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의 바른 자세
리 상 각
(중국 동포 시인)
『동방문학』 8월호(통권 제16호)에서 「민족 시문학의 발전을 위하여」(고명수)라는 특별기고를 읽었다. 부제는 「조선족 시인들의 시를 다시 읽으며」이다. 이 글은 중국 연길에 와서 세미나에 논의가 되었던 그의 ꡐ30년대 수준론ꡑ을 다시 증명하기 위하여 쓴 고명수 교수의 두번째 평론이다. 그것을 또 다시 증명하기 위해서는 조선족 시문학의 낮은 차원을 끄집어내는 것이 주 목적이 되었다. 끝구절에는 ꡒ필자의 이러한 지적과 충언이 같은 동포로서 민족 시문학 발전을 위한 것이니만치 충정이 어린 고언으로 받아들여 주었으면 한다ꡓ고 썼다.
지난 5월 25일, 『연변문학』지와 『동방문학』지가 공동으로 가졌던 세미나 전경을 스스로 떠올리게 된다. 그 때 고명수의 주제발표에는 없었지만 『동방문학』에 발표된 그의 문장에는 중국 조선족 문학이 한국의 30년대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내용의 글을 누군가 나에게 귀뜸해 주었다. 그래서 내가 의문을 제기하자 시우들이 다투어 발언하고 질문을 했던 것이다. 고명수 교수의 해답은 시원치 않았다.
우리가 너무 열을 올린 것이나 아닌가 싶어서 교수와 조용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세미나가 끝나자 그는 저녁행사에도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대담을 가질 수 없었다. 기분이 잡쳤을까 아니면 몸이 불편한가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았다.
나의 질문은 고 교수의 평론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귀 아프게 들어온 말이 납득되지 않아서 물었을 뿐이다. 그러니 우리가 남의 충고를 겸손하지 못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오해하지 말기를 바란다.
ꡐ50년대 수준ꡑ이니 ꡐ30년대 수준ꡑ이니 하는 말은 고 교수의 발명이 아니다. 아주 일찍부터 귀 아프게 들어온 건방진 소리이다. 한국에는 시인이라는 사람들이 시간과 자금과 종이를 낭비해 가면서 만든 수두룩한 쑤세미를 안고 와서는 조선족 문학이 한국의 50년대 수준이라고들 하였다. 원로시인이나 명시인의 입에서는 이런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이념이 다르고 체제가 달랐던 두 나라 문학을 어떻게 종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가? 경제생활은 그렇게 말할 수 있어도 문학은 그렇게 말할 수 없지 않는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던 차에 고 교수의 주제 발표문에는 더구나 ꡐ30년대 수준론ꡐ이 나왔으니 우리의 귀가 번쩍 열리지 않을 수 없었다. 30년대는 김소월, 정지용, 이상, 한용운, 이상화 그리고 윤동주 등 절세의 명시인을 낳은 문학의 황금기였는데 조선족 시단을 거기에 비기니 초풍할 지경으로 놀라웠다.
우리가 겸손하지 못해서 이런 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인가. 아니면 한국의 어떤 이들이 우리를 얕잡아 뱉은 말인가?
이런 비교법은 비과학적이다. 고국의 30년대 문학과 90년대 문학, 어느 것이 수준급인가? 고 교수는 그 이유를 지금의 다양화에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문학의 다양화가 문학의 발전표지로 되는가? 아무리 이리 치고 저리 둘러쳐도 신통한 소리가 없는 궤변이다.
큰 부자도 아닌 사람이 큰 부자인 체하고 헛소리를 치고 다니거나 물거품처럼 둥둥 떠있는 문인이 아무런 가치도 없는 쑤세미를 걷어 안고 와서는 큰 소리를 땅땅 치며 중국이 어떻고, 조선족이 어떻고, 세계를 주무르기나 하듯이 말하는 사람들은 흔히 이런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식은죽 먹기로 한다. 더욱 유감스러운 것은 수준이 있는 교수들이 깊은 생각이 없이 덩달아 이런 말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 교수는 ꡐ30년대 수준론ꡑ을 증명하기 위하여 『동방문학』 6월호(통권 제15호)에 발표된 우리의 시 작품들을 수두룩이 들고나와 혹평하였다. 그 중에서도 설인 선생의 시와 리상각의 시가 만신창이 되도록 얻어맞은 셈이다. 더러는, 마지못해 절반쯤 긍정하고 절반쯤 부정했으며, 더러는 찬양한 시편들도 있다. 이렇게 써 놓고는 ꡒ필자의 판단은 역시 옳았다.ꡓ고 ꡐ30년대 수준론ꡑ을 고집한 것이다.
우선, 나는 고 교수가 보귀한 시간을 따내여 알심들여 조선족시단을 분석해 준데 대하여 고맙게 생각한다. 글은 썼는데 좋다궂다 아무런 반응이 없으면 이것처럼 슬픈 일이 없다. 앓는 이빨을 뽑으러 갔는데 의사가 그만 생이빨을 뽑았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평론이 이러하다면 해독을 끼칠 뿐이다. 어느 작품이라는 명확한 지적도 없이 두루 둘러쳐서 한 사람의 시 전반을 악평한다면 이런 평론이야말로 무단적인 것이다.
한 시인이 쓴 수많은 시편은 그것이 다 명작일 수 없다. 수수한 시가 더 많을 것이며 실패작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누구도 미신을 할 수 없다. 가령, 한 시인에게서 가장 수준이 낮은 시를 골라들고 그 시인을 매도해 버린다면 과연 그러한 비평이 정확하달 수 있는가?
고명수 교수는 우리의 존경하는 원로시인이며 윤동주 시인의 창작연대와 같은 시기에 써두었던 설인 선생의 미발표작을 혹평하였다. 일제의 고압정책에 말도 할 수 없던 그 시절, 친일파가 욱실거리던 세월에 항일투사들이 피를 흘린 소식을 듣고 민족의 선구자를 노래한 시 「소식」과 「5월」을 습작품이라고 혹평했다. 시의 저항정신은 팽개치고 아무런 구체적 분석도 없이 한마디로 결론을 내린 것은 언어도단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예술성과 시어가 단순할 수 있지만 고 교수는 그 시의 정신이 뭔지도 모르고 쓴 것이 분명하다. 윤동주 시인 작품도 대표작은 손으로 꼽을 수 있다. 그렇다고 편편이 다 명작인 것은 아니다. 단순하고 깊이가 옅은 시들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렇다고 윤동주 시를 과소평가할 수 있는가. 평자가 찬양한다고 해서 시인이 영웅이 되고, 평자가 내리깎는다 해서 시인이 매장되는 것이 아니다. 한 시인에 대한 연구는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과학적으로, 전면적으로, 역사적으로 평가되어야 정확한 결론이 나온다.
다음으로 나는 좀 계면쩍은 얘기지만 고 교수가 평한 나의 시에 대하여 솔직히 말하고 싶다. 문단생활 45년에 자기변명을 해보기는 처음이다.
고 교수는 어느 시편이라는 지적도 없이 이렇게 썼다. ꡒ사상은 깊이가 없고 매우 상투적이어서 이미지의 새로운 차원을 열어보지 못하고 있으며, 상상력의 수준이 소박하고 메시지가 약한 점이 아쉬웠다.ꡓ라고. 한마디로 말해서 이런 것이 다 시냐 하는 뜻이다.
ꡐ서울에서 뺨을 맞고 시골에서 눈을 흘긴다ꡑ는 식으로 자기 변명을 좀 해야겠다. 오늘 세월에는 ꡐ시골에서 뺨을 맞고 서울에 가서 큰 소리치는ꡑ 것도 심심잖게 보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앞에서도 말했지만 평이 혹평이라도 감사를 드린다. 내가 지금까지 쓴 2천여 수 시편들에는 고 교수가 지적한 그런 문제점이 수두룩할 것이다. 나의 시편들에는 가라지와 쭉정이가 많다. 설사, 고 교수의 지적이 타당하지 않더라도 그런 지적은 시창작에 대한 요구인 만큼 참조로 받아들여도 나쁜 점이 없을 것이다 이를 데 있는가.
ꡐ건너산 꾸짖기ꡑ 평론은 도대체 어느 시를 두고 그렇게 썼는지 알수 없어서 『동방문학』 6월호(통권 제15호)를 뒤져 보았다. 시 「그리움」, 「두루미」, 「물빛으로 살고싶다」 세 편이었다. 평자는 내가 시단을 이끌어 나가는 시인이어서 ꡒ주의깊게 읽어보았다.ꡓ는 말을 덧붙였다. 아주 신중하게 읽어보았다는 말이 되겠다.
평론가는 법관이 아니요 시인은 피고석에 앉은 죄인도 아니다. 얼마든지 자신을 변호할 권한이 있다. 예절적인 말은 진작 다 했으니 이제는 허심하지 않다고 나무라지 말기를 바란다.
시 「그리움」은 1960년에 쓴 작품이다. 정치적 압력과 도식주의 창작이 범람하던 때 투고해도 실어주지 않았던 시인데 몇 십년이 지나 발표된 뒤 반향이 컸고 중문으로 번역된 뒤 미국에서 영문으로 번역되어 발표되었다. 이번에는 『동방문학』에 명시 소개로 발표되었다. 시는 소박한 순수애정을 절절하고도 진실하게 그렸다는 평을 받았다. 시정은 그 자체가 사상인데 그 무슨 사상의 깊이가 없다는 평에 나는 그만 억장이 막힌다.
시 「두루미」는 1980년에 썼다. 두루미는 자기 아름다움을 알지 못한다. 자기 아름다움을 알지 못하는 그것이야말로 진짜 아름다운 것이요 자기 아름다움에 놀라서 높이 나는 두루미는 더더욱 아름답다. 이것은 우리 백의겨레의 형상을 두루미로 상징해서 쓴 것이다. 이 시가 우선 중문으로 번역된 뒤 중국소수민족전국상을 받았고, 이 시에 곡이 붙여져 2백만 조선족 가운데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즐겨 부르는 노래가 되었다. 그후 이 시가 영문으로 번역되고 일본에서 일어로 번역되어 발표되었다. 모르는 것이 아는 체하고, 미운 것이 고운 체하고, 없는 것이 있는 체하는 것이 현대인이라면 진짜로 고운 것이 자기가 고운 줄 모르는 두루미야말로 미의 천사일 것이다. 우리 겨레 여성들의 이런 숨어있는 미를 나는 잘 알고 있다. 이것이 시의 사상이 아니고, 시의 상상력이 아니고, 이미지가 아닌가. 고 교수가 말한 사상이니 이미지니 상상력이니 메시지니 하는 따위는 대체 무엇을 두고 한 말인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고 교수는 그렇게 아무 것도 아닌 맹물 같은 시로 평했지만 나는 나의 시 「두루미」가 명작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세계에로 진출하고 있으며, 후세에 오래 남을 나의 대표작 중의 하나임을 확신하고 있다. 시 「물빛으로 살고싶다」도 우리 겨레의 미덕을 읊은 것이다. 물론, 이상 세 편의 시도 제한성과 결함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고 교수의 그와 같은 극단적인 전면부정의 평은 접수할 수 없으므로 마이동풍격으로 흘려보내는 수밖에 없다.
고명수 교수의 평론에서 첫장은 본주제와 거리가 먼 서술인데 이른바 원로, 중견이라는 허명이 높은 ꡐ허술한 시인ꡑ이니 ꡐ허명에 사로잡힌 인간ꡑ들이니 하는 투의 말 훈계와 질책으로 얼룩진 이 장은 참다운 평론이라기보다 욕지거리요 어딘가 위협조가 있는 것 같다. 욕지거리는 궤변과 마찬가지로 진리가 아니다. 이러한 평론자세로 우리 문단을 이끌 수 있겠는가. 오히려 반감을 살 뿐이다.
ꡐ예술의 세계에도 등급이 있다ꡑ느니 ꡐ예술에도 훈련이 필요하다ꡑ느니 따위 하등의 상식에도 속하지 못하는 말들을 지저분하게 널어놓고, 지금이 어느 때라고 ꡐ음풍농월ꡑ인가? 누가 ꡐ음풍농월ꡑ이나 일삼고 있는가. 같은 동포로서 ꡐ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다ꡑ고 질책을 했다. 그래 무엇이 ꡐ음풍농월ꡑ인가? 이백은 ꡐ음풍농월ꡑ을 안 했는가? 자연미와 인간미를 접목시키는 시도 ꡐ음풍농월ꡑ인가? 대체 시를 얼마나 써봤고 시를 얼마나 읽어봤기에 이백을 운운하고 해외 동포시인을 운운하는가? 이론적으로 논쟁할 가치가 없는 평론이어서 나는 다만 평론자세에 대해서만 논했다.
고 교수가 그처럼 알심들여 우리 조선족 시인들의 시를 이러니 저러니 논했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ꡐ30년대 수준ꡑ이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했다. 그러하니 고 교수도 나의 충언을 받아들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