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다보니 저녁이었다. 고궁을 따라 이어진 길에는 거의 인적이 없었고 혜화동 로터리 쪽으로는 차들만 길게 늘어서 있었다. 해가 지는 무렵이면 늘 그랬듯이 사물들의 윤곽이 뚜렸했다. 몇백년 전 쌓았을 고궁의 돌담 언저리, 이끼 낀 기와의 까실까실한 결들까지 선명했다. 문득 눈을 들었다. 희끄무레한 저녁 하늘 사이로 앙상한 나뭇가지가 파들거리며 떨고 있는 게 보였다. 한때는 무성히 이파리가 피어났었고 또 한때는 푸드득거리며 커다란 이파리를 떨구던 나무들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미세한 바람결에도 몸서리를 치면서 그저 파들거릴 뿐이었다. 나는 가방을 고쳐 메며 계속해서 걸었다. 아까 오후에 선배의 출판사에 들른 이후로 나는 계속 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모든 약속들을 스스로 취소해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길 잃은 사람처럼 이 저녁 거리가 낯설었다. 늘 걷던 길의 버스 정류장 팻말까지 그랬다. 갈 곳이 없었던 것이었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지만 그의 생각이 났다. 그가 결혼을 한다고 아까 출판사에서 누군가가 말을 꺼냈을 때부터 나는 계획했던 저녁의 일정들을 혼자서 취소해버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정확히 말해서 그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마도 지금 이 시간, 아마도 김 교수의 출판 기념회에 참석해 있을 것이다. 별로 동의하지도 않는 그의 논문에 입에 발린 치하를 보내고 사람들을 만나고 뷔페를 먹고 어쩌면 쓸데없는 농담들을 지껄이면서 거품도 싱싱한 맥주를 마시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가,결,혼,을 한다.
이제 나는 아무도 건너지 않는 신호등 앞에 서 있다. 차들이 늘어선 길 건너편에 서 있는 여자가 보였다. 스물이 좀 넘었을까, 시장에서 아무 생각 없이 골라잡은 것 같은 허름한 파카에 무릎이 나온 바지를 입고, 그 여자도 길 건너편에서 내 쪽에 있는 신호등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나는 그 여자가 몹시 불안해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나자 갑자기 지금 나와 마주보고 서 있는 여자의 모습이 혹시나 환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런 모습을 하고 있는 여자를 나는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단발머리를 하고 아무렇게나 골라잡은 파카와 무릎이 나온 바지를 입고 저 길거리에 서 있던 스물 몇살의 여자, 지금 저 여자처럼 신호등을 바라보면서 파란불이 들어와 주기를 기다리고 있던 여자.....
그러자 이 세상의 모든 풍경들이 내 곁에서 지워져 버렸다. 그리고 그 여자와 나..... 차들이 밀려 있는 한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그 여자와 나만이 이 세상에 남았다. 그리고 이윽고는 그 여자도 지워져 버리고 기억 속의 여자만 남아 거기에 서 있었다. 머릿속에서 달력들이 거꾸로 팔락거리기 시작했고 1986년 겨울이 되었다.
그때 그 여자는 몹시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유난히 검은 눈동자는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고 온몸이 딸꾹질을 하듯 몇분 간격으로 가볍게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신호등이 바뀌자 그 여자는 빠른 걸음으로 길을 건너 혜화동 쪽으로 향해 갔다.
이윽고 어떤 초라한 다방 입구에 다다랐을 때 그 여자는 멈추어 서서 가쁜 숨을 몰아쉬다가 다방으로 들어갔다.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은 그 여자의 낡은 운동화가 닿을 때마다 삐그덕거리는 소리를 냈다.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혹시 불길의 징조는 아닐까, 그 여자는 그 계단 중간에 서서 잠시 그런 소리를 하기도 했다.
그 여자는 조심스레 다방문을 밀쳤다. 그때, 1986년 겨울의 어느 날에는 아직 시간이 일러서 다방엔 아무도 없었다. 간절하게 담배 생각이 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여자의 주머니 속에서는 토큰 몇개만 가련하게 짤랑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가 들어섰다. 불안하게 출입구를 응시하고 있던 여자의 얼굴에 왈칵 화색이 번졌다. 그는 인조털이 달린 감색 체크 무늬 반코트를 입고 있었다. 그 반코트를 보자 그 여자는 설풋 고개를 숙여 버렸다. 이제 와서 그의 반코트를 보면서 눈물이 고여 버린 게 부끄러워서는 아니었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그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던 때문이었다.
그는 그 여자의 앞자리로 와서 앉았다. 천천히 그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생각 탓이었을까 그의 눈은 괴로워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여자처럼 그의 눈동자도 몹시 흔들리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여자는 가슴께에서 무언가가 찢겨져 나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그 여자는 남자의 시선을 피해 낡은 탁자로 시선을 떨어뜨리면서 자기도 모르게 가슴 한구석에 제 손을 가져다 댔다. 심장이 뚝, 뚝 피를 흘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다시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 여자는 설풋 웃었다. 마지막이라는 생각도 금기라는 생각도 그 여자는 하지 않기로 했다. 마지막이라도 좋았던 것이다. 그가 여기 있고 나는 또 여기 있고..... 아직 우리는 함께다. 미소짓는 그 여자의 마음을 헤아린다는 듯 그가 입을 열었다.
“어젯밤엔 술이 과했던 것 같구나..... 우리 둘 다.....”
설풋 미소짓고 있던 여자의 윗입술이 얇게 뒤틀렸고 이어 선명하게 일그러졌다. 술 때문이라고 그가 입을 열었을 때 알아차려야 했었다. 하지만 그 여자는 그러지 않았다. 그건 마지막이었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그 여자에게 용기를 주었다.
어차피 모든 선을 넘어 버렸다고 그 여자는 생각했다. 지금은 아침 세미나 시간이었다. 말도 없이 빠져나온 그와 그 여자를 모두들 찾고 있을 것이었다. 그 눈초리들, 쏟아져 내릴 그 비판들..... 가뜩이나 그 여자는 지금 사람들의 따가운 눈초리를 받고 있는 처지였다. 하지만 그 여자는 제게로 달려들어 그 여자를 상처 입힐 그 모든 말들을 다 각오하고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그것이, 마지막이라는 생각보다 더 여자에게 용기를 주었다. 그래서 여자는 입을 열었다.
“난 목숨을 걸 수도 있어요.”
술 때문이라고 말한 그와 목숨도 걸 수 있다고 말한 그 여자의 눈이 다시 한 번 허공으로 부딪쳤다. 그는 무슨 말인가 하고 싶은 듯했으나 바람빠진 것처럼 웃어 버렸다.
대학원을 그만두었을 때, 집을 뛰쳐나와 노동 운동을 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그 여자는 어머니와 아버지 앞에서 이해해 달라고 말하며 시선을 떨구었었다. 남자 앞에서 여자는 아직 시선을 떨구지는 않았다. 하지만 술 때문이었다는 그의 말을 다시 생각하자 여자는 결국 시선을 떨구고 말았다.
“.....형은 참 비겁한 사람이군요.”
그가 말없이 주머니를 뒤적거려 담배를 꺼냈다. 그리고 그 여자에게 한 대를 내밀었다. 담배를 받아들면서 그 여자는 어젯밤에 일어난 일들을 생각했다. 그와 그녀에게 돌연히 찾아왔던 밤을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밤이 돌연하게 찾아온 것이 아니라는 걸 그 여자는 알고 있었다. 1983년의 어느 가을날, 낙엽이 지는 교정의 뒷숲에서 여학생들이 우수수 우수수 강간을 당하고 다음날 벌어진 시위..... 여학생들의 치마를 발겨놓고 유유히 사라졌던 사복 경찰들의 이야기가 흉흉하게 떠돌던 가을이었다.
“산 자여 따르라! 산 자여 따르라!”
그는 도서관 유리창에 매달린 채로 소리쳤다. 물론 그는 끌려갔다. 그리고 건너편 건물에서 유인물을 뿌리던 여자 선배가 사복 경찰들에게 쫓겨 건물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학생 회관 뒷편에 숨어서 그 광경들을 바라보면서 엉켜쥔 주먹으로 눈물을 틀어막고 서 있던 그 여자는 일년 후 대학원에 진학했다. 대학원을 그만 두고 집을 뒤쳐나온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 여자는 살아 있었고 살아 있는 젊은이들의 갈 길을 알고 있던 탓이었다. 수천 명의 살아 있는 젊은이들이 택했던 감옥의 길을 그 여자도 가고 싶어했었다. 왜냐하면 감옥 밖에 있다는 사실이 더 괴롭던 시절이었으니까, 이유는 단지 그것이었다.
그 여자는 노동 현장에 투입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 머리털이 나고 나서 그렇게 혹독한 공부는 처음이었다. 물론 그렇게 궁핍한 것도 처음이었다. 하루 분의 아주 작은 식량이 정해지고 하루 분의 엄청난 양의 학습 분량이 정해지고 피워도 될 은하수 담배의 갯수가 정해졌다. 그 여자는 학습에 몰두했다. 그것은 힘겨웠지만 기쁜 일이었다. 하지만 그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손질이 간편한 머리와 허름한 옷, 식물 성분의 식사, 공동의 용돈..... 닥쳐올 나날들에 대한 구체적인 불안..... 실제로, 모여서 공부를 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끌려간 동료들도 많았다. 여자는 제 선택에 대해 불안해 하기 시작했다. 노동자가 된다는 일은 혹은 민중이 된다는 것은 너무 힘겨운 일이었다. 적어도 이미 물질이 주는 쾌락을 맛본 여자에게 그랬다. 하지만 내색할 수도 없었다. 여자는 노동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과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뒤죽박죽인 채, 실마리를 풀 수 없는 혼돈을 혼자서만 싸안고 그해 겨울을 맞았다.
그리고 어느 날 그가 그녀들에게 왔다.
그는 그녀들을 지도하고 있던 선배가 끌려간 이후로 그녀들에게 왔던 거였다. 물론 그도 수배중이었다. 그 역시 언제 끌려갈지 모르는 상태였다. 그는 그 여자의 얼굴을 전혀 기억하고 있지 못했다. 그 여자가 자신의 후배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여자는 그를 기억했다. 끌려가던 그가 외치던 마지막 소리, 어쩌면 신파적인 대사처럼 보이기도 하는 말, 산자여 따르라, 라는 소리가 젊은 가슴에 비수처럼 꽂힐 수 밖에 없었던 그 가을날들을 잊지 않고 있었던 거였다.
“김정석이라고 합니다.”
그가 간단히 자신을 소개했다. 물론 이름은 가명이었다. 그 여자도 가명으로 자신을 소개했고 그들은 그렇게 다시 만났다. 공부를 하는 짬짬이 휴식 시간이 되면 그는 낡은 기타를 퉁겼다. 공부에 지친 그녀들이 그 주위에 둥그렇게 모여 앉아 노래를 불렀다. 기타를 퉁기며 노래를 부르는 그를 보고 있자면 그 여자는 문득 도서관에 매달려 있던 삼 년 전의 그를 떠올리곤 했었다. 그때 그는 분명 저런 모습은 아니었다. 그가 외쳤을 때, 외치면서 끌려갔을 때 그 여자는 그가 그렇게 고운 저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걸 몰랐었다. 부드럽게 마치 휘파람처럼 휘감기는 그의 낮은 노랫소리를 들으면서 그 여자는 왠지 가슴이 아팠다. 그가 그저 외치는 자의 소리로만 남아 있었더라면 아마 가슴이 아프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그 여자는 사담이 허용되는 시간이면 가만히 그에게 이야기를 걸었다. 외치는 자의 소리와 낮은 휘파람처럼 휘감기는 저음을 동시에 가진 그라면 그 여자의 고민을 안아 줄 것만 같았다. 이해하고 독려하고 그러고 나서 강철처럼 그 여자를 단련시켜 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그렇게 했다.
누군가의 과거사에 대한 이야기는 서로에게 금물이었지만 그가 없을 때 호기심 많은 여학생 하나가 그의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우리 대학 3학년 때 시위말야, 그때 도서관 4층에서 짭새를 피하다가 떨어진 언니 있잖아. 그 언니랑 결혼한대..... 그 언닌 그때 떨어진 상처 때문에 지금 하반신 마비가 되었는데 얼마나 열심히 활동하는 줄 아니? 참 잘 어울리는 커플이야. 감옥에서 서로 편지를 몰래 교환하면서 연인으로 사귀기 시작했대..... 멋지지 않니?”
그리고 며칠 후 그녀들에게 그가 왔을 때 그는 새로운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선명한 배춧빛의 손뜨개 스웨터였다. 휠체어에 앉아서 저 스웨터를 뜨개질했을 여자의 손가락이 떠올랐다. 둥글게 감은 배추색 털실이 풀려 나가는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뜨개질이라면 그녀도 자신이 있었다. 후드가 달린 멋진 가디간을 동생들에게 떠 입힌 적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여자는 지금 뜨개질을 할 수는 없었다. 더더구나 그를 위해 뜨개질을 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그에게 아무것도 줄 수가 없었다. 무엇인가를 받지 못했을 때가 아니라 주고 싶은 사람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을 때 사람은 가장 슬플 수도 있다는 걸 그 여자는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깨달으면서 그 여자는 생각했다. 대체 어쩌자고 이런 생각을 하는 거지? 그러자 그 여자는 그제서야 아득한 나락으로 떨어지는 걸 느꼈다. 그 여자는 아득바득 그 절망감과 질투심의 정체와 싸웠다. 대학원을 그만두고 집을 뛰쳐나온 것은 결코 그런 식의 감정을 느끼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뛰쳐나오면서 아버지에게 뺨을 맞으면서도 당당하던 그녀가 아니었던가..... 새벽에 일어나 찬물에 손을 담그고 걸레를 빨다가도 눈물이 나왔다. 그 여자는 생각을 잊기 위해 쏴아, 수도를 틀었다. 하지만 수도 꼭지에서 쏟아지는 것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어처구니없는 감정의 격류였다.
호기심 많은 여학생이 다시 말했다.
“얼마나 지독한 형인 줄 아니? 그 언니가 몸이 아파 누워 있어도 후배들과의 약속 시간이 되면 일어나 나오는 형이야..... 저렇게 늘 웃고만 있어도 강철 같은 형이야..... 그야말로 정석에서 단 한 번도 벗어난 일이 없는 사람이야. 그래서 우리 모두 정석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지..... 정석이 아니면 어떤 행동도 하지 않거든.....”
그랬다. 그는 절대로 흐트러진 적이 없었고 그렇다고 권위를 보이지도 않았다. 말씨는 언제나 한 옥타브 낮은 <라>음이었다. 아주 강조를 해야 할 말이 있을 때도 <시> 이상 올라가지 않았다. 물론 아주 높은 음까지 올라가는 노래를 부를 때는 제외였지만 말이다. 만일 그녀들이 하고자 열망했던 그 일에 정답이 있다면 그건 바로 그였다. 경제학, 철학에서부터 역사, 문학에 이르기까지, 영어, 독어에서 일본어, 스페인어까지..... 그는 그녀들을 주눅들게도 했고 운동에 대한 열망에 눈뜨게도 했다. 그는 빛이었다. 그녀들에게는, 아니 적어도 아득바득 제 감정과 싸우느라 자꾸 그늘 속으로 숨고 싶었던 그 여자에게는.....
그 여자는 감히 그가 그 여자만을 향해서 특별한 미소를 지어 주기를 바란 적이 없었다. 하지만 한 번 그는 그 여자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건 이런 일 때문이었다. 며칠 밤을 지새우면서 세미나가 벌어지던 날 밤..... 그는 드디어 잠깐 쓰러져 버렸다. 지독한 감기였다. 그녀들이 감히 큰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는 창백한 얼굴을 찡그리며 가볍게 손을 저었다. 별것 아니라는 말이었다. 그는 누운 채로 그녀들의 세미나를 들었다. 세미나가 제대로 진행될 리가 없었다. 그 여자는 아까부터 그가 쓰러질 때부터 마음이 뒤숭숭거려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발제도 건성으로 했고 그리고 내내 그의 창백한 얼굴만 훔쳐 보고 있었다. 세미나가 끝나고 누군가가 새벽 거리로 그의 약을 사러 뛰어나갔다. 그 여자는 그때 식사 당번이었다. 그 여자는 어제 장을 본 여학생들이 사다 놓은 대파의 흰 뿌리를 잘라 깨끗이 씻었다. 그리고 물을 한 컵 냄비에 넣고 그것을 끓였다. 어렸을 때 지독한 감기에 걸리면 할머니가 끓여 주던 파뿌리 생각이 났었던 거였다. 새벽 거리로 약을 사러 갔던 여학생이 빈손으로 돌아왔다. 이제 그를 도와 줄 사람은 그 여자밖에 없었다.
그 여자는 파뿌리 삶은 물을 내밀었다. 이제사 무언가 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 여자는 들떠 있었다. 더구나 그 여자의 얼굴을 잠깐 동안이었지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나서 그는 그 여자에게 아주 특별하게 보이는 미소를 지었던 것이다. 그 미소가 하도 눈이 부셔서 그 여자는 그 방안에 있던 그녀를 제외한 다섯 명의 여학생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린 것도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파뿌리 물을 다 마시고 났을 때, 그녀는 자신이 주시받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자꾸만 떨리는 입술을 지그시 누르며 그가 내미는 빈 대접을 받아들고 부엌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녀에게 쏟아졌던 여학생들의 시선은 분명 의혹이었다. 그 여자는 그때 그 조직 내에서 심하게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던 중이었다. 얼마 전 한 여학생이 앓아 누웠을 때 그 여자는 한밤중에 약을 사러 나가는 것을 몹시 귀찮아하기도 했었다. 그때는 분명 부엌에 항상 있었던 파뿌리 같은 건 생각하지도 못했었다.
그 여자가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부엌으로 다른 여학생이 들어섰다. 모임 내에서 제일 나이가 많은 여자였다. 그녀는 그 여자를 바라보더니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했어. 정석이 형은 곧 나을 거야..... 난 다만 네가 동지애를 다른 여자 동료들에게도 나누어 주었으면 해.”
그 여자는 그러자 떨리는 입술을 펴고 그것이 동지애였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 여자도 그리고 나머지 그녀들도 그것이 동지애만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그 여자는 그 모임 내에서 심한 차별을 받았다. 심한 차별이라고 했지만 그건 차별이라기보다 격리였다. 예를 들어 다른 동료들이 살고 있는 방으로부터 책을 전달받기 위해 몇명이 외출을 해야 할 때도 그녀는 제외되었다. 왜냐 하면 그 책을 중간에서 전해 주는 일을 그가 할 때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 여자가 살고 있는 방이라는 공간에서 여섯 명이 모두 모여 있는 시간이 아니면 그 여자는 그를 볼 수 없게 배려되었다. 가끔씩 상상력이 뛰어나다거나 발제를 요령 있게 한다고 그 여자를 칭찬하던 그의 입도 다물어졌다. 그 여자는 그 좁디좁은 비밀방에서 여섯 명의 여학생들이 누워서 잠이 들 때 혼자서 벽을 보고 깨어 있었다. 그러면 그 여자는 또 생각했다. 대체 어쩌자고 내가 이러는 걸까? 곧 현장에 투입될 상황에서 이런 감정으로 인해 동지들에게 누를 끼쳐도 되는 걸까? 모두들 사랑조차 버리고 이 곳으로 오지 않았던가..... 모두들 보고 싶은 사람까지 보지 못하고 어떻게든지 역사를 올바르게 책임져 보자고 눈물을 참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 여자는 그 생각만으로 그녀들의 따돌림을 묵묵히 받아들였다. 그래서 다음번에 다른 동료가 감기에 걸렸을 때 그 여자는 손수 장을 보아다가 파뿌리를 끓여 그녀에게 내밀었다. 같은 방에 살던 동료들이 그녀에게 미소를 보냈다. 하지만 여자는 그날 밤 혼자서 또 생각했다. 아아, 나는 혹시 위선자는 아닐까.....
그리고 몇달이 흘렀다. 그 여자에 대한 조직의 엄격한 배려도 조금씩 누그러들었다. 그는 여전히 그 여자에 대해서는 완강히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가끔씩 눈길이 부딪쳤을 때, 아주 짧은 시간 허공에서 두 사람의 눈길이 부딪쳤을 때 그 여자는 그의 눈길이 특별하다는 걸 느꼈다. 사랑을 해 본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그 짧고도 긴 시간..... 그 여자는 이제 그런 사실들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이제 곧 노동자가 될 것이었다. 사람들에게 더이상 누를 끼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 여자는 또 생각했다. 그건 정말일까, 눈동자끼리 허공에서 얽혔을 때, 그의 동공이 검고 크게 확대되어 오는 듯한 그 느낌...... 그걸 확인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그 여자는 눈을 내리깔고 그녀가 제일 애를 먹고 있던 자본론 공부에 몰두했다.
어느 날인가 그는 기쁜 듯이 그녀들을 찾아왔다. 돈이 생겼고 맛있는 것을 사 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몇달 동안 채소와 싸구려 어묵으로 연명하던 그녀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삼겹살이 구워지고 소주가 날라져 왔다. 그녀들은 오랜만에 낡은 기타를 꺼내들었고 그리고 토론이 아닌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놀기로 작정한 날이었으므로 모두들 유쾌했다. 그가 술을 마시는 것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대접에 따른 소주잔을 여섯 명의 그녀들에게 골고루 돌렸고 그 동안 알지 못했던 각자들의 고민에 고루 귀를 기울이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별로 말이 없던 사람들이었는데 그날은 아주 우스운 이야기들도 꺼냈고 힘든 생활과 긴장에 지쳐 있던 그녀들을 흐드러지게 웃게도 만들었다. 그 여자도 오랜만에 커다란 소리로 웃었다. 그리고 행복했다. 그것으로 족했던 것이다.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여기 있고 우리는 기필코 역사를 바꿀 수 있고 그리고 여기 빛나는 나날들을 모범적으로 사는 그가 있다.
밤이 깊어지고 하나, 둘 술에 약한 그녀들이 작은 마루에서 방으로 들어가 잠이 들었다. 밤 세시가 넘었을까 작은 마루에는 그와 그 여자만 남아 있었다. 문득 그 여자는 그걸 깨달았다. 그와 그 여자의 눈이 오래도록 허공에서 만났다. 그 여자도 그도 눈을 내리깔지 않았다. 눈길을 떼지 않은 채 그가 물었다.
“내일 종로에서 후배를 만날 일이 있는데 나가지 못할 것 같거든..... 대신 나가서 내가 다시 연락한다고 좀 전해 주겠니?”
그가 말했다. 그 여자의 눈이 환희에 빛났다. 그 여자는 거의 한 달이 넘도록 시내 구경을 하지 못했던 거였다. 그의 말은 그러니까 이제 그 여자의 유예 기간이 끝났다는 뜻이 되는 거였다. 그는 찬찬히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다방의 약도를 그려 주었다. 약도를 확인하느라 그에게 다가앉은 그 여자의 숙인 머리가 그의 앞이마에서 나풀거리는 머리카락과 맞닿았다.
“가면 아마도 이런 전화가 올 거야.”
다음 말을 듣기 위해 그 여자가 착한 학생처럼 그를 응시했다. 그때 그가 왈칵 손을 뻗어 그 여자의 팔을 당겼다. 아니, 어쩌면 그 여자가 먼저 그의 품으로 안겨 버렸는지도 모른다. 엉거주춤 포옹을 한 채로 그 여자는 생각했었다. 내가 결국 저지르고 마는구나.....
그 여자는 남자의 배춧빛 스웨터에 그저 고개를 묻고, 그 스웨터를 뚫고 나오는 그의 체온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 여자는 그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느낀 것은 단순한 환희는 아니었다. 휠체어에 앉은 여자가 짜주었다는 그 배춧빛 스웨터..... 그의 손길이 그 여자의 등으로 가만히 다가왔다. 그 여자는 그의 배춧빛 스웨터에 얼굴을 묻은 채로 생각했다. 이래도 되는 걸까..... 그가 그녀를 천천히 떼어 내고 두 손으로 그 여자의 얼굴을 감싸안은 채 그 여자의 눈을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 그 여자가 울음을 터뜨린 것은 그때쯤이었다.
“잘못했어요. 사실은, 사실은..... 형을 사랑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가 다시 그 여자를 안았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힘이 세었다. 그가 말했다.
“다 알고 있었어.....”
그 여자가 눈물 젖은 얼굴을 그의 어깨에 비볐다. 배춧빛 스웨터, 휠체어에 앉아 있는 그의 여자..... 그러나 그도 그 여자도 서로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 여자는 그의 어깨가 움찔하고 굳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천천히 그 여자를 떼어 내고, 이번에는 그 여자에게 눈길을 돌리지 않은 채 가만히 집 밖으로 나갔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다.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그 여자가 그를 따라 집 밖으로 나갔다. 그는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찌르고 캄캄한 어둠 속에 서 있었다.
“미안하다..... 이러지 말자고 생각했었는데.....”
그 여자는 어둠 속에서 고개를 저었다.
“.....한 번만 만나 주세요. 저 사람들 있는 데서 말구..... 그냥 뵙고 싶어요. 내일 열시 요 앞 다방에서.....”
그 여자의 말을 듣는지 마는지 그는 입술만 욱신거리며 씹어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여자는 그날 밤 어둠 속에 서 있는 그를 남겨 두고 먼저 집으로 돌아왔다. 불 꺼진 방에서는, 그녀들 중 제일 나이가 많은 여자가 자지 않고 깨어 있었다. 집으로 들어간 그 여자는 아무 말없이 이불을 덮고 예의 그랬듯 벽을 보고 누웠다. 긴 한숨소리가 나이 많은 여자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탁자 위로 커피가 날라져 왔다.
그가 그녀에게 말했다.
“어젯밤엔 술이 과한 것 같다. 우리 둘 다.....”
그 여자가 다시 말했다.
“난 목숨을 걸 수도 있어요.”
그는 설핏 웃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미소를 짓고 있는 그 여자의 입술이 얇게 뒤틀렸고 이어 일그러졌다. 그가 담배를 내밀었다. 그 여자는 그가 내미는 담배를 받아들였다.
“무슨 말이든지 하려무나.”
그가 말했다. 여전히 그는 그 여자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지만 자석에 끌리듯 다시 눈이 마주쳤다. 그 여자는 피를 뚝, 뚝 흘리는 듯한 자신의 심장을 부여잡고 굳은 듯 앉아 있었다. 그가 담뱃불을 내밀었다. 그 여자는 담뱃불을 순순히 받았다.
“형, 참 비겁한 사람이군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술 때문이 아니잖아요?”
그는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그 여자는 마치 그가 도서관에 매달려 있다가 끌려갔던 그 몇해 전의 가을처럼 주먹으로 입술을 틀어막고 그를 바라보았다. 인조털이 달린 감색 체크 무늬 반코트 속으로 배춧빛 스웨터가 보였다. 그들은 아주 오래된 연인들이고 그녀는 그와 동시에 시위를 하다가 하반신 불구가 되었다..... 둘은 감옥에서 편지를 주고받으며 동지로서의 사랑을 키웠다. 그리고 그녀는 아직도 그를 위해 뜨개질을 한다..... 뜨개질이라면 그 여자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여자는 그를 위해 뜨개질을 할 수가 없다..... 그러자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이번에는 그 여자의 머릿속으로 명확히 떠올랐다. 그저 이렇게 마주앉아 있어서 좋은 게 아니고 정말 마지막이라는 단어..... 그가 떠나든 그 여자가 떠나든 그건 마지막이었다. 그 여자는 울음을 억누르려고 입술을 누르고 있었던 조그만 주먹을 입에서 떼어 내었다. 마지막으로 그 눈빛의 의미를, 그가 그 여자를 바라보았을 때 커다랗게 확대되어 오는 동공의 의미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형,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단지 정말 이름을 가르쳐 주세요. 그러
고 나면 더 떼쓰지 않을게요.”
“.....김,정,석.”
그가 천천히 말했다. 그는 끝내 그렇게 말했다. 여자의 콧날이 왈칵 시큰해졌고 그리고 서러운 눈물이 맺혔다.
“이름은 알아서 무얼 하겠니? 나는 그저 네가 알던 김정석이라는 사람이야..... 우리가 각자의 장에서 열심히 살아간다면 그걸로 족한 거야..... 아마 다시 이런 자리에서 만날 일은 없게 되겠지..... 그래도 열심히 살면 우린 만나는 거야..... 내 말 알아듣겠니?”
그 여자가 작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렇게 상투적으로 말하지 마세요..... 그저 난 이름을 알고 싶었을 뿐이에요..... 동지로서의 이름을 원하는 게..... 아니었는데.....”
여자가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그의 눈에 확 붉은 기운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그는 그 여자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았다. 마치 입술로 다 할 수 없는 그 어떤 진실을 그녀에게 전달해 주고야 말겠다는 듯이 그의 눈길은 집요해 보였다. 그 여자도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입술로 말할 수 없는 어떤 진실들을, 해면처럼 하나도 남김없이 빨아들이겠다는 듯했다. 그리고 그 여자는 말했다.
“잘못했어요. 다..... 제 잘못이에요.”
그리고 그들은 다방을 나왔다.
그는 그 여자를 더 돌아보지 않고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었다. 그러자 다시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여자는 굳어진 입술로 그를 불렀다. 몇발자국 걷던 그가 그 여자를 돌아보았다. 그들은 그렇게 몇발자국을 사이에 두고 서 있었다.
“오늘 시내에 있는 다방에 가서 형이 나오시지 못한다고 전하겠어요.”
어젯밤 그 포옹의 전조가 되었던 그 약속을 생각하며 그 여자가 말했다. 그가 마른 손으로 제 얼굴을 부볐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그가 말했다.
“.....아니 그럴 필요 없다..... 들어가 봐. 모두 기달릴 거다..... 다들 힘들잖니!”
그가 다시 발을 떼었다. 여자는 그를 잡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이번에는 더 큰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가 끝끝내 고집하던 정석이라는 이름..... 그는 돌아보지 않고 어깨를 움츠린 채 뛰듯이 걸어갔다. 그리고는 달려오는 버스를 향해 달음질치더니 그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의 배기 가스가 하얗게 뿜어나오던 겨울날이었다. 그리고 그 여자가 그를 본 것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 여자는 그녀들이 살고 있는 방으로 돌아갔다. 그녀들은 말도 없이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온 그 여자를 차가운 눈초리로 맞았다. 그 여자 역시 냉랭한 눈초리로 그들과 마주앉았다. 무거운 침묵이 그 방을 감쌌다.
“너무 철없다고 생각하지 않아? 대체 이게 무슨 짓이야!”
성마르던 여자 하나가 소리쳤지만 아무도 더 대꾸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 아침이 지나갔다.
며칠 후 그녀들을 지도해 줄 새 선배가 왔다. 새 선배는 김정석이라는 사람이 사정상 그녀들을 더 지도해 줄 수 없게 되었다고 짤막하게 말하고 책을 폈다. 그녀들은 일제히 그 여자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 여자는 눈을 책에 고정시킨 채 몸을 떨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름 같은 건 순순히 가르쳐 주지 않아도 좋았다. 다시 그에게 안기지도 않을 것이고 겁도 없이 사랑한다고 말하지도 않을 것이고 그리고 아침에 사라지는 일도 없을 텐데.....
그녀는 그 과정을 이수한 후 노동 현장으로 배치되는 일에서 제외되었다. 그리하여 그녀들이 제각기 다른 곳으로 떠나가 노동자가 되었을 때 그 여자는 후배들이 모여 있는 다른 방으로 가야 했다. 거기서 다시 한번 재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그들은 말했다. 하지만 그 여자는 거기서 공부에 몰두하지 않았다. 그 여자는 어느 날 저녁거리를 사러 간다고 그 방을 빠져나와 다시는 그들과 합류하지 않았다.
돌아온 탕자처럼 집으로 돌아간 그 여자는 며칠 후 혼자서 강릉 이모집으로 갔다. 하루 종일 바닷가를 거닐다가 밤이면 돌아와 잠을 잤다. 겨울 바다에서조차 사람들은 모두 짝지어 있었다. 둘 혹은 셋..... 혹은 여섯. 어느 날 바닷가를 지치도로 걷던 여자는 털썩 백사장에 주저앉았다. 누구하고라도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목숨을 걸 수도 있다고 말한 적이 있었지. 그래 분명히 그렇게 말했고 난 정말 그럴 수도 있었을 거야. 그렇지만 일상을 걸 수는 없었어. 자잘한 나날들을 건다는 건 목숨을 거는 일보다 더 힘들었어. 나의 미래..... 나의 젊은 날..... 젊음을 건다는 건 미래를 거는 일이고 일상을 건다는 건 언제까지 이어질지도 모르는 삶을 거는 거잖아..... 목숨을 거는 일이 차라리 쉬웠을 거야..... 하지만 나는 정말 목숨이라도 걸고 싶었었나?”
어떤 남자가 그 여자 곁으로 다가왔다. 묻지도 않았지만 그는 자신이 대학원생이며 서울에서 바람을 쐬러 혼자 온 여행객이라고 소개를 했다. 다만 그가 그 여자가 다니던 대학원 이름만 대지 않았다면 그 여자도 대충 그렇게 믿어 버렸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둘은 바닷가에서 술을 마셨다. 그는 회를 샀고 그 여자는 소주를 마셨다. 그가 머뭇거리며 여관으로 그 여자의 손을 잡아 끌었을 때 그 여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따라나섰다. 하지만 그가 불도 끄지 않고 그 여자의 몸을 끌어당겼을 때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면서 그 여자는 불현듯 배추색 스웨터를 생각했다. 그 여자는 상처 입은 짐승처럼 그의 어깨를 강하게 밀쳐냈다. 당황한 남자가 다시 그 여자를 끌어당겼지만 여자는 벗었던 코트를 입었다. 가짜 대학원생이 그녀의 뺨을 연거푸 후려쳤다. 부풀어오른 뺨을 잠깐 매만지다가 그녀가 대답했다.
“미안해요. 아깐 죽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따라온 거예요. 하지만 갑자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죽으려면 당신하고 하룻밤 자는 것쯤 정말 아무 일도 아니겠지만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니까 가고 싶어요. 절 보내 주세요.” 가짜 대학원생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욕설을 퍼부었다.
밤 바닷가로 뛰쳐나온 그녀는 그때까지 아무렇게나 풀어져 있던 목도리를 꼭꼭 여미며 이모집을 향해 걸었다. 흰이빨을 드러낸 파도소리만 그녀의 귀에 철썩였다. 그 여자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 내면서 걸었다.
“스물네 살짜리 여자가 스물다섯 살짜리 남자를 사랑했어. 그뿐이었어. 그게 죄야? 공부방에 여학생들과 같이 앉아서 고기가 먹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지. 그것도 죈가? 남루한 파카에 무릎이 나온 바지 말고 예쁜 치마를 입고 싶다고 생각도 했어. 그도 아니면 수배자들과 나란히 앉아서 혹시라도 끌려갈까 봐, 끌려가서 성고문이라도 당하게 될까 봐 벌벌 떨었어. 그것도 비겁한 건가? 대체 그게 무슨 큰 죄인 거지?..... 아니야, 그도 아니면 이름 한번 가르쳐 달라고 말했어. 가명 말고 진짜 이름..... 대체, 대체 그게 무슨 죄였다는 거야?..... 난 당신의 진짜 이름이 무언지 아는데..... 사실은 당신이 도서관에 매달려 있다가 끌려가던 그날부터 벌써 알고 있었는데.....”
그에게 그런 말을 했어야 했다. 무식하게, 일자무식하게 대들어야 했었다. 그리고는 얼굴을 바꾸고, 희극을 연기하다가 갑자기 비극을 연기하는 배우처럼 얼굴을 바꾸어서 그 여자와 자고 싶어하던 가짜 대학원생에게 말해야 했었다.
“그래도 우리에겐 지켜야 할 것들도 있어. 니 눈에는 우습게 보이겠지만..... 그건 우리의 무기야. 그것마저 없다면 돈도 없고 힘도 없고 핍박당하는 우리가, 거대한 뿌리를 가진 이 역사의 왜곡에 대항해서 대체 무얼 가지고 싸우겠니? 사랑마저도 버리고 가야 할 길이 있다는데 누가, 누가 감히 그를 나무랄 수 있겠니?”
그 여자는 그해 겨울이 끝날 무렵 집으로 돌아와 대학원에 다시 등록을 했다.
그리고 1987년 그 여자는 수배자 해제 명단에서 그의 본명을 읽었다. 그 여자는 그 여자가 감옥보다도 괴로운 곳이라고 생각하던 대학원에 다니면서 교수집에 세배도 가고 논문도 쓰면서 석사를 마치고 박사 과정에 등록했다. 그러는 동안 동구권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고 그리고 그 여자가 한때 몸담았던 조직의 그 사람들이 모두 끌려갔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리고 또 한겨울이 지나자 소련 연방이 해체를 선언했고 그가 폐결핵 2기가 되어서 고향으로 내려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런 소식을 전해준 것은 감옥에서 나온 그의 후배였다. 후배는 그 여자의 동네에 우유 대리점을 열고 있었다. 딱히 대학원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있던 그 여자는 가끔 후배의 우유 대리점으로 가서 남산만큼 배가 부른 후배의 부인과 우유를 마시며 사는 이야기들을 하곤 했었다. 어느 날인가 후배가 그 여자에게 말했다.
“혹시 정석이 형이라고 불리던 사람을 아세요?”
우유를 마시던 그 여자가 잠시 동작을 멈추었다. 삼키려던 우유가 하얗게 엉긴 채로 목구멍을 틀어막는 것 같았다. 후배가 다시 물었다.
“87년인가 수배 해제되고 나서 그 형이 여기 놀러 왔었어요. 그때 정화 씨를 요 앞길에서 봤다고 하더군요. 내가 우스갯소리로 동네 처녀라고, 자주 놀러 온다고 말했어요..... 그러고 나서 그 형이 우리집에 자주 왔었죠..... 가만, 그러고 보니 희안하게도 정화 씨랑은 마주친 적이 없네. 한번은 마누라랑 나랑 둘이서 영화 구경을 갔다가 술도 한잔 먹고 새벽에야 돌아왔는데..... 셔터가 내려진 우리 대리점 앞에 그 형이 앉아 있겠죠?
술이 잔뜩 취해서 하는 말이, 발이 가길래 그냥 종로에서부터 걸어왔다고 하더군요. 안됐어요, 폐결핵이라는데..... 조직은 다 깨지고..... 술 먹고 다니지 말라고 내가 그렇게 충고를 해도 안 들어요..... 그 형 결국 고향으로 내려갔어요. 사촌형님이 골프 용구점을 차렸다는데 거기서 일을 도와줄 건가 봐요..... 원래 집도 가난하고..... 이번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나 봐요.” 우유 대리점을 경영하던 후배는 말을 하다 말고 허공에 시선을 던졌다. “그 형..... 참 빛나던 사람이었는데..... 약삭빠르게 일찍 빠져나온 우리들만 이렇게 무사하군요.”
그 여자는 한번도 골프 용구점에 가 본 일이 없었다. 그래서일까, 그곳에서 일하는 그의 모습은 아무래도 떠오르지 않았다. 자가용을 탄 사람들이 와서 달걀만한 골프공을 고르고 골프대를 만져 보고..... 그럴 때 그가 지을 표정을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다만 닫혀진 셔터 앞에서, 새벽도 아직 먼 어느 캄캄한 밤중에, 닫혀진 셔터 앞에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은 선명하게 떠올랐다.
왜였을까.
그 여자는, 아무렇게나 골라 입은 파카에 무릎이 나온 바지를 입은 그 여자는 아직도 길 건너편에서 이쪽을 향해 서 있었다. 나도 그녀를 향해 서 있었다. 다시 머릿속의 달력이 펄럭이며 1992년이 가고 있음을 알려 주었고 그러자 밀려 있는 자동차들이 매캐한 배기 내음과 거리의 성마른 소음이 들려 왔다.
나는 그 여자가 아직도 서 있는 길 건너편의 붉은 신호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잠깐 회상 속에서 떠올렸던 그 시절의 그 여자는 설사 시간이 좀 걸린다 하더라도, 아무리 이 겨울의 어스름 속에서 떨면서 서 있는다 해도 곧 파란 신호등이 들어올 거라고, 그래서 모든 차들을 멈추게 하고 길 건너편에서 이쪽 편으로 자신을 안전하게 걸어가도록 만들어줄 거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요즘의 나는 아무것도 믿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영영 파란 불은 들어오지 않을지도 모르고, 그리고 이 자리에 그대로 언제까지나 서 있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나는 길을 건너기를 포기했다. 어차피 방향도 없는 길이었다. 나뭇가지들이 그 봄날과 여름날의 무성한 이파리들을 떨구고 그저 파들거리며 서 있었다. 봄날이 오면 그 나무에 다시 잎이 돋을지도 나는 알 수 없었다. 나는 원시인들처럼 혼돈에 빠져 있었다. 밤이 오면 그들은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고 했다. 그 밤도 지나고 나면, 밤을 견디어 낸 자들에게는 아침이 온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지 못하고 있었던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가,결,혼,을,한,다. 사복 경찰들에게 쫓기느니 차라리 지구의 중력에 몸을 맡기기로 결정했던 그녀하고..... 날개도 없이 추락을 택했던 그녀하고..... 그녀는 아직도 그를 위해 뜨개질을 하고 있을까.
“자식..... 참 좋은 녀석이었는데, 결핵 고치기는 했는지..... 하기는 서로 나이가 꽉 차기도 했지..... 그 자식 87년인가 수배 해제되기 전에 헤어진다 어쩐다 소란을 피우더니 결국 결혼을 하는구만..... 어때?..... 정화 너도 물론 올 거지? 그나저나 넌 왜 결혼 안 하는 거야.”
그의 결혼 소식을 전해 준 선배는 사람들을 향해 떠들다가 나를 향해 명함을 한 장 내밀었다. 금박도 선연한 그의 명함에는 재벌 기업의 기획실이라는 직함이 박혀 있었다. 나도 곧 전임 자리를 맡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때 그 방에서 배운 지식을 활용해 나는 “1930년대 소설에 나타난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논문을 썼고 그것으로 박사 학위를 받을 예정이었다. 우리들은 별로 놀라운 표정을 짓지도 않았다. 그 출판사에 모인 옛시절의 동지들은 서로 쑥스러운 얼굴로 명함을 건네고 그리고 공룡이 다니던 시절의 이야기를 했다.
“맘모스들이 커다란 소리로 쓰러져 얼음 속에 갇혔대..... 글쎄 몇만년이 지났는데도 하나도 상한 데가 없대잖아..... 파랗게 얼어서..... 그 둥그렇고 날카롭던 상아도, 허공을 향해 치켜뜬 눈매도 모두 다 그대로라는 거야..... 얼어붙어 있는 붉은 피까지..... 밀매꾼들이 그 맘모스를 발견해서는 상아만 가져다가 판다는 거야..... 그게 돈이 되니까..... 그리하여 맘모스의 치켜뜬 눈동자하고 얼어붙은 붉은 피만 영원히 지하에 갇히는 거지..... 돈이 되는 상아만 빼고.....”
13년 동안 감옥에 있다가 출옥한 선배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하하 웃었다. 웃다가 그는 후배들보다 먼저 일어섰다. 우리들보다 십몇년 전부터 반독재 운동을 해 온 그는 후배들과의 자리를 이제 거북해 하곤 했다. 한번은 가려는 그 선배를 붙잡았더니 그가 쑥스러운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명색이 선배인데 니들한테 맛있는 거 사 줄 돈도 없고..... 미안하구나.....”
사라져 가는 선배의 뒷모습을 나는 한참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의 등은 벌써 굽어 있었다.
나는 천천히 걸어가며 1986년의 그 다방을 찾았다. 창경원을 지나 돌담이 끝난 곳에서 스무 발자국쯤 더 걸어가면 작은 골목에 있던 다방. 그 다방은 이제 노래방이 되어 있었고 보랏빛과 노란빛의 네온 사인이 간판 주위에서 천박하게 번쩍이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거기에 서 있었다. 그 다방이 노래방 간판으로 바뀌어서가 아니었다. 그런 일들이야 흔해서 더이상 상처가 되지 못했다. 다만 나는 네온 사인 같은 종류가 아닌 빛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빛은 폐결핵에 걸리고, 골프 용구점의 점원이 되었다. 그 빛을 위해 뜨개질을 하던 여자는 아직도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감옥에서 나온 남자는 우유 대리점을 차리고, 화려한 민주 투사였던 노선배는 다만 저녁을 사 줄 돈이 없어서 후배에게 굽은 등을 보이며 사라져 가고..... 우리들은 모여 앉아 금박 글씨가 선연한 명함을 건네며, 얼음 속에 갇혀 있는 치켜뜬 맘모스의 눈매가 보였다. 한때는 따뜻했으나 이제는 얼어붙어 버린 붉은 피가 보이고, 그러자 또 누군가가 말하는 소리가 들려 오는 듯했다.
“약삭빠르게 일찍 빠져나온 우리들만 이렇게 무사하군요.”
나는 어두워져 가는 초겨울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우리들은 이제 겨우, 겨울의 입구에 서 있을 뿐이었다.
첫댓글 선생님 이 소설 이게 마지막 이에요?? .. 끝이 약간 허무하네..-_-;
아니 '었다.' 이 말이 더 있었다. 사실 좀 허무한 소설이지! 그렇지만 깊이 생각하면 가슴에 와 닿는 내용이 있을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