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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오늘" 예수님 따라 낙원 가는 법>의 줄거리:
예수님 좌우편에서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한 행악자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고 명확하게 선언하십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을 향하여 취한 태도와 말을 통해 우리도 바로 "오늘" 낙원에 이르는 길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또 그러라고 누가복음은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고요. 관건은 십자가 죽음이 얼마나 철저한가입니다.
“오늘” 예수님 따라 낙원 가는 법
(누가복음 23장 39절~43절)
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오늘” 예수님 따라 낙원 가는 법>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오늘” 예수님 따라 낙원 가는 법
예수님께서 한 행악자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행악자가 예수님 앞에서 무엇을 했기에 이러한 확정적 선언을 이끌어낼 수 있었는지에 대해 역점을 두고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낙원과 음부 그리고 천국과 지옥에 대해 명확한 구분을 갖고 계십니까?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차원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는 곧 생각하고 느끼고 뜻하는 것이 시간과 공간에 국한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시간과 공간 바깥에 존재하는 낙원과 음부 그리고 천국과 지옥에 대해 정확하게 아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언어 또한 시간과 공간 안에 갇혀있는 것이기에 시간과 공간 바깥의 상황에 대해서 묘사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예수님이 영원 전부터 삼위일체 상태로 거하시던 곳이 천국입니다. 이 천국은 예수님의 아버지 집으로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이고 천군천사들이 거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낙원과 음부 그리고 천국과 지옥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장소의 개념이 아닌 인격적 접근이 필요합니다. 장소의 개념으로 볼 것이 아니라 관계를 중심으로 보자는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천국을 환경적 요소가 최상인 장소로써 연상합니다만 이것은 장소의 개념으로써 천국을 받아들인 예입니다. 그러나 인격적 관계의 개념에서 천국이란 바로 하나님 아버지와 내가 온전한 하나를 이루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9장을 보면 변화산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9절을 보면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옷을 입고 계셨지만 몸과 옷이 일체 된 상태에서 빛이 발산되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예수님 안에 영이시고 빛이신 하나님께서 온전히 들어오셔서 발산되는 상태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님처럼 하나님과 하나 되어서 내 안에서부터 하나님을 발산하는 상태로 머무는 것이 바로 천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관계의 개념에서 정의할 수 있는 천국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접근법을 통해서 본문에 기록된 낙원이 무엇인지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0장 27절에서 신명기 말씀을 인용하시며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염두에 두자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로 이루어진 천국과 지옥 그리고 낙원과 음부를 이해하는 것이 팩트에 가장 가까울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시간과 공간에 갇힌 언어로는 시간과 공간 바깥에 존재하는 것을 온전히 묘사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중심에 놓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42~43절을 보면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낙원으로 번역된 헬라어 파라데이소스(παράδεισος)는 꽃과 과실수가 가득한 아름다운 공원이나 정원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 바깥으로 나가는 과정 중이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께서 가실 곳에 이 땅에 존재하는 꽃이나 과실수가 있는 정원이 실재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낙원이란 육체로 거할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말씀을 듣는 행악자나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비유적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표현이 사용된 다른 경우를 찾아보면 히브리어의 에덴을 헬라어로 번역할 때에도 파라데이소스라는 단어는 사용되었습니다. 또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도 이러한 표현이 암시적으로 등장합니다. 거지 나사로는 죽어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고 부자는 죽어서 음부에 들어갔습니다. 여기서도 낙원이라는 개념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에서는 사도 바울이 자기 자신을 제3자로 언급하면서 낙원에 이르렀던 경험을 언급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편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오늘’이라는 단어입니다. 2000년 전으로 돌아가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던 때는 금요일 오후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흘 뒤인 주일 새벽에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하늘로 가시는 승천은 사십일 뒤에나 일어나게 됩니다. 이러한 십자가 사건의 과정을 염두에 두자면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말씀에 굉장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낙원에 이르는 시점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는 금요일이기 때문입니다. 숨을 거두실 때 예수님의 마음이 행악자의 마음을 데리고 낙원으로 진입하셨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 반복해서 말씀드렸던 사람의 구조를 다시 한 번 떠올려봅니다. 우리의 마음은 영이신 하나님과의 접촉과 밀착이 가능하고 하나님을 모셔 들일 수 있도록 지어졌습니다. 마음이 곧 영입니다. 그리고 육체의 오감을 통해 마음은 이 세상을 접하게 되고, 세상을 접하는 중에 의식이 활동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구조를 염두에 놓고 예수님의 상황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육체가 죽었으니 더는 생각과 감정과 의지도 없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마음은 육체를 떠나서 행악자를 데리고 낙원에 들어가시게 됩니다.
한편 본문을 이해할 때에 걸리는 것이 바로 행악자의 과거 행실에 대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어냈는지를 생각함을 통해 나 자신이 오늘 낙원에 이를 수 있는 길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행악자가 그동안 살았던 모습을 생각해봅니다. 행악자는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육체를 통해서 사람을 만나고 물건을 대하고 사건들을 접촉해왔습니다. 마음이 육체를 의존하여 있음의 느낌과 좋음의 느낌을 가졌던 것입니다. 육체가 만나는 것들에서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느꼈고 그 느낌이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말과 행동을 하며 살았습니다. 즉 신성모독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본래 사람이 있음과 좋음을 느껴야 할 대상은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 앞서 예수님께서 체포되시는 상황을 통해 진짜 신성모독이 무엇인가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신성이란 있음과 좋음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서 세상의 있음과 좋음을 느끼는 것이 신성모독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있음의 느낌과 좋음의 느낌이 육체에 의지하여 종속되고 있는 상태가 하나님과 분리된 저주받은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 행악자가 예수님을 믿게 되면서 변화가 생겨나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었다는 것은 곧 예수님께 마음을 드렸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몸이 죽게 됩니다. 몸이 죽을 때에 행악자의 마음은 세상과 완전히 분리되고 마음이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마음이 세상과 철저히 분리되어 예수님 안으로 들어간 상태가 관건입니다.
행악자가 세상에서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느끼는 상태에서는 하나님과는 철저히 분리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간 상태에서 육체가 죽자 지금까지 접촉하고 밀착해 왔던 세상과는 철저히 분리되게 됩니다. 이렇게 육체가 죽어서 세상과 분리되고, 분리된 마음이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통해 낙원에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다른 행악자를 생각해봅니다. 예수님 좌우편에 행악자가 매달려있었는데 누가 구원받았는지는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습관적으로 우편의 행악자가 구원 받았다고 여깁니다만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다른 행악자는 육체가 죽었을 때 마음이 세상과 분리되는 것까지는 똑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 죽는 순간까지 마음을 예수님 안에 들여보내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을 믿었던 행악자가 오늘 낙원에 들어가게 되었다면,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행악자는 오늘 음부에 들어가게 됩니다.
오늘도 지구상에서 죽는 모든 사람은 낙원으로 들어가든지 음부로 들어가게 됩니다. 몸이 죽어서 마음이 세상과 분리되었을 때에 그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가 있으면 오늘 낙원으로 가게 되고, 그 마음이 세상과 분리되었어도 예수님 안에 들어가 있지 않다면 오늘 음부로 들어가게 됩니다. 오늘 마음이 예수님 안에 있느냐 없느냐가 낙원이냐 음부냐를 결정짓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낙원이란 어떤 상태를 의미하는 것일까요? 앞서 인격적인 차원에서 낙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과 마음의 밀착관계를 중심에 놓고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에서 거지 나사로가 죽은 다음에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것으로 낙원을 묘사하셨습니다. 거지 나사로의 형편을 생각하신다면 낙원을 탁월한 곳으로 묘사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형편을 대비시키기 위해서라도 거지 나사로가 들어간 낙원이 환경적으로 얼마나 아름답고 호사스러웠는지를 보여주면 좋았는데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아브라함 품에 안겼다고 말씀하십니다. 낙원을 인격적으로 보고 계신 것입니다.
낙원의 상태란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죽었던 모든 자들이 부활하기 이전으로써, 독자적으로 신령한 몸을 가지지 못했지만 마음이 예수님 안에 있는 상태입니다. 마음이 예수님 안에 있기에 예수님을 통하여 외부세계를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상태를 비유적으로 아브라함 품에 안겼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품에 안겼다고 말씀하실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당시의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해함으로써 큰 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유대인들이 믿음의 조상이자 선민의 뿌리라고 생각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는 비유적 표현을 하신 것입니다.
다만 오늘 본문의 상황에서는 예수님께서 더 이상 그러한 표현을 사용하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행악자는 예수님께 마음을 드렸습니다. 이제 몸이 죽으면 그 마음이 독자적으로 신령한 몸을 입기 이전에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외부세계를 느끼는 상태가 됩니다. 몸이 죽었기 때문에 외부세계는 더는 세상이 아닌 천국에 계신 하나님뿐이십니다. 아직 독자적으로 신령한 몸을 입지는 못했으나 예수님 안에 머물러서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고 하나님의 좋음을 충만하게 느끼는 상태가 바로 낙원의 상태입니다.
천국과 낙원은 두 개의 별도 장소가 아닙니다. 같은 천국인데 낙원은 예수님 안에 마음이 들어가서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느끼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몸을 통해서 세상의 있음과 좋음을 느꼈듯이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느끼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낙원의 상태이고 오늘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는 부활의 사건이 전우주적으로 일어날 것입니다. 그때에는 신령할 몸을 독자적으로 갖게 될 것입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모습과 같이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오셔서 하나님이 발산되는 발광체와 같은 신령한 몸을 갖게 되고 영원히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낙원은 이렇게 독자적인 신령한 몸을 갖기 이전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는 말씀이 상징하는 대로 마음이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100% 느끼게 되는 상태를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처럼 인격적인 관계를 염두에 두고 이해하면 낙원과 음부 그리고 천국과 지옥이라는 개념이 명확해질 수 있습니다.
다른 행악자가 들어간 음부의 상태는 낙원과는 반대입니다. 마음으로 느끼는 외부세계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즉 지옥의 불구덩입니다. 있음의 느낌과 좋음의 느낌이 아예 없는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몸이 있는 동안에는 세상 것의 있음을 느끼고 세상 것이 좋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오해이고 거짓된 희망이지만 적어도 느낌만은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음부에 들어갔다는 것은 더 이상 있음과 좋음의 느낌 자체를 갖는 것이 불가능해졌음을 의미합니다. 간단히 말해 무엇으로도 마음을 채울 길이 없어진 것입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 부자는 음부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때 심한 갈증을 느껴 나사로의 손끝에 물 한 방울 먹기를 소원합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마음을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두려운 것은 마음의 채울 거리를 더 이상 찾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것을 가장 무서워하고 고통스럽게 여깁니다. 그리고 부활의 시점이 지나면 신령한 몸과 대비되는 지옥에 맞는 영적인 몸을 입고 영원히 마음의 채울 거리가 없는 지옥에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음부란 있음과 좋음을 느낄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부활과 승천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지 않고 승천하시지 않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기만 해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마음을 데리고 낙원으로 가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굳이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야만 하셨던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시고자 하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사십일 동안 마음이 세상을 빠져나간 상태에서도 몸으로 이 땅에서의 삶이 가능함을 보여주셨습니다.
행악자는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당신의 나라는 세상 밖에 있는 나라입니다. 승천하심은 이 땅에 있는 나라가 아니라 땅 바깥의 나라를 소망하라는 방향을 제시해주신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의 행악자처럼 십자가에 매달려 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육체가 죽지 않았음에도 마음을 주님께 보낼 수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과 승천의 사건이 의미하는 바가 이와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너의 몸이 아직 살아있지만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수 있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셈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마음이 세상 바깥으로 빠져나가서 이루어지는 삶을 암시합니다. 부활은 죽은 다음에 일어나는 사건이기 때문에 마음이 세상 탈출 뒤에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누가가 예수님의 별세를 탈출을 의미하는 엑소도스(ἔξοδος)로 표현한 바와 같습니다. 행악자는 오늘 몸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기 전에도 예수님께 마음을 드릴 수 있습니다. 그 결과 마음은 세상과 분리되는 순간 예수님이 가시는 예수님의 나라로 따라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사십일 동안 사시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것은 이 땅에 살고 있을지라도 마음을 예수님께 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마음이 육체에 매여서 저주받은 세상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행악자가 십자가의 예수님을 대했던 방식대로 예수님께 마음을 드린다면 몸이 죽지 않아도 오늘 마음이 낙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부활과 승천의 사건을 통해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이 부활과 승천의 사건이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행악자에게 주신 말씀이 나에게도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오늘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이를 수 있을지에 대해 정리해보겠습니다.
낙원은 예수님 안에 마음이 들어가 있는 상태로 천국에 머무는 것입니다. 아직 육체를 입고 있기에 독자적인 신령한 몸으로 존재할 수는 없지만 마음만은 예수님을 통하여 천국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학서적들을 보면 낙원을 천국에 들어가기 이전의 상태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인격적인 관계를 중심으로 이해한다면 천국에 들어가 있으되 예수님 안에 내 마음이 들어가서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충분히 느끼는 상태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기쁨의 동산인 에덴을 낙원이 뜻하는 파라데이소스라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이 의미하는 것은 행악자처럼 육신이 죽지 않더라도 마음이 세상을 빠져나와 부활의 자리에 머무르고 승천하여 낙원에 진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낙원에 있는 상태에서 이 세상의 삶이 어떻게 진행될 수 있을까요? 십자가 사건의 과정을 간단히 정리해보면 내 마음이 낙원에 있는 상태에서 삶이 진행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행악자의 행동을 관찰해보면 그 원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행악자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마음으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간단한 일이지만 이것이 낙원 진입 과정의 시작입니다.
우리는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낙원에 진입할 수 있습니다. 행악자가 십자가에 달려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바라보았듯이 우리는 가정이든 직장이든 어느 곳에서나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마음으로 바라볼 때 낙원 진입은 이루어집니다. 단 행악자와 예수님 사이에는 아무런 대상도 끼어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행악자는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는 것을 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은 부당하다고 여깁니다. 41절에서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이 두 상황을 우리의 삶에 적용해봅니다. 행악자는 십자가에 달려서 자신이 죽어 마땅하다고 여겼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지 않았지만 마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봄으로써 내가 죽어 마땅한 자이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실 이유가 없음을 인정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가정이든 직장이든 어디서든 이루어질 수 있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실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던 이유는 내가 십자가에서 죽어 마땅한 죄인이기 때문이다.”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낙원에 진입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단계는 예수님이 죽으셔야 될 이유가 없는 분임을 알고 죽으심의 이유가 나에게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단계는 예수님의 나라에 대한 소원을 갖는 것입니다. 행악자는 42절에서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고백하였습니다. 행악자는 죽음을 앞에 두고 세상 안에서 어떤 소원도 가질 수 없었기에, 세상 바깥에 있는 예수님의 나라에 대한 소원을 갖게 됩니다. 이 소원이 우리의 소원이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이 세상에서 최고의 자리는 십자가라는 내용의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십자가는 세상 바깥에 있는 예수님의 나라로 진입하기 위한 유일한 근접거리이고 정거장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십자가는 이 세상에서 내가 취할 수 있는 최고의 자리라고 보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소원하기에 마땅한 예수님의 나라는 세상 바깥에 있기 때문에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최고최선의 자리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회사에서 승진을 바라며 좋음의 느낌을 적용하고 있는 나 때문입니다. 사장님의 있음의 느낌을 느끼고 있는 나 때문입니다. 이처럼 있음과 좋음이라는 신성의 특징을 엉뚱한 곳에 적용하고 있는 나 때문에 예수님은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죽으신 예수님을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십자가를 최고로 좋은 곳으로 여길 수 있어야만 합니다. 본래 있음과 좋음은 하나님의 신성입니다. 그러나 나의 저주받은 체질은 이 세상에서 있음과 좋음을 느끼려고 합니다. 이러한 저주받은 체질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합니다. 그렇기에 십자가가 나에게 최고로 좋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할 때에 오늘 낙원에 이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서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낙원에 이른 자들에게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이 말을 풀어보면 “항상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라, 쉬지 말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라, 범사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라, 그리하면 항상 기뻐할 수 있고 쉬지 않고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라는 의미가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동일시해야 될 예수님은 공생애 때의 기적을 일으키시던 능력의 예수님이 아닙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죄 없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야말로 우리가 동일시해야 될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 예수와 동일시의 과정을 통해 낙원에 이르게 됩니다. 행악자가 예수님을 바라보았던 것처럼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의 이유가 나에게 있음을 인정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있음과 좋음의 느낌을 세상에 적용하기 때문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십자가로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인들을 향해 슬퍼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저주받은 세상에서 있음과 좋음을 느끼며 살아가는 체질이야말로 슬퍼할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십자가야말로 저주받은 세상에서 주어질 수 있는 최고의 자리라는 것을 계속 고백해 나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살펴본 낙원으로 가기 위한 세 가지 과정은 모두 영적인 팩트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봐야 하고, 예수님의 죽음의 이유가 나에게 있음을 알고, 예수님이 가신 곳으로 가기를 소원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과정은 애쓰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이 팩트를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럼으로써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예수님의 선언은 나를 향한 선언이 됩니다. 실제로 예수님 안에서 내 마음이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느끼는 낙원의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행악자가 죽어서 도달한 낙원의 상태를 우리는 살아서 도달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과정을 예수님께서는 부활과 승천의 사건을 통해 가르쳐주십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행악자처럼 육체적 죽음을 경험하지 않더라도 마음이 낙원에 이르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일이 낙원에 이른 증거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러한 삶을 살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마음이 낙원에 이르기 위해 인정해야 할 팩트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죽어야 할 이유가 없으셨지만 세상에서 있음과 좋음을 느끼고자 하는 나의 저주 받은 체질 때문에 죽으셨음을 인정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셋째, 예수님이 가신 나라를 소원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 세 가지 팩트를 인정할 때에 예수님의 십자가는 내게서 일어날 수 있는 세상에서 제일 좋은 자리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나의 마음은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이르게 됩니다. 이 세 가지 팩트를 순차적으로 기억하고 적용하는데 시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기필코 이 팩트를 붙잡고 고백함으로써 낙원에 이르는 경험을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을 통해서 행악자가 죽어야만 도달할 수 있었던 낙원에 우리의 마음이 도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이 길을 가기 위해 세 가지 팩트를 기억하고 인정하는 간단한 일을 함으로써 오늘 마음이 낙원에 이르게 하여 주시고 이 세상의 삶은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느끼는 가운데 진행되는 참으로 놀라운 기적 같은 경험을 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