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과학] 운동선수의 유전자
운동 관련 유전자 200개… 한국인은 격투기에 유리해요
입력 : 2023.10.10 03:30 조선일보
운동선수의 유전자
▲ /그래픽=진봉기
항저우 아시안게임이 끝났어요. 16일 동안 경기 장면을 TV로 지켜보면서 운동선수는 정말 평범한 일반인과는 선천적으로 다르다는 생각을 한 번쯤 했을 거예요. 영국 스포츠 과학자 크레이그 샤프는 '위대한 운동선수는 생리적인 변종'이라고 했어요. 그만큼 뛰어난 운동선수가 되는 데 유전자가 중요하다는 뜻이죠. 과연 운동선수의 우월적 유전자라는 게 존재할까요.
'탁월한 운동선수 체질 따로 있다'
핀란드 헬싱키대 연구진은 올림픽 크로스컨트리 스키에서 메달을 7개나 딴 에로 멘티란타 선수의 유전자를 분석해 '적혈구 생성 인자(erythropoietin·EPO)'라는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일어난 것을 발견했어요. 이 변이 덕분에 멘티란타는 적혈구 생성이 일반인보다 많았고, 산소를 운반하는 능력이 25~ 50% 높았어요. 그로 인해 놀라운 육체적 힘을 갖게 됐다고 해요. 연구 결과는 1993년 미국국립과학원회보(PNAS)에 실렸어요.
스포츠 과학자들에 따르면 운동 능력과 관련된 유전자는 200개가 넘어요. '스포츠 유전자' 저자 데이비드 엡스타인은 타고난 재능과 연습 중 어느 것이 스포츠 능력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지 연구해 '탁월한 운동선수가 되는 체질은 따로 있다'고 밝혔어요. 운동에 유리한 유전자가 있다는 의미예요.
물론 유전자가 운동선수의 절대적 성공 요건은 아니에요. 뼈를 깎는 노력과 체계적인 훈련도 빼놓을 수 없는 요소로 꼽히죠. 엡스타인 또한 키가 크면 농구를 잘할 확률은 높지만, 키가 크다고 모두가 프로농구 선수가 될 수는 없다는 점을 강조했어요. 단, 선수가 어떤 유전 형질을 갖고 있는지 파악한다면 훈련에 적용해 운동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대요. 또 내 아이가 어떤 운동을 잘할지 적성을 찾아주는 데 도움을 준다고 해요.
신경섬유가 운동에 적합한 근육 결정
스포츠에서 유전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근육이에요. 근육은 몸을 움직이는 원동력일 뿐 아니라 사람을 구성하는 조직 중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거든요. 근육은 수축 속도에 따라 '지근'과 '속근'으로 구분해요. 지근은 지구력이 좋지만 수축 속도가 느리고, 속근은 아주 빠르게 수축하지만 지구력이 부족하지요.
지근은 유산소 운동에 적합해요. 모세혈관이 촘촘하고, 지구력을 증가시키는 미토콘드리아가 많이 있기 때문이에요. 반면 속근은 순간적인 동작에 유리해요. 산소가 없는 상태에서도 당을 분해하는 효소가 다량 들어 있기 때문이에요. 실제로 단거리 선수의 근육은 대부분 속근으로 이뤄져 있고, 장거리 선수의 근육은 약 90%가 지근이에요.
근육의 성격을 결정하는 것은 신경섬유예요. 근육 다발에 어떤 신경섬유가 꽂혀 있는지에 따라 지근인지 속근인지 결정돼요. 과학자들은 유전자가 이 신경섬유 분포를 결정한다고 해요.
단거리·장거리 육상 선수 유전자 달라
그렇다면 속근이 많은 단거리 선수의 스피드에 영향을 미치는 유전자는 무엇일까요? 호주 시드니 웨스트미드어린이병원 신경근육연구소 캐서린 노스 박사는 골격근에 관여하는 유전자 'ACTN3'를 찾아냈어요. 이 유전자에는 RR형, RX형, XX형 염색체가 있어요.
RR형이 많고 XX형이 적을수록 단거리에 유리해요. R형은 폭발적인 속도와 힘을 내는 데 도움이 되는 '근섬유 형성 단백질'을 만들기 때문이에요. 연구에 따르면 단거리 선수 95%는 한 개 이상이 R형인 유전자를 갖고 있고, 50%는 X형을 갖고 있어요. 반면 장거리 선수는 76%만 한 개 이상 R형을 갖고 있고, 대신 69%가 X형을 갖고 있다고 해요. 유럽과 아시아인은 XX형이 50%, 육상에 강한 아프리카인은 15%만 XX형인 것으로 나타났어요.
한편 영국 런던대 휴 몽고메리 교수팀은 지구력과 관련된 유전자 'ACE'를 발견해 1998년 국제 학술지 '네이처'에 발표했어요. 이 유전자는 II, ID, DD형으로 나눌 수 있는데, 극한의 지구력을 가진 산악 등반가들은 II형이 DD형보다 5배쯤 많았어요. 남자 육상 장거리 종목을 휩쓸고 있는 케냐 선수들도 거의 II형 유전자를 가졌어요.
스위스 취리히대 등 국제 공동 연구팀은 흑인들이 단거리 육상 경기, 멀리뛰기, 농구 같은 종목에서 강세를 보이는 이유를 힘줄 세포 속 'E756del' 유전자 변이에서 찾았어요. 유전자 변이가 힘줄을 강화해 수퍼맨처럼 '빠르고 강하게' 힘을 발휘하도록 도와준다고 해요.
한국인 유전자, 격투기 종목에 유리
그렇다면 체구가 작은 우리나라 선수들은 어떤 종목에 유리한 유전자를 가졌을까요. 인하대 스포츠과학과 박동호 교수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운동 능력과 관련한 세로토닌(5-HTT 유전자)을 연구해 우리 선수들은 공격성이 요구되는 격투기 종목에 유리하다고 밝혔어요. 5-HTT 유전자의 유형에는 S형과 L형이 있는데요. SS형은 공격성이 강한 사람에게, LL형은 만성피로증후군 환자에게 많대요. 우리나라 선수들이 유도나 레슬링, 권투 같은 격투기 종목에서 메달을 많이 따는 건 외국 선수들보다 SS형이 많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또 우리나라는 양궁 강국이죠. 양궁 선수의 유전자 연구는 아직 이뤄지지 않아 밝혀진 건 없어요. 하지만 분명히 한국인에게 특별한 활쏘기 유전자가 있을 거라고 스포츠 과학자들은 말해요.
전문가들은 앞으로 운동선수의 '유전자 조작'이 새로운 도핑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해요. 근육을 만드는 유전자를 세포에 주입하면 근력이 비약적으로 향상할 수 있거든요. 하지만 운동 능력은 수많은 유전자가 상호작용해 영향을 미쳐요. 그래서 유전자 한두 개로 결론을 내리는 건 금물입니다. 스포츠 영웅은 타고난 재능에 피나는 노력이 더해질 때 비로소 빛을 발할 수 있답니다.
김형자 과학칼럼니스트 기획·구성=김윤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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