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철의 집을 생각하다 · 1 - 25 回 끝 |
| 1 1920년대 개성 선죽교 / 2 내성 구역 골목 | |
25 ·끝 이념, 자본 풍파 뚫고 유일하게 살아남다! 우리네 삶터의 원형질 |
<25 · 끝> 개성 옛집
2003년과 2005년 두 번에 걸쳐 개성을 다녀왔다. 하루 일정인지라 출국과 입국을 두 차례 겪는 진기한 경험이었다. 간단하지만 긴장된 입국신고를 마치고 다시 버스에 오른 지 10여 분 지나니 도착이란다. 판문점에서 8㎞ 거리이므로 당연한데도 다들 마냥 신기할 뿐이다. 부모님 고향이 평안도이고 처갓집 고향이 개성이라서 예전부터 수없이 들어왔던 북한 땅 고향길이 이렇게 코앞이라니….
오백 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고려 말 충절을 지킨 삼은(三隱) 중 가장 어린 탓에 조선 초기를 감내했던 야은 길재(1353~1419)의 장탄식이 들리는 듯 보기에도 암울한 개성의 풍경이다. 남한의 자본과 기술로 조성된 공업지구의 활기찬 모습과는 다르게 온통 무채색인 개성 시가지는 방문객의 시선을 당황하게 한다. 평양 간 고속도로에서부터 자남산(子男山) 정상에 세워진 김일성 동상까지의 통일거리는 양 옆에 늘어선 시멘트 색깔의 고층 아파트들과 더불어 암담하다. 아기자기한 우리나라의 지형과는 무관하게 뻗어있는 일직선 도로나 획일적인 아파트의 수직선은 예전의 산천을 간데없게 만들었다. 그나마 반갑게 보이는 남대문도 잠시 그곳을 경계로 개성 성안마을은 들어가지도 못하게 한다. 오기 전 열심히 사전조사를 거쳐 꼭 많은 풍경을 담아 오리라 다짐했던 ‘개성의 집’의 원형은 보지도 못한 채 돌아왔다.
| 3 자남산 김일성 동상에서 바라본 통일거리. 보이는 봉우리가 용수산이다. 4 개성 남대문. | |
세계유산 등재 … 되살릴 길 찾아야
천년 전 고려의 도읍지 개성(開城)은 한자 뜻 그대로 ‘열려 있는 도시’다. 실크로드의 연장인 서해안 뱃길의 거점이자 동남아시아·인도·아라비아 등지까지 왕래하던 국제 무역도시였다. 수심이 깊어 원양함이 들어올 수 있는 벽란도에는 한 해 1만 명이 넘는 외국인이 다녀갔다. 이곳 예성강(禮成江)은 글자대로 ‘예절을 이루는 강’으로서 국제교류의 장소이기도 했다. 또 한강 · 임진강 · 예성강 등 한반도 내륙의 3분의 1 지역에 뱃길이 닿는 삼강합수(三江合水)의 요충지로서 물산이 풍부한 풍천(豊川) 터이기도 하다.
벽란도에서 개성의 서대문인 선의문(宣義門)까지 17리 길에는 2층짜리 기와집이 줄지어 시가지를 형성했다. 집집마다 여섯 자가 넘는 처마가 저잣거리를 덮고 있어 눈·비를 피할 수 있는 시전회랑(arcade)의 장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거란족의 침입으로 뒤늦게 군사용 성채를 구축한 개성은 만월대를 중심으로 하는 황성 구역과 사대문 안에 해당하는 내성(반월성) 구역, 그리고 송악산 · 부흥산 · 용수산 ·오공산의 사신사(四神砂)로 둘러싸인 나성(羅城) 구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국 송나라와 대등한 황제국으로서 고려는 이처럼 도성 건축 에서도 우리나라 지형에 맞는 풍수이론을 발전시켜 황성체계를 완성했고 이후 조선시대 도읍지인 한양에서도 응용하게 되었다.
‘개성의 집’은 사대문 안 내성 구역에 집중돼 있다. 두문동(杜門洞)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선비처럼 내사산에 안온하게 둘러싸여 옹기종기 모여 있는 기와집 군상을 보면 바깥 세계의 무상함과 상관없이 천년 전 기품이 서려 있다. 몇몇 솟구쳐 올라있는 근대 건축물을 제외하면 역사의 정지 화면처럼 산천이 의구하게 되살아날 것 같다. 남대문을 지나 과거 시전이 펼쳐지던 주 가로인 남대가 (南大街)는 만월대가 있는 황성의 정문인 광화문까지 이어진다. 송악산에서 흘러내리는 백천(白川)은 남대가 이면길을 따라 흐르고 골목길 작은 개천들은 집 앞의 낙갓줄 (집 앞 또는 집안으로 이어지는 실개천. 먹는 물 외에 집에서 사용하는 생활용수의 물줄기이자 빗물의 자연 배수로로 기능하는 전통적 친환경 물활용시스템) 로 연결되면서 자연스러운 기와집 마을의 고즈넉한 풍경을 이룬다. 우리나라의 도읍지는 다섯 곳이고 이 중 통일 수도는 세 곳이다. 삼국시대 평양과 부여가 있고 신라의 경주, 고려의 개성, 그리고 조선의 한양이 각기 400~500년이라는, 세계사에 드문 장기집권의 수도다. 이 중 부여와 경주는 과거의 도읍지 형상을 찾아보기 어려운 상태고 평양은 이념의 수도로, 한양은 자본의 수도로서 확장되어 현재는 남과 북으로 대치하고 있다. 이에 비하면, 예전 형상대로 현존하는 개성의 집은 이념과 자본의 파도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보물이자 우리나라의 역사 문화를 확인할 수 있는 원형질이라 할 수 있다.
2층 기와집이 줄지어 서있던 천년 도시
지난 6월 23일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진행된 유네스코 제37차 세계유산위원회 에서는 북한이 신청한 개성 역사유적지구를 세계 유산으로 등재했다. 5개의 성벽 구역, 만월대와 첨성대 유적, 남대문, 성균관, 숭양서원, 선죽교와 표충사, 태조 왕건릉 외 7개 왕릉 등이 포함돼 있다.
이는 북한에서 신청한 낱개의 유산에 대한 판단이었기 때문에 ‘개성의 집과 도시’의 결정적인 유산 가치에 관해서는 접근이 이뤄지지 않았다. 이탈리아의 베네치아(1987년)나 체코의 프라하(1989년), 중국의 리장(1997년) 등은 도시 전체가 세계유산에 등재됨에 따라 집과 도시, 나아가 그곳에 사는 사람들도 같은 범주 속에서 평가받고 있다. 물론 이제는 세계적인 관광지가 되어 부를 누리며 시민들의 삶과 문화 또한 주목받고 있다.
2000년 6·15 공동선언에 따라 2002년 11월 북한의 개성공업지구법이 발효됐다. 이로부터 남한의 자본과 기술이 북한의 토지 및 인력과 결합할 수 있게 됐다. 규정상 50년 임대한 2000만 평 토지에는 800만 평의 공업지구와 배후 생활구역 600만 평 등이 있고, 내성 구역을 포함한 기존 시가지 400만 평도 남한의 사업 대상지에 속해 있다. 정치 문제로 늘상 말썽인 개성공단에는 최근까지 평균임금 150달러의 근로자 5만여 명이 123개 제조업체(섬유업체 72개소)에서 근무하고 있다. 그나마 중국 공장의 평균임금 250달러보다 싸게 책정돼 있기 때문에 다행이란다. 과연 천년 전 황제국 고려의 수도 개성에서 이루어졌음직한 해법일까.
땅은 말이 없다. 산천도 의구할 따름이다. 북한이야 말할 바가 없겠지만 세계를 향해 한반도의 족보를 밝혀야 할 남한이 기껏 선택한 자본과 기술의 결과물로서는 너무 개념이 없다. (헌법 제3조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로 한다.”)
이제라도 ‘개성의 집과 도시’를 복원해야 한다. 열려있는 도시로서, 국제 무역도시로서, 천년의 역사도시로서, 오백 년 도읍지 황제 도시로서, 자연과 더불은 생태도시로서, 우리나라 집과 마을의 원형질로서, 그리고 살아온 사람들의 수많은 삶과 문화와 이야기들로서 꽉 차게 복원돼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우리나라의 집과 도시의 미래가 열릴 것이다.
- 최명철 · ‘단우 어반랩(Urban Lab)’ 대표 | 제337호 | 2013.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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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 침실 위에 거실 옥상은 갑판 데크 호화 요트 뺨치네 |
<22> 물 위의 집, 플로팅 홈 (Floating Home)
물의 계절이다. 올해는 유난히도 장마가 길다. 눅눅해지는 빗물은 지겹지만 방학과 휴가를 맞아 찾아간 피서지에서는 물놀이가 한창이다. 물은 사람에게 떼려야 뗄 수 없다. 엄마 배 속부터 물속에서 놀았고 태어난 몸속에는 70퍼센트가 수분이다. 우리가 사는 지구 표면적의 70퍼센트도 물이고 생물은 물 없이는 살지 못한다. 전통 풍수에서는 장풍득수(藏風得水), 즉 바람을 머물게 하고 물을 얻을 수 있는 장소가 사람 살기 좋은 곳이라 했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 서로 다투지 않고 결국에는 낮은 데로 처한다 (상선약수 · 上善若水)”고 하여 최고의 선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사람이 물가에 이르면 몸과 마음이 원초적이 된다. 펼쳐진 수평선은 나를 평안하게 하고 잔잔한 물결의 리듬감은 어디론가 나를 이끄는 것 같으며 산뜻한 물소리와 냄새는 아득한 마음의 밑바닥(심저·心底)을 어루만지는 듯하다.
‘물 위의 집(Floating Home)’은 1993년 영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Sleepless in Seattle)’으로 일약 유명해졌다. 부인을 잃고 아들과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톰 행크스의 집은 시애틀 중심부에 있는 유니언 호숫가의 수상가옥이다. 미국 서북부 끝단 캐나다와 마주한 워싱턴주의 수도 시애틀은 미국인이 가장 살고 싶어하는 도시다. 이 도시의 유일한 단점이자 또 다른 매력 포인트는 겨울. 우리나라 장마처럼 지루하게 내리는 겨울비 때문에 수많은 이들이 잠 못 이루는 밤에 뒤척이고 있다. 미국 커피의 밋밋한 숭늉 맛을 제치고 세계 최고의 커피전문점 스타벅스 신화가 탄생한 배경이기도 하다.
시애틀 동쪽 캐스케이드 산맥 아래에 있는 커다란 워싱턴 호수에서부터 태평양으로 흐르는 물이 다운타운 한가운데 모여 경치가 아름다운 유니언 호수를 이루고 있다. 영화 속 건축가로 등장하는 톰 행크스의 집은 호수 서편에 있고 지금 소개하려는 ‘물 위의 집’은 맞은편 페어뷰 에비뉴(Fairview Ave.) 도로가에 있는 200여 채의 수상가옥 중 하나다. 시 정부가 환경 보호 문제로 신규 허가를 억제하면서 전망 좋은 이 지역의 집들이 각광받고 있다.
단지 북측 끝단에 있는 8채 중 가운데 위치한 이 집은 2008년 신축됐다. 지정된 도로변 주차장을 거쳐 호숫가 데크를 걸어가면 마치 주택가 골목길에 들어선 것 같다. 좌우로 4채씩이 있고 데크 길 끝자락에는 호수의 전경이 펼쳐진다.
엄격해진 규정을 따르면서 최대한 건축 면적을 확보하려는 건축주의 요구대로 ‘상자형’이지만 내부의 각 실, 방들의 용도나 필요에 따라 다양하게 투영된 외관은 꽤나 아기자기하다. 유리와 삼나무, 돌과 시멘트 패널 및 각종 철물이 필요한 만큼 적절히 비주얼 요소로 조합돼 기존 수상 가옥들 사이에서 새로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거주(living) 기능에 더해 물을 즐기기(entertain) 위한 집이다. 그래서 1층에는 비교적 유동이 적은 침실을 두고 2층에는 거실과 식당 등 공용 공간을 원룸 형태로 꾸몄다. 거실 남쪽의 발코니로 나서면 남서쪽으로 호수의 쾌적한 경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한편에 있는 나선형 계단을 오르면 사방이 트인 넓은 옥상 데크를 즐길 수 있다.
이러한 3개 층 공간 구조 -아래층 침실, 중간층 거실, 위층 갑판 데크- 는 호화 요트를 연상시킨다. 바다 위 수상 생활의 고단함이 없는, 호숫가에서 ‘물을 만끽하고 물 위의 생활을 즐기기’ 위한 집주인의 의도가 적극 반영된 것이다. 더불어 플로팅을 위한 구조물인 함체(pontoon) 공간까지도 알뜰하게 부대시설로 이용하고 있다. 흘러간 영화 속 허름한 건축가의 단층짜리 수상가옥과 비교하면 유니언 호숫가에 있는 물 위의 집들이 점차 고급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2 유니언호 플로팅홈: 시애틀의 건축사사무소 ‘Vandeventer + Carlander Architects’가 설계한 플로팅 홈. 3 바다 위의 축구 스타디움 | |
새만금개발청의 ‘바다위 청사’ 관심
삼면이 바다에 계곡 · 개천 · 강이 풍성한 우리나라에서도 조만간 물가나 물 위의 생활이 활발해지는 ‘마리나 시대’가 열릴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이를 사업화하려는 프로젝트들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손쉬운 서해안 간척사업으로 일확천금하려는 것에서부터 중국과의 교역을 발판으로 밑도 끝도 없는 큰 그림을 그리는 사업들까지, 우리나라의 자랑인 길고 긴 해안선 주변을 들썩이고 있다. 최근 몇몇 대형 사업들이 좌초되는 바람에 애꿎은 주민들의 피해만 늘어나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이런 가운데 가장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새만금 사업이 1989년 노태우 대통령 공약으로 시작된 지 24년 만에 본격화 되고 있다. 차관급으로 승격된 새만금개발청은 9월 1일부터 업무를 시작한다. 바다 위 도시를 구축해 새로운 황해시대를 맞이하려는 취지에 맞춰 첫 사업으로 ‘바다 위 청사(Floating Office)’를 준비 중이다. 이를 위해 2011년부터 국토 해양부 주관 하에 군산대학교를 주축으로 ‘플로팅 건축 연구단’을 출범시켰다. 우리나라 수(水) 공간에 적합한 물 위의 집을 기본적인 구조에서부터 에너지 · 인프라 · 입지 · 친환경 · 사업성 ·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종합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이 연구를 바탕으로 새만금개발청의 청사 건축을 물 위의 집 시범사업으로 진행할 예정이다.
성경 속 노아의 방주가 변덕스러운 지구환경으로부터 물 위에서 인류를 구해내듯 한반도 좁은 땅덩어리에서 나아가 더 큰 물과 더불어 살 수 있을 때 우리나라의 삶은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다.
- 최명철 · ‘단우 어반랩(Urban Lab)’ 대표 | 제335호 | 2013.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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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 이층 발코니의 힘! · 밋밋한 건물이 로맨틱 공간으로 |
| 1 베로나 시 에르베 광장 2 줄리엣의 집 Casa Di Giulietta 중정으로 들어서는 길. 3 좁은 중정과 줄리엣의 발코니가 보인다 | |
<23> 이탈리아 베로나 ‘줄리엣의 집’
봄 학기가 끝나고 무더위가 시작될 때면 젊은 시절 즐겨 찾던 연극 ‘한여름 밤의 꿈’이 생각난다. 학기 내내 이어지던 데모의 물결도 끊어지고 최루탄 냄새도 사라질 즈음 신촌 연세대학교의 백양로 길은 짙게 푸르러진다. 잠깐은 낭만적이고 싶어 찾아 들어가면 돌계단의 노천극장은 벌써 젊은 열기로 가득 차다. 먼 나라 이야기를 어설프게라도 흉내 내고픈 그 시절의 배우나 관객으로서는 탁 트인 야외의 시원스러움이 그저 고맙고, 뭔가를 갈망하던 마음도 다소 느긋해진다. 왠지 수다스럽기만한 대사들이나 자칫 지루해질 수도 있는 긴 공연이 끝나고, 이어지는 뒤풀이 향연의 추억들은 한여름 밤의 꿈처럼 내 젊음의 롱테이크로 아련히 남아 있다. 1970년대 그때는 가보지 못한 곳의 이야기, 상상 속의 장소들은 늘 동경의 대상이었다.
최근 출간된 리처드 폴 로의 『셰익스피어의 이탈리아 기행』에 따르면 ‘한여름 밤의 꿈’ 속 아테네는 그리스가 아니라 ‘작은 아테네(La Piccola Atena)’라 불리던 북부 이탈리아의 작은 성 사비오네타(Sabionetta)라는 것이다. 변호사이면서 셰익스피어 연구가인 저자는 이처럼 30여 년간 이탈리아 각지를 찾아다니며 셰익스피어 작품들을 추적한 결과 작품 속 배경들이 허구가 아닌 현실 속 이탈리아의 장소들인 것으로 밝혀내고 있다.
줄리엣의 집은 북부 이탈리아 베로나(Verona)에 있다. 한여름 축제 오페라 페스티벌(올해는 6월 14일~9월 8일)이 열리는 로마시대 유적 아레나(Arena)로 잘 알려진 베로나는 ‘알프스산맥을 무사히 넘은 뒤 브렌네르 고개(Brenner Pass)로 내려올 경우 가장 처음 밟게 될 이탈리아의 첫 번째 도시’다. 교황이 있는 로마를 중심으로 보면 변방 도시지만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입장에서는 알프스 바로 밑 로마로 향하는 관문이 되는 경계 도시다. 바로 로미오와 줄리엣의 두 가문, 교황파 몽테규 가문과 황제파 캐플렛 가문의 갈등이 폭발하는 지정학적 숙명의 도시인 것이다.
1302년에 있었다는 두 가문의 이야기는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전해오다가 17세기 영국의 셰익스피어에 의해 세계적인 사랑이야기가 되었다.
극중 무대가 된 영원한 사랑의 집 ‘줄리엣의 집(Casa Di Giulietta)’ 은 베로나 시내 중심부에 있다. 줄리엣이 살았다고 전해 내려오는 집이다. 원형 경기장 아레나가 있는 브라 광장(Piazza Bra)에서 북쪽으로 가다 보면 왁자지껄한 에르베 광장(Piazza Erbe)이 나온다. 그곳에서 남동쪽으로 꺾어 아디제 강으로 향하는 카펠로 거리(Via Capello)를 걸어가면 왼쪽으로 아치가 있는 탑상형 집이 나타난다. 그곳엔 ‘줄리엣의 집’이라는 조그만 팻말이 있다. 철문 안으로 들어서면 안쪽 마당으로 눈 돌릴 틈도 없이 좌우 벽에 가득 붙어 있는 종이들에 눈이 간다. 전 세계에서 몰려온 사랑 이야기들이 좁은 골목길 안에 아우성처럼 꽉 들어차 있다.
중정(corte)에 들어서면 단아한 줄리엣 동상을 나무 밑에서 마주할 수 있다. 허무하게 죽은 두 연인 앞에서 로미오의 아버지 몽테규는 “나는 순금으로 그대 따님의 동상을 세워서, 베로나의 이름이 남고 남는 동안 진실하고 절개가 굳은 줄리엣의 모습이 세상의 찬양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하지 않았던가.
극중 대사대로 이곳을 찾아 동상 앞에 선 모든 이들은 마치 영원한 사랑을 쟁취한 것처럼 환하게 웃으면서 사진 속에 자신의 모습을 남긴다. 이층 벽에 붙어 있는 다소 둔중한 발코니는 1900년대 개보수하면서 첨가한 것이라는 의심을 받지만, 밋밋한 벽체에 훌륭한 무대장치로서 손색이 없다. 어두운 밤 정원의 로미오가 발코니의 줄리엣과 나누는 대사에 감명받는 수많은 남녀가 있는 한 영원히 그럴 것이다.
내부는 일반적인 이탈리아식 주택으로서 별 특징은 없다. 현재는 매년 보내오는 사랑의 편지 4만여 통을 상대해 주는 사무실로 일부 사용하고 있다. 증축한 맞은 편 호텔에는 베로나 시가 ‘사랑의 도시’를 내걸고 1000유로에 결혼 예식을 그럴싸하게 치러주고 있어 많은 여행객의 환영을 받고 있다.
로미오의 집은 그리 멀지 않은 북쪽 단테(Dante) 동상이 있는 광장을 지나 좁은 골목길 안에 전형적인 도시형 주택 도무스(Domus)에 있다. 일설에 의하면 그 당시 영주 스칼리거(Scaligere)의 미움을 받아 1324년 추방되어 이후 몰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부 이탈리아에서 유명한 관광도시 밀라노 · 베네치아 등과는 달리 고대 로마 시절 도시 조직이 잘 남아 있는 베로나의 시민들은 자존심이 강하다. 셰익스피어를 굳이 팔지 않더라도 1302년에 있었던 사실은 단지 그들의 이야기일 뿐이다. 베로나 시 홈페이지에도 딱히 로미오나 줄리엣의 집에 대해 별반 소개하고 있지 않다. 그저 알고 찾아다니는 여행객들의 선택일 뿐이다. 아는 만큼 보고 느낀 만큼 생각할 수 있는 여행의 즐거움은 18세기 독일의 대 문호에게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정말이지, 지난 몇 년 동안은 마치 병이 든 것 같았고 그것을 고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이곳을 내 눈으로 직접 바라보며 이곳에서 지내는 것뿐이다.”
약혼자가 있는 샤를로테와의 사랑을 질풍노도(Strum und Drang) 같은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남긴 괴테(Goethe, 1749~1832)가 ‘온 세계를 위한 위대한 학교’ 이탈리아를 37살 나이에 1년 8개월 동안 여행하면서 남긴 독백이다.
여름 휴가철, 혹시 이탈리아로 여행가는 분들은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과 『셰익스피어의 이탈리아 기행』을 미리 읽거나 가져가길 권한다. 꽤나 새로운 느낌으로 유럽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 최명철 · ‘단우 어반랩(Urban Lab)’ 대표 | 제330호 | 2013.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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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개천길에 옹기종기 다른 듯 닮은 귀농 · 귀촌 20 가구 |
| 1 16호집 / 사진 대안건축연구소, 자료협조 지리산 작은마을 | |
<22> 남원 ‘지리산 작은마을’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도시생활에 지쳐갈 즈음이면 흙냄새 나는 고향이 물씬 그리워진다. 이도 저도 안 풀리는 인생사가 공기 나쁘고 인심 사나운 도시환경 탓이라 여겨지면 더욱 귀농·귀촌에 솔깃해진다. 1600여 년 전 중국 땅에서 도연명 (陶淵明) 선생도 낮은 관직에 매달려 심위형역 (心爲形役 · 마음고생)하다가 때려치우고 낙향하면서 저 유명한 ‘귀거래사(歸去來辭)’를 남겼다. “雲無心以出岫 鳥倦飛而知還 (구름은 무심하게 산 위에서 피어오르고 / 날다 지친 새들은 둥지로 돌아오네).” 가족들과 자기 집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온 선생과는 달리 낯선 동네에서 새 출발을 하려는 귀농·귀촌인들에게는 집 문제가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선택이다.
‘지리산 작은마을’은 통일신라시대 창건한 유서 깊은 사찰 실상사가 있는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에 있다. 지리산 북쪽에 경상남도 함양군과 맞닿아 있는 이곳 산내면은 예전부터 지리산 정상인 천왕봉을 남향으로 마주하고 있는 길지로서 유명하다. 실상사 도법스님이 앞장서온 귀농학교는 IMF 사태로 온 국민이 어려움에 처했던 1998년 시작됐다. 귀농학교를 마친 이들이 주변 마을에 정착하면서 점차 살 곳과 살 집이 부족하던 차에 2007년 귀농학교 부지 일부에다 농림부와 지자체가 지원해 ‘입주자 주도형’ 전원마을 사업이 출범했다. 입주자 선정 1년, 선정된 입주자들의 준비·교육·계획 및 사업승인 받는 데 1년, 마을 기반공사 및 주택설계 1년, 주택공사 및 입주 완료에 1년가량씩 소요돼 2011년 7월 뒷정리까지 끝내고 ‘지리산 작은마을’이 완성됐다.
| 2 13호집과 14호 집. 지리산 작은마을의 한가운데를 지나가는 작은 내에서 보이는 삼정산이다. 3 19호집 2층 테라스에서 보이는 산내면. 왼쪽의 산이 지리산 자락의 북쪽 끝 산인 삼정산이다 |
산내면 큰길에서 백일리 길로 들어서 학교에 이르는 가파른 길을 오르다 보면 조금은 넉넉하게 펼쳐진 양지바른 마을이 나타난다. 입구에 있는 마을회관과 친환경 처리시설 사이 작은 개천길 따라 좌우로 한두 채씩 총 20가구가 있다. 각자 200여 평의 남향 터에 계단식으로 자리 잡고 있고 끝자락은 나무로 둘러 싸여 편안한 풍경이 이어진다. 서룡산(해발 1073m)을 뒤로하고 지리산 줄기의 북쪽 끝 산인 삼정산(해발 1225m)을 바라보면 왼편으로 천왕봉의 도도한 자태가 드러난다.
이곳의 집들은 동시에 지어졌는데도 똑같은 형태 없이 제각각이다. 입주자들이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심사숙고한 끝에 ‘자유설계’ 방식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CM(Construction Management)으로 계약해 건축과정에서 여러 전문가와 폭넓은 소통을 이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같이 공부해 가면서 정한 ‘건축 가이드라인’ -예산에 맞는 35평 규모의 미니 2층집, 서양식 목구조로 하되 한옥의 장점 요소를 접목하기, 친환경 자재의 사용 및 자연 발효식 생태화장실 설치 등-은 각기 다른 형태 속에서도 공통으로 지켜진 룰이다. 시공 또한 건설회사로서는 꺼리는 ‘직영’ 방식으로 계약해 주민 스스로가 직접 참여함으로써 인건비, 간접 노무비 등의 절약은 물론 집 안 곳곳의 공사 상태를 파악하게 되어 추후 집을 손볼 때도 자력으로 가능하게 되었다.
각 가정의 구성과 라이프스타일에다 가족 모두의 꿈을 더해 이루어진 다양한 자유설계 안들은 이곳 ‘작은마을’의 한 집 한 집을 방문하는 즐거움을 준다. 실내에 토방처럼 맨흙바닥을 다져 생태적인 환경을 조성한 집, 옛 방식대로 구들을 깔고 장작을 때면서 음식 조리와 난방을 동시에 해결한 집 등 각자의 개성이 물씬 배어나고 있다. 그런 만큼 주인들의 육성도 구수하다.
“고향에서의 어릴 때 추억이 이곳으로 이끌었습니다.”(1호집 조광제), “조금은 불편해도 덜 먹고, 덜 쓰고 간소한 삶을 살고 싶습니다. 그 불편한 삶 속에 참 내가 있음을 발견하고 싶습니다.”(3호집 조의제), “산을 그리워하고 살다가 그 품에 살 수 있는 때가 온 것”(6호집 고광균), “어울려 가면서 살맛 나는 삶을 꾸려나가고 싶다.”(9호집 윤여정), “있어야 할 곳, 자연과 내가 하나이고 너와 내가 하나인 본연의 삶을 찾고 싶다.”(13호집 윤성호)
이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새로운 고향을 세우는 일에 다 같이 적극적이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귀농 가구 20만 신규 수요 예상
귀농 · 귀촌 인구가 가파르게 늘고 있다. 농촌진흥청 통계에 따르면 귀농의 경우 2002년 769가구에 불과했는데 2010년 3000여 가구에서 2011년부터는 급격히 늘어 1만 가구를 상회하고 있다. 베이비부머들의 은퇴에 따른 선택이자 도시화율이 90% 가까이 이를 때 생기는 전원 회귀현상으로 분석되고 있다.
선진국 사례에 따르면 80%대에서 안정되는 경향이므로 우리나라의 경우 향후 10~20년 안에 대략 20만 가구의 신규 수요가 예상된다. 이런 추세와 발맞추어 지난 4월 말에는 ‘농어촌 마을 주거환경개선 및 리모델링 촉진을 위한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농어촌 주거의 20%에 해당하는 40만 호 정도가 심각하게 노후화돼 주거복지 차원에서 개선해 주는 사업이 중앙정부 주도하에 시작될 것이다. ‘제2의 새마을운동’까지 예상되는 시점이다.
‘도시를 버려야 전원을 얻는다’는 말은 귀농·귀촌인들에게 적절한 문구다. 도시 생활에 대한 미련에 더해 낭만적인 생각만으로는 전원생활이 지속되기 힘들다. 정부의 지원사업을 도맡고 있는 박정승 귀농·귀촌종합센터장은 “인생을 거는 선택인 만큼 벤처창업과 마찬가지로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 최명철 · ‘단우 어반랩(Urban Lab)’ 대표 | 제328호 | 2013.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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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부처님 어깨인 듯 듬직한 나무 기둥 감칠맛 나는 비례 |
| 1 고려 충렬왕 34년 1308년에 중건했다는 상량문이 발견된 수덕사 대웅전. 유일하게 설립 연도를 확인할 수 있는 고려시대 목조건축이다 | |
<21> ‘수덕사 대웅전’
| 2,3 목가구 구조의 아름다움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수덕사 대웅전의 측면 |
봄꽃이 찬란한 사월이 가고 너나없이 푸르게 새 잎으로 가득 차는 계절의 여왕 오월이 되면 산 속에 있는 절집들은 일 년 중 가장 부산해지는 시기를 맞는다. 올해 초파일은 불기 2557년 석가탄신일. 점점 화려해지는 연등의 배열로 마당 위에 햇빛은 부서져 내리고, 성수기를 맞아 부쩍 늘어난 외국인 관광객과 우리나라 아웃도어인(?)들은 촘촘한 연등처럼 넓었던 사찰 경내를 가득 메우고 있다. 마음먹고 찾아간 충남 예산 수덕사. 그 번잡스러운 장터 분위기에 성(聖)과 속(俗)의 구분은 어느새 무의미해진다.
수덕사는 고려 충렬왕 34년인 1308년 중건했다는 상량문이 발견되어 유일하게 연도를 확인할 수 있는 고려시대 목조건축이다. 고즈넉했던 추억 속의 수덕사는 하지만 언제부턴가 사라지고 내가 좋아하는 대웅전만 그나마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다. 물론 이 지역을 다녀가면서 누리게 되는 풍성한 먹거리의 즐거움이나 온천욕의 감미로움도 빼놓을 수 없지만 그래도 나를 이끄는 건 대웅전이 전달하는 청량함이다.
수덕사가 위치한 이곳 내포 지방은 4대 강 수계 지역과 무관하게 금북정맥(錦北正脈) 또는 차령산맥을 경계로 구분되는 독자적 지역이다. 한강에서 밀려나 금강을 중심으로 터를 잡게 된 백제는 이곳을 중심으로 인도·중국 등과 많은 교류를 했다. 자연 불교 전래의 근거지가 되었다. 가야산을 조산으로 덕숭산을 배산하는 수덕사의 형국이 아산·예산·덕산·서산 등지를 잇는 중심 거처가 된 연유다.
| 4 대웅전 처마, 맞배지붕의 담담하고 단순한 선들. 집안 내부가 잘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5 널찍한 어깨 같은 기둥 구조의 비례는 보면 볼수록 감칠맛 느끼게 한다 |
대웅전은 대웅(大雄), 말 그대로 석가모니의 집이다(참고로 무량수전이나 극락전은 아미타불을, 대적광전은 비로자나불을 본존불로 모시는 곳이다). 이 집의 청량함은 평범하게 보이는 구성에서부터 나온다. 비교적 넓어 보이는 정면 세 칸의 나무 기둥 4개가 자못 무겁게 흘러내리는 기와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모습은 군더더기 없이 말끔하다. 맞배지붕의 단순한 선들이 담담하게 놓이면서 집안 내부가 잘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부처님의 널찍한 어깨 같은 기둥 구조의 비례는 보면 볼수록 감칠맛을 준다.
특히 절 안에 들어가려 옆으로 돌아 측면을 바라보는 순간, 말을 멈추게 된다. 옆 모습의 그 고졸(古拙)한 아름다움이란…. 가장 최고의 경지는 즐기는 사람만이 이룰 수 있다는데, 우리나라 목가구 구조의 아름다움을 이처럼 즐거이 온통 내보일 수 있는 자신감은 700여 년의 시간을 꿰뚫고도 여전히 생생하다.
문 안으로 조심스레 들어서면 마룻바닥의 듬직한 감촉에 향내와 섞여져 풍기는 오래된 목재의 묵은 냄새, 그 속에서 한눈에 꽉 들어차는 부처님은 오래도록 나를 기다리고 있는 고향 할아버지처럼 내 눈높이에서 이제 오느냐고 미소 짓고 있다. 좌우에 있는 협시불 또한 염화시중의 미소로서 잔잔한 공간을 향기롭게 구성하고 있다. 그 위로 시원스레 드러나 있는 목가구 구조 그대로의 내부 모습은 집 안팎의 경계를 허물면서 무념무상의 불교교리처럼 시공을 넘나드는 형상을 보여주고 있다.
집은 집일 뿐이고, 기둥과 지붕의 단순하지만 격조 있는 구성 속에 우리는 잠시 머물러 있을 따름이며, 깨달음의 말씀은 그저 야단법석(野壇法席)인 자연 속으로 흩어질 뿐이다.
21세기 신의 집은 어떤 곳일까
우리나라는 종교의 나라인 것 같다. 인도의 불교, 중국의 유교, 유럽의 천주교, 미국의 기독교 등 세계적인 종교들을 골고루 진정성 있게(?) 계승하고 유지 발전시키고 있는, 지구상에서 아마 유일한 나라가 아닌가 싶다. 때로는 원조 나라들보다 더욱 깊은 종교적 성취들로 명성을 얻기도 한다.
산이란 산에는 대부분 사찰이 있고 흩어져 있는 암자들까지 헤아리면 이른바 ‘부처님의 집’으로 가득하다. 도시는 어떤가. 시선이 닿는 곳마다 십자가가 있고 상가 건물에 있는 ‘하나님의 집’까지 도시의 밤하늘을 잔뜩 메우고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건축의 역사는 ‘신(神)의 집’에 의해 쓰였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에서부터 서양 건축의 역사는 시작됐다. 대부분의 유럽 도시 중심부에는 광장에 면한 대성당 두오모가 있다. ‘하느님의 집’으로 대표되는 서양 건축은 이처럼 돌집(石造)의 역사다. 반면 동양의 집은 나무집(木造)의 역사다.
영국의 전래동화 ‘아기돼지 삼형제’는 전 세계 어린이들이 다 읽는다. 첫째 돼지의 초가집과 둘째 돼지의 나무집은 게으름 탓이고 막내 돼지의 돌집은 근면함과 성실함의 결과로 늑대를 물리칠 수 있다. 서양의 성공신화 근대화 · 산업화의 패러다임을 잘 전달해 주는 텍스트다. 이에 반해 근대화 패러다임에 도전하던 동양의 동도서기(東道西器)론은 아직도 하나의 가정에 불과하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0년 11월 19일 뮌헨에서 다음 같은 교지를 내렸다.
“현대 교회건축은 바실리카나 로마네스크, 고딕이나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의 모방일 수 없다. 현대 성당건축은 우리 시대의 문화와 감성, 그리고 오늘날 가능한 재료와 수단을 활용하면서 오늘의 신앙에 그 형태와 표현을 부여해야 한다.” 하지만 현대에 이르러 ‘신의 집’은 양식(style)을 잃었다. ‘하느님의 집’은 돌집으로서, ‘부처님의 집’은 나무집으로서 각기 최고의 건축 역사를 구현한 이래로 여전히 새로운 진화를 꿈꾸고 있는 단계다. 콘크리트·철·유리로 대변되는 오늘날의 ‘재료와 수단’이 하느님이나 부처님에 대한 신앙에 다다르지 못하고 있다. 돌아가신 바오로 교황의 간절한 소망은 아직도 새로운 건축의 역사를 위해 비워진 채 남겨져 있다.
- 중앙선데이 | 최명철 · 단우건축 대표 | 제324호 | 2013.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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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그림 · 음악으로 손님 맞이하는 현대식 사랑방 |
| 1 키 높은 천장의 거실은 갤러리로 활용했다. 2 음악을 주제로 한 게스트룸 | |
<20> 게스트하우스 ‘수토메’
그림 · 음악으로 손님 맞이하는 현대식 사랑방
여행에서 돌아와 가방을 열면 여러 갈피의 추억들이 어느새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끌려 나온다. 그래서 먼지를 뒤집어쓴 가방은 어느새 ‘추억의 여행가방 (Suitcase of Memories)’ 이 된다. 영화 ‘써니’로 다시 유명해진 보니엠의 노래 ‘Time after time’에도 이 말이 나온다.
게스트하우스 수토메 (SUTOME) 라는 이름은 이 노래 가사에서 힌트를 얻어 만들었다. 올해 1월 문을 열었다. 6호선 마포구청역 5번 출구를 나와 오른편 골목으로 들어서면 똑같은 집 두 채가 대칭으로 나란히 서 있는데, 낮은 담장 너머로 4월의 목련이 화창하게 피어 있는 동편 집은 도서출판 산수야가 사용하고 있고, 그 옆에 담장을 헐고 앞마당을 드러낸 갤러리 겸 게스트하우스가 수토메다.
큐레이터로 근무하다 몸이 약해진 홍윤경씨가 쉬엄쉬엄 느리게 할 수 있는 일을 위해 선택한 곳이다. 어릴 적부터 낭만적인 소규모 호텔을 운영해 보는 게 소박한 꿈이었다는 엄마와의 의기투합도 큰 힘이 됐다. 값이 비싸진 홍대 앞을 피해 이모네 집과 가까운 이 집을 발견한 것은 행운이었다.
| 3 게스트용 주방과 리빙룸 4 게스트룸에서는 갤러리에 걸린 그림들이 바로 보인다. 5 담장을 헐고 앞마당을 드러낸 갤러리 겸 게스트하우스 수토메. 사진 Choi Soonyoung |
1970년대 일명 ‘불란서풍’으로 지어진 이 집은 지어진 그대로 말끔하게 손을 보고 나니 의외로 격조 있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깨끗해진 지붕의 모습이나 부분 포치 등의 외관도 그렇지만 애초부터 갤러리를 만들고 싶었던 홍씨가 마음에 들어 했던 키 높은 천장의 거실, 벽면 높이 붙어 있는 창, 디테일이 살아 있는 계단 등은 꽤나 풍취 있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모녀의 손님맞이는 소소한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게스트를 위해 준비해 둔 국화차는 부모님의 고향집에서 직접 만들어 보내주신 거란다. 국화차 외에도 다양한 꽃차들이 마련되어 손님들의 입을 즐겁게 해주고 있다. 손님들이 사용할 방에도 모녀의 정성 어린 손길이 곳곳에 배어 있다. 음악을 테마로 한 방에는 CD플레이어가 벽걸이 형태로 걸려 있다. 꽃을 테마로 한 방에는 그림도 꽃이다. 그림을 테마로 한 룸도 있다.
‘문화가 있는 게스트하우스’ 수토메에서 현재 운영 중인 룸은 8인 도미토리식 1실(침대당 2만5000원), 싱글베드 2실(5만원), 트윈베드 2실(7만원) 총 5개다. 직접 만든 과일 잼과 커피, 빵 등이 포함된 아침 식사도 이 가격에 제공된다. 2층에는 홍윤경씨 가족 3명이 살고 있고 동선이 분리된 아래층에는 손님들이 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주방과 세탁실 등도 갖췄다.
한국적인 것을 느끼고 교감케 하자
갤러리로 사용하고 있는 거실에는 현재 건축가 박정연씨의 드로잉전이 열리고 있다. 10년 동안 답사하며 그린 국내 전통가옥을 비롯한 전 세계 다양한 건축물 그림이 벽면 가득이다. 홍씨는 앞으로 서울에 관한 책들을 모아 전시를 할 계획이다. 또 난방이 가능한 바닥을 이용해 누워서 영화를 보는 행사도 해볼 생각이다. “저렴한 숙소라는 개념에서 벗어나 문화와 예술을 즐기고, 사람들의 만남이 있는 ‘열린 공간’으로 커 나가길 바란다”는 것이 홍씨의 바람이다.
한국을 찾는 외국인의 수가 작년에 1000만 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최근 북핵 문제나 일본의 엔저 영향으로 주춤대고는 있지만 우리나라에 대한 이미지가 높아져 있기 때문에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다. 따라서 점점 다양해지는 여행객 눈높이에 맞는 숙박시설들이 필요해진다.
어느 나라에서나 표준화된 호텔방에 누워 있으면 갇혀 있다는 답답함에 의문까지 생긴다. 내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인가 하며 여행자로서의 존재감을 확인할 길이 없다. 한국에 왔으면 한국다운 환경과 사람과 음식과 소리와 냄새를 기대하는 것이 당연하고 이를 충족시켜 준다면 그 이상의 외교적 성과까지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방편으로 ‘외국인관광 도시민박업’이 최근 큰 인기를 끌고 있고 게스트하우스가 한 유형으로 급격한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2010년 30여 곳에 불과했던 서울의 게스트하우스는 지난해 말 215곳으로 늘어났다. 홍대앞·신촌 등 마포권이 가장 많고 기존의 종로·중구 등 4대문안권과 강남권이 3대 권역으로서 주축을 이루고 있다. 서울시는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지원 및 홍보대책을 펼쳐 ‘공유도시’ 서울의 자랑거리로 격상시키고자 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손님을 중시하는 사랑방 문화가 있다. “이리 오너라” 호령 하나로 지나가는 과객이 방과 음식과 기타 서비스를 요구할 수 있는 열린 생활문화가 우리에게는 있었다. 주인과 손님의 대등한 만남은 항시 가능하고 서로의 교류는 중요한 사연이 되어 역사의 갈피마다 기록되고 있다. 집시가 천대받는 유럽과 달리 나그네가 존중받는 우리나라의 경우는 열린 시대의 중요한 ‘손님문화’ 유전자임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주요섭의 소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는 근대화 초입의 일제 강점기에도 살아 있던 우리네 사랑방 문화의 한 단면을 잘 그리고 있다. 나이 들어 딸과 함께 게스트하우스 수토메를 운영하고 있는 어머니 이옥랑 여사가 혹시 그때의 옥희가 아닐까.
- 중앙선데이 | 최명철 · 단우건축 대표 | 제320호 | 2013.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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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런던을 위한 방(A Room For London) 내·외부 ⓒ Charles Hosea | |
<19> 알랭 드 보통과 ‘리빙아키텍처’
언젠간 나도 이런 집에서 살고 싶어라
알랭 드 보통. 이 영민한 스위스 출신 글쟁이는 타성적인 삶을 살고 있는 이들에게 “집과 말해보라”고 속삭인다. 게다가 ‘집이 말해주는’ 언어를 통해 자기 자신을 밝히고 싶은, 알리고 싶은, 스스로를 일깨우고 싶은 갈망을 부추긴다. 그러고는 “잡지에 나온 집, 너무 비싸서 도저히 손에 넣을 수 없는 집에서 사는 상상을 하다가 이내 슬픔을 느끼곤 한다. 혼잡한 거리에서 매우 매혹적인 낯선 사람을 지나칠 때처럼 말이다”라고 자기 이야기처럼 딱 끊어서 맺는다. 한때 건축에 지독히 빠져서 글도 쓰고 책도 펴내고 강연도 하더니, 이젠 아예 집을 짓고 있다.
지난해 런던은 올림픽을 중심으로 한참 들썩였다. 여기엔 2012 런던페스티벌과 연계해 문화단체 아트앤젤(Artangel)이 후원한 이색적인 집짓기도 한몫했다. 템스 강변 워털루 브리지 옆 퀸엘리자베스 홀 건물 꼭대기에 이상한 배 한 척이 얹혔다. 조금 떨어진 런던아이와 함께 템스 강변의 명소가 된 이 집의 이름은 ‘A Room for London’. 국제 공모 500대1의 경쟁 속에서 뽑힌 이 집은 작가 조셉 콘라드의 『암흑의 핵심(The Heart of Darkness)』(1899)에 등장하는 템스 강변의 리버보트(riverboat)를 형상화한 것(데이비드 콘 건축사무소와 피오나 배너의 작품)이다. 대항해 시대의 맹주가 되었던 ‘지지 않는 해’ 대영제국의 영광과 그 시대 식민지 경영에 대한 뼈저린 반성이 교차하는 원작의 무게 덕분에 올림픽 개최지로서의 문화적 면모에 큰 의미를 더하고 있다.
| 2 균형 잡은 헛간(The Balancing Barn) 내·외부 ⓒ Living Architecture. |
더구나 템스 강변의 ‘지는 해’를 마주하기에 적합한 이곳에서 그날의 항해일지 (숙박일기를 쓰도록 하고 있음)를 기록하면서 보내는 하룻밤은 영국인에게는 매우 환상적이다. 최근엔 다양한 프로그램을 더했다. 음악인을 위한 ‘Sounds from a Room’, 작가들을 위한 ‘A London Address’, 미술인들을 위한 ‘Hearts of Darkness’, 시민들의 아이디어를 위한 ‘Ideas for London’ 등 네 가지 섹션으로 구분해 운영하고 있다. 이들이 펼치는 공연이나 퍼포먼스는 웹사이트를 통해 생중계되고 바깥의 템스 강변 대형 스크린에서 실시간 감상할 수도 있다.
덕분에 매 분기 추첨을 통해 주어지는 일일 숙박권(2인 300파운드)은 신혼부부와 예술가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어 지금도 대기자가 수만 명이다. 2012년 한시적으로 운영하려던 계획도 바뀌어 이곳 주인인 사우스뱅크 센터와의 합의를 통해 당분간 연장했다. 이 집의 주인은 리빙아키텍처(www.living-architecture.co.uk)라는 비영리 사회적기업이다. 알랭 드 보통이 설립했는데 그는 현재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근무한다. 이 단체가 하는 일은 말 그대로 ‘건축가가 지은 건축에서 살아보기’ 다. 서양에서는 건축(Architecture)과 건물(Building)의 개념이 달라 작가가 지은 집과 일반적인 집을 구분하고 있다. 홈페이지에는 “건축가가 지은 주택에서 직접 자고 식사하면서 어떤 곳에서 살아야 하는지 비전을 제시하겠다”고 한다.
| 3 널빤지 지붕 집(The Shingle House) ⓒ Charles Hosea 4 모래 언덕 집(The Dune House) ⓒ Living Architecture 5 기다란 집(The Long House) ⓒ Living Architecture |
'균형잡힌 헛간' 4박5일에 150만원
2010년 10월 완공된 제1호점 ‘균형 잡은 헛간(Balancing Barn)’은 정말 창조적이다. 영국 시골의 완만한 구릉 지형 위에 반은 땅에, 나머지 반은 경사지에 떠 있는, 마치 드가의 그림처럼 발레리나가 한쪽 다리를 들어 균형 잡고 있는 모습이다.
지형을 따라 가로로 앉혀야 할 긴 직사각형의 집을 역으로 세로로 설치해 놓은 꼴이다. 유럽 마을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는 헛간을 네덜란드의 친구(건축그룹 MVRDV)가 ‘선물(Gift)’ 한다는 설계 의도는 알랭 드 보통의 설립 취지와 교묘 하게 맞아떨어진다. 현실과 꿈을 교차시키면서 휴가를 즐기려는 사람들에게 또 다른 건축을 가르치고 있는 셈이다.
이 집이 위치한 서포크(Suffolk) 지역은 런던 동북부에서 가장 아름다운 휴양지다. 북해에 면한 바닷가 근처에 있는 이 집은 거실과 식당 주방, 욕실이 갖춰진 방 4개의 8인실 주택이다.
통째로 4박5일 사용하는 데 810파운드(약 150만원), 1인 1박당 약 4만5000원 정도이기 때문에 가족이나 친구 부부들의 휴가 장소로 인기가 높다. 최고급 휴양지에 높은 수준의 건축가 작품인 전용 별장에서 저렴하게 휴가를 즐길 수 있다면, 덤으로 얻어지는 주최 측의 의도된 공부(?)쯤이야 상관 있겠는가. 이와 같은 프로그램으로 지어진 리빙아키텍처 시리즈는 총 5채이고 2014년에는 2채가 만들어질 예정이다. <표 참조>
생각할수록 아름다운 남의 나라 이야기이다. 매혹적인 글쓰기로 한국에서만 100만 부 이상 판매한 스테디셀러 작가이자 철학자가 그 이상 매혹적일 수 없는 집짓기를, 그것도 비영리로 사회적 기여를 목적으로 발 벗고 나섰다는 데 경의를 표하고 싶다. 찰스 왕세자의 건축에 대한 사랑과 국민주택을 위한 실천적인 노력에 더하여, 40대 초반의 알랭 드 보통을 갖고 있는 남의 나라에 대하여 부러움과 동시에 부끄러움을 가지게 되는 건 내가 나이 들어서일까?
- 중앙선데이 | 최명철 · 단우건축 대표 | 제318호 | 2013.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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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공장에서 뚝딱 트럭으로 옮겨 층층이 쌓으니 3층짜리 원룸! |
| 1 포스코 A&C 공장, 공장 건물 또한 모듈 건축물이다. | |
<18> 이동식 주택
공장에서 뚝딱 트럭으로 옮겨 층층이 쌓으니 3층짜리 원룸!
현대인의 삶은 이동하고 있다. 모든 정보가 빛의 속도로 전달되는 순간 지구 전역에서는 돈이, 물건이, 사람이 이동하고 있다. 한 손에 든 물체(mobile device)를 가지고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온갖 인간의 지식까지 섭렵하고 있다. 농경 시대의 가치를 좇아 움직이지 않고 머물던 집안은 쇠락하고 새로운 정보와 기술을 따라 ‘가족 빼고 다 버린’ 집안은 흥하는 시대가 되었다.
삶이 이동하므로 현대인의 잠도 이동한다. 집 밖의 잠은 예전부터 군대에서나 학교에서, 출장 중이나 여행 중에 있어 왔지만 최근 들어서는 ‘나 혼자 자는’ 잠이나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잠의 형태로 급격히 늘고 있다. 몽골리안의 게르, 인디언의 티피, 키르기스족의 유르트 등 유목민들의 생활 방식으로만 여겨지던 이동식 주거가 새로운 집의 유형으로 등장하고 있는 이유다. (nomadism)
지난해 5월 서울 청담동 언북초등학교 뒷길 주택가에 생소한 장면이 벌어졌다. 주차장으로 쓰이던 빈터에 바닥을 고르고 울타리를 치더니 한 보름간 1층 기둥 공사가 진행됐다. 그러던 어느 날 대형 트럭에서 직사각형 박스들을 내려 옮겨 쌓더니 3일 만에 18개의 육중한 상자가 포개진 모습이 드러났다. 마무리 외벽공사와 주변 정리를 마치니 제대로 된 건물이 되었다. 공사한다고 울타리 친 지 40여 일 만에 18세대의 집이 완성된 것이다.
1층은 들어 올려진 필로티 구조. 주차장으로 사용된다. 전면에 있는 옥외 계단을 올라가면 가운데 복도로 된 한 층 6세대 원룸형 주택이 3개 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테리어는 공장에서 부품형으로 조립됐기 때문에 거친 면 없이 산뜻하게 마감돼 있어 젊은 사용자들의 취향을 따랐다. 박스 형태 블랙 앤드 화이트 투톤의 외관은 주변 주택가 풍경과는 차별화된 새로운 미래형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포스코A&C가 제작한 모듈러 하우징 브랜드 ‘뮤토(MUTO)’의 탄생이다.
| 2 강남의 평범한 주택가 가운데 자리 잡은 모듈형 주택 ‘뮤토 청담’. 특징적인 박스 형태의 블랙 앤드 화이트 투톤의 외관은 주변 주택가 풍경과는 차별화된 새로운 미래형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3,4 공장에서 제작, 조립된 모듈형 주택의 내부. 혼자 사는 직장인에게 부족함 없는 구조다. 5 집 샤넬모바일 - 자하 하디드가 샤넬사의 의뢰로 설계한 이동형 파빌리온 ‘샤넬 모바일 아트’ (출처: www.zaha-hadid.com). 자료협조: 포스코 A&C |
공사 40여 일 만에 18세대 뮤토 완성
뮤토는 ‘Modular Utopia’의 줄임 말이자 라틴어로는 ‘진화, 변화’를 뜻한다. 30여 년간 포스코가 생산한 강재를 사용해 조립식 주택을 지어 온 경험을 바탕으로 출범시킨 새로운 이동식 모듈러 주택 사업이다. 지난해 준공한 천안 공장에서는 연간 3600개 이상의 모듈을 제작할 수 있다.
국내 시장이 불황인 상황에서도 기술과 경제성을 알아보는 해외에서의 주문이 잇따르고 있다. 2009년 G20 정상회의 때 한국에 온 러시아 메드베데프 대통령과의 MOU에 따라 2011년 계약된 사하공화국 엘가 탄전지대의 근로자 숙소는 1단계 3000명, 2단계 1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총면적 7만2000 ㎡ 물량이 공급 중에 있다. 지난해 7월 계약한 호주의 로이힐 광산 근로자 숙소는 전체 247동 980세대용 모듈이 현지에 공급 완료돼 현재 마무리 공사 중이다.
주택사업에 있어서는 꽤 까다로운 국내 규정에 따라 지난해 말 국토부로부터 각종 거주 성능 시험을 통과해 공업화 주택으로 승인받았다. LH공사는 공공임대주택용으로 천안 공장 내에 실험 동(mock up)을 제작해 각종 주거 성능들을 면밀하게 시험 평가 중에 있다. 공장에서 80% 이상을 만들기 때문에 건축물의 이동과 해체, 복원에 대한 실험들도 계속적인 연구 대상이다.
이동식 주택(mobile home) 시장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2년 전 일본의 쓰나미 사태로 수만 명의 이재민들을 위한 임시주택 문제가 급격하게 대두된 이래 평상시 이동식 주택의 대량 생산 체계가 국가마다의 현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비단 재해재난용뿐만 아니라, 전쟁 시 주둔막사 등의 군사용에서부터 주말농장 등의 세컨드 하우스용, 관광휴양지의 레저용, 록 페스티벌이나 엑스포 같은 행사용, 광산 공장 등의 산업용, 공항이나 역사 내의 교통용, 심지어 사막이나 남극 같은 극한지용까지 일반적인 주거용도 외에도 수많은 ‘집 밖의 잠’을 위한 수요가 방대하게 생겨나고 있다.
이동식 건축(mobile architecture)은 기계 산업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자동차나 비행기 산업과 같이 부품화·조립화에 의한 생산 방식을 꿈꾸어 온 오래전부터의 숙제다. 1964년 영국의 전위적 건축그룹 아키그램(archigram)에 의해 제안된 ‘걸어 다니는 도시(Walking City)’는 암스트롱의 달 착륙 시대 때 이미 품었던 미래 비전이기도 하다.
2008년 샤넬사에서는 샤넬 모바일 아트(Channel Mobile Art)를 기획해 자체 브랜드의 전시매장 건물을 이동할 수 있는 건축물로 제작했다. 홍콩을 시작으로 도쿄, 뉴욕, LA, 런던, 모스크바 등 세계적인 대도시들을 거쳐 2011년부터는 파리에 있는 아랍세계연구소에 전시되고 있다. 이를 완성시킨 건축가 자하 하디드는 “현대 사회는 가만히 멈춰 있지 않는다. 끊임없이 변화한다. 공간적인 정돈과 배열은 삶의 패턴에 맞춰 진화한다”고 설계 의도를 전한다.
청담동 뮤토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 단순 레고 수준에서 벗어나 자동차처럼 비행기처럼 고도의 기술집약적인 모습으로 새로운 삶의 패턴을, 새로운 잠의 집을, 새로운 움직이는 도시를 만들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 중앙선데이 | 최명철 · 단우건축 대표 | 제316호 | 2013.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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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건축주와 건축가 운명처럼 만나 '작은 우주' 만들다 |
| 1 남쪽에 15층 아파트 다섯 동이 지어지면서 10여m 절개지 위에 남겨졌다. 2 3층 앞마당과 벽에 뚫린 창. 3 2층 중앙의 식당. 하루의 일과 중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낸다. | |
<17> 서울 방배동 H씨 댁
집은 자기만의 우주다. 내밀한 피난처이기도 하지만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캔버스이기도 하다. 시선은 밖을 보지만 보여지는 것은 자기일 수밖에 없다. 단독 주택은 이러한 안과 밖의 시선이 교차하면서 이루어내는 합주곡이다. 가족과 가족 간의 추억까지 더해지면 풍요로운 교향곡이 된다. 매일 매일의 일상 속에서 보고 보여지고, 만지고 만져지고, 느끼고 느껴지는 대상으로서의 집은 그렇기 때문에 건축의 꽃이다.
이런 단독주택 설계를 의뢰받을 때 늘상 건축가는 고민한다. 잘 아는 사람이 의뢰인인 경우는 마치 친구 간 돈거래처럼 화들짝 피하기도 한다.
20세기 초 호황이던 미국에서 잘나가던 루이스 설리번은 주택 의뢰가 들어오면 초짜이면서 고집 센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를 시켜 회사의 중요한 고객(혹은 고객의 부인)을 만족시켰다. 도전적인 시절의 르 코르뷔지에나 미스반데로에는 역사에 남은 주택 ‘빌라 사보아(Villa Savoye)’, ‘판스워드 하우스(Farnsworth house)’를 건축했지만 건축주와 소송까지 이어지는 곤욕을 치르고서야 작품으로 남았다. 건축주와 건축가의 관계는 TV 만화영화 속 톰과 제리처럼 평생 앙숙이지만, 동전의 앞뒷면처럼 둘이 있어야 롱런하는 역설적인 관계다.
톰과 제리 같은, 동전 양면 같은 관계
서울 방배동 H씨 댁은 서래마을 언덕 서측 가로변에 있다. 서래마을은 프랑스 학교가 세워진 이래 꾸준히 새로워지면서 서리풀공원 주변과 함께 내외국인 모두가 선호하는 주거지로 각광받고 있다. 건축주 H씨는 이십여 년 전 이곳에 새 집을 짓고 가족과 함께 살아온 토박이다. 그런데 2006년 멀쩡하던 남향집 앞에 단독주택 재개발사업으로 15층 아파트 다섯 동이 지어지면서 십여 미터 절개지 위에 남겨졌다. 더구나 바로 옆집마저 허물고 연립주택 공사가 시작된 순간 이곳을 떠날 생각까지 했다. 어처구니없는 세월 속에서도 정신을 차리고 주변 여건을 극복할 수 있는 새집을 짓기로 결심한다.
| 4 2층 마당. 상식적인 마당 조경을 거부하고 중정(中庭)용 소나무와 단풍나무를 심어 오브제화한 구성 또한 둘이서 쉽게 합의한 내용이다. 사진 윤준환 |
하지만 ‘자기만의 우주’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건축가를 만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친형이 경영하는 대형 설계사무소에서 2년 가까이 여러 명의 건축가를 만났고 수많은 설계안을 검토했다. 그러나 내키지 않는 집을 지을 수는 없었다. 우여곡절 속에 마지막으로 소개받은 건축가 조남호(솔토건축)와의 만남은 말 그대로 운명이었다. 기존 안을 발전시키던 중 자기 생각이라고 가져온 스케치에 꽂혀 묵은 체증이 확 풀리듯 일주일 만에 설계도면을 확정했다. 이거였다!
길에서 보이는 하얀 돌담과 무표정한 백색 상자형 집은 마치 갤러리 같은 모습이다. 서래마을에 있는 풍부한 외관의 주택들과는 차별화된 풍경이다. 지붕이 없는 출입문을 들어서 기둥으로 뻥 뚫린 필로티(pilloti) 공간을 마주하는 순간 남의 집이라는 의식은 사라지고 자유로운 풍경에 편안해진다. 그 속에 조그만 로비 같은 1층 현관은 품격이 있고 마주한 계단으로 오르면 미닫이 칸막이 앞으로 회의실 같은 모습의 식당이 나타난다.
이 집의 중심은 거실이 아니라 식당이다. 안주인은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식탁에서 책을 읽으며 보내며, 손님맞이도 이곳에서 이루어진다. 3층의 커다란 중정은 남쪽의 아파트 그늘에도 불구하고 따뜻한 빛을 담는다. 2층 높이의 백색 상자는 남측의 아파트와 서측의 4층 빌라로부터의 부담스러운 시선을 막으면서 1층은 필로티로 들어올려 그들과 대응한다. 1층은 홀과 창고 등 최소한의 공간으로만 구성되고 대부분은 주차장과 데크로 비워져 있다. 이곳에 상식적인 마당 조경을 거부하고 중정용 소나무와 단풍나무를 심어 오브제화한 구성 또한 둘이서 쉽게 합의한 내용이다.
마치 초기 모더니즘 건축을 맞닥뜨린 것처럼 외관에서 느꼈던 심플함이 집안 곳곳에 배어 있다. 최소한의 구조체 외에는 가변성 있는 경골 목구조를 사용했다. 벽체나 천장의 마감 또한 일반적인 벽지마감이 아닌 친환경 페인트 마감이어서 새삼 건축주와 맞아떨어진 건축가의 차분한 취향을 발견하게 된다. 군더더기를 배제한 민낯의 공간들은 살아갈 사람들의 눈길과 손길에 따라 세월을 채울 수 있게 될 것이다.
집이 완성되어 살게 되면서 밖에 외출했다가도 빨리 집으로 돌아오고 싶었다는 건축주, 가족들과 같이 가기로 한 해외여행도 마다하고 혼자 남아서 이 집의 풍취를 즐겼다는 집주인……. 정말 르네상스 시절의 레전드인 메디치 가문과 미켈란젤로의 이야기 같은 만남이 방배동에서도 이루어졌다.
뻘쭘하게 솟은 아파트는 이제 그만
요즈음 단독주택이 살아나고 있다. 개성을 존중하는 30~40대 부부들은 일찌감치 식상한 아파트를 거부하고 이곳저곳 살고 싶은 동네를 찾아 자기 집 짓기에 나서고 있다. 마침 일부 의식 있는 건축가들은 공동 홍보를 통해 좋은 건축주들과의 만남을 모색하고 있다. 이러한 자발적인 움직임들은 매우 바람직하고 향후 우리나라 집의 미래도 기대해 볼 수 있다. 이들을 위해서는 도시 내 좋은 동네, 좋은 땅의 공급은 필수적이다.
멀쩡한 단독주택지들을 노후 주거지라고 선을 그어 아파트를 지을 수 있다고 부추기고 이웃 간의 갈등마저 야기한 잘못된 도시 행정은 멈춰져야 한다. 고요한 단독주택지 속에 뻘쭘하게 솟아 있는 아파트의 풍경은 이제 더 이상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 중앙선데이 | 최명철 · 단우건축 대표 | 제313호 | 2013.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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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동체 복원형 셰어하우스는 · 공간 공유 거부감이 걸림돌 |
| 민간을 중심으로 다양한 셰어하우스 실험이 이어지고 있다. 1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수목 마이바움 연희’의 외관. 2‘수목 마이바움 연희’의 공용 공간. 거실 겸 사랑방, 카페의 역할을 한다. 3 아이들 놀이방 등 다양한 용도로 쓰이는 소행주 1호의 공용 공간. ※ ‘소행주(소통이 있어 행복한 주택)’ | |
마포 성미산마을 … ‘소행주가 대표적
부동산 경기 침체가 길어져 ‘생계형’ 셰어하우스가 늘고 있는 가운데, 공동체 복원에 중점을 둔 본격 셰어하우스를 만드는 시도도 잇따르고 있다. 성공 사례도 적지 않다.
서울시는 지난해 9월 주택·자동차·물건·정보 등을 함께 나누고 협력해 사회적 가치를 높이자는 취지의 ‘공유도시 서울’ 계획을 발표했다. 이 가운데 주택과 관련해서는 ‘두레주택’ 사업과 ‘한 지붕 세대공감’ 사업이 눈에 띈다. 두레주택의 경우,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의 주택 2채를 리모델링하는 시범사업이 진행 중이다. 2층 주택의 내부를 바꿔 4~5가구가 함께 살 수 있게 하고, 넓은 공용 공간을 두는 ‘셰어하우스’다. 올해 초 선정된 입주 후보자들은 6월께 리모델링이 끝나면 입주하게 된다. 이 사업을 담당하는 양준모 팀장은 “개인의 삶과 공동체 생활이 어우러지는 셰어하우스의 모델로 만들 계획”이라며 “성공하면 한 마을을 획일적인 아파트 단지로 만들던 기존 재개발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 지붕 세대공감’ 사업도 눈에 띈다. 자식이 분가해 방 3~4개짜리 집이 필요 없지만 쉽게 처분을 못하는 노년층과, 주거 비용 때문에 곤란을 겪는 대학생들을 서로 연결시켜주는 사업이다. 노인들은 인근 시세보다 싸게 세를 주고, 대학생이나 청년들은 노인들의 말 상대가 되고 장보기를 돕거나 스마트폰 교육을 시켜주는 등 서로 도움을 주자는 취지다.
민간에서는 서울 마포구 성미산마을 ‘소행주(소통이 있어 행복한 주택)’가 대표적이다. 이는 입주자가 건축 설계부터 참여하고 입주민들이 공용 공간에서 함께 소통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사업의 코디네이터 역할을 맡았던 이일훈 건축가는 “입주민들끼리 의사소통하고 그것을 반영해 건축한 사례는 소행주가 처음일 것”이라며 “이 같은 사업이 가능하기 위해선 공동체 삶을 지향하는 마음가짐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런 이상적인 셰어하우스를 만들기 위해서는 입주(희망)자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필요하지만, 의견을 맞추는 게 쉽지는 않다. 서울시 관계자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만들어 시세 차익을 내는 기존의 재개발 방식에 익숙한 이들에게 공동체 정신을 강조하는 셰어하우스를 납득시키는 과정이 어렵다”고 말했다. 셰어하우스가 당장 집값을 올려주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집, 내 공간’을 남과 나눈다는 개념도 아직 낯설어 하는 경우가 많다.
민간 부문에서도 아쉬움을 토로하는 이들이 많다. 한 셰어하우스 업체 대표는 “개인 공간을 확보하고도, 공용 공간을 충분히 만들려면 당연히 비용이 상승하게 된다”며 “공용 공간을 확보할 경우 건축법상 층고 완화나 용적률 조정 등 혜택이 주어지면 사업이 더 활기를 띨 것”이라고 말했다.
최명철 대표는 “시장 원리로만 가면 원룸·오피스텔 등 유행 따라 만들어진 건축 상품의 하나가 될 수 있다”며 “입주 희망자들의 참여를 최우선으로 하고 정책은 이걸 뒷받침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이자 벌 겸 ... 적적함 달랠 겸 ... 아파트 방 세놓기 붐 |
부동산 장기침체가 불러온 新풍속도, 셰어하우스 (share house)
서울 양천구 신정동의 한 아파트. 평범한 40평대 아파트지만, 방 4칸짜리 이 아파트엔 4가구가 모여 산다. 집주인 김모(44·여)씨는 5년 전 대기업에 다닐 때 대출을 받아 이 아파트를 마련했다. 이후 김씨는 퇴직했고, 지금은 자영업을 한다. 그사이 부동산 경기는 차갑게 식어 매달 100만원 남짓한 대출 이자가 큰 부담이었다. 어쩔 수 없이 생각해 낸 고육책이 셰어하우스(share house). 여러 가구가 방은 각자 쓰되 거실과 주방 등을 공유하는 주거형태다. 미혼인 김씨는 방 3칸을 모두 월세로 내놨다. 그는 “함께 살던 동생이 결혼해 떠난 뒤 방이 남았다”며 “전 재산인 집을 팔기도 싫고, 팔려고 해도 제값을 받을 수도 없어 대출 이자도 마련할 겸 방을 세놓았다”고 말했다. 김씨는 “여러 식구가 같이 살려니까 솔직히 불편하지만, 경제적 부담 때문에 감수하고 있다”고 말했다.
세입자 고모(40)씨가 이 집에 들어온 것도 경제적 사정 때문이다. 고씨는 사업을 하다 큰 돈을 날렸다. 그는 “빚을 갚고 재기해야 하는데 이만한 원룸을 구하려면 월세는 물론 보증금 부담이 커 이 아파트에 들어오게 됐다”고 말했다. 또 다른 세입자 이모(31·여)씨는 중국·호주 등 외국 생활을 오래한 케이스. 이씨는 “외국에는 셰어하우스가 매우 보편화돼 있다” 며 “한국에는 이런 주거형태가 드물어 이 아파트를 찾는 데 시간이 걸렸다. 지금은 만족한다” 며 웃었다.
일본·유럽과 달리 한국은 '생계형'
셰어하우스의 불문율은 철저한 프라이버시 보호다. 세입자들은 소음 방지에 각별히 신경 쓴다. 주인이라도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세입자의 사생활에 끼어들지 않는다. 사전 약속 없이는 방문에 노크도 하지 않는다. ‘한 지붕 네 가족’을 가능하게 하는 최소한의 조건이다.
금융위기 여파로 시작된 부동산 경기 침체가 장기화하면서 한국 사회에도 셰어하우스가 차츰 늘고 있다. ‘내 집’에 대한 욕구가 크고, 프라이버시에 예민한 한국에서는 익숙지 않던 이런 형태의 집들이 늘어나는 데는 사정이 있다. 집주인 입장에서는 아파트 값은 계속 떨어지는데 팔려고 해도 거래가 안 된다. 전세·월세 시세가 끝없이 올라 집 없는 이들도 고달프다. 양쪽의 수요가 만나 ‘셰어하우스’라는 절충점이 나온 것이다.
일본과 유럽에 흔한 본래 의미의 셰어하우스는 입주자들이 자발적으로 주택을 설계하고, 공동체 생활을 이어간다는 게 핵심이다. 이것과 비교하면 최근 국내에서 늘어나는 셰어하우스는 ‘생계형’이라는 점이 다르다. 건국대 부동산대학원 조주현 교수는 “정부의 정책적 해결을 기다릴 수 없는 하우스푸어들이 자발적으로 나선 형태”라며 “널리 퍼지는 데는 한계가 있겠지만, 여건이 맞는 하우스푸어들에게는 해결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포털의 부동산 직거래 사이트에는 이런 ‘공유형’ 매물이 크게 늘고 있다. 대부분 보증금 없는 월세 계약이라 부동산소개소를 거치지 않는다. 그만큼 소개 수수료를 아낄 수 있는 것도 셰어하우스의 매력. 일반 아파트보다 월세로 내놓기 편하다는 이유로 가변 벽체식 아파트가 인기를 끌기도 한다. 2000년대 들어 많이 공급된 가변 벽체식 아파트는 방과 방 또는 거실과 방 사이에 가벽을 세워 공간을 나눌 수 있다. 서울 방배동에서 부동산 업소를 운영하는 박인호 공인중개사는 “주인과 세입자의 공간을 나눠 월세나 반전세 형태로 임대하기 수월해 이런 주택들이 인기”라고 말했다.
셰어하우스가 증가하는 배경엔 경제적 이유만 있는 게 아니다. 부산시 사하구 하단동의 방 3칸, 화장실 2칸짜리 아파트에 사는 최순자(64) 할머니. 그는 6년째 방 2칸을 대학생들에게 세를 주고 있다. 자녀들은 출가한 지 오래고, 작은 사업을 하는 남편은 중국에서 지낸다. 최씨는 대학생에게 세를 줄 때 ‘얼마나 있을지’를 먼저 물어본다. 가급적 오래 정을 나누며 살고 싶어서다. 값은 전기료·관리비 따로 없이 한 달 28만원만 받아 원룸보다 훨씬 싸다. 하숙과 달리 밥을 해주겠다는 ‘계약’은 안 하지만, 빨래·청소뿐 아니라 불규칙한 대학생 세입자가 끼니를 거르지는 않는지 늘 살피고 챙긴다. 학생들과 사는 얘기를 주고받으며 어쩌다 술이라도 한잔 나누는 게 낙이다.
최씨는 7년 전, 당시 대학생이던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었다. 그 후 아들·딸 또래의 대학생들을 세입자가 아닌 자식처럼 돌보는 것으로 외로움을 달래고 있다.
셰어하우스가 늘어나는 이면에는 인구구조의 변화도 있다. 우리 사회에서 가족의 해체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1인, 2인 가구가 크게 늘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 신정동의 김모씨와 세입자들, 부산 최씨와 세입자들 모두가 1~2인 가구다. 통계청이 지난해 발표한 장기 인구 추계에 따르면 2000년 전체 가구의 15.6%였던 1인 가구는 2013년 25.9%에 이른다. 1인 가구는 2020년에는 29.6%, 2035년에는 34.3%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2인 가구까지 합칠 경우 그 비중은 2013년 현재 전체의 51.6%나 되고 2035년이면 70%에 육박할 것으로 예상된다.
전문가들은 부동산 거품의 붕괴와 함께 1인 가구가 급증하는 시대상이 만나 셰어하우스 등 새로운 형태의 주거 수요가 급증할 것으로 예상한다. 도시설계 전문가인 최명철 단우어반랩 대표는 “1인 가구가 급증하는 현실에서 기존의 천편일률적인 아파트로는 변화를 수용할 수 없다”고 말했다. 최 대표는 “1~2인 가구에 맞게 개인 공간은 작으면서도, 이웃 간에 서로 정을 나누고 공동체 생활을 할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주택 공급이 확산될 것”이라고 말했다.
부동산 거품 붕괴와 1인 가구 증가 영향
계획단계부터 입주자들이 참여해 공동생활을 준비하는 본격적인 셰어하우스도 있다. 서울 마포구 성산동 성미산마을의 소행주(소통이 있어 행복한 주택) 프로젝트가 대표적이다. 2011년 9가구가 사는 소행주 1호가 입주한 뒤, 2호를 거쳐 올해 6월에는 3호가 완공된다. 소행주 1호 주민인 김우(43·여)씨는 “서재와 아이 놀이방, 영화 관람실 등 공용 시설을 쓰고 있다”며 “개별 주택에 마련하기 어려운 시설을 손쉽게 쓸 수 있을 뿐 아니라 다양한 이웃들과 정을 나누며 살 수 있어 무척 만족한다”고 말했다. 소행주 박흥섭 공동대표는 “경기도 용인, 광주, 수원 등에서 문의가 잇따르고 있다”며 “조만간 이들 지역 중 한 곳에서 4호 작업을 시작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입주자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지만, 공용 공간을 늘린 형식의 공동주택은 민간에서도 활발히 공급되기 시작했다. 수목건축은 서울 서대문구에 공용 공간을 갖춘 임대주택 ‘수목 마이바움 연희’를 공급했다. 주방과 거실, 사랑방 역할을 하는 공용 공간을 세련되게 꾸몄다. 공용 공간을 저렴한 가격에 음식을 사먹을 수 있는 북카페 형식으로 만들어 1인 가구가 대부분인 세입자들의 호응을 얻었다. 주변보다 임대료가 비싼 편인데도 공실이 거의 없다. 서용식 대표는 “일본이나 유럽에 비해 한국은 사생활 보호에 대한 요구가 더 많은 편”이라며 “욕실·세탁실 등은 개별 공간에 넣고, 수요가 많은 부분만 공용 공간으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건국대 조주현 교수는 “새로운 형태의 주택이 더 많이 나오고 자리 잡으려면 그에 따른 건축법상의 인센티브 등 정책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중앙선데이 | 이승녕 기자, 강신우 인턴기자 | 제312호 | 2013.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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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같은 높이와 같은 간선도로, 같은 외관’의 균질한 도시계획으로 세계적인 명품도시 현재의 파리가 된 것이다. 이 대규모 재개발 사업의 대표적 상품이 7층짜리 중정형 공동주택이다. | |
<16> 은평뉴타운 ‘중정형 아파트’
프랑스 혁명, 특히 19세기 파리의 역사에 등장하는 바리케이드(barricade)는 경계이고 진영이다. 자유로워야 할 도시 속에서 경계가 만들어지는 순간 양 진영의 대치와 폭력은 불가피하다. 영화 ‘레 미제라블’ 속 1830년의 파리 시가지는 참으로 형편없다. 좁은 골목길에 더러운 하수구, 힘없는 서민들의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공동주택…. 이들이 바리케이드를 형성해준 사회적·물리적 공간구조였다면,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의 현실적인 등 돌림으로 앞장선 젊은이들이 먼저 희생된다.
1852년 제 2제정을 시작한 나폴레옹 3세는 오스만 남작을 통해 ‘파리 개조(Transformations de Paris)’를 단행한다. 열악한 도시구조와 주거환경의 개선이 일차적 목표라면, 부수적 결과로 바리케이드 없는 열린 도시가 되었다. ‘같은 높이와 같은 간선도로, 같은 외관’의 균질한 도시계획으로 세계적인 명품 도시로 꼽히는 현재의 파리가 된 것이다. 이 대규모 재개발 사업의 대표적 상품이 7층짜리 중정형 공동주택이다.
| 2 은평뉴타운 중정형 아파트. 가운데 뻥 뚫린 마당에서 서로 어울리고 나면 하루가 남부럽지 않다. 3 마쿠하리. 도쿄에서 나리타 공항 가는 길에 있는 지바현 신도시 ‘마쿠하리 베이타운’. 뚜렷한 중정형 아파트로 구획된 시가지가 보인다. |
‘같은 높이, 같은 도로, 같은 외관’으로
2003년 서울시는 ‘강북을 강남처럼’이라는 기치 아래 균형발전본부를 출범시켜 뉴타운 사업을 시작했다. ‘IMF 사태’ 졸업과 2002년 월드컵의 열기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can do it)’ 시절이다. 은평 뉴타운은 첫 번째 시범사업지구로서 서울시가 공영개발한 곳이다. MA(Master Architect)로 위촉되어 해외의 바람직한 도시개발 사례를 연구한 결과 은평의 도시조직에 적합한 주거 유형으로 유럽식 중정형 아파트를 제안했다.
은평 뉴타운은 땅의 힘이 좋은 곳이다. 서울의 주산인 북한산을 동쪽으로 직면하고 서쪽으로는 서오릉 자연공원이 받쳐주고 북으로는 서울시의 경계인 창릉천이 가로질러 한강으로 흘러가는 형국이다. 남쪽으로는 서울의 서북 관문인 박석고개와 갈현근린공원, 구파발목과 진관근린공원 등의 자연 산세와 폭포동, 물푸레골, 못자리골 등 이름만으로도 알 수 있는 개천과 습지들이 우수한 자연 생태계를 구성하고 있다.
펼쳐져 있는 우람한 자연 속에서는 건축물의 높이가 의미를 잃는다. 사람의 눈높이에서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정도의 높이가 가장 안정적이다. 7층 내외의 23m 높이를 규범화한 파리 시내가 아름답게 느껴지는 까닭이다. 중정형 아파트는 땅을 소중하게 여기는 낮은 도시를 향한다.
은평 뉴타운의 길은 사람의 길이다. 차나 자전거가 사람이 감내할 수 있는 속도라면 같이 섞일 수 있다. 우리의 동네 길은 이처럼 사람 위주의 길이어야 한다. 차 속의 나도, 자전거 위의 너도, 길 가는 그이나 창가의 그녀도, 모두 한동네 이웃이다. 길 위에서 인사 나누고 눈 맞추고 서로 부르는 일은 일상이다. 중정형 아파트는 길을 사람에게 내주는 느린 도시 속에 있다.
은평 뉴타운의 이웃은 더불어 산다. 이웃 사람들은 어떤 조건으로도 구별될 수 없다. 팍팍한 세상살이에서 이웃이 사촌 되어 주는 게 더 살갑고 반가운 일이다. 가운데가 뻥 뚫린 마당 같은 아파트 단지에서 서로 어울리고 나면 그 하루가 남부럽지 않다. 중정형 아파트는 이웃과 더불어 사는 하루하루가 있는 도시다.
은평 뉴타운의 집들은 자기 얼굴이 있다. 한국형 아파트는 대부분 단지 내부를 향하기 때문에 길에서의 얼굴이 없다. 아름다운 도시를 떠올리면 도시의 얼굴(facade)을 마주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마주한 집들의 얼굴은 길 위의 나를 향한다. 길 위의 내가 로미오가 되면 창밖 발코니의 그녀는 줄리엣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중정형 아파트는 사람을 마주하는 얼굴 도시가 되어 준다.
이처럼 낮은 도시, 느린 도시, 이웃 도시, 얼굴 도시가 은평 뉴타운이 지향하는 설계 지침(Design Guide Line)이다. 중정형 아파트는 이러한 개념들을 생활가로를 중심으로 충실히 해결하고 있다. 뉴타운 사업은 이렇듯 열악한 도시 구조를 새로운 비전으로 바꿔주면서 살기 좋은 새집을 마련해 주는 일인 것이다.
이웃과 함께하는 느린 삶이 있는 곳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집 다오.” 어렸을 적 모래 장난을 하며 즐겨 부르던 전래동요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네 염원 중 으뜸이 새집이었던 모양이다. 우리나라엔 아직도 헌 집이 많다. 전쟁 후 폐허 속에서 70~80년대까지 여러모로 부족했던 시절에 엉성하게 지어진 집들이 문제다.
LH공사의 자료에 따르면 서울시의 노후화 주택 수만도 20%에 이른다. 헌 집은 대부분 과거 덜 갖춰진 도시 구조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남겨져 있다. 헌법 제35조③항에는 ‘국가는 주택개발정책 등을 통해 모든 국민이 쾌적한 주거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라고 명시해 놓고 있다. 뉴타운이든 도시 재생이든 주거복지가 되는 ‘강북 개조’를 해서라도 국민의 염원은 해결되어야 한다.
- 중앙선데이 | 최명철 · 단우건축 대표 | 제311호 | 2013.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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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고즈넉한 골목길 살짝 숨은 마당 현행법으론 한낱 꿈 |
| 1 전주 한옥마을의 한옥은 중정(中庭)이 있는 도시형 한옥과는 다르게 담장과 그 안에 둘러쳐진 자투리 공간 같은 애매한 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 |
<15> ‘도시형 한옥’
새해 첫날을 보내고 신년 계획에 분주하다 보면 곧 설날이 다가온다. 이 또 다른 새해(?)를 맞이하고 나서야 비로소 2013년이 시작된다. 음력설은 구한말 태양력을 도입한 이래 구정(舊正)으로 불리며 신정의 뒤안길에 있었다. 한 세기가 지난 1989년부터 설날로 복권되면서 이제는 세계 공용의 달력 속에서 추석과 함께 최고의 명절이 되었다. 고유한 전통문화가 세계화된 양식 속에서 잘 융화된 모습이 바람직하다. 개량 한복, 퓨전 한식 등 기본적인 의 · 식생활에서부터 음악 · 드라마 · 영화 등 예술 분야에까지 한류의 약진이 눈부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집, 한옥은 아직 역사 속 과거의 집에 머물러 있다. 최근에 많이 짓고 있지만, 현재 9만여 채로 전체 주택 수의 0.5%에 불과하다. 한옥을 원하는 사람은 내 · 외국인을 포함해 많아지는데 한옥의 보급은 더디다. 이러다 보니 남아 있는 한옥은 비싸지고 그나마 10% 정도에 불과한 한옥마을들은 점차 테마파크화하고 있다. 일상적인 삶이 이루어지는 주거 유형의 하나로서 한옥의 현대화는 과연 가능할까.
| 2 하루헌은 바깥담으로 만들어진 골목과 내밀한 마당이 있는 도시한옥이다. 사진 진효숙 |
집은 생활을 담는 그릇이다. 농경사회의 삶을 유지시켜준 한옥은 그 생활에 맞춘 집이었다. 따라서 현재 남아 있는 대부분의 한옥은 농촌에 있다. 정부의 지원에 의해 새로이 지어지는 한옥들도 농촌형이 많다. 문제는 도시형 한옥이다.
서울 종로구 옥인동에 있는 하루헌(何樓軒)은 소박한 도시형 한옥이다. 61년 지어진 한옥을 한 전통주택학자가 연구소 겸 주택으로 개조해 사용하고 있다. 좁은 골목길을 가운데 두고 일곱 열, 14채가 가지런하다. 그당시 제법 큰 대지를 나누어 집장사가 지은 형상이다. 50여 년의 풍상을 겪어서인지, 번잡한 찻길과 대비되어서인지, 나란한 집들의 모습이 고즈넉하다. 삐죽 나온 처마 밑에 대문간과 문간채가 반복되면서 이어지는 골목길 풍경은 도시형 한옥이 갖는 첫 번째 매력이다. 여기에 비하면 담장 너머의 집이 갖는 보통 집의 풍경은 섬처럼 영역의 경계감이 느껴진다. 그 집이 그 집 같은 균질감 속에서 2-12번지를 찾아 “이리 오너라” 하는 기분으로 대문을 열어 젖히면 맞닥뜨리는 마당은 도시 한옥의 결정적 매력이다. 『한옥의 진화』를 쓴 윤재신 교수는 이 마당과 사각형 하늘을 일컬어 ‘우주적 자연과 직접적으로 소통하는 도시 공간의 내밀한 사적 통로 (private passage of confidentiality)’ 라고까지 표현하고 있다.
| 3 잘 알려진 북촌의 한옥들은 대부분 1930년대부터 1960년대 사이에 지어진 중정식 도시형 한옥이다. 당시 집장사가 제법 큰 대지를 여러 개의 필지로 나누어 보급했다. 삐죽 나온 처마 밑에 대문간과 문간채가 반복되면서 이어지는 골목길 풍경은 도시형 한옥이 갖는 첫 번째 매력이다. 자료: 건축도시공간연구소 |
소방도로 · 주차장 확보하자니 짓기 힘들어
도시형 한옥의 요체는 이처럼 길과 마당에 있고, 이들의 비어 있음에 의해 한옥의 형태는 자기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마치 음악이 쉼표에 따라 들리듯, 그림이 좀 떨어져 보아야 보이듯. 길과 대문간, 문간채, 마당과 안채로 이어지는 안과 밖의 무수한 변주를 ‘띠 패턴’ 으로 정의 내린 윤재신 교수는 이를 공적 영역을 포함하는 ‘도시 조직(urban tissue)’ 의 대표적 특성으로 도시 한옥이 계승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잘 알려진 북촌의 한옥들도 대부분 1930년대부터 60년 사이에 지어진 ㅁ자형 도시한옥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도시형 한옥이 63년 제정된 도시계획법과 건축법으로 인해 달리 개발 여지가 없어 잔존하게 되었고, 역설적이게도 새 법체계 때문에 더 이상 생산될 수도 없다. 부연 설명을 해보자면, 골목길은 차가 다닐 수 있는 소방도로여야하고 주차장이 확보돼야 한다. 집마다 화재와 분쟁을 예방하도록 대지 경계로부터 1m씩 확보해야 하니 전후좌우로 담장과 자투리 공간이 필요하다. 따라서 넓힌 찻길과 둘러친 담장 너머로 섬처럼 한옥을 배치하고 나면 도시 한옥이 갖는 고즈넉한 골목길이나 내밀한 사적 통로인 마당은 사라지고 만다. 이런 조건으로 하루헌과 비슷한 규모인 25평 정도의 한옥을 완성하려면 땅값 비싼 도심에서 최소 70평 이상의 대지가 필요하다(기존 도시형 한옥의 대지는 35~40평 정도다). 그러므로 이러한 건축 규제를 완화시켜준 기존의 한옥지구들이 한정적 자원이 되어 희소해지고 비싸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에 반해 관광자원의 목적으로 도시화된 대표적 사례인 전주한옥마을의 경우 기존 법 테두리 안에서 개발되었기 때문에 ㅁ자형 도시 조직과는 다르게 담장과 자투리 공간과 애매한 마당과 한옥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결국 도시 속에서 지속 가능한 한옥의 현대화는 ‘집의 형태*’ 에 앞서 한옥의 안팎 공간이 구현될 수 있는 적절한 ‘도시 조직’ 을 공급하고 이를 체계화할 수 있는 새로운 건축제도가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국가 한옥센터에서 발행한 자료에 따르면 한옥의 범주를 ‘전통적 형태에의 충실도’ 에 의해 문화재 한옥 (보존과 관리)과 정통 한옥(보존과 활용) 및 현대 한옥(보급과 육성)으로 구분하고 있다. 보급형인 현대 한옥도 최소한 기둥 · 보 · 지붕틀은 목구조여야 하고 한식 기와에 외관은 전통 양식에 따라야 한다).
최근 한옥을 마을 단위로 공급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은평뉴타운의 경우 기존 단독주택지를 한옥지구로 지정 공급 · 분양하고 있다. 70~80평의 대지 비용에 제대로 짓는 한옥 건축비를 포함하면 과연 수요가 얼마나 될지 궁금하다. 조선 말 고종은 태양력을 들여오면서 국호를 건양(建陽)이라 하였다. 태양력 달력 속의 음력 설날처럼 한옥의 본질이 살아 숨 쉬는 우리나라 집의 현대화와 도시화는 온전히 우리들의 숙제다.
- 중앙선데이 | 최명철 · 단우건축 대표 | 제305호 | 2013.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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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무늬만 한옥 허물고 어색한 이름 떼고 새 시대 새로운 집을 |
| 1 신무문(神武門)을 나서면 보이는 청와대. 2 북악산과 청와대 그리고 경복궁. | |
<14> ‘청와대’
청와대의 새 집주인이 선출됐다. 집 비워줄 사람과 5년 전세(?) 들어올 사람들의 이사가 곧 시작될 터다. 집이긴 한데 국가의 운명을 거머쥔 사람의 집이라 조심스럽다. 선거 때마다 불거져 나오는 청와대 이전 문제에 대해 그동안 석연치 않았던 이야기를 중심으로 정리해 보자.
우선 집터의 문제. 세종로 광장에서 바라보는 경복궁 전경은 꽤나 아름답다. 세계사에 드문 600년 왕조의 궁궐 모습으로서 손색이 없다. 광화문과 근정전 북한산에 이르는 축도 볼 만하지만, 옆으로 비껴서 있는 북악의 빼어난 자태는 자꾸 눈길이 가는 풍광이다. 경복궁 후원을 돌아 계단을 오르면 개방한 지 오래지 않은 북쪽문 신무문(神武門)에 이른다. 문에 들어서는 순간 한눈에 꽉 차게 들어오는 북악산 봉우리는 압권이다. 그런데 순간 눈에 걸리는 게 있다. 예의 푸른색 기와집과 철제 대문은 가슴을 답답하게 만든다.
일제시대 북악을 배경으로 남산 신궁에 이르는 축선상에 총독관저(‘大’자 건물)를 건립하는 순간부터 생겨난 모습이다. 조선 정궁 경복궁 경내에 총독부청사(‘日’자)를 짓고 구 서울시청건물(‘本’자)까지 건물로 쓴 ‘大日本’의 완성인 것이다.
집 짓지 말라는 터에 일본이 세워
예부터 우리나라는 자연과의 조화를 중시하면서 사람이 사는 집(양택)과 죽어서 머무는 곳(음택)에 유난히 공을 들여 왔다. 천지인 사상의 요체 또한 사람으로서 하늘의 뜻만큼 땅을 거스르지 않는다는 생각을 키워 왔다. 즉 사람들이 활동하는 공간을 제한해 자연 훼손을 최소화하는 체계를 갖추어 왔다. 경복궁 경내의 신무문 바깥은 자연의 공간이지 일상적 활동의 집터일 수는 없는 것이다.
조선시대 이곳은 신무문이라는 글자대로 신(神)의 공간인 칠궁*과 과거시험이나 무술연마를 위한 무(武)의 공간 경무대* 만 있었다. 또한 현 관저 터에 있다는 ‘천하제일복지’(天下第一福地)*라는 바위 위 각자 또한 경복궁 또는 한양 전체의 터를 일컬어 이름한 것이지 바로 눈앞의 집터를 가리킨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심히 잘못된 발상이다. (*는 청와대 홈페이지 참조)
말하자면 집 짓지 말라는 곳에 일본이 저질러 놓은 잘못을 건국 후에도 이어받고 군사정권 시절에는 더 크게 훼손시킨 상태가 현재의 청와대 모습인 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예전부터 청와대 이전을 주장해 온 풍수지리학자 최창조 교수는 “특히 청와대 터는 북악산에서 이곳을 거쳐 경복궁 근정전과 광화문을 연결하는 용(龍)의 맥세 중심통로의 출발점으로 기를 모아서 명당에 공급하는 수문 역할을 맡는 곳으로 그곳에 대형건물을 축조하는 것은 서울의 목을 조르는 행위에 해당된다” 고 말한다.
다음은 집의 문제다. 하루 하루의 일상사가 이루어지는 집에서는 편리함이 최우선이다. 하물며 국가 대사를 밤낮으로 챙겨야 하는 대통령과 그 식구들의 동선은 가장 안전하고 편리하게 구성되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의 청와대는 사는 곳 따로, 일하는 곳 따로다. 더구나 비서실 · 영빈관 · 춘추관이 각각 걸어다니기에도 애매한 거리에 별도로 나뉘어 있다. 고 김대중 대통령 시절 대변인이었던 박선숙 전 의원은 “마무리 보고를 끝내고 어스름한 저녁에 홀로 떨어져 있는 관저에서 나올 때면 왠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고 말한 바 있다. 이런 연유에서인지 언제부턴가 소통이 안 되는 구중궁궐로 불리고 있다. 미국의 백악관, 프랑스의 엘리제궁, 영국의 다우닝가 10번지 사례에서 보듯 대통령의 ‘삶과 일’ 은 하나의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게 바람직하다.
더구나 청와대 본관은 가짜 한옥이다. 노태우 대통령 시절 나름 근정전을 본떠 제왕적 건축형식을 갖추었어도 콘크리트로 지어진 한옥은 국가적 망신이다 (이미 콘크리트로 지어진 구 광화문은 철거돼 서울 역사박물관 앞마당에 속살을 보이고 전시되어 있다). 국가 한옥센터를 만들고 신 한옥 문화를 한류로 이끈다고 수백억원을 쏟아 부으면서 정작 국가의 상징으로 보여지는 집은 가짜 한옥이라니?
품격있는 대통령 집엔 어울리지 않는 이름
또 다른 문제는 이름이다. 4 · 19로 탄생한 윤보선 대통령 시절 미국의 백악관 (White House)을 모방해 청와대(Blue House)라 하고, 석조건축의 역사에서 의미를 갖는 하얀 대리석에 견주어 우리나라 전통의 청색 기와를 사용했다고 한다. 이어진 5·16으로 비롯된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영어로 블루가 갖는 의미를 꺼려했던 고 육영수 여사는 영문으로 ‘Chong Wa Dae’라 쓰게 했고, 중화주의에 근거했다는 동방색깔 청색을 싫어했던 일부 참모들은 ‘황와대’(Yellow House)를 주장했다는 웃지 못할 사연들이 있다.
더구나 ‘대(臺)’의 뜻은 높고 평평한 건축물, 높게 두드러진 평평한 땅으로서 조선시대의 경무대나 육군사관학교의 화랑대 또는 베이징의 조어대처럼 쓰이는 것이지 품격 있는 대통령 집의 이름에 붙이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미국·일본·중국·러시아 등 세계 열강의 사이에서 자존감을 지키고 국력을 키워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동안의 역사에서 스스로 낮추기와 큰 나라 따라 하기로 살아남았다면 이제부터는 우리의 국격에 걸맞은 당당한 우리의 모습을 갖출 때가 되었다. 1800년에 지어진 미국의 백악관이 200년 넘게 세계를 호령했듯 한반도의 미래를 새롭게 설계하는 이 순간 ‘새 술은 새 부대에’ 라는 속담 처럼 새로운 대통령의 집을 새로운 건축의 역사로 준비해야 한다.
- 중앙선데이 | 최명철 · 단우건축 대표 | 제302호 | 2012.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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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새 주인은 과연…’ 제18대 대통령 선거가 사흘 앞으로 다가왔다. 북악산 아래 청와대는 과연 누구를 새 주인으로 맞을 것인가 사진은 경복궁 북문인 신무문(神武門)을 통해 바라본 청와대다. 조선시대에 신무문은 북악산의 노기(怒氣)를 막기 위해 늘 닫아두었지만 현재는 개방돼 누구나 오갈 수 있다. 동서남북의 방위를 나타내는 상징동물인 사신(四神: 청룡 · 백호 · 주작 · 현무) 중 북쪽을 관장하는 현무(玄武 · 거북)가 출입구 천장에 화려한 색으로 그려져 있다.
- 중앙선데이 제301호 사진·글=최정동 기자 2012.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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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아담한 개인 공간, 널찍한 공유 공간, 작지만 커다란 집 |
| 1 자륵파브릭(Sargfabrik) 전경. 기존의 건물을 그대로 활용해 공동주거를 지었다. | |
<13> 1인 가구 시대 ‘셰어하우스’
12월 세밑이면 추워지는 날씨만큼이나 따뜻한 나눔이 소중해진다. 소유의 시대에서 나눔이라는 것은 가진 것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제러미 리프킨(Jeremy Rifkin)은 저서 『제 3차 산업혁명』 (The Third Industrial Revolution)을 통해 인류 역사에 오래된 소유권으로서 ‘공동 소유물에 대한 접근권’ 을 강조한다. 즉 배를 이용해 강을 이동하고, 숲에서 식량을 찾고, 시골길을 걷고, 가까운 냇가에서 물고기를 잡고, 공공 광장에서 회합을 갖는 권리 같은 것 말이다.
사유재산형 수직적 자본주의와는 달리 분산형 · 협업형 자본주의 시대가 다가 오면서 공유(sharing)의 가치가 소유권의 경계를 넘어설 것이라 예견하고 있다. 일찍이 오픈소스형의 리눅스 사례나 위키디피아, 구글의 예는 유명하고 최근 에 자전거나 자동차를 임대하거나 빌리거나 시간에 따라 구분하는 타임셰어형 공유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다. 집도 마찬가지다. 개인공간을 갖되 공용공간을 공유하는 ‘셰어 하우스(Share House)’ 같은 새로운 주거 형태가 최근 주목받고 있다. 코하우징(co-housing)이라고도 불리는 이 같은 스타일은 사회주의가 발달한 유럽에서 시작됐다. 오스트리아 빈의 서부 도심에 위치한 자륵파브릭(Sargfabrik)은 가장 손꼽히는 사례다. 서민용 시영아파트(Sozialbau)지만 지어서 주는 형식이 아니고 입주자들이 만들어가는 밑에서부터(Bottom-up)의 과정으로 이뤄지는 공유주택이다.
카페 · 공연장 · 수영장 갖춘 서민 공동주택
1996년 입주한 첫 번째 단지의 경우에는 입주민들이 7년 동안 건축가와 함께 집의 위치와 형태, 공용공간의 내용, 개별 집들의 모양 및 공동규약까지 토론해 가면서 결정해 나갔다. 통합주거조합(Association for Integrative lifestyle)이라는 입주민단체가 건축주·토지주·운영자·임대자의 다중역할을 수행하면서 30년 동안 장기 저금리로 갚아나가는 방식의 주거복지 정책이다. 시 정부가 ‘서민들도 호화로운 주거환경에서 살 수 있다’는 목표를 가지고, 110가구 200여 명의 입주민으로선 과분해 보이는 식당·카페·공연장 및 유치원과 청소년용 클럽, 수영장과 사우나시설, 옥상공원 등 다양한 공유 환경을 제공했다. 특히 본게마인샤프트라는 사회공동체 정책에 따라 모든 연령층에 걸친 입주자 배분으로 소셜믹스(Social Mix)로도 성공해 오토와그너 도시계획상을 수상했다.
1호의 성공에 이어 1998년 시작된 2호 미스 자륵파브릭(Miss Sargfabrik)은 좀 더 준비된 형식으로 진행됐다. 40가구 입주를 대상으로 30~50가구의 잠재적 입주자들의 적극적 참여로 이루어졌다. 처음부터 사는 곳과 일하는 곳을 결합하면서 경제적으로 부담 가능한 대안적 주거를 기본 목표로 정하고 건축가와 같이 설계했다. 이들은 우선 각자의 개인적 요구조건을 점검하고 같이 공유할 조건들을 면밀히 설정했다. 또 도심의 비싼 땅값을 고려해 밀도를 높이고 대지면적에 걸맞은 공유공간을 기획해 유지관리의 경제성도 확보했다. 셋째로 20년 이상 각 입주민들 라이프사이클의 변화에도 대응할 수 있는지를 점검했다. 기본적인 공간단위를 수면(sleeping), 생활(living), 일(working)로 구분해 개인 공간은 작지만 넓은 공유 공간 속에서 입주민들 삶의 질이 확대되는 새로운 주거 유형을 창출했다.
| 2 자륵파브릭 평면도. 3 자륵파브릭의 중정.사진제공 자륵파브릭 www.sargfabrik.at 4 소행주 1호. / 사진제공 (주)소행주(소통이 있어서 행복한 주택 만들기) |
유럽은 핵가족 시대를 지나 일찍이 가족해체를 경험하고 있다. 대부분 1, 2인 가구 비율이 70%에 이르고, 스웨덴의 경우 1인 가구만 50%에 육박한다. 프랑크 쉬르마허는 저서 『가족 부활이냐 몰락이냐』에서 “공동체를 가장 깊은 내면에서 결속시키는 일은 시장이나 국가가 할 수 없음을 깨닫는 게 급선무” 라며 가족 해체에 따른 이타심이나 희생, 협동정신의 실종에 경고를 보내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최근 1, 2인 가구가 급증하면서 여기저기에서 가족 해체의 속도 또한 빨라지고 있다.
마포 성미산 마을의 ‘따로 또 같이’ 실험
이런 가운데 국내에서도 셰어하우스 실험이 시작됐다. ‘따로 또 같이, 작지만 큰 집’ 이란 모토로 마포구 성미산 마을에서 ㈜소행주 (소통이 있어서 행복한 주택 만들기)가 진행하고 있는 한국형 셰어하우스다. 소행주 1호는 성미산 주민들이 발의해 2~3년간 공론화를 거쳤다. 2009년 설문조사에 응한 주민 60여 명을 대상으로 입주민을 모집해 적극적으로 나선 9가구를 중심으로 땅을 마련해 2010년 착공해 2011년 4월 입주했다. 이어진 소행주 2호는 올해 7월 12가구가 입주했고, 현재 소행주 3호가 8가구를 중심으로 설계와 부지 정지에 들어가고 있다. 94년 ‘우리 어린이집’이라는 공동육아를 중심으로 시작한 성미산 마을공동체는 마을살이에 관련 있는 가게, 밥집들과 두레생협, 동네 극장, 동네 학교, 성미산 지키기 등으로도 유명하다. 이런 바탕 속에서 내 집 마련의 꿈을 투자 수단으로서의 집이 아닌 사는 공간 더하기 공유의 가치를 중심으로 새롭게 구성하는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소행주가 지향하는 새로운 주거운동의 슬로건 ‘삶, 쉼, 놀이, 나눔으로의 초대’ 는 그 실험의 과정이자 결과일 터다.
통계청의 ‘장래 가구 추계, 2010~2035’ 에 따르면 2035년 가구당 인구 수는 2.17명, 1~2인 가구수 68.3%로 예측된다. 이런 추세라면 핵가족 중심의 1가구 1주택, 주택 보급률 100% 이상의 맹목적 주택 정책은 재고돼야 한다. 소유의 시대를 지나 거주(임대)의 시대로, 핵가족 중심에서 공동체 중심으로, 사유의 이기적 구조에서 공유의 협업적 구조로 주거복지의 새로운 패러다임 정립이 시급한 시점이다.
- 중앙선데이 | 최명철 · 단우건축 대표 | 제300호 | 2012.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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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서민들 위한 집이 국민 대표 주택으로 이젠 해외로 수출 |
<12> 한국형 아파트의 어제와 오늘
한국에서 집 이야기에 아파트를 빼놓을 수는 없다. 마포아파트가 지어진 1964년 기록에 의하면 당시 공동주택 수가 500호 정도였다. 70년 와우아파트 참사를 딛고 40여 년이 지난 지금 공동주택은 전체 주택에서 60%를 차지하고 아파트만 900만 호에 이른다. 한국 인구의 절반인 2500만 명이 살고 있는 집이다. 한국의 아파트는 양면성을 지니고 진화했다. 국민주택이라는 서민용 주거 공급을 위해 값싸게 조성된 택지에 저렴한 생산 방식에 따라 단기간에 많은 호수를 건설하는 것이 목표였다. 70년대 한강변을 따라 동부이촌동, 반포, 압구정, 잠실지구 등이 해당된다.
80년 5공화국이 출범하면서 주택 500만 호 건설이라는 정치적 목표가 설정 됐고,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등 세계적 행사에 걸맞은 도시 정비와 주거 형식이 이른 시간 내에 필요해지면서 ‘한국형 아파트’의 중흥기가 시작됐다. 6공화국의 200만 호 건설 구호에 따라 분당 · 일산 등 다섯 곳에 초단기에 건설한 ‘한국형 신도시’도 여기에 일조했다. 이로써 90년대에는 주택 정책이 서민이 아닌 국민 모두를 상대하는 1가구 1주택 정책으로 바뀌었다. ‘IMF 위기’도 잠깐, 내수 진작책의 일환으로 진행된 규제 완화 정책들은 새로운 주거 상품들을 출현시켰다. 즉 ① 30년을 유지해 온 분양가 상한제 폐지에 따라 민간 건설 회사들은 저마다 브랜드와 신상품 개발에 몰두했고, ②상업용지에 주거를 허가함에 따라 타워팰리스 등 주상복합의 전성시대를 열어주었으며, 급기야 ③멀쩡한 단독 주택지들을 정비구역이라 하여 아파트 개발을 허용하도록 주거환경정비법을 개정함으로써 ④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서울시장은 뉴타운이라는 획기적인 포장 상품(?)을 창출해내기에 이르렀다. 2000년대는 한국형 아파트의 최고 전성시대라 할 수 있다.
| 2 반포아파트[사진 중앙포토] / 3 반포 래미안퍼스티지 만물석상[사진 삼성물산] 4 반포 래미안퍼스티지34평형 평면도 / 5 73년도 반포1단지 아파트 32평형 평면도 |
아파트 진화의 대표적 공간, 반포
한국형 아파트는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이제 세계화됐다. 중국 등 대부분의 신흥국에서는 가장 효율적이고 경제적인 주거 해결 방안이 됐다. LA 주상복합이나 런던 온돌 마루 아파트 등은 선진국이 도시 회귀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채택한 방안이다. 건축에 철과 콘크리트가 사용된 이래 서민 주거의 대명사였던 아파트(apartment)가 지속 가능한 보편적인 인류 주거 양식으로 얼마만큼 진화 가능한지 시험받고 있다 하겠다.
반포 지역은 한국형 아파트 진화의 대표적인 현장이다. 70년 현대건설, 삼부토건, 대림산업이 공동 출자한 회사인 경인개발주식회사가 시행한 한강 개발사업으로 반포지구 19만 평 매립공사가 이루어졌고, 지금의 반포천에서 한강 제방 사이의 택지가 개발됐다. 이곳에 주택공사가 5층 판상형의 일률적 구조로 전형적인 서민용 주거 단지인 반포 1, 2, 3지구를 개발해 70년 중 · 후반 입주가 이루어졌다. 이로부터 30년 만에 이 지역은 최고의 아파트 단지로 탈바꿈했다. 주변 지역의 변화나 재건축이라는 제도적 뒷받침 외에도 건설회사나 설계업체들의 경쟁적인 상품 개발에 따른 결과다. 반포 래미안퍼스티지에서 보이는 한국형 아파트의 진화 양태는 크게 다섯 가지다.
우선 규모다. 도시의 블록 하나가 한 단지로 구성돼 초등학교 하나를 중심으로 2000~3000가구의 공동체가 안정적으로 구성돼 있다. 도시성(Urbanity)을 자체적으로 완결시킬 수 있는 규모로의 진화다. 애매한 규모의 담 쳐진 단지 (Gated Community)들이 모여서는 이룰 수 없는 커뮤니티다.
두 번째는 평면. 브랜드 가치를 내걸고 주부 모니터링 요원 등을 활용한 연구개발로 경쟁적 발전이 성능이나 기능 면에서 공간 활용을 극대화하고 있다. 발코니 확장 합법화 등을 통해 탄생한 서비스 면적의 ‘마법 같은’ 확장은 소비자 만족도는 높지만 적지 않은 부작용이 우려되는 한국형 아파트만의 불편한 진실(?)이기도 하다.
세 번째는 인테리어. 규모의 경제로 가능해진 좋은 자재와 기구의 사용, 최상의 설계와 시공은 선택사양을 빼놓더라도 최고급 수준이다. 온돌 마루의 우수성은 이미 알려졌고, 각종 빌트인 전자기기나 수납공간 개발은 입주자의 개별 인테리어로는 따라가기 힘든 수준이 됐다.
네 번째는 조경. 32층으로 확보된 개방감 속에 잘 어우러진 옥외 공간의 조경시설은 이 단지 최고의 자랑거리다. 경북에서 온 1000년 된 느티나무 고목을 비롯해 한강의 심층수와 빗물을 정화해 만든 1200평 규모의 인공호수와 금강산 만물상을 재현했다는 만물석산 등은 도시 속 자연공원이다.
마지막으로 편의시설 이다. 지하주차장은 인근 센트럴시티 주차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넓고 여유롭다. 입주민을 위한 커뮤니티 센터도 호텔 수준이다. 골프 연습장, 피트니스센터, GX룸, 연회장, 남녀 독서실, 사우나와 수영장 등은 단지의 규모에 의해 가능해진 시설이다.
하우스 푸어, 렌트 푸어의 인생 고스란히
이러한 한국형 아파트의 공통적인 특성들은 최근의 미분양 사태에도 대부분 일반화돼 있다. 그만큼 수준이 높아졌고 값어치도 상승돼 있으므로, 현실적으로는 주거 양극화의 주범이기도 하다. 아파트는 집이다. 한국 경제의 압축 성장만큼이나 아파트도 압축 발전했다. 각종 시빗거리의 대명사이기도 했고 서민들의 애환이기도 했으며 복부인의 투기 대상이기도 했다. 경제 부침에 따라 하우스 푸어, 렌트 푸어의 인생도 출렁인다. 그 속에서도 한국형 아파트는 진화하고 있고, 진화하고 있는 이상 집으로서의 미래가 있다.
- 중앙선데이 | 최명철 · 단우건축 대표 | 제298호 | 2012.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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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카페 위 사무실 그 위엔 살림집 '무지개떡' 빌딩! |
<11> 西村의 ‘상가주택 실험’
도시의 맛은 길 위에 있다. 좋은 도시는 살아 있는 길의 장소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은 길(道)을 따라 산다. 사람이 많아지면 길에는 속도가 생기고 길 위의 집은 그 속도에 따라 변한다. 명동이나 인사동 길 또는 최근의 삼청동이나 신사동 가로수길에서는 사람들의 양과 속도에 따라 지형도가 바뀐다. 자동차 위주의 빠른 길만 부각되는 신도시에는 방음벽으로 둘러싸인 성냥갑 아파트가 가득하다. 좋은 도시는 인체의 혈관과 같아야 한다. 빠르고 굵은 동맥부터 느리고 가는 실핏줄까지 잘 짜인 유기체적 구성이 필요하다.
지하서 옥탑까지 층층이 다른 용도
경복궁 서쪽의 마을인 서촌(西村)은 느린 시간의 동네다. 북서풍을 막아주는 서고동저(西高東低)의 지형에 따라 한양도성을 병풍 쳐온 인왕산 기슭의 마을은 조선 초기에는 궁궐을 관리하는 별감이나 환관들의 거처였다. 또 후기에는 상인·공인·예인 등 이른바 중인들의 마을로서 많은 기록이 남아 있다.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나 추사 김정희의 집터로도 알려졌고 시인 이상·윤동주나 화가 이상범·이중섭 등의 거처이기도 했다. 현재는 청와대의 뒷동네로서 문화재 규제 외에도 높이규제 및 시선차단(?) 규제까지 받고 있는 곳이다. 경복궁의 서문인 영추문(迎秋門)이라는 이름처럼 지는 해를 맞이하는 쓸쓸한 가을날 같은 분위기의 마을은 최근 들어 출판사나 갤러리 카페 등 문화예술의 사랑채로서 새롭게 각광받고 있다.
경복궁 돌담길 효자로 변에 ‘구 열린책들 사옥’이 있다. 십여 년 전 말라죽어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했던 통의동 백송터와 연결된 대지에 지하 1층 지상 4층의 집이 경복궁 안을 굽어보며 세워졌다. 일견 무심해 보이는 건물과 달리 남측에 붙어 있는 계단길은 자극적이다. 산지나 구릉지가 많은 우리나라 도시에서 자주 보이는 뒷골목 풍경이기도 하다.
| 2 궁정동 웨스트빌리지 전경 사진 박영채 3 궁정동 웨스트빌리지 조감도 4 구 열린책들 사옥의 계단과 옛날 계단 골목 사진 황두진 |
건축가는 이러한 길에 대한 판단으로 건물의 모티브를 창안해 냈다. 우선 600년 된 경복궁과 백송에 이르는 길은 땅 위로 구부러지게 이어 역사성에 대한 정리를 했다. 찻길로 뚫린 효자로에 면해서는 무심한 듯 건물의 파사드로 대응했으며 4층까지 다다르는 계단 골목길은 집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일상적 동선을 다양하고 풍요롭게 연출하고 있다. 답답하고 좁은 실내 계단의 기능적 해결을 뛰어넘는 새로운 해석이다.
몇 년 전 열린책들 사옥이 파주로 이사 가면서 사옥으로 쓰이던 4층에 주택이 들어섰다. 일층엔 카페, 이층엔 미술연구소, 삼층엔 사무실, 이른바 상가주택이 된 것이다. 서촌의 ‘동네건축가’를 자처하는 황두진은 최근에 이와 같은 소규모 저층 주상복합건물에 푹 빠져 있다. 한옥 건축가로도 유명하지만 도시 내 주거로서 단층 한옥은 한계가 있고 도심부의 밀도와 속도를 만족시킬 수 있는 주거유형이 좀 더 다양해지기를 바라고 그런 바탕에서 단순한 상가주택을 ‘무지개떡’ 형상으로 발전시킬 것을 제안하고 있다.
1층부터 꼭대기 층까지 똑같은 모양인 아파트가 ‘시루떡’이라면 ‘무지개떡’은 지하층부터 옥탑 층까지 층층이 다양한 용도로 채워지는 형상을 말한다. 특히 높이 규제가 있고 대지 면적이 좁아 적극적 개발에 한계가 있는 서촌에는 적합한 해결책으로 보인다. 경제적 구심력이 약해진 대신 사회문화적 구심력을 향상시킬 기회요소가 되는 것이다.
유럽의 베네치아·피렌체가 이런 도시주거의 대표적인 초기 모습이라면 파리의 경우 여기에 자동차의 속도가 반영된 근대화된 도시주거를 구축해 꾸준히 사랑받는 도시가 되고 있다.
최근 궁정동에 지은 ‘더 웨스트 빌리지’는 소규모 무지개떡이다. 지하층엔 녹음스튜디오, 1층엔 카페, 직접 계단으로 통하는 2층엔 디자인사무실, 3~4층엔 원룸형 임대주택, 5층엔 주인집으로 구성되었다. 푸드스타일리스트인 집주인은 자기 집 주방을 활용해 문하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강남의 아파트 한 채를 처분해 이곳에 이사 온 뒤로 이 동네에 푹 빠져 지낸다고 한다.
경복궁·북한산·인왕산 등 지척에 있는 좋은 인프라에 개인의 일상에서 다다르고 싶은 장소를 바로 곁에 두어 늘 좋은 친구나 지인들과의 사랑방 구실을 할 수 있으며, 자신의 일과 관계된 사무실 공간까지 마련해 나머지 임대수입으로 건물 관리 비용이나 고정 경비를 충당하는 이른바 일석사조의 효과를 누리고 있다.
임대수입으로 여유 있는 은퇴생활
최근 베이비부머들의 은퇴 후 노후가 걱정거리다. 아파트 투기 열풍의 주역이기도 했던 이들은 부동산의 자산비율이 80%에 이르고 있는데, 깔고 앉아 있기에는 식어버린 아파트 부동산 가치의 미래가 불투명하고 처분하자니 새로운 돌파구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일부 공기 좋고 물 맑은 건강형 전원주택도 염두에 두지만 지금까지 길들여온 도시생활을 단번에 끊어내기도 쉽지 않다. 이런 고민들이 수익형 부동산으로 옮겨 타는 움직임으로 나타나고 있다. 소규모 주택 임대사업과 상가주택에 관심이 쏠리게 된 연유일 것이다. 단순한 경제적 가치에만 매몰될 게 아니라 도시생활의 다양한 장소들을 가까이 유지하면서 일과 집의 거리를 좁혀 삶의 질을 확보하고 지인들과의 만남의 공간, 사랑채 같은 동네를 만끽하며 노년을 보내기를 소망하는 이들이 가꾸어 나가는 다양한 무지개떡 마을을 기대해 본다.
- 중앙선데이 | 최명철 · 단우건축 대표 | 제294호 | 2012.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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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조화로운 공간 구성, 실용적인 온돌 · 마루 ... 창덕궁 연경당이 답 |
| 1 사랑채 마당. 마당은 비어 보이나 매우 중요한 기능적 공간이다. 계절 · 시간 · 행사에 따라 다양 하게 가변적으로 잘 쓰여야 하기 때문에 ‘채우기 위해 비워져 있음’ 의 동태적이고 생산적인 공간인 것이다. | |
<10> ‘한옥 살리기’
한옥은 우리가 살던 집이다. 그런데 잊히면서 낡게 되고 헐려서 사라져 버렸다. 대표적인 도시 한옥마을인 서울 가회동의 낮시간은 관광객들이 차지했고, 밤에는 불 꺼진 골목이 된다. 새로운 부동산 신화를 이루어낸 북촌마을은 높아진 가격만큼 차곡차곡 박제화되고 있다. 인사동길, 삼청동 갤러리길을 타고 확산하는 상업화는 일상적 주거 기능을 위협한다. 지원금에 의존하는 지방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민속촌 같은 박제화된 관광자원이나 출퇴근하는 사업용으로는 한계가 있다. 지속 가능한 일상적 삶이 이루어지는 주택으로서, 이웃이 있고 도시적 생활이 가능한 주거단지로서 현대화가 이루어져야 한옥은 비로소 길을 찾을 것이다.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한옥의 독창성을 올바로 해석해 내는 것이 필요하다. 근대화 이전까지 흔들림 없이 계승된 한옥 건축의 핵심 콘텐트는 무엇일까. 창덕궁 연경당이 그 답이다.
연경당에 담긴 한옥 건축 핵심 콘텐트
1405년 태종이 경복궁의 이궁으로 창건한 창덕궁은 조선시대에서 가장 오랜 기간 정궁으로 사용됐다. 베이징의 자금성이나 경복궁처럼 인위적인 구조를 따르지 않고 자연 지형과 토착적 풍수지리에 따라 조화를 이루고 있어 가장 한국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또 왕가 생활에 편리함이 우선됐고 지형마다 친근감을 주는 구성으로 건축적 성취도 뛰어나다. 창경궁과 같이 동궐로 불렸 으며 남쪽의 국가 사당인 종묘와 북쪽의 왕실 정원인 후원이 붙어 있어 최대의 궁궐 규모를 이루고 있다. 이 후원에는 순조 28년(1828) 효명세자가 아버지 순조에게 존호를 올리는 의례를 행하기 위해 창건한 연경당이 있다. 왕실에서 일반 사대부들의 일상생활을 경험해 보고자 지었기 때문에 가장 규범적인 건축 형식을 따랐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옥의 공간 구성은 같은 목구조에 기와지붕 형식인 중국이나 일본과 큰 차이를 보인다. 기본적인 모듈인 한 칸은 수평적이면서 보편적이다. 모든 채마다 홑집의 형태라서 중국이나 일본 건축에서 보이는 공간적 위계나 종속적 영역체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마당을 두고 펼쳐지는 집의 모습은 조금씩 다른 변화를 이루면서 조화롭다. 연경당의 120여 칸 역시 균질하게 펼쳐져 안정적인 느낌을 준다.
방 안에 앉아 있어 보면 몸의 기가 살아나는 느낌이 든다. 자기를 둘러싼 위(天) · 아래(地)의 공간과 앞 · 뒤의 마당, 경계 없이 이어지는 마루 등 천지자연의 비어 있는 공간들과 바로 맞닿아 있다. 암자나 선방의 형국이어서 한 개인이 온전히 사유하는 전인적(全人的) 공간 구성이 된다. 이러한 홑집에서 방의 독자성은 자연과의 동화에는 유리하지만 자연으로부터의 보호(shelter) 라는 점에선 취약하다. 이를 온전히 보완하는 수단으로서 온돌은 필수적이다.
| 2 안채에서 보는 사랑채의 팔작지붕. 3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사람이 드나들 수 있게 만든 작은 문. 4 안채와 사랑채가 한눈에 보인다. 마루와 방이 번갈아가며 자리하고 있다. 사진 Choi, Soonyoung, 도면 창덕궁 브로슈어 |
부뚜막(土) 속에 나무(木)를 넣고 불(火)을 지펴서 무쇠 솥(金)에 물(水)을 붓고 밥(五穀)을 짓는다. 이렇게 부엌에서 오행으로 만들어진 화기는 구들을 돌고 돌아 방안을 데우고 벽을 타고 오르며 목재인 기둥과 창호를 팽창시켜 외기를 차단하고 지붕까지 촉열채로 사용해 난방효과를 극대화한다. 취사용 에너지와 난방용 에너지를 동시에 해결하는, 세계적으로 유일하고 탁월한 시스템이다.
이러한 온돌방이 실(實)이라면 이에 대응하는 마당이 공간, 즉 허(虛)가 된다. 마치 동전의 앞 · 뒷면처럼 실내와 실외 공간의 대응, 즉 홑집으로서 온돌방과 마당의 1:1 결합이 한옥 공간 구성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마당은 비어 보이나 매우 중요한 기능적 공간이다. 계절·시간·행사에 따라 다양하게 쓰여야 하기 때문에 ‘채우기 위해 비워져 있는’ 동태적이고 생산적인 곳이다.
방과 마당을 이어주는 마루 역시 빼어난 공간체계다. 사계절에 걸쳐 마당과 더불어 가장 가득 차는 공간이다. 실내와 실외를 맺어주는 사이 공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적극적 공간 구성으로서 독립적 지위를 갖는다. 마치 중용의 도에 나오는 시중(時中·때에 맞춰 양극단을 포섭해 운행하는)의 공간으로서 한옥 공간 구성의 핵심이다. 대부분의 사회적 활동과 생산 활동의 장소이기도 하다.
한옥의 형태를 결정짓는 것은 지붕이다. 지붕은 예부터 하늘을 상징하기에 과다할 정도의 재료와 장식 및 공력을 사용했다. 연경당 120칸 기와지붕도 일견 동일한 모습이 반복된 것 같지만 하나하나의 변화에는 세심한 의도가 들어 있다. 개별적 한 칸의 평등하고 독자적인 공간체계와는 달리 그 위를 덮는 지붕의 구성은 신분이나 성별 또는 공간의 쓰임새까지 다양한 의미가 담겼다. 예를 들면 안채와 사랑채의 지붕은 연경당에서 가장 공을 들인 부분이다. 양 끝단 누마루(바닥이 가장 높은 마루방)의 팔작지붕에서 시작해 서로의 높이를 맞물리면서 뒤편 안채와 연결된 사랑방의 지붕까지 팔작으로 마무리했다. 하늘의 기운으로 후손을 점지하고 싶은 의도를 다양한 조형미로 승화한 솜씨에서 선조들의 격조가 느껴진다.
한옥, 미래 주거양식으로 재해석해야
유럽의 르네상스는 중세 암흑시대 천년을 뛰어넘어 그리스·로마 시대로부터 오래된 미래를 끌어내 새로운 인류 문명을 탄생시켰다. 그리스신전과 로마의 건축술에 기초한 건축 형식의 재해석은 당대의 경제력과 인문학, 과학의 발전과 결합돼 서구의 건축양식으로 계승됐다. 더 역사가 오랜 한옥을 현대생활 속에서 어떻게 해석해야 하며 지속 가능한 미래의 주거양식으로 구현할 것인가. 오로지 우리의 노력과 창조적 역량에 달려 있다.
- 중앙선데이 | 최명철 · 단우건축 대표 | 제291호 | 2012.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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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마음의 생채기 아물게 하는 나무 위 유토피아 |
| 1 트리 하우스 전문 건축가 안드레아 베닝(Andreas Wenning)이 설계한 독일 북부 멜레(melle)의 트리 하우스 ‘매그놀리아 앤 파인(Magnolia and Pine)’. | |
<9> ‘트리 하우스’
힐링(Healing). 치유의 시대다. 인류의 문명은 고도로 찬란해지는데, 개인의 몸과 마음은 저마다 상처가 있나 보다. 요가나 명상, 심리학이나 정신과 치료, 나아가 템플스테이 등 조용히 치유하던 시절과 달리 책에서도, 학교에서도, TV 등 미디어에서도 이제는 상업화된 힐링이 유행이다. 선남선녀가 아닌 일류 스타나 대통령 후보까지도 힐링 캠프에 나와 자기 문제(?)에 집중하고 있다. 잔디 깔린 뜨락이나 푸른 숲속, 시원한 물가 등 도시에서 벗어나 자연과 더불어 내 몸을 치유하는 행사에 너도나도 뛰어들고 있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 서부개척과 산업화로 경제발전에 여념이 없던 1823년 미국에서 오페라 ‘클라리, 밀라노의 아가씨’의 노래 중 ‘Home! Sweet Home!’ 의 가사다. 즐거웠던 힐링 캠프도 해가 지고 조명이 꺼지면 막 내린 무대처럼 혼자가 된다. 돌아오는 길에 그저 ‘내 쉴 곳은 작은 집’ 그 집밖에는 없다.
최근 숲으로의 행렬 중에 ‘트리 하우스(Tree House)’ 가 치유의 공간으로 떠오르고 있다. 트리 하우스란 나무 위에 지어진 작은 집을 말한다. 어린 시절 큰 나무를 만나면 오르고 싶어진다. 여러 번 달라붙어 오르게 되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자유롭다. 모든 사물들이, 심지어 아버지까지 작아 보인다. 두근거린다. 내 앞으로 나만의 풍경이 펼쳐진다. 가만히 앉아 있어 보면 비밀스러운 나만의 시간이 생겨난다.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는 이런 장소를 유토피아와 비교되는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s)’ 라 명명했고, 에세이 『of other spaces』에서 정원이나 영화관, 박물관, 도서관 및 유원지 등을 현실 속 대안적 이상향의 장소로 기술했다.
| 2, 4. ‘매그놀리아 앤 파인’의 테라스. 3. ‘매그놀리아 앤 파인’ 실내. 5. 만화영화 ‘타잔’의 트리 하우스 스케치. ⓒJohn Puglisi |
나무 안 다치게 작고 간단하게
트리 하우스의 역사는 다양하다. 현재까지도 파푸아뉴기니의 코로와이족은 생존형 트리 하우스에서 원시적 삶을 살고 있다. 고대 로마시대 악명 높은 칼리귤라 황제는 연회를 위해 거대한 트리 하우스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Pliny, the Elder’s Natural History).
르네상스 시대 메디치가의 트리 하우스는 그림으로, 낭만주의 시대 로빈슨 표류기에서는 소설로, 홍차왕 립톤이 남긴 사진에도, 20세기 들어 최고의 흥행영화 타잔의 집이나 아바타의 나무마을까지 꾸준히 사랑받는 장소로 남아 있다. 트리 하우스를 현대화시키고 건축가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독일의 건축가 안드레아 베닝(Andreas Wenning)은 사람과 나무의 ‘조화’를 최우선으로 삼았다. 트리 하우스는 일단 ‘건강한 나무’에 의존해야 한다. 나무의 둥지 및 가지가 그 위에 올라가는 집의 무게를 견뎌내야 한다. 땅 위에 세우는 일반 건축물과 달리 구조적 안정성이 중요하다. 살아 있는 수목을 지주로 사용하므로 호스트 트리(Host Tree)에 대한 사전 검토나 세운 후의 점검은 필히 전문가에게 의뢰해야 한다. 또한 나무는 살아가는 유기체이기에 집이 나무의 성장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미국 오리건주에서 매년 개최되는 세계적 트리 하우스 모임인 WTC(World Tree-house Conference)에서는 구체적인 구조나 공법에 대한 연구나 실험이 활발하다. 초기에는 양쪽에서 조이는 샌드위치 공법이 사용됐다. 하지만 이는 나무의 성장을 저해하는 것으로 판명돼 이후로는 특수한 볼트를 나무에 박는 GL공법이 일반화되었다. 하지만 이 또한 나무에 생채기를 내는 방법이기에 안드레아 베닝은 인장력이 강한 특수 천으로 된 고리를 매다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마치 해먹이나 멜빵 같은 원리로서 ‘나무와의 완전 공존’을 실현하고 있다.
트리 하우스를 지을 때에는 ‘최소한의 법칙’ 이 필요하다. 최소한의 구조, 최소한의 재료 등 새가 나무에 둥지를 짓는 것처럼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의 최소 공간으로 구성해야 한다. 내부 역시 군더더기를 줄이고 최소한으로 실내 마감을 해야 한다. 이렇게 덜어내고 비워내는 과정 속에 자기 자신에 대한 몸과 마음의 치유도 병행되는 것이 아닐까.
이렇듯 사람과 나무의 조화를 원칙으로 2003년부터 시작된 트리 하우스가 독일 외에 미국이나 브라질 등 많은 나라에서 각광받고 있다. 2007년 독일 멜레(Melle)의 한 저택의 숲에 지어진 트리 하우스는 널찍한 테라스를 별도의 지주로 세워 또 다른 스타일을 선보이고 있다. 필요한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나무에만 의존하지 않고 부분적인 지주구조를 결합할 경우 훌륭한 작품이 가능해진다.
이른 아침에 잠에서 깨어 기지개를 켜고 심호흡을 할 때 나는 어디 있는가. 이런 느낌들이 치유의 공감을 이룰 때 숲은 새로운 힐링 캠프가 된다. 이 작가는 현재 미국 플로리다 숲속에 힐링을 위한 시니어 콘도미니엄을 새로 주문받아 열심히 작업 중이라고 한다.
힐링 위한 생활형 숲 체험 공간
한국은 자랑할 만한 숲의 나라다. 삼림 면적 비율이 국토 면적의 70%로 핀란드나 스웨덴같이 삼림이 풍부한 나라다. 벌거숭이 민둥산을 경제발전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울창하게 조성했다. 양적으로는 풍부해진 이제는 나무를 사랑하고 숲 가꾸기를 실천할 수 있는 일상생활 속의 삼림문화가 필요하다. 현대인들은 상대적으로 적은 도시 면적 속에서 밀도가 높은 삶을 살아가면서 경제적 풍요로움은 얻었으나 심신의 여유로움은 많이 잃어버렸다. 트리 하우스는 어린 시절의 판타지나 일상으로부터의 탈출, 건강한 숲에서의 치유 등 궁극적인 자연으로의 회귀가 주는 청량함으로 다시금 어른들의 로망이 되고 있다. 자연과의 조화를 중요시한 한국 건축의 전통을 이어가면서 우리의 삼림을 진정한 힐링 캠프로 만들고 싶다.
- 중앙선데이 | 최명철 · 단우건축 대표 | 제288호 | 2012.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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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아파트족의 로망 ... 텃밭 · 정원 딸린 알록달록 층층집 |
<8> 파주 도시농부 ‘타운하우스’
아이들은 마당 있는 집에서 사는 게 좋다. 흙이 있는 풀과 꽃, 나무 그리고 벌레나 새 등 자연과 같이 지내는 동안 많은 것이 아이에게 유익하다. 살아가면서 소중해지는 감수성이 무럭무럭 자란다. 아이들은 골목 있는 동네에서 노는 게 신난다. 만나서 부딪치고 깔깔대고 싸우고 돌아서서 뛰놀고 남들과 더불어 사는 과정에서 부쩍 크는 자신을 알게 된다. 타인을 배려하며 공감하는 능력을 자연스레 터득하게 된다.아이들은 자기만의 공간을 갖는 게 바람직하다. 혼자 놀고 공부하고 혼자서 울음을 삼킬 수 있는 다락이나 계단 밑, 장롱 속 등 조그마한 공간 속에서는 견뎌내야 할 삶의 큰 공간들을 깨닫게 한다. 크면서 꼭 필요한 생각하는 힘을 키울 수 있다.
경기도 파주 운정신도시에 인접한 ‘도시농부’ 타운하우스 마을은 아이를 가진 30, 40대 부부들에게 맞춤형 주거지다. 운정역 뒤편으로 도보 10분 거리에 있는 이곳은 계획된 개발구역이 아니다. 띄엄띄엄 집들이 있던 마을에 신도시 개발과 때맞춰 기반시설을 공유할 수 있는 이점 때문에 사업이 가능해졌다. 처음 1단지 20가구는 운정 신도시 입주가 이루어진 2009년에 기획해 2010년 분양이 완료됐다. 도시농부라는 컨셉트로 높은 관심 속에 분양에 성공했고 입주 후 만족도가 높아 본격적인 마을 만들기가 시작됐다.
운정신도시 아파트 분양가와 비슷
총 5개 단지 250가구로 이루어진 이 마을은 울타리가 없다. 일반적인 개발사업 단지나 신도시 아파트 단지 같은 경계가 없다. 기존에 사용되던 마을길을 이용해 골목길이 이어진다. 따라서 영역 구분이나 단지의 대문이 필요없다. 마을에 들어서면 2, 3층의 올망졸망한 집들이 다양한 채색으로 녹색 정원과 어울려 아름다운 풍경으로 다가온다. 불황과 주택경기 침체 우려 속에서도 인근 운정신도시의 새 아파트 분양가와 비슷한 가격으로 2011년 분양을 성공시켰다. 땅콩집처럼 새로운 흐름에 맞춰 수요자 눈높이에서 세세한 부분까지 준비해 나간 기획력이 돋보인다. 건축을 전공한 최용덕 대표의 디자인 능력도 한몫한 것 같다.
우선 2, 3단지의 새로운 수직형 주택 구조는 차별화된 상품으로 가장 인기가 높다. 아파트 생활의 단조로움에 대한 대안으로 내건 ‘평범한 수평보다 개성 있는 수직이 좋다’는 슬로건은 실험적이다. 스킵 플로어(skip floor)라는 반층형 스타일은 우리나라에서 좀처럼 보기 드문 구조다. 계단을 중심으로 반 층씩 엇갈려 배치된 공간구조는 3층의 건축 형태 안에 7개의 실내공간과 1층 마당, 옥상 발코니 등 총 9개의 독립적인 공간을 제공한다. 그 덕분에 재택 근무자나 자기 취미생활이 주된 주민들 입장에서는 독자적인 공간을 활용하는 것에 대한 만족도가 매우 높다.
둘째로는 DO 시스템이다. ‘당신의 수고로움을 위로한다’. 도시 생활과 아파트 생활의 편리함에 익숙해진 수요층들을 위해 단독주택이나 전원주택의 단점을 해결하기 위한 서비스 프로그램이다. Do it, 즉시 실행한다는 뜻으로 여덟 가지 프로그램이 있다. ① 폐쇄회로TV(CCTV)를 이용한 24시간 보안 서비스 ② 출퇴근 및 등·하교를 돕는 셔틀버스 운행 ③ 청소 등 클린 서비스 ④ 세탁수거 서비스 ⑤ 유아방 서비스 ⑥ 돌보미 서비스 ⑦ 택배 서비스 ⑧ 녹색 정원 서비스 등이다. 아직은 입주가 완료되지 않아 시행사인 ‘도시농부’가 관리사무소 기능을 대신하고 있다. 앞으로 250가구가 전부 입주해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게 되면 주민 자치모임에서 관리규약과 함께 시스템화시킬 예정이다.
셋째는 올해부터 문을 연 브런치 바 ‘아무거나(A’muguna)’다. 하루 세 끼 식사를 제공하기 위한 식당으로 출발했는데 지금은 주민들의 열렬한 호응 속에 주민센터 기능까지 구심점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맞벌이 부부에게 절실한 이른 아침 저렴한 아침식사, 출근 및 등교 뒷바라지를 마친 전업주부들의 브런치 수다방, 돌잔치 집들이 같은 손님 행사에 지쳐가던 부부들을 위한 우아한 연회 장소 등 다양한 활용은 변두리 전원생활에서 누리기 힘든 새로운 해결책이 된다. 또 2층 북카페에서는 다양한 교육프로그램들이 재능기부 형태로 진행 중이다. 특히 입주민 중 원어민들이 앞장서고 있는 언어교육은 참여도가 높아져 점점 활성화되고 있다.
넷째로는 도시농부 프로그램이다. 무료로 제공되는 가구당 5~6평씩의 텃밭에서는 전원생활의 즐거움과 유기농 식재료까지 수확해 먹는 기쁨을 준다. 여기에 입주민 자치모임에서 주도하는 새로운 커뮤니티 플랜들도 시작됐다. 이른바 창업지원센터 드림 팩토리(Dream Factory)다. ‘따뜻한 삶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자체 생산과 창업을 서로 도와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경제적 커뮤니티까지 새로운 실험을 준비 중이다. 전통적인 농업 경제에서의 마을 공동체가 도시형 생산자, 즉 ‘도시농부’의 컨셉트로 진화하는 일종의 주거문화운동으로도 볼 수 있다. 주민 위한 브런치바 ‘아무거나’
우리나라에서 도시에 사는 사람은 전체 인구의 90%가 넘었다. 또 아파트 가구수가 전체 가구수의 절반을 훨씬 넘어섰다. 프랑스 지리학자 발레리 줄레조는 그칠 줄 모로는 아파트 열풍을 보고 한국을 ‘아파트 공화국’ 이라 지칭했다. 무엇이 우리를 여기까지 오게 했을까. 최근의 부동산 경기 침체와 속락하고 있는 아파트 가격 속에서도 용적률과 층수로만 계산되는 주택공급 제도들은 대체 뭘 위한 것일까. 우리의 도시생활과 주거환경의 미래는 어떤 것일까. 저 파주 변두리에서 일고 있는 조그마한 나비의 날갯짓이 향후 어떠한 의미나 가치를 창출하게 될지 지켜볼 일이다. - 사진 도시농부 타운하우스, ⓒ Choi Soonyoung
최명철씨는 집과 도시를 연구하는 ‘단우 어반랩(Urban Lab)’을 운영 중이며, ‘주거환경특론’을 가르치고 있다. 발산지구 MP, 은평 뉴타운 등 도시설계 작업을 했다.
- 중앙선데이 | 최명철 · 단우건축 대표 | 제284호 | 2012.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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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보일러 안 때고도 한겨울 실내 20도 산골짜기 작은 집 |
| 강원도 홍천의 ‘살둔 제로에너지 하우스’. 47평 규모의 이 집은 건축비가 평당 400만원 가량 들었다. 겨울철 한달 유지비가 5~6만원선에 불과하다. 현재 이 양식을 참고해 전국에 10여채가 지어졌다. | |
<7> 강원 홍천 ‘살둔 제로에너지 하우스’
지난 6월 20일부터 3일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는 리우+20 제3차 유엔 지속가능발전회의가 열렸는데, 글로벌 경제위기와 미국·중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의 권력 교체기와 맞물려 성과 없는 회의가 됐다. 20년 전인 1992년 1차 회의에서는 기후변화협약을 체결하는 등 지구환경에 대한 구체적인 리우 선언이 있었고, 이에 따른 97년 교토의정서에 의해 선진 38개국은 1990년을 기점으로 2008~2012년까지 평균 5.2%의 온실가스를 감축하기로 했다.
리우 선언과 교토의정서에 의한 기후변화협약이 무기력하게 된 지금, 하나뿐인 지구가 위험하다. 급증한 기후 관련 재해·재난 속에서 세계적인 리더십에 기대를 걸었던 많은 이의 걱정도 늘고 있다. 게다가 2012년은 석유 정점(peak oil)의 해이기도 하다. 투자전문가 제프시겔은 최근 『재생 가능한 에너지에 투자하라』는 책에서 기존 연구의 모든 자료를 분석해 본 결과 투자적 측면에서의 피크 오일은 2012년이라고 단정했다. 피크 오일의 문제는 높아지는 원유가와 공급량 감축 등으로 우리나라처럼 수입에만 의존하는 에너지 소비 국가에는 치명적이다.
이대철 선생 10여 년 연구의 결실
피크 오일에 관한 국가적 차원의 걱정에 대비하고자 지어진 집이 있다. 강원도 홍천 산골에 있는 ‘살둔 제로에너지 하우스’다. ‘살둔’이란 지명은 생둔(生屯)이라고도 하며 ‘살 만한 언덕’이고 ‘여기에 머물면 산다’라는 뜻이다. 워낙 오지여서 임진왜란이나 한국전쟁 때에도 안전했고, 세조에 반대해 단종 복위를 꾀했던 사람들이 숨어 살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오는 곳이다. 정감록에는 ‘삼둔사가리’라 하여 방태산 주변 일곱 곳을 일러 피난처로 기록했다. 삼둔은 홍천군 내면 지역 방태산 남쪽 내린천변에 있는 살둔·월둔·달둔이고 사가리는 방태산 북쪽 인제군 기린면 지역에 있는 적가리·아침가리·연가리·명지가리를 말한다. 이런 세상 끝 같은 곳에서 ‘21세기 노아의 방주’를 만들겠다는 이가 있다. 30여 년 전 일찍이 전원주택을 지어 자연친화형 삶을 살았고, 이를 통해 97년 『애들아, 우리 시골 가서 살자』라는 책으로 일반인에게도 알려진 이대철 선생이다. 에너지 수요를 줄이는 주택 개발을 위한 십여 년간의 연구와 돈키호테 같은 의지가 결실을 본 이 살둔 집은 지식과 지혜로 가득하다. 외부 에너지, 특히 화석에너지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온전한 제로 에너지하우스는 국가나 기업도 성취하지 못한 큰 사건이다.
너무 넓지 않게, 단순하게 지어라
일단 이 집엔 난방용 보일러가 없다. 혹독한 추위로 유명한 강원도 산골 집에 난방 보일러 없이 살 수 있을까? 보조 열원인 벽난로만으로 한겨울에 20~22도를 유지한다는 이 집의 비결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절약이다. “1㎾h를 아끼는 것은 1㎾h를 만드는 것보다 훨씬 가치 있다”는 철학이다. 패시브 하우스라고도 불리는 절약형 주택의 출발은 적정한 면적과 단순한 형태에 있다. 선생이 경험한 바에 따르면 “건축가가 설계한 집은 복잡하다. 따라서 건축비도 비싸고 열 손실이 많아진다. 복잡한 형태는 유지관리도 어렵다.” 결론적으로 동서로 긴 남향집에 30평 규모(7×14m) 이하를 권장한다.
둘째는 가장 중요한 단열이다. 불리한 외부 환경을 최대한 차단하고 집안의 온·습도 조건을 균질하게 유지하는 고유의 셸터(shelter) 기능을 말한다. 선생의 결론은 미국의 자재 전시회에서 발견했다는 SIPs(Structural Insulated Panels)이다. 불에 안 타고 안전한 두께 200㎜ 스티로폼 양면에 합판 대용의 친환경 소재 OSB(Oriented Strand Board)를 붙인 구조용 외벽재다.
셋째는 창호의 문제다. 창호 자재의 선택이나 시공상 주의하는 것 이상으로 위치와 크기 문제가 중요하다. 유리창은 집 디자인에서 결정적 요소다. 집에서 보는 전망이나 보이는 외관보다 겨울철 햇빛에 의한 열 에너지원과 자연환기의 기능적 조건이 중요하다. 따라서 지역의 위도와 최저 기온, 창의 방향과 창호의 종류, 실내 열저장체와의 관계까지 분석 대상이 된다. 비싸지 않은 시스템 창호, 햇빛이 중요한 남쪽은 로이코팅 된 2중창과 나머지는 3중창, 바닥면적 대비 남향창의 면적은 최대 15% 이내, 단열 덧문은 관리가 가능한 내부에, 창틀은 PVC, 모기망은 롤업 제품으로 하는 등 각종 경험이 함축돼 있다.
넷째는 실내 축열 기능이다. 밀도가 높은 물체는 온도 변화가 느리다는 특성을 활용한다. 특히 겨울철 실내 깊숙이 들어오는 햇볕을 축열시키는 것이 핵심이다. 실내에 효율적인 열저장체(thermal mass)를 되도록 많이 갖는 것이 중요하다. 타일로 마감한 바닥, 내화벽돌로 된 벽난로, 점토벽돌로 된 내벽 등이 사용된다.
다섯째는 숨 쉬는 집이다. 단열이 잘된 패시브 하우스는 겨울철 환기가 문제다. 따라서 실내온도를 유지 하면서 환기를 적절히 하는 방법으로 전열교환기(HRV·Heat Recoverable Ventilation)를 사용한다. 친환경 자재를 사용해 유해가스 발생을 최소화하는 것은 필수다.
마지막으로 보조 열원이다. 잘 구성된 패시브 하우스는 일반 주택에서 사용되는 에너지의 10%미만 으로 난방이 가능하다. 하지만 겨울철에는 맑은 날이 50% 정도이기 때문에 보조 난방이 필요하다. 까다롭긴 하나 잘 선택한 벽난로는 축열 기능과 더불어 중요한 보조 난방 수단이다. 또 주택에서 필요로 하는 전기를 공급할 수 있는 태양광 발전도 필수다.
이 집은 이런 모든 지적 연구의 성과물이다. 뒤편에 있는 목공장에서는 선생의 땀과 열정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망치박물관을 차릴 정도의 장비에 대한 집념도 기인 수준이다. 현대판 ‘합리적 기인’인 이대철 선생만이 이룰 수 있는 길인 것 같다.
2011년 대한민국 녹색기후상 대상 등 국내에서 상도 여럿 받았지만 국가나 기업에 손 내밀지 않고 꾸준히 제로에너지 하우스의 보급을 위해 지금도 실천 가능한 사업만 하나씩 쌓아가는 선생의 업적을 보면서 건축가로서 부끄럽다. 그래서 이 글은 집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 중앙선데이 | 최명철 · 단우건축 대표 | 제280호 | 2012.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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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속 보이는' 유리집 함께 쓰는 마당 마음의 벽도 허물까 |
<6> 서판교 월든힐스 2단지
서울시 신청사의 가림막이 걷혔다. 오랜 세월 보아왔던 석조건물 뒤편에 낯선 유리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두 건물이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건축가의 변명에도 불구하고 익숙한 것과 낯선 것의 대비를 인식하기도 전에 시각적으로 불편하다. 일제강점기 시대 묵직한 건물을 압도하는 유리 건물의 형상 때문에 의도하지 않은 억측들이 네티즌이나 외국인들 사이에서 퍼져나간다. 꽤나 오랫동안 시빗거리가 될 것 같다.
노출증과 관음증의 건축 재료, 유리
최초의 유리건물은 1851년 영국 런던의 하이드파크에 지어졌다. 전장이 565m나 되는 수정궁(Crystal Palace)이다. 제1회 만국박람회에서 대영제국의 위용을 자랑하면서 서양 문명의 팡파르를 울렸다.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 때 혁명 100주년 기념탑으로 지어진 에펠탑과 함께 역사를 바꾼 건축물이 되었다. 지구상에 유리와 철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들의 출현으로 도시의 풍경이 바뀌었고 모더니즘의 역사가 시작됐다. 유리는 투명하다. 자신의 삶을 어느 정도 남에게 보여주고 싶고, 어느 정도 다른 사람의 삶을 엿보고 싶다는 인간의 노출증과 관음증을 충족시키는 데 유리만 한 재료도 없다. 건축가로서는 도전하고 또 극복하고 싶은 재료다.
| | | 2 1851년 런던 하이드파크에 지어진 수정궁. [사진 PetrusBarbygere] | 이 같은 욕망을 구현한 유리집으로 대표적인 작품이 1945년 시카고 근교에 미스 반데어 로에(Mies van der Rohe)가 지은 판스워드 주택(Farnsworth House)과 49년 미스에 대한 존경심을 담아 지은 필립 존슨의 글라스하우스(Glass House)다. 벽면이 온통 유리다. 나의 공간이 곧 너의 공간인 셈이다.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파격이었다. 건축주와 논란을 빚고 결국 소송까지 한 판스워드 주택은 빼어난 작품성과 동시에 건축적 교만이라는 논란 속에 국가문화유산이 됐다. 두 유리집 모두 경치 좋은 교외에 위치한 주말 별장이다. 그렇다면 도시 속 공동주택으로서 유리집은 가능할까. 지난해에 입주가 시작된 경기도 서판교 월든힐스 2단지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훤히 들여다보이는 각 세대 1층
서판교는 뛰어난 입지로 각광받는 곳이다. 청계산 남면과 마주하고 있는 광교산 · 백운산 자락의 수려함 사이에 있는 서판교는 최근 모 재벌 3세의 집 이야기부터 시작해 단독주택 붐의 진원지이기도 하다. 새로 뚫린 경수고속국도나 남서울CC 등의 환경도 인기 원인이다. 2006년 대한주택공사(현 LH공사)는 판교 신도시 부지 중 가장 입지가 좋은 이곳에 고급 주거단지를 기획했다. 외국인 초청 설계 경기의 방식으로 3명을 선출해 청계산 남사면 길게 늘어선 부지에 다양한 저층 연립주택을 건립했다.
| 3 서판교 월든힐스 2단지 내부.4 미스 반데어 로에가 지은 판스워드 하우스. [사진 tinyfroglet] 5 필립 존슨의 글라스하우스. [사진 Eirik Johnson] |
2단지는 운중천이 흐르는 길에서 보면 서측 위쪽의 1단지와 동쪽 고속도로 전에 있는 3단지 사이에 가장 낮은 부지에 위치해 있다. 올망졸망 하얀 입방체들이 늘어선 전경은 낮아서인지 편안하게 느껴진다. 차량이 들어서는 정문을 지나면서부터 보이는 백색의 건물과 유리로 된 풍경은 낯설다. 마당에 서면 쇼케이스 형태의 건물들이 양옆으로 마주해 있다. 각 세대 1층은 4면이 온통 유리다. 그런데 유리벽을 사이로 마주한 상대가 모르는 사이라면 둘 다 불편해진다. 마네킹이 움직이면서 나를 바라보거나 우리 속의 동물이 나를 보고 웃는다고 생각해 보라. 내 시선의 선택권과 타인의 시선 간에는 수많은 사회적 관계가 존재한다. 설계자인 일본의 노 건축가 야마모토 니켄(山本理顯)은 이런 관계에 주목한 사람이다.
“20세기 들어 ‘한 주택=한 가족’이라는 형식이 자리 잡았다. 이런 가족 전용 주택을 목표로 설계한 결과 주택은 그 지역 및 환경과는 분리된, 획일적인 패키지 상품이 되고 말았다. 고령화 등으로 인구 구조가 급격히 변하고 가구당 평균 인구 수가 2인으로 떨어지는 상황에서 주택은 미래 라이프스타일을 염두에 두고 지어져야 한다. 이제부터는 주택과 주택 사이의 관계 즉 공동체 문제에 주목해야 한다.” 서판교 월든힐스 2단지는 바로 핵가족만의 자율성과 완결성에 그쳐 밀실에 가까워진 현대의 주거문화를 경계하면서 새로운 관계의 복원을 주장하는 그의 의도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21세기 버전 이웃사촌 만들기 실험
10여 가구씩 나누어진 9개의 동네는 각기 공동 데크 형식의 마당이 있고 이 공간으로부터 각 집의 현관이 연결된다. 현관이 있는 이 유리집을 건축가는 ‘사랑방’이라 불렀다. 일본에도 있다는 이 사랑방 형식은 개념상 우리나라 전통 주거형식과 유사하다. 전통 가옥에서 사랑채, 또는 사랑방은 외부인과 자유롭게 소통하는 공간이었다. 프라이버시를 우선하는 사적 공간(private space)과 열려 있는 공적 공간(public space) 사이의 매개공간, 즉 사회적 공간(social space)이었던 것이다. 이 사회적 공간이 넉넉해질 때 인간들의 관계가 풍요로워진다는 내용이 건축학 개론에 나온다. 노 건축가의 얘기를 더 들어보자. “이 사랑방은 거주자들이 자유롭게 창의적으로 꾸밀 수 있게 비워놓았다. 텅 빈 캔버스라 생각해 주길 바란다. 취미를 위한 방이거나 작업실로 쓸 수 있다. 응접실로 꾸며 손님을 맞는 공간이 될 수도 있고, 아이들을 위한 놀이공간으로 만들 수도 있다. 가족만이 아닌 이웃을 의식하며 사용하는 장소가 되면, 거주자의 개성과 활기와 온정이 담기게 된다. 프라이버시와 커뮤니티, 이 둘이 공존하는 새 시대의 주택이 될 것이다.”
역사적으로 예술가들은 당대의 평가에서 종종 외면당해 왔다. 에펠과 미스도 여러 수모를 겪었다. 서판교 월든힐스 2단지도 예외는 아니다. 미국발 경기 하락에도 순조로운 분양을 마친 1, 3단지와 달리 2단지는 지난해 입주 때까지도 50% 미만에 머물렀다. 구조조정 중인 LH공사로서는 애물단지였다. 현재까지도 몇 가구가 미분양이란다. 그런데 입주 후 사계절을 지낸 지난봄부터 조금씩 변화가 감지됐다. 각양각색으로 인테리어가 된 이 사랑방 공간을 중심으로 이웃끼리 저녁을 함께하거나 다양한 모임을 여는 액티비티가 하나 둘 생기고 있다고 한다. 낯선 사람이 이웃 사촌이 되는, 새로운 공동체 실험이 시작된 셈이다. 결과는 과연 어떻게 나올 것인가. - 자료 제공 야마모토 니켄(山本理顯)
- 중앙선데이 | 최명철 · 단우건축 대표 | 제278호 | 2012.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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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좁은 골목 안 바이커 집, 기찻길 옆 뮤지션 집 |
<5> 맞춤형 소형 주택
도쿄 스기나미구의 한 주택가 좁은 골목에 들어서면 골목 끝에 하얀 건물이 보인다. 그 골목을 따라 10여m 들어서면 곡선이 도드라진 작은 마당이 나온다. 이 작은 마당을 면해 8개의 현관문이 마치 둥지 속 새들처럼 조밀하게 벽을 이루고 있다. 가운데 서서 하늘을 올려다본다. 둥근 우물 형상의 하늘. 빨려들어간 듯 들어선 곡선 마당에서 둥근 하늘을 쳐다보는 순간 태아의 원초적 느낌 같은 것이 전해지는 듯하다. 스기나미구 니시 에이후쿠(Nishi Eifuku) 지역에 있어 NE 아파트로 불리는 이곳은 오토바이 매니어들을 위한 8세대 소형 집합주택, 이름하여 바이커스 맨션(biker’s mansion)이다.
오토바이 매니어들은 일반적인 주택단지에서는 많은 불편을 겪는다. 오토바이 둘 곳도 마땅치 않고 소음도 곤란하다. 주변의 눈총이나 불평을 견뎌야 하고 장난이나 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NE아파트는 이런 문제를 해결해주는 특화상품이다. 시작은 부지였다. 좁은 골목을 지나야 다다를 수 있는 대지. 일본에서는 이런 땅을 흔히 깃대부지(旗竿敷地)라 부른다. 깃대에 해당하는 골목길과 깃발 형상의 네모난 땅의 조합을 일컫는다.
스기나미구는 조용한 주택가이지만 시부야·신주쿠 등 번화가와 가깝기 때문에 인기가 있는 동네다. 하지만 이런 깃대부지는 주변 건물들에 의해 막혀 있기 때문에 활용도가 낮아 땅값이 싸다. 좁은 골목길로는 차량 이용도 불가능하다. 조망도 채광도 열악하다. 따라서 중앙에 마당을 두고 건물을 둘러싸는 방법만이 유일한 해결책이 된다.
어쩔 수 없는 땅의 한계가 누군가에겐 기회가 됐다. 우선 값비싼 동네에서 비교적 저렴한 임대주택이 생겨났다. 둘째, 차 대신 오토바이로 사는 이들에게 좁은 골목길은 그들만의 전용공간이 됐다. 셋째, 중앙 마당의 곡면 공간이 훌륭한 오토바이 전시장이 되면서 매니어들끼리의 커뮤니티 공간으로도 활용됐다. 넷째는 그들만의 건물들로 둘러싸여 소음에 대한 신경을 안 써도 된다는 것이다. 다섯째로는 마당에 면한 각 1층 공간이 각자의 애차(?) 전용공간이 된다는 것이다. 보관 및 수리가 가능하고 더구나 같이 거주할 수 있는 주륜장은 바이커들에게는 최고의 해결책이다.
다음 단계의 해결은 디자인에 있었다. 건물의 볼륨을 덜어내 마당을 만들면서 오토바이의 방향 전환을 쉽게 하는 타원형 공간을 만들었고 다시 이 공간을 군더더기 없는 미니멀한 벽체로 마무리해 공사비를 절감했다. 깔끔한 디자인으로 젊은 매니어들 취향까지 부합한 셈이다. 마당을 향한 7개의 방사형 철근 콘크리트구조 벽체는 세대별 프라이버시뿐만 아니라 지진에도 강한 구조다. 전용면적 28㎡에서 50㎡까지 각기 다른 평면 구성은 개성 강한 매니어들에게 새로운 만족감을 주기도 한다. 2층형 3세대와 3층형 A, B 두 타입 5세대로 구성됐기 때문에 1~2인 가구의 선택 폭을 넓혀 주고 있다. 특히 좁은 공간을 디테일이 강한 일본식 마무리로 해결해 가장 인기 좋은 임대주택으로 변신, 부동산 가치 또한 높이고 있다.
이 집으로 2009년 도쿄 건축상 최우수상을 수상한 나카에 유지(中永勇司·http://nakae-a.jp)는 이렇게 말했다. “특화된 디자인으로 차별성을 추구하면 수요자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 혼자 사는 사람들은 취미생활을 즐기며 사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를 활용하면 수요도 꾸준하고 사회 문제로 대두되는 커뮤니티 부재 현상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른바 컨셉트 맨션(concept mansion)의 기치를 내건 이유다.
컨셉트 맨션이란 주택 수요자의 모든 조건, 즉 경제적 여건이나 라이프스타일 또는 직업이나 취미까지를 고려해 설계하는 이른바 맞춤형 소형 주택을 말한다. 수요자의 눈높이에 맞게 패션이나 음악처럼 다양한 스타일의 주거 형태가 요구된다. 도쿄 세타가야구에 있는 MM아파트도 이와 유사한 경우다. 이른바 뮤지션 맨션(musician mansion)이다. 이 동네에는 30초당 1대 간격으로 전철이 통과한다. 이른바 기찻길 옆 오막살이 형국이다. 근처에는 메이지 대학이 있고 가까운 거리에 시부야·신주쿠 등 번화가도 있어 접근성에서 젊은 수요층이 많다. 전환 포인트는 전철의 소음을 역으로 이용해 뮤지션들이 맘 편하게 연주할 수 있도록 집 안에 스튜디오를 구성한 것. 소음에 소음으로 맞불을 놓은 셈이다.
결국 건축가는 어떤 사람인가. 일차적으로 수요자의 눈높이에서 설계하고, 건축주의 욕구도 만족시켜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도시를 더불어 사는 공간으로 창조해 내야 한다. 일본에는 전용 50㎡ 미만의 소형 주택이 약 1000만 가구로 전체 가구 수의 20%가량 된다. 도쿄는 전체 570만 가구 중 1~2인 가구가 차지하는 비중이 70%에 이른다. 따라서 1~2인 가구용 임대주택 사업은 중요한 수익형 부동산 상품이다.
우리나라의 인구 구조나 사회 여건 변화는 급속히 일본을 따라가고 있다. 최근 발표한 통계청 자료에는 올해부터 1~2인 가구 수가 50%를 넘어섰고, 특히 1인 가구 비율(25.3%)은 30%대인 노르웨이·일본·영국이나 미국(26.7%)의 수준까지 육박하고 있다. 국가별 통계보다 더 중요한 것은 대도시권의 통계수치일 것이다. 도쿄의 경우 1인 가구 비율이 42.5%라니, 이를 쫓아가는 서울의 미래는 과연 어떻게 될까. 부동산 침체 속에서 주거용 오피스텔이나 도시형 생활주택 정도만이 팔리고 있는 요즈음, 컨셉트 맨션 즉 맞춤형 주택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 사진 Hiroyasu Sakaguchi
- 중앙선데이 | 최명철 · 단우건축 대표 | 제276호 | 2012.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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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드림하 우스 ‘ PA P I ’.2005년 아이치현 만국박람회를 위해 도요타홈이 만든 스마트하우스다. 2 일본식 정원을 즐길 수있는 손님 접대용 다다미방. 3 거실. 기상시간 1시간 전부터 천천히 커튼이 열리며 아침을 깨운다. 4 주차장. 정전 시에는 하이브리드 자동차로부터 전원을 공급받을 수 있다. 5 침실. ‘PAPI’는 집안의 전자제품과 실내 습도, 온도등이 자동으로 조절된다. | |
<4> 미래 주택
미래의 집은 어떤 모습일까?
1990년 작 영화 ‘토탈 리콜’의 첫 장면은 2084년의 미래 주택이다. 숲 속의 집처럼 보이지만 창문 너머 바깥 풍경은 하나의 디스플레이 화면이다. 날씨 변화도 보여주고, TV가 대형 동영상 전화기가 되기도 한다. 가상 현실의 세계를 앞장서 제시한 영화로 많은 SF영화들의 전범이 됐다. 2054년의 워싱턴을 배경으로 한 톰 크루즈 주연의 ‘마이너리티 리포트’(2002)에서는 집 안에 있는 여러 개 투명 평판 디스플레이가 손동작과 안구 인식 등으로 작동되는 장면이 돋보였다. 복제인간을 그린 영화 ‘아일랜드’(2005) 속 미래 주거공간에서는 침실에서 수면상태를, 변기에서는 소변을 분석해 일일 건강 상태를 알려준다. 그날의 식단도 건강 상태에 맞춰 조절된다. 이처럼 영화나 만화, 소설 등 공상과학 세계에서 미래의 집은 상상 속의 작업이다. 현실적으로는 미래의 집에 대한 추구가 일반적이지는 않다.
21세기를 맞으며 각국은 뉴 밀레니엄 시대를 선점하기 위한 다양한 프로젝트를 준비했다. 미래의 집 연구 또한 경쟁적으로 이어졌다. 미국 MIT에서는 1995년 『Being Digital』을 쓴 니컬러스 네그로폰테가 미디어랩(media lab)을 출범시켰다. 이곳에서 하버드 의대와 미국노인협회(AARP) 및 여러 산업체의 참여 아래 2004년 7월 39평 크기 아파트 형식의 실험공간인 플레이스 랩(Place lab)을 건설했다. 7개의 미래 환경 영역을 설정하고, 초고령 사회 진입에 대비하는 연구 및 개발사업을 대대적으로 추진했다.
조지아테크에서 2002년 세운 어웨어 홈(Aware Home)이나 스웨덴 왕립기술과학대학이 주축이 된 커뮤니케이션 홈(com. Home), 벨기에의 리빙 투머로(Living tomorrow) 등도 21세기 미래의 집을 선점하기 위해 맹진 중이다. 이들의 공동 목표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IT기술의 결과물인 사이버 공간의 확장이다. 물리적 공간 외에 가상현실이 더해지는 상황에 따른 변화 연구가 필수적이 됐다. 유비쿼터스 공간의 탄생이다. 둘째는 기후재난과 탄소저감에 대한 세계적 공감대가 형성됨에 따라 지속가능성의 탐구다. 녹색성장으로 함축되는 친환경 에너지 자급형 주거형태 연구개발이 여기에 해당한다 하겠다.
이런 흐름 속에서 일본의 ‘파피 홈(PAPI Dream Home)’이 탄생했다. PAPI는 Pal(사이가 좋다)과 Pizzazz(활기 있다)의 합성어다. 도쿄대 사카무라 겐 교수팀은 유비쿼터스 컴퓨팅이 가능한 주거공간의 실현을 목표로 1989년 트론(TRON·The Real-time Operating Nucleus)하우스를 건립했다. 여러 차례 실험과 개축을 통해 기술을 축적하던 중, 2005년 아이치 엑스포를 준비하던 도요타사의 지원으로 PAPI를 선보이게 됐다.
일본에는 우리나라 영·호남처럼 관동(간토·도쿄 중심지역)과 관서(간사이·오사카 중심지역) 지방이 있다. 이 두 지방의 대립 또한 역사가 있다. 두 지역을 구분하는 중부지역에 동해(도카이·나고야 중심지역) 지방이 있고, 그곳에 나고야시와 도요타시를 포함한 아이치현이 있다. 아이치 엑스포는 이런 배경 아래 21세기를 여는 일본의 ‘희망 프로젝트’였다. 국가적으로는 일본의 재기, 지역적으로는 관동·관서의 지역 갈등을 해소하는 국토개발, 산업적으로는 렉서스를 앞세운 도요타의 미래 등 어쩌면 완벽한 시나리오의 행사였다. 행사의 주역은 당연히 도요타였고, 도쿄대 사카무라 교수의 트론하우스 또한 준비된 작품이었다.
미래주택 PAPI 홈은 아이치 엑스포장의 도요타 자동차박물관 옆 조용한 언덕 위에 있었다. 사카무라 교수팀이 PAPI를 통해 다음과 같은 내용을 추구했다. ① 식물의 광합성을 모방해 개발한 외벽 에너지 시스템 ② 유비쿼터스 커뮤니케이터에 의한 네트워크 인식 및 최적 제어 방식 ③ 자동차와 집이 같은 시스템 하에서 에너지나 정보들을 주고받을 수 있는 기술 ④ 가족 구성원의 스타일이나 동작 인식들을 통한 자동 보안 시스템 ⑤ 사람의 건강 상태와 심리 상태가 연계돼 작동하는 홈시어터 ⑥ 인텔리전트 수납공간과 일체화된 부엌·식탁 시스템 ⑦ 생체 정보센서를 활용한 기상조절기능 등 수면의 질을 보장하는 쾌적 수면 침실
이런 요소 기술들을 계속 이 집에서 실험하고 연구개발하고자 했다. PAPI 홈은 외피 해결과 옥외 공간까지 연계해 각종 미래주택 연구 중 가장 집과 가까운 형상을 갖춘 솔루션이었다.
더 나아가 도요타홈의 시미즈 뎃타(淸水哲太) 회장은 주택산업의 미래에 대한 포부도 발표했다. 즉 지금까지의 현장생산 방식을 자동차처럼 공장생산 방식으로 전환시켜 품질 100% 보장, 크레임 없는 시공 및 비용 대비 효과를 2배로 하는 주택생산 방식의 전면적 전환을 주창한 것이다. 미래주택 생산의 세계 제패를 위한 속내도 드러낸 행사였다. 이렇게 아이치 엑스포는 70년 오사카, 85년 쓰쿠바 이후 일본 내 세 번째 엑스포로서 21세기 재기를 꿈꾼 잔치였다. 그러나 이 행사 이후에도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은 계속됐다. 대규모 리콜 사태로 도요타의 눈물도 이어졌다. 나고야의 중부지방 중흥론도 미뤄졌다. 최근 도요타 홈에 문의한 결과 “PAPI 홈은 2008년 문을 닫았고, 현재로서는 보여줄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단순히 진보한 기술의 조합만으로는 새로움을 만들 수 없다. PAPI 홈의 요소 기술들이나 도요타의 개성 없는 조립식 생산체계로는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집의 가치를 창출하지 못한다.
궁극적으로 인간에게 필요한 미래의 집은 새로운 기술력과 자재의 총화 속에서 개인의 삶이 가치지향적으로 융합해 건축될 때 창조되는 것이다. 근대 조형의 중심이 된 바우하우스의 시대정신이나 애플사의 모토처럼 새로운 시대를 여는 가치가 구현되고 창조적 디자인으로 만들어질 때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다. 여수에서는 지금 엑스포가 한창이다. 그런데 국가적으로, 지역적으로, 또 산업적으로 우리는 무슨 전략을 구상하고 있나. 서양 문명의 축제 장소로서의 엑스포를 150년 만에 동아시아에서 구현하면서 일본, 중국, 한국은 과연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가.
얼마 전 다녀온 여수 밤바다에서 한류 스타의 노래는 들려오는데, 한국이 선택한 미래의 집 ‘엑스포 타운’은 오동도를 내려다보는 고층 아파트였다. 그것도 LH공사에서 턴키 발주한 ‘작품’(?)이라니. 파리의 발레리 줄레조가 『아파트 공화국』을 쓸 때는 그래도 한국의 미래에 대한 기대가 있었을 텐데….
- 중앙선데이 | 최명철 · 단우건축 대표 | 제274호 | 2012.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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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분에 넘치는 집 머리에 이고 힘겨워하고 있다면... |
| 1 현재 월든 호숫가에 재현돼 있는 소로 오두막과 소로의 청동상 ⓒRhythmic Quietude. | |
<3> 월든 오두막과 세한도의 집
눈이 부시게 푸른 하늘을 마주하거나 지평선이 드러나는 너른 들판에 나서게 되면 문득 들려오는 듯한 선율이 있다.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서 영원한 자유인 데니스(로버트 레드퍼드)를 표현하는 음악으로 쓰였던 모차르트의 유일한 클라리넷 협주곡 A장조 K.622 2악장 아다지오다. 이 영화에서 사바나 대초원을 누비는 모험가 데니스에게 커피농장 여주인 카렌(메릴 스트리프)은 묻는다. “집엔 언제 오실 거예요?” 카렌은 파혼의 상처를 입고 도망치듯 고향을 떠나 상속받은 땅이 있는 케냐로 왔다. 빈털터리 귀족 블릭센 남작 브로(클라우스 마리아 브랜다우어)와의 계산된 결혼을 위해서다. 니공 언덕 산기슭에 지어진 유럽식 집에서 신혼집을 꾸리는 것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농장과 연인, 모든 것을 잃은 카렌이 그 집을 떠나 덴마크로 돌아가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강인한 생활인인 카렌에게 집은 삶의 견고한 축이다. 그런 카렌에게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데니스는 묻는다. “진실로 무엇인가 소유한다는 것이 가능하냐”고. 우리에게 집은 무엇일까. 현실이고 생존의 조건으로서의 소유와, 근원이고 꿈과 가치로서의 삶 사이에 내가 쓰려는 집 이야기가 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1817~1862)는 월든 호숫가에 오두막집을 지으며 집에 대한 본질적 접근을 한 인물이다.
“내가 숲 속으로 들어간 것은 인생을 의도적으로 살아보기 위해서였다. 다시 말해 인생의 본질적 사실들만을 직면해 보려는 것이었으며, 인생이 가르치는 바를 내가 배울 수 있는지 알아보고자 했으며, 그리하여 마침내 죽음을 맞이했을 때 내가 헛된 삶을 살았구나 하고 깨닫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하버드대 출신의 이 도도한 엘리트 의식의 소유자는 당시 보스턴의 1년치 집세 정도인 28달러 12센트(표 참조)만 가지고 도끼 하나 들고 홀로 숲에 들어가 소나무를 켜서 3개월 만에 집을 완성해 입주하게 된다. 그러고는 당시 800달러가량 지불해야만 하는 일반적 집들에 대해 이렇게 비판한다. “결국 노동자가 10~15년 걸려 모아 지은 집은 그 집 때문에 더 부자가 된 것이 아니라 더 가난하게 됐는지 모르며, 그가 집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집이 그를 소유하게 됐는지 모른다.”
생의 본질에 다가서기 위해 더욱 간소한 삶을 주장했던 초월주의 철학자는 그 당시 건축가들에게도 직격탄을 날린다. “‘건축가들은 건축적 장식에는 진리의 핵심과 필연성, 그에 따른 아름다움이 갖추어져야 한다’고 마치 신의 계시처럼 말하지만 그것은 그들만의 허구이고, 좋은 집이란 ‘거주자의 필요와 성격에 의해 겉모습과는 무관하게 어떤 무의식적인 진실성과 기품에 따라 내부에서 외부로 자라나 표현되는 것’이다.”
| 2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1844) 23×69.2㎝ 3 소로가 살았던 월든 숲 속의 오두막 4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Out Of Africa)’(1986)의 한 장면. |
그의 치열했던 삶의 태도는 실용주의(pragmatism)나 개척정신(frontier)으로 이어지면서 유럽의 대항해 시대에 비견되는 대모험 시대의 한 축을 이루게 된다. 산업혁명 이후 서양 문명이 절정기를 향해 치닫던 19세기 중반, 차세대 강국 미국의 중심부에서 일과 명예, 돈과 사회적 통념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한 혁명가의 월든 호숫가 오두막 체험기는 150여 년의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 같다. “너희들은 잘 살고 있니?”라고. 최근 국내에서 국가가 지정하는 ‘최소 주거기준’이 7년 만에 12㎡(3.6평)에서 14㎡(4.2평)로 상향 조정되면서 월든의 오두막집 크기가 새삼 회자된 적이 있다. 소로가 제시한 기준에 비로소 우리가 올라선 것일까?
소로가 미국 매사추세츠 월든 호숫가에서 집을 짓기 1년 전 제주도에서 귀양 중이던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자신을 잘 챙겨주는 후배 이상적에게 감복해 집을 한 채 지었다. ‘세한도’에 그려진 집이다. 우리나라 집 그림 중에 가장 사랑받는 이 집은 조선시대 일반적인 3칸짜리 초옥의 구조도 갖추지 않은, 마치 축사 같은 느낌의 최소한의 형식으로 그려져 있다. 집을 그린다면 당연히 있어야 하는 기둥과 지붕 구조 및 개구부의 표현이 없으며, 오직 중국에 흔한 원형 출입구 하나만 있을 뿐이다. 혹자는 김정희가 교유하던 청나라 학자 옹방강의 시나 그림을 통해 얻은 소동파의 겨울 소나무 그림인 ‘언송도’와 연관지어 이 중국식 집 형태에 대한 유래를 뒷받침하기도 한다. 어쨌거나 추사의 세한도는 ‘시린 한겨울을 그린 그림’으로서 최고의 걸작이 돼 사랑할 수밖에 없는 그림으로 남았다.
동시대에 조선에서 그림으로 지은 집과 미국에서 온몸으로 지은 집! 둘 다 역사적으로는 최고의 값어치를 지닌 집으로 남아 있다. 그것도 그 당시 현실적으로 유배된 엘리트들의 유산으로서 말이다. 가장 작은 집, 삶의 가치를 되돌아보게 하는 집, 그래서 거대한 우주(집 宇, 집 宙)와 맞닿아 있는 집은 과연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 것일까.
- 중앙선데이 | 최명철 · 단우건축 대표 | 제272호 | 2012.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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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한 지붕 세 가족자연과 어우러진내 집 마련의 꿈 |
| 1 프린스 하우스 전면. 왼쪽에는 85㎡의 주택, 오른쪽 1층은 36㎡의 스튜디오, 그리고 우측2층과 다락을 함께 쓰는 복층형 주택이다. | |
이노베이션 파크 :1921년 영국 정부에 의해 설립된 후 77년 민영화되었다. 2005년부터 운영하고 있는 BRE는 이곳을 첨단 녹색주택기술의 시범단지로 만들었다. 20여 개의 다국적 기업이 1000만 파운드(약 180억원)를 들여 조성한 이곳은 시공기간을 단축하고 탄소 발생을 줄이기 위해 목재 프레임 등 경량 자재와 재활용 자재를 최대한 이용한 주택들을 전시하고 있는 녹색주택기술의 시범단지다. 이곳의 모델하우스들을 보기 위해 매해 전 세계에서 100만 명 이상이 방문한다. 이 시범단지 안에 왕세자의 땅콩집이 있다. 자료 제공: www.princes-foundation.org.
<2> 찰스 왕세자의 땅콩집
자기 집을 짓고 산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행복한 일이다. 최근 30, 40대 부부들이 땅콩집에 열광하는 이유다. 아파트의 삭막함이나 단독주택의 부담감에 고민하다 보면 다소 저렴한(?) 모드의 땅콩집이 충분히 새집 마련의 대안이 된다. 한 주머니에서 두 알이 나오고 한 껍질 속에서 가지런한 두 조각이 나누어진다. 비정한 도시 생활에 지쳐가는 즈음, 등 기대고 따뜻한 이웃이 있는 우리 가족의 집이라니! 참으로 매력적이다. 어느새 외콩집도 생겨나고, 심지어 땅콩 밭(단지형 마을)까지 생겨나는 등 전국적으로 500여 채가 건립 중에 있다. 얼마나 폭발적이었으면 창시자라 할 수 있는 이현욱(광장건축 대표)씨는 더 이상의 작업을 포기한다고 선언까지 했을까.
지난해 5월 런던 교외에서 찰스 왕세자가 지었다는 원조 ‘땅콩집’을 보았다. 녹색 도시, 녹색 건축의 화두를 안고 유럽의 새로운 사례들을 답사하던 중의 일이다. BRE(Building Research Establishment)연구소에서 2005년부터 조성하고 있는 이노베이션 파크에서다. BRE는 1921년 정부에서 세웠고 97년부터 민영화해 건축환경에 관한 설계, 컨설팅, 테스트를 전담하는 최고의 연구기관이다. 특히 그린 홈 시범단지인 이노베이션 파크는 20여 개 다국적 기업이 1000만 파운드(약 180억원)를 들여 조성한 12개 모델하우스와 친환경 단지 조경으로 구성돼 있다. 런던 북쪽 교외 왓퍼드(Watford)에 있는 이 단지는 최근 들어 세계적인 녹색 성장의 모범으로 주목받고 있다. 리커창 중국 부총리 등 지금까지 약 100만 명의 방문객이 다녀갔다. 한국도 G20 정상회의를 계기로 녹색성장을 새로운 국가발전의 돌파구로 천명하고, G20 산하 기관으로서 GGGI(Giobal Green Growth Institute)를 제안해 주도하고 있다.
| 2 2층 실내 3 2층 테라스에서 본 건물 입구. 전통적인 자연 재료와 시공기술을 사용한 서민형 주택이다.4 2층 발코니. |
산업사회 이후 인류 문명은 과학과 기술의 힘으로 자연을 극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정복 단계에 이르러서야 자연 파괴의 재앙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그동안의 성장 패러다임 속에 머물러 있어서인지 ‘자연을 챙겨주는 선에서의 개발성장’쯤 되는 모순적 형태로서 녹색성장의 길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으로 볼 때 새로운 패러다임의 실행에 있어서는 항시 근본적인 성찰이 요구되며, 더욱이 성장과 연계한 조급한 사업들은 냉정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 5 이노베이션 파크 메인 광장에서 바라본 프린스 하우스. 3세대 공동주택이다. | 이노베이션 파크에 있는 실험 대상 모델하우스 중 하나인 왕세자의 땅콩집(프린스 하우스)은 녹색성장과는 무관하다. 건축 환경을 위한 왕세자재단(The Prince’s Foundation)은 일찍이 수많은 건축 관련 작업들을 꾸준히 실행해오고 있다. 이번에도 새로운 친환경 국민주택에 관해 구체적 목표를 천명하고 2009년에 시작, 2011년 3월에 개관했다. 이름하여 자연의 집(natural house)이다. 12채 중 따로 떨어져 있어 우아한 형태의 권위를 드러낸다.
찰스 왕세자가 주창하는 복고주의에 맞춰 영국 조지아 양식의 저택을 본뜬 외관으로 전통적인 좌우대칭형이다. 자연환경에 순응해 함께 숨쉬는 자연의 일부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되, 내부 공간은 현대 생활에 맞게 설계했다. 한 지붕 아래 좌측엔 전용 85㎡의 주택, 우측 1층은 전용 36㎡의 스튜디오, 우측 2층과 다락은 73㎡의 메조네트로 구성된 3세대 공동주택이다.
서민을 위한 소위 국민주택 규모의 땅콩집으로 전통적 자연 재료와 시공 기술을 사용해 값싸고 손쉽게 저탄소, 저에너지, 저비용이라는 ‘3 less’ 목표를 구현하고 있다. 더구나 두터운 다공질의 점토 블록을 개발해 자연 환기·단열 등 패시브 시스템으로 습기와 곰팡이를 제거하고 천식이나 호흡기 질환·아토피·피부염 유발 원인을 차단하는 데도 기여하고 있다. 자연 재료 또는 재활용 경량 자재 및 물받이 블록의 사용 등으로 자원의 통합적 리사이클링 또한 목표다.
영국 건축계에선 일찍이 찰스 왕세자의 건축 비평이 유명하다. 항상 황실의 입장에서 복고주의를 천명하고 모더니즘에 대해 반대 입장을 취하고 있다. 특히 대규모 개발행위를 반대해 수많은 논란을 일으키곤 한다. 최근에는 작위를 받은 건축가 리처드 로저스경조차도 “노력에 의해 얻어지지 않은 지위를 가진 찰스는 함부로 나서지 말라”는 발언까지 했다. 두 개의 대형 프로젝트를 놓친 후의 일이다. 게다가 『Deconstructing Prince Charles』란 책까지 출판해 논쟁에 불을 붙였다.
어쨌든 왕세자 같은 영향력 있는 인물이 자국의 도시나 건축에 대해 전문적 식견을 가지고 비평하고 그것이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부러운 일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재단은 단순 실험 주택에 머무르는 게 아니라 도시형 집합 형태까지 연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진정한 보급형 국민주택 연구라 할 수 있다. 땅콩집이 땅콩밭으로 이어지듯, 단지나 마을 그리고 도시공간에서 유효하게 실현되기 위한 노력이 병행되고 있다는 것은 본받을 만하다. 전문가들에 의한 가로경관(street view) 연구가 왕세자의 직접적 참여 속에 이루어지는 것은 세계적인 도시경쟁력 시대에 또 하나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라 할 수 있다. 같은 녹색성장의 패러다임 속에서 왕세자의 땅콩집과 우리나라의 4대 강 사업이 비교되는 것은 한국인의 자격지심일까.
주거문화의 다양성은 생태계의 종 다양성 이상으로 필요한 시대가 된 것 같다. 지속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현재의 삶을 규정짓는 것 또한 부질없는 것 같다. 다만 우리나라의 땅콩집 신드롬은 혹 거품은 아닌지, 땅콩집의 성공이 과연 땅콩밭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 한국의 지속가능한 국민주택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지, 보다 치밀한 연구가 필요하다. 그저 남의 나라의 부러운 일로만 쳐다볼 때는 아닌 것 같다.
- 중앙선데이 | 최명철 · 단우건축 대표 | 제269호 | 2012.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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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 삶에 딱 맞는 숲 속 '맞춤집' 다섯 채의 오중주 |
| 1 나지막한 산이 병풍처럼 집을 감싼다. 2 앞뒤로 모두 조망이 좋았으면 좋겠다는 건축주의 말대로어느 편에서 보아도 건물의 정면 같다. | |
<1> 강원도 양구 포레스트 퀸텟 (quintet)
사람에게 노년이란 자신만을 위해 살 수 있는, 살아야 하는 때다. 보기 싫은 것 보지 않고, 하고 싶지 않은 것 안 할 수 있는…. 그런 당신을 위해 준비해 놓은 집은 어떤 곳인가? 아침에 눈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무엇이길 바라는가? 영화 ‘건축학 개론’에서 처음 서연이 바랐던 것은 높은 천장과 대리석 바닥이었지만 결국 가장 원했던 것은 제주도의 푸른 바다였다.
| | | 2-1 2번 집의 측면도., 2-2 2번 집의 평면도. | 강원도 양구의 포레스트 퀸텟 또한 이런 바람에서 시작돼 마련된 집이다. 북쪽으로는 북한강의 원류인 양구 서천이 흐르고 멀리 파로호가 보인다. 남쪽으로는 사명산에서 흘러내린 산줄기가 있다. 이 산줄기에 다섯 채의 건물이 오중주(quintet)를 이루며 마을을 이뤘다.
작은 숲을 중심으로 초승달 모양으로 자리를 편 다섯 채의 집은 이곳에 도시 주거를 대신할 만한 삶의 터전을 심기로 한 다섯 명의 건축주에 의해 계획됐다. 친척 이거나 가까운 지인이며 은퇴 후 아름다운 시골에서 모여 살기로 약속하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건축가는 대지를 보는 순간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숲을 가로지른 임도가 난 것을 제외하면 사람이 손댄 것이 거의 없었기에….
이곳에 어우러진 집들은 같은 시기에 같은 건축가가 설계했지만 각각 다른 형태를 하고 있다. 앉아 있는 땅이 다르고, 살아갈 사람이 다르기 때문이다. 가장 낮은 곳에 자리한 집은 주변 집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으로부터의 보호를 고민하면서 동시에 주변 집들의 조망에 거슬림이 없어야 했다. 좁은 경사지에는 부분적으로 바닥을 올리고 기둥 위에 떠 있는 집처럼 보이게 건물을 높였다. 숲이 정면을 막고 있는 땅은 멀리 조망이 가능하도록 시야를 확보했다. 주어진 땅에 순응하는 건물들의 평면과 단순한 지붕들로 이루어진 마을의 모습을 보면, 자연과의 조화를 고려한 건축가의 노력이 돋보인다.
| 3 집 앞의 숲 너머 먼 조망을 위해 건물을 높게 지었다. 4 가장 북쪽에 있는 이 집은 옆집보다 낮게 깔려 있다. 옆집에서의 시선을 고려하면서도 조망을 해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5 경사가 급한 땅 위에, 어느 방향이든 자연을 향해 열려 있는 집을 지었다. |
양구 포레스트 퀸텟을 설계한 홍익대 이현호 교수는 다섯 명의 건축주와 그 가족들을 인터뷰하고 그들이 원하는 집, 살고 싶은 집에 대해 충분한 대화를 나눴는데, 이 과정만도 6개월이 걸렸다. 모든 집들의 크기는 150㎡ 정도지만 사는 사람이 다른 만큼 공간도 달라야 했으므로 구조는 모두 다르다. 어떤 집은 앞과 뒤의 조망을 모두 만족시켜야 했으며, 경사가 가장 급했던 집은 그 경사를 활용해 거실의 조망을 더욱 살릴 수도 있었다. 낮은 곳에 있는 집은 옆집에 노출되지 않으면서도 파로호를 향한 시선을 확보해야 하기도 했다.
이렇게 각각 다른 구성의 집들은 하나의 공통점을 지님으로써 다양과 더불어 조화를 이룬다. 그것은 자연을 향해 열려 있는 정자와 같은 집들이라는 것이다. 건축가의 말을 빌리자면 “자연이 집 안을 지나가도록 둘레 친 집” 이라는 것인데, 자연이 드나들게 집을 열어놓아 둔 것이다.
대부분의 생활공간은 한 층에 두길 원한다고 한다. 포레스트 퀸텟 또한 주방, 화장실, 창고 등은 최대한 밀집시키고 방과 거실은 바깥으로 두어 집약적이며 단순한 동선으로 생활에 불편함이 없도록 한 보수적인 평면이다. 건축가는 “좋은 건축은 좋은 사람처럼 주위와 잘 어울리면서도 내면은 바르고, 멋을 내면서도 과장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사업의 성공적인 결과는 시니어 낙원을 표방하는 자치단체의 지원이 큰 힘 이 되었다. 시니어 낙원 프로젝트는 강원도가 2008년 말부터 도입한 정책이다. 다섯 가구 이상 주택을 신축할 경우 진입도로, 상수도, 지하관정 등 기반시설을 도에서 구축해 준다. 건축 규모에 따라 취득세, 등록세 및 재산세 감면 혜택도 있다. 최근 도시 탈출을 꿈꾸는 은퇴자가 많아 호응도가 높은 편이다. 평창군 대관령면에는 어느 기업체 임직원들을 중심으로 38가구 전원형 주택을 추진 중이며, 양양군에도 19동의 전원 휴양주택이 인허가 작업 중이다. 충남 서천에는 은퇴자, 현직 교사, 회사원 등 34가구가 2009년부터 입주해 생활하고 있다.
건축가 이현호 교수는 “단독주택은 기성품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딱 맞는 맞춤복이 돼야 한다” 고 한다. “가장 좋은 집이란 없고 자기에게 잘 맞는 집이 있을 뿐” 이라는 이현호 교수의 말은 건축가라면 늘 품고 있어야 하는 말이다. 얼마 전에 본 영화 ‘건축학 개론’에서 교수의 말과 함께. “자기가 살고 있는 곳에 관해 애정을 가지고 이해를 시작하는 것, 이게 바로 건축학 개론의 시작입니다.”
- 중앙선데이 | 최명철 · 단우건축 대표 | 제267호 | 2012.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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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명철. 단우건축 대표. 최명철씨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이라는 공간의 다음 단계를 생각하는 건축가다. 이 같은 생각을 갖고 국가건축 정책위원으로 활동했다. 집과 도시를 연구하는 ‘단우 어반랩(Urban Lab)’을 운영 중이며,‘주거환경특론’을 가르치고 있다. 발산지구 MP, 은평 뉴타운 등 도시설계 작업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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