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사랑의 재판관
법원장 재임 시절 새벽미사 참례 사형 선고하며 연민과 번뇌 느껴 마음 다해 사람을 사랑으로 섬겨
| ▲ 임기를 마치고 광주를 떠나며 남동본당 교우들과 함께 사진 찍은 김홍섭(앞줄 왼쪽에서 세번째). |
1962년 10월 12일 광주고등법원 대법정에서 한 재판이 열리고 있었다. 경주호 납북미수 사건의 공소심 판결 공판이었다. 법대 위에 앉은 재판장 김홍섭이 판결문을 읽어 내려갔다.
‘김사배 사형, 박석운 사형, 정회근 사형!’ 3명의 피고인에게 형을 언도한 후 재판장은 잠시 멈췄다. 법정은 숙연한 침묵으로 일순 낮게 가라앉았다. 김홍섭 판사의 목소리가 다시 법정에 울려 퍼졌다. “내가 오늘 여러분에게 이렇게 판결을 내리고 있지만 하느님의 눈으로 보시기에는 누가 죄인인지 알 수 없습니다. 불행하게도 제가 능력이 모자라 여러분에게 사형을 선고하니 그 점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고개를 떨구고 서 있는 수인들 각자에게 눈길을 주며 말했다. 방청석에서는 수인들 가족이 낮게 흐느껴 우는 소리가 들렸다. 비록 죄를 지었으나 가련한 이들이었다. 사형을 선고하는 판사의 목소리에는 고뇌와 연민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그 연민의 대상은 법대 아래에 선 피고인뿐만 아니라 법대 위에 앉은 재판장 자신을 향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형제에게 죽음의 형을 내리는 자신을 김홍섭은 정죄하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1960년 12월 16일 일어난 경주호 납북미수 사건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사상 최대의 해상 납치 사건이었다. 일단의 좌익 세력이 목포를 출발하여 제주로 가는 여객선 경주호를 탈취하였다. 애초 중국으로 향하려던 이들은 항거하는 군인 2명을 살해하는 등 필사적으로 월북을 시도했다. 그 무리 중에는 부녀자, 학생, 어린아이까지 섞여 있었다. 미수에 그친 이 사건으로 22명이 구속되었고 처음 1심 판결에서는 5명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납북을 기도하고 인명을 살상한 이 사건에 대해 사회여론은 격앙되어 있었다. 동족상잔의 뼈아픈 기억이 여전히 고통스러운데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질렀다는 감정이 팽배했다. 그러나 김홍섭은 법관으로서의 공평무사한 정신을 보여주었다. 재심 판결을 맡았던 김홍섭은 심문 과정에서도 마치 친부모인양 부드럽게 처신했다. 그는 납북 범죄자들과 판사 자신의 입장을 이렇게 표현했다. “여러분과 나는 불행히도 서로 세계관이 달라 오늘 이렇게 서로 위치가 달리 있는 것입니다.” 범법자들에게 ‘세계관이 다르다’고 한 표현은 당시 분위기에서는 상당히 파격적이고 용기 있는 태도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듯 김홍섭은 늘 자기 소신을 당당히 지켰다. 1961년 7월11일 대법원 판사 김홍섭은 국가재건최고회의로부터 혁명재판소 상소심 심판관 4명 중 한 사람으로 임명받았다. 혁명재판소의 재판장은 현역 장교가 맡았다. ‘반국가적 반민족적 반혁명적 범죄를 중점적으로 일벌백계주의로 엄정 신속 처리함으로써 혁명 정신 완수를 수행한다’는 기치 아래 정치깡패, 반혁명적 인사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이 재판은 군법을 기준으로 진행되어 극형이 선고되는 경우가 많았다. 김홍섭으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분위기였을 것이다. 한 달 만인 8월에 김홍섭은 광주고등법원장으로 발령받았다. 그가 왜 광주로 떠나갔을지 그 이유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김홍섭에게 사형은 선고하기에 너무나 고통스러운 제도였다. 어찌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죽음으로써 처벌을 내릴 수 있다는 말인가. 신앙인 김홍섭에게 삶과 죽음은 인간의 영역을 넘어 신의 영역에 속하는 일이었다. 평소 그는 판결에서 되도록 사형을 피하고자 했으나 국가의 사법체계를 비껴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혁명재판소 재판을 피하려고 광주로 내려간 그가 다시 사형을 선고해야 하는 경주호 재판을 맡게 되었으니 그의 심정이 참으로 힘에 겨웠을 게 분명하다. 광주고등법원장 재임 시절 그는 늘 새벽미사와 저녁 성체조배를 빠트리지 않았다. 그의 본당이었던 광주 남동본당 교우들은 십자가의 길을 바치고 있는 김홍섭 바오로를 자주 목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제1처 예수님께서 사형선고 받으심을 묵상합시다.’ 그 기도문을 김홍섭은 얼마나 깊게 묵상했을 것인가! ‘하느님의 눈으로 보시기에’ 사형을 선고하는 자신도 분명 죄인이라고 그는 믿었을 것이다. 당시의 사회 분위기와 사법적 기준으로 보아 사형제도 자체를 반대하는 말을 꺼내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판사 김홍섭의 행보는 사형의 반인도적 본질을 대중들에게 각인시키기에 충분했다. 가톨릭을 중심으로 한국 사회에서 사형 제도 폐지 움직임이 나오기 반세기 이전에 이미 김홍섭은 사형 폐지 운동의 선구자로서 첫발을 떼놓았던 것이다. 그의 선구적 믿음은 ‘사형 제도를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인도적으로 사람의 목숨을 빼앗을 올바른 방식 또한 없다’고 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최근 메시지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판사 김홍섭의 화두는 언제나 ‘사람이 사람을 재판할 수 있을 것인가’였다. 그는 ‘과연 그대가 누구이기에 이웃을 재판한다는 말입니까?’(야고 4,12)라는 성경 말씀을 가슴에 품고 살았던 신앙심 깊은 법관이었다. 이웃을 재판해야 하는 그 직을 떠나고자 애쓴 적도 있었던 그는 결국 법관으로서 자신의 직분을 받아들이기로 한 다음부터는 늘 이렇게 다짐을 했다. ‘좋은 법관이기 전에 또는, 그와 동시에, 친절하고 성실한 인간이어야겠다.’ 죄지은 이들을 법으로 단죄할 때라도 그들이 어쩔 수 없는 힘에 압도당해 패배자가 되어버린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사랑으로 대하고자 했다. 김홍섭이 6·25 전쟁 후 있었던 부역자 재판에 관련된 일화도 그의 이런 성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재판이 있었던 날 저녁 밥상을 받은 김홍섭은 쉽게 수저를 들지 못했다. “오늘 재판에서 부역자로 재판정에 선 남자가 있었다오. 방청석에는 그 부인과 아이들이 넷이나 있었소. 나이 어린아이들이 올망졸망 쳐다보고 있었소. 재판하는데 아비가 공산주의자로 죄를 받으면 나중에 저 아이들이 어떻게 자라날지 걱정이 되더란 말이오.…내가 어떻게 밥을 먹을 수 있겠소. 그 아이들은 지금 저녁도 못 먹고 있을 텐데 말이오.” 광주고등법원장 재임 시절 그는 역시 겸손한 교우이기도 했다. 당시 남동성당은 한옥이던 옛 성당을 허물고 새로 짓기로 했는데 평신도 사도회 의장으로 뽑힌 김홍섭은 주일이면 직접 삽을 들고 벽돌을 나르며 앞장서 일했다고 한다. 허름한 차림으로 성당 마당에서 잡초를 뽑거나 돌을 치우는 김홍섭을 고등법원장으로 알아보는 이는 없었다. 김홍섭의 광주 재임 기간은 거의 3년으로 꽤 긴 시간이었다. 1964년 3월 김홍섭이 서울고등법원장으로 부임해 간 다음 사람들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김홍섭이 그동안 남모르게 했던 봉사 활동으로 광주 동광원 방문이 있었다. 동광원은 그 무렵 광주에서 가장 후미진 곳으로 갈 데 없는 환자나 장애인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김홍섭은 이곳을 찾아가 기도 모임을 함께했고 특강을 하기도 했다. 특히 환자 중 김인옥이란 청년을 돌보았는데 나무에서 떨어져 하반신 불구로 가족들에게서도 버려진 채 누워 지내는 불쌍한 환자였다. 김홍섭은 어둡고 냄새나는 움막에 누워있는 환자를 매주 찾아와 머리맡에서 복음서를 읽어주며 희망을 잃지 말라고 위로해주었다고 한다. 또한 김홍섭이 사제에 대해 표한 존경심은 아무도 따를 수가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갓 부임한 보좌신부를 대할 때도 귀한 부름에 응하듯 언제나 공손히 “예”라고 했고, 어떤 사제가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공무를 제외하고는 지체 없이 찾아가 보살피는 일도 그의 몫이었다. 남동성당 시절 김홍섭의 대자였던 임기석(아우구스티노)씨는 이렇게 회상한다. “김홍섭 판사님은 법관이라는 인상보다는 인자한 아버지 같고 조용하고 침잠한 영혼의 소유자 같았습니다. 그분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무더운 여름 계곡을 흐르는 맑은 물에 얼굴을 씻은 것 같고 유순한 가을 하늘을 대하는 것 같았습니다.” 법관 김홍섭은 ‘생은 누구에게나 대견한 것’이라고 말했다. 신앙인 김홍섭은 그 대견한 존재들을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섬겼다. 다 같이 하느님의 자녀, 형제자매이기 때문이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