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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그 에코토피아의 길 스크랩 <거장 이쾌대, 해방의 대서사>-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남궁효 추천 0 조회 265 15.09.12 11:2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지난 토요일(9/5)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중인 <거장 이쾌대, 해방의 대서사전>에 갔었다. 한겨레신문에 난 기사를 보고 한 번 가봐야겠다고 마음 먹고 한 달도 더 지나서 찾아갔다. 참으로 오랜만에 마눌님과 덕수궁을 거닐었다. 입장료는 무료이며, 사진 촬영은 할 수 없었다. 나중에 자료집을 한 권 구입해서 사진을 찍어 올릴 생각이었으나, 국립현대미술관 사이트에서 몇 장 다운을 받았다.

 

 

 

  이쾌대는 누구인가? - 백남준과 함께 20세기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

 

참으로 특이한 이름이다. 해설사님의 설명을 들으니, 조부는 현재의 검찰총장에 해당하는 지위를, 부친은 창녕군수에, 고향 칠곡에서 3만 석꾼의 거부였다고 한다. 서울 휘문고보에 진학하여 처음에는 야구를 했었는데, 집안의 반대로 미술을 하게 되었고, 재주가 있어서  일본 제국미술학교로 유학하였다. 그는 휘문고보 졸업반 때 혼인한 터라 그 부인 유갑봉과 함께 일본으로 갔다. 거기서 인물화를 주로 그렸다. 특히 아내인 유갑봉을 수도 없이 그려서 이쾌대가 그린 여인상은 유갑봉의 얼굴이라고도 한다. ^^

 

 

  왜 우리는 이쾌대를 몰랐나? - 월북 작가의 비극적 운명

 

일본 유학후에 돌아와 해방공간에서 의욕적인 활동을 하던 그는 6.25 전쟁으로 운명이 뒤틀리게 된다. 모친의 노환과 부인의 임신으로 피난을 가지 못했던 이쾌대는 북한 정권에 붙들려서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화를 그리게 된다. 본의 아니게 북한의 부역을 하게 된 것이다. 다시 국군이 서울을 회복하자 북한으로 도망가려던 그는 붙들려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갇혔다가 1953년 포로교환 때 북한 을 선택하고 월북하였다. 1988년에 비로소 정치적 해금이 되었고, 1991년 최초의 전시회를 하였다. 유갑봉 여사가 그림을 한 점도 팔지 않고 잘 보관해온 덕분이라고 한다.

 

<정물> (<거장 이쾌대, 해방의 대서사>, 국립현대미술관 기획, 돌베개)

 

1. 사랑을 그리다(1929~37)

 

이쾌대는 휘문고보 5학년인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정물>을 출품하여 입선하였다. (위의 사진) 이로써 화단에 이름을 알렸다.

일본 유학기에는 인물화를 탐구하면서 부인 유갑봉과 자화상을 많이 그렸다. 부인 유갑봉은 그가 화가로 성장하는데 예술적 자양분을 준 '뮤즈'였다고 한다. 1935년 이쾌대는 제국미술학교 동기들과 하랏파 양화 전람회를 결성하고 조선의 여성을 소재로 한 <궁녀의 휴식>, <부인상>, <무희의 휴식> 등을 발표했다.

 

 

<카드놀이 하는 부부>일본에 살고 있던 시절의 이쾌대 부부의 어느날 모습이라 한다. 부부끼리 놀다가 외부에 들킨듯한 뜨악한 표정이다. 해설사님은 눈빛과 눈매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국립현대미술관 홈페이지 사진)

<무희의 휴식>이쾌는 전통 무희의 복식에 대해서도 철저히 고증했단다. 여인의 눈매가 예사롭지 않다. 식민지 상황에서도 굽히지 않는 마음과 정신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해설사님은 이쾌대 작품의 눈빛에 주목해 볼 것을 요구했고 그 변화를 이야기 해주었다. 화면을 응시하는 여인을 통해 자신의 운명을 맞서려는 주체적인 인간상을 표현했다는 점에서 이쾌대 예술의 이정표라고 평한다.

 

이쾌대가 학생의 신분으로 그린 잡지 <신가정> 표지화. 1936년

 

 

 

2. 전통의 탐구(1938~1944)

 

 

이쾌대는 제국미술학교를 졸업한 1938년 '이과전(니카카이 미술전람회)'에 <운명>으로 입선하고, 39년, 40년 잇달아 입선하여 화가로서 입지를 굳힌다.

귀국한 다음 1941년 김종찬, 문학수, 김학준, 진환, 이중섭, 최재덕 등과 신미술가협회를 결성했다. 당대의 식민정책에 휩쓸리지 않으면서 한국적이며 모던한 화풍을 구상했다. 화단은 전쟁 분위기로 위축되었으나, <부인도>, <이여성> 등 밝은 색감을 사용하였다.  

 

<운명> 일본 이과전 입선작. 병든 남자와 비탄에 잠긴 여인들의 모습은 당시 조선이 처한 고통스럽고 암울한 운명을 표현했다고 한다. (<거장 이쾌대, 해방의 대서사>, 국립현대미술관 기획, 돌베개)

 

<상황> 일본 이과전 입선작. 가운데 여성이 방어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고, 아래엔 벌거벗은 여인의 놀란 표정, 그 뒤로는 나이든 여인과 젊은 여인이 뭔가를 당기고 있는 모습, 맨 뒤로는 기분 나쁜 남자의 모습이 상당히 복잡하면서도 혼란스러운 상황을 표현, 역시 조선의 식민지 상황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한다.

                                                  

<2인 초상> 이쾌대와 유갑봉의 부부 초상화. 이쾌대는 부인을 전면에 내세우고 자신은 뒤편으로 그림자처럼 처리했다. 1939년 작.

 

<부녀도> 1941년 신윤복의 <미인도>를 연상시키는 작품이다. 조선 여인의 아름다움과 세련된 색감을 표현하려고 했다.

<자화상 2> 1942년

<이여성> 1940년대 작. 이쾌대의 친형으로 일찌기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하였고, 귀국한 뒤로는 <조선일보>,<동아일보> 사회부장을 역임했으며, 복식연구가, 한국화가, 미술사학자로 활동했다. 이쾌대보다 12살이나 많은 이여성은 항상 책을 보고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으로 이쾌대의 기억에 자리잡았다. 이쾌대가 미술을 전공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이여성의 본명은 이명건이다. 그가 중앙고보 다닐 때, 김원봉(영화 <암살>에서 조승우가 분한 의열단 단장), 김두전을 만나 평생 동지가 된다. 김원봉의 고모부 황상규는 만주에서 만난 이들에게 낭만적인 호를 지어주었다, 산처럼, 물처럼, 별처럼 살라는 뜻으로, 약산, 약수, 여성이라고...그래서 이명건보다 이여성을 더 알려지게 되었다.이여성은 옥인동에 살았고 이쾌대는 청운동주민센터 뒤에 살았다. [배기봉 샘이 알켜준 이야기 ^^]

 

 

<소녀상> 1940년대 작.

 

 

3. 시대를 끌어안다(1945~1953)

 

감격의 해방공간에서 이쾌대는 일제의 잔재를 벗은 새로운 민족미술의 건설 방향에 대해서 고민했다. 르네상스부터 20세기초 사회주의 리얼리즘까지 화풍을 연구하고, 한국 전통미술의 색채와 복식을 연구하여 한국적 리얼리즘을 표현하려 했다고 한다.  1947년 조선미술문화협회를 조직하고 <군상1-해방고지>, <창공>, <조난> 등의 대작을 쏟아냈다.  

 

<추과 1> 1949년 한국미술전람회 출품작. 해설사님은 이쾌대가 해방시기 좌우 이념갈등 속에서 이러한 작품밖에 내놓을 수 없어서 무척 아쉬워 했다고 한다.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 1948~49년 작. 이쾌대의 대표작. 두루마기를 입고 서양 중절모를 쓴, 서양 팔레트를 들고 동양화 붓을 쥔 화가 이쾌대의 모습은 하국적인 서양화를 모색하면서 한국의 밝고 명랑한 채색에 주목했다고 한다. 그림의 뒷배경도 물동이 이고 가는 아낙들의 전통마을 풍경이어서 해방직후의 혼란한 사회상 속에서도 평화로운 전통적 가치를 옹호하는 작가의 가치관을 보여준다는 평이다.

   

 

<봄처녀> 붉은 저고리와 펄럭이는 흰 치마로 동세감을 표현하였다. 수줍어하는 모습 속에서도 당당한 체구와 확고한 시선으로 앞으로 걸어가는듯한 동작은 이쾌대 특유의 주체적인 여인상을 보여준다고 합니다.  

                           

                               

<군상1-해방고지> 1948년. 해방을 알린다는 제목처럼 왼편 두 여성이 소식을 전하러 달려오고 있고, 오른편에는 소식을 듣는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있다. 그 아래는 이미 참혹하게 죽은 사람의 모습을 통해 비참했던 식민지 시절의 상징으로, 위로는 해방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굳건하고 기운찬 의지가 표현되고 있다. 더 위로는 앞으로 나라가는 미래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한다. 2미터가 넘는 화폭에 30여명의 사람이 들어간 이 작품은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대작이었다.

<군상 4> 이쾌대는 1946년 북한 미술계의 초청을 받고 북한 전역을 돌아보게 된다. 황해도 해주에서 어느 벽화를 보고 큰 충격을 받는데, 그 영향으로 남한에 돌아와 커다란 역동적인 대작을 구상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사실이지 <군상.시리즈를 보면 마치 르네상스기의 미술을 보는듯한 착각이 일어난다. 힘차고 역동적인 인체의 모습과 결연한 의지에 가득찬 얼굴을 통하여 작가가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해방공간의 혼란과 갈등 가운데 주체적으로 민중의 힘으로 함께 앞으로 나갈 것을 요구하는 화풍이다.

 

<군상 4>는 화면 오른편 아래에서 왼편 위로 올라가는 사건의 흐름이 있다. 과거 식민지와 전통 사회의 아수라 상황에서 일어나 고통속에서도 기운을 내어 지친 몸뚱아리를 ?ㄱ해서 일으키고 결연한 의지로 앞으로 나아가려는 군중들, 그 맨 앞에는 아기를 수태한 여인과 작은 소녀의 또렷한 눈빛, 그 소녀가 단단히 쥐고 있는 푸른 나무가지는 새생명을 상징하고 푸른 미래를 의미한다. 유갑봉을 글며 여인상을 꿈꾸고 표현해왔던 이쾌대는 민족의 미래 또한 여인과 소녀를 앞세워 민족의 미래에의 희망을 꿈꿨다.       

 

 

전시장 촬영이 금지되어 있어서 간신히 해설사님이 설명하는 모습만 허락받고 찍었다. ^^ 이쾌대전은 반드시 해설사의 강의를 들어야만  이해할 수 있다. 귀찮더라도 꼭 들으면 많은 공부가 절로 된다.

 

 

휘문고보 졸업반 시절 결혼한 이쾌대 부부 사진

출판사 돌베개에서 펴낸 자료집을 구입했다. 가격 2만원. 입장료가 무료니까 선뜻 한 권 샀다. 4만원 짜리는 사진이 너무 어둡게 나와서 이것만 못하다.( 이 블로거에 올린 기사는 대체로 이 책의 내용이며, 그날 들었던 해설사님의 설명을 토대로 했음을 밝힌다. )

 

나는 자료집 뒷면에 적힌 "이쾌대는 백남준과 함께 20세기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라는 글귀에서 강한 충격을 받았다. 세계적 비디오 아티스트인 백남준과 어깨를 겨룬다면 정말 대단한 화가가 아닌가?  남북 분단의 비극, 비극적 운명의 이쾌대, 부인 유갑봉과의 사랑, 그녀의 사랑으로 40년만에 부활한 이쾌대 작품전, 너무나 드라마틱한 천재의 삶이 해방 공간의 혼란기,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이념 갈등 남북 갈등과  오버랩 된다.

북한으로 넘어간 이쾌대는 제자 이병호의 집에서 살다가 1957년 재혼을 했으며, 1966년 위천공이 악화되어서 사망했다고 한다. 1999년 북한 <<조선력대미술가편람>>증보판에 실림을서 복권되었고, <박연 초상>1956. <송아지> 1961.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1961년. <소녀> 1959. <우의탑 벽화> 1958년 등의 작품을 남겼다.

거부의 자식으로 일본 유학한 부르조아지적 집안 배경, 민족적 민중적 정치의식은 좌우 어느 쪽에서도 호감을 받기 어려웠을 것으로 우리 화단과 평단에서 추정한다. 해방 공간의 수많은 중도파 민중들처럼... 

영화 <암살>이나 <베테랑>을 넘어서 영화<이쾌대>가 나왔으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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