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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마태복음 5:13)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의 말씀을 하실 때에 주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중심되는 의미는 믿는 사람이 세상속에서 어떠한 위치에 있는 것인가? 혹은 어떤 책임을 지고 있는가?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두 가지 비유를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하나는 세상의 소금이라는 말과 또 하나는 세상의 빛이라는 말입니다. 이 소금과 빛의 비유는 너무나도 잘 아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도 대단히 깊은 의미를 지닌 말씀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과 같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라. 이제 우리는 이 말씀의 의미를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두고 두고 우리의 생활 속에서 매일처럼 새롭게 깨달아야 할 교훈입니다. 너희는 소금이다! 소금이 되라! 너희는 이 세상과의 관계에 있어서 소금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 사람을 만날 때에는 너희가 소금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 너희는 소금이니, 소금이 되라!
여러분, 이 말씀을 마음 깊이 새기십니다. 주님께서는 이 간단한 비유 속에 참으로 무한한 진리를 담아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어느 식탁에나 소금이 있습니다. 매일 하루에 세끼먹는 음식속에 소금이 들어가 있습니다. 온 세계의 어느 식탁에도 소금이 없는 식탁은 없습니다. 매일 매일 먹어야 하는 것이 소금이요, 그 소금을 먹을 때마다 이 교훈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소금으로 음식을 만들 때마다 "너희는 소금이다"라는 주님의 말씀을 잊지마시고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가끔 먹는 갈비탕이나 설렁탕을 먹을 때 소금치는 일을 깜박 잊어버리고 그냥 맛을 보게 되면 어쩌면 그렇게도 맛이 없습니까? 아주 밋밋해서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소금을 조금 치면 달라집니다. 구수한 맛을 내는 갈비탕이 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소금이다 하는 것은 가장 가깝고 가장 절실한 교훈입니다. 동시에 이것은 세상속에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의 의미를 깊이 깨닫고 그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세상의 소금이라는 말은 없어서는 안될 꼭 필요한 존재가 되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소금"하면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짠맛을 내는 것이요 방부제의 역할입니다. 이는 생활현장에 꼭 필요한 요소일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소금과는 뗄레야 뗄수 없는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인간이 엄마의 배속에 태어나서 양수 속에서 자랍니다. 그런데 그 양수가 0.9%의 소금물이라는 것입니다. 소금물이 아니라면 아기는 안전하게 자랄 수 없습니다.
사람의 몸안에도 소금이 들어 있습니다. 인체내 혈액의 염분농도는 0.9%이고 세포의 염분농도 역시 0.9%입니다. 그 0.9%의 소금이 혈액의 산성화를 막아주고 신진대사를 주도합니다. 만약 소금농도가 0.9%에 미치지 못하는 양수에서 자란 아이는 뇌와 뼈, 생식기능이 선천적으로 약한 체질로 태어나게 됩니다. 초등학교 4학년 교과서에서 소금을 이렇게 가르칩니다.
"소금이 몸에 들어오면 위액이 염산이 되어 살균작용이나 소화작용을 돕는다. 또한 소금은 피와 섞여 몸 구석구석을 돌면서 세포 속의 노폐물을 새물질로 바꾸어 주어 신진대사를 촉진한다. 이 밖에도 소금은 신경이나 근육의 움직임을 조절하기도 한다." 소금은 단순한 염분이 아니라 '생명물질'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음식을 먹고 분해시켜서 에너지를 만들어 내는 것을 신진대사라고 합니다. 신진대사를 멈추면 사람은 죽습니다.
'그 신진대사를 주도하는 것이 바로 소금입니다. 만약 몸안에 소금이 부족하여 신진대사가 원할하지 못하면 혈액이 산성화되고 면역력이 약해져 병들게 됩니다. 여러분, 세상에 별의 별 암이 다 있지만 "심장암"은 없습니다. 심장에는 암이 생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심장은 소금덩어리이기 때문입니다. 옛날에는 심장을 "염통"이라고 불렀습니다. 소금통이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소금이 우리의 생명을 유지시켜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금이 싸고 흔하다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다이어몬드다" 혹은 "너희는 세상의 금이다"라고 말씀하셨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랬다면 우리는 보통사람들과 함께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어느 깊은 산 속에 숨어 아주 고결하게 자신만을 위하여 은둔되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습니다. "너희는 소금"이라는 것입니다. 가장 값싸고 흔한 소금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귀한 것입니다. 금은 없어도 살 수가 있습니다. 다이어몬드를 모르고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소금 없이는 살 수가 없습니다. 다시말하면 꼭 필요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처럼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꼭 필요한 존재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주 평범하고 아주 서민적이지만 소금처럼 꼭 있어야 할 존재가 되라는 그러한 이야기입니다. 소금은 언제 어디서나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고대사회에 있어서 무역을 하는 대상들이 가지고 다니는 상품 중에서 언제나 뺄 수 없는 것이 바로 소금이었습니다.
소금이 비싼 것은 아니었지만 장사꾼들이 반드시 가지고 다니는 필수품이었습니다. 바로 이처럼 언제, 어디서나 꼭 필요한 존재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겉으로 나타나기에는 수수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모습인 것입니다. 외모나 그의 생활자세로 보아서는 나타나는 것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삶의 현장에서 소금과 같이 꼭 필요한 존재로 나타나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는 말은 언제 어디서나 꼭 필요한 존재가 되라!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리고 희망을 주고 기쁨을 주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주고 활력을 주는 존재가 되라는 의미에서 주시는 말씀입니다.
2. 소금은 맛을 내는 역할입니다.
욥기 6장 6절에 보면 "싱거운 것이 소금없이 먹히겠느냐?"며 맛을 내는 소금의 역할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음식은 역시 소금으로 맛을 내게 됩니다. 소금은 적당히 칠 때에 비로소 제 맛의 음식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삶의 맛을 잊어버리고 사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사는 맛이 없다는 것입니다. 맹물같이 아무런 맛이 없어 사는 재미도 없고, 사는 의미도 없다고 탄식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첫번째 기적을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서 맛도 있고 색깔도 있고, 가치도 있는 삶으로 변화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맛을 내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고 있습니다. 온갖 지식을 동원하여 좀 더 편리하고 좀 더 간편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힘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말 살기 좋은 세상이 된 것 같습니다.
여러분, 그렇다고 인간이 진정한 맛이 있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지금 많은 사람들이 우울증에 걸려 고통하고 있습니다. 삶의 맛을 잊어버리고 사는 것입니다. 사는 것이 죽을 맛이라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맛을 잊어버린 세상에서 맛을 내는 소금같은 자가 필요합니다. 소금이 맛을 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신이 녹아야 합니다. 자신의 모양이 보이지 않습니다. 다 녹아서 보이지 않지만 소금이 들어가는 곳에 맛이 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도 겸손히 자신을 감추고 그리스도의 향기와 맛을 드러내야 합니다. 소금이 많아서 맛을 내는 것이 아닙니다. 조금만 넣어도 맛을 냅니다. 바닷물의 염도는 3%정도 밖에 되지 않지만 바다가 썩지 않습니다. 이 땅에 진정한 기독교인이 3%만 있어도 세상은 썩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모양만 기독교인이 너무 많아서 오염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많다고 해서 이 세상이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깨뜨려 바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때에 이 세상은 변화되는 것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깨어지듯 한 알의 소금이 녹아 내리지 않고는 그 소금은 그저 입안에서 씹히는 모래알일 뿐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땅에서 채취한 불순물이 많은 암염을 사용했습니다. 잘못 보관하면 염분은 빠져나가고 찌꺼기만 남아 짠맛을 낼 수 없습니다. 실제로 짠맛을 잃은 소금은 길가에 버려지기도 했습니다. 모래알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없는 것 같지만 맛으로 남을 것인지 선택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식이나 재능, 건강, 물질 등 우리의 가진 것이 많이 있지만 그것이 전부 필요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거기에 믿음이 있어야 하고 말씀이 있어야 하며 거기에 바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맛을 내는 사람! 삶의 의미를 주는 사람! 다시 말하자면 거기에 그리스도인이 있어서 가치를 나타나게 하는 그런 사람 말입니다.
예를 들어 가정에 예수 믿는 한 사람이 있어서 가정다운 가정이 되고 직장에 가면 그 직장에 빛이 나고 공동체에 가면 그 사람 때문에 기분이 좋고 행복하고 의미있는 세상을 만들어 내는 그런 사람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맛없는 세상, 맛없는 삶이라고 비판하고 탄식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소금이 되어 그 분위기를 바꾸라는 것입니다.
만약 여기에 고깃덩어리가 있다고 하면 이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거기 소금이 들어가서 양념을 하면 맛있는 고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와 공동체 속에서 소금이 되어 맛을 내라는 것입니다. 맛있는 가정, 맛있는 교회, 맛있는 공동체, 맛있는 사업체, 맛있는 직장을 만들어 가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소금은 제물의 역할입니다.
당시에는 제사 의식에서 소제와 번제물에 소금을 뿌려 제사를 드렸으며 향을 쓸 때에도 소금과 함께 향을 사용했습니다. 이처럼 부정한 것을 정결하게 하는 데 두 가지가 쓰여졌는데 그 하나는 피요, 또 다른 하나가 이 소금이었습니다. 소금의 의미는 부정을 몰아내고 더러움을 씻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성경적으로 풀이하면 귀신을 몰아내고 잡귀를 쫓아냄으로 부정을 몰아내는 것에 소금을 사용하였습니다.
그 한 예로 아기가 태어나면 소금물로 목욕을 시키는 일이었는데 이것은 위생적인 면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잡귀가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지켜준다는 의미가 컸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정월 초하룻날 집 주위변에 소금을 뿌리기도 하고 개업을 하면 소금을 입구에다 잔뜩 뿌려서 잡귀로부터 부정타지 말라고 하기도 하고 반갑지 않는 손님이 왔다가면 재수없다고 소금을 뿌리기도 합니다. 아마 다 비슷한 풍속이라 생각합니다.
아무튼 이와 같이 소금을 뿌려서 악마와 잡귀를 막아내는 표징으로 쓰여지게 됩니다. 다시말하면 소금은 위생적으로도, 영적으로도 정결하게 의미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이 세상 어디에 있든지 정결함의 요소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가는 곳마다 있는 곳마다 더러움을 씻어내고 정결함을 지켜나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소금은 방부제 역할입니다.
이 방부제라는 것은 이미 썩은 것을 썩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썩지 않게, 혹은 썩을 수 있는 것을 썩지 않게 한다는 뜻입니다. 이미 썩은 것이 소금을 친다고 살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썩은 것은 썩은 것입니다. 그러나 소금은 썩어가는 것을 멈추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냥 내버려 두면 썩을 수 있는 채소나 생선을 소금에 절이게 되면 썩지 않게 됩니다.
영적으로 말하면 죄지을 수 있는 사람이요, 타락할 수 있는 나약한 사람이지만 거기에 그리스도인이 있어서 썩지 않습니다. 아차 하면 쓰러질 것 같은 위험한 순간의 남편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부인 하나가 온전한 신앙인이 됨으로써 그 남편이 썩지 않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넘어질 수 있는 처지인데 그리스도인이 거기에 있으므로 그로 인해 넘어지지 않는단 말입니다. 이것이 곧 방부제의 역할인 것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롯이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롯이 아브라함을 떠나 기름진 땅인 소돔 고모라로 선택하였습니다. 그런데 겉보기는 화려한데 내면에 들어가 보면 죄악이 관영하였습니다. 이렇게 죄악의 도성 소돔 고모라에 믿음의 사람 롯이 들어가 살고 있으니까 썩지 않아야 하는데 롯이 변변치 않아서 소금 노릇을 제대로 못한 것입니다. 그 결과 마침내 소돔 고모라는 완전히 썩었고 롯 마저 죄악에 감염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롯까지도 맛을 잃어버렸습니다. 결국은 소돔 고모라는 망하고 롯의 아내는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롯 한 사람만 온전히 서서 소금노릇을 제대로 했더라면 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고 보면 이 롯 한 사람은 소돔고모라에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소돔고모라에 의인 열 명만 있어도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바꾸어 말하면 소금과 같은 하나님의 사람 열 명만 있었더라면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하지 않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이 지경에 이를 때까지 도대체 롯은 무엇을 하였다는 말입니까? 우리는 이 점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우리는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썩을 수 밖에 없는 세상을 썩지 않도록 막는 방부제의 역할을 하여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라면 바로 그러한 영향력을 가져야 합니다.
부정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있어서 그 부정을 막고 불신과 타락의 세상이라 하더라도 그리스도인이 있어서 믿을 수 있고 바로 설 수 있다면 그가 바로 소금이요 방부제인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는 말씀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너는 바로 네 직장의 소금이다. 너는 네 가정의 소금이다. 너는 네가 사는 공동체의 소금이라는 것입니다. 거기가 어디든 거기서 방부제의 사명을 다하라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 소금은 화목함의 역할입니다.
김장할 때보면 아무리 뻣뻣한 배추라 하더라도 소금을 치고 조금만 기다리면 부들부들해집니다. 또한 서로 섞이지 않던 것도 소금을 치면 잘 섞여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막 9:50)고 말씀하십니다. 뻣뻣하게 굴어서 네가 크냐 내가 크냐 다툼을 일으키지 말고 소금을 치듯이 부드럽고 온유하게 되어 서로 화목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4장 6절에서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르게 함같이 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말을 진정 "소금으로 고르게 함같이" 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이 슬픈 마음을 가진 사람과 이야기하면 만나는 동안에 그 슬픈 마음이 반으로 줄어들고, 기쁜 마음으로 만나면 기쁜 마음이 배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반대라고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슬픈마음을 가진 사람이 만났는데 오히려 더 슬퍼지고, 기쁜 마음으로 만났는데 오히려 기쁜마음이 사라진다면 참으로 곤란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이란 어떠해야 하는 것이겠습니까? 그저 얼굴만 척 보아도 어느 사이에 마음이 달라지는 그런 영적 권위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야말로 화목케 하는 피이스 메이커(peace maker)인 사람이 소금인 것입니다. 잠언 15장 1절에 보면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 화를 벌컥 내려고 했다가도 그 사람만 대하게 되면 그만 그 분노가 다 수그러진단 말입니다. 그런 인격이 되어야겠는데 가만히 있던 조용한 사람까지 화나게 만든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크게 잘못된 것이지 결코 소금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그런데 화목케 하는 소금! 피이스 메이커가 되기 위해서는 또 하나의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녹아지는 것입니다.
만약 소금이 녹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녹아 자기는 없어지고 그리고 침투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비로소 소금이 소금의 구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녹지 않는 소금은 절대로 자기의 구실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녹아 자기는 없어지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을 통하여 주신 말씀을 다시 한번 생각해 봅니다.
13절,"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조롱과 밟힘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진정 그렇다면 큰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소금이 맛을 잃었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이스라엘에는 암염이 있습니다. 이 암염은 돌덩어리와 소금이 섞여 있습니다. 한쪽에는 소금이지만 다른 한쪽에는 돌덩어리입니다. 양들에게 소금을 빨아 먹게 하기 위해 군데 군데 이 암염 덩어리를 갖다 놓았는데 소금은 다 빨아먹고 돌덩어리만 남았단 말입니다. 거기에서 무슨 맛이 나겠습니까? 바로 그것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이제 무엇을 하겠습니까? 본문 말씀에 의하면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맛을 잃어버린 그리스도인들, 길가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히게 되는 신세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수치스러운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 교회의 현실일 수 있다는 경고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소금은 매우 흔한 것이지만 꼭 필요한 것입니다. 소금은 맛없는 세상에 맛을 내는 역할을 합니다. 소금은 더러워진 것을 정결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소금은 썩어져가는 세상을 썩지않게 하는 방부제 역할을 합니다. 소금은 화목케하는 역할을 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우리는 오늘도 내일도 소금을 만지고 먹으면서 이 말씀의 의미를 음미하며 소금의 역할을 온전히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