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선명 평전 제9장 언론은 정도를 걸어야 한다 3. 아시아의 등불 일본의 「세까이닛뽀」와 한국의 「세계일보」 문선명이 창간한 첫 번째 신문은 한국이나 미국이 아닌 일본의 「세까이닛뽀 世界日報」다. 일본에 사는 재일동포를 비롯해 일본 신도들이 점차 늘어나고 좌익 세력이 확대되는 일본 사회에서 자유의 이념을 지키는 신문이 필요해졌다. 그러나 일본에서 신문을 창간하고 언론사를 운영해 나가는 일은 힘겨운 오르막길을 오르는 것과 같았다.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아시아 대륙에 다가오고 있는 공산화 위협이었다.
1975년 1월, 문선명이 자유 이념에 바탕을 둔 신문을 창간하려 했을 때 베트남은 전 세계에 우울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월맹에 의해 베트남이 곧 공산화 될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한국전쟁과 북한에서의 옥중 생활을 체험했기에 공산 치하에 들어가면 그 즉시 피비린내 나는 대학살과 그로부터 탈출하려는 난민들이 홍수처럼 밀려 나올 것임을 알고 있었다. 대학살은 평범한 사람들까지 이유없이 희생당하는 눈물의 참사이다. 문선명은 선량한 사람들이 세계로부터 외면당하지 않기를 진실로 바랐다.
이러한 마음으로 새로운 신문을 창간한다는 소식이 들리자 이곳저곳에서 명망 있는 기자들과 직원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마이니치 毎日新聞」, 「요미우리 読売新聞」, 「아사히 朝日新聞」, 「산케이 産経」 등과 같은 유명 신문사에서 은퇴한 편집자와 기자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세까이닛뽀 1975년 1월, 많은 사람들의 후원과 함께 도쿄에서 창간되었다. 자유 이념을 지키고 정도를 걷는 언론으로서의 역사적 발걸음을 내딛었지만 신문의 앞날을 험난하기 그지없었다. 일본 내의 좌익단체들은 미국에 있는 단체들과는 달랐다. 그들은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고 소송이 끊이지 않았으며 폭력까지도 불사했다. 그럴수록 선량한 시민들과 반공단체들로부터 더 많은 지지를 받았다.
「세까이닛뽀」가 창간되고 4개월 후, 결국 베트남이 무너졌다. 그러나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캄보디아도 공산주의자에 손에 넘어갔으며 대학살이 자행되었고 보트피플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소련은 인간적인 참상은 외면한 채 그 여세를 몰아 일본마저도 공산화시키기 위해 온힘을 기울였다. 그 시절은 일본 역사에서 아주 위험한 시기였다. 이러한 때 「세까이닛뽀」가 어둠을 통과해 나갈 수 있는 횃불 역할을 했다.
또한 남과 북의 갈등에서도 「세까이닛뽀」는 그 책임을 다 했다. 많은 난민들이 보트를 타고 북한를 탈출했던 1987년 초에 한국과 북한, 일본은 첨예하게 대립했다. 북한 당국은 일본이 난민들의 입항을 불허하고 북한으로 즉시 되돌려 보내줄 것을 요구했다. 일본 정부가 이를 거부하자 일본에 거주하는 조총련 사람들은 매일 일본 정부와 「세까이닛뽀」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일본 정부는 점차 흔들리기 시작했고 북한의 요구를 받아들이려는 기미가 보였다. 만일 난민들이 강제로 북한에 송환되면 그들의 운명은 불 보듯 빤했다. 「세까이닛뽀」는 전국적인 반대 캠페인을 펼쳤고 일본 지도자들을 격려하여 북한의 요구를 거절하도록 했다. 그러한 애끓는 노력으로 난민들은 한국으로 망명할 수 있게 됐다.
「세까이닛뽀」의 초창기 직원들은 작고 번잡한 사무실에서 일해야 했지만 지극히 헌신적이었다. 그들은 좌익단체의 데모와 소송을 이겨내면서 취재 기자로서 든든하게 성장했으며 「세까이닛뽀」를 신뢰 받는 신문으로 만들었다. 정치・경제적 압력이나 청탁, 뇌물 등을 애당초 알지 못하는 그들은 오늘도 전 세계를 발로 뛰면서 바른 길을 제시하는 언론인으로서의 사명을 다하고 있다. 「세까이닛뽀」는매일 발행하는 일간지 외에도 주간 「サンデ_ 世界日報」, 월간 「ビュ_ポイント」를 발행한다. 「세까이닛뽀」는 미래에 문선명이 창간하게 될 모든 언론들이 따라야 할 전통을 만들었다. 그것은 두려움없이 진실을 보도해 명성을 얻는 것이었다.
일찍이 일본과 미국에서 신문을 창간한 것에 비해 정작 한국에서는 신문 발행이 늦어졌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으나 1987년 이전만 해도 한국에서는 언론이 정부의 통제를 받았기에 신문 창간이 쉽지 않았다. 6.29선언 이후 언론자유가 활성화 되면서 신문 발간이 규제를 받지 않자 문선명은 오랫동안 준비해왔던 「세계일보」의 창간에 들어갔다. 문선명은 신문이 걸어갈 길을 밝히는 사시(社是)를 '애천, 애인, 애국'으로 정했다. 이는 문선명의 교육이념과 같았으며 신문 역시 사람들을 가르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똑같이 정했다. 사지(社旨)는 '조국통일의 정론, 민족정기의 발양, 도의세계의 구현'을 지표로 '올바른 신문, 창조적 신문, 개방적 신문'을 표방했다.
일본에서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이념의 신문을 창간한다는 소식이 들리자 내로라하는 많은 인재들이 몰려들었다. 1년여의 준비 끝에 1989년 2월 1일 창간호를 발간한 「세계일보」는 16면 조간, 세로쓰기로 120만 부를 찍었다. 창간 기념식은 1월 31일 서울 용산의 본사 대강당에서 직원들과 각계 인사 1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문선명은 그 자리에서 창설자로서 '안팎이 하나되자'라는 제목으로 격려의 말을 했다.
"한국 통일을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되겠어요. 방방곡곡 집집마다 드나들어야 돼요. 무엇 가지고? 신문으로! 세계일보를 보는 사람은 그것이 천주일보의 주인이에요. 사랑의 일보를 보는 거예요. 사랑의 보금자리를 옮겨주기 위한 하늘나라의 사자(使者)들이예요. 여기 사훈이 '애천, 애인, 애국'이에요. 이것도 마찬가지로 안팎이에요. 애천 하면, 아무리 하늘이 크더라도 그건 외적이에요. 하나님을 움직이고 하나님을 오라고 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것이 사랑이에요. 그 다음, 애인할 때, 인(人)은 개인이 아니에요. 인류를 말하는 겁니다. 인류가 사랑을 따라가야 돼요. 애국, 나라는 딴 사람 따라가지 않아요. 나라를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을 따라갑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은 앞으로 손을 잡고 이 나라와 이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언론을 만들어야 합니다."
문선명은 그동안 통일교 지도자들이 과학자대회와 언론인대회, 세계교수협의회 등 다양한 세계적 대회를 통해 축적한 지혜와 지식을 「세계일보」에 쏟아붓기를 원했다. 그동안 쌓아온 정상의 기준을 한국의 언론에 적용하기를 바랐다. 그런 만큼 세계로 나갈 것을 요청했다.그 자신이 세계와 더불어 싸워 나왔기에 「세계일보」도 세계를 품에 안은 신문이 되기를 바랐다.
창간 기념 리셥션은 2월22일에 서울 신라호텔에서 정계, 재계, 언론계 인사들과 주한 외교사절단 등 1,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미국 부시 대통령은 특사를 보내 창간을 축하했다. 문선명은 전날 특사를 만나 미국정세와 세계정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통일교가 중국에서 진행하는 사업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했다.
「세계일보」는 창간 이후 신문 발행 외에도 많은 일을 했다. 월간지 「세계여성」, 「세계와 나」, 「쉬크」 등을 발행했으며, 세계광고대상, 세계농업기술상, 음악콩쿠르대회, 남북통일 기원 국제마라톤대회, 바둑기성전 등을 통해 광고와 농업, 음악, 스포츠 발전에 기여했다. 또 세계청소년문학상과 세계문학상을 실시해 한국문학을 이끌어가는 유망한 작가들을 발굴・ 배출했다.
「세계일보」의 기자들은 투철한 기자 정신으로 언제나 우리 사회의 부조리와 어두운 곳을 파헤치며 결코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다. 1991년 세계일보는 노태우정부 최대의 권력형 비리인 수서택지분양 특혜 사건을 특종 보도했다. 정・경・관이 유착한 대형 스캔들이었는데 이 사건은 세계일보 최고의 특종으로 기록되고 있다. 2001년 '장애인 부재자 투표 부정 파문' 기사로 제5회 국제엠네스티 언론상을 수상했으며, 2004년 특별기획 '기록이 없는 나라'로 한국신문상을 받았다. 특히 「세계일보」가 한국언론사의 새 지평을 연 '탐사보도 시리즈'는 오늘날 신문이 나아갈 길을 잘 보여주는 기사다. 매일 벌어지는 사건을 맹목적으로 내보내는 습성에서 탈피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현상을 집중적으로 취재하는 탐사보도는 과연 현대를 살아가는 한국인과 세계인이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으며 미래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깨우쳐주었다.
그렇게 20여 년을 넘기면서 「세계일보」는 어느 단체나 기관, 기업으로부터 압력에 굴하거나 청탁을 받거나, 편파적으로 보도하지 않는 정직한 신문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것은 문선명이 처음부터 주창해온 신문의 가치였다. 또 초창기에는 적자로 허덕였으나 이제는 스스로의 힘으로 운영을 해나가는 굴지의 신문사가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