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성제 8정도 4과
/ 불교학개론
1. 4성제의 내용
십이연기설은 인간에게 왜 생사의 괴로움(苦蘊)이 발생(集)하며, 또 멸(滅)할 수 있는가를 밝혀주는 가장 체계적이고 완비된 이론이라는 것은 앞 절에서 논한 바와 같다. 이러한 고온(苦蘊)의 집(集)과 멸(滅)에 입각해서 베풀어진 본격적인 실천적 교설을 학계에서는 사성제(四聖諦) 또는 줄여서 사제(四諦)의 교설이라고 보고 있다.
諦(satya)라는 말은 <제>로 읽는데, 사실(事實,fact)·진리(truth) 등을 나타낸다. 그러한 제(諦)로서 고(苦)·집(集)·멸(滅)·도(道)의 네 가지를 설하여 이것을 신성한 종교적 진리로 삼고 있는 데에서 사성제(四聖諦,catur-arya-satya)라고 부르는 것이다. "네 가지 성제(聖諦)가 있으니 어떤 것이 네 가지인 가. 괴로움·괴로움의 집(集)·괴로움의 멸(滅)·괴로움의 멸(滅)에 이르는 도(道)의 네 가지 성제(聖諦)가 곧 그것이다."<잡아함 卷 15>
"뭇 교설은 사성제(四聖諦)로 집약된다."<중아함 卷7 상적유경>고 말해질 정도로 중요시되는 이 사제는 이제 어떤 내용을 가진 것인가를 살펴보자. 첫째, 괴로움의 성제(聖諦)에 대해서 경전은 여덟 가지 괴로움(八苦)을 드는 것이 보통이다. "어떤 것이 고성제(苦聖諦)인가. 생하고(生)·늙고(老)·병들 고(病)·죽고(死)·미운 것과 만나고(怨憎會)·사랑하는 것과 헤어지고(愛別離)·구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求不得) 것은 괴로움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오취온(五取蘊)은 괴로움이다."<중아함 卷7 분별성제경>
이 여덟 가지 괴로움은 삼법인설(三法印說)에서 충분히 밝혔던 것이므로 여기서 다시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십이연기설에서도 인간의 현실적 존재는 괴로움으로 제시하고 있다. 무명에서 시작한 연기는 생(生)·노사(老死)에 귀결되고 있으며, 그것을 '커다란 하나의 고온(苦蘊:純大苦蘊)'이라고 다시 요약하고 있음을 보기 때문이다. 괴로움의 성제(聖諦)는 바로 이 명백한 사실을 직지하고 있다.
둘째, 괴로움의 집(集)이라는 성제는 위에서 말한 괴로움이 어떻게 해서 발생하게 되는가의 이유를 밝혀주고 있다. 경전에는 여러 가지 설명이 베풀어져 있는데, 주로 오온을 대상으로 하 고 있다. 즉 오온에 대한 '탐애(愛貪,chanda-raga)' <잡아함 卷2>이라든가 또는 "재생(再生)을 초래하고 (punar-bha-vika)" 희탐(喜貪,nandi-raga)을 수반하고 이곳저곳에 락착(樂着,abhinandin)하는 애(愛,trsna)"<잡아함 卷3>라고 설명되어 있기도 하다.
어떤 경우에는 오온 중의 색(色)은 희애(愛喜)가 그 집(集)이고, 수(受)·행(想)·행(行)은 촉(觸)이, 식(識)은 명색(名色)이 그 집(集)이 라고 따로따로 설해져 있는 경우도 있다.<잡아함 卷2> 괴로움의 집(集)을 이렇게 오온을 대상으로 설명하고 있음은 앞서 고성제(苦聖諦)에서 여덟 가지 괴로움을 오취온으로 요약하였기 때문일 것 이다. 그러나 집(集)이라는 개념의 최승한 뜻은 역시 십이연기설에서 찾아야 한다. 집(集,samudaya) 이라는 술어는 원래는 '결합하여(sam-) 상승한다
(udaya)'는 뜻으로서, '모은다(collect)'는 뜻이 아니다. '집기(集起)'라고 번역함이 좋은 말이다. 따라서 연기(緣起)라는 말과 매우 가까운 개념이다. 그러 기에 십이연기설에서도 생사의 괴로움이 무명에서 연기한 것임을 설한 다음, "그렇게 해서 고온(苦蘊)의 집(集)이 있다."고 맺고 있는 것이다.
집(集)이 이렇게 연기에 통하는 개념이라면, 괴로움의 집(集)이라는 둘째 번 성제(聖諦)는 괴로움은 연기(緣起) 한 것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가리킨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또 그것은 괴로움의 성제(聖諦)와 함 께 십이연기설의 유전문(流轉門)에 입각한 사실을 지적한 것이라고 보아도 좋다.
셋째, 괴로움의 멸(滅)이라는 성제(聖諦)는 집제(集諦)와 정확하게 반대되는 입장이다. 경전에도 그런 각도에서 설명되고 있다. 오온의 집이 애탐(愛貪) 등으로 설명되면, 멸제(滅諦)는 그것을 멸한 것이라고 설명되 어 있는 것이다. 십이연기설에서도 생사의 멸은 무명의 멸과 함께 사라진다고 설한 다음 "그 렇게 하나의 커다란 고온의 멸이 있다."고 맺어져 있다. '멸(滅,nirodha)'의 원어 또한 '멸한다'는 뜻을 나타내고 있다.
생사의 괴로움이 무명에서 연기한 것이 분명하다면, 무명의 멸진을 통해 우리는 그 괴로움 을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가 있을 것이다. 괴로움의 멸이라는 성제(聖諦)는 우리에게 이 명백한 사실 을 깨우쳐 주고, 동시에 괴로움이 사라진 그러한 종교적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다.
넷째, 괴로움의 멸(滅)에 이르는 길(道)이라는 성제는 경전에 팔정도(八正道)라고 설명되어 있다.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정정진(正精進)·정념(正念)·정정(正定)의 여덟 가지 실천사항을 가리킨다.
2. 팔정도
먼저 이 팔정도의 각항에 대한 경전의 설명을 살피면서 그들이 어떤 입장에서 종교적 생활을 조직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자.
정견(正見,samyak-drsti)은 바르게 본다는 뜻으로서, 경전에는 사제를 닦을 때 "法을 잘 결택(決擇)하 여 관찰하는 것"이라고 설명되어 있다.<중아함 卷7 분별성체경>
정사유(正思惟,samyak-samkalpa)는 바르게 사유(思惟)한다 또는 바르게 마음먹는다는 뜻으로서, "생각할 바(可念)와 생각 안 할 바(不可念)를 마음에 잘 분간하는 것"이라고 한다.
정어(正語,samyak-vac)와 정업(正業,samyak-karma-anta)은 각각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일하는 것인 데 전자는 '네 가지 선한 구업(口業)'이오, 후자는 '세 가지 선한 신업(身業)'이라고 설명되어 있다.<동상경 > 정어와 정업이 이렇게 각각 구업(口業)과 신업(身業)에 해당된다면 위의 정사유는 의업(意業)에 통한다고 말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정명(正命, samyak-ajiva)은 바르게 생활하는 것으로서, 정당한 방법으로 적당한 의식주를 구할 것이 권해지고 있다.
정정진(正精進, samyak-vyayama)은 바르게 노력하는 것으로서, "끊임없이 노력하여 물러섬이 없이 마음을 닦는 것"이라고 한다.
정념(正念,samyak-smrti)은 바르게 기억하는 것인데 '생각할 바에 따라 잊지 않는 것'이다.
끝으로 정정(正定,samyak-samadhi)은 바르게 집중한다는 말로서, 마음(心) 을 한 곳에 집중하는 것인데 삼매(三昧)라는 음역어를 통해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수행법이다.
이상이 대개 경전에서 볼 수 있는 팔정도의 설명인데, 괴로움의 멸에 이르려면 이러한 팔정도가 행해져야만 할 이유는 무엇일까? 연기한 것에는 실체가 없다는 것은 앞절 십이연기설에 서 살펴본 바와 같다. 생사의 괴로움도 연기한 것이므로 실체가 없을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무명 망념에서 연기한 괴로움은 현실적으로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集諦).
괴로움이 이렇게 현실적으로 있으므로 그것을 멸하지 않으면 안된다(滅諦).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진리를 똑바로 의식(凝視)하고(정견) 그에 입각해서 새로운 종교적 생활을 영위하면서 (正思惟∼正念) 마음(心)을 진리에 계합(契合)하게끔 집중하지(正定) 않으면 안될 것이다. 경전에도 이런 뜻을 나타내고 있다. "해 뜨기 전에 밝음이 비치듯이 괴로움의 사라짐에는 먼저 정견이 나타나고, 이 정견이 정사유 내지 정정을 일으키며, 정정이 일어남으로써 마음의 해탈이 있게 된다."<잡아함 卷28>
따라서 팔정도에서 수행상으로 가장 중요한 비중을 갖고 있는 것은 정견과 정정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불교 수행법의 주축이 되는 지(止,samatha)와 관(觀,vipasyana)의 拄수(修)라든가, 정(定,samadhi)과 혜(慧,prajna)의 쌍수(雙修)와 같은 것도 이 정견(正見), 정정(正定)의 원리에 입각한 것이라고 볼 수가 있다.
불교의 업설은 선악을 결택(決擇)하여 현실의 괴로움을 타개하려는 강력한 실천윤리라는 것을 앞서 살펴보았는데, 그러나 이 업설은 아직도 생사윤회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어떻 게라도 즐거운 과보를 초래코자 하는 것으로서, 사후 하늘(天)에 生하는 것이 목적이 되고 있다. 이에 반해서 사제 팔정도는 선악의 근저에 있는 '정사(正邪)'를 문제로 대두시켜, 정사의 결택을 통해 생사의 괴로움을 근본적으로 극복하려는 해탈에의 길이다. 따라서 범속한 세간(生死)을 벗어나는 '신성한' 진리라고 해서 사제를 '사성제(四聖諦)'라고 부르는 것이다.
사성제가 설해짐으로 해서 석존의 교설은 이론과 실천의 완비를 보게 된다. 뿐만 아니라, 종교는 '신성한 것과의 만남'이라고 말해질 정도로 성스러운 것을 특질의 하나로 삼고 있는데, 석존의 교설은 이제 이러한 신성성을 띠게 되었다. 석존이 녹야원에서 사성제를 설하신 것은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함은 사성제가 이렇게 교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3. 4과
사제 팔정도는 행하는 사람의 인격구조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오지 않을 수가 없다. 세계관의 근본적 전환과 심성의 정화가 함께 행해지기 때문이다. 수행하는 사람이 얻게 되는 그러한 종교적 체험을 크게 네 단계로 구분하여 행자의 수행을 돕고 있으니, 예류(預流)·일래(一來)·불환(不還)·아라한(阿羅漢)의 사과설(四果說)이 곧 그것이다.
첫째의 예류(預流,srota-apanna)는 세 가지 결박의 번뇌(身見·戒取·疑)를 끊고 범속한 생활에서 성스런 흐름에 들어간 사람을 가리킨다.<중아함 卷1 수유경> 일래(一來,sakrd-agamin)는 여기 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세 가지 결박의 번뇌뿐만 아니라 탐·진·치(삼독심)의 셋도 약화시켜 이 세상에 한 번 돌아와 괴로움을 다하는 단계이다. 셋째의 불환(不還,an-agamin)은 다섯 가지 결박(五下分結)의 번뇌(身見·戒取·疑·貪·瞋)를 끊고 이 세상에 옴이 없이 천상에서 열반에 드는 것을 뜻한다. 끝으로 아라한(arhat)은 일체의 번뇌(身見·戒取·疑·瞋·痴)를 끊고 현재의 법에서 그대로 해탈의 경계를 체득하는 사람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