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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호산회 원문보기 글쓴이: 나나
상왕봉을 가기 위해
42명이 몇 분을 기다렸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가장 많이 애태웠을 등산메니아님은
미안함을 먼저 차 안으로 밀어 넣고 뒤따라 들어선다.
등산메니아님 뒤를 이어 맨 마지막으로 고마움이 오르자 차가 움직인다.
8시30분이라고 해 두자.
목마른 땅을 토닥토닥 다독여주는 비가 내린다.
찰대로 차서 상처가 날 지경으로 목이 조여지고 있는 배추들이 추위에 떨고 있다.
누구네 집 김장독으로 들어가게 될 것인지 잎이 말라간다.
밭에서 겨울을 나야할지,
김장배추는 걱정 때문에 빗줄기 속에서도 밭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데,
난 오늘 하루만 살 것처럼 '비가 오면 산에 오르기 힘들 텐데', 걱정을 하고 있다.
상황봉을 향해 가는데 발걸음에 무게가 실릴 때쯤 세우가 눈송이로 바뀐다.
오를수록 빠르게 자란 눈송이는 유치원에서
친구들을 데리고 소풍을 왔는지 점점 많아진다.
국화꽃차 같은 향기가 나는 단아한 모습의 차미님,
다정다감하게 회원님들의 장점들을 꼭 집어
머리위에 얹어주시는 모습이
첫눈처럼 보기 좋고 반가웠다.
산이 가팔라지면서 성년이 되어버린 눈송이들은
굵직한 모습으로 두껍게 땅을 덮어놓고 자기 땅이라고 우긴다.
두려움과 함께 눈앞에 펼쳐진 황홀한 광경에 온 몸이 후들거린다.
산을 오르면서 숨통을 조여 오는 근심걱정,
밭은 숨과 함께 걸음걸음 토해 낸다.
심장 한 켠에 세 들어 사는 고뇌는 새롭게 시작되는 숨과 함께
깊게 들이마셨다가 뱉어내면 어디론가 스멀스멀 사라져버린다.
한걸음 한 걸음 오르다보니
고개를 뒤로 꺾고 올려다봐야하는 철계단 앞이다
면사포를 쓴 상왕봉을 축하해 주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정오의 햇살을 받아 피어난 소금꽃을 뿌려놓은 듯한 얼음조각상들이 늘어서 있다.
어둡던 하늘에 햇살이 비추면서 얼음조각상들은
빛의 조각인 루미나리에 보다 환하고 화사해서 눈이 부시다.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똑 같다는 그림자를 뒤에 감추고
하객들은 밝고 환하게 웃는다.
가까운 곳에서부터 멀리에 사는 친구들까지
새하얀 면사포를 쓴 신부를 축하해주기 위해 몰려온다.
친구들은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상왕의 환상적인 모습에
그대로 굳어버려 움직이지 못한다.
화석이 되어버린 산들은 마법이 풀릴 날을 기다려야한다.
키도 크고 예쁜 아가씨를 신랑이 잘도 낚아챘다는 소문에
신부를 보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모여든 사람들 중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신비로운
신부를 서로 차지하려고 순번을 기다린다.
가족 친지 모두 불러 모아 신부를 둘러싸고 서서 찰칵,
언제 꺼내보게 될지 모를 기록사진을 찍는다.
얼음 속에서 눈을 똥그랗게 뜨고 햇살을 끌어 모으고 있는
소나무 면류관이 새 신부 머리 위에 얹혀 있다.
그녀는 임자 있는 12년 연상의 국사 선생님이던
땅딸막한 첫사랑을 밀어내고 8개월 연하와 결혼하려 한다.
친정어머니가 물려준 합천 집에서 살 것인가,
광주에 계신 시어머니께 얹혀살 것인가,
주말 부부로 살 것인가 고민 중이다.
호산의 스타인 두 남정네가 곁에 있어도 눈 하나 꿈쩍 않는 상왕이다
기억의 창고에 켜켜로 쌓인 먼지 밑에 앉아 있는
사진첩 속의 빛바랜 낡은 사진이 어딘가 있겠지.
영원히 돌아갈 수 없는 깊은 잠속에 빠져 있을 신부,
언제였던가.
잃어버린 시간 속에 갇혀 있을 내 젊은 날의 신부는,
필름을 넣지 않고 찍은 사진처럼 내 기억 속에서 낯설다.
상왕봉에서 첫사랑을 잊고 새롭게 출발하는
새신부처럼 이미 떠난 시간들을 보내고
내게 온 새로운 시간의 밧줄을 잡고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어깨와 다리에 힘을 주며 내려온다.
올라올 때 보다 빠르게 내려가려는 시간을 이기지 못하고
몇 번을 휘청거렸는지
시간을 끌고 오던 내가 이제 시간에 끌려 내려가고 있음을 느낀다.
비바람 속에서 떨며 날 기다렸을 시간들에 이끌려
해인사로 흘러들어가는 시간의 밧줄을 붙들고
한발한발 조심스럽게 내딛는다.
세차게 끌어당기는 시간을 이기지 못한다.
시간은 점점 내 말을 듣지 않고 앞서간다.
바닥에 깔려 있는 발칙한 시간을 밟지 않으려고
발을 살짝 비껴 내디뎠는데
그만 스르르 몸이 무너져 내린다.
눈 위에 엉덩이의 크기를 들키지 않으려고 주르륵 미끄러진다.
자세를 낮춰야 미끄러지지 않는다고 두 번째 넘어지는 날 보고
뒤따라오던 성철스님의 설법 같은 傅是맨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傅是맨이 일러준 말은 머릿속에 저장해야하는데
창자 속으로 들어 가버린 건지 순간 또 다시 미끄러진다.
웃음 방석에 앉아있는 것처럼 그대로 앉아 한 참을 웃었다.
미끄러지는 게 너무 재미있었다.
아마도 난 나의 자존심을 밟고 미끄러지고,
욕심을 밟고, 고집을 밟아 미끄러지고 또 미끄러진 것 같다.
모든 건 내 발 아래 허방인 것을,
내 안에 구덩이를 파고 숨어 있던 오만, 교만, 거만, 고집, 자존심,
수 없이 많은 오만방자한 것들을 밟고
엉덩방아를 찧은 게 너무 잘한 일인 것 같다.
그런 것들에 의해 넘어지고 웃을 수 있는
오지게 많은 나이가 싫지 않은 시간이다.
옹골진 내 나이만큼이나
무거운 것들을 지니고 살다보니 무거웠나보다.
자세를 좀 더 낮추어보자
조금이나마 그런 것들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었으면,
보다 못한 智山이 앞장서서 눈보라가 없는 아늑한 곳으로 들어간다.
따뜻한 커피잔 속에 위스키를 두 어 방울 떨어뜨려준다.
다르면서 같고 같으면서 다른
세 사람은 하나같이 커피를 마신다.
이제는 이렇게 느긋한 휴식이 필요한 나이가 되었나보다.
잎맥을 지탱해 주던 초록은
햇살의 입맞춤에 노랑으로 변했다.
노랑은 햇살이 유난히 빛나던 날
햇살을 향해 높이 뛰어 올랐다.
노랑을 따라 뛰어 올랐던 잎맥은 노랑을 잃어버린 상심에
갈색빛이 되어 땅에 엎드렸다.
그 위로 눈가루를 살살 흩뿌리고 조릿대 댓잎을 덮는다.
그 위에 다시 눈가루를 살살 뿌리니
촛불을 밝힐 수 있는 결혼 축하 떡이 된다.
해인사로 향하는 길이다.
내 안에서 풀 먹인 창호지처럼 뻣뻣하던 것들이
조금은 꺾였을 거라는 생각이 날 떠나지 않은 걸까?
왠지 모를 웃음이 헤프게 삐실 삐실 세어 나온다.
누가 날 보면 노란 국화꽃을 머리에 꽂은 여자로
오인할까봐 고개를 푹 숙이고 걷는데,
아뿔사, ㅎㅎㅎ 웃음보가 터졌다.
장난기 많은 부시맨이 뒤에서 웃지 말란다.
난 저렇게 난감할 땐 옆에 있던 일행들이
마음껏 소리 내어 웃어 줘야 아픈 것이나 창피함이 달아나버리고
즐거움이 된다고 빨리 웃으라고 독촉했다.
참을 수 없는 나의 오지랖이다.
앞서가던 智山이 내 앞에서 미끄러진 게 그렇게도 신명나는 일인지.
몸집이 크고 당당한 智山도 어쩔 수 없는 허방이 들어앉아 있었나보다.
내게만 허방이 있는 건 아닌가 보다.
나 같은 사람이 또 있구나 싶어 안심이랄까?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은 아니란 말씀,
동병상련이랄까 뭐 그런 거, ㅋ 덕분에
참았던 웃음의 구실이 생겨 참을 필요 없이 실컷 웃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버스로 돌아와서 미끄러졌다고
당당하게 자랑삼아 이야기하는 넉살이
내 안에 살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대중 앞에서 미끄러져놓고 신나서 떠들어 대는 내가 싫지 않다.
옹골찬 내 나이가 되어야 비로소 실감 할 수 있는
비밀스런 감정이 아닐까한다.
지금도 넘어졌던 그 시간대의 영상을 돌리면 알 수 없는
웃음이 피식피식 흘러나와 기분이 좋아진다.
해인도-만다라(우주 법계의 온갖 덕을 망라한다는 뜻) 돌기-팔만대장경의 진리
즉 가르침을 나타내고 있는 오묘한 도안이란다.
합장을 하고 이 길을 따라 한 바퀴 돌면 큰 공덕을 쌓을 수 있다고 한다.
난 몸으로 돌지 못하고 남들이 도는 걸 디카 랜즈를 통해 구경을 했다.
결국 보는 것만으로도 어지러워 셔터 누르는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스님이 되려고 하는 총각도 나처럼 카메라로 해인도를 구경하고 있다.
막 태어난 태양처럼 은은한 빛이 감도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해안도를 도는 것보다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을 보는 것이 더 좋다.
가야산 중턱에 있다는 석조여래좌상도 못 보고 지나쳤다.
1200년 된 전나무는 찾다가 포기했다.
성철스님의 사리탑도 어디에 있는지 못 보았다.
국보52호로 세계문화유산이라는 팔만대장경이 있는 장경판전도 못 가봤다.
그렇지만 면사포를 쓴 눈부신 신부를 보았다.
회원 한 분 한 분을 귀하게 여기는 운영진과
연중 바겐세일을 하는 값싼 호산 회비가 마음에 든다.
작은 것에 크게 감동할 줄 알고,
잘한다고 추켜 줄줄 아는 값비싼
호산 회원들의 따뜻한 가족애가 빵빵한, 호산회가 있어 좋다.
해는 낮에 보았던 것들을 남은 불씨로 모두 태우고 있다.
거창 휴게소 한쪽 모퉁이에서 떡국을 쑤고 있는 총무님이 보인다.
태양의 불씨가 꺼지자 차가운 바람이 한꺼번에 떡국에 관심이 있는지 모여든다.
급하게 달려드는 바람은 몸집이 점점 커진다.
농짝보다 작은 바람막이로는 역부족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힘센 바람이 덮쳐도 난파될 걱정이 없는 배와 같은 호산.
한석봉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 가래떡을 썰었다는데,
나누리님은 호산회원들에게 맛있는 떡국을 대접하려고
밤늦도록 곰국을 끊이고 가래떡을 썰어서 가지고 왔다고 한다.
난 내 자식을 위해 지금껏 가래떡 한 번 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