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만의 겨울 여행'을 떠난 세 모녀가 경남 남해군 삼동면 물건리 바닷가에서 천연기념물 제 150호인 물건 방조어부림에서 한가로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
- '바람의 딸' 꿈꾸는 여성여행객 증가세 - 훌쩍 떠나고 싶어도 안전·비용 등 장벽 - 여성전용 게스트하우스 하나 둘 생겨 - 저렴하고 안전한 베이스 캠프로 인기
부산 해운대에 사는 '워킹맘' 권은경(43) 씨. 권 씨는 새해 첫 주말인 지난 4일 중학교 2학년인 큰딸과 초등학교 5학년인 작은딸을 데리고 1박2일 일정으로 '보물섬'이라고 불리는 경남 남해군으로 여행을 떠났다. 가천 다랭이마을에서 새해 첫 날 깜빡한 해맞이를 하고 싶었지만, 회사원인 남편은 정초부터 주말 근무여서 동행 불가. 어쩌다보니 '여자들만의 여행'이 돼버린 셈이다.
출발 전에는 여자들끼리 가야 한다는 것이 재미 있을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걱정도 됐다. 워낙에 '길치'인데다 '20년 장농면허증'의 소유자로서 승용차도 운전할 수 없다는 점이 첫 번째 걸림돌이었다. 그래도 가장 큰 걱정거리는 '안전 여행' 여부였다. 딸들을 보호하면서 안전하고 즐겁게 여행을 마무리해야 하는 책임이 오롯이 자신에게 지워져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권 씨는 약간의 인터넷 검색 만으로 그런 걱정이 기우였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 남해군에도 여성 여행객들을 위한 여성전용 게스트하우스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마침 계절도 여행객이 뜸한 겨울철이라 예약에도 쉽게 성공했다. 그곳은 바로 가천 다랭이마을에서 가까운 남해군 남면 선구리에 위치한 달품 게스트하우스 2호점. 주인장도 40대 초반의 여성이고, 이용객도 여성만으로 한정돼 있어 안심이 되는 데다 숙박료도 1인당 1만8000원으로 저렴해 '알뜰 여행'까지 겸할 수 있으니 주부인 권 씨로서는 일석이조. 그녀는 "짧은 기간이지만, 여자들끼리의 남해 여행에서 베이스 캠프로 삼기에 딱 좋네"라며 자신있게 출발했다.
■언덕 위의 작은 집, '달품'
"달품 속으로 어서 오세요!"
4일 오전 부산서부버스터미널에서 남해읍까지 시외버스를 이용한 후 남해읍에서 다시 가천 다랭이마을행 군내버스를 타고 가다 선구리에서 하차한 권 씨 세 모녀. 주인장이 전화로 알려준데로 옛 선구보건소를 찾아가니 바로 그곳이 '여자들만의 남해 여행 베이스 캠프'로 불리는 달품게스트하우스였다. 언덕 위에 자리잡아 멋진 풍광을 자랑하는 이 집은 도로변에 있어 찾기도 어렵지 않았다.
앙증맞을 정도로 자그마한 간판과 나무 대문, 생각보다 작고 소박한 건물을 보면서 작은 종을 흔드니 이 게스트하우스의 주인인 김현주(42) 씨가 뛰어나와 함박 웃음으로 일행을 맞아 주었다. 발 아래로 남해군 내 여러 해수욕장 가운데 유일한 몽돌 해수욕장인 선구해수욕장을 내려다 보면서 기쁜 마음으로 게스트하우스로 들어선 권 씨 일행은 그제서야 진정으로 마음이 놓였다.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여행지 사진이 차분하게 장식돼 있는 거실은 여행자들을 아늑하고 포근하게 감싸주었다. 격자무늬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도 포근함을 더했다.
■소박하지만, 있을 건 다 있다
"독일마을에 가시려면…"
마루 중앙의 나지막한 나무 탁자를 사이에 두고 주인 김 씨와 마주 앉아 따뜻한 차를 나눠 마시며 남해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권 씨네 세 모녀 눈에는 벽에 붙여져 있는 세계 각국과 국내 여행지의 사진들이 들어왔다.
"저 사진들 어느 사이트에서 내려받은 거예요?". 주인 김 씨는 "호호, 내려받다뇨? 모두 제가 찍은 사진인걸요"라며 또다시 살짝 웃었다. 그렇다. 김 씨는 20대 초반부터 틈만 나면 국내외 곳곳으로 '나홀로 여행'을 떠났던 또 한명의 '바람의 딸'이었다. 김 씨는 "원래 직업은 학원 강사였어요. 돈이 조금 모이면 주저않고 어디론가 훌쩍 떠날 수 있는 자유가 있었죠. 중국 일본은 물론이고 네팔, 인도,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 미얀마, 티벳 등 아시아 여러 곳과 유럽의 소국들, 심지어 아프리카까지 참 많이도 돌아다녔죠. 그러다가 나이 마흔이 넘으면서 도시 생활을 완전히 접고 지난해 초 이곳에 여성전용 게스트하우스를 열었어요"라며 자신의 이력을 요약했다. 자신 처럼 여자 혼자 또는 두 세명이 함께 여행을 할 때 느끼는 불안감을 달래줄 곳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은 마음과 도시를 떠나고 싶은 마음이 결합돼 '달품'을 탄생시켰다는 것이다. 남해군의 제1호 여성전용 게스트하우스.
"내일 새벽 일출 보러 가요!"
"서울, 부산, 대구 등 전국에서 찾아오는 여성 여행객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재미가 쏠쏠하고 특히 그분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는 점이 좋은 것 같아요. 여행객들도 마음 편해 하시니 감사한 마음이 드는 것은 물론이구요. 요즘은 여성전용 게스트하우스가 조금씩 늘고 있어요."
2층 침대 3개, 즉 6명이 잘 수 있는 도미토리룸 1개와 2, 3명이 함께 들어갈 수 있는 온돌방 2개, 그리고 거실과 주방, 샤워실 겸용 화장실 등이 시설의 전부인 소박한 곳이지만 이곳에는 남해를 여행하려는 사람에게 꼭 필요한 것은 없는 게 없다. 남해 군내 버스의 노선별 시간표는 물론이고 다양하게 제작된 여행안내서와 여행지도, 투숙객이 읽을 만한 다양한 주제의 책들까지.
■주인장이 여행 안내자 역할까지
남해군 상주면 양아리 두모마을 해안에서 바래길 트래킹을 하고 있는 세 모녀, 뒤에 보이는 산은 금산이다.
권 씨 모녀 일행이 첫 날 오후 가고 싶었던 독일마을에 가는 방법을 묻자 주인 김 씨는 아주 친절하게 알려준다. 여행의 고수 답게 그녀는 이미 남해군의 제반 여건과 여행 요령을 꾀고 있었다. 무보수 가이드 역할까지 해주니 권 씨 모녀는 더욱 만족스럽다.
주인 김 씨가 알려준 방법으로 독일마을에 들렀다가 내친 걸음에 인근의 해오름예술촌과 천연기념물 제150호인 물건리 방조어부림까지 둘러본 뒤 달품으로 돌아온 권 씨 일행은 저녁 식사를 직접 준비해 주인 김 씨와 나눠 먹었다. 여타의 게스트하우스처럼 원래는 음식 조리 만은 자제토록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음식재료를 준비해온 알뜰 여성 여행객들에게 매몰차게 "안 돼요"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 김 씨의 웃음 섞인 푸념.
오후 9시 무렵. 권 씨는 몰랐고, 주인 김 씨는 알고 있었던 또 한 명의 여행객이 달품으로 찾아들었다. 미리 예약하고 서울에서 혼자 왔다는 박진희(39·가명) 씨. 그녀는 "어머! 전화드렸을 땐 다른 손님이 없다고 하시더니, 그 새 먼저 온 분들이 계셨네요"라며 반갑게 인사를 한다. 박 씨 역시 '나홀로 여행'을 즐기는 미혼의 여성이다. 그녀는 "얼마 전에는 통영으로 갔었어요. 아무래도 안전 여행이 최우선이니, 남해에 여성전용 게스트하우스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검색해서 예약했지요. 아늑하고 참 좋네요"라며 짐을 풀었다.
선구리 마을에서 가천 다랭이마을까지 거리는 약 4㎞. 일출을 보고 싶어하는 권 씨 모녀를 위해 주인 김 씨가 새벽에 승용차를 태워주기로 했다. 김 씨는 "걸어가도 1시간 안에 갈 수 있지만, 두 공주님이 새벽 추위에 고생할까봐 특별히 태워드리는 거예요"라고 말했다.
다음 날 새벽, 네 사람은 가천 다랭이마을 전망대 앞에서 먼 바다에서 떠오르는 시뻘건 불덩어리를 보면서 서로의 안녕을 빌었다.
아침 식사 후 권 씨 모녀는 주인 김 씨의 추천코스인 마을 인근 남해 바래길 제1코스를 걸으며 보물섬 남해 여행의 대미를 장식했다.
권 씨는 "최근 여성 혼자 또는 몇 명이서 함께 떠나는 여행이 트렌드가 되고 있지만, 정작 여성들이 안심하고 여행할 수 있는 시설은 여전히 부족한 것 같아요"라며 "여성전용 게스트하우스가 조금씩 생겨나고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죠. 영업이 잘 되는지는 솔직히 알 수 없긴 해도…"라며 또다른 곳으로의 여자들만의 여행을 기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