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인가 재앙인가 유전자 가위 크리스퍼
(과학동아 공개)
유전자
조작이 처음 시작된 것은 1970년대다. 1970년 DNA의 특정 서열을 인지해 자르는 '제한효소'가 발견된 것을 시작으로 DNA를 자르고 붙이고 삽입하는 유전자 조작 기술이 탄생했다. 그러나 제한효소를 활용한 유전자조작기술은 그 한계가 명확했다. 인식할 수 있는 서열의 길이가 너무 짧았다. 제한효소는 6~8개의 염기서열을 인식한다. DNA의 염기는 A,C,G,T 등 4가지기 때문에 만약 염기 여섯 개를 인지하는 제한효소를 쓰면 약 46(4096)개의 순서쌍밖에 구분하지 못한다.
제한효소를 활용해 유방암 유전자 치료를 한다고 생각해보자. 유방암을 일으키는 유전자를 제거하려면 그 부분을 정밀하게 도려내야 한다. 고작 4096개 를 구분하는 효소로는 이런 정밀한 조작이 불가능하다. 인간의 DNA는 길이가 32억 개가 넘는데, 4096개마다 한 번씩 반복되는 서열을 잘랐다가는 산술적으로 7만 개가 넘는 다른 DNA까지 잘라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한효소는 플라스미드 같이 염기서열이 수천 개 내외인 곳에서만 사용됐다.
제한효소를 대체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DNA에 결합하는 단백질인 징크 핑거(Zinc Finger)와 탈렌(TALEN)을 활용한 새로운 종류의 유전자 가위가 연구됐다. 하지만 이들 역시 인식서열이 10개 내외로 짧았고, 이렇게 짧은 서열을 자르기 위해서 수천 개가 넘는 유전자 가위 DNA를 새로 이식해야 했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격이다. 이런 상황을 종식시킨 새롭고 강력한 유전자 가위가 2012년 개발된 'CRISPR(이하 크리스퍼)'다.
어디에 쓰는 서열인고?
크리스퍼가 처음 발견된 것은 1987년이다. 일본 오사카대 소우 이시노 박사팀은 대장균의 단백질 유전자를 연구하던 중 특이한 서열을 발견했다. 이 서열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회문구조(palindrome)가 반복되고 있었다. 회문구조는 DNA에서 염기서열이 역순으로 배치되는 구조다. 예컨대 'GGTC'라는 DNA가 앞쪽에 나오면 이에 상보적으로 결합하는 'GACC'가 이어 나오는 것이다(DNA는 G와C, T와A가 짝을 이뤄 결합한다). 당시에는 단순히 단백질의 서열을 알아내는 걸로도 충분했기 때문에 이 서열은 한동안 잊혀졌다.
정체불명의 서열은 1990년대에 들어서 다시 한번 주목받았다. 1994년 최초의 세균 유전체지도가 나온 뒤, 여러 세균의 유전체 서열이 밝혀졌다. 이를 살펴보던 과학자들은 한 개의 공통적인 서열을 발견했다. 앞서 발견된 회문구조였다. 이 구조 사이에 21개 염기서열이 끼어있다는 것도 찾아냈다. 21개 서열은 세균의 다른 DNA에서 발견되지 않은 완전히 새로운 서 열이었다. 그때까지도 회문구조와 21개의 염기서열 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단순 히 '주기적으로 간격을 띠고 분포하는 짧은 회문구조 반복서열(CRISPR, Clustered Regulary Interspaced Short Palindromic Repeats)'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뿐이다.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아무 의미가 없어 보이는 21개 서열 중에 어떤 것은 종의 구분 없이 여러 가지 세균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요구르트 회사 직원들의 이상한 실험
21개 서열의 정체를 밝혀낸 것은 덴마크의 요구르트 회사인 '다니스코' 연구자들이다. 로돌프 바랭고 박사 와 필리피 호바스 박사는 세균에서 '적응면역'을 최초 로 발견해 2007년 '사이언스'에 발표했다. 요구르트 발효에 사용되는 대량의 유산균을 배양 할 때 세균 감염을 막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특히 유 산균을 죽이는 박테리오파지가 나타나면 애써 키운 유산균이 떼죽음을 당할 수 있다. 다니스코의 연구자들은 이렇게 떼죽음 당한 유산균 사이에서 살아남 은 일부 유산균에 궁금증을 품었다. 이 유산균이 다 른 유산균을 몰살시킨 파지에 내성을 가진 게 아니냐 는 것이다. 연구결과 정말로 내성을 가지고 있었다. 마 치 사람이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나면 항체가 생겨 이 후에 그 바이러스에 대해 내성을 갖는 것처럼, 비슷한 적응면역이 박테리아에서도 존재한 것이다.
다니스코 연구팀은 이어진 연구에서 정체를 알 수 없던 크리스퍼가 적응면역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회문구조 사이 21개 서열에서 파지 의 DNA가 발견된 것이다. 이 유전자를 지웠더니 내 성이 사라졌다. 이것을 토대로 연구팀은 ①파지가 침 투하면 파지의 DNA를 잘게 잘라 유산균의 유전자에 붙여 넣어서 '기억'하고 ②나중에 다시 침입하면 이 전에 DNA 형태로 기억해둔 정보를 활용해 면역작용 을 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흥미로운 결과지만, 이때까 지도 단순히 고등동물에만 존재하던 적응면역이 세 균에도 존재한다는 것을 밝힌 데 불과했다.
크리스퍼가 유전자 가위로 활용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미국 버클리대 제니퍼 다우드나 교 수와 독일 하노버대 엠마뉴엘 카펜디어 교수가 이 끄는 공동연구팀이다. 이들은 크리스퍼 적응면역에 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Cas9' 단백질을 세균에서 찾 아냈다고 '사이언스'에 2012년 발표했다. 연구팀은 세균에 기억된 파지 DNA(21개 염기)가 RNA로 전사되 고, 이 RNA와 Cas9이 결합해 외부에서 침투한 파지 의 DNA를 자른다는 것을 발견했다. 군대에 비유하 면 21개 염기는 다른 유전자를 찾아내는 정찰병이고, Cas9은 직접 적을 물리치는 전투병인 셈이다. 더구나 Cas9에 결합하는 RNA를 바꾸면, 파지의 유전자가 아닌 다른 유전자 서열도 자를 수 있다는 것을 찾아 냈다. 새로운 유전자 가위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크리스퍼를 활용한 유전자 가위는 기존 기술보다 훨 씬 간편하다. 징크 핑거나 탈렌 같은 인공 유전자 가위 는 단백질이 정찰병 역할을 했다. 두 가지 모두가 원래 는 DNA와 결합해 전사를 촉진하는 DNA 결합 단백질 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단백질은 덩치가 꽤 커서 연구자가 자신이 원하는 서열을 자르려면 수천 개의 새로운 인공 유전자로 적절한 단백질을 만들어야 했다. 반면에 크리스퍼는 단백질 보다 훨씬 작은 RNA가 그 역할을 한다. DNA 100개만 바꾸면 전혀 다른 서열 특이성을 가 지는 유전자 가위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생물의 유전체를 수정할 수 있게 된 인간
크리스퍼의 발견은 유전자 수정 붐을 일으켰다. 가장 먼저 2013년 12월 동물 세포에서 유전자 수정이 가능하다는 사실 을 확인했다. 곧바로 실험 동물의 대표 격인 마우스의 수정란에 유전자를 삽입하는 데 성공했다는 연구 결 과도 나왔다.
기존에도 마우스에서는 유전자 발현을 막거나 새 로운 유전자를 집어넣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때까지 만 해도 과학자들은 크리스퍼가 특별하다고 생각하 지 않았다. 그러나 기존 유전자 조작 마우스는 일단 배 아줄기세포 수준에서 유전자 조작을 하고, 조작된 배 아줄기세포를 배반포에 주입한 뒤 이식하고 또 검증 하는 매우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반면 크리스퍼 를 이용하면 수정란에 Cas9과 RNA를 주입하는 방식 으로 간편하게 새로운 형질의 쥐를 만들 수 있다.
마우스의 성공 이후 1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동안 제브라피시(어류), 래트(포유류), 초파리(곤충) 등의 대표적인 실험동물은 물론이고 소, 돼지, 밀, 쌀 등 동 식물의 유전자 수정도 성공했다. 모두 이전에는 줄기 세포가 없어 유전자 조작을 할 수 없던 생물들이다. 인간이 드디어 지구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생물의 유전체 정보를 마음대로 수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사람도 포함된다.
이제 인간은 거의 모든 생명체의 유전자를 고칠 수 있는 전지전능한 힘을 가지게 됐다
인간이 크리스퍼를 감당할 수 있을까
지난 4월 1일 중국 중산대 황쥔주 박사팀이 크리스퍼를 활용한 인간 수정란 유전체 편집 결과를 발표했 다. 효율이 낮아 유의미한 성과는 아니었지만 크리스 퍼를 인간에 적용한 첫 번째 결과라는 점에서 크게 주목받았다. 인간이 드디어 자신의 유전정보를 스스 로 편집할 수 있는 전지전능한 힘을 가지게 된 것일까. 과연 인간은 이 힘을 감당할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당장은 SF영화에 나오는 괴물 을 실험실에서 만들어낼 수는 없다. 아직까지는 인간 을 비롯한 고등생물 유전체를 수정할 능력이 없다. 생명체를 자동차와 같은 복잡한 기계에 비유하면 지금 은 자동차를 구성하는 복잡한 부품 일부의 기능을 알고, 고장이 났을 때 교체하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 도 망설이는 수준이다. 헐크 같은 괴물을 만드는 것은 자동차를 개조해 트랜스포머를 만드는 수준에 비유 할 수 있다. 아직은 갈 길이 멀다.
현실적으로 크리스퍼로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기능 을 아는 유전체 내의 유전자 몇 개의 기능을 없애고 잘못된 부분을 수선하는 정도다. 이마저도 넘어야 할 산이 많다. 가령 유전자의 기능을 없애는 것에 비해서 새로운 유전자를 집어넣는 것은 아직까지 걸음마 단 계다. 또 세포 밖에서 만들어진 크리스퍼를 세포 안으로 전달하는 것도 큰 난관이다. 크기가 꽤 큰 Cas9 단 백질을 최소화하는 게 관건이다.
아직까지는 우리에게 시간이 꽤 남아있다. 남은 시 간을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인간과 크리스퍼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다. 인간이 처음으로 가진 무서운 힘 을 어떻게 사용할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우선돼야 한다. 크리스퍼를 발견한 다우드 박사를 비롯한 유수 의 외국 연구자들은 중국 연구진이 결과를 발표하기 전부터 인간 유전체 편집을 자제할 것을 호소하는 성 명을 발표했다.
올해 하반기에는 인간 유전자 조작에 얽힌 윤리문제만을 다루는 콘퍼런스도 개최할 예정 이다. 우리나라는 어떨까. 우리나라는 생명윤리 및 안 전에 관한 법률에 의해 인간 생식세포에 대한 유전자 조작이 법으로 금지돼 있고, 이 문제에 대한 관심이 미미하다. 아직까지 크리스퍼를 연구하는 학자의 숫자도 많지 않다. 크리스퍼의 무분별한 사용을 막기 위 해 우리도 논의를 시작해야 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