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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오점수, 돈오돈수설 비판
이 글을 현응스님의 <깨달음과 역사>중에서 옮겨 싣는다. --- 편집자 주
回 쟁점의 대두
한국불교는 1970년대에 와서 불교사, 특히 선종사에서의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것은 해인총림의 방장인 성철스님이 '돈오돈수설'을 제창하면서 부터였다. '돈오돈수설'은 깨달음에 계합하는 과정과 내용을 혁명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돈오(頓悟)사상을 기본 뼈대로 삼는 수행론으로서 '돈오점수설'을 강력히 비판하는 태도를 갖는다. '돈오점수’설이 과거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선종(禪宗)과 관련한 저술에서 이따금 거론되고 주장되었던데에 견주어, '돈오돈수설'은 종밀스님(AD 780-841)이 일곱 가지의 돈점(頓漸) 형태를 분류하는데서 유래하지만 본격적인 수행론으로서 명명화되어 주장되기는 성철스님에 의해서가 아닌가 싶다.
'돈오점수설'은 중국에서 신회(神會, AD 685-760) 스님에 의해 싹이터서 종밀스님에 의해 이론적으로 정립된 수행론이다. 깨달음을 얻고 난 뒤에도 일정한 수행과정을 거쳐야만 완벽한 깨달음에 이른다는 내용이 핵심인 이 주장은 교종의 많은 경론(經論)과의 접합을 통해 한층 설득력있게 수행자들에게 받아들여졌다. 우리나라의 보조스님의 수심결이나 절요 같은 저술은, 종밀스님의 '도서’와 함께 돈오점수의 수행론을 담고 있는 것으로서 강원에서는 대표적인 필수 이력교재로 취급되고 있다.
'돈오돈수설이나 '돈오점수설'은 둘 다 그 표현에서도 나타나 있듯이 '돈오’라는 절차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뒤에서도 언급하겠지만, '돈오' 곧 깨달음을 어떻게 파악하는가 하는 견해에 분명히 차이가 있으며 이로 말미암아 대조적인 수행가풍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 두 주장은 과연 어느 쪽이 옳은가? 어느 하나가 옳다면 나머지 한쪽은 그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돈오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를 통하여 그 두 주장이 다같이 문제가 있다는 점을 주장하려 한다. 곧, 어느 한쪽이 아닌 양쪽이 다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 이 글의 취지이다
'돈오란 깨달음의 혁명적 성격을 부각한 말로서, 깨달음의 ‘ 悟'에다 단박에, 한꺼번에 한 뜻을 함축한 ‘頓'이란 글자를 합성한 것이다. 이러한 뜻을 담은 돈오의 사상은 일찍이 깨달음이 과연 점진적인 것인가, 혁명적인 것인가에 대한 혜능스님(AD 638-713)과 신수스님(AD ?-706)의 논쟁을 통하여, 돈오 곧 혁명적인 견해가 옳다는 혜능스님의 생각이 선종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지면서 그 뒤의 수행의 주류를 이루게 된다. 이 때가 중국 당나라 때의 일로서, 선종의 육조(六祖)라 불리는 혜능스님의 돈오사상이 본격적으로 선종의 정통 수행법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그 뒤 혜능의 제자, 특히 신회스님에 의해 깨달음의 혁명적.성격이 이론적으로 정립되었고 이러 한 돈오의 견해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선종의 정통한 가풍으로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러한 돈오적 수행법에 반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깨달음이 그렇게 혁명적인 절차로 이룩되는 것이라면 돈오를 이룩한 선자(禪者)가 왜 부처님과 같은 신통묘용과 갖가지 덕상(德相)을 나타내지 못하는가"하는 반문이 크게 일었다. 또, "수행 보살은 아득한 세월에 걸쳐 무수한 생을 전전하면서 보살만행을 닦아 비로소 부처님 경지(佛地)에 이른다는 경전의 말씀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하는 문제도 제기되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해 '돈오'의 견해 를 표명한 사람들은 명확한 해답을 하지 못한 채 돈오사상을 왜곡하고 마는데, 이러한 혼란은 돈오 이론의 효시라 할 수 있는 신회의 '남종 정시비론,남양화상 돈교해탈선문직료성단어.菩提達摩南宗定是非論, 南陽和尙頓敎解脫禪門直了性壇語 ' 등에서 진작에 보이고 있 으며, 주胡適,新校定的 敦煌寫本 神會和向遺著兩種,p69.72,73.74,大乘文化出版社,民團66년 종밀에 이르러서는 '돈오'의 개념이 완전히 변색되어 버리는데 이를 전폭 수용한 것이 보조스님이다. 이리하여, 돈오사상에 대한 비판을 제대로 해명하지 못한 채로 적당히 화해함으로써, '돈오'사상에다 보충적 기능으로서 '점수를 덧붙여 왜곡시킨 것이 바로 '돈오점수설' 이다.
'도서에 나타나 있는 종밀의 교학적 업적이라 할 수 있는 禪과 敎의 접합의 시도는 매우 뛰어난 감각과 예지로써 이룩되고 있지만, 왜곡된 돈오사상이라 할 수 있는 '돈오점수설'을 정당화하기 위한, 경전에 대한 아전인수의 해석이 바탕에 깔려 있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특히' 도서 하권의 悟+重, 迷+重' 설이바로 그런 경우로서 오해의 소지가 많은 부분이다.
성철스님의 '돈오돈수설은 이러한 ‘돈오점수설'을 근본적으로 비판하면서, 돈오란 그 자체에 돈수를 포함하는 것으로 파악해야 한다고 말한다.
돈오란 모든 수행의 완성처이며 최후처인 것이지, '돈오점수설'에서 보이듯이 불완전한 깨달음이거나, 수행의 시작일 수는 없다고 반박한다.
극도의 미세한 번뇌인 제8 아뢰야식 의 습기(習氣)까지도 단절한 완벽한 깨달음(證悟)은 더 이상 수행의 여지가 없으며, 그래서 깨달음과 함께 수 행도 종결되는 돈수의 경지라 한다. 또 이러한 사람의 생활은 깨달은 뒤에 다시 수행하여 보완하는 삶이 아닌, 남이 없고 함이 없는 (無生無爲) 해탈경지에서 자유자재하는 보림(保任)의 경지라고 주장한다. 오매일여寤寐一如, 숙면일여熟眠一如, 내외명철內外明徹, 돈오돈수頓悟頓修 등의 표현은 스님의 주장을 단적으로 대변하는 말이다. 그러 나 이 주장도 깨달음을 파악하는 부분에서 문제가 있어 보이며, 이에 따른 신비주의나 비역사적인 경향과 같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고 본다.
선종사에서 많은 논쟁이 있어 왔지만, 그 요지는 대강 돈(頓)이냐 점 (漸)이냐의 주장으로 요약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를테면, 혜능과 신수로 대표되는 남돈북점(南頓北漸)의 대립과, 여래선과 조사선의 구별과, 우리나라의 백파와 초의에 의해 제기된 논변들도 대강 돈과 점의 이론적 틀을 기본으로 하여 쟁점화되고 있다. 한마디로 깨달음이란 어떤 것이며, 어떻게 거기에 도달하는가에 대한 논쟁들이다. 이러한 지속적인 수행상의 논쟁은 오늘에까지 이어져 왔으며, 마침내 돈오점수설'과 그를 부정하는 '돈오돈수설'의 등장에까지 이른 것이다.
이로부터 한국불교는 수행론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수행현장인 각 선원에서 조차 돈오돈수, 돈오점수의 두 가지 견해의 차이에 따른 저마다의 수행 가풍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당연히 그에 따른 혼란도 가중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 두 주장이 각각 뿌리를 둔 교리적 태도와 이러한 주장이 낳은 수 많은 효용과 공덕의 상당한 부분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 두 주장이 함께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깨달음의 측면'과 역사의 측면'에 대해 혼돈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선종이 불교사상에 끼친 가장 중요한 공헌이라 할 수 있는 돈오- 깨달음의 혁명적 성격-의 개념에 대한, 선종 스스로의 굴절과 왜곡에 대한 문제도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回깨달음과 역사 (보디와 사트바)
우선 '돈오점수설, '돈오돈수설을 비판하기에 앞서 이 두 가지 설이 공유하고 있는 돈오 곧 깨달음에 대해 살펴보자.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어원으로 보면 '깨닫다라는 동사의 명사화된 말이며,'그 어떤 무엇에 대한 깨달음'이란 뜻이겠다. 그렇다면 불교에서의 깨달음은 그 무엇에 대한 깨달음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부처님의 경에서 보듯이, 생로병사로 대변되는 삶의 문제에 대한 것, 곧 바로 우리 뭇 삶(衆生)에 대한 것이다.
많은 종교가나 사상가들도 삶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전지전능한 신을 내세우거나 초월의 영역과 가치를 설정하기도 했으며, 역사 속에 내재하는 절대적인 가치체계 - 이를테면 절대이성(세계정신)이나 과학법칙(사회과학이나 인문과학의 법칙)-를 주장하기도 했다. 이와는 달리 불교의 깨달음은 대강 세가지 특성을 가진다.
첫째, 우리 뭇 삶(衆生)의 영역 밖에 또 다른 어떠한 존재 형태도 있을 수 없다는 점에 대한 깨달음이다. "마음 밖에 한 물건도 없다(心外無物)"는 말은 바로 이를 말한 것이다. 불교에서의 마음이란 심리현상으로서의 주관적 인식의 틀을 말함이 아니다. 어떠한 존재양상이든지, 그것이 심리적이든 개념적이든 간에, 그 것은 주객이 어우러져 있는 형태의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복합적인 의미와 형태로서의 모든 존재양상을 일러 마음’ (心)'이라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마음은 달리 뭇 삶(衆生)이라 부르기도 하고 부처라고 명명하기도 한다. 그래서 마음이라고 불리는 뭇 삶들의 세계(衆生界) 밖에 어떠한 별도의 존재 영역이나 가치 체계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 까닭은 다음에 나오는 깨달음의 두 번째 특성 때문이다.
둘째, 이러한 뭇 삶의 모습은 실체도 없으며 실재적 존재가 아님을 아는 것이 깨달음이다. 삶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요소들은 상호 연관과 조건지워짐에 따라 변화되고 전개되어 가고 있으며, 이러한 모습을 성찰한 결과 존재의 제 모습은 고정불변하는 어떠한 주체적 존재나 아무런 원인과 조건 없이도 자생적으로 존재하는 자기 원인적 존재로서가 아닌, 비실체적이고 비실재적으로 변화되고 전개 되어가는 존재양상임을 깨닫는 것이다. 이는 불교수행의 목표이기도 한데, 모든 형태의 실재의식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서 무아나 무생(無生)의 이치를 깨달았다 함이 바로 그것이다.
셋째, 이러한 깨달음은 점진적인 과정에 의해 이르게 되는 것이 아니라 혁명적인 전환을 통해 성취하는 것이다. 선종에서는 이러한 깨달음의 혁명적인 성취를 돈오(頓悟)라고 표현한다. 오늘날 철학에서나 자연과학에서 지식이나 법칙의 발견은 기왕의 지식과 법칙의 연장과 정제를 통해서가 아닌, 혁명적 전환 또는 창조적 직관을 통해 획득하는 것이라는 점에 대체로 합의하고 있다. 그래서 귀납법적 사고 방법에 대한 거부가 오늘날 과학적 탐구 방법의 특성이 되고 있다.
이와는 꼭 적합하게 비교할 수는 없으나, 불교에서의 깨달음도 기왕의 지식이나 장점의 축적과 단련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더욱 이 그러한 견해가, 깨달음 이전의 견해가 번뇌로 얼룩진 미망의 상태임에랴!
깨달음이란 존재를 바라보는 데에서 실재의식의 장막을 벗기는 일이다. 곧, 실재화된 인식과 실재화된 대상존재에서 실재의 막을 벗기는 일이며, 그 둘이 어우러져 만들어 낸 삶의 갖가지 양태에서 실재의식 없이 그를 수용하는 일이다. 실재의식을 깨뜨리는 것은 존재양상의 상호 관련성과 변화로 인해 선후의 유기적 절차를 통해 해결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어떠한 견해나 태도도 선행된 조건과 관점을 전제하기 마련이며 그로부터 독립되어 해방될 수 없다. 그래서 깨달음이란 지말적이거나 부분적이며 개체적인 시각을 떨칠 것을 요구하는 한편 또한 유기적인 관계성 속의 전체적 시각을 요구하 는 것이다. 또 이러한 깨달음의 과정은 인식이 아닌 창조적 직관으로 다 가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 깨달음의 성격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한편 깨달음과 그의 대상자이자 내용인 뭇 삶(衆生)에 대 한 설명으로 치자면 부분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 문제를 더욱 포괄적이면서 역동적인 현실의 삶의 문제로 심화시키는 일이 중요하다. 먼저 '못 삶이란 말을 보면, 그것이 가지고 있는 객관성과 생동성 그리고 포괄적 의미에도 불구하고, 아무래도 현실적인 구체성을 결여한 느낌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이 뭇 삶이란 말을 그 뜻을 크게 손상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달리 '역사란 말로 대체해 본다. 물론 '역사라는 말에는 수 많은 정의를 내릴 수 있는 부분이 있지만, 불교에서의 뭇 삶의 개념에 다 좀 더 구체적인 역사의 현실성을 덧붙이는 정도의 선으로 한다. 따라서 역사란 '검다, 회다, 딱딱하다, 무르다, 높다, 낮다 따위의 형태적 모습위에 좋다, 싫다 따위의 주관적 가치판단이 덧붙여진 영역이 되며, 거기다가 이렇게 저렇게 하고자 하고 또 그렇게 되어 가는 변화의 과정에 있는 역동적인 삶들의 전반적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깨달음이란 이러한 역사의 속성이 '고정 불변하는 실체가 아닌 비실재적인 존재 양태임을 통찰하는 일이며, 역사의 영역에 대한 어떤 각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말은 불교가 결코 초역사적이거나 비(반)역사적인 것이 아니라 모름지기 역사적이며 중생적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데 유의할 점은 역사(존재)들의 실재성에서 해방된다 함이, 곧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이 존재를 현실적으로 좌지우지하여 마음대로 변화시킨다거나 주재한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이다. 역사에서 현실적인 변화는 존재들의 현실적인 경험적 속성과 관행 그리고 선택적 노력에 의해 되어가는 것이며, 깨달음이란 그러한 역사적 모습과 상황에서 실재적 구속으로부터 해방됨을 뜻하는 것이다.
곧 어떤 것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개선시키고자 하는 역사적인 측면과, 그 어떤 것이라는 '것' 자체의 실재성을 벗겨내는 깨달음의 측면은 서로 같은 영역을 말하고 있으면서도 다른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역사에서의 깨달음의 논리적 한계랄까, 그 적용 범주를 인식하는 일이다.
깨달음은 모든 역사적 존재의 비실재성을 통찰함으로써 그로부터의 원천적인 해방을 획득하는 일이다. 그리고 현실 역사는 실재를 전제하지 않고도 변화되고 전개되어 나가는 존재양태로서, 불교식으로 말하면, 연기적(緣起的, 변화와 관계성)인 특성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현실 역사를 꾸려가는 문제에서는 존재의 연기적 관계와 내용을 잘 읽어내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사실 실재적 존재라야만 그것의 동질적 변화를 측정하고 유추할 수 있다고 생각함은 아무런 논리적 근거가 없는 것이다. 실재적 존재가 아니더라도 현실적으로 나타나 보이듯이 역사상의 뭇 삶의 양태는 수 많은 조건과 관계속에 비실재적인 모습 그대로 또 일정하게 변화해가고 있으며, 그것들은 어느 정도 시간적 가변성과 공간적 상관성을 측정하게 해주고 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역사의 문제는 잠정적이며 가설적인 실재성을 인정하면서 바라보는 것이 편리할 때가 많다. 엄밀한 논리의 측면으로 보면 그 어떠한 실재도 인정할 수없지만, 감정적이면서 가설적인 실재를 의도적으로 인정함은 그렇게 하는 것이 상당히 삶의 운용에 편리할 때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러한 현실의 모습은 꼭합리적이고 인과적인 – 여기에서는 귀납적인 - 법칙으로만 전개되지 않음은 사실이나, 필요에 따라 그러한 법칙성에 잠정적으로 가탁할 수도있다는 점에 인색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아무튼 깨달음이란 역사에 대한 깨달음이며, 역사적 존재들이 비실재적인 속성으로 변화 전개되어 가는 것임을 통찰하는 것이다. 한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진행과 변화는 그것 나름대로의 요인과 조건에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 두가지 측면을 이해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이 말은 깨달음을 얻는다고 해서 역사 속의 삶에서 모든. 존재를 자유자재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깨달음을 얻어 윤희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생사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말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적어도 이 말은 생멸하는 윤회현상에 대한 깨달음으로서 생멸현상에 대한 깨달음으로서 생명현상의 실재의식(我相)으로부터 해탈함을 뜻한다. 생명현상 자체가 축소하고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생멸현상을 실재로서 받아들이는 생멸심 등의 실재성으로부터 해방함을 말한다. 삶의 윤회현상, 곧 역사의 전행이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수용하는 자세가 전환되는 것을 뜻한다. 결국 실재의식(아, 인, 중생, 수자)를 떠나서 삶을 수용하는 것을 일러 윤회를 영단(永斷)하는 것이라 한다. 여전히 이 각자(覺者)는 존재 (역사)속의 여러가지 제약과 소외 속에 놓일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적인 희로애락 속에서도 깨달음은 그로 하여금 원천적인 열반락을 견지하게 할 것이다.
'모든 번뇌를 끊는다'는 불교의 목표는 이렇게 본다면 모든 심리현상을 종결하여 목석화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경전에서 말하기를" 번뇌를 끊는 것은 범부의 소견이며, 대승보살은 번뇌의 공한 속성을 깨달아 그로부터 자유로와짐"이라 하지 않았던가? 제 아무리 미세한 번뇌습기일지라도 그것을 제거하고 단 절시키려는 노력은 번뇌 자체의 실재성에 사로잡혀 있음이다.
거울 위의 티끌을 닦아 내고자 하는 노력의 어리석음을 질타하는 혜능스님의 법문은 아직까지도 철저히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다. 거울이나 티끌'은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그 어떤 실재(物)조차도 인정하지 않는 확연한 깨달음의 자세는 역사적 삶의 운용에 있어 기본적인 것이다.
'보디사트바(보살)란 표현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삶의 모습을 아주 적절하게 표현해 낸 대승불교의 압권이다. '보디'란 깨달음이며 '사트바'란 중생이니 곧 역사인 것이다. 통상 깨달음(보디)과 역사(사트바)를 병렬식으로 표현할 때, 이 두 말은 얼핏 다른 영역의 것으로 이해될 수 있으나 이들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삶에서의 존재 양태에 대한 원천적인 통찰(보리)이며, 또 삶의 현실적 진행모습에 대한 것(사트바) 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둘을 늘상 묶어 두는 이름, 그리고 그에 값하는 삶을 '보디사트바(보살)라 부르는 것이다. 이 보디사트바는, 실재의식으로부터 해방된 기본적 깨달음을 바탕으로 하여, 현실적 삶의 제 문제는 현실상의 방편바라밀을 통해 대처하며 방편적인 역사적 설계를 통해 역사적 성취(불국토 장엄)를 추구한다. 그리고 역사적 성취의 정도 여부와 관계없이 모든 삶의 진정한 행복은 존재의 실재성으로부터 해방되는데에 있음을 알고, 이러한 해방(깨달음)의 성취를 모든 역사적 실천과 장엄의 배후에 근저하는 기본적 목표로 삼는다.
보디사트바의 삶은 현실 속에 살되 현실 그 자체에 원천적으로 구속되지 않으며, 구속되지 않으면서도 적극적으로 애정과 정열을 쏟는다. 투명하고도 질긴 역사관, 이것이야 말로 바로 보디사트바의 역사관이라 할만하다. 역사가 실재가 아님을 통찰하여 그로부터 원천적으로 구속되지 않기에 투명하다는 것이며, 실재적 존재가 아니라 하여 존재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변화와 관계의 형태로 끝없이 펼쳐지는 모습이며, 그러한 변화와 관계의 모습에 갖가지 역사적 상상력과 실천을 통해 역사를 일구어 가는 것이기에 질기다 하는 것이다. 역사(존재)를 비실 재적인 것으로 통찰하는 '깨달음'과 그러한 비실재적인 역사를 어떠한 자세로 어떻게 꾸려 가는가 하는 '역사적 행위'는 이러한 '보디사트바란 절묘한 변증적 삶을 통해 결합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보디사트바'의 삶이야말로 병폐없고 고통없는 가장 바람직한 삶의 모습으로 떠오르 게 되는 것이다.
回두 주장의 문제점
이제 '보디사트바란 이해의 틀로 써 돈오점수설과 '돈오돈수설을 살펴보자. '보디사트바'에서의 보디(깨 달음)를 선종에서 '돈오라 표현함은 중국불교의 개가라고 생각된다. 그 만큼 '돈오라는 표현은 깨달음의 중요한 성격을 한눈에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앞서도 말했듯이 '돈오'의 견해를 이론적으로 정리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왜곡을 낳게 된다. 대표적인 것이 규봉 종밀에 의해 정립되는 '돈오점수설'이다. 이 돈오점수설의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깨달옴의 측면과 역사의 측면을 무리하게 같은 차원의 것으로 설명하고자 한 점이다. 깨달음의 측면이란 존재들의 속성이 비실재적임을 깨닫는 차원이며, 역사의 측면이란 존재들이 그러한(비실재적인) 속성위에 그것대로의 조건과 계기 속에서 변화되고 전개되어 가는 차원이니 이 두 측면은 논리적으로 볼때 동일한 의미의 체계가 아님은 분명하다. '돈오점수설'의 문제점은, 깨달음이란 존재(역사)의 실재의식을 타파하는 것인데 역사상의 변화 개선의 차원 - 개인에 있어서의 습관, 체질, 심리상태의 개선이나 현실적제 문제의 정상화까지도 포함-까지깨달음의 소관 영역으로 보려 한다는 점이다
불교에서의 깨달음이란 존재들을 축소하여 단절시키거나 변화시켜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존재성(곧 비실재성)을 통찰하는 일이다. 그리고 존재들의 변화 및 전개의 사항은 역사의 문제이며 방편의 영역이다. 곧 '사트바'의 차원이라는 것이다
보디와 사트바에 대한 논리적 혼돈은 역사적 진행 차원의 문제까지 깨달음의 소관 사항으로 접불이려는무리한 시도를 낳게 된다. 그래서 깨달음의 본래 의미와 기능을 잃어버리고 역사의 모든 문제도 깨달음이라는 가치체계와 연관시킴으로써 역사를 법집(2회)의 차원에서 일관화, 도식화, 신비화시키는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둘째, 깨달음과 역사에 대한 혼돈은 '돈오라는 깨달음의 기본적 성격까지도 모호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돈오하고 난 뒤 다시 오랜 세월의 보살만행을 통해 깨달음을 완성한다고 하는 '돈오점수설'은 점진적인 과정을 통해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식으로 오해될 소지가 많으며, 깨달음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놓치게 되는 결과를 빚게 될 것이다. '돈오'와 '점수는 그 내용이 동일한 영역의 연장 개념이나 확충개념이 아님을 알아야한다.
'돈오점수설은, 비유로 말하면, 소(牛)라는 실재를 발견하여(頓悟) 그것을 길들이고 훈련시켜(漸修) 자유자재로 노니는 것을 뜻함은 아닐까?
하지만 깨달음의 길은 소를 길들이는 목우행(牧牛行)이 아니라, 소가 소 아님을, 다시 말해 객관적 실재가 아님을 알아 소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며, 동시에 소와 상대하고 있는 주관적 실재의식 상태에서 벗어남을 뜻한다. 곧 깨달음의 같은 모든 형태의 실재를 타파하는 일인데 돈오점수설은 여전히 실재상에 고착되어 붙잡혀 있는 듯이 보인다. 실재상에서 진행되는 제반사항은 필연적으로 점진적인 과정을 겪을 수 밖에 없지만, 그 모든 실재의식을 벗어나는 일은 시간적으로는 동시적으로 (단번에), 공간적으로는 한꺼번에 되는 일이다. 바로 이러한 모습을 선종에서'돈(頓)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셋째, 돈오점수설은 그 자신의 주장에 경전의 이론적 뒷받침을 꾀하고 있지만, 경전 해석에서 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화엄종의 학승으로도 분류되는 종밀은 특히 '돈오점수설을 정립하는 데에서 화엄의 이론을 많이 원용하고 있다.
깨달음에 이르는 열 가지 단계인'오십중(悟十重)의 이론에서도 그 과정의 실천들을 화엄경의 '신(信), 주(住), 행(行), 향(向), 지(地)의 오위(五位)의 순서에 배대하여 설명한다. 그리하여 화엄 등의 경전에서도 점진적인 보살수행(점수)을 통해 구경의 불지(佛地)에 든다는 점을 은연중 강조하려 한다. 그러나 화엄의 교의(敎意)는 돈교(頓敎), 원교(圓敎) 등으로 표현되는 것처럼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일즉일체(一卽一切), 일념즉무량겁(一念卽無量劫),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 같은 화엄사상은 바로 돈오사상의 이론적 뿌리이기도하다. 화엄에서 광활하게 전개되는 보살의 실천적 유형은 경전에서 서술적 전개 순서 때문에 마치 점진적인 성취와 진전을 나타내는 듯이 보일지 모르겠으나, 화엄의 교의는 그렇게 해석할 수 없는 기본적 가르침으로 충만하다.
여러 부문의 설법들이 화엄이라는 동일한 경전 체계로 결집되어 편찬되는, 경전 성립사의 관점에서도 살펴보아야 하지만, 무엇보다 화엄의 구절과 실천 조목들은 그것 하나하나가 자기 완성적인 교리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이를테면 "전단 향나무 조각 하나하나도 전단향을 구족하고 있고, 바닷물의 방울방울이 다 짠 맛이다"하는 경의 비유처럼 화에서의 십주(tt), 십 행(+(T), 십회향+제미), 십지(+※) 같은 실천적 모습은 서술된 순서에 따라 그 우열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낱낱의 실천들의 저마다 그 자체의 모습 속에 부처의 경지를 내 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화엄 현담(5권 7~10)에서는 다음 과 같이 말하고 있다.
"••• 보살의 여러가지 수행 모습은 항포문(行布門)과 원융문(圓融門)의 두가지 측면으로 이해해야 한다. 순서적으로 각 보살의 수행상(십주, 십행 등)을 나열함은 항포문이며, 하나의 수행상에서 다른 전체의 수행상을 겸하여 갖추고 있음은 원융문이다. 이를테면, 십주는 십행, 십회향, 십지 등을 내포하며, 나아가 십주 가운데 제일 초발심주(初發心住)는 다른 아홉주(九住)를 내포하고 동시에 십행, 십회향, 십지를 내포하는 것이다.
'현담'은 화엄의 세계에선 보살의 실천적 모습을 병렬적으로 무수히 나열하고 있으나, 그것들이 항포와 원융의 모습으로 걸림없이 조화되어 서로간에 내포되는 것이라 말한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화엄에서 말하는 보살의 여러 형태의 지위도 점진적인 과정으로 파악해서는 안된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래서 경전의 보살 지위설(地位說)을 돈오점수의 틀로서 원용하려 함에는 많은 문제가 있음이 드러나는 것이다.
넷째, 요즈음와서 '돈오점수설'을 지혜와 자비의 측면으로 해석하여, 지혜는 존재에 대한 깨달음으로, 그리고 자비는그를 토대로 한 중생 구제의 차원으로 보자는 시도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의 취지는 공감할 수 있으나 본래의 '돈오점수설'과는 기본적으로거리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본래의 '돈오점수설이 지금의 경우처럼 '지혜와 자비의 측면으로 볼수 있는 부분도 있음은 인정되지만 그 주장의 기본 골격은 깨달음의 차원에서 전개되는 이론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론을 토대로 역사적 차원의 문제를 깨달음의 문제에 귀속시키며, 또는 깨달음을 역사의 차원에 연장한 것이 '돈오점수설'의 본질인 것이다. '지혜와 자비'의 이론은 돈오점수설보다는 '보디와 사트바'의 채널에 맞추어야 적합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면, 이제는 위와 같이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는 '돈오점수설'을 비판하면서 제기된 돈오돈수설' 을 살펴보자.
'돈오돈수설'도 '돈오점수설'과 마찬가지로 깨달음과 역사의 측면을 하나의 틀에 담으려 한 점이 기본적인 문제가 아닌가 한다. 미세한 번뇌 습기까지 끝까지 단절하고, 내외명철(內外明徹)하여 각자(覺者)로서의 위신력과 공덕상을 다 갖추어야만 마침내 돈오(또는 원증, 원오)라 부르는, 엄격하고도 완벽한 '돈오돈수설은 수행자로 하여금 해태심과 증상만에 빠지지 않게 하는 고매한 가풍을 이룬다.
그러나 깨달음이란 번뇌를 제거하 는 일도, 외적인 신통묘용을 갖추는 일도, 자유자재한 역사적 운용을 뜻 하는 것도 아님은 이미 이야기한 바 있다. 이러한 요건들을 구족하는 것 을 깨달음의 기본 자격으로 파악하 는 돈오돈수설은 그가 비판하는 '돈오점수설이 낳는 문제점에 스스로 말려들어가고 만다. 그래서 '돈오점수설'에서와 마찬가지로 '돈오돈수설' 도 역사상의 여러 모습을 다루는 데에서 실재론의 언저리를 맴돌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돈오'라는 깨달음의 기본 성격까지도 흐리게 하고 있다. 돈오란 바로 모든 존재들의 실재성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그것이 혁명적인 전환으로 다가오는 점은 앞서 말한 바와 같다. 그런데 '돈오수설'은 번뇌습기나, 깨달은 자가 갖추어야 한다고 믿는 갖가지 공덕상을 실재화함으로써 그것을 성취하고자하는 수행의 모습을 점진적인 수정주의의 경향을 띠게 만들고 만다. 곧, '돈오돈수라는 거창한 이름과는 달리 그 내용은 '점수돈오(돈수)적 성격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돈오점수설이나, '돈오수설'은 둘 다 돈오라는 깨달음의 성격을 제대로 부각시키지 못함으로써, 표현에 따라 '돈오점수설'은 초반에, '돈오돈수설'은 후반에 돈오의 성격을 강조하고 있으나, 사실상 '점수점오1술 계폼)의 모습에 다가가고 있는 것이 아닌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또 하나는 돈오돈수설이 나타내는수정주의적 경향이 낳게 되는 깨달음의 신비화에 대한 우려이다. 제팔 아뢰야식의 미세한 습기도 끊고, 어떤 상황에서도 맑음을 견지하고자 하는 '돈오온수설은 깨달은 사람을 수퍼맨 같은 초능력자도 생각하게 할 소지가 있다. 깨달음이란 역사의 모든 현상- 심리적인 번뇌상태까지 포함해서 -과 사건을 자유자재로 조절하고 통제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들의 속성을 통찰하여 비실재성을깨닫는다는 뜻이니, 그로 인한 원천
적 자유(해방)로 말미암아 역사의 모든 제약과 변화에도 불구하고 늘상 열반락을 견지한다는 뜻이 아니던가? 그래서 이러한 깨달음을 통해 세간상의 제약에서도 해탈, 법신, 반야의 열반 삼덕을 누리자는 것이다. 고봉정상에서 고요히 앉아 있음이 그의 깨달음을 증가시키거나 감소시키는 것이 아니며, 십자가 두 시내 복판에서 열심히 일을 해도 또한 그러한 것이다. 신통묘용이 도와 무관함은 진묵스님이 일찍이 설파하였으며, 경론에서도 힘써 깨우치신 바다.
고기가 용이 됨에 비늘을 바꾸지 않고 범부가 성인이 됨에 얼굴을 고치지 않는다는 위산스님의 말은, 깨달은 자의 풍모가 인격적으로 고매하다거나 그것도 결국 사회적인 통념이지만 능력에서도 절대적으로 신비화된 모습이 아님을 단적으로 말하고 있다. 다만 깨달은 자는 그의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역사적 제 존재의 실재성의 구속으로부터 해방된 사람이다.
또 하나 '돈오돈수설'의 문제는, '돈오점수설이 애써 경전과의 조화를 꾀하는 점과는 달리, 교(敎)와 선(禪)의 엄격한 분리를 선언하는 점이다.
이러한 태도가 꼭 경전의 교리에 적응하고 조화하지 못하는 스스로의 입지의 약점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선종의 교리와 사상의 근거가 교종의 사상적 근거와 다르다면 문제가 크다.
따라서 아무리 스스로의 입지를 실제 수행상의 처지에 두더라도, 경전의 여러가지 가르침을 지해(知解)나 '해오(解悟)'의 차원으로 전락시켜 선과 교에 우열의 차등을 두어 사상적 괴리나 불균형을 낳게하는 점은 문제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선종이 나름대로의 철저한 실제 수행법이라면, 교종의 경험도 다른 문화적 감각으로 기술된 그러한 수행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돈오점수설이 경론을 일면적으로 해석하여 자기 주장에 끌어들이는 것이 정당하지 못한 것 처럼, '돈오돈수설'에서도 경론의 가르침을 이단시하고 폄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본다. 사실, 정통적인 모든 선사들이 강조하듯이, 경전의 부처님 말씀과 조사들의 선적 법어는 표현 기술상의 차이를 접어 두면 동일한 가르침인 것이다. 선종의 보도(寶刀)인 '돈오라는 표현도 능가경, 유마경, '금강경;'화엄경' 등의 대승경전에서 그 이론적 영감을 얻지 않았던가?
回맺음말
'돈오점수와 '돈오돈수의 논쟁은, 선종사에서의 주요한 논점인 '돈'과 점'의 문제를 실제 수행상의 현실적 문제로 전화시켜, 깨달음과 수행의 문제를 그 깊이와 폭에서 한층 밀도있는 논의로 전개하였다는 점에서 불교수행론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한편 이러한 주장들은 적지 않은 문제점을 담고 있었다. 그가운데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것은, 이러한 주장들이 이면에서는 깨달음(보디)와 역사(사트바)의 차원을 그 논리적 적용 범주를 벗어나 동일차원의 연장 개념과 확충 개념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그 것도 주로 깨달음 차원을 중심으로 역사적 사항을 설명하려 한다는점이다. 그래서, 이러한 기본적 시각의 혼돈으로 말미암아 선종에서 정통적으로 말하는 '돈오'와, '돈오점수설이나 '돈오돈수설에서 말하는 '돈오'는 서로 다른 개념으로 겉돌게 되었다
현재 한국의 수행가풍은 '돈오점수설'과 '돈오돈수설'의 양대산맥으로 나뉘어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만일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이 두 주장이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 개념의 혼란으로 말미암아 한국불교는 수행상의 깨달음을 성취하는 데에서도 반드시 많은 장애를 낳을 것이며, 역사상의 보살적실천도 많은 제약과 한계에 부딪칠 것이 자명하다.
그러면 과연 우리는 어떠한 수행과 실천을 해야 할 것인가? 깨달음(보디)의 길은 선종의 돈오가풍을 살려갈 때 가장 올바르게 깨달음에 부합될 것이며, 존재에서 실재의 장막을 벗겨내는 깨달음의 본뜻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실재의식을 벗겨내어 역사적 사항을 받아들이는 열려진 삶의 자세인 깨달음의 토대 위에, 역사적 실천은 역사상의 경험과 그 상관성을 읽어 내어 풍부한 역사적 상상력과 가설을 적용하는 일에 스스로를 과감히 개방하는 일일 것이다.
이 때도 역사적 차원의 것을 불교적 진리(또는 깨달음)와 부합되는가그렇지 않은가 하는 식으로 역사적 사항을 깨달음의 가치체계로 심사하려 해서는 안 된다. 역사의 문제에 있어 공과의 의미, 선악, 미추 등의 가치 판단은 역사적 경험의 영역으로 이관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하여 깨달음과 역사가 동일한 영역이면서 다른 차원의 체계인 특성을 이해하여 이들을 변증법적으로 결합하여 하나의 삶에서 통
일적으로 조화시키는 일이야말로 가장 바람직한 삶이라 할 것이다. 이럴 때 우리는 일면적인 선자(禪者, 보디)나, 단순한 역사(사트바)를 넘어서 '보디사트바(보살)가 되는 것이다.
1992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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