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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이마쥬의 잔존 - 기억과 정신 [정신 -> 영혼]
순수 추억 (Le souvenir pur 147-152)
147 앞의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자. 우리는 순수추억, 이마쥬-추억, 지각작용이라는 세 가지 항목들을 구별했는데, 사실상 그 중 어떤 것도 게다가 고립적으로 생산되지 않는다.
<도식,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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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각작용은 현재적 대상과 더불어 정신의 단순한 접촉이 결코 아니다. 지각작용은 그것을 해석하면서 완결시키는 이미지-추억들로 죽 배어 있다. 이번에는 이미지-추억이 “순수추억”과 지각작용에 참여한다: 그런데 이미지-추억은 순수 추억을 물질화하기 시작하고, 또한 이미지-추억은 지각작용에서 스스로를 육체화하기로 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후자의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이미지-추억은 생겨나는 지각작용으로 정의되리라. 결국 순수추억은, 아마도 권리 상으로 독립적이라 하더라도, 자기 자신[순수추억]을 폭로할 때는 생생하며 색깔있는 이미지 속에서만 정상적으로 드러낸다. 이 세 가지 항목들을 동일한 직선 AD의 잇따르는 선분들인 AB, BC, CD라는 상징으로[기호표기로] 나타내면, 사람들은 우리의 사유가 A에서 D로 나아가는 연속적인 운동의 선을 묘사한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그 항목들 중의 하나가 어디에서 끝나고 다른 항목은 어디에서 시작하는지 정확하게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148)
148 게다가 의식이 어렵지 않게 매번 확증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기억(la mémoire)을 분석하기 위해, 그 의식이 작업하고 있는 기억의 운동자체를 따라간다는 것이다. 하나의 추억(un souvenir)을 다시 찾는 것, 즉 우리 역사의 한 시기를 상기하는 것이 문제인가? 우리는 고유한(sui generis) 작동(un acte)을 의식한다. 이 고유한 작동에 의해 우리는 우선 과거 일반 속에서, 그러고 나서 과거의 어떤 지역(région) 속에서, 우리 스스로 다시 자리 잡기 위하여 현재로부터 스스로를 떼어 놓는다. 이는 더듬기 작업인데, 사진기의 초점 맞추기와 유비적(analogue)이다. 그러나 우리 추억은 아직도 잠재적 상태에 머물러 있다. 우리는 이렇게 추억을 받아들일 준비를 단순히 갖추고서, 적절한 태도를 채택한다. 그 추억은 마치 구름처럼 나타나고, 그 구름은 점점 응축되리라; 그런데 그것은 잠재적 상태로부터 현실적 상태로 이행한다. 그리고 추억의 윤곽들이 그려지고, 추억의 표면이 채색됨에 따라서, 그 추억은 지각작용을 모방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 추억은 자신의 깊은 뿌리들에 의해서 과거에 매여 있다. 만일 그 추억이 일단 실현되어서, 그 추억이 자기의 본래의 잠재성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면, 만일 그것이 현재적 상태인 동시에 현재와 뚜렷이 구분되는 어떤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 추억을 하나의 [순수]추억으로써 결코 재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148)
148-2 관념연합론의 항구적인 오류는 살아있는 실재성인 생성이라는 생성의 연속성 대신에 타성적이고 병치되어 있는 다수의 불연속적인 요소들로 대체하는 것이다. 이렇게 구성된 요소들 각각은 그 기원 때문에, 자신을 앞서는 어떤 것과 자신을 뒤따르는 어떤 것을 포함하는 바로 그 이유로, 우리가 보기에는 그 각각은 혼합된 상태, 어느 정도로는 불순한 상태에 있는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관념연합론의 원리는 모든 심리학적 상태가 일종의 원자, 하나의 단순한 요소이기를 바란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구별했던 각 국면들에서 불안정한 것을 안정된 것을 위해, 즉 시작을 목적을 위해 희생시켜야만 하는 것이다. (148-149)
지각작용이 문제되는 경우는 어떠한가? 사람들은 지각작용에서 지각작용을 색채 있게 하는 감각작용들만을 지각작용에서 보려고 할 것이다. 사람들은 지각작용으로 어슴프레한 핵을 이루는 회상된 이미지들은 잘 못 인식할 것이다.
그러면 이번에는 회상된 이미지가 문제되는 경우는 어떠한가? 사람들은 그것을 이미 만들어진 것(toute faite)으로, 즉 약한 지각작용의 상태로 실현된 것으로 간주하고서, 사람들은 이런 이미지가 점진적으로 발전시켰던 순수 추억에 관해서는 눈을 감을 것이다. 따라서 관념연합론이 안정된 것과 불안정한 것 사이에 이렇게 세워 놓은 이 둘의 경합에서 지각작용은 항상 이미지-추억을 대체하고, 이미지-추억은 항상 순수 추억을 대체할 것이다. 그런 이유로 그 [순수]추억은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관념연합론은 진행 과정의 전체인 [선분] AD를 선 MO에 의해 두 선분으로 나누기 때문에, OD라는 부분에서는 선AD를 끝내기하는 감각작용들만을 본다. 그리고 관념연합론에서는 이 감각작용들이 지각작용 전체를 구성한다.그리고 다른 한편 관념연합론은 AO라는 부분을 또한 실현된 이미지로 환원하는데, 순수 추억이 펼쳐지면서 이 실현된 이미지 속에 도달하는 것이다.따라서 심리학적 삶은 전적으로 감각작용과 이미지라는 두 요소로 귀착시킨다. (149)
그리고 한편 마치 사람들은 이미지 속에 순수 추억을 푹 잠기게 하는데, 그 순수 추억이 이미지의 원본적(original) 상태를 만들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한편마치 사람들은 이미지를 또한 지각 작용에 접근 시켰는데, 지각작용 속에 미리 이미지 자체의 어떤 것을 놓는 것과 마찬가지로,사람들은 이 두 상태들 사이에 정도의 차이 또는 강도의 차이만을 발견할 것이다. 거기서부터 강한 상태들와 약한 상태들의 구별이 비롯되는데, 우리는 전자들을 현재의 지각작용들로 삼을 것이고, 후자들을 – 이유는 알 수 없으나 – 과거의 표상들[재현들]로 삼을 것이다. 그러나 진실인즉, 만일 우리가 스스로 과거에 단번에 위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과거에 결코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과거는 본질적으로 잠재적이어서, 과거는 과거로서 우리에게 파악될 수 있는데, 그 경우는 우리가 운동을 – 이 운동에 의해 과거는 어둠으로부터 빛으로 출현하면서 현재적 이미지로 피어나게 되며 - 따르고 채택할 때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현실적인 것 그리고 이미 실현된 어떤 것 속에서 과거의 흔적을 찾으려고 해 보아야 헛된 일이다. 그것은 빛 아래서 어둠을 찾으려는 것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거기에 바로 관념연합론의 오류가 있다. 즉 관념연합론은 현실적인 것 속에 위치해서, 어떤 현재 상태이며 실현된 상태에서 그 상태의 과거 기원적인 징표를 발견하기 위하여 헛되기 노력들을 소진하고 있는데, 그 헛된 노력이란 추억을 지각작용으로부터 구별하기 위하여, 그리고 관념연합론이 미리 크기의 차이만이 있도록 단죄했던 것을 본성상 차이로 만들기 위하여 이다. , (149-150)
150 ‘상상하다(imaginer)’는 ‘추억되다(se vouvenir)’가 아니다.아마도 하나의 추억은 그것이 현실화됨에 따라, 하나의 이미지 속에서 살아가는 경향이다. 그러나 그 역은 진실이 아니다. 순수하고 단순한 이미지가 나에게 과거와 연관이 있으려면, 단지 내가 이미지를 과거 속으로 찾으러 갈 경우이며, 그[추억의] 이미지를 어둠으로부터 빛으로 이끌었던 연속적 과정을 따르면서 이다. 거기서 심리학자들이 너무도 자주 잊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들이 결론 짓기를, 회상된 감각작용은 사람들이 감각작용에 무게를 둘수록 더욱 현실적이 된다는 사실로부터, 감각작용의 추억은 이런 시발적(naissante) 감각작용이었다고 결론을 짓는다는 것이다. 그들이 내세우는 사실은 아마도 정확할 것이다. 내가 과거의 고통을 떠올리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더욱더 나는 그 고통을 실제적으로 느끼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어려움 없이 이해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말한 바 있듯이, 추억의 진행과정은 바로 물질화되는(se matérialiser)것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고통에 대한 추억이 진실로 기원에서 고통인가를 아는 일이다.최면에 빠진 환자는, 사람들이 그에게 덥다고 끈질기게 반복하면, 마침내 덥다고 느낀다. 거기서부터{최면 상태에서} 암시된 말투들에서 이미 더위가 있다는 것에 도달하지 못한다. 한 감각작용의 추억이 이어져서 감각작용 자체가 된다는 사실로부터, 사람들은 그 추억이 하나의 시발적인 감각작용이었다고 결론지어서는 더욱 안 된다. 이런 이유에서 이 추억은, 아마도 곧 시발적{생겨날} 감각작용과 관련하여, 암시를 주는 최면술사의 역할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비판하는 추론은, 이런 형태로 소개되어는 이미 별로 입증할 만하지 못하다. 그 추론은 아직은 악순환까지는 아닌데, 왜냐하면 추론은 추억이 현실화됨에 따라 변형된다는 것을 의심의 여지없는 진실로 혜택을 입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반대의 길을 따라서 추론 할 때 불합리(l’absurdité)가 터져 나온다. – 그럼에도 반대 길도 사람들이 위치한 가설에서는 마찬가지로 합법적이 됨에 틀림없을 것이기에– 말하자면, 즉 사람들이 순수 추억의 강도를 증가시키는 대신에 감각의 강도를 감소시켰을 때 불합리가 터져 나온다. 그 때는 실로 만일 두 상태들이 단순히 정도의 차이에 의해서만 다르다면, 어떤 찰나에서 감각작용은 추억으로 변형되는 일이 발생해야만 할 것이다.예를 들어 한 큰 고통의 추억이 단지 [현재로서는] 미약한 고통일 뿐이라면, 거꾸로 내가 느낀 강렬한 고통이 약화되면서 끝내는 회상된 큰 고통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느끼는 것이 내가 체험하는 미약한 감각인지 아니면 내가 상상하는 미약한 감각인지를 말하는 것이 불가능한 찰나가 의심할 바 없이 도래한다(그리고 이러한 것은 자연적이다. 왜냐하면 이미지-추억은 이미 감각작용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미약한 상태는 결코 나에게 어떤 강렬한 상태의 추억처럼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추억이란 그와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151 그러나 여기서 추억과 지각작용 사이에서 정도의 차이만이 있다고 정립하려는 착각은 관념연합론의 단순한 귀결보다 더 많은 것이 있고, 또한 철학사에서 우발적 사고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는 것이다. 이 착각은 깊은 뿌리들을 가지고 있다. 그 착각은 지난 분서에서 보아, 외적 지각작용의 대상과 본성[자연]에 관한 거짓 관념에 근거한다. 사람들은 지각작용 속에서 오로지 순수 정신에게 말을 건네는 이런 교육만을 그리고 아주 사변적 관심[추억의 관념화]의 교육만을 보려 한다. 그런데 추억은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이런 종류의 인식임으로, 왜냐하면 추억은 더 이상 대상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단순히 더 강한 것의 법칙 덕분으로, 지각작용이 추억을 대체하고, 그렇게 해서 우리의 현재를 구성하므로, 지각작용과 추억 사이에 단지 정도의 차이만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과거와 현재 사이에는 물론 정도의 차이와는 다른 것이 있다. 나의 현재는 나의 관심을 일으키는 것이고, 나를 위해 살고 있는 것이며, 말하자면 나의 행동을 일으키는 것이고, 반면에 나의 과거는 본질적으로 무력한(impuissant) 것이다. 이 점을 깊이 탐구해 보자. 나의 과거를 현재적 지각작용과 대립시킴으로써, 우리가 “순수추억”이라고 부른 것의 본성[자연]을 우리는 더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5:11, 56NLI)
첫댓글 우리 글로서 철학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봅시다. 벩송의 전 작품들 중에서 이 3장 부분은 꽃이다. 우선 한 번 죽 끝까지 읽어보시라, 그리고 어린 시절 동화를 또 다시 읽듯이 읽어보시라, 그러고 나서 이 파일의 역주들과 더불어 생각해 보시라. 그리고 관점이 다르면 읽는 당신이 노트를 해보고 개념상으로 또는 전개상으로 문제가 있으면 생기면, “마실에서 천사흘밤”에서 “검색”란을 통해 ‘개념’들이 어떻게 쓰였는지를 검토해 보시라.
문제제기가 되는 쓰여진 글을, 마실가(https://cafe.daum.net/masilga)의 “프랑스인” 속에 ‘사상가’에 올려주면 답이 있을 것입니다.
(56NL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