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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잊혀진 제국, 발해를 찾아서
작년 이맘때 『발해고』라는 책을 처음 만났으나 두꺼운데다 어려울 것 같아서 읽기를 포기한 적이 있는데, 그 책이 아닌 다른 『발해고』를 만난 것은 책이 두껍지 않아서, 쉽게 읽힐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고구려·신라·백제는 말할 것도 없고, 가야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은 것 같은 발해에 대해 공부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과 꼭 한번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발해고』의 저자는 조선 정조 때의 학자 유득공(柳得恭, 1748∼1807)으로 그는 서자로 태어났음에도 정조의 배려로 규장각 검서관으로 20여 년간 관직에 있었고 황해도 풍천 도호부사 등 지방직을 지내기도 했다. 그와 같은 시기에 정조를 보필한 인물로는 박제가, 박지원 등이 있으나 정조가 죽자, 12살의 순조가 즉위하면서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으로 안동김씨 세상이 되고, 반대파인 남인과 사학(邪學)이라고 한 천주교의 박해가 시작되었으며, 실학파이던 북학파가 탄압을 당하면서 유득공은 박지원 등과 함께 관직에서 물러나 후학을 기르며 살았다.
조선 시대에는 그래도 치적이 많은 임금으로 정조를 꼽기도 하는데,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의 당평책을 이어받아 당파싸음 없는 정치를 펴고자 했으나 봉합은 되었을지언정 그것을 타파하지는 못했고, 다른 업적은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해 문화사업을 전개한데다, 지금의 연수원과 같은 초계문신제도(抄啟文臣制度)를 도입해 관료들을 재교육하였고, 말년에는 수원 화성을 축성하기도 했는데 문화재로서, 관광자원으로서 활용되고는 있으나, 당시에 그 얼마나 많은 백성들의 고혈을 짰을까 하는 위구심은 남는다.
발해와는 관련이 없는 정조 이야기지만, 그래도 정조대에 역사를 고찰하는 실학이 발붙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으로, 유득공은 우리 역사임에도 그것을 정리한 것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기고 『발해고』를 저술했다고 했다. 그런데 왜 사(史)나 전(傳), 그도 아니면 실록(實錄)이라고 하지 않고 고(考)라고 한 것일까? 考는 ‘상고한다’는 것으로 유득공은 『발해고』뿐만 아니라 『사군지』라는 역사서도 저술했는데 『사군지』는 한사군, 즉 낙랑·임둔·현도·진번군의 부침과 멸망에 관한 역사인데 유득공은 북학파로서 실재했던 역사를 복원하려 한 것이었다. 『발해고』와 『사군지』는 이전까지 거의 손대지 않던 것을유득공은 다른 역사보다 이것들에 치중했다.
『발해고』는 대부분 『신당서』의 기사를 전재하고 있으나 의문점에 대해서는 유득공 자신의 견해를 첨부하였는데 전반적으로 발해의 역사는 고려와 남북국시대론으로 정리했다. 『신당서』는 당나라 역사서로 북송시대 구양수 등이 편찬한 것으로 당나라 때 발해를 직접 방문한 당나라 관리이던 장건장이 쓴 『발해국기』*의 내용을 여기에 담고 있다.
*『발해국기』: 현존하지 않으나,『신당서』에 내용 일부가 전하고, 장건장이 발해에서 1년간 머물면서 저술한 발해의 역사서.
『발해고』저술 목적은 유득공의 저서 「영재집」에 기술되어 있는데, 여기에 보면 발해인의 자의(自意)에 따른 발해와 고구려의 연계성, 발해와 신라가 양립된 남북국시대를 한국사 체계에 도입함으로써 역사서술의 유용성에 대한 문헌이 인멸되는 위험을 막고, 연구가 안 된 공백 부분을 채우고자 하는 보궐(補闕)의 인식과 역사서술 방식에 따라서 본격적이고 체계적으로 발해사를 최초로 정리했음을 알 수 있다.
『발해고』에 대하여는 박제가가 서문을 썼는데, 그 구절을 인용하면 이렇다. “내 친구 혜풍(惠風,유득공의 아호)은 박학하고 시를 잘 지으며 장고(掌故, 사물에 대한 전례)에 능숙하다. 그는 이미 이십일도시주(二十一都詩註,우리역사의 도읍지 21곳을 읊은 칠언절구)를 지었고, 일을 계속 추진하여 『발해고』를 썼는데, 인물, 군현, 세차, 그리고 연혁을 다 상세하게 읽어서 여러 가지를 모았으니 반갑다.”
그리고 유득공은 『발해고』에 대한 서술에서 고려가 발해사를 적지 않은데 대한 안타까움을 나타내고는 발해의 역사를 기술하면서 考라고 한 데 대해 이렇게 말했다. “아, 문헌이 흩어져 없어져서 몇백 년 뒤에 비록 발해사를 짓고자 하나 그럴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내각(內閣,규장각 관원-정조의 특채로 평생 겸직한 검서관)으로서 그곳에 비장 된 도서들을 읽고 발해의 사실들을 찬술하되 군고, 신고, 지리고, 직관고, 의장고, 물산고, 국서고, 국어고, 속국고* 등 모두 아홉 개 考로 했다. 世家와 傳 그리고 志라고 안 하고, 考라고 한 것은 사서로서 체계를 못 이루었고 또 감히 史라고 자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갑진년(1785,정조8년)윤삼월 25일 쓰다.”
*君考, 臣考, 地理考, 職官考, 衣章考, 物産考, 國書考, 國語考, 續國考 군왕의 치적, 신하에 관한 사료, 5경 15부 62주에 속한 지명, 관직, 관복, 특산물, 국왕의 외교문서, 나라의 언어, 후예들의 이야기를 말함.
『발해고』가 어떤 책인지 대략 감이 잡힌다. 그러면 발해는 고구려의 후손이 세운 나라인가? 대조영은 어떤 인물인가? 발해의 역사는 어떻게 이어졌는가? 이런 것들을 알게 되면 발해 역사를 아는 것이 아니겠는가 싶다. 발해의 시조는 대조영(大祚榮)으로 알고 있지만, 『발해고』는 그의 아버지로부터 시작한다.
“그의 성은 대大씨요, 이름은 걸걸중상이니 속말갈인이다. 속말갈인은 속말수(송화강)에 살았는데, 고구려에 신하 노릇을 했다. 어떤 사람은 대씨는 대정(大庭)씨에서 나왔다고 하고, 동이의 대씨는 대련(大連,예기)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당고종 총장 원년(668)에 당이 고구려를 멸망시키니 걸걸중상은 그의 아들 대조영과 함께 가속을 거느리고 영주(瀛州,요령성 조양)로 옮겨가서 살았다. 그리고 측천무후 때인 697년 영주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당이 영주도독 조문훼를 죽이고, 영주가 함락될 때 걸걸중상은 난을 피해 말갈추장 걸사비우와 고구려 유민을 데리고 동쪽으로 달아나 태백산(백두산)동북쪽에 성벽을 쌓고 굳게 지켰다. 그 후 무후가 걸걸중상을 진국공(震國公)으로 봉하고, 걸사비우는 허국공에 봉했으나 걸사비우가 듣지 않자 대장군 이해고를 보내 그를 죽였다.”
이때(698년)부터 대조영이 등장하는데 그는 일찍이 고구려 장수였으며, 용감하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했다. 아버지 진국공이 죽고, 걸사비우가 죽자 뒤를 이었다. 이해고가 천문령을 넘어 끝까지 쫓아오자 대조영이 고구려와 말갈의 병사들을 이끌어 이를 크게 쳐부쉈다. 대조영은 무리를 동모산에 거처하게 하였으며 돌궐과 통교하고, 부여, 옥저, 조선, 변한, 해북(海北, 어딘지 알 수 없다)을 공략했다. 동쪽 끝은 바다요, 서쪽은 거란, 남쪽은 신라와 닿았는데, 국토는 사방 5,000리, 호수는 10여 만호로 글을 배우고 익혔으며 습속은 고구려와 거란과 대략 같다. 국호를 진(震)이라 하고 몸소 진국공이 되었으며, 홀한성(忽汗城,발해 수도)을 쌓았는데 영주에서 동쪽으로 2,000리 떨어진 곳이다.
발해는 고구려가 독자 연호를 사용한 것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독자 적인 연호를 사용했다. 이것은 신라가 삼국통일 이전까지 독자 연호를 쓰다가 당나라의 질책을 받고 당나라 연호를 사용한 것과는 달랐다. 발해의 역대 왕들의 계보는 아버지 진국공에 이어, 고왕(高王, 대조영,22년) - 무왕(武王, 대무예,8년) - 문왕(文王,대흠무,56년) - 폐왕(대원의,수개월) - 성왕(成王,대화의, 1년) - 강왕(대숭린,15년) - 정왕(대원우,3년) - 희왕(대언의,5년) - 간왕(대명충,1년) - 선왕(대인수,13년) - □왕(대이진,26년) - □왕(대건황,14년) - □왕(대현석,22년) - □왕(대위해,13년) - □□왕(대인선,20년)으로 이어져 이들이 발해를 다스렸다.
이쯤에서 짚고 가야 할 것이 있다. 걸걸중상과 걸사비우가 속한 말갈족에 대해서다. 주나라 때는 숙신(肅愼), 한나라 때는 읍루(挹婁)라 불렀으며 6세기 중반부터 발해가 멸망한 10세기 초반까지는 말갈(靺鞨)이라 불렀고, 이후 금나라를 세운 후에는 여진족으로, 청나라를 세운 뒤에는 만주족으로, 현재는 만족이라고 부르는 이 민족은 만주에서 연해주에 이르는 방대한 영토에서 살았으며, 이질적인 집단이었다. 그래서 말갈족은 일곱 부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백두산 근처에 살았던 백산말갈과 흑룡강 근처의 흑수말갈, 송화강 근처의 속말말갈과 백돌·불녈·호실·흑수·안차골 등이 그들이다. 속말말갈이 고구려 유민들과 같이 발해를 세웠고, 흑수말갈은 이에 대립하여 금나라를 세우고, 청나라로 이어졌다.
발해는 앞서 본대로 여러 왕들에 의해 부침과 번영을 이루기도 했으나 당나라에 조공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후당 장종(莊宗, 923년) 2년 사신을 보내 당에 조공했는데, 여자와 아이들도 바쳤다.”고 하였고 “발해는 자주 여러 학생을 경사(京師,당나라 수도)로 보내 태학에서 고금의 제도를 배우게 했다. 그래서 당나라에서는 발해를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고 불렀다.”고 했다. 발해는 요나라 태조인 야울아보기에 의해 망하고 말았는데, “요왕 4년 을해일에 요의 국왕이 나라 안에 다음과 같이 명령을 내렸다. ‘두 가지 일이 있다. 하나는 이미 끝났지만 오로지 발해와 대대로 맺힌 원수만은 갚지 못했다. 어찌 안주할 것인가?드디어 병사를 일으켜 발해로 쳐들어왔다.’고 하고
병인일에 늙은 재상이 이끄는 발해의 군대가 패했다. 이날 밤에 요의 태자 야율배와 대원수 야율요골, 남부재상 야율소, 북원이리근(관직) 야율사열적, 남원이리근 야율질리 등이 홀한성을 포위했다. 기사일에 국왕이 항복을 청했다. 정축일에 요나라 왕이 입성하니 국왕이 말 앞에서 죄줄 것을 청했다. 요나라 왕은 병사로 하여금 국왕과 왕족들을 에워싸고서 나갔다. 2월 병오일에 발해국을 동단(東丹,동쪽 거란)으로 고치고 홀한성을 천복(天福)으로 바꾸었다. 태자 야율배를 인황왕으로 봉해 이곳을 다스리게 했다.”고 했다.
하지만 대인선 때 발해가 완전히 멸망한 것이 아니라고 보는 학자들이 많은데, 그것은 야율아보기가 부여성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여기를 동단(東丹)부로 삼았다. 하지만 야율아보기가 죽자, 대인선이 ‘그 아우에게 명령을 내려 군사를 거느리고 부여성을 공격하게 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고 하였으며, 당나라를 이은 송(宋)나라 태종 2년에는 ‘겨울 발해가 조공하지 못한다고 해서 여진에 조서를 내리고 공격했다. 야율(요나라)이 자주 송에 군대를 보냈으나 굴복시킬 수는 없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발해는 일찍이 망하지 않았고, 대인선 이후에 부유부, 염부왕 등에서 이름은 언급되지 않았지만, 송태종의 조서로 보아 그들이 대씨의 후예임을 알 수 있다. 발해가 멸망한 날짜는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발해고』의 신고(臣考)는 것은 신하들에 관한 이야기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훌륭한 군자에게는 훌륭한 신하가 있었다. 그들의 치적을 다 볼 수는 없으므로 몇 명의 치적만을 살피고자 한다. “고모한(高模翰)은 일명 송(松)이라 한다. 힘이 세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며 병서 읽기를 좋아했다. 홀한성이 함락되자 고려로 피난왔다. 고려 국왕이 딸을 주어 처로 삼게 했다. 그러나 죄를 지어 요나라로 도망쳤다. 여러 번 전공을 세워 벼슬이 중대성 좌상에 이르렀고 철군개국공(焎郡開國公)에 봉해졌다. 『요서』에 그의 「열전」이 있다.”
2016년 태영호 귀순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영순태씨’는 대씨의 후손이다. “대광현의 아들 대도수는 현종 때 대장이 되었다. 후손 대금취는 고종 때 대장이 되어, 몽고를 쳐서 공을 세우자 연순군으로 봉해 마침내 영순태씨가 되었다.(대가 태로 된 것은 언제인지 모른다)대광현은 고려 태조 17년 7월, 수만 명의 무리를 이끌고 고려로 왔다. 태조가 왕계(王繼)라는 성명을 내려주고, 왕실 종적에 덧붙였다. 원보(元甫,관품)로서 백주(白州,황해도 배천)를 지키게 하고, 제사를 받들게 했다. 그 후에 만부교 사건*이 발생했다.”
*만부교 사건 : 고려 태조(25년,942)가 요나라가 발해를 멸망시킨 일을 지적하면서 요나라를 견제하겠다는 뜻을 전하자, 요나라가 친선 도모를 목적으로 사신 30명과 낙타 50필을 보내자 태조는 사신은 섬으로 귀양보내고 낙타는 개성의 만부교 다리 밑에 묶어두어 굶겨 죽게 한 사건이다. 이로써 만부교는 낙타교라고 하기도 하고, 이를 빌미로 요나라는 세 차례나 고려를 침공했다.
臣考에서는 왜와 외교관계를 위해 일본으로 떠난 사신과 문서 교환에 관한 사실들이 많은데, 당시 왜는 통일된 국가가 아니었으므로 애로가 많았던 모양이다. 심지어 홋카이도 아이누족에 관한 이야기도 있다.
“무왕 때에 고인의, 덕주, 시나루, 고재덕 등이 함께 일본으로 사행을 갔는데, 하이(蝦夷,아이누족)지역에 도착해 이곳에서 고인의 이하 열여섯 사람이 살해를 당했다. 고재덕은 여덟 명과 함께 출우국(出芋國,이마가타)으로 달아나서 겨우 이를 모면했다. 국서를 올리고 일본 사신인 조신충마려와 함께 왔다. 빛깔 있는 비단 10필, 얇은 비단 10필, 두꺼운 비단 20필, 실 100꾸러미, 솜 20돈을 주었다.”
발해의 지리, 즉 地理考에는 ‘5경 15부 62주’로 되어 이들 대부분이 조선 시대의 길림, 오라, 영고탑 주위에 있었다고 하면서, 조선의 경계에 있었다고 했다. 유득공은 “요나라 때의 주와 현은 대개 그 이름을 이어받았고 「요사」에서 발해의 옛땅이라고 한 것들 모두는 실제로 다 그런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발해의 수도였던 용천부에 대해서는 이렇게 설명했다.
“한나라 삼국시대, 진나라 때에는 읍루국 땅이다.
후위(後魏)와 제나라, 주나라 때에는 물길국(勿吉國)땅이다.
수나라 때에는 말갈국의 땅이다.
당나라 때에는 발해로 들어와 용천부가 되었다.
금나라 때에는 상경 회령부(會寧府)의 땅이다.
원나라 때에는 합란부 수달달로 등이 되었다.
명나라 때에는 건주(建州) 모란위 등의 땅이다.
지금은 영고탑이다.”라고 하였다.
이외에도 현덕부, 용원부, 남해부, 부여부가 있었고, 상경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지금의 영고탑성 서남쪽에 있다. 『신당서』에 천보 말기에 대무예가 상경으로 천도했는데, 구국(舊國)과 300리 거리로 홀한하의 동쪽이라고 했다. 가탐이 말하기를 안동도호부 동북쪽에서 옛 개모신성(蓋牟新城)을 거치고 발해의 장령부를 지나 발해의 왕성에 다다르니 1,500리다. 이로써 고증 하건데 마땅히 영고탑의 서남 지경에 있어야 하고 상경과 서로 가까운 곳이어야 한다. 『명일통지』에 금이 요를 멸망시키고, 발해의 도읍에 설치했다고 했는데, 이것이 그것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평양에 대해서는 이렇게 설명했다.
“한나라의 낙랑군이었다. 나중에 고구려 국왕이 도읍한 곳이다. 또한 장안성이라고 하는데, 일명 왕검성이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평정하고 여기에 안동도호부를 두었다. 나중에 발해로 들어왔다. 지금은 조선 경내에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발해와 신라의 국경은 패수(浿水), 즉 대동강을 경계로 보았는데, 이것은 그대로 역사 교과서에 실려있다. 맞을까?
발해의 행정기구는 당나라의 3성 6부 9시제를 거의 그대로 받아들여 ‘3성 6부 1대 7시 1원 1감’으로 된 관료 체제였다. 3성은 조칙을 기초하는 중대성(中臺省-우상)과 조칙을 심의하는 선조성(宣詔省-좌상), 그 위에 정대성(政臺省-내각상,좌우상보다 높음)이라는 상급기구를 두었고, 6부는 충부(忠部), 인부(仁部), 의부(義部), 지부(智部), 예부(禮部), 신부(信部)이고, 1대는 중정대(中正臺,어사대부)로 조직의 명칭을 1대 1원 1감으로 당나라와 약간 달리한 것은 당나라 조직을 모방하면서도 주체성을 지니려고 한 흔적으로 볼 수 있다. 지방은 부, 주, 현을 두었고 도독, 제사, 현승 등 지방관이 다스리게 했다.
이외에도 발해의 의장과 특산물, 언어 등에 대해서도 소개하고 있으나 대체로 고구려와 말갈의 풍습을 그대로 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당나라에는 해마다 혹은 한해에도 두세 번씩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일본과도 우의를 돈독히 하고자 노력한 흔적이 남아 있다. 3대 문왕 흠무가 일본 성무(聖武)천황에게 보낸 편지는 이렇다.
“흠무(대흠무)는 아룁니다. 산천이 다르고 국토가 멀리 떨어져서 풍화와 정책을 듣고 오직 우러러봅니다. 엎드려 생각하건 데 천황의 큰 덕은 더 빛나서 세월이 흐를수록 만백성에게 두루 은혜를 미쳤습니다. 흠무는 왕업을 이어받아 처음과 같아서 의리와 정리가 깊어 매번 좋은 관계를 유지합니다.
지금 귀국의 사신인 조신광업(朝臣廣業)등이 바람에 뱃길을 잃어 이곳에 표착했습니다. 각각 후하게 대접하고 오는 봄에 돌려보내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사신 등이 앞을 다투어 올해에 돌아가고자 요청하는데, 그 말이 매우 신중하고 이웃의 의리가 가볍지 않아서 행장을 갖추어 곧 출발시킬 것입니다. 또한 약홀주(若忽州) 도독인 서요덕(胥要德)등을 차출하여 조신광업 등을 거느리고서 지금 귀국으로 보냅니다. 아울러 범 가죽과 곰 가죽 각각 일곱 장, 담비 가죽 여섯 장, 인삼 서른 근 그리고 꿀 세 말을 들려 귀국에 보내니 잘 살펴서 받아 주십시오.”
안 그래도 중국은 ‘동북공정’으로 발해는 중국의 변방이라고 한 지가 오래고, 일본은 과거에 대한 반성을 커녕, 우리의 허점만 노리고 있는 마당에 이 『발해고』마저 없었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발해가 망할 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고려로 귀순하였음에도 고려는 왜 발해의 역사와 인물, 지리 등을 담은 『실록』하나 남기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남고 부끄럽기도 하다. 하지만 역사에는 가정이 없고, 해서도 안 된다. 오늘도, 지금도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새롭게 써야 하지 않을까하고 생각해 본다. 2022.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