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 리 글 과 공 동 체 라 면?
2012-07
나는 무엇을 위하여 살아가는가?
박병민 목사(새터공동체)
어떤 남자가 길을 가다가 요술 램프를 줍게 되었다. 그 남자는 어느 책에서 본대로 요술 램프를 문질렀다. 그러자 램프의 요정이 나오게 됐다. 그러면서 그 요정은 그 남자에게 “여기에 돈과 여자와 그리고 결혼 이라는 것들이 각각 있는데, 그 가운데서 갖고 싶은 소원 한 가지만 들어 들이겠습니다”라고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남자는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돈을 선택하려고 들자면, 그것은 가질 수 있으나, 어떤 여자를 그 이후에 만나게 된다면, 여자와 친구로만 지내기에는 그저 그런 것에 불과하게 될 것이고, 그런 사이의 여자가 아닌, 바로 결혼도 하게 되는, 그래서 그 사람은 모두를 가지면서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는 수 없이 모든 것들을 다 불러 보고 나서, 모두가 나오게 되면 좋고,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이나 나오게 되는 것을 갖기로, 포기하다 시피 그만 말을 하고 말았다. 그 남자는 횡재를 기대하는 반신반의의 속에서도 “돈.... 여자.... 결혼....”이라고 열심히 각각 그렇게 말들을 늘어놓듯 하게 됐다. 그러자 그 남자의 눈앞에는 그의 기대에 흡족하게도 돈 여자 결혼이 모두 다 쏘다지듯 나오게 되었는데, 그 뜻인즉 “돈(돌은) 여자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는얘기다. 사람들에게는 너나 나나 양 두 손 모두를 가지고 떡을 움켜쥐려고 든다. 태어 난지 1년 된 아기의 돌잡이의 모습 속에서는 그렇지가 않고, 하나만을 잡으려는 듯하다가, 그 아이가 점점 더 잘아가면서 그런 모습들은 살아져가게 된다. 그런 모습을 여실히 볼 수 있는 곳은 어떤 모임 행사 끝에서 이루어지게 되는 경품추첨에서 호기심어린 눈으로 가득 차있는 사람들의 적극적인 표정 속에서 그런 모습을 읽을 수 있다. 나도 그와 별다른 예외는 아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천하만국에 모든 것을 다 지니고서 사는 사람은 없다. 그러면서도 부족한 것을 스스로 자인하거나 포기하는 삶의 아름다움은 찾아보기가 매우 힘들다. 신성일 선생님의 부인인 엄앵란 여사가 한말이 기억난다. “203호에 사는 사람이나 306호에 사는 사람이나, 사람 살아가는 모습들은 다 그저 그렇게 똑같다”는 말이다. 그것은 다들 매양 비슷비슷 하여서 “지지고 볶아가면서 살아가는 모습들이”, 대전의 보문산 공원에 만들어져 있는 비둘기 아파트 안에서 살아가는 그 비둘기의 모습들을 보는 듯싶다. 세상에서 사람들이 삶의 문제를 지니지 않은 사람은 한사람도 없다. 재미난 얘기를 꺼내자면, 인근 마을의 표 목사님으로부터 전하여 들은 말인데, 소위 잘산다는 집 안 식구들은 네 명이라면, 네 대의 승용차량을 갖추어 놓고, 각각 차 한 대에 한명씩 각자 나누어 타고 다니게 되고, 굳이 하자고 들자면 각각의 차량에 다른 이웃 사람들을 함께 태우고 다닌단다. 왜냐하면 식구 넷이서 한 차를 타고 질주 하다가 참변을 당하는 꼴이 발발하게 되면 함께 몰살당하기는 싫다는 계산속에서 그렇게 살아가는 예측 불가의 세상길을 사람들은 나서고 있다. 어떤 극소수의 사람은 맞닥트려지는 그 문제점들의 실타래를 하나하나 풀어가며 살아가는 그 묘미 함을 만끽해가듯 사는 사람들은 천에 하나 있을까? 말까? 한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바람결을 거스르지 아니하는 도사(道士)들일 것이다. 대부분의 땅바닥을 디디며 살아가는 이들은 아픈 만큼 성숙해져 가는 일상 일들의 반복일 것이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만사형통스러운 일들만 눈앞에서 주어지고 펼쳐진다면, 아마 그런 사람은 태만(怠慢)이라는 것을 불러드려서 그것과 같이 지내게 된다. 사람들은 나태하려고 들면 그 한도가 백지수표를 지닌 사람처럼 끝도 없이 진행해 간다. 사람들은 원님 덕분에 나팔 불자고 들것이고, 철에 맞지 않은 겨울철의 이야기 이지만 “배부르고 등 따듯하게 되면, 배를 뚜드려가며 살려고 들것이다(누가복음 12:13-21). 그러한 사건이 인류의 최초의 사람이 벌려가서 불러드린 선악과(善惡果)의 사건이다(창세기 3:1-21). 그래서 그 결과로 정 반대의 일로 치닫게 되어서 남자에게는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창세기 3:18-19上). 그래서 바울 선생님이 이 해답을 가져다준다.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립보서 4:11下-12). 태만과 안일무사에서 탈피하는 삶의 자세가 아주 요청되는 때이다.
어제는 보리농사를 지어서 그것을 거두어들였음에 감사하게 되는, 그러면서 올해도 전반기를 잘 보내게 되어서 감사한다는 모습의 표현으로 맥추감사절(麥秋感謝節)의 예배 모임을 가졌다. 어렸을 때에 누런 보릿대를 가지고 여치 집을 만들었던 것이 생각이 되어서 지지난 해에는 들어오는 길옆에 인삼농사를 할 요량으로, 밭에 보리를 심어서, 그 새순이 어느덧 시간과 더불어 잘 잘아가서 열매가 누렇게 된 보리 알곡이 탱글탱글하기 시작하면, 그 보리밭을 갈아엎어대는 희생을 치러가며, 엎어진 보리의 줄기와 열매들을 통째로 흙과 뒤섞어 밭의 거름으로 사용하려고 한다. 나는 보리농사를 짓는 밭에 찾아들어가 보릿대를 잘라 여치집을만들어보려고 실로 묶어 매어 열십자 형태로 시작하여 각각 한 곳의 굵다란 곳에 가느다란 쪽의 보릿대를 한 개씩 끼워가고 나머지 한 곳에는 가느다란 보릿대 두 개를 꽂아서, 그 곳으로부터 시작하여 직각으로 된 옆의 방향으로 계속 돌려가면서 네모 모양으로 한층한층 쌓아 가면서, 모질라져 가는 곳은 다른 보릿대를 끼워 이어가며 계속해서 돌아가며 진행 해가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말과 같이 잘 만들어지지가 않는다. 굽혀서 옆의 것으로 옮겨가면 힘을 받지를 못하고 빠져나가기 일쑤이다. 만들어보려 하였으나 생각처럼 그렇게 잘 만들어 지지가 않았다. 그 예전에 여치 집을 만들어서 지붕의 처마 밑에 걸리어진 채 바람결에 간드랑간드랑 흔들거리는 모습이 아련히 아름답게 떠오른다. 보릿대를 구하기 어려우면 두세 가지의 색을 가지고 플라스틱 빨대를 가지고 만들어도 가능하다. 우리는 작은 것으로부터, 그리고 어떻게 보면 지금 살아서 활동하고 있다는 것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돈, 여자, 결혼 그 외에 등등의 다른 여러 것들을 소유하고 싶은 사람의 욕망은 끝도 한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먼저도 얘기했듯이 에맄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라는 자기 가치관의 세워짐이 필요하리라 여겨진다. 소유에 매진하다 보면 자기 존재감의 참된 아름다움은 헌신짝처럼 여겨가며 아귀다툼 속에서 허우적거려가며 손아귀에 움켜쥐기에 바쁜 인생이 되고 마는, 바로 자기 존재감과 자기 정체감의 의미를 잃어버려서 퇴색되고 말아버린, 자기의 존재감을 상실해버린 퇴락이 함께 동반된 석고형태의 사람으로 굳어지거나, 또 다르게는 이와는 정반대의 극을 걷게 되는 “모 아니면 도라는 식의” 살이로 내몰리게 되어서 굳이 말을 끄집어 오자면, 폭주족과 같은 광란의 질주로 치닫는 삶으로 전락하게 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성서는 그렇게 말을 한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라고 한다(디모데전서 6:7-8).
우리는 무엇에 관심을 같게 되는가? 무엇인가에 관심을 같게 되는 것은 살아있음의 증거이고, 더 나아가서는 살아서 움직이며 가고 있다는 바로 생동이라는 힘의 감각을 지닌 꿈틀거려 댐이다. 시내의 길거리를 지나치며 가노라면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시간과 함께, 흔들리듯 지나치는 세월을 그저 따라만 가듯 사는 사람들이 적지가 않다. 나는 어느 모임에서 다음과 같은 노래를, 거기 계신 분들에 의지하여 함께 부르곤 했다. “잃어버린 것들에 애달파 하지 않으며.... 살아 있는 것들에 연연하지 않으며, 살아가는 일에 탐욕하지 않으며.... 나의 나됨 버리고 오직 주님 내 안에... 살아 있는 것들이 되게 하옵소서... 가난해도 비굴하지 않으며, 부요해도 오만하지 않으며, 모두 나를 떠나도 외로워하지 않으며... 억울한 일 당해도 원통하지 않으며, 소중한 것 상실해도 절망 하지 않으며, 오늘 살아있음에 감사하게하소서... /가난해도 비굴하지 않으며, 부요해도 오만하지 않으며, 모두 나를 떠나도 외로워하지 않으며... 억울한 일 당해도 원통하지 않으며, 소중한 것 상실해도 절망 하지 않으며../ (반복) 오늘 살아있음에 감사하게하소서... 오늘 살아있음에 감사하게하소서...”(반복). 또 이어서 말하자면 -고든&게일 맥도날드의 ‘마음과 마음이 이어질 때’라는 글 중에서- “용서로 얻는 자유”라는 얘기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과거에 받은 상처 때문에, 부모를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지나간 문제를 가지고 몇 년이고, 상대를 용납하지 않는 부부들에게서, 우리는 그들이 안고 살아가는 고통을 보곤 한다. 해결되지 않은 관계의 무거운 짐에 눌려, 신뢰와 믿음은 깎여 가고 자유와 기쁨은 사라진다. 그러나 용서가 있는 곳에는 자유가 뒤 따른다. 우리는 인간이 하나님께 가장 가까워지는 때는, 바로 자비를 주고받는 과정에 있을 때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사람이나, 하나님에게도 마치 한가지이다. 바로 그 하나님에게로 이런 모습의 잘아감으로 다가들어야 하겠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면, 뒤 이어서는 그에게 고백을 하게 되고, 또 그 다음으로 이어서는 행동으로 옮기게 된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로새서 3:15).
공 동 체 소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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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터 공동체 가족
예성만 김진구 박성찬 조창봉 이은주 김복순 지명수 권희숙 주송례 진영택 김정화 박소웅 박정임 라홍채 최성재 최영애 정이삭 박종만 박병민 진선미 박한솔 박진솔
* 여러 가지의 육신과 정신적 아픔 중에 있는 새터공동체 식구들의 건강한 몸이 되기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세요.
* 2012년 7월 11일에 금산군 일원에 산재한 사회복지시설들에 입소하신 모든 분들을 대상으로 금산우리성폭력상담소와(황동철소장님) 금산군청사회복지과와(임영관선생님) 금산경찰서에서 공동으로 입소하신 분들의 생활 모습들을 경청하고 가셨습니다. 우리 공동체는 건전하다는 소장님으로부터 좋은 이야기를 듣게 되어서 나름대로 흐뭇하였습니다.
☻ 기도하며 함께 하신 분들
신평반점(문창준).금성교회.충전교회.정이삭.최영애.라홍채.박종만.이은주.튼튼영어대전동구(연월순외14인).진명구.신평교회.살림교회(박상용외13인).반석전원교회.채윤기(박현실).김기홍.양오석.주식회사EG(이광형).그리스도의집(금산파리바게트.옹인숙.3회).신건태.김복순.수영교회.대덕교회.오미순.김상수.금산주부클럽(4인).금산시각장애인협회(박지한외3인.8회).이소연.오정교회(최세영).금산경찰서교통계(백윤현).사랑의쌀나눔공동체(장진성).김병선(신평리).대한적십자금산군추부봉사회(2인).김용환(최정숙).임영호외1인(금산복수).금산군북초등학교자모회(4인).금산군모란회(4인).금산군북용문초등학교(조기숙외8인)
(호칭은 생략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