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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의 나이 / 임보
어느 고고학 박사가
땅 속에서 석기를 하나 찾아냈다
몇 만 년 전 것이라고 했다
길을 가다 나도
돌멩이 하나 집어들었다
몇 백만 년 전 것이 아닌가?
*
고고학자들이 구석기 유물이라고 해서 특정한 돌에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고, 돌을 즐기는 사람들이 수석이라 해서
특정한 돌멩이를 선택해서 애지중지하는데 도대체 이 세상
에 오래된 돌 아닌 것이 어디 있으며, 신비롭지 않은 돌이
어디 있단 말인가?
마누라 음식 간보기 / 임보
아내는 새로운 음식을 만들 때마다
내 앞에 가져와 한 숟갈 내밀며 간을 보라 한다
그러면
"음, 마침맞구먼, 맛있네!"
이것이 요즈음 내가 터득한 정답이다.
물론, 때로는
좀 간간하기도 하고
좀 싱겁기도 할 때가 없지 않지만―
만일
"좀 간간한 것 같은데" 하면
아내가 한 입 자셔 보고 나서
"뭣이 간간허요? 밥에다 자시면 딱 쓰것구만!'
하신다.
만일
"좀 삼삼헌디" 하면
또 아내가 한 입 자셔 보고 나서
"짜면 건강에 해롭다요. 싱겁게 드시시오."
하시니 할말이 없다.
내가 얼마나 멍청한고?
아내 음식 간 맞추는 데 평생이 걸렸으니
정답은
"참 맛있네!"인데
그 쉬운 것도 모르고….
바람들의 길 / 임보
언덕 위에 서면 바람들의 길이 보였다
바람들도 빛깔이 있었다
투명하지만 색유리처럼 맑고 깨끗한 빛깔이었다
감귤밭을 넘어온 남풍은 노오란 빛
전나무 숲속을 빠져나온 북풍은 청록빛
쪽빛 바다를 밟고 온 서풍은 남빛이었다
바람들은 들판에서 서로 만나
오색 실타래들이 꼬이듯 몸을 부비며 돌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떤 바람의 실가닥은 풀리어
초가집 사립문 틈으로 슬며시 스며들기도 하고
어떤 가닥은 잠자는 송아지 코 속으로 조용히 빨려들기도 했다
문득 꺽꺽꺽 장끼 한 마리 숲을 깨고 솟아오르자
황 록 청 백 홍 오색 바람들이 소용돌이 치며 몰려와
눈부신 날개를 허공에 만들었다
주위를 가만히 살펴보았더니 이 어찌된 일인가
감귤밭을 향해서는 다시 황색 바람이
쪽빛 바다쪽으론 다시 남색 바람이
전나무 숲으론 다시 청록색 바람들이
떼를 지어 달려가도 있었다.
귀거래별사(歸去來別辭) / 임보
―지게의 독백
주인님 이제 그만 돌아갑시다. 어디선들 입에 풀칠이야
못하겠오. 우리가 떠나왔던 그 고향으로 다시 돌아갑시다.
산 좋고 물 맑은 그 산골로 어서 내려갑시다. 지금은 고향도
많이 변해서 우리 같은 놈 발붙일 곳 없어져 간다고 합디다만
경운기 구루마 같은 놈들이사 들판에서 놀라 하고 산에 오르
내리는 일이사 그래도 아직은 제몫이 아니겠습니까.
여름이면 풋풋한 풀짐, 겨울이면 삭정이 낙엽 얽어 집채만큼
만들어 지고 마을 뒷동산 언덕빼기 신명나게 내려올 적에
이놈 목다리 장단 두드리며 구성지게 뽑아 올리던 그 육자배기
가락 ― 주인님 젊었을 때 그 폭포수 같던 목청 지금도 귀에
쟁쟁합니다.
가을이면 낟가리 곡식 휘청휘청 짊어지고 노적 쌓던 그 달밤도
즐거웠고요. 볏섬 지고 물레방앗간 오르내리면서 큰골댁 담장
너머 보름달 같던 곱단이 얼굴 훔쳐보며 볼 붉히던 주인님
생각나시지요. 그 곱단이가 주인님 마님 되어 우리 셋이 밭일
가선 내 등에 그 색시 올려놓고 덩실덩실 맴돌다엉클어져
콩밭 뭉개던 일도 알고 계시지요.
읍내 장날이면 발대 얹어 닭 돼지 잡곡들 싸짊고 가서 팔아
다가 조기 북어 미역 어물 등속 마련하여 명일 제일 조상
제사상도 푸짐하게 보았고요.
허기사 즐거운 일만 늘 있었던 건 아니지요. 읍내 신작로
낼 땐 강변에 자갈 모래 몇 달을 등이 휘게 져다 부려도 보
고, 동란 땐 총부리에 끌려 탄약통 걸머지고 유탄이 비오듯
퍼붓는 구름재 그 험한 능선을 몇 번이나 넘나들었던가요.
그러나 정말 슬펐던 일은 염병이 불꽃처럼 번지던 어느
봄날 곱단이 마님 서른도 채 못 되어 세상 떠나던 일이었지요.
거적에 싸인 마님 등에 업고 산천 갈 때에 철쭉들도 우리처럼
목이 터지게 울고 있었지요.
그리고 주인님 우리가 고향 산천 버리고 떠나온 것이 아마
그 무렵이었지요. 아무 물정 모르는 우리 시골것들 홧김에
서울 대처에 올라오기는 하였지만 눈도 멀고 귀도 먼 일자
무식 우리들이 뭐 해먹겠다고 올라왔을까요. 논밭 팔아
몇 푼 손에 쥔 것 오다가다 만난 뺑덕에미 밑구멍에 다 털어
넣고 청계천 다리 밑에서 훌쩍훌쩍 울던 것도 생각나지요.
서울역 광장, 동대문 시장, 을지로, 종로통 퍽도 싸대고
다녔지요. 그래도 그때는 제법 일거리들이 있어서 종일
헤매면 국밥에 막걸리 사발이라도 마실 수 있었어요.
그 자유당 시절까지만 해도 그런 대로 우리에겐 살만 했지요.
손수레, 용달, 택시들이 쏟아져 나오자 세상은 개판이 되었
지요. 고속도로 뚫리고 전철 생겨 사람들은 개미떼처럼 북적
대기 시작했지만 이젠 우리 쳐다보는 놈 한 놈도 없어요.
온종일 터미널 입구에 주저앉아 기다려 봐도 우리에게 짐을
맡기는 어리석은 자는 아무도 없어요. 어쩌다가 물정 모른
시골 아낙네들이 고구마 보따리라도 싸들고 오다 우리를
부르는 일이 더러 있기는 하지만 그것도 겨우 차 타는 곳까지
옮겨다 주는 일일 뿐 일다운 일거리는 택시 용달들이 다
독차지하는 세상 어디 분하고 원통해서 살 수 있겠오.
주인님 이 복잡하고 한많은 서울땅 어서 등지고 우리 고향
으로 떠납시다. 주인님 이제는 쓸모없다고 혹 저를 내던질
생각은 않겠지요. 주인님 저는 남이 아닙니다. 한 평생 주인님
등에 붙어 다니던 등뼈입니다. 주인님의 등뿔 주인님의 한
부분입니다. 어서 저를 데불고 고향으로 가 주세요. 고향에
가기만 하면 봇맥이 자갈짐도 내가 다 지고 오뉴월 똥장군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어서 돌아갑시다. 어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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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정신에 관하여 / 임보
시정신이란 말이 시를 논하는 자리에서 자주 거론된다.
그런데 막상 무엇이 시정신인가를 따져 물으면 그 대답이 석연치만은
않다. 시정신이란 작게는 개별적인 시 작품들 속에 내재해 있는 정신
을 가리키기도 하고, 크게는 다른 문학 장르와는 달리 시를 시 되게
하는 시문학의 정신적 특성을 이르는 말로 사용하기도 한다.
편의상 전자를 협의의 시정신 그리고 후자를 광의의 시정신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개별적인 작품들 속에 담겨 있는 협의의 시정신들이
모여 한 시인의 시정신을 형성하고, 동시대를 살고 있는 시인들의
시정신이 그 시대의 시정신을 형성하게 되며, 시공을 초월해서 시인
들이 지닌 보편적인 시정신이 시문학의 특성을 드러내는 광의의
시정신이 된다. 따라서 협의의 시정신은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것
이라면 광의의 시정신은 보편적이며 종합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이는 시에서의 정신 같은 것을 아예 무시하려고도 한다.
즉 예술은 기술이 문제니까, 언어 예술인 시도 언어를 잘 다룰 수
있는 기교적인 것만 중요시하면 된다는 것이다. 마치 나무를 잘
다루는 목수처럼 언어를 잘 다루는 기술만 있으면 좋은 시를 쓸
수 있다고 믿는 모양이다. 그러나 목수가 만든 가구 속에도 정신
이 들어 있다. 속된 정신이든 고매한 정신이든 정신적인 요소가
배어 있게 마련이다.
보통의 목수가 만든 가구와 인간 문화재급의 장인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그것은 분명 풍격(風格)이 다르다. 기술의 수준에서
오는 차이뿐만이 아니라, 작가의 인품과 정신력이 크게 관여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의미를 지닌 언어 구조물인 시가 작자의 정신적
세계와 무관하다는 생각은 납득할 수 없는 견해다. 하찮은 잡문
속에도 글쓴이의 넋이 서려 있거늘 하물며 언어 예술의 정수라고
하는 시는 더 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는가.
무릇 모든 발언은 발화자의 의도에서 비롯된다. 말하자면 인간은
무엇인가를 실현하고자 언어를 구사한다. 아무런 목적 의식이
없는 발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목적 의식을 욕망의 실현이라
고 해도 상관없다. 시라는 형식의 언술도 분명 목적 의식을 지니
고 있다. 말하자면 시는 시인의 욕망 실현의 한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시를 통해 실현코자 하는 시인들의 욕망은 보통 사람들이
언술을 통해 실현코자 하는 욕망과는 같지 않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흉금을 울려온 좋은 시들을 살펴보건대 그 작품들 속에
서려 있는 시인의 욕망은 세속적인 것과는 사뭇 다르다. 그것은
맑고 깨끗한 승화된 욕망이다. 나는 이를 이상적인 시정신으로
삼고자 한다. 이 시정신은 진・선・미를 추구하고 염결(廉潔)과
절조(節操)를 중요시하는 선비정신과 상통한 것으로 나는 보고
있다.
나는 앞에서 개별적인 작품들 속에 담겨 있는 협의의 시정신들
이 개인의 시정신을 형성하고, 개인의 시정신들이 모여 광의의
시정신을 형성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귀납적인 논리와는 달리
반대로 연역적인 논리도 가능하다. 즉 한 시대가 요구하는 시
정신이 여러 시인들의 호응을 얻어서 그러한 시정신을 바탕으로
한 개별적인 작품들을 생산해 내게도 할 수 있다.
귀납적인 논리는 결과를 중요시하고, 연역적인 논리는 원인을
중요시한 사고다. 전자는 시에 대해 수동적으로 대처하는 자세
라면 후자는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자세다.
오늘의 한국시단을 나는 부정적으로 진단한다. 시에서 감동성이
사라져 가고 있다. 시가 읽는 이에게 흥겨움과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답답함과 괴로움을 안겨준다.
시가 욕설인가 하면 말장난이요, 잡배들의 장타령처럼 난삽한가
하면 술 취한 자의 주정처럼 거친 푸념 같기도 하다. 시가 이처럼
퇴락하게 된 요인은 무엇인가? 나는 그 원인을 자유시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무분별한 모방 행위 때문이라고 지적한 바 있지만,
여기에 하나를 더 첨가하자면 고매한 시정신의 상실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오늘의 시에는 청렬한 시정신을 담고 있는 작품들이
흔치 않다. 고결한 선비정신을 지닌 시인들이 많지 않다.
오늘날 실추된 시의 위의(威儀)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시정신을 되살리는 일이 급선무다. 양질의 상품 생산을 독려하는
운동이 있는 것처럼 오늘의 시단에 청렬한 시정신을 불러 일으키
는 운동이 절실히 필요하다.
어떤 이는 ‘자유’를 핑계삼아 청렬한 시정신으로 우리시의 정체성
을 수립하자는 데 선뜻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현대시가 어디로 가든 오불관언 방관 방치한다면
이는 태만을 넘어 자신의 소임을 저버리는 죄악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시가 긍정적이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발전해 갈 수 있도록
모색하는 것이 어찌 우리의 소중한 책무가 아니겠는가.
시는 언어의 정련 못지 않게 정신의 정련을 필요로 한다.
시인은 언어를 다루는 기술자이기 이전에 정신을 다스리는
수행자여야 한다.
/ 임보 시인의 홈 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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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선생님의 글을 읽을때마다 옷깃을 바로하게됩니다 그래서 함부로 글을 못 쓰겠습니다 요즘같은 세상에 이런 훌륭한 스승을 만난다는것은 행복입니다
동산님 덕분에 선생님의 시정신을 다시 새겨 봅니다. 고맙습니다.
구도자의 마음가짐으로 글을 쓰라 ,하신 말씀
먼저 유미성에 대하여 고민하게 합니다.
넋두리나 비방의 글은 뒷맛이 씁쓸하기 마련입니다.
영혼의 창이 투명하도록 닦고 또 닦으며 살겠습니다.
동산님! 감사합니다.
어느 글은 읽다가 웃음보가 터져 아들까지 불러 쿡쿡 웃다가 어느 글은 시원해서 잠시 눈을 감았다가 어느 글에선 눈물이 핑 돌아 절절 매었습니다.
시 정신 다시 새기며 더 부지런하겠습니다. 동산님, 감사합니다.
바람들의 길을 청록빛 바람이 되어 날고싶습니다
시 정신에 대하여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