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있는 부평이야기9 – 산곡동 근로자주택
어렸을 적 살던 마을은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집집이 마주보고 있었다. 좁은 골목길을 걸을 때 발자국 소리가 좋아 뛰어도 보고 빠르게 걸어도 보고 발자국 소리가 나지 않도록 살금살금 걸어도 봤던 재미있는 기억이 있다. 긴 시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을 받아내어 이곳저곳 패이고 깨진 바닥은 정겨웠고, 그 사이를 비집고 올라 온 풀꽃은 반가웠다. 해 질 무렵 집 밖으로 낸 연통에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면 누구네 집에서 저녁을 준비하는 지도 알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묏골마을’ 부평의 근·현대사 고스란히 간직
요즘에는 눈 돌리는 곳 마다 고개를 한껏 뒤로 젖혀야만 끝을 볼 수 있는 높은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아파트 단지 산책로는 마치 지금 막 만든 것인 마냥 깔끔하게 관리되고 있는데, 그 곳에 피어있는 꽃을 보고 있으면 좁은 골목길의 이름 없는 풀꽃을 바라 볼 때와는 사뭇 느낌이 다르다. ‘마을’은 사라졌고 그 자리를 ‘단지’가 채운 지는 꽤 오래전부터이다.
부평구 산곡동에 ‘묏골마을’이라 불리는 작은 마을이 있다. 마을 서편으로 원적산이 있어 ‘원적산 골짜기’라는 뜻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주변 모두가 고층 아파트인데 반해 이곳은 어렸을 적 필자가 기억하는 마을의 모습과 많은 부분이 비슷하다. 요즘에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빨간 벽돌로 지어진 집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고, 골목은 두 사람이 지나다니기에 불편함이 느껴질 정도로 비좁다. 마을을 걷다보면 작은 시장이 나온다. 도로 하나를 건너면 대형마트가 있어 시장에 물건을 사러 오는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이발소 삼색등’도 힘차게 돌아가고 있고, 방앗간의 문틈사이로 새어나오는 고소한 참기름 냄새를 봐서는 저 나름의 역할을 하고 있는 듯하다. 지금까지의 장면으로는 근래에는 사라져 버린 옛 마을을 추억할 수 있는 공간으로 이해 할 수 있지만, 사실 ‘묏골마을’은 부평의 근․현대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곳이다.
친일인사 조병상, 근로자 주택 500호 건설 계획
원적산을 옆에 두고 있어 자연적으로 부락이 형성 된 것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묏골마을’은 특별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세워진 마을이다. 1930년대 후반 부평에는 히로나카상공을 비롯하여 동양자동차 공장, 국산자동차 공장 등 근대식 공장이 하나 둘씩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 중 가장 큰 규모의 공장은 전쟁무기를 만들어내는 ‘일본육군조병창 제 1제조소’였다. 부평에 대규모 군수공장이 들어온다는 소식이 들리자 부평의 땅 값이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경성부 의원 조병상(조병상은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한 인물이다)을 중심으로 한 재계 인사들이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경인기업주식회사를 설립하고 경기도로부터 부평 내 토지 2만평을 분양 받아 근로자 주택 500호 건설을 계획하였다. 군수공장의 설립에 따라 부평에 많은 사람들이 이주할 것으로 보고 사업성이 높을 것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당시의 건설계획을 살펴보면 전체 13,013평의 부지에 8개의 블록을 만들었으며, 한 개의 블록에는 6동 88호를 배치하였다. 전체적으로 48동 704호의 조선식 목조가옥이 세워진 것이다. 1호 당 크기는 6.25평이었다. 40년대 초반에 완공을 이룬 경인기업주식회사의 주택에는 조병창의 노무자들이 입주하여 사택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경인기업주식회사 외에도 산곡동에 주택을 건설한 회사가 있다. 바로 조선주택영단이다. 조선주택영단은 1941년 조선총독부에서 설립한 법인체인데, 조선주택영단이 지은 주택을 조선영단주택 혹은 영단주택이라 부른다. 1944년 8월에 정지공사를 끝낸 조선주택영단은 부평 산곡동에 500호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으나 곧이어 맞이한 해방으로 인해 실현시키지 못했다. 해방 전 까지 조선주택영단이 건설 한 주택은 약 200여 호 정도였다.
경인기업주식회사와 조선주택영단의 주택 건설 사업의 표면적인 목적은 인구 급증에 따른 주택 부족의 해소였지만 실질적인 목적은 따로 있었다. 바로 한강이남 최대의 군수단지였던 조병창으로의 원활한 노동력 공급을 위한 것이었다.
▲ 산곡동 영단주택지 구성도
광복 후 마을의 변화
광복 후 인천에 들어 온 미군은 일본이 남겨 놓은 시설과 물자를 그대로 사용했다. 미군은 옛 조병창을 애스컴시티(ASCOM City)로 이름 지었으며, 이후 미군을 위한 새로운 군수기지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면서 마을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일어난 변화는 마을 구성원이었다. 해방 후 조병창 노무자들은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갔고, 빈 자리는 애스컴에서 근무하는 한국인 종업원들로 채워졌다. 한국인 종업원들 뿐만 아니라 미군들의 현지처 역할을 했던 소위 ‘양공주’ ‘양색시’라 불리는 여성들이 새로운 주인으로 자리를 잡아나갔다.
산곡시장이 활기를 띠게 된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미군PX에서 판매되는 물건이 시장으로 흘러나와 활발하게 거래되었다. ‘양공주’ ‘양색시’들이 중간 유통의 역할을 한 것이다. 지금이야 상점 몇 개와 가판 몇 개가 전부 인 작은 규모의 모습으로 남아있지만 당시에는 품질 좋은 미제물품을 구할 수 있는 핫 플레이스가 바로 이곳이었다.
또 한 번의 변화
묏골마을은 1973년 애스컴 부대가 해체된 후 또 한 번의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직장을 잃은 미군부대 종업원들과 ‘양공주’ ‘양색시’들은 새로운 터전을 찾기 위해 이곳을 떠났다. 그리지난 번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주인이 묏골마을을 찾았다. 바로 대우자동차 부평공장과 한국베아링 그리고 부평공단에서 근무하는 노동자들이었다. 각 가정의 빨랫줄에 공장 작업복이 널려져 있는 모습은 당시 묏골마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묏골마을은 경인기업주식회사와 조선주택영단에 의해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후 조병창과 미군기지를 거쳐 산업화 시대의 공장들과 함께 역사적 흐름을 같이해 왔다. 그리고 영단주택은 때마다 주인을 달리하며 근로자 주택으로서의 역할을 해왔다.
현재 묏골마을에서는 경인기업주식회사가 건설한 주택은 ‘구사택’으로 조선주택영단이 건설한 주택은 ‘신사택’으로 주민들에게 불리며 긴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살면서 조금씩 개·보수를 하여 원래의 모습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그래도 제법 옛 모습을 간직한 채 남아있다.
▲ 경인기업주식회사가 건설한 구사택의 모습 ▲ 조선주택영단이 건설한 신사택의 골목 모습
필자에게는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좁은 골목길은 사실 안전한 주거환경을 방해하는 원인이 된다. 건축물의 노후와 그에 따른 안전문제를 이유로 이 지역의 개발에 대한 목소리가 높다. 그러나 나이 많은(?) 건축물을 다 밀어버리고 새 건물을 짓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방법이다. 묏골마을의 근로자 주택은 단순히 나이 많은 건축물이 아니라 그 안에 많은 역사적 이야기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마을의 개발 이전에 부평의 역사적 기억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묏골마을을 어떻게 보존하고 재생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 묏골마을 전봇대 위 복잡하게 얽혀있는 전선들이
마치 마을의 지난 시간을 보여주고 있는 듯 하다.
그나저나 누군가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 걸고 싸우고 있을 때 부평에 대규모 군수공장이 들어선다는 소식에 재빠르게 사업성을 계산하고 날름 경인기업주식회사를 세운 조병상의 이야기는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부동산 투기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 보다 꽤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나보다.
글· 사진 김정아 부평역사박물관 총괄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