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19] 유광렬(柳光烈) - 임의 날에, 나의 날에 6. 입교, 한가지 잘못 안 것이 있었다 - 1
1 그런데 그때 채 한 가지 깨치지 못한 것이 있었다. 밤이 깜깜하다가도 동산 위에 서광이 한 점만 떠올랐다 하면 순간에 천지가 밝아오듯이, 나는 세상이 이렇게 어둡지만 재림 주님만 나타나면 순간 인심이 바뀌고 사람은 새사람이 되어 그 즉시 지상천국으로 화하는 것으로 믿었다. 그것이 잘못 깨달은 점이다.
2 후일 우리 교회 와서야 천국이란 주님이 갖다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지도하에 우리가 만들어야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다가 1954년 12월 19일, 즉 겨울방학 전날 주일(主日) 나는 통일교회에 입교하였다.
3 황환채 씨의 인도에 의해서였다. 입교 무렵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었고 게다가 집이 교회서 가까운 데 있었고 또 입교일이 방학 전날이었고 보면 40일 동안 유효원 선생의 원리 강의를 계속 들을 수 있어 어쩌면 밤낮 40일 수련을 받은 첫 사람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4 그것이 필경 첫날밤이었을 것이다. 황환채 씨가 나에 관해서 선생님께 소개하기를 서울대 학생이고 시인이고 기독교인이라고 하였다. 선생님께서는 소개의 말을 다 들으시고 “그래 유광렬 씨는 어쩌다가 또 이런 델 왔소? 여기는 남들이 다 돌았다고 하고, 미쳤다고 하는 곳인데” 듣던 중 귀를 당기는 말씀이었다.
5 “사람이 한번 바로만 미칠 수 있다면 오죽이나 좋겠습니까” 하고 반문하였다. 선생님은 “옳소, 우리도 그거요, 바로 한번 미쳐보자 그거요” 하시고는 다음과 같은 설명을 하셨다.
6 남들이 우리를 보고 미쳤다는 것은 말인즉 맞는 말이오, 당신들은 벌써 다 미쳤구려, 다시 말하면 벌써 갈 곳까지 다 갔구려. 우리는 아직도 이렇게 미치지(及) 못했는데 하는 뜻이어서 옳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이고, 우리를 보고 돌았다는 것은 자기네들이 당초부터 잘못 돈 것을 모르고 하는 말이오,
7 애당초 인류의 조상이 타락치 않았다면 모두 다 즉 전인류가 바른 쪽으로 돌았을 것인데 타락으로 인해서 전인류가 다 정신없이 외로 돌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한 열아문 명이 바른 쪽에서 돌아오고 있으니까, 다수의 자기들이 보기에는 돈 사람처럼 보여 그렇게 말하나 사실은 다수의 자기들이 근본적으로 잘못 돌고 있음을 모르고 하는 말일 뿐이오.
8 이 설명을 들으니까 귀가 확 뚫리는 느낌이었다. 나는 참으로 미치고 싶었다. 인간의 체면을 아주 잃어버릴 만큼 미치고 싶었다. 그러면 바른 말 좀 실컷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원리를 듣고 마디 마디 납득이 갔다.
9 특히 말세를 설명하는데 유 선생이 어떻게 그렇게 고중을 가지가지로 하면서 하시는지 통쾌하기 이를 데 없었다. 들어오니까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라는 명칭과 협회장에 유효원 선생이라는 것과 그 위에 선생님이 창시자로 계신 것뿐 아무 조직도 돼 있지 않았다.
10 그해 1954년 말에 우리가 성화기독학생회를 만들고 1955년 봄에 성화청년회를 만들고 1960년에 비로소 우리는 협회기구를 확립했던 것이다.
11 1955년 초경이었다. 나는 함석헌 선생의 ‘뜻으로 본 한국 역사’를 읽고 그 저자가 놀라운 영적 혜안을 가진 분으로 크게 감탄한 나머지 어느 날 밤을 새워 ‘선생은 한국의 세례 요한입니다’라고 하는 원고지 100매 안팎 되는 긴 서찰을 썼었다.
12 그랬다가 그 이튿날 저녁 우리 대학(師大)에서 있은, 내가 사회한 기독학생회 졸업생 환송예배에서 초청강사로 마침 함 선생을 모셨기로, 산회에 즈음하여 선생의 손에 그 전날 밤 쓴 장문의 편지를 쥐어드렸다. 그로 해서 후일 종교계사(잡지사)에서 함 선생과 맞닥뜨려 크게 언쟁을 벌인 일이 있다.
13 함 선생은 내가 세례요한이라면 주는 누구란 말이냐 어서 좀 대보라고 언성을 높이셨던 것이다. 그해 흥인동 교회에서 선생님의 탄신 35주년 축하행사가 있었는데, 그때 나는 정성껏 기도하여 35행으로 된 축탄시 ‘임의 날에 드리나이다’를 써 바쳤다.
14 한 줄 더해도 못 쓰고 한 줄 덜해도 안될 것 같은 짜임새의 시가 되어나와 이상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해 3월 27일 성화청년회가 창설되던 날 잡지 ‘성화’를 창간하고 내가 머리말을 쓴 일이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성화청년회가를 공모, 내 작품이 당선된 것도 잊지 못한다.
15 어느 날은 내가 새로 방을 옮기는데, 형편상 일부밖에 대주지 못한다고 몹시 미안해하시면서 누구에게 매월 이잣돈 얼마, 누구에게 매월 생활비 얼마를 각각 대주지 않으면 안 되는 사정이라서 그렇다고 설명하셨다. |
첫댓글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