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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태일 목사
요즈음은 계절적으로 완연한 봄입니다. 추운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따뜻한 날씨, 어느덧 겨울 내내 죽었던 같은 가지에 싹이 나고 꽃망울을 터뜨리면서 꽃이 피어 만발하는 계절입니다. 이렇게 봄은 새로운 생명이 약동하는 계절입니다. 만물이 생동하며 방끗 웃는 계절입니다. 그래서 영어로 봄을 Spiring이라고 하는데 이 뜻은 Living, 즉 "살고 있다, 또는 약동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봄이 오는 3월을 가리켜 "March"라고 합니다. March란 "행진한다", "출발한다", "전진한다"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봄이 오면 먼 산에 눈이 녹아 내리고, 얼어붙은 대지 위에 따사로운 햇빛이 쌓여 부드러워지는 계절이며 모든 것이 새로운 출발을 시작하는 때라 하여 "March"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사랑의 찬가라 할 수 있는 본문 아가서의 말씀을 통하여 신앙의 봄을 맞이하고자 합니다. 다시 약진하는 신앙의 봄을 나누고자 합니다.
본문 아가서(雅歌書)는 아름다운 노래(Song of Songs)라는 뜻입니다. 아가서는 솔로몬왕이 술람미 여인과의 사랑과 행복을 노래한 책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과의 사랑의 관계, 신랑되신 예수님과 신부된 우리들, 교회와의 사랑과 행복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노래한 것이 아가서입니다.
1. 먼저 부르시는 주님의 초청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술람미 여인이 하는 말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 함께 가자" "Arise, My darling, my beautiful one, and come with me"
신랑인 솔로몬왕은 감출 수 없는 사랑의 가슴으로 신부, 술람미 여인을 부르고 있습니다. 까무잡잡한 시골 여인 술람미가 남의 눈에는 어떻게 보이든지 간에 솔로몬왕에게는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 귀여운 여인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랑되신 예수님께서도 그의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와 성도들을 향하여,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라고 부르십니다.
영원히 멸망받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사람이 되어 이 땅에 내려오사 십자가위에서 죽으기까지 사랑하신 주님이 신부된 교회를 향하여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라고 부르시니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부르심의 사랑을 알 때 성도는 행복합니다. 성도는 이 사랑의 샘에서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얻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대속의 사랑입니다. 보혈의 사랑입니다. 죽음에서 우리를 건져낸 구원의 사랑이며 십자가에서 심장을 터뜨린 생명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라고 부르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지극히 단순합니다.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한 주체할 수 없는 주님의 자원적 사랑이 우리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는 감격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기쁨과 희열이, 환희와 감동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깊은 애정의 정서는 우리의 지성과 의지 못지 않게 중요합니다.
신앙의 성숙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을 분리해서 생각하지 마십시오. 신앙은 곧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입니다. 신앙이 깊어진다고 하는 것은 이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이 사랑에 포로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이 사랑에 눈이 멀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양식 삼고 음료 삼아 순간을 살며 영원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신앙이 깊어진다는 것은 이 사랑 때문에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주님과는 바꿀 수 없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 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
다른 어떤 은혜 구하지 않으리
오직 주님만이 내 삶의 도움이시니
주의 얼굴보기 원합니다.
주님 사랑 해요 온 맘과 정성 다해
하나님의 신실한 친구되기 원합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더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던 시대에 교회가 복음의 참된 의미를 이해한 적이 없습니다. 성도들의 가슴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뜨거운 감동이 식었을 때 언제나 그 시대는 영육간에 핍절한 삶을 살았습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의 가슴에는 다 측량할 수는 없겠지만 나를 사랑하며 나를 찾아오는 주님의 음성이 들리고 있습니까? 우리를 향해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라고 부르시는 주님의 사랑의 음성이 들려지고 있습니까? 지금도 여전히 우리의 가슴이 저미듯 부어지던 하나님의 그 충만한 사랑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John Owen)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너무 모르는 것 같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너무 깊은 나머지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께 대하여 상사병에 걸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너무 많다" 이 시간 신앙의 봄을 맞이하는 우리 모두가 주님 사랑의 음성 듣기를 소원합니다.
2. 일어나 함께 가자(11-13절)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이렇게 부르시던 주님은 이제 “일어나 함께 가자” 말씀하심니다. 주님이 “일어나 함께 가자”고 부르시는 이유가 11절에서 13절까지 잘 나타나 있습니다.
1) 겨울이 지나가고 비도 그쳤기 때문입니다.(11절)
팔레스틴에는 겨울에 장마철이 계속됩니다. 여름철에도 장마는 지루한데 겨울의 지루한 장마철이 지나고 비가 그쳤을 때의 기쁨이라는 것은 형언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장마철에는 나들이도 하지 못하고 갇혀서 지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어둡고 추운 불모의 계절, 이 긴 겨울이 드디어 지나고 그 지루하고 차가운 폭풍의 겨울비도 그쳤으니, 봄이 왔으니 일어나 함께 가자고 초청합니다. 신선하고 따뜻한 봄바람을 쐬면서 신랑과 함께 동행하는 것이 얼마나 복되겠습니까?
주님이 오시기 전에는, 주님 만나기 전에는 차가운 겨울과도 같습니다. 이 겨울은 주님을 모르는 심령을 비유하기도 합니다. 마음의 심령이 열리지 않고 어두워져 있으며 기쁨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순간에는 이 겨울같은 시대가 지나가고 비도 그쳤으니, 구원의 시대가 왔으니 일어나 주님과 함께 천성을 향하여 나가자는 것입니다.
2)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하며 반구의 소리가 들리기 때문입니다.(12절)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니 겨울 내내 죽어서 다시는 꽃을 피울 것 같지 않던 화초에 아름다운 꽃이 만발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벌 나비가 춤추며 새들이 노래하는 참으로 좋은 시절을 의미합니다.
특별히 꽃이 핀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은혜를 많이 받은 심령은 굳은 모든 것들, 곧 죄악의 모든 것들이 녹아지고 마음이 활짝 열리고 기쁨이 넘치는 것입니다. 봄 기운같은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누구라도 달라지고 소생될 것을, 거듭나는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게 될 것을 말씀하심니다. 주님이 임하시는 곳에는 사막에도 꽃이 핍니다.(사35:1)
주님을 내 마음에 모시니까 마음에 은혜의 꽃이 활짝 피어 기쁨이 넘치므로 노래소리가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천국에서 주님과 영원한 삶을 위해 지상에서 신앙의 꽃을, 은혜의 꽃을 많이 피우도록 합시다. 이 때에 바로 새가 노래하며 반구의 소리가 들리는 은혜의 시대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반구는 산 비둘기로서 성령의 상징입니다. 성령이 오실때 신앙의 꽃을 아름답고 향기롭게 피우며, 또한 꿀송이보다 더 단 하나님의 말씀으로 역사하시니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인내와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입니다.(갈5:22-23) 신앙의 봄을 알리는 반구의 소리, 성령의 역사가 이제 우리 땅에도, 교회에 여기 저기, 이 부서 저 부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도 들리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하고 기쁘고 반갑습니까?
그래서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은 주님의 덕을 기리고 어떤 환경속에서라도 송축하는 은혜로 화합니다.
(찬송 495장)
높은 산이 거친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천국이니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받고
주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은혜의 기쁜 노래를 부르는 새가 되는 것입니다.
3) 무화과 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기 때문입니다.(13절)
무화과 나무의 푸른 열매가 익었다는 말은 향기를 발한다는 뜻으로 무화과가 익어서 향기를 발하는 것입니다. 과실은 무르 익으면 익은 냄새가 나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심령 깊은 곳에서 향기를 토하는 것같이 새로운 영적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또한 무화과는 종교의 표상으로서 꽃이 밖으로 피는 일이 없이 과실을 맺어 그 단 맛이 다른 과실에서는 맛보지 못하는 특유한 맛이 있습니다. 성도의 신앙생활이 이러해야 합니다. 어느 누구에게서도 볼 수 없는, 맛볼 수 없는 그 맛이 있습니다. 그 맛이 성도들에게서 느껴지기 시작함을 볼 때 얼마나 기쁨니까?
4) 포도나무는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하기 때문입니다.(13절)
포도나무는 신앙의 표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친히 포도나무요 우리는 그 가지라고 하셨습니다.(요15:5) 이 포도나무에 꽃이 피었다는 것은 신앙생활이 일어났음을 뜻합니다. 이 포도나무 꽃은 보기보다 향기가 좋습니다. 동시에 그 열매는 과실중에 왕입니다. 포도의 맛도 향기도 너무 좋습니다. 신앙의 꽃은 향기롭고 그 열매는 인간의 생명을 살림니다.
특별히 본문의 무화과 나무와 포도나무는 이스라엘,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하는 동시에 교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은혜의 꽃을 피움으로 은혜의 향기를 토하는 것입니다. 꽃은 열매의 전조입니다. 꽃이 피었다는 것은 열매의 시작을 알리는 것입니다. 꽃만 피는데 머므는 것이 아니라 열매를 많이 맺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성도가 은혜와 사랑만 받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구주의 은혜 주시는대로 각각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갈 때 눈으로 볼 수 있는 무화과 나무의 열매의 은혜를 주십니다. 그윽한 향기를 내는 포도나무 꽃과 같은 은혜를 주심니다. 귀로 들을 수 있는 반구의 소리, 비둘기 같은 성령의 역사, 복음을 외치는 소리, 구속의 은혜 때문에 부르는 놀라운 찬송 소리 더욱 주실 것입니다.
이제 신앙의 봄을 맞이하여 우리의 포도원에, 교회에 꽃이 피었고, 겨울도 지났고, 비도 그치고, 새들이 노래할 때가 이르렀으니 “일어나 함께 가자”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가시기를 바랍니다. 함께 가기 위하여 다같이 일어나야 합니다. 앉아 있는 사람, 누워있는 사람, 잠자고 있는 사람, 병든 사람, 죽은 사람 모두 일어나 함께 가야 합니다. 마음을 모으고 힘을 합하고 뜻을 묶고 발을 맞추어 함께 갑시다.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뜻이 계시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하여 역사를 이끌고 가시는 하나님께서 가자는 방향으로 함께 가야 하겠습니다. 누워 있을 수 없으며(찬 391장) 앉아 있거나 잠자고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앉아 있는 분들은 일어 서시기 바람니다. 누워 잠자는 영혼들은 깨어날 수 있기 바람니다. 병든 심령들은 치유의 역사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신랑되신 주님의 사랑의 요구입니다.(14-15절)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 함께 가자”
부르는 신랑은 이제 신부에게 사랑의 요구를 합니다. 사랑의 초청과 함께 신랑은 신부에게 사랑의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14-15)
1) 네 얼굴을 보게 하라(14절)
"바위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14절)
'얼굴'은 직역하면 '모양'입니다. 너의 모습을 보이라는 말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습을 보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얼굴을 주께로 향하여 들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보며 말씀하고 싶어하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보며 교제하고 싶어하십니다. 여러분! 날마다 부지런히 주님께 우리를 보이는 성도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예배에 빠지지 맙시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말고 열심히 모이시기 바람니다. 이것이 신랑되신 주님이 신부된 교회와 성도들에게 요구하시는 사랑입니다.
2) 네 소리를 듣게 하라.(14절)
"바위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14절)
'소리'는 '달다' 혹은 '기쁨을 주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주님을 기쁘게 하고 주님을 달콤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경의 가르침 모두가 다 주님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주님을 기쁘게 하는 소리는,
먼저는
(1) 기도의 생활입니다.
(2) 찬양의 생활입니다.
(3) 영혼 구원, 전도함으로 주님을 기쁘게 합니다.
(4) 우리의 비전을 이루실 주님을 믿음으로 주님을 기쁘게 합시다.
히11:6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4. 마지막 봄에는 유혹을 경고합니다.(15절)
봄은 청명한 날씨에 초록이 싱그럽게 새 꽃을 피우는 계절입니다. 아름다운 연인들이 자주 만나 사랑하기에 좋은 계절입니다. 결혼으로 이어지는 좋은 계절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과 함께 하기 좋은 계절입니다. 그러나 봄에는 이 사랑을 방해하는 대적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15절 말씀을 보면,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라"
팔레스틴 지방에는 '여우'(수아림)가 많습니다. 이 여우는 포도의 수확기가 되어 가면 극렬히 활동하는데 수확을 눈앞에 두고 망치게 만들어 버립니다. 포도원 사람들에게는 아주 못된 짐승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 작은 여우를 잡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우의 특성이 무엇입니까?
교활합니다. 의심이 많습니다. 외식적입니다.
여러분! 여기 포도원은 교회요, 성도를 가리킵니다.
우리 가운데, 내 심령속에 이런 여우가 자리잡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신앙의 결심을 뒤흔들어 버리는 여우, 교회 생활을,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여우, 심령에 평안을 깨트리는 여우, 가정에 화평을 부수는 여우, 이런 여우들을 잡아야 합니다.
포도원을, 성도의 신앙을 허는 작은 여우는 마음을 혼란케 하는 유혹들, 사랑의 방해자들을 말합니다. 교회의 신앙과 구원의 역사를 방해하는 모든 원인, 사단의 역사를 말하는데 그것은 외부적으로 들어 오는 것과 내부적으로 들어 오는 것 모두를 가리킴니다. 마귀의 유혹, 거짓 선지자, 불건전한 신앙생활, 신신학, 환난, 곤고, 위험, 적신, 칼입니다. 또 이것은 단체나 개인이 될 수도 있고, 문화 교육 풍속일 수도 있으며, 남일 수도 있고,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폭력으로 오기도 하고, 감언이설의 꾀임으로 오기도 합니다.
여하간 이 여우란 놈은 교활한 놈이니 갖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방해합니다. 이것을 제거해야 좋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여우를 온전히 잡아내야 신앙의 손상을 당하지 않고 결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잡되 작은 여우를 잡아야 합니다. 작을 때 잡아야지 큰 다음에는 잡기가 어렵습니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용납하면 점점 커져서 제거하지 못하고 그로 인하여 망하고 맙니다.
그 여우 때문에 주님과 우리의 사이가 손해를 보지 않았습니까?
새로운 시작을 결심하는 모든 성도들은 이제 그 여우를 잡으시기 바람니다. 그리고 새롭게 승리하며 사시기 바람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사랑의 마음과 관계를 위협하고 있는 작은 여우를 잡아야 합니다.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과의 사랑을 방해하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혼란케 하며, 우리의 심령을 약하게 만들고, 우리의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교회, 포도원에, 가정에, 내 심령을 헐기 위해 몰래 기어들어 오는 작은 여우를 잡아야 합니다. 들어 오는 것을 절대로 허용해서는 안됨니다. 비록 작은 여우이지만 큰 해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15절을 보면 여우를 잡아야 할 이유가 나옵니다. “우리 포도원에 꽃이 피었기 때문”입니다. 포도나무에 연한 포도가 달리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과수원에서는 꽃피는 시기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 때를 망치면 그 해 농사는 망쳐버리고 맘니다. 꽃이 피었는데 여우란 놈이 들어가서 뜯어 먹거나 꽃을 망친다면 과실은 맺지 못하게 됨니다.
교회의 꽃은 신앙생활이 한창 호화로이 전개되는 때를 말합니다.
이 꽃을 피지 못하도록 함은 신앙의 결실을 가져오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탄은 신앙의 꽃이 피는 시기에 가장 맹렬한 활동으로전개해 들어옴니다. 은혜의 역사가 크면 클수록 마귀도 역사를 더 크게 합니다.
선한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결심을 시작하려는 마음을 빼앗아 갑니다.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성숙한 신앙에 이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입니다. 사소한 죄악이라도 이겨야 합니다. 물리쳐야 합니다. 이제 겨우 가꾸어 놓은 포도원, 교회의 신앙의 꽃들이 떨어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신앙의 담이 작은 여우에 의하여 헐려서는 안됨니다. 내 신앙의 봄을 위하여서는 내 심령의 작은 여우를 경계해야 합니다. 작은 여우를 잡아야 합니다. 신앙의 꽃과 열매를 위해서는 조심해야 합니다.
16절에 보면 포도원에 여우가 들어 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한 까닭입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성도와 주님과의 관계는 서로 나눌수 없는 사랑의 관계입니다. 마귀는 주님과 성도가 함께 한 마음 한 뜻으로 나가는 것을 보고는 시기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은혜의 꽃이 피게 되는 것을 시기하여 갈라지게 멀어지게 하기 위해 들어 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이 시간 신앙의 봄을 맞이하시는 성도 여러분!
신랑되신 주님은 교회와 성도들을 향하여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 함께 가자”고 다정하게, 또는 강력하게 말씀하십니다. 세상주의를 버리고 일어나 오직 주님과 함께 가는 결단의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일어나 함께 가자는 귀한 음성 듣고 일어나 함께 가는 자들만이 예수님의 구원의 역사를 눈으로 보기도 합니다. 소리를 귀로 듣기도 합니다. 은혜의 향기를 맡기도 하고, 입으로 외치기도 합니다. 새같이 날기도 하고 입술로 찬양도 합니다.
우리는 이 시간 우리의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용납해서는 안됩니다. 신앙의 봄을 유혹하는 작은 여우에 대한 경고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지금은 우리의 사랑하는 포도원에, 교회에, 심령에 은혜의 꽃이 만발하게 피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나의 사랑하는 자(주님)가 내(교회,성도)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아름다운 역사가 있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