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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이 나라를 어디로 끌고 가는 것이냐… (いったいどこへこの国をもって行くのや、こちは…)
- 사이온지 긴모치, 1940년 11월 24일
1940년 가을, 로마에서 도쿄로 송신된 32페이지짜리 외교전문 한 통이 일본 제국의 진로를 조용히, 그러나 결정적으로 흔들기 시작했습니다. 이 문서를 작성한 인물은 주이탈리아 해군무관 야마모토 이치류 대좌였습니다. 겉으로만 보면 그것은 영국 해군의 타란토 공습과 영국 본토 항공전의 전훈을 분석한 평범한 군사연구문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해군항공전의 전략적 한계와 장기국가전 수행에 관한 의견」이라는 제목 아래 적힌 내용은, 실상 당시 일본 상층부 일각에서 힘을 얻어가고 있던 “결정적 선제타격” 구상 전체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위험한 정치문서에 가까웠습니다.
보고서의 골자는 단순하면서도 도발적이었습니다. 항공전에 의한 기습은 일시적 충격을 줄 수는 있어도, 대국의 산업력과 전쟁의지를 단번에 꺾을 수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타란토 공습은 정박 중인 함대를 기습해 일정한 성과를 올렸으나, 그것이 곧 해상전 전체의 승패를 갈랐던 것은 아니며, 무엇보다 그런 성공이 대양 너머의 산업국가를 상대로 반복 가능하다고 볼 수는 없다. 아울러 영국 본토의 항공전에서 독일 공군은 공중우세와 대량폭격으로 영국의 항전 의지를 꺾겠다는 목적으로 접근하였으나, 실제로는 영국의 산업력과 방공체계, 사회적 결속을 무너뜨리지 못했다. 따라서 항공전에 지나치게 기대어 결정적 일격을 가하려는 구상은, 설령 일시적 전과를 올리더라도 적의 총화단결과 총동원만 촉진할 수 있는 것이다.”
즉, “항공전으로 단숨에 전세를 결정할 수 있다”는 낙관 자체가 틀렸다는 뜻이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야마모토 이치류는 항공기라는 신병기의 가치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국가전략 전체를 떠받치는 결정타로 과대평가하는 태도를 비웃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보고서가 나오게 된 배경에는 야마모토 이치류라는 인물의 기묘한 이력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는 해군 내부에서 선명한 함대파, 곧 워싱턴·런던 해군군축조약 반대파에 속한 인물이었습니다. 항공전의 현실과 조약체제의 한계를 인정하며 미국과의 장기전을 냉정하게 계산하려 했던 조약파와는 정반대의 감각을 가진 인물이었던 셈입니다. 그의 오촌 당숙이자 해군항공전파의 상징적 수장인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이치류를 어떻게든 보호하려 애썼지만, 정작 이치류 본인은 “지나 국민정부와 즉각 강화하고 제국의 모든 역량을 귀축영미와의 대아시아 성전에 집중해야 한다”는 식의 과격한 주장을 공공연히 떠들고 다녔습니다. 결국 그는 인사상 불이익과 좌천을 거듭한 끝에, 사실상 본국 권력투쟁의 중심에서 밀려난 채 해외로 내몰렸습니다.
따라서 이 보고서는 한편으로는 냉정한 전훈 분석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치류 개인의 냉소와 분노가 짙게 배어 있는 문서이기도 했습니다. 항공결전론을 신주단지처럼 떠받드는 본국의 분위기에 대한 조롱, 좌천당한 장교 특유의 삐딱한 오기, 그리고 “어차피 아무도 내 말을 진지하게 듣지 않을 것”이라는 체념이 뒤섞여 있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는 화풀이하듯 보고서를 써내려갔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점 때문에, 오히려 이 문서는 예상치 못한 정치적 생명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문서의 잠재력을 가장 먼저 알아본 사람은 총리대신 고노에 후미마로였습니다. 외무성을 통해 보고서를 전달받은 고노에는 그 안에서 단순한 군사논문이 아니라, 육군을 견제할 수 있는 뜻밖의 정치적 무기를 읽어냈습니다. 당시 고노에에게 가장 골치 아픈 문제는 자신이 군부를 통제하기 위한 장치로 기용했던 마쓰오카 요스케 외무대신이 사실상 그 구실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마쓰오카는 외교를 조정과 절충의 기술이라기보다, 과시와 충격의 정치로 이해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혁신관료를 등용하겠다는 명분 아래 외무성의 숙련된 고위외교관들을 대거 내쫓아 외무성 내부를 적으로 돌렸고, 독일·이탈리아와 더 긴밀히 공조해 소련을 공격해야 한다는 발언까지 공공연히 내놓으며 관료집단과 궁중, 육군 내부에서 동시에 불신을 샀습니다. 겉으로만 보면 그는 강경외교의 화신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도조 히데키와 육군 통제파에게 질질 끌려다니는 처지에 가까웠습니다. 즉, 고노에가 기대했던 ‘군부를 견제할 수 있는 외교적 검’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정치적 부담만 키우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고노에는 이 시점에서 도조를 정면으로 치기보다는, 그의 구상을 황실과 궁정의 불안감에 연결시키는 우회로를 택했습니다. 그는 육군 통제파의 공격으로 한직에 밀려나 있던 이시와라 간지를 다시 불러냈습니다. 만주사변의 설계자이자 한때 육군 내 독자적 전략사상의 상징이었던 이시와라는, 도조와 같은 육군 출신이면서도 세계전략과 국가총력전에 대한 관점은 전혀 달랐습니다. 즉, 고노에는 군 외부의 비판자가 아니라, 육군 내부의 권위를 가진 이단아를 끌어들여 도조를 공격한 것입니다.
고노에는 야마모토 이치류의 보고서를 토대로, 미국 태평양함대에 대한 선제타격을 발판으로 남방을 장악하겠다는 도조의 대미개전안을 비판하는 문서를 이시와라에게 작성하게 했습니다. 그 뒤 그는 이 문서를 친구인 기도 고이치 내대신을 통해 황거에 직접 상신했습니다. 이 도박은 예상 외로 크게 먹혀들었습니다. 도조의 구상은 해군 내부, 특히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의 손에까지 정식으로 올라가 해군 전체의 전략안으로 가공되기 전에 궁정 차원에서 제동이 걸렸습니다. 실제 역사에서 진주만 공습과 태평양 전쟁으로 이어졌던 대미개전안이, 군 내부의 정식 논쟁을 거치며 세력을 넓히기도 전에 정치적으로 좌초된 것입니다.
이 사건은 단순히 한 개전안이 기각된 것 이상의 의미를 가졌습니다. 가장 먼저, 도조가 적지 않은 정치적 타격을 입었습니다. 그러자 외무성 관료집단, 육군 내부의 통제파, 그리고 황도주의적 관념우익 사이에서 삼중으로 압박받고 있던 마쓰오카의 운신폭이 오히려 약간 넓어졌습니다. 물론 이것이 곧 마쓰오카의 정치적 승리를 뜻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고노에가 그를 조금 더 자유롭게 ‘도구’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에 가까웠습니다. 동시에 고노에는 육군 통제파에게 한 방을 먹였다는 사실 자체로, 더 이상 수세적 중재자에만 머무를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즉, 이전보다 조금 덜 타협해도 되는 위치에 올라섰다는 것입니다.
이 변화는 곧 신체제운동의 내부 권력구조에도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나카노 세이고, 히가시 노리마사, 나가이 류타로 등 신체제운동을 단순한 관제 통합이 아니라 대중동원적 파시즘으로서 지지하던 친고노에계 문민정치인들은, 이제 자신들의 요구를 더 강하게 밀어붙일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또한 대정익찬회 사무총장이자 신체제운동의 행정 실무를 총괄하던 아리마 요리야스, 그리고 동경제국대학 법학부 교수이자 그 이데올로그 역할을 맡고 있던 야베 데이지 등 이른바 ‘근위 그룹’ 역시 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확보했습니다. 다시 말해, 대미개전안을 둘러싼 도조의 실점은 곧 고노에 진영 전체의 활동반경 확대를 뜻했습니다.
여기서 실제 역사와의 차이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실제 역사에서 1941년 2월, 고노에 2차 내각의 내무대신이자 반(反)신체제운동적 관념우익이었던 히라누마 기이치로는 제국의회 대정부질의에서 대정익찬회를 정치결사가 아니라 공사결사, 곧 권력 장악을 위한 당조직이 아니라 공공 목적의 봉사조직으로 규정했습니다. 이 규정은 치명적이었습니다. 익찬회가 정치기구가 아니라 봉사단체라면, 그 지방조직은 자연히 내무관료의 관리 아래 들어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도도부현 지사가 지역위원장을 겸임하고, 지방 행정조직이 익찬회를 흡수하는 구조가 됩니다. 즉, 신체제운동은 자생적 대중정당으로 자라나지 못하고 급속히 관료화·무력화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대체역사에서는 사정이 달라집니다. 내대신부와의 협력을 강화하고, 자신의 측근들을 더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도조를 비롯한 육군세력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숨통이 트인 고노에는 익찬회를 행정의 부속기구로 놔두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지사·시장·정촌장이 익찬지부장을 겸임하던 관례를 폐지하고 전임간부제를 시행합니다. 이는 지방 익찬조직을 행정관료의 겸직 업무가 아니라, 별도의 정치조직으로 만들겠다는 뜻이었습니다. 동시에 중앙사무국에 파견되어 있던 내무성 관료들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익찬회 전임 당직자들로 채웁니다. 더 나아가 제국의회 내부에는 익찬회 원내총무회를 설치해, 익찬회가 단순한 외곽 운동체가 아니라 의회정치와 내각운영을 직접 연결하는 지배정당의 골격이 되도록 만듭니다.
이 조치의 의미는 분명했습니다. 고노에는 더 이상 단순히 군부와 궁중, 관료를 조정하는 귀족정치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일본의 지배정당을 이끄는 정치지도자이자, 동시에 내각의 수반으로서 이중의 권력을 쥐기 시작했습니다. 즉, 신체제운동은 관제봉사단체가 아니라 점차 당적 성격을 띤 국가정당으로 변모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곧 육군이 훗날 대미개전안 사태를 수습하고 세력을 다시 회복하더라도, 고노에를 예전처럼 단독으로 흔들 수 없게 되었음을 뜻했습니다. 이제 그는 단지 총리 한 사람이 아니라, 정치조직과 국가기구를 함께 움켜쥔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1940년 이탈리아에서 날아온, 한 좌천된 해군대좌의 삐딱한 전훈 보고서는 본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일본 정치의 흐름을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작성자인 야마모토 이치류는 아마 “항공전 따위로는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다”는 자신의 분노를 토해냈을 뿐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노에는 그 속에서 군부를 견제할 논리와 궁정을 설득할 무기를 읽어냈고, 이시와라는 그것을 육군 내부의 언어로 번역했으며, 기도 고이치는 그것을 황실정치의 맥락 속에 올려놓았습니다. 그 결과 도조의 대미개전안은 한 차례 좌절되었고, 마쓰오카는 조금 더 오래 정치적으로 연명했으며, 무엇보다 고노에는 신체제운동을 보다 본격적인 지배정당 건설로 밀어붙일 여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겉으로는 단지 한 건의 군사보고서였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일본 제국의 전략과 권력구조 모두를 미세하게 비틀어놓는 나비효과의 출발점이 되었던 것입니다.
도조 히데키의 대미개전안이 궁정 차원에서 좌초되었다고 해서, 일본 제국이 처한 전략적 곤경 자체가 해소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어디까지나 개전의 형식과 우선순위였지, 말레이, 보르네오,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자원지대로 향해야 한다는 압박 그 자체는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고노에와 그 측근들조차 이 점만큼은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더 이상 중국대륙에서 물러설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현재의 자원 기반만으로 그 전쟁을 계속 끌고 갈 수도 없었습니다. 즉, 제국은 이미 너무 깊이 들어와 있었고, 그 대가를 감당할 수단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1937년 이래 이어진 중일전쟁은 본래 일본 군부가 기대했던 것처럼 단기간의 응징전이나 정권교체 전쟁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상하이와 난징, 화북의 주요 도시와 철도망, 해안 거점들은 차례로 일본군의 손에 들어갔지만, 장제스의 국민정부는 붕괴하지 않았습니다. 충칭으로 물러난 국민정부는 후방으로 물러나 항전을 지속했고, 일본군은 전투에서는 이기면서도 정치적으로는 아무것도 끝내지 못하는 이상한 전쟁 속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이는 일본이 ‘승리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보다 정확히 말하면 ‘전쟁을 끝내지 못한’ 상태에 빠졌다는 뜻이었습니다.
이 교착은 군사적 불명예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점령지가 넓어질수록 일본은 더 많은 병력과 보급, 경찰력과 행정력을 투입해야 했습니다. 대도시와 항만을 장악하면 전쟁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도시와 항만을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철도, 더 많은 수송선, 더 많은 헌병과 관료가 필요해졌습니다. 점령은 곧 관리의 시작이었고, 관리란 곧 끝없는 비용을 뜻했습니다. 특히 중국 전선은 단순한 야전군의 문제가 아니라, 제국 전체의 인력과 물자, 재정과 산업을 서서히 잠식하는 거대한 소모전으로 변질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이 시점에서 중국에서 발을 빼는 것도 불가능했습니다. 이미 군부와 정권은 수년 동안 엄청난 정치적 자산과 선전을 이 전쟁에 쏟아부은 뒤였습니다. 여기서 타협하거나 철수한다는 것은 단순한 외교적 후퇴가 아니라, 국내적으로는 제국의 권위가 무너지고 군의 명분이 붕괴하는 것을 뜻했습니다. 다시 말해, 중국에서 물러나는 선택지는 전략적으로는 합리적일 수 있어도 정치적으로는 거의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은 승리할 수 없는 전쟁을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멈출 수 없는 전쟁을 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문제는 그 전쟁을 계속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 점점 더 부족해지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장기전이 심화될수록 일본은 석유, 고무, 철, 주석, 크롬과 같은 전략물자에 더 깊이 의존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해군과 항공전력, 기계화 부대의 확대는 곧 막대한 연료 수요를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자원은 제국 본토나 조선, 만주만으로는 도저히 충당할 수 없었습니다. 제국이 현재의 전쟁을 계속하고, 더 나아가 미래의 대전까지 대비하려 한다면 결국 남방 자원권에 손을 뻗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지점에서 미국-영국-네덜란드의 경제압박은 단순한 외교적 불쾌감이 아니라, 제국 전체의 생존을 위협하는 문제로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자산 동결, 수출 통제, 특히 석유를 둘러싼 압박은 일본 지도부에게 시간이 자기 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날카롭게 일깨워주었습니다. 중국전쟁을 계속할수록 자원은 더 많이 필요해졌고, 자원을 얻기 위한 외부 통로는 오히려 좁아지고 있었습니다. 즉, 일본은 전쟁을 계속하기 위해서라도 새로운 자원권을 확보해야 했고, 그 자원권을 확보하려면 또 다른 전쟁을 준비해야 하는 악순환 속으로 밀려들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고노에 정권과 대본영 내부의 논쟁은 ‘남방으로 가느냐 마느냐’를 둘러싼 것이 될 수 없었습니다. 남방으로 내려가야 한다는 결론 자체는 이미 거의 전제처럼 굳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진짜 쟁점은 다른 데 있었습니다. 미국을 단숨에 분노시키는 큰 도박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최대한 전면충돌의 문턱을 늦추면서 영국과 네덜란드의 식민지 거점과 자원지대를 먼저 틀어쥘 것인가. 즉, 이 세계선에서 바뀌는 것은 남진의 필요 그 자체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그 남진을 어떤 형식으로 수행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고노에와 그 측근들이 야마모토 이치류의 보고서를 그렇게 집요하게 활용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남방 포기’를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정치적으로도, 군사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불가능했습니다. 다만 그들은 일본 제국이 미국과의 총력전을 먼저 불러들이는 방식으로 남진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습니다. 제국의 목표는 미국을 박살내는 것이 아니라, 미국이 아직 완전히 결심하지 못한 틈을 타 남방 자원권과 전략거점을 선점하는 데 있어야 했습니다. 다시 말해, 문제는 전쟁을 하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누구를 먼저 때리고 누구를 잠시 남겨둘 것이냐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일본의 전략 논쟁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습니다. 하와이와 태평양 한복판을 향한 상징적 대도박은 일단 봉쇄되었습니다. 대신 대본영과 내각, 외무성과 해군, 그리고 궁정 주변에서는 보다 건조하고 계산적인 질문이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영국령 말라야와 싱가포르, 북보르네오와 브루나이, 수마트라와 자바의 유전과 항만을 얼마나 빨리 장악할 수 있는가. 미국령 필리핀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고립과 봉쇄의 대상으로 남겨둘 수 있는가.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새로운 현상을 미국에게 협상으로 승인받을 수 있는가. 이후 수개월 동안 일본 상층부를 사로잡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질문들이었습니다.
이 새로운 전략을 실제 군사체제로 번역하기 위해, 고노에 정권은 곧바로 육해군 인사 재편에 착수했습니다. 대미개전안이 궁정 차원에서 좌절된 이상, 그 구상을 밀어붙였던 인물들과 그 구상에 회의적이었던 인물들의 위상은 더 이상 예전과 같을 수 없었습니다. 가장 먼저 손이 간 곳은 육군이었습니다.
육군참모총장 스기야마 하지메 대장은 이미 노구교사건 이래 이어진 전략적 교착과 병력 운용의 난맥상에 대해 결코 자유로운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중국전선에서의 여러 실책에 직접적 책임이 있었을 뿐 아니라, 그 전쟁이 끝없이 확대되면서도 어떤 정치적 결말도 낳지 못하는 현 체제를 상징하는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고노에와 기도, 그리고 이시와라를 중심으로 한 재편파는 바로 이 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었습니다. 결국 스기야마는 책임을 지는 형식으로 경질되었고, 그 자리는 참모차장 쓰카다 오사무가 넘겨받았습니다. 쓰카다는 도조와 완전히 결별한 인물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기존의 대미 선제결전론에 맹목적으로 매달리는 장교는 아니었습니다. 즉, 그는 육군 내 강경파와 신중파 사이를 임시로 접합할 수 있는 과도기적 인사였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다음 인사였습니다. 쓰카다가 위로 올라가며 비게 된 참모차장 자리에 이시와라 간지가 화려하게 복귀한 것입니다. 한때 만주사변의 설계자로서 육군 전략사상의 총아였고, 이후 도조를 비롯한 통제파와의 충돌 끝에 주변으로 밀려났던 이시와라는, 이제 다시 육군 전략 실무의 중심부로 돌아왔습니다. 더구나 이것은 단순한 상징 인사가 아니었습니다. 참모본부 제1부장 다나카 신이치 중장이 실질적인 전략 입안과 작전계획의 총괄을 맡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시와라의 복귀는 곧 전략 실무의 최상위 감독자가 바뀌었다는 뜻이었습니다. 즉, 육군의 남방작전은 더 이상 도조와 통제파의 단선적 의지만으로 밀어붙일 수 있는 계획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 위에는, 중일전쟁의 교훈과 세계전략 전체를 연결해서 보려는 이시와라의 시선이 놓이게 된 것입니다.
해군의 재편 역시 그 못지않게 중요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처리가 상징적이었습니다. 실제 역사에서라면 그가 주도했을 법한 미국 태평양함대 선제타격 구상은 이미 정치적으로 봉쇄된 상태였습니다. 고노에와 궁정, 그리고 군령부 일각에게 야마모토는 여전히 유능한 제독이었지만, 동시에 “결정적 일격”이라는 환상을 가장 체계적으로 작전계획으로 만들 수 있는 위험한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그는 “중앙 복귀”라는 체면 좋은 명분 아래 해군차관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명목상으로는 본부 중추에 불려온 승진이었지만, 실제로는 현장 작전지휘권을 박탈당한 좌천에 가까웠습니다.
그 뒤를 이은 인물은 군령부차장 곤도 노부타케였습니다. 곤도는 야마모토처럼 극적인 일격결전의 상징은 아니었지만, 중앙의 통제 논리를 더 잘 이해하는 제독이었습니다. 새로 짜인 남방작전에서 해군에 요구된 것은 태평양 한복판의 모험적 도박이 아니라, 남중국해와 말라야 해역, 보르네오와 동인도 방향에서 상륙작전을 엄호하고 제해권을 유지하는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해군의 중심축도 자연히 바뀔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제 역사에서 진주만 기습에 사용될 예정이었던 제1항공함대는 이 세계선에서는 미국 태평양함대를 향한 일격부대가 아니라, 필리핀 봉쇄와 남방 상륙 엄호를 위한 항모기동부대로 재편되었습니다. 이 변화는 단순히 목표가 달라졌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항모의 쓰임새 자체가 “결정적 타격”에서 “정교한 지원”으로 바뀌었다는 뜻이었습니다.
이 재편 과정에서 나구모 주이치 대신 오자와 지사부로가 기동부대 지휘관으로 임명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구모는 대규모 일격 작전의 지휘에는 익숙할지 몰라도, 보다 유동적이고 복합적인 남방 엄호작전에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다는 평가가 힘을 얻었습니다. 반면 오자와는 보다 적극적이고 융통성 있는 해상기동전 개념을 이해하는 인물로 여겨졌습니다. 즉, 해군 수뇌부 역시 이번 전쟁의 첫 단계가 “미국의 심장을 찌르는 단 한 번의 도박”이 아니라, 남방 곳곳에 흩어진 상륙선단과 보급망을 세밀하게 보호하고 유지하는 문제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해군 전체의 내적 합의를 뜻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표면적으로야 해군 수뇌부는 바뀐 남방작전안에 협조했습니다. 이미 궁정과 내각, 군령부가 새로운 방침을 정한 이상 이를 정면으로 거스를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해군 내부, 특히 항공전력과 기동부대 운용에 깊이 관여하던 강경파 장교들 사이에서는 불만이 공공연하게 터져 나왔습니다. 그들의 눈에 필리핀을 남겨둔 채 남방으로 내려가는 계획은 “후환을 남기는 바보짓”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은 미국을 협상 상대로 보는 발상 자체를 순진한 것으로 여겼고, “진작 미국 태평양함대를 직접 쳐서 필리핀과 함께 무력화했어야 했다”는 주장을 되풀이했습니다. 즉, 해군은 겉으로는 수정된 작전에 복종했지만, 내면에서는 여전히 좌절된 일격결전의 유령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점은 훗날 대단히 중요해졌습니다. 겉으로 봉합된 이 노선 갈등은 이후 전개에서 일본제국의 전략목표 달성을 방해하는 구조적 균열로 남게 되기 때문입니다. 남방자원권의 확보와 기정사실화를 위해서는 장기적 병참 유지, 필리핀의 정치적 중립화, 미국의 결심 지연이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해군 강경파는 애초에 이 전략의 전제를 신뢰하지 않았고, 따라서 작전 수행 과정에서도 끊임없이 “필리핀을 먼저 제거해야 한다”거나 “미국 함대에 직접 타격을 가해야 한다”는 압박을 되살렸습니다. 즉, 일본은 새로운 전략을 채택했지만, 그 전략에 필요한 정치적 인내와 군사적 절제를 내부적으로는 끝내 완전히 공유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재편된 육해군이 새로 정리한 남방작전의 목적 자체는 현실 역사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남방 자원지대의 획득을 기정사실화하는 데 있었습니다. 석유와 고무, 주석, 항만과 해협을 틀어쥐지 않고서는 중일전쟁도, 장차 닥칠 더 큰 전쟁도 감당할 수 없다는 판단은 여전히 살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방법론은 분명히 달라졌습니다. 미국 태평양함대를 불구로 만들고 필리핀을 신속히 점령하는 식의 과격한 방안은 폐기되었습니다. 대신 필리핀은 봉쇄와 제한타격의 대상으로 남겨둔 채, 말라야와 북보르네오, 브루나이, 수마트라, 자바와 네덜란드령 동인도 전반에 공격력을 집중하는 보다 어렵고 정교한 방안이 채택되었습니다.
이는 군사적으로 더 까다로운 선택이었습니다. 필리핀을 남겨두면 그곳의 미군은 언제든 일본 남방 병참선의 옆구리를 찌를 수 있었습니다. 살아 있는 미국 태평양함대와 결합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노에 정권과 외무성, 그리고 신중파 군부는 이 방식을 택했습니다.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필리핀을 당장 짓밟는 순간, 일본은 미국과의 전면 총력전을 스스로 불러들이게 됩니다. 반대로 필리핀을 봉쇄하되 직접 점령하지 않으면, 적어도 외교적으로는 아직 “미일전 미발생 상태”를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즉, 필리핀은 단순한 군사목표가 아니라, 협상을 위한 정치적 인질이 된 것입니다.
바로 이 국면에서 마쓰오카 요스케 외무대신은 다시 한번 활용 가치를 얻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독일과 이탈리아를 등에 업고 소련을 공격하자는 식의 과격한 외교연출만을 일삼는 인물로 방치되지 않았습니다. 고노에는 오히려 그의 과장된 수사와 과시욕을 새로운 방향으로 돌려세웠습니다. 마쓰오카는 대외적으로 “동아신질서”를 끊임없이 외쳤습니다. 일본은 침략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낡은 서구 식민체제를 종식시키고 아시아의 자원을 보다 공정하게 재편하려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말라야와 동인도, 북보르네오의 자원은 더 이상 런던과 헤이그의 이익을 위해 존재해서는 안 되며, 그것은 아시아 전체의 새로운 질서를 위해 재조직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은 실질적으로 일본이 그 자원을 가져가겠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쓰오카의 역할은, 바로 그 노골적인 제국주의를 “해방”과 “재편”의 언어로 포장하는 데 있었습니다.
개전 직전의 외교전도 이 논리에 맞추어 전개되었습니다. 일본은 미국에 대해 끝까지 “직접 충돌을 원하지 않는다”는 신호를 보냈습니다. 동시에 영국과 네덜란드에는 남방 자원권과 항만 문제를 둘러싼 강압적 요구를 점점 노골화했습니다. 도쿄가 워싱턴에 보내는 메시지는 일관되었습니다. 일본은 어디까지나 자위와 생존권 확보를 추구할 뿐이며, 필리핀의 현상 역시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이 개입하지 않는다면 사태 확대는 피할 수 있고, 일본도 굳이 필리핀 문제를 격화시키고 싶지는 않다는 신호가 거듭 흘러나왔습니다. 즉, 일본은 군사적으로는 이미 남방으로 팽창하고 있으면서도, 외교적으로는 아직 미일전이 시작되지 않았다는 외양을 최대한 유지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 모순된 계산은 결국 1941년 12월 9일, “도라, 도라, 도라”라는 암호와 함께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세계선에서 그 암호가 가리킨 것은 진주만이 아니었습니다. 새벽과 함께 일본군은 말라야 북부 해안에 상륙했고, 동시에 홍콩 공격이 개시되었습니다. 북보르네오와 브루나이의 유전지대와 항만은 재빨리 장악되었으며, 태국에는 군사적 진입과 함께 피분송크람 정권에 대한 무력 포섭이 이루어졌습니다. 필리핀에서는 보다 제한된 방식이 택해졌습니다. 일본 해군은 마닐라만을 봉쇄하고, 타를라크와 클라크 일대에 대해 제한적 타격을 가했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봉쇄와 억제의 신호였지, 아직 전면적 상륙전의 개시는 아니었습니다.
미국은 직접적인 기습을 당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와이는 멀쩡했고, 태평양함대는 살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필리핀이 사실상 포위된 순간, 워싱턴은 사태의 심각성을 직감하기 시작했습니다. 더구나 일본군의 초기 작전은 예상 이상으로 성공적이었습니다. 싱가포르와 홍콩, 말라야, 북보르네오, 동인도 방면의 주요 거점에서 일본은 빠른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육군은 자원권 확보의 성과에 고무되었고, 고노에와 외무성은 “미국이 아직 완전히 결심하지 못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들의 눈에, 일본은 미국을 정식 총력전으로 끌어들이지 않은 채 영국과 네덜란드의 남방 거점을 거의 일방적으로 무너뜨리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해군 내부의 시선은 달랐습니다. 필리핀을 그대로 두는 것은 결국 언젠가 더 큰 문제로 돌아올 것이라는 불안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살아 있는 미국 전진기지, 살아 있는 미국 함대, 그리고 봉쇄는 했으되 아직 제거하지 못한 필리핀의 미군은 해군에게 점점 더 불쾌한 존재가 되어갔습니다. 즉, 작전은 성공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성공 때문에 일본 상층부는 더 위험한 착각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이제 “필리핀만 남겨둔 채 미국과 협상할 수 있다”는 환상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남방 자원지대의 획득을 기정사실로 만든 뒤, 미국에게 그 새 현실을 받아들이도록 압박할 수 있다고 믿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일본이 의도적으로 남겨두었던 필리핀이라는 변수는 더 이상 정적인 인질로 남아 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마닐라와 루손의 미군, 그리고 무엇보다 더글러스 맥아더는 자신이 단순히 포위된 것이 아니라, 일본 남방작전 전체의 옆구리에 칼을 겨눌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남방작전이 초기 단계에서 눈부신 성공을 거두고 있던 시점, 이 세계선의 전쟁은 실제 역사와 비교해 몇 가지 결정적인 차이를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첫째, 미국에 대한 대대적 기습공격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진주만은 공격받지 않았고, 따라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이른바 “치욕의 날” 연설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미국 내부에서 실제 역사와 같은 급격한 여론 대단결 역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일본이 기대한 대로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미일 간 외교적 접촉과 상호 탐색이 조금 더 연장될 여지는 생겨난 셈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일본은 전혀 다른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실제 역사에서 진주만 공습은 미 해군에 심대한 물적 충격을 가했습니다. 전함 8척이 손상 또는 격침되었고, 항공기 300여 대가 파괴되거나 손상되었습니다. 태평양함대는 초기 대응능력에 큰 상처를 입은 채 전쟁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 대체역사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즉, 미국의 정치적 결심은 다소 늦춰졌을지 몰라도, 그 대신 미 태평양함대는 거의 온전한 상태로 살아남았습니다. 미국은 분노의 충격 속에서 재건을 시작하는 나라가 아니라, 처음부터 강한 해군력을 쥔 채 상황을 관망하고 압박할 수 있는 나라로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 “동아신질서”라는 구호가 실제 역사보다 훨씬 더 진지한 국가 대전략으로 취급되기 시작했습니다. 실제 역사에서 그것은 종종 “귀축영미에 맞선 대동아 성전” 같은 과장된 선전문구로 소비되었고, 실제 정책과는 괴리된 채 공허한 수사로 남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 대체역사에서 일본의 목적은 미국과의 즉각 총력전이 아니라, 남방을 안정적으로 장악한 뒤 미국과 협상하는 데 있었습니다. 따라서 일본은 적어도 외양상으로는 정말로 “동아시아의 해방자”처럼 행동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앞서 고노에가 재구성한 신체제운동이 새로운 의미를 띠게 되었습니다. 실제 역사에서는 시작도 제대로 해보기 전에 관료화되어 좌초한 신체제운동이, 이 세계선에서는 동아신질서의 이념적 하부구조와 결합하게 된 것입니다.
다만 이 변화는 단번에 완성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조선과 대만, 만주를 포함한 제국의 식민지 질서가 하루아침에 바뀐 것은 아니었습니다. 변화는 어디까지나 상층부의 인식과 제도개편 논의에서 먼저 시작되었습니다. 특히 조선에 대한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남방을 무력으로 제압하면서도 미국과 협상을 시도하려면, 일본은 최소한 제국 내부에서 “해방”과 “협력”의 모양새를 보여주어야 했습니다. 그 결과 조선은 더 이상 강제적 동화의 일방적 대상일 수 없다는 인식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공식 담론상으로는, 조선은 이제 제국의 2인자이자 동아신질서의 파트너로 호명되기 시작했습니다. 제국의회 내 조선인 의석 확대안이 검토되었고, “조선인은 정치적 권리능력 없이 신민으로서의 의무만 진다”는 허울 아래 세워졌던 국민총력조선연맹은 해체 또는 재편의 대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대정익찬회 조선분회였습니다. 물론 이것이 곧 조선의 실질적 평등이나 자치를 뜻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일본은 이전처럼 조선을 단순한 동화와 동원의 대상으로만 다룰 수는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셋째, 이런 변화의 연쇄 속에서 “대동아전쟁”의 이데올로기화는 실제 역사보다 훨씬 더 급격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고노에 등 권력 상층부의 눈에 남방작전은 어디까지나 중일전쟁의 난맥상을 해결하고 미국으로부터 아시아 주도권을 사실상 승인받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대중동원적 파시즘 체제 아래에서, 바로 그 대중은 이 전쟁을 전혀 다르게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고노에의 언어는 실리적 계산이었으나, 대중은 이시와라의 언어에 감응했던 것입니다. 남방작전은 더 이상 단순한 자원확보전이나 해상교통선 확보전이 아니었습니다. 선전과 동원, 익찬회 조직과 학교교육, 언론과 지역조직을 통해 그것은 점점 “서세동점의 현실을 뒤집고 동양이 서양에 맞서 역사의 주도권을 되찾기 위한 운명적 대결”로 해석되기 시작했습니다. 즉, 상층부의 계산된 제한전은 하층으로 내려갈수록 이념적 총력전으로 변질되어 갔습니다. 이는 체제에 강한 열정을 부여했지만, 동시에 훗날 현실적인 협상과 후퇴를 더욱 어렵게 만드는 압력으로도 작용하게 됩니다.
작전 개시 후 30일, 싱가포르가 함락 직전에 놓이고 보르네오와 수마트라의 유전지대가 거의 확보되기 시작하자, 일본 상층부 내부에서는 자신들의 전략이 예상 이상으로 효과를 내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 평가가 곧바로 단일한 낙관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마쓰오카와 외무성은 “미국이 아직 완전히 결심하지 못했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육군 실무파는 “자원권과 방어선을 먼저 굳히는 데 성공한다면, 미국도 전면개입의 비용을 다시 계산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반면 해군 강경파는 정반대의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필리핀을 살아 있는 채로 남겨둔 이상, 지금의 성공은 불완전한 성공일 뿐이며, 시간이 갈수록 더 큰 위협으로 되돌아올 것이라는 불만이 군령부와 항공전력 담당 장교들 사이에서 커져갔습니다. 즉, 일본은 남방작전의 성공을 공유하고 있었지만, 그 성공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는 서로 전혀 다른 해석을 내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무렵 일본은 중립국 외교채널을 총동원해 미국에 네 가지 기본 조건을 전달했습니다. 첫째, 일미 간 직접 충돌의 확대는 회피할 것. 둘째, 필리핀 문제는 별도로 협의할 것. 셋째, 인도차이나 및 동인도 지역의 현 상태를 전제로 협상할 것. 넷째, 경제제재 완화와 상호 안전보장을 포괄적으로 논의할 것. 외교적 문구는 조심스러웠지만, 그 본질은 분명했습니다. 일본이 이미 손에 넣은 남방의 새 현실을 미국이 일단 인정한 뒤, 그 위에서 미일 간 질서를 재조정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이 제안을 처음부터 협상의 출발점이라기보다 탐지와 지연의 수단으로 취급했습니다. 겉으로는 원칙론을 고수했습니다. 무력에 의한 현상변경은 인정할 수 없으며, 필리핀의 안전이 보장되어야 하고, 중국 문제 역시 협상 카드로 삼을 수 없다는 태도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물밑에서는 일본의 제안에 즉각 문을 닫지 않았습니다. 대신 미국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일본은 필리핀에서 어디까지 물러설 수 있는가. 일본은 동인도 유전만 확보한 뒤 확장을 멈출 생각이 있는가. 영국과 네덜란드의 식민지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 처리하려 하는가. 중국에 대한 미국 지원 중단이 정말 협상의 필수조건인가. 이는 양보를 준비하기 위한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미국은 일본의 최저선을 확인하고, 일본이 정말로 독일의 요구에 따라 소련을 동쪽에서 압박할 가능성이 있는지를 탐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워싱턴의 진짜 관심은 일본과의 타협 그 자체보다, 일본의 전략 방향과 시간표에 있었습니다. 미국이 가장 우려한 것은 일본이 북방으로 방향을 틀어 소련을 압박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미국의 물자지원이 본격 강화되기 전인 1942년 중반까지 소련이 버텨낼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려웠습니다. 따라서 미국은 일본을 달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본을 붙들어두기 위해 대화를 이어간 셈이었습니다. 그 사이 미국은 일본 자산을 추가로 동결하고, 해상통제를 점차 확대하며, 태평양과 필리핀 주변의 군사적 준비를 강화해 나갔습니다. 일본이 보기에는 외교가 연장되고 있었지만, 미국이 실제로 하고 있던 것은 협상이 아니라 정보수집과 시간끌기, 그리고 압박 강화였습니다.
그러나 도쿄에서는 이 미묘한 반응이 전혀 다르게 해석되었습니다. 마쓰오카 휘하의 외무성, 그리고 아리마가 이끄는 대정익찬회 사무국 등은 이를 거의 성공의 조짐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하와이를 공습하지 않은 선택이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은 독일 견제 때문에 아시아 총력전을 원치 않으며, 일본이 보여준 절제와 외교적 유연성이 먹혀들고 있다는 낙관이 퍼져 나갔습니다. 조금만 더 버티면 미국은 결국 현상을 묵인할 것이라는 기대가 고노에 주변과 외무성 실무층에 번져갔습니다.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계산된 희망이자 자기최면에 가까웠습니다. 그러나 초기의 눈부신 성과가 이어지는 동안, 그 자기최면은 점점 더 설득력 있는 정치논리처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조바심이 난 일본 외무성은 곧 수정 제안을 던졌습니다. 이번에는 보다 유연한 형식을 취했습니다. 일본은 필리핀의 직접 점령을 포기할 수 있으며, 장차 그 단계적 독립 문제를 미국과 공동으로 논의할 용의가 있다고 했습니다. 미국의 아시아 상업 이익 일부를 보장할 수 있으며, 남방 점령지에 대한 형식적 국제관리 가능성도 인정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대신 중국에서의 일본 특수이권을 승인하고, 말라야와 동인도에 대한 일본의 우선권을 인정하라는 요구를 집어넣었습니다. 외교 언어는 더 세련되어졌지만, 실질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일본이 총칼로 확보한 기정사실을 미국이 제도적으로 승인하라는 요구였다는 점에서는 이전과 같았습니다. 따라서 미국은 이 수정 제안 역시 거절했습니다.
이 무렵 필리핀에서는 이미 사실상의 제한교전이 진행 중이었습니다. 아직 양국이 정식으로 전면전을 선포한 것은 아니었지만, 봉쇄와 정찰, 국지적 해공충돌은 점점 잦아지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마닐라만을 봉쇄하고 클라크와 타를라크 일대에 대한 제한타격을 지속했으며, 미국은 이를 단순한 억제신호로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필리핀의 미 공군과 잠수함대는 일본의 봉쇄선과 남하하는 선단을 상대로 간헐적 반격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국지공격만으로는 일본의 남방작전 전체를 흔들 수 없었습니다. 더글러스 맥아더는 이 점을 누구보다 빨리 이해했습니다. 일본이 필리핀을 직접 점령하지 않은 것은 자비가 아니라 계산이었고, 이 계산을 깨뜨리지 못하면 필리핀은 결국 살아 있는 인질이 된 채 남방작전 완성의 배경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라고 그는 판단했습니다.
처음에 맥아더는 보다 제한적인 방식으로 일본의 남방 병참선을 찌르려 했습니다. 루손과 민다나오에서 출격한 미 공군은 남중국해 북부와 바시 해협 방면의 선단을 노렸고, 잠수함대도 일본 함선에 대한 국지적 공격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도는 일본의 작전 템포를 늦추는 데는 일정한 효과를 거두었을지언정, 전세를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일본의 전진기지가 너무 가까웠고, 필리핀의 병참과 정비 능력은 너무 부족했으며, 봉쇄망은 갈수록 촘촘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맥아더는 한 단계 더 큰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더 이상 해상에서 증상을 두드릴 것이 아니라, 병의 근원을 때려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의 필리핀 포위와 남방작전을 단순 방어로는 막을 수 없다고 본 그는, 필리핀의 미 공군을 이용해 타이완 남부의 비행장과 항만, 병력 집결지에 대한 선제적 혹은 반선제적 폭격을 감행했습니다.
이 행동은 일본 내부의 권력균형을 순식간에 뒤흔들었습니다. 루손 섬 인근에서의 교전과 타이완 - 일본의 본토로 간주되었던 - 일대의 피습은 그 함의부터가 천지차이였습니다. 강경파가 일제히 득세했습니다. 해군은 “필리핀을 처음부터 쳤어야 했다”고 외쳤고, 육군도 이제는 루손 침공에 동의하기 시작했습니다. 필리핀을 남겨두고 미국과 협상할 수 있다는 외무성 협상파의 논리는 단숨에 붕괴했습니다. 남방작전을 제한전으로 유지한다는 고노에식 계산은, 필리핀에서 날아온 폭탄 몇 발과 함께 사실상 무너져 내린 셈이었습니다. 겉으로는 이미 오래전부터 복종하고 있던 해군 강경파의 불만은 이 순간 공식적인 정책공세로 되살아났습니다. 그리고 이 노선 갈등은 이후 전개에서 일본제국의 전략목표 달성을 방해하는 구조적 균열로 완전히 굳어졌습니다. 남방자원권의 확보와 미국의 결심 지연이라는 원래 전략은, 바로 필리핀을 둘러싼 내부 분열 때문에 끝내 일관되게 유지되지 못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협상은 붕괴했습니다. 그리고 1942년 3월 26일, 일본은 미국에 공식 선전포고를 감행했습니다. 그때까지의 미일관계는 법적으로는 불완전한 상태였으나, 실제로는 이미 수개월째 제한교전과 외교전이 병행되는 회색지대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이제 그 회색지대는 끝났습니다. 같은 날, 이제까지 멀쩡히 살아 있던 미국 태평양함대는 진주만에서 발진했습니다. 실제 역사에서는 불탄 항구와 뒤집힌 전함들 위에서 시작되었을 전쟁이, 이 세계선에서는 온전한 함대와 지연된 결심, 그리고 무너진 협상의 잔해 위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드러나는 함의는 분명했습니다. 일본은 하와이를 치지 않음으로써 미국의 정치적 결심을 늦추는 데는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그 대가로 훨씬 더 강한 물적 상대와 싸우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일본은 제한전으로 시작한 남방작전을 끝내 스스로 총력전으로 전환하고 말았습니다. 즉, 이 세계선의 일본은 실제 역사보다 더 신중하게 출발했지만, 바로 그 신중함 때문에 더 긴 오판과 더 깊은 내부 균열을 안은 채 전면전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 대가도 더 클 것입니다. 다만, 군사적으로 더 큰 대가를 치르게 되는 것이 정치적으로도 더 큰 대가를 치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후에서 다루는 내용에서처럼 말입니다.
RPG 운영을 못 하니, 이전 진행했던 RPG들인 “경쇼년”의 배경설정을 좀 현실적으로 보강하는 대체역사물을 써보려고 합니다. 최근 중단되었던 RPG의 배경설정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겠네요.
이후 조선 이야기로 넘어가느냐? 그건 저도 아직 모릅니다. 일단 써보려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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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 권가연은 이 세계선에서도 죽겠군요!(?)
“찬전파 사회주의 독립운동세력”(…) 같은 게 나올 거라, 권가연의 멘탈은…
@E.E.샤츠슈나이더 크악! 찬전파 사회주의 독립운동세력이라니!
+하기사 권가연은 원역사의 유해진(?) 트로츠키주의도 아닌 트로츠키 하의 소련도 안 좋게 보고, 꼭두각시(?) 김선우도 안 좋게 볼테니....
@E.E.샤츠슈나이더 찬전파 사회주의 독립운동이라면 일제가 미국에게 박살나거나 아님 일제가 전쟁으로 약해져야 조선이 독립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인가요?
@차들어 홍차야 아뇨, 그 반대입니다. 고노에의 신체제운동과 동아신질서가 어쨌든 반제국주의적 성격이 있다고 보고, 경제정책도 대충 좌파적이니까 흐린눈 하고서 비판적 지지 + 대동아전쟁 열심히 하면 독립이든 자치든 시켜주지 않겠냐는 희망회로(…)입니다.
@E.E.샤츠슈나이더 좌익 버전 반데라?
@E.E.샤츠슈나이더 이야..... 반 권위주의 + 반 제국주의 + 마르크스주의자 권가연이 이걸 보면 맨탈 깨지면서 발작할지도....
@dnjdss 그냥 우익으로 전향하시죠?
@dnjdss 인정식: ”ㅎㅎ“
@E.E.샤츠슈나이더 으악!!
@차들어 홍차야 그러기엔 권가연은 확고한 마르크스주의자 인걸요
@dnjdss (자칭)제자도, 동지도 다 전향했는데 본인은 맑스주의자.. 이거 완전 읍읍..
@렌지파일 마르크스주의자인데 이상하게 자유민주주의를 광적으로 신봉하고 탈국가적이며, 반권위적인 이상한(?) 인물이죠 ㅋㅋㅋㅋ
@dnjdss 자유민주주의 인정 시점에서 개량ㅈ..읍읍읍..
확실히 예전과 달라졌군요 ㅋㅋ 스타트는 최대한 간략하고 알기 쉽게 하라고 조언하셨던 기억이 있는데 아예 땅을 파서 기반 공사를 하실줄이야 ㅋㅋ
사실 그냥 맘 가는 대로 쓰고 -> AI랑 서로 피드백 주고받고 -> 교열하고 이렇게 써내려가는 거라 저도 이걸 어떻게 마무리할지는 아직 안 정했습니다 ㅋㅋ
@E.E.샤츠슈나이더 오히려 그래서 더 재밌지 않을까요 ㅋㅋㅋ 쓰는사람도 엔딩을 모르니 ㅋㅋ
라엠 지나사변 조기 종전 시나리오랑 비슷한 느낌이 드네요.
다음화는 쇼와 17년인가요(?)
진주만 공습을 안하는 당-국가체제 일본 ㄷㄷ..
그래서 더 무난하게 집니다(?)
@E.E.샤츠슈나이더 대신 청산도 어렵고 원폭도 어쩌면..?
@렌지파일 예전에 지나가는 얘기로 한번 ”남베트남과 운명이 바뀐 한국“ 시나리오를 언급한 적이 있는데, 그게 힌트가 될 수 있겠네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