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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를 다녀오면서
대전남선중학교 권종만
교장, 박종근, 이동위, 고영상, 류광열, 이상건, 김문익, 이상순, 이환영과 나, 모두 10명이 함께 2012년 1월 9일(월) - 11일(수) 까지 2박 3일에 걸쳐 대마도를 다녀왔다. 남자직원들끼리 이렇게 해외여행을 함께 한다는 것이 쉽지도 않거니와 무척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3일간의 일정을 되짚어 가며 정리해본다.
1월 9일(월)
이즈하라 도착
새벽 0시 5분 부산행 새마을열차는 모처럼의 기차 여행이었고, 남자들끼리의 여행이어서 마음을 무척 들뜨게 했다. 허긴 낼모레 환갑인 사람이 마음이 들뜬다는 것이 우습기도 했다. 부산에 도착한 것은 3시 20분쯤. 부산은 춥다는 것을 절감했다. 씽씽 부는 찬바람은 옷깃으로 파고들고, 몸을 움츠리게 했다. 추위를 피해 모텔 하나를 찾아 잠깐 눈을 붙였다가 일어난 것은 7시. 근처 식당에서 귀 어두운 노인 할머니가 차려주는 대구탕을 아침으로 먹고, 15분을 걸어 국제선여객터미널에 도착한 것이 8시. 롯데관광의 차명순 가이드의 안내로 안성분들 4쌍의 부부와 함께 총 18명이 함께한단다. 출국 수속을 마치고 대아드림호에 오른 것은 9시 20분, 배안에서 10시 50분경 때 이른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었다. 이렇게 이른 점심은 처음이다.
남쪽 섬에 위치한 대마도 최대의 도시 이즈하라에 도착한 것은 원래 예정시간보다 20분 이른 11시 30분이었다. 대마도 인구 약 4만명 중 약 1만3천명이 이시하라에 산단다. 대마도는 원래 하나의 섬이었던 것이 러일전쟁을 대비하여 인위적으로 운하를 파서 남섬과 북섬으로 나누어 놓았단다. 마치 우리나라 안면도를 섬으로 만들어 놓았듯........
이곳 대마도 사람들은 자고로 한국인이 없다면 제대로 살아갈 수 없을 듯하다. 모두 급경사의 척박한 산지라서 농사지을 수 없는 땅이 대부분이고 그래서 바다에서 고기를 잡거나 한반도를 노략질하는 해적(왜구라 그랬지?)으로 살았거나, 지금도 한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관광업이 아니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듯 같다. 관광객의 95%가 한국인이요, 주민의 65%가 관광업에 종사한다는 이야기는 이를 잘 증명하는 것이다. 허긴 원래 대마도는 지질학적으로 한반도와 연결되어 있었다가 떨어지게 되었고 일본 본토(132Km)보다는 부산(49.5Km)이 더 가깝다는 사실은 시사 하는 바가 크다.
일본은 다신을 섬기며, 새해가 되면 복을 가져오는 신을 환영하는 입장에서 1월 한 달은 각 가옥의 출입문 앞에 세 갈레의 새끼를 꼬아 만든 금줄 같은 것을 걸어 놓는다. 이를 시메나와라고 하는데 집집마다 걸어 놓았더라.
수선사
최익현 선생 순국비가 있는 곳이다. 구한말 최익현이 의병을 일으키고 일본에 체포, 유배된 곳이 대마도인데 일본이 주는 식사를 거절하다가 순국하였다. 이를 기리는 의미에서 순국비를 세웠다 한다.
덕혜옹주 결혼 봉축비
고종의 딸 비운의 덕혜옹주가 일본의 책략에 의해 대마도 종가의 宗武志(소 다께유키)와 혼인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발성치매증이 도지고 이혼을 하고 쓸쓸히 일본의 한 병원에서 생활하다가 박정희 대통령 때에 귀국하여 창덕궁 수강재에서 살다 죽는다. 결혼 초기 대마도 사람들은 조선의 왕족이 시집온다하여 대대적인 환영을 벌였겠지. 그리고는 이 비석을 만들어 세웠다가 방치했던 걸 우리나라 사람들의 생활수준이 향상되고 대마도를 찾는 관광객들이 증가하자 찾아내어 다시 세웠다 한다.
조선통신사비, 고려문, 아메노모리 현창비, 대마도자료관
조선통신사비는 고려문, 대마도자료관의 바로 옆에 있었다. 조선통신사는 임진왜란 이후 15차례 파견되었는데, 300명 - 500명가량의 관리와 보조 인력들이 대마도를 거쳐 에도 막부에 가게 된다. 당시 일본은 다른 모든 나라와는 관계가 없고 오로지 조선을 통해서만 문물을 받아들인다. 외교의 의미와 함께 문화 수출의 의미를 지녔다고 볼 수 있다. 워낙 대규모의 사람들이라 오랫동안의 숙식을 책임지려면 일본의 재정이 파탄이 날 지경이나 그를 통해 얻는 부분이 또한 크기 때문에 계속 되었겠지. 그들이 필요가 없을 때까지.
고려문은 조선통신사가 들어가던 문이었다 한다. 대마도인들은 고려를 대단히 좋게 보았던 것 같다. 고려꿩, 고려개 등과 함께 고려라는 말이 들어가는 문이다.
아메노모리헌창비는 무슨 공사 중이라 옮겨져 고려문 옆에 위치하고 있었다. 아메노모리호슈는 조선과의 관계 개선을 적극 지지하던 인물이요 사상가이었다. ‘서로 미워하지 말고 싸우지 말며, 진실을 가지고 교류하는 것’이 ‘誠信의 교류’임을 강조한 그의 외교철학은 현대에 와서 더욱 빛을 발하고 있지 않나 생각이 든다.
대마도자료관은 조선통신사와 관련된 자료들이 전시되어있는 조그마한 전시관이다. 조선과 관계를 유지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척박한 땅의 대마도주 입장에서 일본 막부와 조선 조정의 눈치를 보며 적절한 거짓말과 구라로 줄타기를 하며(조선왕을 속이기 위해 막부의 편지를 위조하거나, 거짓된 범죄인 인도, 막부의 눈을 속이기 위한 거짓된 보고 등이 이를 증명한다.) 대마도민들의 삶을 책임지던 입장이 잘 드러나 있다. 또 에도시대 약 230년간의 대마도주의 각종 기록을 담은 방대한 宗家文庫史料는 공개하지 않고 있다한다. 무슨 비밀스런 내용이 담겨있을까? 분명 조선과의 관계에서의 비밀이 담겨 있겠지........
하치만궁(八幡宮) 신사와 마리아 신사
하치만궁 신사는 전설속의 신공황후를 모시는 신사로 무력(전쟁)의 신이라 일컬어진다. 그의 아들은 오진천황(백제계로 추정함)이라 한다. 신공황후는 가야지방을 정벌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일본이 임나일본부설의 근원이 되었다 한다. 에이 그~짓말. 지들이 뭘 가지고 가야를 침공하고 일본부를 둬! 경영해? 혹시 무역을 위해 건물 하나는 사서 경영했을 수는 있겠지.
마리아 신사는 하치만궁 신사 옆 거대한 녹나무를 앞에 두고 있는 신사인데, 임진왜란과 관련이 있다. 토요토미히데요시는 임진왜란을 일으키기 위해 조선을 잘 아는 대마도 번주 소오요시토시에게 측근 휘하장수인 고니시유키나까의 딸인 마리아를 시집보낸다. 그녀는 천주교신자였는데, 히데요시가 급서하고 고니시가 도쿠가와이에야스와의 대결에서 참수 당하자(자결을 하지 않은 것은 그도 천주교 신자이었기 때문이라는…….) 소오 요시토시에게 파혼당하고 쓸쓸히 죽는다. 후에 그녀를 기리는 사당이 마리아신사라네.
100엔샵과 할인마트
우리나라 1000원샵과 같다. 대부분 메이딘 챠이나. 음~. 쇼핑몰 건물 2층에 있지만 별거 아니더라. 아무 것도 안 샀다.
대아호텔에서 1박과 하쬬(八丁)식당
숙소인 대아호텔은 우리나라 사람이 지은 것 같다. 호텔이라고 하기엔 초라하고 모텔정도? 4시경 호텔에 도착해보니 안성의 남자 분들은 소주를 까고 있었다. 뭐 술 고픈 김에 안면 몰수. 소주 한 팩을 얻어먹었다. 아! 소주는 정말 맛있어. 숙소를 배정 받는데, 눈치를 보니 전망이 좋은 바다 쪽이 아니라 시내 쪽인 것 같다. 조용히 다가가 바다 쪽의 방으로 바꿔달라고 사정하였다. 그게 다행이었다. 2명씩 배정받은 방이 모두 침대 방이고 이한영부장과 내가 쓰는 방만 온돌방이니 저녁식사 후 한자리에 앉을 데를 마련한 셈이었기 때문이다.
발을 닦고 잠시 휴식을 취하고 나서 6시에 모여 저녁을 먹게 된 식당은 차로 5분 거리의 하쬬(八丁)식당이다. 일본식 초밥정식인데, 음~. 또 안성분들의 소주를 축내다. 역시 술을 좋아하지 않는 주최 측의 농간이라 술(일본말로 사케)이 준비가 제대로 안 되는 문제가 있네, 쩝.
저녁식사 후 호텔목욕탕에서 안성분들과 이야기 하다 보니 안성분들은 소를 키우는 조합원들 사이라 한다. 온돌방인 우리 방에서 10명이 한데 모여 술을 맛보고 일찍 헤어져 휴식에 들어갔다. 화투놀이를 제대로 하지 못해 교장선생님은 조금 섭섭해 하셨을라나?
1월 10일(화)
호텔에서 아침을
새벽 0시 20분쯤 잠에서 깨니 적막강산이라. 조용히 옷을 주워 입고 바다를 바라보며 산책을 하다가 다시 잠에 든 것이 2시쯤 되었을까?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이환영 부장도 잠이 깼었나 보다. 미안한 마음으로 다시 잠을 청하였다. 아침에 일어나 목욕탕을 찾았지만 이런, 실수. 타올을 안 가져 간 거라. 습관이 안 되니, 쩝. 드라이어로 몸을 말릴 수밖에…….
아침은 일본식 백반. 역시나 이찌진마에(一人床). 음식은 싱겁다. 밥만 추가가 가능하다. 여기서도 안성분들의 김치, 장아찌 덕을 보았네.
버스 안에서
차명순 가이드는 참 여러 가지 이야기를 버스 안에서 들려주었다.
1. 일본인이 목욕을 자주하는 건 ①여름에 습하고 ②겨울에 추워 몸을 덥히기 위해서
2. 건물이 가볍고 얇은 까닭은 - 지진에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그래서 호텔 건물도 날림 같았구나!!)
3. 일본에 신이 많은 이유는 각종 자연재해 때문 - ①아기가 태어나면 건강을 빌며 7세까지는 신에게 빌며 ②7세 이후에는 부모의 책임으로 간주한다.
4. 일본남자는 초식계, 여자는 육식계라 여자가 먼저 사랑을 고백한다. 남자는 혼자다.
5. 황혼이혼 - 일본인은 혼내(內心)와 다께마이(겉마음)이 다르다. 겉으로는 싫은 내색을 안 하지만 본마음은 그렇지 않다. 남편이 잘못했던 여러 가지 일들을 모두 기록으로 남겨두었다가 남편이 퇴직할 때 이혼사유의 증거물로 내 놓는다. 그러니 꼼짝없지. 우리 마나님은 기록을 남기지 않는 것 같아 나는 황혼이혼은 안 당하겠다.
6. 일본의 산과 나무 - 모두 급경사로 농사짓기 어려움. 그래도 돈 되는 나무들이 그득한 산. 편백나무와 삼나무의 군락.
7. 티내지 않고 자연스러움을 좋아하는 일본인 - 티내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본다. 아주 값 비싼 것들도 티나지 않으며, 어느 한 가지에 투자하는 것을 좋아한다. 예를 들면, 시계, 옷, 팔찌, 신발 등 등…….
8. 일본의 금융자산 - 60% 이상을 65세 이상의 노인이 소유하고 있으며 국민은 부자, 국가는 가난. 국가가 국민의 금융자산을 빌려 쓰고 있어 국가는 외채를 빌려 쓰지 않아 안정적임
9. 낮은 금융이자 - 많은 자산을 보유한 노인들이 이자가 낮아서 집에 비밀리에 보관하며 노인이 죽은 후 이를 노리는 전문털이범이 극성을 부리고 있다.
10. 녹차나무 - 달마의 눈꺼풀. 달마대사가 도를 닦는데 하도 잠이 쏟아져 눈꺼풀을 베어 땅에 던졌는데 여기서 난 나무가 녹차나무였다. 그래서 녹차를 먹으면 잠이 달아난다.
11. 세계 활화산의 10%가 일본에, 108개나 되는 활화산이 있으며, 이로 인해 물이 땅속에 스며들고 지표에는 물이 없다. 지하에 스며든 물은 각종 미네랄이 풍부하고 경도가 낮으나 단 마그네슘이 부족하여 이러한 물을 마시는 일본인은 뼈와 이가 약하다.
12. 짬뽕의 유래 - 일본에 잔폰에서 나온 말로 차이나+폰이 합해진 말이라 한다. 나가사키의 한 화교가 각종 해물을 넣은 중국식 육수에 국수를 넣어 끓인 요리라 한다. 이것이 나가사키 짬뽕의 유래라 한다. 우리나라에는 얼큰하게 고춧가루를 더 넣었지.
13.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회사 - 1400전통의 절을 짓는 회사 콘고구미(金剛組). 현재까지 콘고구미는 42대가 이어져오고 있다. 불교가 전래되던 578년 성덕태자는 사천왕사의 건립을 위해 모셔온 백제인 건축 장인 유중광과 목공들에게 사천왕사 건립 이후에도 계속해서 절을 지어 줄 것을 부탁하여 만들어진 것이 콘고구미란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한때는 경영의 어려움에 콘고구미가 자살을 했고 이를 이어받은 그의 아내가 다시 일으키기도 하는 우여곡절도 있었다 한다. 1995년 고베(神戶)대지진(진도 7.2) 때, 커다란 수직의 지진으로 16만 채의 다른 건물은 모두 넘어졌어도 콘고구미가 지은 절만은 건재했단다. 그 비결에 대해 콘고구미는 “보이는 곳보다 보이지 않는 곳에 더 신경을 쓴다”는 말을 했다 한다. 역시 장인의 풍모를 느낄 수 있는 이야기이다.
코모도하마 신사
일본에는 까마귀, 매 등이 참 많다. 려몽 연합군의 내습지인 코모도하마로 가는 길에 그 많은 까마귀 떼는 태풍(일본인들은 神風-가미카제라 한단다.)으로 숨진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려몽 연합군 병사들의 혼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매란 놈은 다른 새를 잡는 것보다는 물고기 잡아먹는데 더 길들여져 있는 것 같더라. 그런 매는 매가 아니다.
여몽 연합군은 1274년, 1281년 두 차례에 걸쳐 내습이 있었는데, 먼저 여기 코모도하마에 도착하였다. 이에 대마도 전 인구보다 많은 연합군에 대항하여 소 스케쿠니는 86세의 노구를 이끌고 급하게 80기 정도로 대항하다 숨졌다. 코모도하마 신사는 이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신사로서 군인을 모신 신사로는 가장 오래되었다 한다. 아무튼 려몽 연합군의 내습으로 인해 가마쿠라 막부가 멸망하고 무로마치 막부가 등장하였다 한다.
신사 입구에 ‘元寇七百年平和之碑’라는 비석위에 돌 비둘기 두 마리가 앉아있는데…….
이 사람들, 웃겨요. 평화를 말할 때는 꼭 자기들이 외부로부터 침략을 당할 때 뿐이다. 일본 본토인 혼슈를 침략을 당한 것은 꼭 두 번이었는데(이종무 장군의 대마도정벌은 침략이 아니다. 왜구를 토벌한 것에 지나지 않으니깐.) 려몽연합군의 내습과 미국의 원폭 투하이다. 그런데 이런 곳에 가면 여지없이 평화의 비가 세워져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가해를 하고 아무런 보상도 안 해주고 있는 위안부 할머니를 생각하게 하는 소녀상은 철거하라고 난리이다. 에이 ~.
이시야네 마을의 돌 지붕 창고, 정말 잘 가꾸어진 정원이 딸린 집
이 마을은 부자마을일 수가 없는데 부자마을인 까닭은 근처에 은광산이 있기 때문이란다.
마을을 구경하고 있는데 일본인 운전기사분이 와보라고 손짓을 한다. 정원 나무 조경이 기가 막힌 집의 주인과 개인적으로 이야기하여 우리 일행을 구경하도록 하였단다. 깊은 배려에 감사드리며 둘러보며 참으로 장인의 손길을 느낄 수 있는 나무들을 구경하였다. 진정으로 감사한 일이었다.
쯔쯔자키(豆酘崎)의 천도동자 전망대
대마도 최남단인 쯔쯔자키 전망대가 있는 오자키아마(尾崎山) 자연공원 해안가에 천도동자상이 있다. 이곳은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옛날 한 처녀가 아주 센 기를 받고 아이를 임신하게 되었는데 그 아기가 출산하여 천도동자가 되었다 한다. 이곳이 천도신앙의 발원지라 한다. 참으로 대한해협과 쓰시마 해협이 만나는 절경의 자연공원으로 난류와 한류가 겹쳐져 많은 어종이 분포하고 있는 어장이란다. 러일전쟁에 대비하여 많은 포대와 진지가 구축되었었다 한다.
미녀총다옥의 효행면(로쿠베)정식의 점심
미녀총다옥은 식당이다. 이곳 특산물의 하나인 로쿠베(고구마국수)는 구황식물의 하나인 고구마로 만든 국수이다. 닭고기육수에 촐랭이면 형태의 독특한 국수인데 여기에 밥을 넣어 먹는다. 식사를 마치고 후식으로 감귤을 맛보았는데, 제법 맛이 있었다. 잘 꾸며진 정원을 둘러보며 연못에 그물이 쳐져있다. 비단잉어를 날짐승들이 포획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란다. 정말 웃기는 매네! 물고기를 잡아먹어?
건물 입구 쪽에 수금굴이라는 팻말과 그림이 있다. 땅 속에 물이 똠방 똠방 떨어지는 소리가 비파소리 같다하여 수금굴이라 했는데 이 물을 올려 조그마한 물레방아를 돌리고 있다.
미녀총
쯔쯔자키지방은 한반도 도래인의 첫 귀착지였으며, 이들을 唐人이라 불렀다. 이곳은 또한 미녀가 많았다고 한다. 옛날 우네메라는 처녀가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용모도 수려한 미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효심이 매우 깊은 처녀였다. 어느 날 관에 의해 천황의 시녀로 차출이 되었는데, 어쩔 수없이 강제로 이끌려 길을 가던 중, 어머니를 모시지 못하고 떠나는 처지를 비관하여 소변이 마렵다고 핑계를 대고 산으로 들어가 자결을 하였다. 자결을 감행하며 쯔쯔마을에 미녀는 태어나지 말라는 저주를 내리며 혀를 깨물고 죽은 것이다. 그리하여 그 처녀를 추모하며 혀 모양의 비석을 세워놓아 舌塚이라고도 한단다.
쯔쯔마을
이곳은 한반도 도래인의 첫 귀착지라고는 하나 활기가 느껴지지 않는 어촌이라 할까? 마을을 둘러보면서 폐교된 소학교건물, 사람이 살지 않는 가옥들이 자주 보였다. 그만큼 젊은이들이 도시로 빠져나간 우리의 힘없는 농촌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아유모도시 자연공원
대마도 번주의 선착장
가미자카 전망대와 러일전쟁을 위한 포병 진지 터
이즈하라에서 북쪽으로 조금 올라와서 위치한 358m 높이의 가미자카공원이 있다. 옛날 백제계와 신라계가 대마도 도주 쟁탈의 전쟁터이기도 했다는데, 그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고 덕혜옹주의 전남편이었던 소오 다케유키(宗武志)의 시비가 있다. 가미자카공원 전망대는 아소만의 리아스식 해안과 대마도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이 좋은 곳으로 멀리 공항의 활주로가 보이기도 한다.
차가운 바람은 얼굴과 손을 시리게 불면서 괴롭게 했지만 조금이라도 의미를 찾아보려 애썼다. 전망대 뒤편으로 러일전쟁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한 번도 전쟁에 활용되지는 않았지만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의 일본 육군이 전쟁을 대비한 포병진지와 막사는 저들의 군국주의의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또 한편 그 오래된 군사시설 위에 자라고 있는 나무들의 두께에서 세월을 실감 할 수 있었으며, 건축술 또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타마노유 해수온천욕
대마도에는 타마노유, 유타리, 나기사노유 등 3개의 온천이 있다고 한다. 모두가 해수온천이며, ‘진주의 탕’이라 불리는 '타마노유 온천'은 시설은 작고 초라하나, 피부미용에 좋은 수질로 여행객들에게 인기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 일행이 찾았을 때는 평일이라 그런지 노인들만 오간다. 옆에 있는 커다란 호텔에는 젊은 사람들로 북적이는데 말이다.
온천욕을 하는 과정에서 우리 일행 중 4사람은 싫다고 차에 남았었고, 6사람이 온천탕에 들어갔었다. 그런데 저런! 또 수건을 깜빡한 것이다. 얼른 온천욕을 마치고 헤어드라이어로 몸을 말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아침에도 그랬는데……. 하루에 두 번씩이나 수건도 없이 온천욕을 했네!!
해산물바베큐로 저녁식사를
타마노유 해수온천을 마치고 근처의 해변에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저녁식사로 해산물 바비큐를 먹었다. 보라색, 주홍색이 나는 가리비, 새우, 소시지, 돼지고기와 꼬치, 어묵꼬치, 닭날개, 고구마, 옥수수 등을 숯불에 구워 먹는데, 역시 또 소주 없다!! 안성 팀들은 소주로 신나게 마시며 먹는데, 우리 팀은 꾸역꾸역 바비큐 구이만 먹다보니 모범생이 된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자기 마실 것은 자기가 챙기는 수밖에 없다니까? 아니야. 그렇다고 나만 챙기면 뭐하나? 함께 먹지도 못하면 무슨 맛이냐? 결국 팀에서 챙기는 게 맞지?
100엔숍과 할인마트
이즈하라로 돌아오는 길에 100엔숍과 할인마트를 다시 들렸다. 역시 100엔 숍은 들어가지도 않았고, 호텔에서의 마지막 밤을 위해 할인마트 식품점에 들러 장을 보았다. 각종 회, 초밥, 사과, 맥주(기린맥주와 금릉맥주. 아사이맥주는 전날 사놓은 것이 있었음), 그리고 소시지 등을 구입하였다.
대아호텔의 마지막 밤
여행에서 마지막 밤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여행을 되돌아보며 반성과 또 다른 계획을 세운다. 함께했던 사람들과 이 밤만 보내면 아쉬운 이별이요, 그리운 헤어져있던 가족을 만나는 꿈에 희망도 생기는 밤인 것이다. 우리 팀은 제대로 마셔보지도 못하고 제대로 이야기 나누어보지도 못했다.
아쉽게도 다목적실 예약을 깜박하는 바람에 식당 한켠 테이블에서 대마도의 마지막 밤을 보낸다. 술로는 국산양주 임페리얼, 참이슬 소주, 아사이맥주, 기린맥주, 금릉맥주. 안주로 도미, 고등어, 연어, 한치 등 각종 회. 초밥. 마른 오징어와 사과, 일본산 소시지. 참으로 풍성하게 차려놓고 모든 술을 모두 비웠다.
한쪽 방 한 켠에서 고스톱도 펼쳐보고……. 그렇게 마지막 밤은 풍성하게 흘렀다.
1월 11일 (수)
면세점과 문구점
전날 아침과 비슷한 백반을 먹고, 버스에 오른 것은 8시 20분. 가이드는 면세점으로 가잔다. 드디어 가이드의 본색이 드러나나 보다. 맥반석도 사라고 하고, 게 껍질에 있는 키토산도 사란다. 면세점은 어제도 가보았던 100엔샵과 할인마트 맞은편 골목에 있다. 면세점을 구경하는 둥 마는 둥 이동위 부장은 문구점으로 직행이다. 면세점도 그렇고 문구점도 한국의 대형마트와 비교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다. 결국 그냥 나올 수밖에.
러일전쟁의 주역 만관교운하
만관교는 1897년에 시작하여 1900년에 완공한 만관교운하 위에 세워진 다리이다. 이는 1904년 발발한 러일전쟁을 염두에 두고 기획된 것으로 대마도가 남섬과 북섬으로 나뉜다. 일본 본토에서 쓰시마 해협을 통해 아소만을 거쳐 대한해협으로 가장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통로이다.
이미 청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은 만주 봉천에서 러시아 육군을 무너뜨렸지만 해군의 무적 발틱함대가 블라디보스톡으로 이동하는 것을 눈치 챈 일본은 영국의 협조로 스에즈운하를 봉쇄한다. 할 수없이 발틱함대는 머나먼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올 수밖에 없었다. 당초 일본은 발틱함대가 대마도의 서쪽인 대한해협을 통과할 것으로 예상하였으나, 쓰시마해협을 통해 이동하는 것을 미리 눈치 챈 일본의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군은 신속히 아소만을 거쳐 만관교운하를 통해 동진하고 쓰시마해협에서 대기하던 해군과 협공으로 발틱함대를 궤멸시킨다.
우리나라를 둘러싸고 주변국들이 아귀다툼을 벌였던 현장이다.
아무튼 운하의 물은 급류였고, 말없이 흐르고 있었다. 젠장.
아소만의 절경을 한 눈에 보는 에보시타게 전망대
히코호호의 와타즈미 신사
와타즈미 신사는 아소만의 리아스식 해변을 끼고 바다위에 서 있는 두 개의 토리이를 포함한 총 다섯 개의 토리이가 일렬로 바다를 향해 서 있는 해신신사이다. 일본 건국신화에 나오는 천신의 아들이 형의 낚시 바늘을 찾으러 갔다가 용궁의 딸과 결혼하게 되고, 바다 속에서 3년을 살다가 만삭이 된 아내랑 육지로 나왔는데, 아이를 낳는 모습을 결코 엿보지 말라고 한 부탁을 어기고 이를 엿보다가 아내가 용의 모습으로 몸부림치는 모습을 보게 된다. 화가 난 아내는 아이를 버리고 다시 바다로 돌아가는 데, 그 아이가 일본 왕가의 시조인 텐무천왕의 아버지가 된다…….
또 신사 앞에는 우리나라의 해태상과 비슷한 고려개 두 마리가 마주보고 있는데 암수 한 쌍의 삽살개로 여겨진다. 수놈은 입을 벌리고 있고 암놈은 입을 다물고 있다는.
미네역사자료관
와타즈미 신사에서 북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조그마한 도시에 위치한 미네역사자료관이 있다. 아주 조그마한 자료관이다. 이곳에는 부근에서 출토된 각종 부장품들을 전시하고 있는데 바로 한반도에서 건너온 대마도 지배자들의 것들임을 한눈에 느낄 수 있다. 그럼에도 한견에 전시된 고기잡이하는 훈도시를 찬 남자들은 조선사람 보다도 더 기골이 장대한 인형으로 꾸며 놓은 것을 보면 역시 이들이 역사 왜곡의 선수들임을 눈치 챌 수 있다. 꾸며놓은 고대 움집의 형태도 한반도 고대인들의 것보다 더 진화된 형태로 꾸며놓은 것을 보면 실소가 나온다.
한국전망대와 조선역관사 순국비
미우다해수욕장
마지막 관광코스인 미우다해수욕장은 조그마하지만 일본의 100대 해수욕장 중의 하나로 꼽힐 만큼 아름다운 모래와 바다색깔, 주변 풍경을 골고루 갖춘 해수욕장이다. 가이드에게 걸었던 농담 한마디 - 일본사람들은 이상해요. 왜 이렇게 아름다운 해수욕장을 미우(웁)다 해수욕장이라고 했을까요?
히타카츠항으로 가는 도중 와니우라포구(鰐浦)에 위치한 식당(이름이 생각이 안남)에서 우동정식을 점심으로 먹었다. 우동정식은 일단 익힌 음식을 식지 않도록 초(파라핀)으로 데우는 것이 신기했다. 여기서도 여지없이 안성분들의 소주를 얻어먹었다. 흠~.
잠깐 포구에 나와 바람을 쐬던 중 텅 비어있는 건물에 ‘특산물유통판매시설’이라는 글귀가 눈에 뛴다. 매월 2, 4주 토요일에 만 개최된다니 우리의 놀토에만 개최되는군!
히타카츠항에서의 출국수속
이즈하라에서 함께 내렸던 사람들을 대부분 이 히타카츠항에서 만나는군. 출국 수속은 간단했다. 낚시관광을 왔던 사람들은 아이스박스에 2-3통씩 잡은 물고기를 포장해 가는 것 같다.
오후 2시 45분 대아드림호였으니 부산 도착시간은 4시쯤이었다.
부산에서 KTX를 타고, 대전한밭식당에서 저녁을
원래 오후 7시 KTX를 타기로 되어있으니, 시간을 앞당겨 다시 끊기로 하고 다리가 좋지 않은 교장님, 김문익, 박종근과 이동위는 택시로 역에 까지 가기로 하고 나머지 6명은 걸어서 부산역에 가기로 하였다. 역시 내 예상대로 5시 열차로 바꾸었으니 대전에 도착하면 6시 30분. 의외로 울산, 대구만 쉬고 대전에 도착하니 KTX, 참으로 빠르구나!
한밭식당에서 설렁탕과 갈비탕을 나누어먹고 헤어지니, 아! 2박 3일이 꿈같이 흘렀구나.
다시 대마도 여행을 돌아보며
이번 여행에서 나름대로 얻은 사실이 몇 가지가 있다.
1. 다음 방학에는 필리핀으로 가보자.
2. 그 전에 4월 3주 토요일 일요일을 이용, 1박2일로 신시도와 선유도의 풍미를 느껴본다.
3. 음주는 적절히, 또한 적절히 즐겨가면서 하자. 그를 위해서는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
4. ‘컵라면 좆되버렸네’사건 - 아주 난처한 위기도 유머를 잃지 않으면 쉽게 극복될 수 있다.
5. 여행은 사전의 공부가 철저히 요구된다. 그렇다면 아는 만큼 보인다. 그리고 즐길 수 있다.
6. 주변에 여행을 떠나는 사람에게 적절하게 배려해주는 것이 옳겠다.
7. 진정으로 마음이 통하는 사람과의 여행이 재미있는 거다.
첫댓글 꼼꼼히 적었네... 치매예방하려고 하나? 좋았겠구만. 나는 요즈음 소주가 맛이 없어지는 중이네. 맛이 깔끔하지 못하고 조미료 맛이 느껴진다고 할까?
비싼 외국술을 먹을 수 없으니 큰일났다. 빨리 양조를 활성화해야겠다. 잘 보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