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남 들판에 서하임춘 시인의 후손이 거닐다
서하 임춘 시인의 증손 임난수장군이 거닐던 동네를 골말이라고 했고 600년 후 우리도 골말이라 불렀고 600년 후 우리도 골말이라고 불렀다. 골말 중 금강쪽은 동촌, 은행나무 부근은 서촌, 정자가 있었는지 정자동에 침례교회가 있었다. 골말 중 난 이랫마을에 살았고 골목을 위 전월산 아래는 윗말이라고 했다.
서하임춘 시인의 둘째아들 임경세의 손자인 전서공 임난수 장군의 후손은 다섯 아들이 있었고그중 골말은 넷째 아들 후손이 대부분 살았다. 지금의 세종 대통령집무실이 건립 될 곳은 전서공의 양양파로 둘째 아들 후손이 많이 살던 가래기, 진의리. 성전이고, 셋째 아들이 공민왕 부마로 사직공 후손이 평촌지역 그러니까 얼마전 들어선 광제사 부근이다. 넷째인 위의공파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곳에는 임난수은행나무와 숭모각 주변이다. 첫째는 무자했고 다섯째는 서자였다.
우리 집 앞 양화리 버스 정류장이 있던 세거리를 시거리라고 하는 것은 길이 세 곳으로 가서 그럴 것으로 여겼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1861년)에는 '삼기'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를 뒷받침하는데 구한말 일본의 지적도에는 세거리가 양화리라고 표시되기 시작했다. 시거리, 세거리에서 갑자기 양화리라고 표시한 것은 일본이 우리 정신을 말살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겨진다.
임난수 장군이 조선 건립으로 왕의 부름을 거절하고 낙향하던 길에 산새와 물새가 좋은 전월산 자락에 몸을 피해 이곳에 왔을 때는 고려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이곳은 천한 직업을 가진 몇몇 사람들을 양화 사람이라 불렀다. 골말 사람들은 장군이 오시자 그의 거처와 시중을 들어 편하게 지내도록 했다. 금강 뱃나루를 이용한 물품들이 경상, 전라도까지 오고가니 세거리, 시거리라 이곳을 불렀는데, 일본은 몇몇 천민을 부르던 양화리로 표시하고 부르게 하여 장군의 후손들을 면박한 것이다.
그러나 임난수 장군이 이곳에 들어서면서 집 앞에 심은 은행나무 암수가 2022년 동시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당당히 '임난수은행나무'라고 등재했고 동네 이름도 '세종동'이라 호칭하며 주변 모두를 세종시로 명명했다.
왕의 안위와 나라를 생각한 임난수장군을 인정하여 후에 세종대왕이 그의 후손에게 땅을 하사했으니 지금의 장남들판과 세종청사가 들어선 나성리 일대다. 600년간 평화롭게 절의와 충성심으로 살던 서하 임춘 시인의 증손자 임난수장군의 후손이 가장 많이, 가장 오래 한 곳에서 평화롭게 살았지만 나랏일이라니, 장군의 후손은 부모 묘까지 안고 유유히 떠날 것을 결심했다. 은행나무가 미리 울고 결국 후손도 대성통곡하며 떠난 것이다. 지금은 세종동 밖에서 다시 장군처럼 나라가 잘 되길, 대통령집무실이 잘 되길 기도하며 살고 있다.
임난수 장군은 은행나무 사이로 보이는 장남들판을 매일 바라보거나 들길에 서서 계절마다 허다한 철새를 보셨으리라. 오늘같이 청둥오리와 기러기와 백조들을 보며 얼마나 흐뭇해 하셨을까. 추운 곳만 찾아들어 살아야 하는 겨울 철새를 위해 이삭을 넉넉히 논 바닥에 고의로 흘려 놓으라고 가르치셨나 보다. 그래서 이삭 줍기를 하지 말라는 말씀들을 하셨던 것이가 보다. 그러니 겨울 철새가 지금도 잊지 않고 장남 들판과 금강을 서로서로 찾아 온 것이 고맙다. 이들을 지금도 돌보는 이들이 있는 고향 들판을 가 보고 싶다. --위의공 후손 임하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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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한편의 대하드라마 같습니다.선생님
세미나 자료에 발표한 이해준 교수께서 2006년에 시거리에 대한 내용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꿈같이 살던 고향입니다
힘내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