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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의 유명한 필하모니 지휘자였던, 토스카니니는, 대원들에게 폭군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는, 베토벤의 권위자였습니다. 한 번은, 베토벤 교향곡 제 9번을 연주한 뒤, 우뢰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이때, 단원 중 한 사람이, 다른 단원에게 “오늘 연주는 다른 어떤 날보다 최고였어. 그런데, 오늘도 토스카니니가 칭찬하지 않는다면, 그를 죽이고 말겠어”라고 했습니다. 이 소리를 들은, 토스카니니는 그에게, “나는 누굽니까? 토스카니니가 누굽니까? 또, 당신은 누굽니까? 나도, 당신도, 여러분도, 베토벤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직, 베토벤이 최곱니다”라고 했습니다. 토스카니니는, 베토벤의 권위자답게, 그의 앞에 서 있었습니다. 고전 15: 10을 보시면,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는 사도바울의 고백이 나옵니다. 그리고, 고전 3: 7에서는,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 합니다. 토스카니니가, 베토벤 앞에서,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한 것처럼, 사도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자신을 철저하게 낮춘 것은, 자신을 통해서 증거된, 하나님의 능력을 높이고자 함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과 같은, 자기 인식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쉬울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자신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기보다는, 공동체에서 자신을 드러내길 원하던가, 공동체의 중심이 되길 원하던가, 공동체에서 자신의 자리나 위치를 갖고자 합니다. 그러면, 그 때부터, 그는, 교만에 빠지게 되고, 자신 뿐 아니라, 그 공동체까지도 파멸로 이끌어 갑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 우리 자신에 대해, 가질 인식은, “하나님 앞에 있는 나”라는 겁니다. 솔로몬이 왕으로 등극하면서, 하나님께 일천번제를 드렸는데, 그 이유가 왕상 3: 7에 있습니다. 보시면,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버지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라고 합니다. 여기서, “작은 아이”란, “자신의 어리석음”을 가리킵니다. 바로, 이런 자세가, 오늘의 우리에게도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하나님께, 그 분의 능력과 은총과 지혜를 구하며, 겸손함으로, 하나님께 나가게 됩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기에, 나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해야 합니다. 여기 장갑이 있습니다. 대 예배시간에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나, 특별히 사용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빈 장갑입니다. 그냥 두면, 아무 일도 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 속에 손이 들어가면, 그 때부터, 그 손의 힘을 통해, 장갑은 장갑으로서의 일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행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루기 위해서는,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성도는, 어디서나, 어떤 일에서나,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찾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사울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버림받았다는 내용입니다. 사울은, 겸손함 때문에, 하나님께 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복을 끝까지 누리지 못했습니다. 말씀을 살피는 가운데, 우리 안에 있는, 사울적인 요소들이 다 떠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심으로,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리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1 - 12을 보시면,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더니 어떤 사람이 사무엘에게 말하여 이르되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발길을 돌려 길갈로 내려갔다 하는지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리기 위해서는, 기념비를 세우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에 대해, 후회한다고 합니다. 이를 가지고, 하나님도 “후회한다, 안 한다”하기도 하는 데, 이는, 신인동형적 표현법으로, 아이들에게 자연보호를 가르칠 때, “나무 가지를 꺾으면, 나무가 아파하겠지?”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사울이 겸손한 자였는데, 왕이 되어서, 겸손한 자가 아닌, 교만한 자가 되었습니다. 이로써, 하나님께 불순종을 행하는 것과 그의 반역에 대해, “하나님께서 괴로워하심”을 표현한 것입니다. 본문 앞의 3절을 보시면,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라고 사무엘이 사울에게 전합니다.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나,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아말렉은 계속적으로 방해했습니다. 이 때문에, 적대관계가 되었던 아말렉을 향해, 하나님께서는, 출 17: 14에서, “내가 아말렉을 없이하여 천하에서 기억도 못 하게 하리라”고 하셨고, 16절에서는,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때의 전쟁이, “르비딤 전쟁”인데, 우리가 잘 아는, 모세의 손이 올라가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피곤해서 내려가면, 아말렉이 이기던 전쟁입니다. 또, 에스더서를 보시면, 모르드개를 괴롭히면서, 전 이스라엘을 다 죽이려고 음모를 꾸민 하만을 기억하실 겁니다. 그도 역시, 아말렉의 후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에게, 아말렉과 전쟁해서 진멸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전쟁하는 것까지는 순종했으나, 진멸하지 않고, 왕도 살리고, 살찐 가축도 데려오고, 이 보다 더 한 것은,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음을 자랑하고자, 자신의 공적을 나타내는 기념비를 세운 겁니다. 우리 속담에 “잘되면 자기 탓, 못되면 조상탓”이라고 하듯, 이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 자기 탓도 아니면서, 자신을 드러내고자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그래서, 12절을 보시면, “자기를 위하여”라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사울은, 무엇을 하든,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영광이 없습니다. 오직, “자기를 위하여”만 있을 뿐입니다. 나니아 연대기의 저자인, 루이스가 종교토론에 참석했습니다. 그 때의 주제는, “기독교와 타종교의 차이가 무엇인가?”였습니다. 이 주제는, 오늘날 문제시되는 “가나안 성도”에 대한 글에서도 언급됩니다. 데일리 굿뉴스 14일자 기사에서, “가나안 성도들의 특이점은, 종교는 궁극적으로 같은 가르침을 준다는 데에, 많은 동의가 있었다”라고 합니다. 이 토론에서, 부활이 언급되는 등,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기독교의 특징들이 많이 주장되었습니다. 그리고, 루이스에게도 이 질문이 던져졌습니다. 그 때, 그는, “답은 쉽습니다. 바로 ‘은혜’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은혜, 이것이, 기독교의 복음이고, 타 종교와의 차이라는 겁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고, 우리가 누리는 생명과 건강, 그리고, 우리 생활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을, 우리의 기념비로 세워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통해,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만족시켜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9절을 보시면,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였나이까”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만족시켜드리기 위해서는, 순종해야 합니다.
사무엘이 사울을 향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고”라고 합니다. 사울은 하나님께 불순종한 것입니다. 사무엘이 지금, 사울을 찾은 것은, 간 밤에 하나님께서, 사울의 행위에 대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울을 용서해 달라고, 밤새도록 기도하고 왔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사무엘이 모를 줄 알고, 사무엘을 보자마자,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라고 자신있게 말합니다. 그 말이, 사무엘에게 어찌나 가증스럽게 들렸던지, “그럼, 내 귀에 들리는 양의 소리와 소의 소리는 무엇입니까?”라고 반문합니다. 이쯤되면, 사울의 모든 행적을 알고 왔다는 것이 드러나는 것이니, 이쯤에서, 사울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한 단계를 더 나아가, “그것은 백성이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남긴겁니다”라는 궁색한 변명을 합니다. 사울의 이러한 변명은, 창세기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창 3: 12을 보시면, 첫 사람들이 선악과를 먹은 것에 대해, 하나님이 묻자, 아담은,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며, 자신이 선악과를 먹게 된 것은, 하나님과 하와에게 책임있다고 변명합니다. 그 다음절에서 하와는,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고 합니다. 행위는 자신이 해 놓고, 그 이유에 대해서는, 모두가 타인에게, 다른 것을 핑계로 삼습니다. 이것은, 가인에게서도 마찬가집니다. 창 4: 9을 보시면,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질책을 하자,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발뺌을 합니다. 이를 보면, 죄인들의 특징은, 핑계를 대며, 거짓을 말한다는 겁니다. 본문에서, 사울에게 전해진 하나님의 명령은,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하나님의 명대로 하지 않고, 자기생각대로 했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열심으로, 핑계를 늘어놓았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사울에게 “가만히 계시옵소서”라고 합니다. 이를, 현대인의 성경역에서는, 더욱 현실적으로, “듣기 싫소!”라고 번역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나단을 통해 지적받았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삼하 12: 13을 보면,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며, 자신의 죄를 깨끗하게 인정합니다. 요 21장을 보시면, 이른 아침, 밤새도록 투망하며, 고기를 잡던 제자들은,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피로에 쌓였습니다. 이 때, 예수님이 바닷가에 오셔서, 고기를 얼마나 잡았냐고 묻자,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합니다. 밤새도록 투망한 사람들이 왼편에만 했겠습니까? 그러나, 그대로 순종합니다. 이를 보면, 진정한 신앙은, “하나님 앞에서 내 자신을 포기”하는 겁니다. 여기에는, 내 생각, 내 경험, 내 지식, 내 모든 것이 포함됩니다. 이 사건으로, 예수님을 다시 경험한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다 말았습니까? 생명이 다할 때까지, 순종함으로 따랐습니다. 창 12장을 보시면, 아브라함은 어떻습니까? 창 12: 1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하자,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가타부타 이유가 없습니다.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할 때도, 마찬가집니다. 그런데, 베드로나 아브라함이나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에 있어서, 즐거움으로 순종했겠습니까? 여러분 같으면, 베드로나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상황에 처했다고 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이 때, “아멘”하고 행하겠습니까? 이를 보면, 신앙은, 감정보다는 의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나 아브라함이나 자신의 판단과는 반대로, 의지적인 믿음으로, 순종한 것입니다. 밤새도록 투망함으로 지친 사람들이, 새벽에 부둣가에 있는 사람의 한 마디에 그대로 행했다는 것은, 의지입니다. 곽선희 목사님의 부친께서는, 순종에 대해, “소금섬을 물로 끌어라 해도 끄는 것이 순종이요 그것이 효도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소금가마니를 물로 끌라고 할 때, 물로 끌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는 것이 순종이라는 겁니다.
본 회퍼는, “믿는 자만이 순종하고 순종하는 자만이 믿게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정뿐 아니라, 의지를 요구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그리고, 순종할 때, 우리의 믿음은, 비로소, 업그레이드 됩니다. 곧, 믿음이란, 그것 자체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 순종을 통해서 자라고 성숙해 진다는 겁니다. 우리 모두, 주의 말씀에 순종하심으로, 더욱 성숙한,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22절을 보시면,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만족시켜드리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청종해야 합니다.
자신의 잘못에 대해 인정할 줄 모르는 사울을 향해,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겠냐?”라고 묻습니다.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뭘까요? 이에 대해, 우리는 이미, 해답을 알고 있습니다. 순종이고, 청종입니다. 사무엘은 본문에서,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라고 합니다. 우리가 드려지는 예배의 형식보다는, 예배에 임하는 우리의 마음이 바뀌어야합니다. 미 6: 7 - 8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합니다. 요 4: 24을 보시면,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민할 것은, 미 6: 7의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여야 합니다. 곧,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우리가 매 주일,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것이, 필수입니까? 선택입니까? 그럼, 자식의 입장에서,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필수입니까? 선택입니까? 우리는 이 모든 것이, 필수라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천에서는 상황을 중시하여, 선택으로 돌립니다.
본문을 다시 보시면, 하나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다”고 하십니다. “순종과 청종”은, 우리의 마음가짐에서 비롯됩니다. 삼상 16: 7을 보시면,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고 합니다. 여기서도 강조된 것이 무엇입니까? “마음”입니다. “생각”입니다. “마음이 있으면, 행동이 따른다”고 합니다. 그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중시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 말씀을 청종하여, 순종하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나는 기적을 행하는 사제가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마치기 전에 부르는 찬양이 무엇입니까? “주님 말씀하시면”이죠? 그 찬양의 중심이 무엇입니까?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다. 주님 뜻이 아니면 내가 멈춰 서리다. 나의 가고서는 것 주님 뜻에 있으니, 오 주님, 나를 이끄소서” 하나님께 전폭적으로 내 자신을 맡기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주관자이심을 고백하는 겁니다.
“순종”은, 히브리어로 “샤마”입니다. 그 뜻은, “듣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역성경에서는 22절의 “청종과 순종” 모두를 “순종”으로 기록했고, 현재의 개정에서는, “목소리에 순종”하는 것이라 하여, “청종”으로, 그리고, 행위에 관련된 것은, 그대로 “순종”으로 기록했습니다. 영국의 신학자로 기독교 복음주의의 거장인 존 스토트는, “고난의 진짜 쓰라림은 불행 그 자체도 아니고 고통이나 그것의 부당함도 아니다. 바로 그 고난 중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신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고통은 참을 만하지만, 외견상으로 보이는 하나님의 무관심은 참을 수 없다”라고 했습니다. 진정, “고난을 아는 신학자”라고 생각합니다. 시 86: 7을 보시면, 다윗은,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께 부르짖으리니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리이다”라고 하며, 렘 33: 3에서, 하나님은,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며,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이야말로, 고난 가운데 고난입니다. 본문의 23절을 보시면,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라고 합니다. 그제서야 때늦은 회개를 합니다. 그것이, 24절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사울은, 백성을 핑계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에게 이중택일을 제시합니다. “순종하여 복을 받든지, 아니면, 불순종하여 저주를 받든지”입니다.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는, 피조물과 창조주의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의지를 가지고,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여, 하나님을 만족시켜드림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