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4-4 온고을교회 주일설교-황의찬목사.hwp
행복은 제로섬게임이 아니다
(마20:1~19)
상대방이 차지하면 내 것이 없고, 내가 차지하면 상대에게 돌아갈 것이 없는 상황을 제로섬 게임
의 상황이라고 한다. 세상에는 제로섬 상황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은데, 사람들은
‘행복’이라는 가치를 제로섬 상황으로 오인하여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라고 말하며, 사촌이
땅을 사면 내 배가 아프다고 한다. 그러나 행복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우리가 변화되어야 한다면 이 착각을 깨뜨리는 것이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남의 행복을 내 행복
이상으로 기뻐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은 바로 이 착각으로부터
벗어나라는 명령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진리를 외면하며, 죽는 순간까지 남의 행복을 시샘하
고, 남의 불행을 기쁨으로 안다. 얼마나 안타까운가? 그러니 이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인 자는 하
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고 그 나라에 참여 한 자이다.
이천년 전 이스라엘 사람들도 착각 속에 살았다. 중동지역의 포도는 건기에 짓는 농사로서 우기
직전에 수확한다. 그래서 수확기가 오면 대단히 바쁘다. 비를 맞으면 당도가 떨어지므로 수확기
가 오면 경쟁적으로 인력시장에서 품꾼을 불러온다. 그러다보니 다급할 때는 작업능력이 떨어지
는 노약자나 장애인도 불러오고, 시간에 구애됨 없이 품꾼을 데려와야 한다. 이때 반나절이나 한
두 시간 일한 사람들의 품삯 문제로 노사 분규가 일어난다.
이스라엘의 품꾼들은 아침 여섯시부터 오후 여섯시까지 열두 시간 일하고 품삯으로 한 데나리
온을 받았다. 만약 정오에 와서 여섯시까지 일한 사람은 반 데나리온을 받고, 한 시간 일한 사람은
1/12 데나리온을 받았다. 이런 상황 아래 한 포도원 주인 이야기가 전개 된다.
본문에 나오는 포도원 주인도 아침 여섯 시에 정상적으로 품꾼을 데려오고, 일손이 부족하여 아
홉시, 열두시, 오후 세시, 오후 다섯 시에 인력 시장에 나가서 놀고 있는 일꾼들을 데려왔다. 오후
다섯 시에 온 사람은 불과 한 시간 동안 일했을 뿐이다. 그런데 포도원 주인은 그 사람에게도 정
상적인 노임인 한 데나리온을 주고, 정오부터 온 사람은 물론 아침 여섯시부터 와서 열두 시간을
일한 사람에게도 균등하게 한 데나리온씩 지급했다.
그러자 소요가 일어났다. 아침부터 정상적으로 와서 일한 사람들이 들고 일어났다. 왜 똑같이 주
느냐? 우리는 더 고생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우리네 사고방식으로 보아도 당연하게 생각
되는데, 그 이유는 바로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주인은 이들에게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않았느냐(13절)”고 설명한다. 주인의 말은 틀리지 않다. 분명히 새벽에 그렇게 약속하고 이들을
데리고 왔다. 그랬으면 당연히 이들이 하루 일을 마치고 즐겁고 행복한 마음으로 일당을 받아 가
야 맞은데, 이들은 지금 분노에 휩싸였다. 원인은 어디 있는가?
다른 사람과 비교했기 때문이다. 사랑이 눈물의 씨앗이라면, 비교는 불행의 씨앗이다. 사실 아침
일찍 뽑혀서 일하게 된 사람들은 건강하고 힘 좋은 일꾼들이다. 그러나 나중에 추가 선발된 자들
은 노약자이거나 장애인들이다.
새벽 인력 시장을 상상해보라, 누군가 자기를 불러 하루 일거리를 주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집결
하여 기다린다. 거기서는 가장 일 잘하고 건장한 사람들부터 선발되어 떠나고 힘도 기술도 없는
사람들은 점점 처진다. 어떤 이들은 온종일 기다려도 불러주는 사람이 없어서 빈손으로 집에 가
야 한다. 그러나 그들도 집에 가면 한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다. 단지 힘없고, 기술도 없고,
능력이 없을 뿐이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 줬다고 해서 쟁의를 벌인 사람들이 범하는 오류는
무엇인가? 바로 자기들의 행복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이다. 상대적 박탈감은 실상이 아닌 허상이
다. 포도원 주인은 이들에게 돌아가야 할 노임을 줄여서 나중 온 자들에게 준 것이 아니기 때문이
다.
오히려 이들이 상대적으로 약하고 능력이 뒤처지는 자들에게 돌아간 후한 노임에 대하여 고맙
게 볼 수도 있다. 그들의 고통을 헤아리고 후하게 노임을 지급한 포도원 주인을 고맙게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런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왜? 사람들이 이기적이며 자기중심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왜 이렇게 되었는가? 그것은 죄의 결과이다. 타락의 결과이다. 죄는 사람의 안목을 슬
그머니 비틀어 놓았다. 사물을 올바르게 보지 못하고 삐딱하게 보도록 했다. 내가 받을 것에 궐이
나지 않았는데도, 마치 큰 손해가 온 것처럼 여기도록 왜곡시킨 것이다. 그것이 죄의 결과이다.
그러나 이들은 젊음과 능력과 힘으로 세상의 권력을 잡았다. 이들은 세상의 메인 스트림이다. 이
들은 남들보다 우월한 지위에서 행복을 찾고 누리는 기득권자들이다.
이들에게 예수님이 천국 복음을 전한다. 천국은 나중 온 자들에게도 먼저 온 자들 못지않게 품삯
을 지급한다. 그렇게 하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밝힌다. 이에 권세를 쥔 자들은 반발한
다. 행복이 제로섬 게임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2천 년 전 이들 실력자들은 천국 복음을 거부하고 예수님을 제거하기로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들의 행복을 수호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결행한다. 결국 예수님은 잡혀서 십자가에
매달렸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의 승리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들의 승리는 짧았다. ‘삼일천하’로 끝났
다. 예수님이 사흘 만에 무덤을 깨뜨리고 다시 사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선이 악을 이긴
승리의 사건이다.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14절)”고 반문하실 때 이미 하나님은 악을
누르고 승리해야 함을 예고하신다. 그래야 나중에 부름을 받은 약한 자들에게 소망이 있을 것이
기 때문이다.
행복은 남이 못 가진 것을 가질 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행복은 포도원주인이 늦게라도 불러
주었을 때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의 나라인 포도원에 들어가면서 행복은 시작한다. 하나님나라의
행복은 우월한 지위가 아니라, 참여함으로써 누릴 수 있다. 그래서 예배가 귀하다. 예배에 참여하
는 자들의 평강을 위해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를 깨고 부활하셨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