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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그리스도를 전함 (1)
2020. 12. 18. 이현래 목사
오늘은 우주적인 대 전쟁에 대해서 이야기 하겠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이 있는데 여기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된다. 창세기 1장 1절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고 했다. 그런데 2절에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창1:2)라는 말이 나온다.
여기에 대한 두 가지 해석이 있다. 한 쪽에서는 이것은 창조의 과정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다른 쪽에서는 그게 아니고 1장 1절에서 이미 창조가 되었는데 방해자가 개입해서 땅을 유린했다는 것이다. 땅은 물에 덮여 버리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 다음에 보면 땅을 드러내는 창조가 있다. 그리고 땅에 식물을 키우고, 동물이 있게 하고, 마지막에는 사람이 있게 한다.
그리고 사람을 지으시고 후에 하시는 말씀이 땅을 정복하고 지배하고 다스리라고 말한다.(창1:28) 땅에 문제가 있다는 말씀이다. 땅을 놓고 두 세력이 싸움이 벌어진다는 뜻이다. 하나님도 땅을 필요로 하고, 사탄도 땅을 필요로 한다는 논리이다. 이것을 좀 더 인격적으로 표현하면 사람을 놓고 우주적인 전쟁이 벌어진다는 뜻도 된다. 왜냐하면 사람은 형상과 모양을 따라 지어졌으니까 하나님에게도 필요하지만 사탄에게도 역시 필요하다.
하나님도 형상이 없고, 사탄도 형상이 없다. 둘 다 영물이라고 생각한다면, 영적이라고 생각한다면, 어차피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땅과 사람으로 볼 때 사람을 놓고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 여자를 놓고 두 남자가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다. 비유가 좀 이상하지만 그런 현상이다.
이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이 뭔가를 해 놓으면 꼭 뒤 따라오는 사단이 있다. 그것을 자꾸 방해하게 된다. 방해하면 하나님은 다른 대책을 내 놓고, 방해하면 다른 대책을 내 놓는다. 지금까지 계속 그렇게 해 왔다. 그런데 결과는 결국 하나님의 승리로 돌아가는 것이 성경 안에 있는 계시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마지막에 갈 때까지 이 원수가 계속 따라 다닌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는 밀을 뿌렸는데 “가라지가 어디에서 생겼습니까?”(마13:27) 하는 이 문제가 나온다. 제자들이 그렇게 물으니까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마13:28), “그러면 우리가 가서, 그것들을 뽑아 버릴까요?”(마13:28) 하니까. “추수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마13:30)는 말씀으로 비유하였다. 이것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이 우주 안에는 큰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하나님과 하나님을 거역하는 대적 사이에 큰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 전쟁 한 복판에 내가 있다. 내가 어디에 속하느냐에 따라서 싸움은 누가 이기느냐가 결정된다. 사람은 굉장히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도 마음대로 못하는 일이 있다.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육체를 가진 인간이 없으면 자기 마음대로 못하기 때문이다. 땅에서는 그렇다. 하늘에서는 그렇지 않지만 땅위에서 땅을 지배하는 일은 사람이 아니면 지배할 수가 없다.
아무리 공군력이 좋아도 지상군이 없으면 점령이 불가능하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도 루스벨트는 큰 오판을 한 것이다. 중국에 있는 관동군이 엄청나게 강하다고 알고 있는데, 전쟁이 끝나고 난 다음에 그 강한 관동군을 처리하는 것이 문제였다. 동양을 너무 모른 것이다. 일본을 너무 몰랐다.
미국 사람에게 그런 문제가 있다. 모든 정보를 다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전혀 모르는 부분도 있다. 그것을 시인하지 않다가 실패하게 된다. 그래서 월남전에서도 실패하고, 중국에서도 실패한 것이다.
전쟁이 곧 끝나 가는데, 끝날 줄 알면서도 스탈린을 불러들인 것이다. 관동군을 처리하려면 미군이 들어가서 처리할 수 없다. 미군이 들어가서 처리하려면 얼마나 많은 희생을 하겠는가? 그것을 못해서 스탈린을 불러서 관동군을 처리해 달라고 했다. 그랬는데 스탈린은 그것을 알면서도 능청스럽게 한 것이다. 우리 소련 인민이 전쟁에 참여하려면 명분이 있어야 되지 않느냐? 무슨 명분이냐? 하니까 제안한 것이 한반도를 분할해서 점령하게 해 달라. 그리고 러일전쟁 때 빼앗겼던 북해 4도를 반환해 달라. 이런 요구를 했던 것이다.
루즈벨트는 그 당시 한국이 아무 것도 아니니까 그렇게 하라고 아주 가볍게 승낙한 것이다. 그래서 팬타곤에서 아주 고급 장교도 아니고 중급 장교 정도가 38선을 그어 버린 것이다. 그런데 일본의 사정은 전혀 아니었다. 천황이 항복하면 다 항복하는 것이다. 관동군을 처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몰랐던 것이다. 알고 보면 큰 실수를 하게 된 것이다. 지금의 동북아의 문제는 그때 잘못되어서 이렇게 오고 있는 것이고, 우리나라도 그렇다.
전쟁이 지상군이 없으면 아무리 화력이 있어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점령을 못 한다. 결국 땅은 사람이 없으면 누구라도 점령할 수가 없고 통치할 수도 없다. 그래서 사람을 지은 것도 결국은 땅을 통치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8) 이것은 땅을 두고 한 말이다. 교회의 오늘날 최종 목표는 알고 보면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전쟁이다.
이 전쟁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 한다.
히브리서 1장과 2장을 보면 1장은 천사에 대한 말이다. 천사냐? 맏아들이냐? 이 문제다. 2장 역시 같은 말이다. 이것을 보면 땅에는 없는 일 같은데 우주적인 전쟁이라는 말이다. 사람이 있기 전에 이미 천사가 있었고, 그 천사는 하나님의 부리는 영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천사가 반란을 일으켜서 결국 사탄이 된 것이다. 어떻게 반란을 일으키는가? 인간은 죽기 때문에 아무리 하나님께 반란을 일으키려고 해도 할 수가 없다. 그런데 천사는 안 죽으니까 하나님과 방불하다.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반항한 것이 우리가 소위 말하는 사탄이고 마귀고 그렇다. 사람을 유혹했던 것도 사실은 알고 보면 천사다. 천사가 아니면 사람은 유혹을 받을 일이 없다.
여기에 인간에게 주어진 아주 중요한 문제가 하나 있다. 사람이냐? 천사냐? 여기서 우리가 지면 하나님은 땅을 빼앗기는 것이고, 우리가 이기면 사탄은 땅을 빼앗기는 것이니까 너무 중요한 일이다.
이것을 우리가 현실로 보면 우리가 만일 하나님 편에서 승리하게 되면 우리가 가진 영역은 하나님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만일 지면 하나님 영역이 될 수가 없다.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이 세상은 전부 하나님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전혀 아니다. 하나님의 것이 될 수가 없다. 사람이 없으면 하나님의 것이 될 수가 없다.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을 유혹할 때,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4:8,9)고 했다.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들에게 주노라고 한다. ‘넘겨준 것이므로’, 그것은 천하만국의 영광이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을 하나님께 구하고 있으면 안 되는 것이다. 천하만국의 영광을 구하려면 마귀에게 구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기독교인들이 큰 오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예수도 믿고 천하만국의 영광도 얻고, 이것을 하나님께 구하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우리가 구할 문제가 아니고 우리가 이겨야 될 문제다. 예수님 대답이 ‘야 이놈아! 왜 거짓말 하느냐?’ 이 말을 하지 않았다. 시인했다. 그래서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마4:10)라고 대답했다. 이 말은 천하만국의 영광을 구하지 말고 주 하나님만 경배하라는 이 말이 아니겠는가.
기독교인 생활을 할 때 참 어려운 것이 세상의 영광도 필요하고, 하나님 나라의 영광도 필요하니까 이것이 갈등이다. 이것을 묘하게 조화시켜 놓은 곳이 가톨릭이다. 그래서 한 때 세상을 지배했다. 그런데 결국은 못 당하고 말았다. 가톨릭 왕국은 무솔리니에 의해서 완전히 축소되어서 바티칸이라는 하나의 조그만 도시를 분할 받고 말았다. 그 전까지는 이태리 전체를 다 통괄했고, 유럽 전체를 다 통괄했다. 지금은 다 빼앗기고 대구시만도 안 된다. 조그만 읍 소재지 정도 분할을 받았는데, 거기가 바티칸 왕국이다.
그렇게 세상을 이길 수가 없다. 세상의 방법으로 세상을 이길 수가 없다. 기독교가 아무리 별 짓을 다 한다고 해도 세상과 같은 방법으로는 세상을 이길 방법이 없다. 기독교 왕국을 세상에서 꿈을 꿔서는 안 된다. 다른 왕국이 있는 것이지 그 왕국이 아니다.
어떻게 이 전쟁이 사람의 승리로 올 것인가?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다. 그런데 먹었다. 너무 쉽게 먹었다. 하와가 보니까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창3:6)고 하였다. 그만큼 좋았다는 이야기다. 너무 좋으면 홀딱 반한다. 홀딱 반하면 제정신이 아니다. 너무너무 좋으면 생각하고 말고 할 필요가 없다.
리브가가 이삭에게 시집을 올 때 그랬다. 늙은 종이 가서 설명을 했다. 우리 주인은 이러이러하다고 설명하니까 그냥 대번에 홀딱 반해서 한 열흘 쯤 있다가 가라는 친정 사람들의 말을 거부하고 바로 가겠다고 했다. 홀딱 반해 버렸다. 여자는 남자가 좋으면 홀딱 반해서 가 버린다.
하와가 보니까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창3:6)고 했다. 그래서 먹고 남편에게도 주니까 아무 말도 없이 먹었다. 성경에 보면 이것을 먹어야 되는 것이냐?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했는데 먹어도 되느냐? 이런 말이 전혀 없다. 그냥 주니까 먹었다고 되어 있다.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지금도 좋으면 그냥 하는 것이다. 기독교인이라도 자기 앞에 지금 너무 좋은 것이 있다면 하나님 생각 없이 그냥 한다.
우리 교회에서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 어떤 형제에게 누가 와서 사기를 쳤다. 주식에 선물이 있다. 앞으로 오를 것에 대비해서 미리 사는 것인 것 같은데, 이익이 굉장히 많다고 한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하니까 퇴직 하면서 연금의 반을 갈라서 거기에 투자해 버렸다. 연금을 받으면 겨우 한 집이 사는 금액인데 반을 갈라서 투자했는데 알고 보니까 사기꾼이었다. 그래서 홀랑 빼앗기고 말았다.
내가 그런 일을 하려면 와서 상의하고 하지 그랬느냐고 하니까 상의하면 못하게 할 것 같아서 그냥 했다고 했다. 당연히 누구든지 그렇다. 자기가 꼭 하고 싶은 것은 상의하지 않는다. 상의하면 분명히 반대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속는 일은 다 그렇다. 속는 일을 보면 이것은 남이 알면 안 되는데, 남이 반대하면 안 되는데, 이런 생각이 드는 일이 속는 일이다. 그래서 지금 경제적으로 굉장히 고생하고 있다. 생각해 보라. 연금의 반을 잘라 버렸으니 어떻게 되겠는가? 백 몇 십 만원 밖에 못 받으니까 사는 게 힘들다.
아담이 그 짝이다. 물어볼 필요도 없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라고 했느냐고 물어볼 필요도 없다. 하나님 보고 물으면 당연히 못하게 하려고 하지 않겠는가? 먹지 말라고 하지 먹으라고 하겠는가? 그래서 먹었다. 그만큼 메리트가 있는 것이다.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반드시(정녕) 죽으리라.”(창2:17)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먹었으니까 그 정도면 얼마나 중요하면 먹었겠는가? 간단하게 한 일이 아니다. 보통 일이 아닌 것이다.
여기서 죽는다는 말은 영적으로 해석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다는 말인데, 그때 그런 것 저런 것 생각을 하겠는가? 우리가 지금 해석을 하니까 그렇게 해석 하는 것이지 그 자리에서는 그런 생각을 했겠는가? 분명히 먹을 만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거역을 하고 나갈만한 일이었다. 그렇지 않은 일에 우리가 하나님을 거역할 일이 없다. 어지간한 일에 뭘 하려고 하나님이 하지 마라는 일을 하겠는가? 그럴 수 있는 일이니까 하는 것이다. 그래서 했던 것이다.
이것을 먹으면 한 편으로는 지식과 지혜가 넘쳐서 하나님처럼 되고, 다른 한 편에서는 하나님처럼 안 죽는다는 말이다. 여기서 하나님 같이 된다는 말은 하나님을 아담이 알았겠는가? 결국 천사다. 천사같이 된다는 말이다. 천사는 사람에 비해서 엄청난 지혜와 지식을 가지고 있다. 천사가 나를 봐라. 안 죽지 않느냐? 왜 안 죽느냐? 하니까 선악과를 먹어서 안 죽는다고 했다.
왜 하나님이 선악과를 동산에 두었는가? 사람들은 이렇게 묻는다. 안 두었으면 안 먹었을 게 아닌가? 왜 두어서 먹게 하고 이렇게 시끄럽게 만들어 놓았는가? 이방인들은 그렇게 묻는다. 이방인이 아니라 기독교인들도 그런 의문이 있다. 묻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선악과라는 것을 놓아두지 않았으면 될 일이 아닌가? 하나님이 지은 동산에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고 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지 사람이 했겠는가? 왜 해 놓았는가?
선악과는 천사의 양식이다. 부리는 천사는 그것을 먹어야 천사로서 일을 할 수가 있다. 천사가 하는 일은 지식과 능력으로 일을 한다. 정승이 하는 일은 혈통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지식과 능력으로 하는 것이다. 지식이 있고 능력이 있는 사람이 정승이 되는 것이다. 아들은 지식과 능력이 있어서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다. 생명으로 된 것이 아들이고, 지식과 능력으로 된 것이 정승이다.
하나님 동산에서 천사의 위치는 정승의 위치다. 일인지하 만인지상, 그것이 정승의 위치다. 그도 먹고 살 것이 있어야 된다. 그 말은 그는 탁월한 지식을 가지고 있고, 탁월한 지혜를 가지고 있으며, 사람에 비해서 죽지 않는다. 이것이 천사와 사람이 다른 점이다. 사람은 아무리 지식이 있어도 천사만큼 가질 수 없고, 아무리 능력이 있어 봤자 결국은 죽기 때문에 천사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지는 것이다. 그리고 천사가 하라는 대로 하는 것이다. 모든 종교가 천사같이 되기 위해서 대부분 천사를 흠모하고 있다. 이유가 그것이다.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이나 필요한 것은 천사가 가지고 있는 그것이다.
돈이 없는 사람은 돈이 필요하다. 돈이 없는 사람은 돈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한다. 건강이 없는 사람은 건강이 절대적이라 생각한다. 내게 없는 것을 부러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종교도 그렇지 않은가? 무엇을 구하는가? 지금 다 지혜와 능력을 구하고 있다. 기독교 같으면 하나님을 의지해서 지혜와 능력을 얻자는 게 아니겠는가? 아무리 하나님을 의지해서 지혜와 능력을 얻어도 타고난 것만 못하다. 천사는 타고나 있고, 사람은 그것을 빌려 써야 되는데, 그게 같겠는가?
예체능계를 가면 금방 알 수 있다. 예체능계는 노력해서 천재가 될 수는 없다. 타고난 것이 없이는 아무리 해도 안 된다고 한다. 넘어갈 수가 없다고 한다. 친구가 아들 하나를 피아노 교실에 보냈더니 잘 한다고 해서 음대를 보낸다고 고등학교까지 피아노를 했다. 막판에 가서 아는 교수가 있어서 상담하러 갔는데, 피아노 치는 것을 보더니 청음력이 떨어져서 안 된다고 했다. 고등학교까지 학원에서는 잘 한다고 했는데, 악보를 보고는 잘 치고 외워서 치는 것은 잘 친다. 그런데 예체능계에는 외워도 안 되는 게 있다고 한다. 이게 안 넘어가는 것이다. 교수들이 보고 그것을 딱 알고서는 이 아이는 청음력이 없어서 안 된다고 했다. 완전히 농사를 버렸다. 그래서 지금도 아무 것도 못하고 있다. 내 친구 아들이다.
천부적인 소질이 없으면 예체능계는 아예 그만 두어야 한다. 한계가 있기 때문에 처음부터 그만 두어야 한다. 미술도 그렇고, 음악도 그렇고, 체육도 그렇고, 다 그렇다. 소질이 없으면 넘어 보면 안 된다. 김연아는 천부적인 소질이 있다. 타고난 게 있다. 자세히 보라. 신기가 있다. 사람이 넘어가지 못하는 것을 넘어가는 게 있다. 그것은 연습해서 되는 게 아니다.
그런 사정인데 사람과 천사가 어떻게 대결이 되겠는가? 그런데 사람들은 천사와 대결해 보려고 애를 쓰고 있다. 왜냐하면 천사의 양식을 먹었기 때문에 종이 되어 버린 것이다. 나보다 훨씬 잘하면 나는 그의 종이 되는 것이다.
대구에서 서울까지 한 시간에 몇 십 만원씩 주고 레슨을 받으러 다닌다. 돈이 없으면 못 한다. 우리가 천사에게 레슨을 받아서 천사보다 나아지겠는가? 그런데 지금 천사에게 레슨을 받고 있는 게 아닌가? 유교에 들어가도 그 레슨을 받고 있는 것이고, 불교에 들어가도 그 레슨을 받고 있는 것이고, 기독교도 그 레슨을 받고 있느라고 수고스러운 것이다. 많은 돈을 지불해 가면서 레슨을 받으러 다닌다.
우리 교회에 어떤 아이가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아주 잘해서 소문이 났다. 대구에서는 레슨을 받을 데가 없어서 서울까지 갔다. 그런데 문제는 돈이 없다. 집이 가난하니까 결국은 못하고 말았다. 그래도 그 아이가 머리가 좋아서 치대 시험을 봐서 합격하여 치과 의사가 되었다. 그 아이가 그것을 극복하느라 애를 먹었다. 그 이야기를 했더니 하루 종일 울었다고 한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더라고 했다. 안 그랬겠는가? 자기가 고등학교까지 전 생애를 바쳐서 했던 것인데, 그것을 못하게 된다고 하니까 부모가 돈이 없어서 도저히 댈 수가 없다고 하니까 마음을 바꾸어서 공부를 하더라고 한다. 그래서 치과대학을 갔다.
지금 사람들은 못할 것을, 이루지 못할 것을 꿈꾸고 있기 때문에 인생고다. 할 수 없는 것을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성취가 된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바라기 때문에 안 된다. 안 되는 사람을 보면 다 자기가 못할 것을 바라고 있다. 주변을 자세히 보라. 실패하고 성공하지 못한 사람을 보면 전부 자기가 할 수 없는 것을 바라고 있다. 우리 인생 전체가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바라고 있기 때문에 인생 전체가 실패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바라기 때문이다. 내가 천사가 되겠는가? 아무리 훈련을 한다고 해도 천사같이 되겠는가?
종교 안에서 유명한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누구인가? 유명한 사람들은 다 천사 같은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우리 기독교 안에서도 빛을 남긴 사람들을 보라. 보통 사람들이 아니다. 보통 사람들이 아닌데 그런 사람들을 목표로 간다. 천주교에 가면 성지 순례를 한다. 그런 성자들을 찾아다니는 것이다. 그분들의 업적을 보고 발자취를 보면서 우리도 저래야지 하는 것이 천주교가 아닌가? 그런데 기독교는 아닌가? 마찬가지다. 설교할 때 무슨 말을 하는가? 맨날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가? 아무개는 이렇고 아무개는 저렇다. 바울이 이렇고 누가 저렇고 한다. 바울 같이 되려는 게 쉬운가? 아무나 바울 같이 되겠는가?
나도 그것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다. 아주 많이 한 것은 아니지만 상당히 했다. 방언하고 병고치고 능력을 행하는데 저래야 나도 목회가 되겠다는 생각에 빠졌다. 이게 맞느냐? 틀리느냐? 이것은 소용이 없다. 성경을 검토해 보니까 다 맞다. 안 맞는 게 아니다.
방언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성령을 믿는다면 바울이 에베소교회에 가서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행19:2)고 말했다. 그래서 바울이 안수했더니 방언을 했더라고 되어 있다. 나는 거기서 결정적으로 굴복했다. 잔소리가 필요 없구나. 그렇게 시작해서 해보려고 아무리 쫓아 다녀도 안 되었다. 그래서 포기를 했는데 내가 이 길로 들어서기 전까지는 항상 그게 열등감이 있었다. 나는 못 하지만 그것을 부인할 수가 없었다. 나는 못할지라도 그게 아니라고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얼마나 힘이 들었겠는가.
우리가 천사를 따라간다는 것, 천사처럼 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어떤 사람이 40일은 금식기도 한다고 해서 나 같은 사람이 했다가는 열흘도 못 가서 죽어 버린다. 내가 열흘을 견디겠는가? 그것은 할 만한 사람이 하는 것이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에서 40일 금식 기도를 하도 자랑하니까 불교의 어떤 스님은 70일을 했다고 한다. 40일 가지고서는 찍 소리도 못 한다. 70일 금식 기도한 스님이 있는데, 40일 금식 기도 했다고 기독교인이 어디 가서 자랑하겠는가? 기는 놈 위에 뛰는 놈 있고,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고 끝이 없다.
사람이 자기 분수를 알아야 한다. 세상에서도 내가 뭘 할 수 있고, 뭘 못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우리나라도 그렇다. 우리나라가 뭘 할 수 있는지 모르고 나대고 있다. 실제로 그렇다. 될 일과 안 될 일을 모르고 한다. 우리 마음대로 종전 선언을 하는가? 우리는 휴전 당사국이 아니다. 유엔이 대신하기 때문에 휴전 회담에 우리는 못 들어갔다. 우리는 휴전 당사국이 아니다. 우리 마음대로 종전할 수가 없다. 그런데 자격도 없으면서 왜 그런 소리를 하고 다니는지 모르겠다. 그런 게 안 될 일이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안 될 일을 하면 안 된다. 안 될 일이 되는 수가 없다. 안 될 일을 하면 시끄럽다. 싸울 일 밖에는 없다. 될 일을 하면 가만히 있어도 다 잘 된다. 가만히 있어도 된다는 말이 이상하지만 될 일을 하면 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안 될 일을 하면 아무리 해도 안 된다. 능력이 있는 사람은 조금 더 하고, 능력이 없는 사람은 조금 덜할 뿐이지 매 한가지다.
누구라도 천사가 못 되기는 매 한가지가 아닌가? 조금 더 근접하게 보이는 사람도 있고, 못한 사람도 있지만 어차피 못하는 것은 똑 같다. 나같이 방언도 못하는 꼴찌와 별 것 다 하는 우등생도 있다. 심지어는 새들이 와서 이야기도 하는 사람도 있다. 신비로운 그런 사람들은 천재들이다. 그런데도 어차피 안 된다. 어차피 천사는 안 된다. 그래 봤자 천사는 안 된다. 그래 봤자 죽을 게 아닌가? 새들과 노래를 하든지 대화를 하든지 간에 어차피 죽는 게 사람이다. 사람은 한 번 나면 한 번 죽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왜 아담이 몰랐겠는가? 사람만 그런 게 아니다. 모든 만물이 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는 게 아닌가?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옛날 사람들도 그것은 당연하게 생각했다. 풀도 났다가 죽고 소도 났다가 죽고 때가 되면 다 죽는구나. 그러니까 불평할 일이 없었다.
왜 아담은 속아 넘어갔는가? 안 죽는 놈이 와서 말하니까 그렇다. 너는 왜 안 죽느냐? 물으니까 나는 이것을 먹고 사니까 안 죽는다는 것이다. 불로초 같은 게 있다. 진시황이 동방으로 불로초를 구하러 보냈다고 하는데 불로초가 있다니까 온 게 아니겠는가? 진시황이 권세를 잡았는데 오래오래 살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승로방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이슬을 받는 큰 접시를 만들어서 공기 좋은 곳에서 받아서 이슬을 먹었다고 한다. 요즘 같으면 가장 깨끗한 물을 먹은 것이다. 그리고 동방에 사람을 보내서 불로초를 구하러 다녔다고 한다. 사람이 모든 것을 다 가지고 나면 마지막 소원은 뭐겠는가? 안 죽고 사는 게 아니겠는가? 인간의 최종적인 욕구는 안 죽고 사는 것이다. 돈이고 명예고 해도 그것은 죽느냐 사느냐에 가면 아무 것도 아니다. 돈 보따리 짊어지고 피난 가는데 돈 보따리 붙잡고 뒤떨어져 못 가고 있겠는가?
배가 침몰해서 죽는데 그 배에는 상인들이 많이 타고 있었다. 목포 앞바다에서 침몰한 연호라는 배가 있었다. 뒤로 그 배를 건져서 보니까 배장 안에서 사람들이 보따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보따리는 다 돈이었다. 그것을 끌어안고 죽었더라는 것이다. 어차피 못 나가니까 그것이라도 끌어안고 죽지 도망칠 수만 있다면 그것을 팽개치고 도망가지 끌어안고 도망가겠는가?
사람의 궁극적인 소원은 죽지 않고 사는 것이다. 이*철씨 같은 사람도 죽게 되니까 인생에 회의가 와서 어떤 신부에게 질문서를 보냈다. 자기가 의문 나는 것을 질문했다. 뭐가 부족했는가? 죽기 전에는 그런 생각을 하겠는가? 죽게 되니까 그런 생각이 난 것이다.
사람은 사람이지 절대로 천사같이 될 수가 없다. 아예 그 생각이 없어져 버리니까 너무 편하다. 나도 그 생각이 있을 때는 불편했다. 사람으로서 삶이 최고의 영광이라고 생각하니까 너무 마음이 편하다.
히브리서 1장 2장 3장은 다 그 이야기다.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히1:5)라고 했다. 그런데 사람은 무엇인가?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히2:9) 이것은 정말 멋있는 말이다.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히2:9) 이것이 사람의 승리고 영광이다. 예수의 승리가 여기에 있다. 카톨릭을 만들어서 교황이 되는 게 승리가 아니다.
왜 그러면 죽어서 영광을 받는가? 죽음 안에서 영광을 받는가?
천사는 아무리 지혜가 있고 능력이 있더라도 자기 혼자뿐이다. 만유를 지배할 수가 없다. 만유를 다스릴 수 없다. 왜 못 다스리는가? 포함 되지 않기 때문이다. 무력으로 세상을 지배하라고 하면 지배할 수 있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다스림이라는 말은 내 안에 포함되어야 한다. 내가 내 맘 쓰듯이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다스림이다.
아무리 권세가 있다고 신하들이나 백성을 자기 손처럼 쓰겠는가? 독재자들을 보면 굉장히 불안하다. 독재를 할수록 불안해진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독재를 하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 마음대로 남을 죽이고 살리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데 하루도 편하게 잘 수 없다. 보통 간덩이를 가지고는 할 수가 없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그렇지 않겠는가? 지금 북한의 김*은은 얼마나 불안하게 살겠는가? 첩첩이 방어막을 쌓고 사는 것이다. 힘이 있으면 편할 줄 알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다. 제일 편한 사람은 다리 밑에 사는 사람이라고 한다.
요즘은 고아원이 좋아졌지만 옛날에는 어려워서 아이들이 도망을 치는데 이 놈들을 잡아다 놓으면 도로 도망간다. 도망을 가면 어디로 가는가? 거지 노릇한다. 왜 거지 노릇을 하는가? 고아원에 있으면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는데 왜 나오는가? 자유가 그리워서라고 한다. 한번 나와 보면 못 들어간다고 한다. 고아원에 가면 피아노도 있고 별것이 다 있는데 그래도 안 되고 잡아놓으면 나가고 잡아놓으면 나간다고 한다. 제일 편한 놈은 거지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제일 고통스러울 것 같은데 제일 편하다.
캐나다 토론토에 가면 유명한 명물이 하나 있다. 길가에 방석 같은 것을 깔아놓고 미소 가운데 책을 보고 앉아 있다. 무슨 책을 보는지 모르겠는데 항상 책을 보고 앉아 있는데 얼굴에는 회색이 만연하다. 겨울에 추워서 얼굴이 얼어 터져서 형편이 없다. 캐나다가 얼마나 추운가. 영하 20도가 6개월씩 가는데 얼마나 춥겠는가. 그런데 아주 즐거운 미소를 띠고 있다. 그 사람을 보면 옛날에 철인이 생각난다. 알렉산더가 오니까 햇빛이 그리우니까 비켜달라고 했던 그 철인 생각이 난다. 저 사람도 그 사람을 본 따서 저렇게 하고 있구나. 겨울에 얼굴이 얼어서 벌겋다. 사람이 참 여러 가지이다.
아무리 해도 우리 인간은 타고난 우리 인간을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벗어난 것이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동산을 떠난 것은 그것을 벗어난 것이다. 일단은 그것을 벗어났다. 이 벗어난 사람에게서 일어난 현상을 가지고 이러니저러니 도토리 키 재기다. 매한가지다. 어차피 동산을 떠난 것인데 거기서 서로 네가 옳으니 내가 옳으니 이것은 너무 유치한 일이다.
사람은 죽음에 매여 일생을 종노릇 한다고 한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을 놓고 그렇게 해석을 한다. 왜 그렇게 죽음의 고난을 받으시고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셨는가? 죽음에 매여서 일생을 종노릇 하는 자들을 놓아주려 하신 것이다. 죽음에 매여 일생을 종노릇 하는 자들을 놓아주려고 하신 것이다. 그러면 결국 사람은 죽음에 매여 있다는 말이다. 선과 악을 아는 지식에 매여 있다는 말은 없다. 그런데 죽음에 매여 있다고 한다.
죽음에 매여 일생을 종노릇 하는 자들을 놓아주려 함이다. 우리가 죽음을 이기고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바라봐야 내 인생의 길이 생긴다. 죽으면 어차피 죽을 것이니까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것이다.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이 고난은 우리가 생각하는 고난이 아니다. 천사 앞에서의 조롱받는 고난이다. 고난이 육체의 고난은 누구나 당한다. 십자가에 매달아 놓으면 누구나 육체의 고난은 당한다. 그것은 다른 사람도 당한다. 그런데 예수님이 고난 받으신 것은 그 고난이 아니고, 천사 앞에서의 조롱거리가 된 것이 고난이다. 멸시와 고난이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그러면 뛰어내려 봐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고난이다. 이것이 수치와 고난이다. 거기서 유유히 걸어 내려왔으면, 거기서 날개라도 펴고 있듯이 내려왔으면, 온 세상이 와서 경배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하고 죽었다. 이것이 사람이다. 거기서 날았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랬으면 황제라도 와서 무릎 꿇지 않겠는가? 반대자가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고 운명하셨다.
어떻게 보면 완전히 실패다. 100% 실패다. 사람은 예수 실패가 사람 실패이다. 예수님 실패가 사람 실패이다. 그만한 사람이 못하면 누가 하겠는가? 물로 포도주를 만들고 물 위로 걸어가신 분이 못했는데, 그 싸움에서 누가 이기겠는가? 아무도 이길 수가 없다. 우리는 거기서 우리 자신을 바로 알아야 결국 그게 우리 죽음이다. 우리를 바로 아는 것은 우리가 이렇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사람은 이것이 사람의 위치구나. 그것을 아는 것이다. 사람의 위치를 바로 알면 그것은 절망이 아닌가? 그래서 그것을 회피하고 간 것이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으신 것을 보고 왜 갔는가? 너무나 절망스러웠기 때문이다. 더 이상 갈 데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독교가 생겼다. 왜? 오순절의 사건이 생겼기 때문이다. 놀라운 일이 생기니까 좋은 일이 생기니까 나왔다. 그것을 못 본 사람은 어떻게 하겠는가? 베드로는 그것을 봤으니까 나와서 죽어도 좋다고 소리를 쳤지 우리 같은 사람은 못 봤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을 듣는 것이 옳은지 하나님 말을 듣는 것이 옳은지 판단 받아 보라고 하면서 그렇게 했다. 어떻게 그렇게 되겠는가? 무엇을 봐야 그렇게 되지 그렇지 않으면 못한다. 그러면 그것을 볼 사람이 몇 사람이 되겠는가? 그렇게 된다면 우리도 다 그렇게 봐야 되는데, 그렇게 볼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석가모니가 해탈을 했다. 광고를 하면 만나보려고 사람이 얼마나 모이겠는가? 만리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갈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니까 다 떠나고 아무도 남지 않았다. 심지어는 그가 입었던 두루마기 같은 옷까지도 군병들이 제비 뽑아서 가져갔다고 한다. 아무것도 남은 게 없다. 물로 걸어가는 것도 날아가고, 죽은 나사로를 살렸던 것도 어디로 날아가 버리고, 예수님 일생이 아무것도 없이 다 날아가 버렸다. 그래서 다 달아나 버렸다. 그리고 부활했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부활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가보지 않겠는가? 다 간다. 그런데 그래서는 안 된다.
우리가 그 자리에서 우리의 구원을 알아야 된다. 뿌리가 거기 있는데 부활이 어디서 왔는가? 뿌리가 거기서 왔는데 그것을 버리고 가서 부활이 얻어지겠는가? 부활을 먼저 걱정하는 사람이 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얘기하면, 그러면 언제 부활하느냐? 어떻게 부활하느냐? 어떤 모양으로 부활하느냐? 고린도전서를 보면 이렇게 묻는다. 사람들이 그런다. 이렇게 부활한다고 하면 온다는 그 말이고, 이렇게 부활한다고 하면 모여든다는 말이다. 그래서는 안 된다. 뿌리가 없는데 어떻게 되겠는가? 뿌리 깊은 나무가 오래 사는 것처럼 우리도 뿌리가 깊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 뿌리가 깊어야 된다.
미국에 가니까 그런 데가 있다. 주목이라는 나무가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큰 주목을 보기 어렵다. 아무리 커도 미국같이 그렇게 큰 나무는 보기 어렵고 결국 죽어서 뼈다귀만 남아서 있다. 왜냐하면 속이 빈 나무들은 죽으면 썩는데, 속이 비지 않는 나무는 겉에서부터 썩어 들어가기 때문에 금방 썩지 않는다. 그래서 괴목이 되는 것이다. 일선 같은데서 찍은 나무들을 보면 앙상하게 뼈만 남은 나무가 있는데 그것이 다 주목이다.
주목이 산을 하나 이루고 있는데, 3천년 넘은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열 몇 명이 둘레를 감싸봤는데 안 된다. 왜 그렇게 거기는 나무가 컸는가? 뿌리가 깊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산에는 나무가 뿌리가 깊이 들어가지 못한다. 조금 들어가면 다 바위다. 우리나라는 나무가 어느 정도 살다가 뿌리가 갈 데가 없으면 죽는다.
거기는 어떻게 3천년을 살 수 있는가? 뿌리가 한없이 가면 나무는 뿌리만 살아 있으면 계속 사는 것이다. 뿌리가 갈 데가 있으면 산다. 왜냐하면 계속 새로운 뿌리가 나서 거기서 영양분을 흡수한다. 그것이 갈 데가 없으면 죽는다. 지나다 보면 소나무가 하나씩 빨갛게 된 것이 있는데, 캐보면 분명히 뿌리가 갈 데가 없다. 우리 산소에 측백나무를 심어 놓았는데, 다른 것은 다 죽었는데 하나가 살아서 상당히 컸다. 이것은 컸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빨개져버렸다. 더 이상 뿌리가 갈 데가 없는 것이다.
우리도 인생도 새 사람도 뿌리가 깊어야 되지 뿌리가 깊지 않으면 천사에게 계속 속는 것이다.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히2:9) 이것이 예수의 승리다. 결국 부활은 이것이다. 다른 것이 아니다. 부활, 부활, 아무리 해봐도 소용이 없다. 사람들에게 부활이 얼마나 전파되었는가? 그런데 언제 부활하느냐고 기다리고 있지 부활된 사람이 어디 있는가? 제대로 거듭나지도 못하는데 부활이 언제 되겠는가? 뿌리가 깊어야 된다.
사람은 절대로 무슨 방법을 써도 천사같이 될 수가 없다. 천사도 무슨 방법을 써도 사람이 될 수 없다. 똑같다. 소가 풀을 먹지 않고 고기만 먹는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는가? 광우병에 걸린다. 그것이 무섭다. 시골에서 여름에 소들이 일을 너무 많이 해서 지친 경우가 있다. 그럴 경우에 육식을 하면 금방 살아난다. 바닷가에서는 낙지 같은 것을 잡아서 먹인다. 뱀을 잡아 먹이기도 한다. 그러면 일에 지쳐서 땀나던 소가 금방 회복이 된다. 그런데 그것을 계속 먹이면 광우병에 걸린다. 광우병이 무엇인가? 뇌가 스펀지 같이 되는 병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는가? 소가 미친 짓을 한다.
어떻게 생각하면 우리 인생도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광우병에 걸렸구나. 육식하고 천사같이 돼보려고 하다가 광우병에 걸렸다. 하나님이 볼 때 사람이 얼마나 한심하겠는가. 사람은 사람의 위치가 있고 사람이 할 일이 있고, 사람의 존귀함이 따로 있는데, 광우병에 걸려 있으니 얼마나 한심하겠는가.
예수님에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를 신처럼 되게 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 앞에 가서 우리가 신처럼 되려고 하면 절대로 안 된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나를 신으로 만든 분이 아니다. 사탄은 너 이거 먹으면 호랑이처럼 된다고 했는데 그것이 거짓말이다. 예수님은 그런 말을 안 했다. 네가 나를 따라오면 너도 신이 된다는 말이 없다.
예수님은 사람을 구하러 왔고, 사람을 제 위치로 구하려고 오신 분이다. 다른 생각을 털끝만큼도 하면 안 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사람 이외의 다른 것을 절대로 생각하면 안 된다.
혹시 어떤 사람이 하늘을 나는 은사를 받아다 하더라도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사람이 나는 게 사람인가? 괴물이다. 어떤 사람은 산뿌라(산플라티나)로 만든 치아를 금이빨로 만든다는데 굉장한 능력이고 은사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괴물이지 어떻게 사람인가? 쇠는 쇠고 금은 금인데 쇠를 가지고 금을 만들면 그것이 괴물이지 어떻게 인간인가? 그런데 나는 그것을 몇 년간 부럽게 생각을 했다. 산뿌라(산플라티나) 치아를 금이빨로 만들어 주려고 쫓아다녔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시고 사람을 찾고 있구나. 이것을 알고 난 이후에 그것이 싹 날아가 버렸다. 지금도 내가 그런 능력을 행하는 사람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아무 가치가 없다. 누가 공중을 날아다닌다고 해도 가치가 없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이치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히브리서는 아주 중요한 책이다. 우리가 천사와의 전쟁에서 지면 다 지는 것이다. 사람이 안다는 것이나 지식은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내일 일을 모르는데 알기를 무엇을 아는가? 내일 일을 모르면서 무엇을 안다고 하겠는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 어차피 죽는데 무슨 능력이 있다고 하겠는가? 세상은 지금 누가 지배하고 있는가? 뭘 좀 안다는 사람이 지배하고 있다. 지식으로 지배하고 무력으로 지배한다. 네피림들은 나와서 영웅이 된다. 영웅들은 무력으로 힘으로 세상을 지배한다. 영웅이 나오면 전쟁이 일어난다. 우리는 지식으로 영웅이 되어도 안 되고, 무력으로 영웅이 되어도 안 된다.
사람은 사람이 되어야 되고, 하나님은 사람을 찾고 있고, 오직 사람만 찾고 있다. 살다가 죽을지라도 사람만 찾고 있다. 죽지 않는 천사를 찾고 있는 것이 아니고, 살다가 죽는 사람만 찾고 있다.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세계는 다 한번 낳다가 한번 죽게 되어 있다. 그것이 다 이유가 있다. 영원히 그냥 살면 좋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한번 나서 한번 죽어야 된다. 그래야 다시 나게 된다. 일차적인 생명에서 이차적인 생명으로 넘어가기 위해서 우리는 과정을 꼭 거쳐야 된다. 어쩔 수가 없다. 어쩔 수 없지만 이것이 축복이다.
천사는 죽지 않으니까 몇 천 년을 살고 있는지 몇 만 년을 살고 있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 대신 항상 똑같은 놈들만 있다. 우리 땅 위에는 아브라함 때가 언제인가? 그런데 아브라함이 지금도 있다. 그 사람은 죽었지만 몇 번 낳고 낳고 해서 나까지 여러분까지 온지 모른다. 참 신기한 일이다. 아브라함이 지금도 있다. 이삭이 지금도 있다. 계속한다. 우리가 다 누구인가? 우리가 다 아브라함이고, 이삭이고, 야곱이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자의 하나님이다. 산자의 하나님이니까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언제까지 계신 분이고, 사람은 사람이 있는 한 언제까지 사람으로 있는 것이다. 천사의 세계와는 다르다. 그래서 결국 천사와 예수를 비교해서 뭐가 되었는가? 예수는 우리의 주님이 됐고 만유의 주가 됐다. 천사는 여전히 부리는 종에 불과하다.
왜 우리 주님인가? 그가 우리를 포함하기 때문에 주님이다. 나보다 똑똑해서 주님이 아니고, 나보다 능력이 있기 때문에 주님이 아니라 나를 포함한 분이다. 그분 한 분으로 내가 다 대표가 된다. 내 얘기 하지 않아도 된다. 예수만 말하면 그것이 나를 다 얘기하는 것이니까 내 얘기 할 필요가 없다. 예수가 나를 대표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유를 대표하고 있다. 그러므로 만유의 주라고 한다.
천사가 만유의 주가 될 수 있는가? 안 된다.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만유의 주가 될 수 없다. 아무리 죽지 않고 살아도 만유의 주가 될 수 없다. 그런데 예수는 죽지만 만유의 주가 되었다. 왜? 만유가 다 그 안에 있다. 우리가 다 그 안에 있다. 우리가 다른 데 있지 않다. 그 안에 있으니까 생전 보지 않았지만 우리 주님이 된다.
왜 아담이 우리 주인이었는가? 우리가 아담 안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다. 왜 예수가 우리 주님이 되는가? 나를 포함한 나의 대표자니까 주님이다. 예수 전하면 된다. 나를 전할 필요가 없다. 예수를 전해야 내가 전해진다. 예수를 전하면 자동적으로 내가 전해진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놀라운 전쟁이다. 복음은 전쟁이다. 내가 나를 증거해도 된다. 예수님이 내가 나를 증거해도 되고, 하나님이 나를 증거해도 되고, 또 내가 하나님을 증거해도 된다고 말했다. 이런 세계가 우리가 만들어 놓은 세계에서는 없다. 다 미친놈을 증거하면 미친놈이 되는 것이다.
우리 생명이 주께 달렸다. 히브리서 2장에 보면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의 뜻을 따라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으로써 그들과 함께 증언하셨느니라 하나님이 우리가 말하는 바 장차 올 세상을 천사들에게 복종하게 하심이 아니니라 그러나 누구인가가 어디에서 증언하여 이르되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시며 만물을 그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 하였으니.”(히2:3~8)라고 했다.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인데, 만유가 다 내 안에 있다. 그 내 안에 있다. 내가 지식을 아는 그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능력이 있는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만물이 내 안에 있는 그 나다. 만물이 내 안에 있는 그 나다. 그러니까 사람은 만물의 주가 되는 것이다.
예수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알고 모르고 능력이 있고 이것이 예수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나도 그와 함께 죽을 수밖에 없는 그 사람이 예수 안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이다.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계22:20) 이분이 오시고 오시고 오시는 것이 바로 우리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분이 영광 받는 것이 우리가 영광 받는 것이다. 우리 영광이 따로 있지 않다.
사람들은 영광이 따로 따로 있으니까 서로 경쟁한다. 싸운다. 네 영광이 크냐? 내 영광이 크냐? 한다. 군대는 별 하나에도 차이가 엄청나게 크다고 한다. 별 하나 있는 사람이 별 하나 없는 사람의 촛대 뼈를 군화로 깐다고 한다. 군대가 세상의 축소판이다.
여기서는 그럴 일이 없는 것이다. 내가 다 그 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만일 그 사람을 욕하면 나를 욕하는 것이고, 내가 그 사람을 영광스럽게 하면 내가 영광을 받는 것이고, 주의 영광 안에 우리가 있다. 그분의 죽으심 안에 포함된 것은 그분의 영광 안에도 포함된 것이다. 같은 이치다. 왜냐하면 그 죽으심과 영광이 다른 것 같지만 다른 것이 아니고 다 같은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눈이 열리면 보이는 것이다. 영광이구나! 이렇게 보이는 것이다. 손바닥 양면도 아니다. 바로 거기서 거기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우리 눈이 닫혔을 때는 실패한 사람으로 보였지만 우리가 눈이 열리면 그 사람이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세상 안에서는 그 사람이 실패한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동산 안에 가면 어떻겠는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마17:5)라고 하지 않겠는가? 판이 바꿔져서 그런 것뿐이다.
그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는 피 흘리고 죽었는데, 살아나서 펄펄 날아다녔다고 하는 것은 유치원 아이들에게 하는 얘기다. 알고 보면 한 자리고 같은 자리이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보인다는 것이 축복이다. 저것이 참 인생이구나. 저기가 내가 있을 자리구나. 저기가 내 아버지 집이구나. 갔다 왔다 하는데 어디를 갔다 왔다 하는가? 그냥 그 자리가 그 자리이다. 예수님이 갔다 왔다 했는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3)고 하니까 상당히 왔다 갔다 한 줄 아는데 왔다 갔다 한 것이 없다. 그 자리가 그 자리이다.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요14:8)하고 또 물으니까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14:9)고 하셨다. 거기 그냥 있다. 예수는 그냥 있다. 우리에게 더 분명하고 더 확실하고 더 완전하게 보인 것이지 어디를 갔다 왔다 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가 만일에 동산에 있을 때, 그것이 사탄이라고 보였으면 먹었겠는가? 안 먹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너무 좋게 보였으니까 먹은 것이다.
이제 우리가 예수 자신이 너무나 좋게 보이면 우리가 거짓말에 속을 필요가 없다. 왜 속겠는가? 사람의 중요함을 알고도 또 천사에게 속겠는가? 우리 교회에서도 누가 그래서 좀 내놓아보라고 했더니 아무 소리도 하지 않는다. 밤에 하나님을 만났다느니 하나님이 와서 말해주었다느니 얼마나 확신을 갖고 얘기를 하는지 가만히 두고 봤더니 완전히 휘젓고 돌아다니고 지배하려고 한다. 그래서 내가 좋은 말로 그렇게 좋은 것이 있거든 내놓아봐라. 같이 나눠먹자 했더니 뭐를 내놓을 것이 있어야지 아무 말도 못한다. 하늘을 날아다닌다고 해도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먹을 양식은 다 그런 게 아니다.
오늘 사랑방에 올려놓았는데 이것을 다 하려면 시간이 모자랄 것 같아서 중심만 얘기했다. 여러분이 참고하시면 좋겠다.
사람이 되자! 다른 것은 없다. 사람 되자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모든 것을 다 주었다. 칼빈도 사람에게 다 주었는데 다 준 것을 누리려면 예수와 연합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어떻게 연합하느냐가 없다. 성령으로 된다는데 성령으로 되면 다 좀 해버리지 뭣 하러 놔두고 있겠는가? 안 되는 것은 다 성령이 한다고 하는데, 그러려면 복음을 전할 필요가 뭐가 있는가? 가만히 놔두고 성령이 와서 해버리면 되는데, 뭣 하러 복음을 전하고 있겠는가?
아주 쉽고 간단하고 너무 쉽다. 예수 알면 다 아니까 너무 쉽다. 성경에 있는지 찾아보라. 못 찾는다. 길을 찾을 것 같지만 못 찾는다. 왜? 예수를 알면 그것이 길이다. 진리를 찾는다고 하는데 성경에 찾아보라. 진리를 찾는데 뭐가 진리가 되는지 없다. 생명을 찾는다고? 성경에 찾아보라. 생명 되는 것이 있는지 못 찾는다. 예수가 생명인데 찾을 것이 뭐가 있는가?
너무너무 쉽다. 예수를 알면 다 아는 것이다. 신약의 중심은 예수다. 구약이 여호와 중심이라면 신약은 예수 중심이다. 우리가 무엇을 알아서 큰 소리를 치겠는가? 언제 성경을 다 연구해서 큰 소리를 치겠는가? 다 같은 말이다. 그것이 예수가 아니면 결론이 안 나고 열매가 열리지 않는다. 모든 말씀이 다 그렇다.
옛날에 했던 말씀을 사랑방에 염*선 자매가 요점 정리를 해놓았는데 유심히 본다. 아, 여기서 이것이 모자랐구나. 그것이 생각이 난다. 그래서 나는 사람으로 만족한다. 사람으로 만족하고 사람의 영광이 너무 영광스럽다. 천사의 영광보다 훨씬 아름답다. 누가 날아다닌다고 해도 부럽지 않다. 모든 것을 다 안다고 해도 부럽지 않다. 모든 것을 다 안다고 해도 예수 모르면 헛일이다. 답이 안 된다.
성경을 천 몇 백 독을 했다는 사람도 있고 별 사람이 다 있다. 그래도 안 된다. 읽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성경 연구해서 될 것 같으면 진즉 다 되지 안 되겠는가? 천 번 읽으면 된다고 하면 천 번 읽을 사람이 수없이 많다. 요즘에 성경 통독을 하던데 그렇게 하면 일 년에 몇 번 읽지 않겠는가? 성경 통독한다고 될 것 같으면 다 한다.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복음은 성경을 읽으라는 것이 복음이 아니다. 그렇다고 성경을 읽지 말라는 말은 아니다. 성경을 읽어도 사람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방법만 찾아다니면 아무 소용이 없다. 동산을 나온 인간은 모든 것을 무슨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생명은 방법이 아니다. 만나면 낳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면 애기 낳는 것이지 무슨 방법이 어디 있는가? 너무 쉽고 간단한 문제이다.
잘 들어주셔서 감사하다. 너무 오래 한다고 해서 할 수 없이 그만하는 것이다. 하루 종일도 하겠다. 옛날에도 집회하면 네 시간씩 했다. 중간에 찬송하나 부르고 또 했다. 그렇게 하다가 강대상을 밀고 들어와서 중간에 구멍이 뚫어졌다. 재미있는 일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