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혁명 (1688) | 크롬웰이 죽고, 프랑스로 피신했던 찰스 1세의 아들(찰스 2세)이 귀국하여, 왕이 됨으로써 왕정(군주정. 왕이 다스리는 나라. 군주 = 왕)으로 복고(과거로 되돌아 감. 복구) 되었다. → 찰스 2세와 그의 뒤를 이은, 제임스 2세는 가톨릭 신자였다. → 가톨릭(구교. 천주교) 보호 정책과 함께 전제정치(왕이 자기 마음대로 정치를 함)를 → 영국(잉글랜드)은 ‘국교회(신교) 중심’이었고, 스코틀랜드는 ‘청교도(신교) 중심’이었다. → 가톨릭 중심의 나라가 되는 것을 우려한, 국민들과 의회는 네덜란드의 오렌지 공(公) 윌리엄 3세와 결혼한 제임스 2세의 딸(메리)에게 왕이 될 것을 요청하였다. 이 둘은 칼뱅파 신교의 신자였다. → 메리와 윌리엄 3세가 군대를 이끌고 영국에 들어오자, 아버지 제임스 2세는 프랑스로 망명(달아남)하였다. 제임스 2세는 의회에 의해 폐위되었다. → 공동으로 왕위에 오른 월리엄과 메리는 의회의 동의(허락)를 받지 않고서는, 어떤 법도 만들지 않고, 어떤 세금도 부과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는 서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 이를 ‘권리장전(權利章典. 1689. 의회에 의한 왕권 제한)’이라고 한다. → 이로써 왕의 독재는 어려워지고, 피를 흘리지 않고 왕을 바꾸었다고 하여, 명예혁명(名譽革命)이라고 부른다. → 이로써 왕은 법의 아래에 존재하는,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가 실시되었다. 입헌군주제의 시행으로 절대왕정(군주가 어떠한 법률이나 기관에도 구속받지 않는 절대적 권한을 가지는 정치 체제)은 타파 되었다. → 입헌군주제는, 군주(君主. 왕)가 헌법(憲法. 법)에서 정한(立) 대로만 제한적으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정치체제를 말한다. → 명예혁명으로 의회중심의 입헌군주제가 수립되었다. → 의회중심의 입헌군주제는, 의회 민주주의의 발전으로 인한 정치적 안정과 산업 혁명에 바탕이 되었다. → 윌리엄의 뒤를 이언 ‘앤 여왕(제임스 2세의 둘째 딸. 메리의 동생)’은 자식이 없었다. 이에 독일의 하노버 가문에서 태어난 조지 1세가 왕이 되었다. 그는 독일 사람이었고, 영국 사정도 잘 몰랐고, 영어도 잘 하지 못했다. → 이에 의회가 중심이 되어, 다수의 의원(국회의원)을 차지한 정당이, 책임을 지고 정치를 하는 ‘내각 책임제’가 실시되었다. 의원이 다수인 당의 우두머리가 총리(수상)가 되어, 정치는 총리와 총리가 만든 내각(정부)이 책임을 지고 나라 일을 하였다. 국회의원(의원)이 다수인 정당이 내각을 구성하기에, ‘의원 내각제’라고도 한다. → 내각은 의회의 다수당에 의해 구성되고, 그 내각이 국왕을 대신하여 의회에 책임을 지는 내각 책임제가 확립되었다. →이로써 영국은 ‘왕은 군림(君臨) 하나 통치하지 않는다.’는 오늘날의 전통이 마련되었다. → 내각(內閣)은 국가의 행정권(內)을 담당하는, 최고 합의 기관(閣). 국무위원(국무회의를 구성하는 구성원) 또는 수상과 각원(장관)으로 구성하며, 내각 책임제 국가에서는 최고 정책 결정 기관이고, 대통령 중심제 국가에서는 대통령의 보좌ㆍ자문 기관이다 → 명예혁명은 혁명의 과정에서, 피 한 방울을 흘리지 않았기에 명예롭다고 하여 이렇게 부르게 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