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록에서 나타난 인침에 대한 이해
베리칩이 666의 징표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인’ 치심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666의 표를 받는다는 것이 요한계시록 7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인’치심의 모형을 모방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치심의 순서가 먼저인지 아니면 짐승의 표 666을 받는 것이 먼저인지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있다면 베리칩이 666의 징표라고 말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번 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이마에 ‘인’ 치시는 것과‘인’침 받은 숫자 144,000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1. 이마에 인침 받음
요한계시록 7장 1-3절의 말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라를 해롭게 할 권세를 받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소리로 외쳐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하지 말라 하더라.
3절에서 나타난 ‘인’을 이마에 새기거나 찍는 가시적인 것으로 해석을 하면 해석의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인’이라는 것은 무엇인가에 자국을 내거나 표시를 내는 도장이나 반지로 추측할 수 있다. 그 ‘인’이 요한계시록 14장 1절에 나타난 대로 충성된 사람들의 이마에 찍히는 어린양과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실제로 이마에 새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스프라기제인’(fragivswmen)이라는 뜻이 ‘인치다’인데 이 구절에서 ‘스프라기제인’(fragivswmen)이 사용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마에 인친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백히 알 수 있게 된다. ‘스프라기스’(sfragiv")는 인, 둥글고 긴 도장, 반지 인장의 뜻이 있는데 ‘스프라기스’(sfragiv")와 ‘스프라기제인’(fragivswmen)은 종말론적인 의미에서 사용되는 하나님의 표와 멸망의 표로도 사용된다. (겔 15:6 참조) 이러한 의미에서 ‘인친다’라는 의미를 살펴보면 사도 요한이 어떠한 의도로 기록을 했는지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은 하나님의 ‘인’을 받게 된다. 네 모퉁이에 있는 다른 천사를 보내어 그들을 보호하신다는 하나님의 ‘인’이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백성을 ‘인’ 침으로 표현한 것은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고대사회의 배경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고대사회에서는 ‘인’을 어떻게 사용하였는지, 그 용도는 어떠하였는지 몇 가지로 살펴보면 이해할 수 있다.
첫째로, ‘인’은 가죽, 짐승에게 찍었다. 이마라는 부위는 앞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가장 눈에 잘 띄는 부분이다. 그래서 예부터 눈에 잘 띄기 위해 노예나 가축에게 이마에 이 ‘인’을 찍었다. 낙인을 찍는 이유는 고대사회의 관례에 보면 나타나는데 짐승들에게 낙인을 찍는 그 의미는 이 짐승은 주인의 소유라는 뜻이다. 주인에게 속해있다는 것을 거부하지 못하도록 짐승들에게 낙인을 찍었다. 자신의 소유를 표시하기 위해서 살갗에 화인(火印)을 찍는 풍습이 있었다. 이 풍습을 인용해서 사도 요한이 계시록에 기록했다는 것이다.
둘째로, ‘인’은 노예, 종들에게 찍었다. 둘로스(dou'lo")'종'이라는 단어는 노예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짐승과 똑같은 의미로서 주인의 소유를 거부하지 못하도록 낙인을 찍었다. 고대사회의 배경을 살펴보면 당시 고대사회에서는 노예들에게 문신을 새겼다. 정직하고 착실한 노예에게는 이러한 문신이 없었으나 형벌을 받을만한 행위를 한 사람에게 문신을 새겼다. 잘보이는 얼굴 전체나 또는 팔과 손, 발에 새겼는데 아마도 저지른 범죄를 기록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신전을 도둑질하는 자가 만약 외국인이나 노예이면 그에 대한 벌로 이마와 양손에 낙인을 찍는다고 말한다. 이렇듯 낙인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정확하게 표시해 주는 역할을 한다. 또한, 종교적인 의식으로 문신을 새기기도 했는데 ‘랴웨 아니’(ynIa; hw:hyl')라는 문구를 새겼는데 그 의미는 “나는 여호와께 속하였다”라는 의미가 있다.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이라는 표시이다.
이와 같은 모습으로 하나님께서도 믿는 성도들에게 ‘인’치기 위해서 천사들을 보내셨다. 짐승과 노예에게 낙인을 찍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자신의 소유된 백성들에게 ‘인’쳐 주신다. ‘인’쳐 주시는 의미는 하나님의 소유이며, 하나님의 자녀 됨과 거룩한 백성 됨을 거부하지 못하도록 주시는 하나님의 ‘인’이다. 갈라디아서 6장 17절 말씀에 보면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라고 사도바울은 고백하고 있다. 여기서 등장하는 흔적, 스티그마(stivgma)가 바로 이러한 뜻을 가지고 있다. 스티그마(stivgma)란 단어도 고대사회에서 노예에게 찍은 낙인을 의미했다. 사도로 부름을 받은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께 인침 받은 예수님의 소유가 되고 그로 인해 받는 고난을 스티그마(stivgma)로 표현했다. 다시 말해서 스티그마(stivgma)는 예수님 때문에 받은 고난의 흔적이기보다는 하나님께 인침 받은 그 자체의 의미인 하나님의 소유로 이해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하나님의 ‘인’을 받아 하나님의 소유로서 흔적을 가진 바울은 복음을 전하며 예수님으로 인한 고난의 흔적이 있다는 것이다. 이 ‘인’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받는 구원의 보증으로서의 ‘인’이다. 더 정확히 말해 구원받은 자들이 이마에 받는 ‘보증의 인’이라는 것이다.
셋째로, ‘인’은 문서에 찍었다. 에스더 8장 8절 말씀에 보면 “너희는 왕의 명의로 유다인에게 조서를 뜻대로 쓰고 왕의 반지로 인을 칠지어다 왕의 이름을 쓰고 왕의 반지로 인친 조서는 누구든지 철회할 수 없음이라 하니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다니엘 6장 8절 말씀에 보면 “그런즉 왕이여 원하건대 금령을 세우시고 그 조서에 왕의 도장을 찍어 메데와 바사의 고치지 아니하는 규례를 따라 그것을 다시 고치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매”라고 기록이 되어 있다.
고대사회의 배경에서 볼 때 ‘인’ 침이라는 것은 중요한 표시였다. 그 배경과 의미를 가지고 요한계시록 7장 2절 말씀에 보면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받은 네 천사를 향하여 소리로 외쳐”라고 기록되어 있다. 먼저 네 천사가 와서 사방의 바람을 붙잡고 있는 모습이 나타난다. 땅에나 바다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방해하는 모습으로 비추어진다. 다른 천사가 나타나서 네 천사에게 말하는 모습이 2절의 모습이다. 그러나 그 천사는 바람이 불지 못하도록 방해하러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왔다고 성경에 기록하고 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하나님께서는 ‘인’ 치시는 것은 자신의 소유를 나타내는 것이고 내 자녀, 내 백성임을 나타내시는 증거이다. 그러나 그 증거는 가시적으로 이마에 표시가 되거나 새겨지는 것이 아니다. 성령으로 도장 찍는다는 것이다. 에베소서 1장 13절 말씀에 보면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라고 기록이 되어 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있어 성령 침례는 굉장히 중요하다. 성령 침례란 성령으로 말미암은 중생을 의미하는 것이지 성령의 체험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로마서 6장 4절에 말씀처럼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 되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 행하는 것”을 말한다. 즉,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는 것은 성령으로 거듭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의 말씀을 통해서 거듭난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선포하시고, 거듭난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3장 3절 말씀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요한복음 3장 5절 말씀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에베소서 1장 14절의 말씀에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신다”는 말씀에 근거해 천국을 기업으로 받았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마에 ‘인’을 친다는 것은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을 의미하며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천국을 기업으로 상속받게 되고 죽는 그 날까지 하나님께서 반드시 구원으로 인도하신다는 약속의 도장임을 알 수 있다.
성령 침례가 하나님의 인치심의 증거이다. 거듭남을 통해 하나님께서 택하심을 깨닫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표시를 받았다는 증거이며, 성령 침례로 하나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되기 때문이다. 믿게 되는 자녀들에게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보호 하심 아래 있다는 사실이다. 요한계시록 7장 3절 말씀에 보면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하지 말라 하더라”라고 기록이 되어 있다. 천사가 해함을 받는 것을 억제한다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택하신 종들은 피해를 입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소유하신 백성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강력한 사탄의 공격과 방해로부터 보호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속한 자들은 겪고 있는 환란과 궁핍함 속에서 보호받으며 하나님 나라에 임하는 그 날까지 인도함을 받는다. 죽음에서부터 구원하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이다.
창세기 4장 15절의 말씀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음을 면케 하시니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인’을 받은 사람이 누리는 특별한 은혜이다. 하나님의 ‘인’은 보호의 기능이 있다. 데이비드 E.아우내는 ‘인’의 기능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인의 보호 기능은 콮트 그노시스교의 논문에 분명히 제시된다. “그래서 나는 이 시간 이후로 사망이 그에게 권세를 갖지 못하게 하기 위해 그를 일으켜 물빛으로 그에게 다섯 개의 인을 찍었다.” 마술적인 인침의 보호 또는 마귀를 쫒는 기능은 고대의 문서들 그리고 부적과 다른 마술 용구들에 새겨진 명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주제다. 아람의 마술 단지에 새겨진 명각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다. “첫째 아담이 아들 셋을 귀신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그에게 찍은 인.” 유사하게 Act Andrew 27에서는 일곱 귀신이 안드레의 이마에 찍힌 인 때문에 그를 공격하지 않는다. 기독교의 주제들이 약간 첨가된 유대교의 주제들과 마술적인 표현들을 담고 있는 서머나에서 발견된 한 부적 앞면에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이여, 사람을 지키라”고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재수 없는 자여, 떠나라 천사 아라압과 솔로몬이 이것을 지닌 자에게서 너를 몰아낸다”라고 새겨져 있다.
데이비드 E.아우내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께 ‘인’침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는데 사단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심을 받는다. 이것은 하나님께 ‘인’침 받은 자들이 누리는 큰 은혜이다. 또한,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인’치심을 받은 사람은 유효한 ‘인’이고 변개할 수 없는 ‘인’임을 알아야 한다. ‘인’치심이 무효 되거나 취소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렇듯 왕이 도장을 찍고 인치는 것이 다시는 고치지 못하는 완전한 조서가 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인’치신 택한 백성들에게는 변함이 없고 영원하시다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한번 택한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박조준 박사는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백성에 영원성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은 영원히 그 결정 속에 속하게 된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로 작정한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인’치심에 대해서 살펴보았을 때 하나님의 ‘인’치심은 가시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불가시적인 것이며 상징이라는 것이다. 이마에 무언가 새겨지고 삽입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침례를 받은 사람의 상징적 표현이며 끝까지 구원으로 인도하신다는 하나님의 변치 않는 약속 도장이라는 것이다.
2. 인침 받은 숫자 144,000
요한계시록 7장 4절 말씀에 보면 “내가 인침을 받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침을 받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십사만사천이라는 숫자는 문자적인 해석이 있고 상징적인 해석이 있다. 오래전부터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가 서로 대립하며 칼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제한 속죄론과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무제한 속죄론이 논쟁이 되고 있다. 또한, 이 두 주장이 옳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이 둘의 접합점을 찾아 문자 그대로 십사만 사천을 택하시어 수많은 이방인을 구원한다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십사만사천이 문자적인 숫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온 인류를 통틀어 십사만사천만 구원받는다는 것은 사실상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구약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삼으신 백성들만 해도 십사만 사천은 이미 넘었다. 그렇게 된다면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이론에 머무르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과거에도 수많은 백성을 자신의 자녀 삼으셨고, 지금도 삼고 계시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삼으실 것이다. 그러므로 십사만 사천이라는 숫자는 문자적으로 해석하게 되면 큰 오류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의 견해를 보면 144,000이라는 숫자를 제한하고 있고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국한되었다고 말한다. 에두아르트 로제는 144,000이라는 숫자를 이스라엘의 남자로 제한하며 말하고 있다:
그들은 모든 음행으로부터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마지막 역경 속에서 결혼을 거부했던 사람들이다. (고전 7, 1,8, 26 이하 참조) 더 나아가 여기서 어떤 내용은 유대 묵시적인 전승에서 유래될 수 있다. 유대 묵시적인 전승에 따르면 (쿰란 공동체에서처럼) 결혼하지 않고 사는 남자들만이 실제로 마지막 때에 이스라엘로 지칭될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은 상당한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이렇게 주장을 한다면 여자와 결혼한 남자는 구원받지 못했다는 결과가 되어버리게 된다. 구원이 결혼하지 않은 남자들에게만 정해져 있다면 바울이 결혼을 해도 괜찮다는 것(고전 7:9)도 거짓 증거가 되고 만다.
오늘날에 이처럼 144,000이라는 숫자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이단 종파가 생겨났다. 이만희 교주가 있는 신천지이다. 신천지에서도 12지파를 강조하며 구원받는 백성은 신천지교인 144,000이라고 말하였다. 각 12지파의 신천지교인이 차게 되면 그들이 구원을 받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흥미로운 사실은 신천지교인이 144,000명이 되면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고 주장하는데, 현재 144,000명이 넘었다는 주장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신천지는 이 사실을 감추고 있다. 그 이유는 144,000명이 되면 하나님 나라가 임해야 하는데 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144,000이라는 숫자는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 과연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는지, 아니면 상징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은지 살펴볼 것이다. 이미 결론을 내리면 상징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상징적으로 보는 학자들의 견해도 결론은 같지만 해석하는 부분에서는 조금의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상징적 해석도 잘 분별해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오토 뵉허는 여러 학자의 144,000에 대한 상징적인 견해를 『오토 뵉허의 요한묵시록』이라는 책에서 설명하고 있다:
부세트(Wilhelm Bousset)에 따르면 유대계 그리스도인이었던 요한묵시록 저자는 요한묵시록 7장 2-8절에서 “12지파 가운데 144,000명의 인 맞은 유대인”에 관한 유대적 전승을 받아들였다. 이 전승은 마지막 날에 12지파가 새롭게 갱신된다는 후기 유대교적인 희망과 연관되어 있다. 또 부세트에 따르면 요한묵시록 14장 1-5절은 7장과 같은 자료를 사용하고 있다; 144,000은 원래 요한묵시록 7장과 14장에서 동일한 의미였는데 14장에서 요한묵시록 저자는 이 숫자를 7장에서의 144,000의 의미와는 달리 이해하였다. 요한묵시록 7장에서 인 맞은 144,000명은 14장에서는 이미 구원을 받았다. 요한묵시록 저자는 144,000을 신앙 때문에 순교한 자들과 금욕한 자들과 관련시키는데, 이들과 더불어 어린양이 천년 왕국을 통치한다; 이 장면은 결국 요한묵시록 저자에 의해서 선취적으로 생각된다.
부세트는 상징적으로 해석은 하고 있지만, 명확한 해석은 아니다. 왜냐하면, 부세트도 144,000이라는 숫자를 신앙 때문에 순교하고 금욕한 자들에게 연관을 짓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이 천년왕국을 다스린다고 하는데 개혁주의 입장에서 천년왕국은 따로 없고, 현재 이 땅이 천년왕국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무천년설적 해석은 아니다.
또 챨스(RobertHenry Charles)는 요한묵시록 7장 2-8절은 영적인 의미로서의 ‘인’ 맞은 144,000명으로 말한다. 144,000은 완전성과 동시에 충만함(12×12×1,000)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숫자는 현존하는 신앙인들의 수로서 종국적인 수이기도 하다. 이 숫자를 영적이고 진정한 이스라엘의 12지파 가운데 ‘인’ 맞은 자로 이해한다. 그리고 챨스는 144,000은 죽음의 문을 통과하고 첫 열매로서 하나님께 바쳐진 자들이라고 말한다.
로마이어(ErnstLohmeyer)는 만다교 페르샤 문헌에서 병행 부분을 발견하여 봉인을 설명하면서 재난에서의 보호를 설명하고 있다. “숫자 12,000(그리고 이 숫자의 12배인 144,000)은 묵시적이다. 즉, 그 수의 의미는 종교적인 완성과 온전함이다”라고 말했다. 하도른(Wilhelm Hadorn)은 숫자 144,000은 완전수인 12에서 출발한다. 하나님께 선택된 12지파의 완전한 회복을 상징하고 있다. 이스라엘 12지파가 회복하는 것이 종말론적인 희망의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 144,000의 숫자를 안전한 공동체를 의미하고 있다. 직켄베르거(Joseph Sickenberger)는 하나님의 소유 144,000은 인 맞은 수이고 하늘의 완전한 수 144(144=12×12)를 이룬다고 말했다. 또한, 그 숫자는 “마지막 전쟁에서 쓰임 받게 될 그리스도의 정예군”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빅켄하우저(Alfred Wikenhauser)는 완전을 의미하는 숫자 12×12와 공동체의 강력한 단위 1000을 곱해서 이 숫자가 나타난다고 말했다. 이들은 우상숭배를 거절하며 양의 피를 통한 속죄된 백성과 하나님께 바쳐진 제물과 헌물로 이해하였다. 크라프트(Heinrich,Kraft)는 144,000의 숫자가 완성과 충만을 의미하는 12×12,000으로 이스라엘의 거룩한 남은 자로 해석했다. 흠 없고 완전한 제물로서 이 숫자를 해석하고 있다.
또 다른 해석으로 하문호 박사의 주장을 살펴보면 144,000=3×4×12×1,000이라는 것이다:
3×4의 의미는 3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나타내는 숫자이며, 4는 동서남북 사방, 곧 세상을 가리키는 숫자이다. 그리하여 3과4를 더한 7이나 3과4를 곱한 12라는 숫자는 완전 숫자로서 전체 또는 완전무결함을 뜻하는 것이다. 1,000의 의미는 10이나 100이나 1,000과 같은 숫자는 만수(滿數)라고 한다. 만수란 가득 찼음을 나타내는 숫자라는 뜻이다. 그릇에 물이 가득 찬 상태와 같은 것을 뜻하는 것이다. 한자로 “가득할 만”자를 써서 “만수”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견해는 어느 정도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결국, 이 견해의 의미는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가득하게 하실 것을 의미한다. 어느 특정한 인물들로 정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견해는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144,000이라는 숫자를 문자적으로 해석하기엔 오류가 있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상징적인 숫자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하나님의 숫자 3과 인간의 숫자 4로 이해하며 하늘과 땅의 완전한 숫자가 차는 것이 하나님이 계획하신 자기 백성들이 완전히 돌아오는 것을 암시한다고 영적인 해석을 하는 것이 오류가 적고 오히려 더 타당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숫자를 교회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레몬 모리스는 이 숫자를 교회로 해석을 하였다:
성경에서 교회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로 불렸고(마 19:28; 눅 22:30; 약 1:1), 이 사상은 성경이 ‘흩어진 유대인’들에게 서신으로 보내어진 그 당시에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 (벧전 1:1) 참 유대인임과 동시에 교회, 즉 ‘하나님의 이스라엘’로 표현되어 있다. (엡 1:11, 14 참조; 벧전 2:9 이하) 교회는 하나님의 ‘친 백성’(딛 2:14)이요, ‘아브라함의 씨’(갈 3:29)이며, ‘할례당’(빌 3:3)으로서 그리스도의 소유물로 표현되었다. 고린도전서 10:18에 있는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이란 말이 내면적으로는 ‘영을 따라 난 이스라엘’을 의미하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당시 이러한 견해는 널리 인정되었으며 요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의 견해는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會)라”(2:9; 3:9 참조)고 말한 구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새 예루살렘’도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성으로 표현했으며(21:2), 그 문 위에는 열두 지파의 이름이 쓰여 있다고 기록했다. (21:12) 그러므로 본문에 언급된 144,000은 참 이스라엘, 즉 교회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본문에서는 다가올 환난 때문에 교회가 인침을 받지만 본 장 후반부에서는 승리와 평화를 누리게 된다. 흑자는 144,000이 더 위대한 사명을 위해 기근이나 역병 등에서 보호받을 특별한 순교자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하나 뒷받침할 만한 확실한 근거가 없다.
그렇다. 특별한 사명을 갖은 사람이나 순교자들만 144,000이라는 수에 포함된다는 근거는 사실상 없다. 144,000이라는 숫자를 교회로 해석하는 견해가 타당할 것이다. 이 땅에 하나님을 전심으로 믿는 교회들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 7장 5절부터 기록을 보면 인침 받은 12지파가 기록이 된다. 그러나 ‘단’ 지파는 기록이 되지 않고 있다. “그것은 이것이 문자적이고 육신적인 이스라엘이 아니라 영적 이스라엘, 곧 하나님의 교회와 백성들을 암시한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이다. 이로 인해 문자적 해석은 오류가 많고 뒷받침할 만한 근거가 없기 때문에 무너지고 만 것이다.”
이렇듯 144,000의 숫자를 문자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이 땅에 고난과 핍박을 받고 있는 교회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144,000이 유대인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그렇다면 이미 구원받은 수가 넘었기 때문에 더 이상 하나님의 구원은 없고, 이미 성취되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아직 하나님의 나라는 완전히 임하지 아니하였고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는 그때 하나님 나라는 임하게 될 것이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한 하나님의 도구들인 교회가 하나님께 찬양할 144,000이다.
짐승의 표에 대한 이해
앞장에서 하나님의 ‘인’치심과 ‘인’침 받은 144,000명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번 장에서는 666의 표를 받는 것을 살펴볼 것인데 먼저 알아야 할 것은 666의 표를 받는 것 또한 요한계시록 7장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인’ 치시는 것을 짐승들이 모방하는 것으로 요한계시록 13장에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순차적으로 하나님의 ‘인’을 받은 자는 이미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고, 666의 짐승의 표를 받을 수 없게 된다. 이번 장에서는 666이라는 숫자가 어떻게 등장하게 되었는지 그 의미를 살펴보고 이마와 손에 받는 짐승의 표에 관한 내용을 살펴볼 것이다.
1. 666에 대한 이해
전통적으로 666에 관한 관심은 끊이지 않고 있다. 무엇을 지칭하고 있는지 또는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지 논란은 깊어져 가고 있다. 그러나 결국 666이 의미하는 것을 학자들에 의해 살펴보면 적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666이라는 숫자는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
유대 사회에서 7이라는 숫자는 충만을 상징하는 숫자이다. 또한, 3은 완전한 수이다. 7이 3번 쓰인 777의 경우는 하나님의 완벽하고 거룩하신 삼위일체의 수를 가리킨다. 777이라는 숫자와 666이라는 숫자를 비교하였을 때 666의 의미는 명백해지는 것이다. 6이라는 숫자는 전통적으로 땅의 수, 노예의 수(출 21:2; 23:10)로 사용되었다. 6이라는 숫자는 완전하고 완벽한 수7에 미치지 못하는 숫자이다. “6이라는 수는 천국에 속하는 것과 반대되는 지상적인 것을 상징한다.” 6을 3번 사용한 666이라는 숫자의 의미는 777의 의미와 반대로 완전 불완전하고 미완성과 거듭 반복되는 실패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완전하신 삼위일체를 모방하고 있지만, 언제나 실패하고 언제나 미완성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는 숫자가 바로 666이라는 숫자이다. 이렇듯 666이라는 숫자는 고대사회의 숫자에 대한 깊은 의미가 있다. 이 666이라는 숫자는 고대 시대부터 근·현대까지 특정한 사람에게 사용되었다는 사실이다. 한성천, 김시열 박사는 666에 대해 이러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유안타스(Euanthas: 전혀 신분을 알 수 없는 이름), 라테이노스(Lateinos: 로마 황제), 테이탄(Teitan: 모든 신을 대항한 그리스 신화의 타이탄 신들)을 가리킨다는 견해(Irenaeus)로부터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를 지칭한다는 견해(Stauffer) 그리고 로마의 일곱 황제 모두를 포괄한다는 견해(Giet)가 있다. 도미니티아누스 황제의 경우 그 이름의 라틴어 칭호 ‘Imperator Caesar Domitianus Augustus Germanicus’를 헬라어 약어로 써서 계산한 것이 666이고, 666이 36의 삼각형 수 즉 전체의 합산이며(triangular number, 1=2=3=···=36), 36이 8의 삼각수라는 점에서 로마의 8대 황제 도미티아누스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그리고 율리우스 시저(Julius Caesar)로부터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 황제에 이르기까지 일곱 로마 황제의 첫 글자 (A, T, C, C, N, G, V)의 수도 역시 666이다. 이외에도 666과 관련해서는 로마 교황이 쓴 관에 ‘하나님 아들의 대리자’라는 뜻의 라틴어 ‘VicariusFiliiDei’, 도하머드, 무솔린, 카이저 빌헬름, 심지어 근, 현대의 히틀러, 키신저 등의 이름 및 신용카드나 컴퓨터를 지칭한다는 견해까지 제시된다.
이러한 견해의 결론은 당시에 잔인하고 가장 악한 일을 행했던 사람을 지칭해서 666이라는 숫자를 붙였다는 것이다. 또한, 사회의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자들에게 666이라는 숫자를 붙였다. 이들이 곧 핍박을 주고, 고통을 주는 적그리스도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본문의 짐승을 네로라고 보는 견해도 있었다. 네로는 A.D.68년에 자살을 했다. 그러나 그는 죽지 않고 살아나서 동쪽으로 피신해 있다가 그가 돌아올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왜냐하면, 네로는 그 당시에 악질 중 악질이었다. 박해의 수준은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은 그가 죽었다는 것을 믿지 않았을 정도로 그는 강인하고 악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다시 와서 엄청난 박해를 한다는 소문도 함께 돌기 시작했다. 그러나 2세기 말에 실재 네로가 아닌 그를 자칭한 사람이 등장하였다. 88년도에 등장한 사람인데 자신이 네로이며 이제까지 숨어 지냈다는 말과 함께 가짜 네로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네로 부활 신화가 적그리스도로 묘사되기도 했다. 네로 설의 문제점은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 그 짐승의 머리 중의 하나일 뿐 아니라 그 짐승 자체라는데 있다. 그 짐승 자신이 죽었다가 후에 살아난 것이다. 죽었다가 살아난 것을 근거로 그 짐승이 칼리굴라 황제라는 해석도 있었으나 칼리굴라도 네로처럼 죽었다가 살아난 적이 없다. 69년에 로마 제국이 심하게 흔들리다가 베스파시안 황제가 등장한 것을 두고 본문의 죽었다가 살아난 짐승은 베스파시안이라는 해석도 있었으나, 성경에서 기록하고 있는 짐승은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말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해석은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사람의 알파벳을 통해 666이라는 숫자를 만들어 내었다. 모두 다룰 수는 없지만, 이처럼 당시에 중요하게 해석되어 졌던 666에 대한 몇 가지 견해가 있다. 김순식 박사는 5가지로 말하고 있다:
첫째로 네로이다. 네로의 히브리음: NRON(네론 가이살, 50+200+6+50+100+60+200=666, J.B.Smith,Charles) 스미스 교수의 연구 이해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스미스 교수는 일보 나아가 1에서 36까지의 수를 합하면 666이 되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본서에는 짐승의 악한 활동이 36차 나타난다고 지적하였다. 두 번째로 유담타스이다. Euamthas(5+400+1+50+9+1+200=666, Irenaeus) 아마 최초의 해석일 것이다. 그러나 이레뉴스는 이 말의 뜻에 관해서는 전해주지 않았다. 세 번째로 테이탄이다.(300+5+10+300+1+50=666, Abbott) 테이탄은 헬라 신화에 나타나는 하나님을 적대하는 거대한 신이다. 이런 테이탄의 신분에 관해서도 베스파사누스, 티도, 도미시안 등의 추측들이 있다. 네 번째로 티아말이다.(Tiamat, Gunkel) 바벨론 신화에 나타나는 악신이다. 다섯 번째로 로마이다.(라테이노스, 30+1+300+5+10+50+70+200=666) 로마를 전체적으로 가리키는 것으로19세기 이후 네로 설이 나타나기까지 가장 유력한 설이었다. 이상과 같은 구체적인 해석을 피하고 상징적인 설이 또한 많다. 666은 1에서 36까지의 수를 합한 것이고 (1+2+3+4+···36=666) ,36 자체는 또한 1에서 8까지를 합한 것이다. 결국, 이 숫자의 성격은 8로서 그것은 17:11의 “여덟째 왕”을 가리킨다.(Lohmeyer): 또 6은 이단의 수요(Dardy). 그러므로 666은 인간적이고 현세적인 발달의 극치이다.
이렇게 사회에 악영향을 주고 고난과 핍박을 주는 사람과 어느 특정 지역이 666이라는 숫자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흥미로운 사실은 짐승을 암시하는 수가 왜 사람에게 또는 지역에 또는 신에게 적용되었을까 하는 문제이다. 그 당시에는 숫자라는 개념이 없었다. 그래서 알파벳으로 숫자를 세기도 했다. 그 계산법을 보면 A=1, B=2, C=3등 이런 식으로 게마트리아(Gematria)를 통해 계산이 되었다. 역사가들은 이것을 근거로 역사상의 인물 중에 자신이 미워하는 사람이 있을 때 그 사람의 알파벳을 따서 666의 수를 맞추려 시도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계산들이 결국엔 근·현대로 와서 컴퓨터와 바코드 그리고 베리칩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들은 문자적으로 해석할 때 가능한 이론들이다. 마지막 때에 짐승의 표 666을 받게 된다고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근거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까지 살펴본 이론으로서 해석 가능한 결론은 666이라는 숫자에 어떠한 의미를 만들어 그것이 마치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짐승의 표 인양 가장한 것이라는 결론밖에 내릴 수 없다. 18세기 이후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어느 것이 가장 타당한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것은 단지 게마트리아(Gematria) 숫자 놀이일 뿐이다.
2. 손과 이마의 표
요한계시록 13장 16절 말씀을 보면 “그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들에게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라고 기록이 되어 있다. 이마나 손에 표를 받게 해서 짐승을 경배하게 한다. 그리고 이마나 손에 표가 없는 자는 매매를 하지 못해 큰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손이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는 것은 고대 당시의 풍습이다. 종이나 노예 또는 하나님께 바쳐진 자들에게 새긴 낙인이다. 오른손이나 이마에 찍는 이유는 낙인이 잘 보이게 하여 누군가의 소유물임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소유자의 소유권을 거부하지 못하도록 손과 이마에 낙인을 찍었다. 구약의 배경에서 그 의미를 살펴보면 이마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였다. 또한, 오른손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여 일하면서 말씀을 보게 했다.
또한, 오른손은 일하는 손이고 교제하는 손으로 해석된다. 오른손에 표를 받게 하는 것은 그 국가가 사람의 모든 활동을 적그리스도의 주의(主義) 아래 통제의 허가 증표이기 때문에 오른손에 주었다. 또한, 이마는 당시에 사람의 신분(身分)을 표시하는 곳이기도 했다. 이마에 표를 받는다는 의미는 생존권과 인권을 모두 상실하는 의미를 갖는다.
김순식 박사는 표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표’의 기원은 여러 가지로 설명된다. 먼저 다이스’(Deissmann)은 당시 모든 상업 문서에 황제의 이름과 날짜가 있는 도장을 찍었던 것을 가리킨다고 했으며, 캐어드(Caird)는 모든 로마의 동전에 황제의 이름이나 형상을 박은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그리고 포드(Ford)는 왼쪽 손과 이마에 율법을 기록한 양피지를 담은 가죽 상자들을 메는 유대인의 관습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았으며, 바클레이(Barclay)는 당시 노예들이 주인의 소유물임을 나타내기 위해 받은 표 또는 군인들이 충성스러움을 나타내기 위해 장군의 이름으로 찍은 인을 그 배경으로 제시한다.
‘표’를 황제의 도장으로 해석하고 유대인들의 관습에 따라 손과 이마에 율법을 새기는 것으로 해석하고 또한, ‘노예들을 소유하기 위한 표’로 명확한 해석을 하고 있다. 이와 비슷한 견해로 김영진 박사도 표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표’란 헬라어로 ‘카리그마’인데 이 낱말은 본래 무엇에 ‘긁힌 자국’을 가리켰다. 이것이 발전하여 ‘인’ 또는 ‘조각’을 의미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 낱말은 노예나 동물에게 찍는 낙인을 의미하는 계시록 7:2-3에서 말하는 ‘스프라기스’와 비슷한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본절에서 이 단어는 실제로 사람의 오른손이나 이마에 찍은 표를 의미한다기보다는 사단에게 종속된 자임을 알게 해주는 사람의 행동 성향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아니면 여기서 말하는 ‘표’란 유대인들의 관습을 배경 삼고 있는 것으로 실제적인 표를 지칭하는 것일 수도 있다. 신 6:8에보면 ‘너는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이간에 붙여 표를 삼고’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때 ‘표’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이 자신의 본분임을 깨닫고 그 임무를 다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양피지를 작은 상자에 넣어 이마와 팔에 매고 다녔던 경문(phylectery)을 가리킨다. 만일 이 ‘표’가 그와 같은 문자적인 ‘표’를 의미한다면 하나님의 백성을 모방하는 사단은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그와 비슷한 표식을 하고 다니게 할지도 모른다. 한편 그 의미는 비슷하지만, 저자가 본서에서 하나님의 ‘인’은 ‘스프라기스’로 표기하고 짐승의 ‘표’는 ‘카리그마’로 표기한 것은 하나님의 인과 짐승의 표가 전혀 다른 것이라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함인 듯하다.
이 견해도 타당하다. ‘표’라는 것이 가시적인 것이 아니라 상징적인 것으로 사단에게 지배받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사단에게 속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다른 해석으로 권성수 박사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표’(카리그마)는 당시 황제의 이름과 날짜가 스탬프로 찍힌 공식문서의 인장이라는 해석이다. 계시록 당시 파피루스 문헌들을 보면 황제와 관련해서 ‘표’가 많이 언급되어 있고 그것이 사고 파는 권한과 직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표’는 문서에 찍히는 것이지 ‘오른손에나 이마’에 찍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이런 해석의 약점이다. 본문의 ‘표’가 유대인들이 성구를 기록한 양피지를 담아 이마와 왼팔에 잡아맨 작은 성구함과 유사하다는 해석도 있으나 성구함은 왼손에 다는 것이지 오른손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문제점이 있다. 본문의 ‘표’가 ‘크리스토스’라는 헬라어 첫 글자 X라는 해석도 있으나 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표시를 했으나 요한 당시에는 그런 표시를 한 일이 없었다는 문제점이 있다.
이렇듯 ‘표’를 가시적인 것으로 해석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이 표를 문자적으로 해석하게 되면 큰 오류에 빠질 수 있다. 이 표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자들은 “장차 짐승처럼 포악하고 잔인한 적그리스도가 나타나 종교를 통합하게 하고 자신을 숭배하게 하며 사람들의 몸에 표를 찍도록 만든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표는 주인이 찍어주는 표이므로 이 표를 받으면 짐승에게 속한 자가 되고 짐승의 통제를 받는다고 말하고 있다. 『베리칩은 짐승의 표다』의 저자는 그 책에서 한계점을 드러냈다:
또 그렇게 숫자를 대입하여 수많은 사람의 이름을 대입한다면 기독교인 중에 동일한 숫자가 나오는 사람들은 마찬가지로 사탄의 자녀로 인식해야 하느냐는 비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단지 그 방법으로 짐승을 논한다는 것은 접합하지 않다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현재 베리칩이 바코드의 고유번호 666을 포함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은 그냥 지나칠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특정 사람들의 이름에 억지로 666을 만든 것은 오류라고 인정하면서 현재 666인지 모르고 사용하는 바코드에 있는 숫자 666은 인정하지 않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이미 우리 삶 속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고, 그것을 사용한다고 해서 666의 표를 받지 않은 것처럼 베리칩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이 견해는 잘못된 견해이며 뒷받침해 줄 근거가 없는 견해이다.
베리칩이 666이라는 근거가 단지 이마와 오른손에 베리칩을 심는다는 것과 그것으로 매매를 할 수 없다는 것만으로 베리칩이 666의 징표라고 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베리칩을 왼손에 받으면 짐승의 표 666을 받지 않은 것인가? 또한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문화적 차이로 칩을 심지 못하기 때문에 짐승의 표 666을 받지 않은 것인가? 칩을 심는 과정에서 “극빈층과 인디언이나 재소자 그리고 일부 종교 단체에는 예외 규정을 두고 있다. 그 그룹에 해당하는 종교나 단체는 인디언, 크리스찬 사이언티스트, 사이언 톨로지스트, 이슬람인들이있다.” 왼손잡이를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은 오른손에 받게 되어 있다는데 이 주장도 분명한 오류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마에는 칩을 이식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이마에 칩을 삽입하는 것은 다소 적합해 보이지 않거나 미관상 좋지 않다는 측면에서 그렇다. 그러므로 불의의 사고로 양손을 잃었거나 손을 사용할 수 없는 사람의 경우 이마에 심는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상 베리칩이 666의 징표일 것이라는 주장의 핵심은 ‘매매’이다. ‘매매’를 하지 못한다는 것에서 문제의 심각성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사도 요한이 이 매매의 아이디어를 어디에서 가지고 왔는지 살펴보면 베리칩이 666의 징표가 아니라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요한계시록 2장 18-29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두아디라 교회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짐승의 표를 받은 자가 ‘매매’할 수 없다고 기록되고 있는데 그 아이디어가 어디에서부터 왔는지 살펴보면 두아디라 지역의 상황과 환경을 보면 ‘매매’가 어떠한 의미에서 사용되는지 알 수 있다. 두아디라 지역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교통의 중심지였다. 이로 인해 두아디라 지역은 상업적으로 굉장히 발전한 도시였다. 당시 두아디라 지역에는 동업조합(同業組合)이 있을 정도로 각색 직종의 조합이 있었다. 모직이나 직조, 염색, 모물, 제혁, 도기 등이 있었는데, 특히 자주색 염색천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이 동업조합들은 우상숭배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각 조합마다 우상(수호신)들은 가지고 있었다. 결국,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냐면 이 조합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상을 하나쯤은 섬겨야 한다는 것이다. 출세하기 위해서는 조합에 가입해야 했고 조합회원이 되면 우상(수호신)을 섬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조합에서 갖는 제사 의식을 참여해야 했다.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어야 했고, 그들이 해야 하는 모든 의식을 행해야 했다. 그것이 바로 ‘문란한 행음’이었다. 2장 20절 말씀에 보면 자칭 선지자라 하는 이세벨이 등장한다. 당시 두아디라 교인들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고민을 할 때 이세벨이라는 거짓 선지자가 이들을 잘못된 교리로 미혹시켰다. 왜냐하면, 우상을 섬기고,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그들의 인식 속에서 우상을 숭배하고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으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세벨은 그들을 향하여 말도 되지 않는 교리를 선포함으로 그들이 죄 가운데 들어가 있지 않음을 안심시켜 주었다. 그가 가르친 내용을 살펴보면 이렇다. 이세벨은 사단을 이기기 위해서는 사단을 잘 알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죄도 경험하고, 또 죄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야 죄를 이길 수 있다고 가르쳤다. 사단의 은밀한 일들을 우리가 배우고, 경험해서 이 죄를 극복하자고 가르쳤다. 그래서 우상숭배도 하고,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도 먹고, 문란한 행음도 해도 된다고 가르친 것이다. 이 모든 의식을 마치고서는 서로 문란한 성행위를 한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다. 이러한 문제를 두고 두아디라 교회는 고민하고 있었다. 어떠한 직종이든 조합에 가입해서 돈을 벌어야 하고, 또 이 돈으로 물건을 매매해야 하는데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조합 속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양심의 가책을 주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상숭배를 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 조합을 탈퇴해야 했다. 그러나 이 조합을 탈퇴하면 수입을 얻을 수 없게 된다. 빈곤과 배고픔을 겪게 될 것이고 핍박을 받게 된다. 조합을 탈퇴해서 수입을 얻을 수 없게 된다는 말은 결국 매매를 하지 못하게 된다는 말이 된다. 더 깊은 의미에서 매매를 하지 못한다는 것은 초대교회의 신실한 믿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우상을 섬기지 않는다는 것이고,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지 않음으로 자신을 정결하게 하겠다는 신실한 믿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두아디라 교회는 이러한 상황에서 매매를 하지 못할지라도, 수입이 없어 빈곤하여지고, 핍박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이겨내겠다는 신실한 믿음을 가졌다는 사실이다. 즉, 매매를 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은 우상숭배를 거부하는 것이고, 그리스도만 섬기며 따르겠다는 의미가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베리칩이 666이라는 견해는 분명한 오류가 있고 한계가 있다. 요한계시록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해서 심각한 오류에 빠진 결과가 베리칩이 666의 징표라고 믿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매매를 한다는 것이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 또 배경은 어떠한지, 그들의 상황은 어떠한지를 정확히 알지도 못하면서 문자적으로만 읽고 이해해서 베리칩을 받으면 매매를 못 하게 되므로 베리칩이 666의 징표라고 말하는 것은 성경에 대해 무지한 것이다. 매매를 하지 못하게 되는 말은 우상숭배를 버리고 그리스도만 따를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오늘날에도처럼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만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매매를 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 당시 그리스도를 위해서 빈곤과 핍박을 각오하고 예수그리스도만을 섬기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 표를 손과 이마에 새긴다고 했는데 박혜근 교수는 이마와 손에 표를 받는다는 것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참된 신앙을 외면적이고 가시적인 행위보다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사람의 마음에서 찾는 신구약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을 고려할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 6:8의 말씀을 상징적으로 이해하기를 원하셨던 것이 분명하다. (cf. 시 51:16-17) 그러나 예수님 당대의 위선적인 종교지도자들은 그것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자신들이 남들보다 더 놓은 경건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경문을 이마에 매곤 했다. 개역성경에서 경문(經文)으로 번역된 헬라어 ‘phulakterion’은 신약성경에서 여기에서만 단 한 번 사용된 말인데, 이 말을 마술적인 힘을 가졌다고 믿는 부적류를 몸에 지니는 이방인의 미신적 풍습을 함축하는 표현이다. 따라서 주님께서 이런 표현을 사용한 것은 유대인들이 그것을 이방인들처럼 행운의 부적같이 몸에 달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8절에 “미간”과 “손목”은 3절의 “듣고”(shama), “행하라”(shamar)는 두 개의 명령에 상응하는 상징적 표현이다. “듣다”는 인간의 청각 작용과 연관된 행동을 연상케 하지만 실은 하나님의 계명을 이해하고 회상하는 지적행위를 강조하는 말이다. 이스라엘이 순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해야 하는데 원칙적으로 지성에 근거하지 않는 순종은 불가능한 법이다. 이런 점에서 “미간에 붙이라”는 말씀의 진의는 6절에 “마음에 새기라“는 말씀에 담겼다. ··· 이런 맥락에서 손이나 이마에 표를 받는다는 말씀 역시 짐승이나 숫자 666과 마찬가지로 상징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물론, 짐승의 표는 왼손이 아니라 오른손에 받는다는 차이는 있지만, 구상적인 표현으로 해석하는 것이 성경이 그것들에 의미를 부과하는 방식과 일치한다. 즉, 그것은 마땅히 하나님에게만 바쳐야 할 충성을 다른 우상이나 혹은 적그리스도에게 바치고 그 결과 하나님 대신에 우상이나 사탄적 권세의 지배를 받으며 궁극적으로 그의 종이 되기에 이르는 배교적 상태를 뜻한다. ··· 이마와 손에 표를 받는 것은 순종의 차원에서 이해한다면 이는 실제로 짐승의 표를 가시적으로 몸에 지닌다는 뜻으로 해석될 것이 아니라 그보다는 짐승의 명에 따르는 짐승에게 속한 존재가 되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위의 견해처럼 가시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불가시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손과 이마에 무언가 표를 받는다는 것보다 순종의 의미로서 하나님께 순종하느냐, 사단의 뜻을 따르느냐에 따라 이 표를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요한계시록 14장 1절을 보면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실제로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는 것이 아니고 상징적으로 하나님의 소유됨을 나타내는 구절로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소유로 확정되었다는 표시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보았을 때 짐승의 표를 받는 것도, 어린양의 이름을 이마에 새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가시적인 것으로서 상징적으로 보는 것이 성경에 오류가 없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설명을 할 수가 있다.
결국, 666이라는 숫자의 의미는 사단을 숭배하는 것이고, 사단의 뜻을 따르는 적그리스도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하나님께 속해 있지 않은 사람들이 666의 징표를 받은 사람이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144,000에 한 일원이 되어 예수그리스도가 재림할 때까지 끝까지 보호하심을 받고 하나님 나라에 임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을 받지 못한 사람, 즉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은 적그리스도가 되어 이 땅의 교회를 핍박하며 하나님이 없다고 할 것이며, 그의 나라를 소망하며 살지 않고 이 땅의 것들만 취하며 살다가 결국 멸망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알 수 없다. 어떤 사람이 144,000에 속하는지 또한 어떤 사람이 666에 속해있는지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가시적인 것이 아니라 불가시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즉, 성령을 받은 사람과 받지 않은 사람으로 구분되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우리의 권한 밖에 일이기 때문에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 아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