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쓰는 일기 - 새해, 이틀을 남겨놓고-
이태호
하늬바람의 추임새에 바다가 춤을 춘다. 살랑대는 파도 끝이 곱다. 된바람 때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어쩌자고 이렇듯 온화할까? 겨울날씨답지 않은 오늘이 몹시 불안하다. 닫혔던 아내의 공방 창문을 모두 열었다. 얼른 바람이 먼저 햇빛을 몰고 들어왔다. 함초롬히 피어나는 꽃봉오리들이 부르르 몸을 떨며 잠시 움츠리는 것 같다. 추운 겨울을 버티고 있는 열두 개의 난(蘭)화분들이다. 흠뻑 물을 먹인 난 잎이 싱그럽다. 햇살, 바람까지 곁들이니 아까보다 품위가 더욱 고고하다.
난 화분 열두 개 중, 두 녀석은 선배님께서 생전에 주신 선물이다. 그중 한 녀석이 꽃망울을 터트리려고 한다. 썰렁했던 아내의 공방이 한결 훈훈하다. 난(蘭)의 원래 주인은 지난달 유명을 달리했다. 그분의 인생길 또한 곡예사와 같았다. 고비마다 장애물을 건너뛰더니 마지막 장애물의 덩치는 그분이 밀어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선배님은 가셨지만, 그분이 남긴 란은 꽃망울을 맺혔다. 아직 만개는 안 되었지만, 거침없이 곧게 뻗은 이파리가 평소 선배님의 인품과 닮았다.
이틀만 지나면 새해다. 세월이 흐르는 물 같다는 말을 이제야 제대로 알 수 있다. 달랑 두 개 남은 파랑과 빨간색 숫자가 오늘따라 유난히 쓸쓸하게 보인다. 며칠 전 모임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다름 아닌 ‘항구성’과 ‘보편성’이다. 돌아가며 한마디씩 하는 덕담 중에 섞어 쓴 단어다. 일 년에 한두 차례 모이는 관계지만, 이번 송년 모임은 예년과 달랐다. 새해에 종심(從心)을 맞는 회원이 많아서다. 그 때문인지 나의 인사말에 그런 단어를 사용한 것 같다. 시대를 초월하고 지역을 뛰어넘는 그런 관계를 지속시키자는 의도였을 것이다. 회원 모두는 앞만 바라보고 냉정하게 살아온 사람들이다. 다시 말하면, 적자생존(適者生存)의 원칙을 고수했던 사람들이다. 진급을 위해서라면, 선배나 친구도 팔았던, 그 각박했던 순간을 경험했던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퇴직한 다음부터 동지란 명찰을 달고 모인다. 이젠 경쟁의 대상이거나 시기나 미움이란 더는 없다. 그저 시들어가는 육신을 끌고 애써 회상의 깃발을 옳게 수선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2017년의 이런저런 만남도 거의 끝나간다. 달랑, 이틀 남았지만, 동서남북을 돌아다닐 필요가 없다. 나머지 만남은 郡內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나도 2017년을 제대로 배웅할 준비를 해야겠다. 우선 동안 기록해온 일기장을 검색해야겠다. 몇 년 전에도 일기장을 읽다가 모두 태운 적이 있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진실의 여백을 넓히지 못한 흔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정직하고 단출한 일기를 쓰자.” 스스로 다짐했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당시 일기장을 태운 다음 일기형식으로 쓴 글을 다시 읽어본다.
새로 쓰는 履歷書
십수 년의 일기장 속에는 진실을 왜곡하기 위한 수사(修辭)로 분칠 된 부분이 많다. 그런가 하면, 제3의 법칙에 누구보다 충실하게 따랐던 흔적이 여기저기 얼룩져 있다. 다시 말하면, 주관이 객체가 되지 못한 허수아비와 같은 삶이 더 많다.
일기장을 태우는 행위는, 동안의 이력을 지우는 것과 같다. 이력서의‘履’자는 신발을 뜻하기도 한다. 이력서를 찢는다는 것은 새로운 신을 신겠다는 각오이다. 물론 헌 신발일수록 편하고 소중한 것들이 더 많을 수 있다. 그것들을 과감하게 버린다는 것은 대단한 결단과 각오가 전제되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무슨 까닭으로 공들여 쌓아놓은 나의 城을 애써 허물어트리려 하는가? 거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또래라면, 내 생각에 조금이라도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라도 그렇듯 우린 잘나가던 시절이 있었다. 명예와 부, 건강과 사랑 등, 주위 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들이 현재의 나에게 무슨 영광을 가져다주었나? 냉정하게 생각해볼 일이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가정을 이루었고, 먹고 살기에 불편하지 않을 경제력, 이 모든 것은 내 이력의 작용이 아닌가.’ 옳은 말이다. 나의 말은 그 모든 것을 부정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내가 나의 ‘이력서’를 찢는다는 의미는 지금도 늦지 않을 새로운 삶을 살고 싶다는 염원의 발로(發露)이다.
앞으로 나는 내 마음과 머릿속으로 부단히 생성되고 있는 ‘결핍증’의 물꼬를 차단하는데 역점을 두어야 할 것 같다. 결핍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욕심에서 나온다. 욕심의 배경에는 이타보다 배타가 지배적일 수뿐이 없다. 그것을 단정 지을 수 있었던 원인은 나의 ‘이력서’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돌이켜보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들도 많았다. 나는 그렇게 해서 얻은 산물로 내 성(城)을 쌓았다. 하지만 그토록 견고하다고 생각했던 나의 성이란? 이쯤에서 둘러보니 허술하기 짝이 없다.
높이 올린 성벽 안에는 꽃 한 송이 피울 수 있는 공간조차 없다. 채워진 것들이란 시기와 질투, 오만과 편견, 증오 같은 나쁜 냄새로 가득 차있다. 나는 그것들을 마치 누에처럼 내 몸을 스스로 가둔 것이다. 한심스러웠다. 또한, 안다는 것은 무엇의 기준인가? 우선 학문으로만 본다면 아직도 내 머릿속에는 수많은 공식이 잠들어 있다. 특히, 공학이거나 수학의 공식들은 복잡하여 난해한 것들이다. 그렇다면, 지금 내 삶 속에서 피타고라스의 정리나 리만의 제타 함수, 전기나 전자공식을 활용하고 있는가? 절대로 아니다. 그저 ‘구구단’을 2단에서부터 9단까지 제대로만 외운다면, 셈하는 데에는 전혀 지장이 없다. 또한, 어렵사리 외워두었던 각 분야의 법칙이나 규범, 수칙은 또 어떠한가? 이 또한 살아가는데 별 소용이 없었다. 그냥 “안녕하세요?”라고 정중하게 인사만 잘하면 관계의 법칙에서도 큰 문제가 없다. 그렇다면 비우고 난 뒤 그 자리에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사랑’과 ‘배려’를 택하는 것이 가장 알찰 것 같다.
우리의 삶이란 결국 태어나서 만남과 이별, 죽음의 반복이다. 다만, 거기에 특별한 것이 있다면, 누군가를 만나서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사랑에 대하여 나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오래전부터 사랑을 화두로 깊이 생각해왔지만, 아쉽게도 만족한 답을 얻지 못했다. 그 때문에 고대 희랍사람들이 남긴 사랑에 관한 세 가지 정의를 나에게 적용해 보았다.
첫째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인 아가페(agape)이다. 그것은 희생을 전제로 한 종교적인 사랑이기에 완벽하게 실천하기란 참 어렵다. 그 때문에 종교의 영향으로 자신을 희생하겠다는 생각은 꿈도 꾸어보지 못했다. 둘째로는 남녀 간의 사랑 에로스(Eros) 이다. 그것은 뜨겁고 정열적인 만큼 상대방을 소유하고 독점하고 싶은 사랑이다. 그런 사랑을 나도 해보았지만, 젊었을 때 이야기지 지금은 정열을 뺀 나머지, 소유나 독점 같은 낱말은 어울리지 않을 나이다. 마지막 세 번째는 필리아(philia)이다. 그것은 인간 상호간에 대한 넓은 배려와 우정, 사랑이다. 이 세 번째 사랑의 개념이 가장 관심 있고 실천하기에 거부감이 없을 것 같다.
결론적으로 나는, 새해부터라도 새로운 이력서를 쓸 것이다. 남은 생애 몇 칸이나 채울지 알 수 없지만, 우선 희랍인들이 남긴 세 가지의 사랑에 관한 지혜에 대하여 깊이 있는 사색이 필요할 것 같다. 그리고 하나씩 실천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배타적이지 않은 종교를 택할 것이다. 그 종교의 교리([敎理)속에는 제대로 된 이력서를 기록할만한, 참된 이치가 있을 것 같다.
이제는 비워야 할 때이다. 잡다한 지식의 쓰레기통을…….
첫댓글 사랑과 배려..결국 남는 것은 그러리라고 저도 공감하며 생각해봅니다. 엉뚱 댓글이지만 사모님이 대단하십니다.ㅋ 예리하시고 감성적이신 선생님의 곁을 지키시려면 여간한 분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따뜻한 연말 보내시고 더욱 멋진 2018년 맞으시길 기도합니다.*^^*
이젠 지쳤나봅니다. 무슨 일을 해도 그냥 웃지요. 사실 그 웃음이 더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요.
새해부터 여생의 motto 를 사랑과 배려로 세웠으니 조금 나아질 것 같습니다. 가제는 게 편이라는 말이 옳습니다.^&^
이 선생님의 깊은 사색, 마음의 밭을 따라 잠시 시간을 잊었습니다. 종심의 나이, 이제 모든 짐 내려놓고 편히 휴식을 취해야할 때가 아닌가요? 무엇보다 마음의 평화가 우선인것 같더군요. 저의 경험으로는.....
네, 명심하겠습니다. 처음 뵈었을 때 제 또래인 줄 알았습니다. 마음의 평화를 얻으면 선생님처럼 온화한 얼굴로
서둘지 않는 삶의 걸음걸이를 걸을 수 있겠습니다. 새해에도 많이 웃으시고 건강하십시오.
'잡다한 지식의 쓰레기통'이라고 겸손하게 말씀하셨지만 사실은 보물창고입니다. 그 보물창고는 불에 태우거나 쓰레기통에 버릴 수 있는 용도폐기성 물건이 아닙니다. 바르지 못하고 옳지 못한 이 세상을 따끔하게 훈계하고 지도하는데 꼭 필요한 어른의 위상이기도 합니다. 새해에는 부디 애국심과 가치관마저 마구 흔들어대는 혼란스러운 나라가 온당한 방향으로 굴러 가기를 기원합니다. 이태호 선생님도 많이 웃는 행복한 새해 맞으시길 바랍니다.
'지식이 많은 즉 번뇌가 많으니라.'라는 말이 스쳐옵니다.
제 새해 소망은 시골에 다니면서 농사를 열심히 짓고 싶어요. *^^*
경건한 새해맞이를 읽으면서 제 자신을 돌아봅니다. 이태호 선생님이 지닌, 청춘의 열정과 노년의 깊이가 부단한 자기성찰임을 다시 깨닫습니다. 어제, 서산 인근에 갔다가 선생님께 전화 드리려다 해미 읍성으로 돌아나오고 말았네요. 새해에도 잘 지내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