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역사 속의 아리랑, 대구아리랑
<대구아리랑>이 있다. 2003년 대구유니버시아드 대회를 기념하여 창작되어 음반 발매와 공연을 통해
이제는 타 지역에서도 불릴 만큼 알려진 아리랑이다.
그런데 <대구아리랑>이라고 할 때는 2003년 발표될 당시와는 다르게 지금은 단서를 달아 말해야 하게 되었다.
언제 창작된 <대구아리랑>이라는 말인데, 왜냐하면 이미 1936년 동일 곡명으로 발표된 또 하나의 <대구아리랑>이 있기 때문이다.
‘新대구아리랑’과 ‘舊대구아리랑’이 있게 된 셈인데, 즉 1936년 9월 <밀리온> 레코드사가 최계란(崔柱蘭)을 통해 취입, 발매한 <대구아리랑>이 그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당시 신문의 광고와 방송 송출 기록이 있어 존재는 확인 된다. 그 후렴과 가사 일부는 이렇다.
“아롱아롱 아롱아롱 아라린가/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오
낙동강 기나긴 줄 모르는 임아/ 정나미를 거두려고 가실라요”
‘낙동강’이 나와 지역성을 담보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노래 한 이가 주로 대구 지역 권번(券番)에서 활동하던 명창으로 1950년대 까지 생존했던 분이다. 곡조는 당시 유행하던 <강원도아리랑>에 기반을 두었고 약간은 애수적인 분위기다.
그런데 이 <대구아리랑>은 2003년 많은 관심 속에 대구지역 연구자와 명창에 의해 창작된 <대구아리랑>이 발표될 때 까지도 그 존재가 알려지지 않다가 2006년에야 음반이 발굴되어 알려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동안 불려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알려지지도 않았던 이유는 무었일까? 그 이유는 간단히 말 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몇 년 전 서울에서 있었던 음반 복원 음악회에 참여했을 때 전문가들로부터 들었던 의견 등을 종합해서 그 원인을 든다면 대략 세 가지를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후렴의 첫 행 ‘아롱아롱 아롱아롱 아라린가’가 당시 대중들에게는 생소했을 것이다.
지역 공동체 내에서 일상적으로 불려지는 것과는 다르게 축음기나 방송으로 익혀 즐겨야 했던 상황에서는 이런 생소함은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둘은 곡조가 이미 <강원도아리랑>으로 알려진 곡조에 가까워서 대구 지역민에게는 어필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아리랑’이나 ‘나의 아리랑’으로 받아들여지기에는 부족했다는 것이다.
셋은 최계란의 주 활동지가 지방이어서 비교적 서울에서 방송 등을 통해 확산시킬 기회를 갖지 못했다는 점이다.
동시대 <신아리랑>· <밀양아리랑>· <강원도아리랑>이 전체 민요 방송 출연 빈도수에서 상위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감안하면, 필자가 확인 한 바로는 1회(1938.6.5)만 송출되었다는 것은 자연스런 도태의 원인이 될 수 있었음을 알게 된다. 이상의 세 가지 요인은 토속아리랑의 전승 요건과는 또 다른 창작아리랑의 전승 요건이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