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전쟁 때 수도가 옮겨오면서 남포동과 광복동 일대에 문화예술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70~80년대까지만 해도 부산의 문화예술인들은 중앙동과 남포동, 광복동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활동했다지만 나는 그곳과는 깊은 인연이 없다. 70년대 후반의 두어 해, 어쩌다 가끔 기웃거리긴 했지만, 대도시 중심의 문화에 선뜻 젖지 못하는 촌뜨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광복동 어디 뭐가 있었고, 중앙동 어디 뭐가 있었고 등등의 이야기가 줄줄 쏟아지는 자리에 있으면 입을 다물고 듣기만 한다.
90년대 이후부터였나. 문화예술인들의 집결 무대가 서면으로 옮겨졌다지만, 그 역시 나와는 관계가 없다. 혼자 고된 습작기를 통과하던 시점이기도 했고, 집안일과 아이들로부터 벗어난다는 걸 잠시라도 생각해 본 적이 없으니까. 하여 소위 문화예술인들이 드나드는 곳에 다녀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가슴이 몹시 아프곤 했다. 언젠가는 나도 그런 곳에 드나들면서 좀 폼나게 살고 싶다는 생각에.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남기고 간 말과 느낌
외로움과 슬픔과 기쁨들이 구석구석 걸어나와
저마다의 자세로 우쭐우쭐 춤을 추는 것 같았다혼자 어디 가서 죽치고 앉았거나, 나름 분위기 잡아본 기억도 없다. 부산 생활 삼십 년은 내게 약간의 틈도 허락하지 않았다. 어쩌다 아주 약간 틈이 난다 싶으면 고작 간다는 데가 부전시장이었다. 양정에서 버스를 타고 부전동 농산물공판장 앞에 내리면 왁자한 난전이었다. 어느 골목에 무슨 가게가 있는지 두루 꿰차고 있는 부전시장을 한 바퀴 도는 것으로 울적한 심사를 풀곤 했다.
하여, 이 글을 쓰려고 마음먹었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게 바로 부전시장이었다. 글 쓰며 살아온 지 십몇 년이건만 잘 가는 데가 고작 시장이라니. 내가 생각해도 한심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니면 이런 글을 쓰게 될 기회가 올 줄 알았던지 6년 전 수영으로 이사를 한 뒤로 가지 못하게 된 부전시장은 마실 장소에서 제외되었다.
하지만 시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 건 아니었다. 그 유명한 수영팔도시장이 코앞이었다. 당연히 틈만 나면 수영팔도시장을 들락거리게 됐다. 완벽하게 몸에 밴 아줌마기질이 어딜 가겠는가. 부스스한 머리에 대충 걸친 차림으로 수영팔도시장에 다녔다. 천원마트에 오늘 뭐 새로운 거 들어왔나 기웃거렸고, 천연화장품가게가 생겼기에 비누 같은 거 만들겠다고 들락거렸다. 생선가게, 반찬가게, 떡집, 두부집, 빵집 등 단골이 하나씩 늘어났다.
근데 이런 일도 마실이 되나? 아줌마가 시장가는 건 일이지 마실이 아니다. 하던 일 툭툭 털고 놀러가기도 하고 그래야 하는데 이제껏 뭘 하고 살았담. 마실을 잘 다녀야 생각도 새로워지고 기분도 새로워지고 하는 건데. 늘상 꽁꽁 묶여 지냈으니 될 게 뭐람! 대책없이 투덜대던 중, 딱, 생각이 났다. 내가 마음 먹고 마실가는 곳이 부산에도 꼭 한 군데 있기는 했다. 부산 중구 중앙동 갤러리카페 '누리에'. 아줌마를 아줌마 아니게 해주는 곳이 내게도 있었다.
2. 중앙동에 갤러리카페 '누리에'가 문을 연 게 20년이 넘었다고 얼핏 들은 것 같다. 그림을 그리는 분이 운영한다는 카페. 하지만 나는 아주 늦게 '누리에'에 발을 들여놓았다. 아무 연고도 없이 발을 들여놓은 판에서 오로지 자기자신만 의지해서 대책없이 끈질기게 한 우물만 파고 있다는 점에서 나와 꼭 닮은 '누리에' 선생님이 무턱대고 좋았다. 작업은 아무도 몰래 혼자 하는 것이고, 생활세계에선 나름 의젓하고 꿋꿋해야 한다는데 대해서도 선생님과 나는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늘 적당히 어둡고, 적당히 조용하고, 구석이 많은 갤러리카페 '누리에'는 중앙동 인쇄골목 안에 있다. 숱한 사람들이 부려놓고 간 인생의 짐들, 그것들이 숨어 있는 구석, 구석만큼이나 많이 숨어 있는 세월과 사람들의 자취와 함께 고요히 나이를 먹어가는 선생님과 내가 '작은 선생님'이라 부르는 선생님의 동생이 함께 꾸리고 있다. 꾸린다는 말이 좀 조심스럽긴 하다. 손님이 오면 오는대로, 안 오면 안 오는대로 '누리에'는 그냥 오래 사귄 친구처럼 그 자리에 있을 뿐, 선생님은 낮에 그림을 그리고, 작은 선생님은 적자를 조금이라도 메우려고 낮에 다른 일을 한다. 그런데도 두 사람의 모습은 늘 한결같다.
그 세월이 십 년은 되었다.
오랜만에 '누리에'에 갔다. 오랜만이라고 했지만 '누리에' 가는 일은 늘 오랜만이었다. 선생님은 반갑게 맞아주었다.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대요? 작은 선생님은 반가움을 슬쩍 감추는 재주가 있다.
따뜻하게 지펴진 난로, 그 위에서 솔솔 수증기를 내뿜는 가습기, 문밖에서부터 들리던 굵직한 저음의 '베사메 무쵸'. 한정없이 추웠던 겨울날, 그만큼 또 마음이 추웠는데 '누리에'는 따뜻했다. 그 따뜻함을 찾아서 모인 사람이 그날따라 꽤 많았다. 구석자리에도 스탠드에도 손님이 앉아 있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아는 체를 했다. 오신다기에 인사나 하고 가려구요. 아, 네. 오랜만이네요.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우연히 합석해서 알게 된 처지였다. 낯가림 심한 성미를 감추려고 사람 처음 만나면 하도 까탈을 부리는 바람에 사귀는 데 삼 년이 걸린다는 나도 단박에 사람을 사귈 수 있는 곳이 '누리에'였다.
그러고 보니, 여기서 못 부르는 노래를 목청껏 불렀던 기억이 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진해서 노래 부르는 일을 내가 했었다. 노래방 가면 마지못해 겨우 한 곡 부르곤 온갖 지청구를 다 먹는 내가. 아마, 다른 자리 사람들과 합창도 했던 것 같다. 구석자리에서 웃다, 웃다 배가 찢어질 것처럼 아팠던 적도 있었고, 다락처럼 높은 자리에 숨어서 사람들 어서 사라지기를 기다린 적도 있었다.
거의 매일, 혼자 왔다가 혼자 조용히 돌아간다는 아리따운 사람이 열고 나간 문에서 쇠방울이 딸랑딸랑 소리를 냈다. 음악은 곧 파바로티로 바뀌었지만 볼륨은 여전히 높았다. 늦은 열 시, 가슴 저 밑에 숨겨뒀던 어떤 것들이 스멀스멀 치솟을 즈음이긴 했다. 오래 내가 들르지 않는 동안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다녀갔고, 그 많은 사람들이 남기고 간 말과 느낌, 외로움과 슬픔과 기쁨들이 구석구석에서 걸어나와서 저마다의 자세로 우쭐우쭐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일 년에 한두 번, 기껏해야 서너 번 불쑥 불쑥 나타나는 내게 선생님은 어제 만났다 헤어진 사람처럼 말했다. 이것 좀 봐. 아유, 내가 못 살아. 그러면서 손으로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오랜만에 파마라고 했더니 귀신처럼 됐다고, 이상한 꼴이 됐다는 푸념이 뒤따랐다. 나는 곧 쿡쿡 웃고 말았다. 지난해 봄이었나. 작업 도중 갑자기 가슴이 터질 것 같아서 직접 다 잘라버렸다던 머리카락이 수북하게 자랐고, 파마까지 하게 됐다니, 웃어야 할 일이었다.
그때 모자를 푹 눌러쓴 선생님을 보고는 얼마나 가슴이 뜨끔했던지. 사방팔방에 정신이고 몸이고 다 걸쳐놓고 대책없이 우왕좌왕하고 있던 중, 선생님의 삭발은 충격이었다. 내 가슴은 아직 이렇게 뜨거운데 넌 대체 뭘 하고 있느냐고, 여기서 우물쭈물, 저기서 우물쭈물, 비겁하고도 졸렬하게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면서 '작가처럼' 살고 있는 넌 대체 뭐냐고 일침을 가하는 것 같았다. 내 고단한 소심증이 부끄럽고 부끄러웠다. 부끄러움은 부끄러움대로 또 가슴에만 남아서 더욱 부끄러웠다.
이것 참. 그런데 나는 아직 여전했다. 죽기 전에 나도 한 번 해 봐야 되는데. 내 주제는 절대 그런 일을 못할 것이다. 기껏해야 동네 미장원 가서 자르기나 하겠지. 이쁘기만 하구만요. 염색도 못하게 된 신세, 제 머리 허얘진 거 좀 보세요. 부끄럽고 미안하고 쑥스러운 마음을 얼른 누르고서, 과민성이 되고부터 남우세스럽게 희끗희끗해진 내 머리카락을 북북 잡아당겼다. 그리고는 들고 간 카메라를 들이댔다. 카메라 새로 샀거든요. 시험 좀 하려고 왔어요.
태연히 거짓말을 하는데 선생님도 작은 선생님도 웃기만 했다. 카메라 처음 사면 무조건 많이 찍어야 된다며 뭐라고 뭐라고 추임새까지 넣었다. 에구, 저렇게 순진해서야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사누? 딴엔 혀까지 차면서 여기저기를 찍어댔다. 사진을 보고 놀라지는 않을까? 에구, 저 여편네가 또 무슨 짓을 하누, 혀를 차지는 않을까? 이러다 혹시 고객 명단에서 제외되는 건 아닐지 몰라. 좀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내친 김이었다. 사정을 털어놓으니, 선생님은 손사래를 치며 달아나버렸다.
등불 같은 조명이 따뜻했다. 그때까지 무심히 보아왔던 '누리에'의 사물들이 새롭게 다가왔다. 익숙한 것들에게 우리는 참 얼마나 무심한지. 벽 모퉁이에 숨은 듯 놓인 나부(裸婦)상이며 천장의 낡고 낡은 낙엽들, 몇 개의 조소들. 모든 것들이 새롭고 정겨웠다. 벽에 걸린 선생님의 그림들도 바뀌었다. 늘 오랜만이다 보니 그림이 언제 바뀌는지 모를 때가 많았고, 속으로 그런가 보다 넘어가야 했다.
한바탕 소란을 피운 뒤에야 부산과 김해를 오가는 생활이 고단하지 않으냐고 선생님은 물었고, 나는 아직 중심을 잡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중심이란 게 잡혀지지 않는 게 당연하지 않으냐고 속으로 혼자 중얼거렸다. 내게 중심이란 게 있기나 했을까? 글 쓰는 일을 중심에 두고 살겠다고 그렇게 떠벌렸으면서도 엉뚱한 일에 매달려 있기 일쑤였으니. 내가 만나지 못하는 사이에 이뤄진 선생님의 작업 이야기를 듣는 동안, 자, 이제 나도 중심 좀 잡아야겠다, 하고 다시 또 다짐해 보는 게 고작이었다. 며칠도 지나지 않아 부질없어질 결심이기는 했지만.
이젠 몸을 아끼자. 자주 그러듯 우리는 또 다짐했다. 그림이나 소설이나 노동자의 길이니만큼, 힘을 아끼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 몸을 아껴야 할 이유가 또렷하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더 이상 바라는 거 없어. 아직 그릴 수 있고, 그려도 된다니까. 그럼요. 아직 쓸 수 있고, 써도 된다니까요. 우리는 마주보며 피식피식 웃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힘들었지만, 그래도 앞으로 가야지 뒤로 갈 순 없잖아? 그럼요. 아직, 아직은 뭔가 조금 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매일매일 중노동을 하고 있다는 선생님 앞에서 나는 다시 다짐했다. 돌아가면 나도 열심히 써야지. 제자리걸음하고 있으면 선생님은 저만치 혼자 가버릴 테고, 그럼 귀한 친구 하나 잃어버리게 될 테니.

조명숙 소설가
약력=2001년 '문학사상' 신인상으로 등단. 작품집 '헬로우 할로윈' '나의 얄미운 발렌타인', 장편소설 '바보 이랑' '농담이 사는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