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성진 nava5@naver.com
대전출생, 서울대학교 졸업, 공학박사
한남대학교 창의융합대학장
한남대학교 연구소기업 ㈜ 베누펫 대표이사
시마을문학회 정회원
경북 김천시 도시계획위원회 심의위원
충북 옥천군 도시계획위원회 심의위원
충남 논산시 경관심의위원회 심의위원
서울특별시 시설관리공단 기술심의 위원
코레일 민간제안사업 평가위원 한국도로공사 기술자문위원회 심의위원
<수상 소감>
친애하는 격월간 에세이스트 여러분께 저의 글을 선정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제 글이 여러분의 소중한 공간에 실려 독자들과 만날 수 있게 해주셔서 큰 영광입니다. 부끄럽게만 생각했던 제 글이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기쁨을 느꼈습니다. 가끔 언론 매체에 글을 써오기는 했어도 즐거움으로 글을 작성하기보다는 하나의 의무감으로 원고 마감일에 쫓기면서 마무리하기가 다반사였습니다.
따라서 늘 글을 쓴다는 일이 고통스러운 일로 여겨지곤 하였는데, 여러분의 지원과 격려가 저에게 큰 자신감과 영감을 주었습니다. 제 글이 많은 이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랄 뿐만 아니라, 저 또한 계 속해서 창작에 힘을 실어주는 이 같은 기회에 감사함을 느끼면서 노력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저의 작품을 선정해주신 격월간 에세이스트 여러분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앞으로도 더 나은 글로 보답할 수 있 도록 더 경주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당선작>
참전용사의 귀환
TV 채널을 돌리는데 6·25전쟁 60주년 기념행사로 해외 참전용사들을 초청하여 각국의 참전비를 둘러보는 장면이 나왔다. 백발이 성성한 노병들이 대부분이고, 참전용사의 아들과 손자들인지 젊은이도 간간이 보였다.
한 노병은 당시 숨져간 전우를 위해 올리브나무를 준비해 고인의 비석 앞에 심어주며 눈물을 하염없이 흘린다. 어느 참전용사의 자녀는 생전의 부모님 결혼사진을 코팅 처리하여 묘비 밑 흙 속에 묻어주며 눈시울을 적신다. 또 다른 참전용사의 자녀는 모친이 70세를 넘기면서부터는 치매에 걸려 가족들을 알아보지 못하면서도 간혹 기억 이 돌아올 때면 한국에 묻혀있는 남편의 묘비 얘기를 하며 자기도 한국의 남편 곁에 묻어달라고 당부하곤 했단다. 가슴이 뭉클했다. 한 노병은 흐르는 눈물을 애써 감추며 ‘우리의 희생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며 대한민국의 발전을 놀라워한다.
1997년 7월 나는 독일의 한 대학 특강초청으로 독일에 간 적이 있다. 특강을 마치고 학생들에게 질문을 받는데 어떤 학생이 ‘젊어 보이는데 결혼은 언제 했느냐?’고 물었다. 아직 미혼이라고 하자 금발의 여학생이 거침없이 소리쳤다.
“How about me(나는 어때요)?”
강의실엔 폭소가 터졌다. 사적인 질문이 연이어지자 옆에 참석한 독일 교수가 강의 내용과 관련된 질문을 하라고 주의시켰다. 강의가 끝난 뒤 휴게실에서 잠시 쉬는데 한 남학생이 다가왔다. 그는 한국으로 유학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그냥 인사치레려니 하고 웃어넘겼 다. 그런데 이튿날 그가 자기의 포트폴리오를 들고 나를 다시 찾아 왔다. 본인의 아이디어로 특허도 출원한 것이 있다면서 시중에 제품으로 나와 있는 아이템도 보여주었다. 그때야 진실성이 있음을 알고 “독일은 한국보다는 훨씬 앞선 선진국인데 왜 하필 한국에 오려느냐”고 되물었다. 그는 동양권에 호기심이 많은데 일본은 너무 서구화된 느낌이고 중국은 아직 저개발국이라서 그렇고, 한국은 개발도상국 중 빠르게 발전하고 있으며 독일처럼 분단국가라서 뭔가 공통 점도 있을 것 같아 관심이 많다고 했다. 당시 독일은 통일이 되어 있었다. 분단국이라는 공통점이라는 그의 말에 나는 멈칫했다. 역시 한국은 6·25전쟁 이후 계속 분단된 나라로 이데올로기의 최전방 국가로서 유엔 참전국의 도움으로 기사회생하여 유엔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은 나라 정도로 인지하는 것 같았다. 그는 한국에서 공부하 게 된다면 양국의 공통점과 관련된 아이템을 중심으로 연구해보겠 다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독일에서의 공식 일정이 끝난 다음 유럽 몇 개국을 여행하기로 했 다. 배낭을 둘러메고 스위스의 인터라켄을 거쳐 벨기에를 지나 룩셈 부르크에 도착했다. 룩셈부르크는 신도시 지역과 옛 고성들이 남아 있는 구도심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다기에 구도심 지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 크지 않은 협곡을 따라 걸었는데 일부 벽돌이 허물어진 성벽들과 빛바랜 낡은 집들이 보였다. 두 시간을 걷고서야 조그마한 마을이 나타났다. 동네 입구에는 초등학교 운동장에서나 볼 수 있었던 천막들이 즐비하였다. 여러 가지 음식과 물건들을 팔고 있는 우리 나라 오일장 비슷한 광경의 장터였다. 비디오카메라로 촬영을 시작했다. 카메라 앵글에 한 노인이 들어왔다. 노인은 손을 흔들며 물었다.
“Your welcome, Are you Japanese? Or are you Chinese?”
“I'm from Korea.”
노인은 오, 코레아! 하며 어깨를 으쓱하더니 가까이 오라며 악수를 청했다. 한국전쟁 때 참전을 했었다면서 감격한 듯 나를 찬찬히 훑어보다가 내 비디오카메라를 가리키며 일본제냐고 물었다. 내가 ‘노! 메이드 인 코레아!’라고 말하자, 고개를 갸우뚱하며 비디오카메라를 달라해서 구석구석 살피더니 ‘메이드 인 코리아’라는 라벨을 보고서 야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전쟁 당시 한국의 이미지가 선입견으로 작용하여 그러는 게 틀림없었다.
TV 화면에는 “우리의 희생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를 연발하며 한국의 발전상에 감탄하는 노병의 모습이 클로즈업되었다. 순간 십수 년 전 룩셈부르크의 어느 마을에서 만난 노병이 떠올랐다. 혹시 그도 저기 끼어왔을까. 저들은 한국전쟁 당시 우리의 가난과 절망을 가장 극적으로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현재의 엄청난 발전상은 저들에겐 믿을 수 없는 기적의 현실일 것이다. 오늘날 세계 10대 경제 대국으로 우뚝 선 대한 민국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60년 전 우리 대한민국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우리 군의 끈기와 용맹스러운 군인정신 덕분이며, 세계 16개국 유엔 참전국의 값진 희생의 대가가 아닐 수 없다.
첫댓글 조편집장님 두서없는 글을 살펴봐주시고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노력하겠습니다.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
오성진작가님,
청룡을 타고 비상하는 2024에 신인상에 당선되어 수필가로 등단하심을 축하드립니다.
세상이 쳇GPT를 말하지만, 그것의 결과물을 판단하는 것은 인간임으로,
글쓰기는 끝까지 희망을 줍니다.
수필가로 출발을 하게 됨을 축하드립니다.
김낙효선생님 안녕하세요?
아직은 일천한 필력이라서 부끄럽습니다.
그래도 축하와 응원을 해주시니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