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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감(1)
ㄱ. 끝나고 시작함
야곱은 벧엘로 돌아와서 그 곳을 엘 벧엘이라 불렀다(창35:7). 자기 집을 세우려다 실패한 야곱이 돌아온 곳은 자기 집이 아닌 하나님의 집이었던 것이다.
인생은 이것 저것을 찾는다. 일생 자기 집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이 사람이다. 미국 사람들은 집을 살 때 밑돈만 조금 주면 삼십 년간 할부로 갚는다. 직장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평생 집 값을 갚아야 한다. 월급을 많이 받아도 한 달에 최소한 천 불 이상이 집값을 갚는데 들어가기 때문에 보통 사람은 일생 벌어서 집 한 채 남는 셈이다. 그러면 노령연금은 정부에서 주니까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인생은 알고 보면 자기 집을 만드는 것이다.
누에는 뽕잎을 먹고 자기 집을 만든다. 그것이 누에고치다. 그 안에서 겨울을 나고 봄에 나비가 되어 나와서 살다가 다시 알을 까면 그 알은 또 자기 집을 짓는다. 일생 동안 자기 집을 짓고 그 다음에 터져 나와서 다시 나비가 된다. 일생 동안 자기 집 짓는 일을 하는 것이다. 인생이 그러하다.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많이 하는데 결국은 자기 안식처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야곱은 아람에서 이십 년 동안 살면서 ‘나는 언제 내 집을 가질꼬? 왜 나는 남의 일만 하고 내 집은 없는가?’ 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기 집을 찾아서 돌아온 것이다. 아무리 해도 아람에서는 자기 집이 안되겠으니까 집을 찾아야겠다고 할 때 하나님께서 벧엘로 돌아가라 하셨다. 그래서 와 보니 그곳이 엘 벧엘이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다.
하나님의 집은 궁극적으로 사람의 집이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지으신 다음에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셨다.
알고 보면 동산이 사람이 살아야 할 곳이다. 그곳은 하나님과 함께 살아야 할 곳이다. 남자는 여자를 만나고 여자는 남자를 만나서 집을 만든다. 그것이 결혼이다. 결국 인생은 자기 집을 만드는 것이다. 야곱은 자기 집을 만들려고 했는데 와 보니 하나님의 집이었다. 그러니 제대로 온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마지막에 그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고 하신 것은 세상에는 우리가 거할 곳이 없다는 뜻이다.
아담은 동산을 잃고 난 후에 바벨로 갔다. 성을 쌓고 흩어짐을 면하자고 하였다. 그것은 집을 만들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사람이 만든 집은 결국은 흩어지고 만다. 사람은 어차피 하나님의 집에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집은 혼자 있을 수 없는 곳이다. 사람과 동거하기 위해서 만든 집이기 때문에 꼭 사람이 있어야 한다.
남자가 아무리 좋은 집을 가지고 있어도 무엇을 하겠는가. 결혼을 해서 아내가 들어와야 되지 않겠는가. 인생이 꼭 그와 같다.
야곱은 하나님의 집에 왔다. 올 곳에 온 것이다. 모든 일이 끝이 나고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왔다. 이 집으로 오기까지 야곱이 그동안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이 끝났다. 그리고 남아야 할 것들만 남았다.
어머니의 유모 드보라가 죽었다. 할머니 같은 분이니까 객지 생활에서 그에게 유일한 위로였을 것이다. 그리고 14년을 머슴 살고 얻은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죽었다. 아내가 네 명이었지만 야곱은 오직 라헬밖에 사랑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버지 이삭이 죽었으며, 늘 귀찮았던 형 에서도 멀리 떠나갔다(창35장~36:8 참조). 다 정리가 된 것이다.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려면 다른 것이 다 정리되어야 한다. 시집을 가려면 주변정리가 다 돼야 하지 그냥 그대로 늘어놓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시집을 갈 때는 끝낼 것은 다 끝내고 가야 한다. 그리고 꼭 있어야 할 것만 가지고 가야 한다.
그런데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들렸다. 유일한 소망이었던 요셉이 짐승에 찢겨 죽었다며 아들들이 피 묻은 요셉의 옷을 가져왔던 것이다. 아들들이 거짓말을 한 것인데 거기서 야곱의 마지막 소망마저 다 끊어지고 말았다. 그래도 요셉이 그의 소망이었는데 그것마저 끊어지고 만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다 끝이 나지 않았던가? 기근이 들어 양식을 구하러 갔던 아들들이 양식은 구해 왔으나 양식을 준 사람이 다음에는 베냐민을 데리고 오라 했다고 한 것이다. 형제가 몇이냐고 물어서 열두 명이라고 했더니 다음에는 막내를 데리고 오지 않으면 양식을 주지 않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기근이 더 심해져서 다시 양식을 구하러 가지 않을 수 없게 되자 베냐민을 보내야 했다. 야곱은 요셉도 잃었는데 베냐민까지 잃을 수 없다며 절대로 못한다며 버텼지만 기근이 더 심해지자 칠십 인이나 되는 가족이 다 굶어죽게 되었으니 어찌하겠는가. 그래서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하고 어쩔 수 없이 베냐민을 딸려 보냈다. 그러고 나서 이제는 살 낙마저도 끊어졌다고 했다. 요셉은 죽었고 베냐민까지 어찌될지 모르니까 인생의 모든 낙이 다 끊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아들들이 다시 돌아올 때는 요셉이 살아있다는 소식과 함께 그가 아버지를 모시고 오라고 보낸 왕궁의 수레가 함께 도착했던 것이다. 그것을 보고 야곱은 그때야 요셉이 죽지 않고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애굽에 가고 싶었다. 죽은 줄 알았던 아들이 애굽에서 총리가 되었다니 얼마나 충동이 일었겠는가. 하지만 그날 밤에 야곱은 여호와께 단을 쌓았다. 왜 단을 쌓았을까? 그 전 같았으면 그냥 갔을 텐데 무슨 마음이 생겼는지 야곱은 단을 쌓았다.
이것을 나는 야곱이 애굽으로 가야 되는지 여호와께 물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애굽으로 내려가는 길은 또 하나님의 집을 떠나는 일이다. 엘 벧엘로 왔는데 또 다시 애굽으로 내려가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혹시나 그것이 자기 뜻이 안되겠나 싶어서 제단을 쌓고 기도했다고 생각한다. 집을 떠난 경험이 있고 다시 벧엘로 돌아온 경험이 있어서 집을 떠나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알고 있었다.
아담도 자기가 에덴동산을 떠난 것이 무엇인지 알았으면 반드시 돌아오고 싶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한번 돌아오면 다시는 나가지 않으려고 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동산을 떠난 아담이 어떤 일로 다시 돌아온다면, 복음을 듣고 다시 돌아온다면 그 복음은 무엇이겠는가? ‘하나님께서 기다리고 있다.’ 그 소리를 듣고 다시 돌아온다면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겠는가.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하였다(요1:11-12). 복음은 “아버지께서 아버지 집에서 기다리고 있다. 에덴동산에서 아버지가 아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니 그리 가자.”라고 전하는 것이다. 세상은 어차피 자기 집이 아니니까 빨리 온 사람은 복이고 무슨 이유론가 문청거리는 사람은 그만큼 화를 당한다.
집을 나갔던 둘째 아들은 돌아갈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자기 죄가 너무 크기 때문에 차마 돌아가지 못했다. 그래서 기독교는 사람들이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오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아버지께 지은 죄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고 있다. 그러나 아버지께 지은 죄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 무조건 죄만 회개하라고 하지 집을 나온 죄가 무엇인지 모른다.
사람은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하는데 그곳을 떠났다. 내가 늘 하는 말대로 사람의 위치를 떠난 것이다. 사람이 자기 위치를 떠난 것이 자기 집을 떠난 것이다.
직장에서도 위치가 없으면 직장에서 떠난 것이다. 회사에서 그 사람을 내보내려고 하면 나가라 소리는 못하고 책상을 없앤다고 한다. 그러면 어느 날 출근해 보니 책상이 없어졌다. 직책이 없어진 것이다. 아무 일도 주지 않는다. 위치가 없어졌으니까 나가라는 말이다. 옛날에 박기민 형제가 출근해 보니 책상이 없어졌다고 한다. 그만두라는 것인데 막상 그만두려니 갈 데가 없어서 그런 사람들끼리 옥상에 모여서 담배만 피우고 있었다는 것이다. 보통 견디기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집에서 나올 때는 양복 입고 출근한다고 했는데 회사에 오면 자기 일이 없다. 바로 그것이 동산을 잃어버린 인생이다.
동산을 나오니까 사람의 일이 없다. 그래서 다른 일을 하는 것이다. 일할 때는 일 때문에 모르고 산다. 그런데 일이 끝나고 나면 허무해진다. 황당해져서 ‘나는 무엇인가. 내 인생은 무엇인가?’ 하게 되는 것이다. 정년까지는 잘 지냈는데 정년퇴직하고 나면 허무해진다. 교장선생님들이 그렇다고 한다. 그분들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다 마찬가지다. 돈이나 많이 모아 놓았으면 모르지만 월급 받아서 얼마나 모았겠는가.
한번 집을 나가 보면, 집과 같은 직장을 떠나 보면 사람은 황당해진다. 그래서 요즘에는 노인 일자리라는 것이 생겼다. 정년퇴직한 사람들은 아무 일이든 하려고 한다. 젊어서 직장생활을 했으니까 일이 좋고 나쁜 것에 연연하지 않는다. 시키면 무엇이든지 성실하게 잘한다. 젊은 사람들은 갈 곳이 많으니까 얼핏하면 대들거나 데모를 하지만 노인들은 퇴직하고 갈 데가 없으니까 일을 시켜 주는 것이 고마워서 용돈밖에 안되는 돈을 받으면서도 일을 한다는 보람이 있기 때문에 열심히 일한다. 한번 직장을 떠나 본 사람의 심정이 그렇다. 에덴동산을 떠난 인간의 모습이 바로 그 모습이다.
한번 나갔다 돌아온 사람은 다시는 유혹을 받지 않을 것이다. 누가 와서 유혹하면서 다른 직장으로 옮기라 해도 듣지 않을 것이다. 아무나 노인들을 써 주겠는가. 그런 자기를 알고 있으니까 있는 자리에서 만족하고 행복한 것이다. ‘나는 이것도 만족하네. 일할 자리가 없는데 일을 시켜 주니 얼마나 고마운가.’ 이렇게 생각한다. 하나님의 동산을 떠났던 아담이 다시 돌아온다면 절대적으로 자기 마음대로 또 나가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이 동산을 나가게 되었는데 하나님께서 왜 잡지 않으셨는가? 하나님은 “한번 나갔다 오너라. 나가 봐라. 그리고 다시 돌아와라. 그러면 전과 다를 것이다.”라고 하셨을 것이다. 전에는 멋모르고 있었으니까 하나님같이 된다는 말을 듣고 나갔지만 나가서 해 보면 하나님같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지 않겠는가. 한번 하나님같이 안된다는 것을 안 사람이 또 하겠는가. 증권은 안돼도 또 하지만 사람이 안되는데 또 하겠는가.
이 세상은 하나님 백성의 교육장이라고 할 수 있다. 공부하는 곳이다. 이것은 도 닦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고향으로, 영원히 살 곳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구속의 주 예수께서는 자신의 소원은 아니지만 십자가의 잔을 거부하지는 않았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요18:11 참조). 베드로는 “주님께 결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일은 없습니다. 우리가 있지 않습니까.”라고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셨다. 이것이 사람의 길이다.
일단 동산을 빠져 나왔으면 그 사람에게 정해진 길은 세상이다. 그 길은 당연히 그렇게 갈 수밖에 없는 길이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동산 안에 있는 일이 아니다. 동산밖에 나왔기 때문에 아들이 자기 땅에 왔지만 영접하는 자가 없었던 것이다.
세상은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다. 선악과를 먹은 사람들이 나가서 만들어 놓은 것이 세상이다. 나쁘게 말하면 사탄이 만들어 놓은 것이고 좋게 말하면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 사람들은 누군가? 하나님같이 되려는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아들이 오면 그들은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를 성경에서는 여러 가지로 비유해 놓았다.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농부들에게 맡기고 외국에 갔다가 추수 때가 되어 열매를 받으려고 종들을 보냈는데 농부들은 때리고 욕하고 보냈다. 두 번째로 종들을 보내니까 또 능욕하고 보냈다. 마지막으로 자기 아들을 보내며 ‘그들이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했더니 “야, 저것은 상속자다. 저놈만 죽이면 포도원이 다 우리 것이 된다.” 하고 죽였다. 이렇게 비유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자기 땅에 왔지만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래서 건축자들이 버린 돌로 집 모퉁이의 요긴한 돌을 삼았다고 한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나온 말이다.
예수께서는 왜 십자가를 지셨는가? 왜 안져도 될 것을 지셨는가? 그것은 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하면서까지 지셨다. 세상에서 사람을 구속하기 위해서는, 다시는 변하지 않을 사람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는 그 길밖에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서는 바로 아버지께로 갈 길이 없다.
우리는 세상에 떨어져 있는 한 동산에서처럼 그냥 있으면 안된다. 동산에서는 내가 생각지도 않았는데 나를 만드신 분이 나를 동산에 두셨다. 지으신 사람을 동산에 두셨다고 되어 있지 내가 동산에 들어갔다는 말이 없다. 그렇지만 이제는 내가 동산에 들어가야 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지성소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제단을 통과해야 하는 원리와 같다.
왜 하나님께 가는 것이 문제가 되는가, 왜 쉽지 않은가? 이유가 바로 거기 있다. 집을 나왔기 때문에, 세상에서 그리 가야 하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완전히 갈 길이 없어졌을 때 가기 쉬운 이유가 이것 때문이다. 일부러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신 것이 아니다. 사람은 자기 길이 없어야만 그리 가기 쉽다. 낙이 없고 길이 없으니까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가는 것이다.
나도 내가 원하는 대로 잘 나갔으면 부름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별로 문제가 없는 사람이다. 어지간하면 사는 사람이지 그렇게 고통하고 하는 성질이 못된다. 조금만 형편이 나았어도 나는 망설이고 안나왔을 것이나 나는 아예 망설일 것이 없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다. 아예 망설일 것도 없는 사람이 되게 하셨다. 그러니까 그냥 손들고 나왔다. 일단 나가야 하기 때문에 어딘지도 모르고 나왔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이 다 그럴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다 살만 하니까 나가지 않으려고 한다. 이번에 어떤 젊은이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이야기를 해 보니 조금 듣더니 대번에 하는 말이 “지금 전 세계가 이렇게 큰 물결을 타고 가는데 우리만 이렇게 한다고 되겠습니까?”라고 묻는 것이었다. 그 젊은이는 갈 곳이 많으니까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갈 곳이 없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면 “예, 나는 가겠습니다.”라고 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가난한 자의 것이라고 한 것이다. 일부러 가난한 자를 찾으시겠는가.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라는 말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다 경험에서 나온 말이다.
어쩔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예수께서는 이 짐을 지셔야 했다. 구속을 위해서, 아버지께로 다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분 자신이 아버지께로 돌아가기 위해서 이 길을 가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인간을 그 귀한 위치에서 하락시키려는 사탄의 계략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어린양의 신부가 준비 될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계21:1~).
사람은 하나님을 대신할 자로, 상속자로 지어졌다. 그래서 천사가 시기했던 것이다. 자기들이 하나님을 대신하고 있다가 사람이라는 존재가 나와서 하나님을 대신하니까 일을 빼앗긴 그들은 사람을 시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왜 천사가 하던 일을 사람에게 주셨는가?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져서 하나님이 없으면 안되는 존재다. 그러나 천사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없어도 잘 산다. 그래서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왜 우주의 구조가 이렇게 되었는지 이제 아셨을 것이다.
천사는 하나님과 방불해서 하나님이 없어도 잘산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이 없으면 못살게 되어 있다. 하나님은 자기와 영원히 살 자로서 사람을 지으신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께 귀중한 것이 누구이겠는가? 하나님과 방불한 천사가 필요하겠는가, 하나님이 없으면 안되는 인간이 필요하겠는가? 하나님은 인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천사에게 속은 사람들은 하나님과 비슷해져야 하나님과 같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형상’에 대한 해석을 전혀 다르게 한다. 사람들은 형상을 하나님과 비슷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래서 항상 ‘조금만 더 하면, 한 가지만 더 있으면, 죽지만 않는다면, 조금만 더 노력하면 뭔가 되겠지.’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종교생활을 해 본 사람은 기도를 해 보면 조금만 더 하면 뭔가 될 것 같다. 봉사를 해 본 사람은 조금만 더하면 하나님께로 갈 것 같다. 무엇이든지 조금만 더하면 될 것 같다. 그러나 항상 그 ‘조금만 더’가 안된다. 여기서 사람이 속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이 자기의 위치를 알고 자기의 본분을 안다면 무엇이 되고 안되고 할 것 없다. 하나님이 쓰실 텐데, 하나님이 쓰시면 그만이지 내가 원하는 대로 이렇게 쓰고 저렇게 쓰시겠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해도 만족이 안되는 것은 ‘조금만 더하면 될 텐데’라는 생각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같이 될 것이라는 말에 속았다. “내가 언제 속았느냐?”고 하겠지만 ‘조금만 더하면 될 텐데’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독재자는 조금만 더 하면 자기 마음대로 다 할 것 같아서 독재를 계속 더 하는 것이다. 독재자가 민주적인 지도자가 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독재를 하기 시작하면 점점 더 독재를 하려고 한다.
군대에서 조교가 입으로 “앉아. 서.” 하려면 힘드니까 손가락을 까딱까딱하면서 “앉아. 서. 좌로 굴러. 우로 굴러.” 하고 명령한다. 훈련병들은 조교의 손가락을 보고 앉았다 섰다 해야 한다. 사람은 무엇이든지 더 쉽고 더 완전하게 하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같이 된다는 말에 속은 것이다. ‘조금만 더하면 나도 하나님같이 될 텐데, 조금만 더하면 천사같이 될 텐데…….’ 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왜 이 잔을 받으셔야 했는가? 원해서 받은 것이 아니라 길이 이렇기 때문에 받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배멀미를 하는 사람은 배를 타기가 괴롭다. 그래도 바다를 건너려면 어쩔 수 없이 배를 타야 한다. 옛날에 우리 살던 데서 목포에 가서 물건을 사와야 했는데 아침 9시에 배를 타면 저녁 5시나 6시까지 하루 종일 배를 타야 했다. 나는 멀미를 했기 때문에 파도가 잔잔해도 기분은 좋지 않았다. 어쩌다 바람이 부는 날 잘못 걸리면 죽을 지경이었다. 토하고 해도 바다를 건너려면 어쩔 수 없이 배를 타야 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이 그렇기 때문에, 넘어가야 할 것이 세상이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셔야만 했던 것이다. 인간을 그 중요한 위치에서 하락시키려고 사탄은 계속 계획을 하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천사를 의지하려고 하고 천사같이 되려고 한다.
이 계략이 언제 끝날 것인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어린양의 신부가 준비될 때까지 사탄은 멈추지 않고 계속 할 것이다. 계시록에 그렇게 되어 있다. 예수님에게는 졌지만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 그분으로 인해서 구속을 받은 사람들이 완전히 승리할 때까지 계속 유혹할 것이다.
사탄이 어떤 존재냐 하면 무저갱에 갇혔다가도 다시 기어 올라오는 자다(계20:1). 무저갱은 밑 없는 구멍이라는 뜻이다. 거기 가둬놓고 천 년 동안 인봉해 놓아도 천 년 후에 다시 나온다. 밑 터진 구멍에 넣어놓아도 천 년이 되면 또 다시 기어오를 수 있는 존재다. 사탄을 무저갱에 가둬 놓고 인봉한 다음에는 땅에는 유혹자가 없으니까 천년왕국이 된다. 그래도 이놈은 꾸준히 천년 동안 기어올라서 위에까지 올라온다.
그러나 어린양의 신부가 남편을 위해 아름답게 단장되어 하늘에서 내려올 때(계21:1~), 주님의 구속-연합이 단체적으로 나타날 때 그를 위해 예비 된 영원한 유황불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계20:3).
언제 신부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때인가, 어떻게 준비되는 것이 참으로 준비되는 것인가? 주님의 구속이 한 사람에게만 아니라 연합적이고 단체적으로 나타날 때가 성경이 말하는 어린양의 신부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때다. 그래서 남편을 위해 단장한 것 같다고 하였다.
교회가 아름답게 신부로 단장될 때까지 사탄의 계략은 계속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 안에서 한편으로는 사탄의 계략과 싸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구속을 누리는 것이다. 우리가 구속을 완전하게 누려야 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어설프게 누리면 사탄의 계략에 늘 빠지니까 확실하게 예수 안에서 구속을 누려야 한다. ‘아! 이것이 사람이구나. 여기서 우리는 한치도 벗어날 수 없구나. 예수님 같은 분도 사람이기 때문에 죽는구나. 사람은 여기가 한계구나.’ 이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이것을 모르면 헛것이 되고 만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이것을 확실히 모르기 때문에 아무리 노력해도 안되는 것이다. 기도하고 회개하고 말씀을 듣고 공부하고, 아무리 해도 끝이 안보인다. 그런데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확실해지면 끝이 보인다.
왜 우리는 이 복음을 전해야 되고 계속 말해야 되는가? 이 세계를 굳혀야 되고 확고하게 해야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확고해져야 하고 복음을 전하면서 확고해져야 한다. 우리가 서로 연합해서 한 교회 안에서 단체적인 연합체가 될 때까지 계속해서 우리는 이 복음을 전해야 한다.
교회생활을 왜 하는가? 하나님 말씀을 듣고 스카이프로 들으면 되는데 교회생활이 왜 필요한가? 나 혼자 사는 세계가 아니다. 나 혼자는 세상을 이길 수 없다. 연합이 돼야만 세상을 이길 수 있다. 사탄도 자기의 세계가 흩어지지 않기 위해서 바벨에 모여서 뭐라고 했는가? “우리가 흩어짐을 면하자.”고 하지 않았는가.
혼자는 힘이 없다. 단체라야 힘이 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나 혼자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연합체가 돼야 세상을 이길 수 있다. 그 젊은이가 하는 말이 그것이다. 세상은 이렇게 큰 연합체인데 지구 한 귀퉁이에서 우리가 몇 명이 앉아서 한다고 되겠느냐는 것이다. 결국 마지막은 단체 대 단체의 대결이다. 사회 대 사회, 나라 대 나라의 대결이다. 가톨릭은 하나의 왕국이다. 비록 사람으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모양은 왕국이다. 개인으로는 안되기 때문에 왕국의 모양을 만든 것이다.
나 혼자 마음 편하게 산다고 인생이 다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한 사회를 완성해야 한다. 우리는 교회가 있으니까 이렇게 교통이 되고, 교통이 되니까 힘이 생기고, 힘이 생기니까 세상을 대항할 수 있는 것이지 나 혼자 있으면 세상을 이길 수 없다.
단체적으로 나타날 때 세상을 이길 수 있다. 어린양의 신부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데 신부가 남편을 위해 단장한 것 같다고 하였다(계21:2) 이는 주님의 구속으로 인해서 연합한 한 몸이 완성되어서 단체적으로 나타난다는 뜻이다. 그때 사탄은 그를 위해서 예비된 유황불 못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우리는 아람에 갔다가 돌아온 사람들이다. 아무리 해도 내 것이 안되는, 아무리 해도 내 집이 세워지지 않는 그 세계에 살다가 돌아온 것이다. 거기서는 아무리 살아 보아도 내 집이 안된다. 라반은 품삯을 열 번이나 변개했다. 세력이 없으면 아무리 재주를 부리고 잘 해도 안되는 것이다.
야곱은 성실했다. 부지런했고 재주도 있었다. 그러나 다 잘해도 자기 것이 되지 않았다. 노름판이 그런 곳이다. 한판 돌 때마다 판돈을 뗀다. 판돈을 모아서 그 돈으로 잘 먹으면서 노름을 한다. 닭 한 마리에 만원이면 거기서는 십만 원을 받는다. 거기서 한두 달 있다 나오면 돈을 딴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 판돈으로 나가 버린다. 노름판을 만든 사람이 돈을 다 긁어가는 것이다.
증권회사도 똑같다. 증권회사는 주가가 오르든 내리든 문제가 안된다. 오히려 자주 오르고 내릴수록 더 좋다. 그럴수록 팔고 사는 것이 늘기 때문에 수수료가 많아진다. 증권을 하는 사람은 망해도 증권회사는 절대로 안망한다. 돈은 결국 증권회사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 육성을 위해서 내자 동원을 하기 위한 방법이다. 놀고 있는 돈을 기업에서 이자 없이 활용할 수 있도록 해 준 것이다. 그러니까 증권을 해서 돈을 딸 생각을 하면 안된다. 열 번을 땄어도 한 번 잃으면 그만이다. 아무리 잘해도 안된다. 구조가 그런데 거기서 무슨 수로 돈을 따겠는가.
어떤 사람이 파친코를 하다 보니까 잘하면 돈을 벌 것 같아서 매일 연습을 했다고 한다. 감각을 익혀서 어떻게 당기면 돈이 쏟아져 나오는지 알게 되었다. 그런데 한 번 돈이 쏟아져 나오니까 누가 옆에 오더니 “손님, 우리도 먹고 살아야 하니 좀 삼가해 주세요.”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그 동안 투자한 것은 아무 소용없이 빈 손으로 나와야 한다. 거기서 만일 계속 했다가는 맞아죽는다. 그곳은 고객들에게 재미 보고 돈을 내놓으라는 곳이지 돈을 따 가라는 데가 아니다.
이 원리를 알면 그런 데서 돈 벌 생각을 하면 안된다. 이것을 모르고 재주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면 망한다. 나보다 훨씬 재주 있는 사람이 만들어 놓은 것인데 무슨 수로 이기겠는가. 사탄의 계략은 사람의 생각보다 훨씬 높다. 하나님 말씀이 없으면 거기 말려 들어갈 수밖에 없다. 구속을 경험하지 않으며 인생의 위치를 모르기 때문에 덤벙대다가 망한다.
야곱은 엘벧엘로 돌아왔다. 그런데 애굽으로 내려가야 될 사명이 주어졌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정리되고 구속의 주님만 남아야 된다. 그래야 애굽이라는 세상에 내려갈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에 나가서 번번히 실패한다. 전에도 그냥 아람에 내려갔다가 아무리 노력해도 자기 것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열심히 했는데도 자기 것이 되지 않았다. 그가 쓴 방법을 보면 기발한 것이 많다. 양떼를 아무리 불려 놓아도 자기 것이 되지 않으니까 라반과 협상을 해서 얼룩무늬 진 것은 자기 것으로 하고 희거나 검은 것은 라반의 소유로 하기로 정했다. 얼룩무늬 진 양이나 염소가 잘 나오지 않으니까 라반도 그렇게 하기로 했던 것이다. 야곱이 꿈에 보니 수놈이 다 얼룩무늬여서 그런 제안을 했는데 꿈에서 본대로 야곱의 양떼는 많아졌고 라반의 양떼는 줄어들었다. 그렇게 되니 라반의 안색이 변했다. ‘저놈이 내 것을 다 가져가는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도망치게 된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좋게 해 주면 누가 싫다고 하겠는가. 그런데 우리가 세력이 커지면 그냥 두지 않는다. 자기들이 위험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처음에는 애굽에서 대우를 받았다. 그런데 인구가 점점 늘어나자 애굽 사람들이 위협을 느꼈다. 그래서 핍박하게 된 것이다. 자기 집 같으면 잘 될수록 좋은데 남의 땅에 왔기 때문에 핍박을 받게 된 것이다.
예수님도 가만히 있을 때는 괜찮았지만 사람들이 따라다니자 소위 당국자들이 생각하기에 ‘안되겠다. 그냥 두면 다 저 사람에게 넘어가겠다.’ 하고 예수를 핍박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는 내가 있던 데서 아주 잘나갔다. 사람들이 놀랄만큼 잘나갔다. 그러니까 문제가 생겼던 것이지 내가 쉬쉬하고 있었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이다. ‘주의 손에 이끌려’에 대강 썼듯이 나는 거기서 놀랄만큼 잘나갔다. 그러니까 대번에 문제가 생겼다. 그래서 거기서 나오게 되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렇게 나를 밀어내 준 것이 나에게 복이 되었다. 밀어내지 않았으면 나는 거기서 못나올 사람이다. 밀어내니까 나왔는데 나오고 보니 하나님이 나를 밀어내셨다고 알아진다.
사람은 갈 곳이 따로 있다. 하나님이 택한 사람은 그 사람이 갈 곳이 따로 있다. 그 길에 서지 않으면 계속 어려움이 생긴다. 그런데 하나님이 정한 길로 가게 되면 그때는 순풍에 돛을 단 것처럼 가게 된다.
자기 길이 따로 있다. 배가 갈 길이 따로 있고 비행기가 갈 길이 따로 있듯이 아담이 갈 길이 따로 있고 그리스도가 갈 길이 따로 있다. 같은 길로 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길을 제대로 들어야 한다.
야곱은 택함을 받았다. 그러니까 다른 길로 가는 것이다. 그의 인간성을 보면 못된 면이 많지만 다른 길로 갔기 때문에 그 성격을 써 먹을 수 있었다. 인간적으로 볼 때는 아주 좋지 않은 성격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하나님 나라에서는 필요하니까 택했을 것 아닌가! 에서는 좋은 사람이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에는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택하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 우리는 모르지만 하나님의 택하심에는 후회함이 없다. 나는 내 일생을 통해서 이것을 경험했다. ‘아! 길이 다르구나.’라고 알았다. 내가 다른 길에 있을 때는 조금만 가면 걸림이 생겼다. 조금 잘되면 걸림이 생겼다. 그런데 제 길로 돌아서니까 그런 것이 없어져 버렸다. 내가 가야 될 길로 가니까 걸리는 일이 없어졌다.
길을 모르면 인생은 왜 그런지 모르게 고통을 당한다. ‘왜 내가 이렇게 되었는가? 나는 아무 잘못이 없는데 왜 이런가?’ 하게 된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까지도 어째서 갑자기 그런 일이 생겼는지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다. 그분은 절대로 나에게 그렇게 하실 분이 아닌데 그렇게 가혹하게 하신 것이 도저히 이해가 안된다. 너무 가혹하게 하셨기 때문에 “왜 이렇게 하셨습니까?”라고 이유를 물어볼 형편도 되지 않았다. 지금도 아무리 생각해도 무엇 때문에 그러셨는지 알 수 없다. 그분도 그 이후로 불행해져서 인생이 망했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 지금도 의문이다. 살아계시면 내가 꼭 이야기를 하겠는데 돌아가셔서 말도 못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11:29).” 이 말씀이 너무나 아멘이다. 나는 이해하지 못해도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 알고 보면 그분의 택하심이 잘된 일이고 복된 일이고 나를 위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