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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 문화기행
시인 최창일 (제주문화포럼 편집국장)
가정의 달 오월!
연이은 3일간 공휴일이다. 오월의 황금같은 뭍으로의 문화기행
이라서 일까?, 그래서
이웃과 함께 한 고마음 미안함 사랑을 담고, (사) 제주문화포럼 회원및 가족,
몇분의 도민이 참여하여 남도 문화기행에 올랐다.
남도기행은 한승훈(부회장)씨의 진행과
김석윤(전 이사장)님이 해설을 맏았다.
특히, 김석윤 해설분은 2010년 지리산 둘레길과 함께하는 남도 문화기행 소책자까지
준비하여 세심한 배려를 해 주었다.
우리일행은 제주항구(제6부두) 출항로비에서
인원점검을 하고 카페리호에 탑승하였다.
승객실에 자리를 잡자, 문화기행의 안내와 회원간의 인사소개로 진행을 끝마치고 자유시간을
갖었다.
필자는 제주항구의 前景(전경)을 구경할겸, 선상밖으로 나왔다.
한라산과 제주시가지는 부연 안개속에 감춰져 있었고 항구에
늘어선 배들이 항구를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카페리옆에는 중국 상해시에서 여행차 들린 1만톤급 크로즈선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필자는 짙은 안개때문에 만약을 대비하기위하여 배의 비상구이며 구명장비 위치를 챙겨 보았다.
그리고 선실로 들어 왔을때는
객실에서 잠을 청하는 사람, 일행과 담소를 나누는사람, 고스톱을 하는 사람, 아침식사를 못했는지 보리빵을 먹는 사람, 자신의 취향에 맞춰 여행에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제주항구를 미끄러지듯 빠져나온 배는 푸른바다 물살을 가르며 완도을 향해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부연 안개속을
해쳐나갔다.
시시각각 변하는 바닷길 안개속에 다도해 섬들이 올맹이 졸맹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사이 안내방송에서 완도항에 도착했다는
방송이 내려졌다.
카페리는 5천톤이며 승객정원이 1천명이고, 승요차는 200여대를 실을 수있다,
그리고 자동항법장치로
운행된다.
5월 21일08:00분에 제주항에서 출항한 배는 완도항구에 11시 30분에 도착하였다.
잠깐 스쳐가는 완도 항구는
섬과섬을 이어주는 배들이 오고 가고, 타원형에 주도가 바다빛처럼 푸르름을 멋부리고 , 길옆 상판에는 漁物이 여기저기 오고가는 소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부두가를 다소벗어나자 인공폭포가 하얀물을 떨어뜨리며 나의 눈을 끌었다.
우리일행은 완도에서 두부탕으로 점심식사를
하고, 첫 기행지인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서정리 달마산 내, 미황사를 찾았다.
이는 749년(경덕왕8년)에 義照和尙(의조화상)이
창건했다.
정유재란(1597년)에 피해를 입어 세 차례걸처 중건, 중수, 복원했다.
미황사 오르는 길은 아스팔트길이었으나 다소
가파른 길이었다.
사찰내로 들어 설쯤 목탁소리와 불경소리가 들려야하는데 유행가를 부르는 소리가 사찰내를 가득 메우고 있어, 의아한
생각을 하며 조금 오르니, 연등이 불당에 목련꽃처럼 가득피어 있고,
불기2554년 5월 21일(금) 부처님오신날 제7회 땅끝 해남
어르신
노래자랑및 경노잔치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그제사 유행가를 부르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부처도 중생이 있어야 부처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한국무용가 김영자씨가 한국 전통무용인 " 閑良舞" 를
어르신을 위해 춤을 추는데,
오월에 한마리의 하얀나비가 사찰내에서
꽃을 찾아 날아다니듯이 아름다운 춤은 노인잔치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듯 했다.
한량무는 한량과 승려가 한 여인을 유혹하는 내용을 춤으로 표현한 무용극이다.
(한량: 일정한 벼슬없이 놀고 먹는 양반)
필자는 한량무에 매혹되여, 달마산
미황사에서(한량무) 詩 <전문>을 올려본다.
미황사/ 달마산 품에 안겨/ 부처님 오신날/
閑良舞 한판으로 멍석을 깔았다//
바다건너 새처럼 건너온 나는/ 땅끝에서
벌어지는 閑良舞/
하얀나비 한마리 유혹에/ 내 것인줄 알았다만//
땅끝해남 어르신들/ 좋다 좋아/
천년은 젊어졌다는 말에/
대웅전 부처는 / 빙그레 웃었다//
필자는 그를 뒤로하고 대응전및
부속건물을 감상하고 사찰을 내려오는데,
길따라 개울물소리가 목탁소리처럼 괄괄, 좔좔, 졸졸,
달마산에서 아래로 내려올수록 적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마도 사찰에서 큰德(덕)을
닦았기 때문에 마음이 가벼워졌나
하고 思索(사색)에 젖어드는 순간, 필자는 버스에 앉아 있었다.
다음 기행지는
해남읍 연동에 자리잡은 녹우당을 찾았다. 녹우당은 한창 重建(중건) 중이었다.
녹우당은 효종의 스승인 윤선도에게 하사했던 경기도 수원의
사랑채를 이곳으로 이전한 것이다.
윤선도는 1587년6월22일 한성부 동부 연화방에서 태어났다.
26세에 진사에합격,
42세에초시에합격,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사부였다.
그의 숫한 귀양에도 시조엔 유배지가 없었다. 그는 완도 보길도에서 어부사시사 40수를
지었다.
고산이 56세 무렵 당쟁에 패하여 官界(관계)를 좇겨나, 고향인 金鎖洞(금쇄동)의 山水에
몸을 맡겼을때 부른 " 古琴詠(고금영) " 이라는 노래를 올려 본다.
바렷던
가얏고를 줄 얹어 놀아보니
淸雅(청아)한 옛소래 반가이 나는 고야
이 곡조 알리 없으니 집겨 놓아 두어랴.
*해설:
당쟁으로 관계를 쫓겨나 고향에 돌아 왔더니 우연히 가야금을 얻어 먼지 닦고 한 곡을 타 볼때 맑고도 超脫(초탈)한 옛소리가 조금도 변함없이
울리니 참 반갑구나. 너의 청아한 옛 소리앞엔 세상의 功名心(공명심) 이 꿈처럼 사라진다.
너야말로 내 시름 풀어주는 유일한 벗이구나.
하고 심정을 읆은 것이다.
필자는 녹우당 유물관을 둘러보고 고금영 노래를 오월의 장미꽃 바람에 실어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아쉽지만 버스에 몸을 실었다.
우리일행은 다음날(22일) 지리산
둘레길 "운봉 - 주천" 코스, 를 걷기위해
남원시 산내면 대정리 매동마을을 찾았다.
이마을을 찾았을때는 저녁 9시였던것
같았다.
안내를 맡은 이마을 사무장의 간단한 인사소개를 받고, 부페식 산채나물과
돼지고기에 막걸리를 곁들인 저녁식사는 꿀맛같았다.
저녁식사가 끝나자 마을
이장으로부터 약10 여분간 마을 소개를 듣고,
농촌생활 체험을 위해 민박에 들어갔다.
소개받은 민박집은 정말로 우리 6-70년대
농촌 주택과 같았으나 집주인은
나그네를 위해 따뜻한 방을 준비했기 때문에 잠자리는 정말로 좋았었다.
이른 새벽
기행지라 그런지 일찍 기상할수 있어, 매동마을 아침공기를 마시며 잠시 걷기운동을 했다.
마을로 들어서는 입구에는 둘레길을 걷기위해 찾은
승용차랑이 즐비하고, 아까시아꽃이 하얗게 피어있어 우리를 반기고 소나무가 송화가루를 날리며, 옛 님을 반기듯 마을 안은 여느 농촌처럼 조용하고,
논밭에는 하얀 두루미가 날개짓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을 안길에는 고추, 감자,
벼, 밭작물이 무럭무럭 자라고있어 인정이 넘치는 마을 같았다.
이마을은 400미터 고지대에 위치해 57가구에 123명이 거주하는
마을인데, 여느 농촌처럼
노인분들이 대부분인것 같았다.
그리고 마을 유래는 한 선승이 푸른소나무와 대나무가
능선따라 둘러쌓여있어
마치 아름다운 배화꽃잎 같다하여 매동마을이라 부르고 있었다.
필자는 아까시아꽃이
마치 어릴적 우리마을에 있던 풍경처럼 느껴져
유년에 느껴 보았던 감상에 젖어들어 " 아까시아꽃 필때까지" 詩文을 띄워
본다.
아까시아꽃이 필때 까지/ 나는 오월을 위해 몸부림 친다/
사월에 핀 꽃보다/ 못하지는 않는가 봐//
매동마을에 매화꽃잎 / 눈이 부시어 찾을
수 없는데/
아까시아 꽃만이/ 옛 꽃향기 뿌리며/ 님 오기를 기다렸는가 보다//
나는 아까시아꽃
같이/ 깊은 色은 없지만/ 옛 추억을 잊지 않기위해/
비수같은 가시를 품고/ 아까시아꽃 필때까지/
내사랑
지키겠다오//
우리일행은 아침식사를 하고 출발지인 "운봉" 마을로 버스를 타고 출발했다.
매동마을에서 버스주차장으로
나오는데, 서울 분들이 서너명식, 둘레길 걷기 위해 나오고,
그리고 파란눈, 금발머리에 하얀 얼굴빛을 가진 프랑스 아가씨 두사람을 만났다.
몇마디 말을 건넸더니 둘레길 걷기와 지리산 관광을 위해 매동마을에서
숙박을 하고 나서는 길이라 했다.
그리고 한국의 농촌풍경이 서정적이고 너무나
정겨운느낌이 들어 한국에 살고 싶다 했다.
버스로 운봉마을에 도착 했을때는 빗방울이 뚝뚝떨어져 비옷과 우산을 쓰고 출발했다.
빗속이라 몸은 무거운듯 했으나 정신만은 새(鳥)처럼 하늘을 비행하는 기분이었다.
지리산 자락의시시각각 변하는 雲霧(운무)와 잘
정돈 된 농경지와 수려한 山野(산야),
어느하나 빼놓을 수 없는 아름다운 백두대간이었다. 얼마쯤 걸었을까 ,
우리일행은
노치마을 정자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매동마을 사무장이 준비해온
간단한 김밥과 된장국으로 빗물을 말아먹는 맛은 정말로 맛중에 맛이 천하 일품이었다.
그곳에서 마을 노인회장으로 부터 마을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마을 이름은 "길재"라 하는데, 이는 높은 곳에 갈대로 덮인 것에서 유래 하였다 했다.
그리고 우리는 예정된 둘레길을 출발했다.
논밭길따라 전신주가 서있어, 가뭄시 양수기로 전기를 공급하는 장치였다.
그리고
밭길따라 하얀비옷, 검은우산, 빨간우산을 쓴 서울 양반들도
두.서넷 팀(10 - 20명)을 이루어 지나갔다.
걷는 다는것, 현대문명으로 인한
병을 이겨내는 훌륭한 건강비법일 것이다,
아마도 서울양반들은 이곳의 추억을 15일에서 한달은 소주잔에 곁들여
이웃과 친구간에 말(言)의 자료로 삼을 것이다.
어떠튼 우리일행은 운봉에서 주천간
한명의 낙오자없이 10여키로 둘레길을 완주했다.
아마도 필자 만이 못한것 같다. 2일차 문화기행은 빗속에서 화엄사 기행으로 끝을
맺었다.
2일차 숙소는 구례 지리산 가족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필자는 강부언 화백과 알듯 모를듯한 세분이서 같이 한 방을
이루었다.
부정숙 이사님이 준비해온 안주와 소주잔에 이야기를 곁들여 이야기꽃을 피우다보니
자정이되여 잠자리에 들었다. 23일(3일차),아침식사는 호텔 부페식 식사로
했다.
식사가 끝나고 호텔 밖에서 바라본 지리산의 풍광은 운무속에 시시각각 변하여
정말로 한폭의 병풍같은 그림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래서 강화백은 작품소재을 위해
카메라에 풍광담기에 바빴고, 필자는
그냥 있고 싶지 않아 "노고단 산장에서" 詩文을 올려본다.
노고단에 雲霧/
마녀처럼/ 네를 얼싸 안고/ 내 것 인냥/ 여기저기 더듬고 있다//
목석같은 노고단/ 바위처럼 굳어 있는지/ 오월의 단비를
뿌린다//
비를 맞고 달려온, 나는/ 지리산 가족호텔에서/ 마녀를 떨처내고/
술잔을 비우며/ 딱 하루밤 동침했다//
그 길로 담양 창평 삼지천마을 옛
담장길 기행에 나섰다.
그곳에 도착하자 창평안내를 맏은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면서 걷는길은
옛 담장길인 돌과 흙으로 쌓고, 기와로 담장위를 덮고 있었다.
간간이 "S"자형으로
굽어진 마을 안길은 고가들과 잘 조화를 이루어
고즈넉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다소 아쉽다면,
옛 건물 마당과 옆건물로 이어진
고샅길에는 잡초가 우거지고
군데군데 사그라지는 옛집은 다소 전통마을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 같기도 했다.
어떠튼
전통보존과 옛 정서를 살리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이곳을 뒤로하고 식영정을 기행하고 가사문학관으로 이동했다.
소재지는 담양군 남면 지곡리 319번지다.
송강 정철은 이곳 식영정과 환벽당, 송강정등 성산 일대의 수려한 자연경관을
벗하며
"성산별곡" 을 창작했다.
그리고 고향은 전남 평창이다. 정철은
歌辭文學(가사문학)의 대가이다.
(가사: 고려 말기부터 나타난 3.4조또는 4.4의 韻文으로된 긴 詩歌형식)
그래서 歌辭와 더불어 人生을 산, 정철의 詩를 올려본다.
ㅇ. 관동별곡
일부분을 소개한다.
江湖에 炳이 깊다/ 竹林에 누웠더니/ 關東八百里에/ 方面을 맞디시니/ 어와 聖恩이야/ 가디록
罔極하다.
* 해설: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 고칠 수 없는 병 처럼 은서지에 지내고 있었더니, 아 임금님의 은혜 말로 갈 수록
그지없다.
ㅇ.속미인곡
저가는 저각시/ 본듯도 한저이고/ 天上 白玉京을/ 어디하야 離別하고/ 해마다
저믄날에/ 눌을 보라/ 가시는고.
* 해설: 두여자를 등장시켜 대화체로 구성하였다. 주로 그중 한여자의 노래가 중심 테에마를 이끌어
가고 있다.
ㅇ. 사미인곡
이몸 삼기실제/ 님을 조차 삼기시니/ 한생緣分(연분)이며/ 하날모를 일이런가/ 나하나
점어 있고/ 님하나 날괴시니/
이 마음 이사랑/ 견졸대 노여없다/ 平生에 願(원)하요대/ 한대네자 하였더니/ 늙거야/ 무사일로/
외오두고 그리는괴.
* 해설 : 천상에 한 선녀가 부부의 연분을 맺고 지내다가 어떤 서슬에 임을 이별하고 下界에 내려와서
천상계에 계절이
바뀌고 풍물이 변함에 따라 더욱 맺혀진는 마음을 춘하추동 사계절에 따라 노래하고 있다.
어떠튼
정철은 담양의 질퍽한 평야와 아름다운 경관은 풍요로운 창작으로 우리말로
가사와 시조를 썼다는 의미도 담고 있어 천재적인 인물이 아닌가 한다.
다음은
소쇄원으로 이동했다.
소쇄원은 문학뿐만아니라 조경,건축등 한국의 멋을 살려 자연과조화을 이루어 남도지역의
대표적 문화관광지였다. 이는 조선조중기 梁山甫(1503-1557)가 조성한 대표적인 민간 별서정이었다.
들어가는 입구에는 제주양씨임을
나타내는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양산보는 스승인 조광조가 기묘사화(1519)로 능주로 유배되고 賜死(사사)되자
세속의 뜻을 버리고 고향인 창암촌에 정착하였다.
소쇄원은 제월당, 광풍각등 빼어난
운치을 일으키지만 돌담과 계곡을 타고
흐르는 풍광이 저절로 감탄을 자아 나는 곳이었다.
이렇기 때문에 조선조의 정치가
문인 들이 많이 찾았던 곳이었다.
이외에 명옥헌 환벽당, 취가정. 나주향교를 두루 기행했으나 지면관계상 생략한다.
우리제주문화포럼
회원및 도민일부가 참여한 남도문화기행은
광주공항에서 운전기사와 아쉬운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그리고 한승훈 부회장의
남도기행동안 유익했던 견문과 식견으로 보다 나은 제주 문화생활에 기여 할것을 다짐하면서 일상으로 돌아가 직장과 가정에서 열심히 일할 것 을
다짐하면서 아쉬운 情을 나누며 귀가길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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