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의 전통과 창조 - 부정성의 함의
김상환 시인 · 문학평론가
01.
시는 알레프의 현현顯現이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알레프'는 모든 각도에서 본 지구의 모든 지점을 포괄하는 작은 구슬 형태의 공간이다. 누구나 그 안에 살고 있으나 아무나 볼 수 있는 것은 아닌, 어떤 '세계'로 존재하는 지점이다. 알레프를 발견하는 자에게는 시를 쓸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지는데 이때 알레프는 '시인에게서 결코 빼앗아 갈 수 없'고 '양도될 수도 없'는 시인만의 시선이다. '손바닥만한 우주'로 존재하는 이 알레프는 딜레마와 모순을 그대로 품고 있는 심연이기에 시로만 쓰일 수 있다.
-정끝별,『시론』(문학동네, 2021) 서문
말과 사물이 기원起源하고 새롭게 생성되는 지점으로서 알레프Aleph. 알레프의 시인은 일상 속에서 비일상적인 의미를 발견하고 사유하며, 실재의 숨은 깊이를 드러낸다. 부재와 경계의 미학을 추구한다. 최대한의 삶을 최소한의 언어로 담아내는〈문제적-예외적 개인〉으로서 시인. 그리고 “누구나 그 안에 살고 있”지만 “아무나 볼 수 있는 것은 아닌”, 시와 세계란 무엇인가?
02.
부채살처럼, 묵시록의 고난처럼 퍼지는 아침의 빛과 옅은 그림자가 지붕 위로 내려 앉는다. 다시 밤이 찾아오면 점차 밝아지는 밤이다. 그 밤은 시간을 공간화 하는 광활한 밤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빛과 색의 변화는 虛와 空에 있다. 허공이라는, 밤이라는 공포! 하루가 일생인 이에게 삶은 '인위적 유용성'이며, 개별성으로서 '또다른 나'이다. 리스본의 영혼 페르난두 페소아에겐 우울과 광휘, 풍경과 상처의 내면이 있다. 그는 검은 빛이다.
03.
한국근대시의 형성과 전개에 있어 동일성에 근거한 긍정적인 계승(시조, 민요)도 있지만, 차이를 본위로 한 부정적 계승(상징주의시)도 있다. 계승이란 개념과 어의 속에는 전통과 창조가 상즉상입相卽相入해 있다.
모더니티가 창조를 가능하게 하는 결정적 요인이나 모티프를 말한다면, 전통은 예로부터 내려오는 사상事象이 아니라, 현재와의 관련 속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다.
04.
그것은 배도 아니고, 비행기도 아니고, 지상의 운송 수단이었다. 아침도 아니고, 저녁도 아니고, 정오였다. 아기도 아니고, 노인도 아니고, 청년이었다. 리본도 아니고, 끈도 아니고, 배배꼰 장식줄이었다. 줄서기도 아니고, 실랑이도 아니고, 떠밀림이었다. 친절한 사람도 아니고, 고약한 사람도 아니고, 성마른 사람이었다. 사실도 아니고, 거짓말도 아니고, 핑계였다. 서 있는 자도 아니고, 쓰러진 자도 아니고, 앉아서 존재하기를 바라는 자였다.
전날도 아니고, 이튿날도 아니고, 같은 날이었다. 북역도 아니고, 리옹역도 아니고, 생라자르 역이었다. 부모도 아니고,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어떤 친구였다. 욕설도 아니고, 조롱도 아니고, 의복에 관한 조언이었다.
―레몽 크노,「부정해가며Négativités」전문(조재룡 역)
현대시가 추구하는 새로운 가능성, 불가능의 가능성으로서 시적인 것(詩性, poeticity)은 타자․부재․비존재에 대한 사유와 방법으로서 사유할 수 없고 사유되지 않는 지점, 혹은 '그것 (자체)'에 대한 '제약'과 '놀이', 그리고 '재창조'를 말한다.
05.
내가 내가 취하면
너도 너도 취하지
구름 구름 부풀 듯이
기어오르는 파도가
제일 높은 사안砂岸에
닿으려고 싸우듯이
너도 취하고 나도 취하는
중용中庸의 술잔
바보의 가족과 운명과
어린 고양이의 울음
니야옹 니야옹 니야옹
술 취한 바보의 가족과 운명과
술 취한 어린 고양이의 울음
역시
니야옹 니야옹 니야옹 니야옹
―김수영,「술과 어린 고양이-신귀거래 4」부분
도연명의 귀거래가 현실 정치, 즉 관직에서 벗어나 전원 생활이 주는 정신적, 정서적인 즐거움을 노래한 경우라면, 김수영의 귀거래는 정치 현실에 대한 부정과 망각, 자조적인 비탄과 슬픔을 노래하고 있다.
이 시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차이와 반복으로 생성되는 새로운 리듬감이다. (…) 반복적으로 제시된 고양이의 울음('니야옹 니야옹 니야옹 니야옹')은 나직하게 울려퍼지는 한 인간의 고양된 영혼이거나 내면의 소리이다. 주문呪文 혹은 '주술적 감응'이다.
06.
종이
펜
질문들
쓸모없는 거룩함
쓸모없는 부끄러움
푸른 앵두
바람이 부는데
그림액자 속의 큰 배 흰 돛
너에 대한 감정
빈집 유리창을 데우는 햇빛
자비로운 기계
아무도 오지 않는 무덤가에
미칠 듯 향기로운 장미덩굴 가시들
아무도 펼치지 않는
양피지 책
여공들의 파업 기사
밤과 낮
서로 다른 두 밤
네가 깊이 잠든 사이의 입맞춤
푸른 앵두
자본론
죽은 향나무숲에 내리는 비
너의 두 귀
―진은영,「쓸모없는 이야기」전문
쓸모없는 것들의 목록이다. 그것은 종이와 펜과 질문들, 붉은 앵두가 아닌 푸른 앵두, 그림액자 속의 큰 배와 흰 돛, 그리고 아무도 오지 않는 무덤가와 향기로운 장미덩굴 가시들, 아무도 펼치지 않는 양피지 책과 여공들의 파업 기사이다. 이런 말과 사물들은 시의 근간을 이루고, 쓸모없는 (것의 쓸모있는) 이야기로 전개된다. 시의 쓸모는 어디에 있는가? 극히 사적이면서도 비밀한 곳에,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과 진리를 알고 느끼는 바로 그곳에 시가 있다. 너머와 여기를 잇는 그리움Sehnsucht은 볼 수 없지만 우리는 마음으로 동경한다. 시를 읽고 쓰는 것이 마음의 현상과 본질을 바로 보는 방법이라면, 시는 마음의 기술이며, 말과 삶의 기술이다. "쓸모없는 거룩함”은 칸트가 말한 '부정적 (현시로서) 숭고Negative sublime'이다. 광야와 사막이 그렇듯, 자연 속의 불가해한 것들과의 대면을 통해 우리는 자기 실존과 마주하며 '생의 우선 순위를 결정'한다. 푸른 앵두가 붉은 앵두의 이전이라면, 아무도 오지 않는 무덤가에 핀 꽃은 죽은 이를 위무하고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어루만진다. 기계에서 자비를 발견하는 것은 여느 사람이 아니라 무용지용의 가치를 아는 시인에 의해서다. 장미의 향기가 애써 꺾거나 버리는 가시에서 발한다면, 아무도 펼치지 않는 양피지 책에는 고대의 시간과 인간이 있다. 무가 유로, 부재가 존재로 전유되는 순간이다. 네가 깊이 잠든 사이의 입맞춤은 흐름-몰입flow의 비밀이다. 그리고 죽은 향나무숲에 내리는 빗소리를 듣는 일은 '두 귀 사이에 뇌(내)가 있다'(웨인 와이어, 『인생의 태도』)는 사실을 환기한다. 자아와 사고는 오직 들음에서 비롯되며, 그 결과 존재의 들음은 존재의 들림이 된다.
07.
걸을 준비 없이 생각 없이 걷지 않는 걸음이다 말할 수 없는 걸음 사이를 묻지 않고 물을 수 없게 궁금하지 않는다 살지 않으면서 살면서 망각도 없이 망각을 모르며 잊은 채로 기억을 모른다 몰락하고 있는 사이를 이미 몰락한 기관으로 들어가 숨을 죽이고 버티는 곳을 찾지 않으며 안이 되었다 처음도 아닌 처음에서 끝을 잘라낸 끝에서 시작하며 시작을 끊는다 머뭇거리지 않으며 줄곧 생각하지 않으며 기능과 작동의 세계를 세계로 삼지 않는다 되돌아오는 법이 없이 닿는 곳을 멈추지 않는 고요한 습관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기이하게 보이려는 의도 따위는 아무런 기이함도 없이 어떤 수단도 되지 않았다 올려다보는 눈과 내려다보는 눈을 함께 닫고 창은 열지 않는다 할 말이 없는 이유를 말에서 찾지 않는 이유 오랜 침묵이 저절로 부화한다 남지 않으려는 의지를 남기지 않고 뒤에서 자꾸만 뒤로 물러났다 생겨난 것에서 필요한 것을 구하지 않는 방법으로 구하게 되었다 밖은 밖이 아닌 곳으로 만들어 가두지 않고 들어가지도 나오지도 않고 버려두었다 되풀이하지 않고 거듭하지 않으며 자리를 바꾸지 않는 하나의 동기뿐이다 그것을 낳으려고 낳지 않았다 죽는 기분을 갖지 않은 채로 죽음을 싸고 있다 살면서 죽어 있다
―김한규,「완보동물」전문
이 시의 경우, 부정어('없다', '않다', '모르다', '끊다'등)를 주축으로 한 모순과 역설, 환유적인 문장 구조가 지배적이다. '살지 않으면서 살면서, 처음도 아닌 처음, 끝을 잘라낸 끝, 낳으려고 낳지 않았다, 살면서 죽어 있다, 망각도 없이 망각을 모르며, 시작하며 시작을 끊는다, 남지 않으려는 의지를 남기지 않고, 구하지 않는 방법으로 구하게, 죽는 기분을 갖지 않은 채로 죽음을 싸고 있다' 등의 표현이 그렇다.
08.
눈 감으면 고래 하나 찾아온다
눈 뜨면 재빨리 사라지는
푸른 눈을 가진 흰고래
보지 않고도 알 수 있다
다시 눈을 감으면
고래는 내 몸 위에 가만히 내려앉고 나는 고래의 부드러운 배에 파묻히고 그러다 고래가 되어보기도 하고 고래처럼 몸을 뒤집어볼까 생각하는 순간 눈 뜨면 여기는 작은 방
꼭 맞는 침대
창문 밖으로는 익숙해지지 않는
차가운 불빛들이 어른거리고
다시 눈을 감고 고래를 기다리면
고래는 오지 않고
눈 사방팔방 흩날리는 거리에서
사람 하나가 눈사람을 만들고 있다
눈사람은 어쩌다 사람의 모양을 갖게 된 눈
사람만이 사람과 닮은 것을 본떠 만든다
그러나 곧 눈은 녹고
눈사람은 없고
나는 눈사람 만드는 사람에게 다가가 묻는다
왜 하필 사람입니까
그가 허리를 펴는 순간 그도 녹아내린다
또 다른 사람 하나가 거리를 걷고 있다
그가 나에게 다가온다
우리 친구 하지 않을래요?
짐이 제법 무거워 보이는데 제가 들어드릴 수도 있어요
나는 뒷걸음질 치며 그를 슬쩍 올려다본다
내 눈길이 닿은 그의 얼굴도 순식간에 녹아내린다
이제 거리에는 아무도 없다
그저 눈
그리고 눈
또 눈이 날리고
또 눈이 날리고
나는 눈길에 미끄러지고
화들짝 놀라 눈을 뜨면
흰고래가 가만히 나를 내려다 보고 있다
그 푸른 눈을 들여다보며
너무 멀리 와버린 것은 아닐까
생각에 잠기는 것이다
―한여진,「기다렸다는 듯 나타나는 밤은 없고」전문
특히 (푸른 눈을 가진) 흰고래는 더욱 그 신성을 부여받게 된다. 그것은 우리가 눈을 감고 무작정 기다린다 하여 오질 않고, 신의 계시처럼 왔다가는 사라진다. '눈사람'의 이미지 도 이와 다르지 않다. 고래가 나타나고 사라지듯이 눈사람은 얼고 녹는 특징이 있다. 그런가하면, 눈사람은 눈과 사람이란 말의 이음과 분리에도 그 물성을 부여받는다. 시인의 능력과 예지가 월러스 스티븐스의 시「눈사람 The Snowman」에서처럼, '스스로 무無가 되어 눈 속에서 귀 기울여 듣는'데 있다면, 이러한 부정적-소극적 수용 능력 Negative Capability은 우리가 현대시에서 새롭게 간취해야 할 부분이 아닐 수 없다. (…) 모든 것은 눈사람처럼 순식간에 녹아내린다. 거리에는 눈도 사람도 없다. 다시 눈이 내리고 허공에 눈이 날린다. 그 시간 그 장소에서 '흰고래가 가만히 나를 내려다'본다. 깊고 푸른 고래, 아니 고래古來의 눈을 들여다보며 나는 생각한다. '너무 멀리 와버린 것은 아닐까'.
09.
현대시의 새로운 전통은 부정과 부정(성)의 함의에 있다. 이 경우 부정은 긍정에 비해 숙고와 새로운 사유를 요한다. 문체를 강조한 레몽 크노의 「부정해가며Négativités」, 심리를 우위에 둔 김수영의「술과 어린 고양이-신귀거래4 」, 역설의 진리를 내포하고 있는 진은영의 「쓸모없는 이야기」, 치밀한 구성이 돋보이는 김한규의「완보동물」, 물성이 강조된 한여진의 「기다렸다는 듯 나타나는 밤은 없고」. 이들은 각기 다른 목소리와 스타일을 추구하지만, 부정(성)의 사유에 기반해 있다는 점은 크게 다르지 않다.
문文이 문紋이라면, 현대시의 문양文樣은 얼마나 오래된 새로움인가. 그렇다면, 현대시의 이해와 심층은 '가장 닳고 닳은 주제가 가장 미친 듯이 새로운 것'(파스칼 키냐르, 『옛날에 대하여 Sur le jadis』)”임을 알고 느끼는 데 있다.
첫댓글 혹 이재성 선배님 근황은 어떠하신가요?
공부도 하고 친교도 하고
부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