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간 [162.9]
동학세상
동학농민혁명지 여수역사기행(1)
-여수 동학농민혁명 전개과정
정암 이무성_광주교구, 소설가
동학농민혁명 현장지의 사료나
기존에 내려오는 이야기를 확인,
자료를 수집하면서 몇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
필자가 오래 거주하고 활동한
여수지역에 대한 자료들을 입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미 장흥, 장성 등 전라지역에 대해서는
역사학자, 재야사학자, 향토사학자들에 의해
상당 부분 기술되어 있어
관심을 갖고자 하는 분야에 주제를 설정하여
내용 전개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었다.
장흥 역사기행에 대한 3회 기술을 마무리하면서
여수지역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여
이를 연재하기로 일정은 잡았다.
주변 몇 분들에게 고증 여부에 상관없이
관련 자료를 연계코자 부탁하였다.
기대만큼 별 효과는 없었다.
2000년도 중반에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소장을 역임한 필자로서는
당시 이사장으로 함께 호흡을 맞추었던
김병호 선생님께 그 취지를 설명하고
자료정보 수집을 하였다.
그는 공주사대에서 역사를 전공하였고
오랫동안 역사교사로서 고향인 여수에서 활동하였다.
고향이 금호도로 그와는 금호도에 자주 들러
당시 거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풍장 장례풍속도 문화인류학 연구자인
동료 교수들과 연계도 하는 등
지역 토착문화 보존, 기록에 뜻을 같이 하였다.
해방공간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분들에 대한
특별법이 금년 국회에서 제정되었다.
많이 미흡하다.
명칭도 여순민중항쟁이 아닌 여수사건이다.
여순민중항쟁은 동학농민혁명정신 등
외세배격 등 자주적인 민족생존권 정신을 이어받아
일제침탈기에는 항일독립운동으로
그 맥을 이어받아 제주 민중에 대한
진압명령을 거부한 사람들에 의해 일어났다.
동학농민혁명도
동학란이란 온당치 않은 명칭을 거쳐
이젠 혁명으로 정명을 회복한 것이다.
광주 5·18 만주화운동도
당시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한 군사 권력자들에 의해
일부 불순분자들의 소행이라는
왜곡된 역사평가를
상당한 기간에 걸쳐 그 명예를 회복하였다.
여수의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활동이나 자료 그리고 이를 접근하고자 할 때
참조할 수 있는 구술기록 등은 많지 않다.
이를 보완해야 할 시간도 많이 흘렀다.
더 이상 늦추어서는 안 된다는 절박함으로
10·19 여순항쟁의 특별법 제정에 따라,
다른 지역에 비해 먼저 연재를 진행하고자 한다.
역사 기술로서 미흡한 부분은
소설 형식을 빌려 보충할 생각이다.
사회적 경제학에 관심이 있는 필자로서는
경제사 특히 토지제도 변천에 따른
일반 민초들의 경제생활에 집중하여
연구에 더 많이 열정을 쏟고는 있었다.
동학을 뿌리고 민족종교를
소설 형태로 구상하고 있어
동학에 관한 관심은 생활 경제사와는 별개로
그 자료들을 열심히 모아가고 원고로서 정리하고 있다.
이런 필자의 바램의 결과로서
여수지역사회연구소의 서고에
책자로서 보관되어 있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전개와 여수’라는
29쪽의 자료편을 입수하게 되었다.
기쁜 마음이 앞섰다.
광양, 순천, 보성, 장흥에 대한 자료들은
상당히 많이 접할 수 있었지만,
여수에 대한 자료는 적은 분량이지만 집필 책자로서
입수하는 것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에 대한 역사적 사실 여부 등
고증이 필요는 할 것이다.
1862년 진주에서 시작된
농민항쟁은 전라, 충청도로 도미노처럼 퍼져나갔다.
전라도 지역에서는 38개 군현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전국에서 발생한
70개 군현 농민봉기의 53%에 해당 된다.
이는 전라도에서
수탈이 가장 극심하였던 것을 반증한다.
좌수영이 위치한 여수 인근 순천에서는
1862년 3천명이 넘은 노인들이
읍폐의 시정을 요구하는 농민투쟁을 전개하였다.
순천 농민항쟁은 3일 만에 끝났다.
광양에서는 1869년
수백 명의 난민들이 동헌을 점령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광양변란은 이필재 변란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광양변란의 주체가
농민인지의 여부는 정확히 확인되지 않았다.
어떻든 이후 이러한 성격의 변란이 자주 발생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여
여수의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기술해 보고자 한다.
좌수영이 소재한 여수에서는
독자적인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구술 기록조차도 거의 입수할 수 없다.
그만큼 관의 통제 등이
여느 다른 지역보다는 강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동학 조직이
여수에 전혀 없다고는 단정내릴 수 없다.
영호도회소의 동학농민혁명군이
좌수영을 공격할 때
여수지역의 농학농민혁명군 세력도
상당히 합세한 점에서 그렇다.
다른 지역에 비해보면
동학 세력은 미약한 것으로 추정된다.
동학농민혁명이 본격적으로 진행될 때에도
조직이 구체적으로 형성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좌수영이라는
군사행정의 중심지역이란 특성이 그 이유일 것이다.
여수의 좌수영은
5관5포의 군사조직으로 전환될 수 있다.
좌수영 자체도 강력한 군사조직을 보유하고 있다.
좌수영은 요새지로 강력히 구축되어 있었다.
동학농민혁명군의 목표가 중앙정부를 향하고 있어
좌수영에 대한 전략적 고려는 낮을 수도 있었다.
농민혁명군의 초기 공격목표에서는 벗어나 있었다.
여수가 군사지역이라는 점에서
여수 좌수영을 공격하기는 어려울 것이었다.
좌수영 공격에 대한 수월치 않은 점은
장흥과 강진을 비교하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용산접이라는 농학농민혁명군의 강한 접(接)이
장흥도호부에는 존재하고 있었다.
행정중심 조직이기에 장흥엔 접 설치가 가능하였다.
반면 병영이 위치한 강진엔
군사 중심 지역이어서 접 조직 등
농민혁명군 주체의 기구를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여수 인접 순천엔 영호도회소라는
강한 농민군 조직이 존재하고 있었지만,
좌수영이 위치한 여수엔
독자적인 농민조직체를 확인할 수 없었다.
좌수영의 동학농민군 진압에 적극적이어서
관군 중심의 기록은 그나마 남아 있었다.
이를 통한 여수에서의 동학농민군 활동을
제한적으로 검토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갖고 있다.
전라도의 동학 유입에 대해서는
정확히 그 시기를 알 수 없다.
다만 1861년 전후한 시기에 처음으로
동학이 전해졌을 것이라는 추정은 할 수 있다.
이는 수운 최제우 대신사의 경주에서 동학전파 후
그 탄압을 벗어나기 위하여
남원 은적암에서 8개월여에 걸쳐 머무르면서
포교와 수도를 한 흔적을 통해 어림할 수 있다.
그러면 여수 등 전남 동부권에는
언제 동학이 유입되었을까?
1890년 전남
고흥의 송년섭1)과 광양의 조두환2)이
1890년 전후하여
자신들의 고향에서 각자 입도하였다.
이 두 사람은 20대의 나이로 동학에 입교하였으며
보은취회와 동학농민혁명에 적극 참여하였다.
여수 거주민의 40%정도가 고흥 출신이고
혼인 등 생활권으로서 두 지역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에서
고흥의 동학 유입과 여수의 유입은
엇비슷한 시기로 여겨진다.
* 1). 송년섭宋年燮. 금암琴菴.
1871.4.5.고흥군두원면신송리출신.
1890.11.13. 입도.
보은취회 참가후 고흥 대접주로 동학혁명참여.
1894년12월 고흥군 수성군에 체포되어
나주군 진영으로 이송되는 도중 탈출.
1902년1월
전라도 대두목 허선許善의 소개로 배를 이용하여
한성 강서에 머무르던 의암성사를 배알하였다.
1904년8월 허선, 박준승 휘하에서
개진개혁운동 참가하고 한성으로 올라와
단발. 교령(1907), 고흥교구장(1910),
총부 총인원 의사원(1913),
장성대교구 총인원 의사원(1914.8),
교훈(1914), 도훈(1916),
고흥군 및 보성군 포덕사(1922.2),
고흥교구 종리사(1923.3),
대신사백년기념회원(1924),
수성포포덕사(1925.4),
정기대회 고흥군대의원(1926.4.4.),
고흥군종리원 대의원(1926.4),
종법사(1930) 등 역임.
1932.11.11. 62세로 환원.
처 김명화, 子송기중, 기휴, 기대, 정화, 孫송동인
(경성부교보1935. 교회월보252호(1931.12),
봉훈사진교회월보110호(1919.10).
혁명참여자등록2009/동학천도교인명사전
*2). 조두환趙斗桓. 소암簫菴.
1867.10.30.광양군봉강면조령리출생.
1890.12 유수덕에게 입도.
1893.2광화문복합상소, 3월 보은취회 참여.
1894년 접사가 되어 동학혁명 참여하여 고초를 겪다.
해접주(1904),
일진회광양지회 부회장(1905)으로 활동.
대정(1905), 봉훈(1909), 봉강면전도사(1910),
광양교구전제원(1917.9-1921.6) 등 역임.
광양교구장으로 3.1운동.
광양군봉강면 종리사(1923),
대신사백년기념회원(1924),
광양군대표의원(1925.4),
제1회대회 광양군대의원(1926.4.4.),
종리원포덕과대표위원(1928), 포덕사(1926.8),
광양종리원장 및 도사(1931),
광양교회 교장(1933.2.21.),
건설록간행위원(1935) 등 역임.
포상으로 6등봉교(1907), 천인장(1913,1914),
1등천훈장(1916), 특신기념장(1923.1925),
천훈동장(1926), 도호(1927.3.21.),
정수월집의춘법문(1931) 등을 받고
1935.7.12.69세로 환원.
처 水相齋주두화, 교회월보279호(1935.9),
혁명참여자등록2009/동학천도교인명사전
전남 동부권에서는
순천의 동학농민혁명군의 활동이 주목된다.
영호도회소의 설치와 폐정개혁운동이
순천지역을 중심으로 강하게 번져나갔기 때문이다.
반면에 전라좌수영이 존치한 여수는
동학교인들의 활동이 두드러진 것은 아니다.
물론 동학농민군의 활동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고 동학교인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894년 6월 이후
동학농민혁명군이 집강소 활동에 들어갈 때에
좌수영에 전달된 공문을 통해
그 존재를 확인해 볼 수 있다.
공문엔 농민군이 귀순하거나 해산 중이니
본영 소재의 포군은 주의를 게을리 하지 말고
파수와 정찰에 전념하면서 동학농민군의 동향을
감시하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여수 인근 거문도에서 관할하는 여러 섬에도
농민군이 활동하였다는 관의 기록이 있지만
구체적인 활동내용은 기술되어 있지 않았다.
전라좌수사 이봉호는 동학교인에게 호의적이었다.
그 관군들 상당수도 동조하였다.
이봉호는 곧바로 해임되고
1894년 7월(음) 김철규가 부임하였다.
‘여수·여천 향토지’ 150쪽의 기술에 의하면,
1894년 9월(음)
여수 쌍봉면 출신 박군하, 윤경삼이
영호도호소의 농민군과 더불어
좌수영 남문을 공격하다가 실패하였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