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은 너를 세워 놓고 휘파람
황정현
파란시선 0155
2024년 12월 20일 발간
정가 12,000원
B6(128×208㎜)
143쪽
ISBN 979-11-91897-95-1 03810
(주)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
•― 신간 소개
인사는 끝이 없어 다시 만나도 잘 헤어질 수 있는데
[바람은 너를 세워 놓고 휘파람]은 황정현 시인의 첫 번째 신작 시집으로, 「모아이」 「청동겨울」 「골목 밖에서 붉은 눈이」 등 51편이 실려 있다.
황정현 시인은 2021년 [경인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바람은 너를 세워 놓고 휘파람]을 썼다.
우리가 황정현 시인의 시에서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은 인간의 연약함이다. 시인의 목소리는 세상을 향하지는 않는다. 즉 참혹을 견디는 자를 위한 정의나 부당한 세계를 향한 심판을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시인은 투쟁할 수 있는 여력을 지니지 않은 취약한 존재, 자신의 고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불안한 존재를 형상화한다. “인사는 끝이 없어/다시 만나도//잘 헤어질 수 있는데”라는 시구처럼(「어제의 소질」) 누군가는 과거의 상실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저편으로 떠난 ‘당신’과 다시 해후하는 순간만을 꿈꿀지도 모른다. 이렇듯 삶보다 죽음에 가까운 주체, 다시 말해 현실을 살아갈 능력보다 “아득히 고요하네 산 사람을 만나러 갔는데 죽음에 가까운 사람들 속에 껴 있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우울증적 주체가 [바람은 너를 세워 놓고 휘파람]에서 아름답게 간직하려는 사람의 모습이다(「여독」). 줄곧 이 시집이 비추는 것은 인간의 무너진 마음이다. 그러한 사람을 바라볼 때 우리가 스스로 깨닫게 된다는 듯이,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 알게 된다는 듯이 다만 자신의 두 발로 자신의 마음을 걸어 나오지 못하는 사람의 형상을 그릴 뿐이다. (이상 박동억 문학평론가의 해설 중에서)
•― 추천사
‘우리’라는 말은 ‘나’와 ‘당신’만으로 분절되지 않는다. ‘우리’가 되기 이전과 이후의 시공간은 다르게 흐르기 때문이다. ‘당신’과 이별하고 ‘나’는 ‘당신’의 골목에 남아 있는 ‘나’의 모습들을 거두어 갈 것이다. ‘내’가 온전한 ‘나’로 돌아오는 동안, ‘나’는 여기저기 부딪히고 부풀고 증발하거나 스며든다. “흰 그림자 밟으며//빛 속에서//서로를 알아볼 수 없을 때까지”(「까마귀와 나」) ‘나’는 죽음의 파노라마에 갇힌다. 죽음은 ‘나’와 ‘당신’을 오가며 삶을 흔들어 놓고 달아난다. 죽음이 “두 손으로 병을 감싸면/우린 조금 투명해지”지만(「코르크스크루」) ‘나’는 일상으로 쉽게 복귀되지 않는다. 황정현의 시집에서 죽음의 이미지가 연쇄되면서 드러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산 사람의 목소리이다. 시인은 죽은 이로부터 건너온 산 사람의 이야기를 반투명하게, 불가사의한 것을 환상적으로 그린다. 우리가 이전에 본 적 없던 몽롱한 구체물을 경험할 수 있다. 이를테면 ‘밤이 오고 뒤꿈치를 들어 올리면 잠시 하늘에 가까워’진다거나(「모아이」) “입속을 굴러다니는 젤리 맛 바람”을 느끼게 된다(「휘파람」). ‘당신’을 생각하다가 “손등이 가려운 건/날씨가 슬퍼서”라거나(「20년을 줄게」), “차오르는 물소리에/목구멍은 얼어” 버리는 감각의 전이도 발생한다(「아이의 이웃」). 이제 ‘우리’로부터 이탈된 ‘나’와 ‘당신’이 지니게 될 빛의 색과 분량은 다를 것이다. 우리는 예측할 수 없는 날씨처럼 ‘나’의 세계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풍경을 마주하게 된다. 아름다운 이미지들은 ‘나’의 회생 장치이다. 삶의 엔진이다. 내일의 ‘우리’를 위한 가능성이다. 시인은 “오래도록 붓끝만 바라보다 겨우 좁은 골목 하나를” 다시 그린다(「골목 밖에서 붉은 눈이」). 폭설 속에서 “붉은 눈”을 걸러 낼 때까지, “죽은 대나무 잎”이 “나비”가 될 때까지(「대숲펜션」), 그리하여 결국, ‘우리’가 다시 만날 때까지 숨죽여 시를 쓸 것이다.
―정우신 시인
•― 시인의 말
사과를
보냈데
상자 속엔
감자가
가득
반씩
나눠 먹을까?
어디
사니?
•― 저자 소개
황정현
2021년 [경인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바람은 너를 세워 놓고 휘파람]을 썼다.
•―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모아이 – 11
파랑 – 13
열두 명이 스물네 개의 거짓말처럼 – 15
의자 고치는 사람 – 18
키오스크 – 20
셀프 주유소 – 22
청동겨울 – 24
골목 밖에서 붉은 눈이 – 26
열여덟 – 28
밤강정 – 30
핑고 – 32
버드스파이크 – 34
언니들의 파노라마 – 38
제2부
송곳니 – 43
아이의 이웃 – 46
거절의 미래 – 48
삼십 일 – 51
코르크스크루 – 54
육교 – 56
정리 – 58
신 놓기 – 60
육손이 – 62
정오 – 64
율리시스 – 66
물뭍동물 – 68
20년을 줄게 – 70
제3부
02:55 – 75
휘파람 – 76
난반사 – 78
까마귀와 나 – 80
종이 다리 – 82
스무디 – 84
스키니진 – 86
대숲펜션 – 88
숨바꼭질 – 90
열대야 – 92
섣달 – 93
손등의 밤 – 94
나무요일 – 96
제4부
모임 – 101
입장 – 102
익산 – 104
아는 동네 – 106
아는 공원 – 108
한밤의 트랙 – 110
한밤의 이사 – 112
접골 – 116
필사 – 118
어제의 소질 – 120
겨울물결자나방은 날갯짓을 서두르고 – 122
여독 – 125
해설 박동억 형언할 수 없는 타자를 향한 응답 – 127
•― 시집 속의 시 세 편
모아이
바다를 등지고 서 있는 기분을 아니
어둠이 불어오면 물결은 밀려가고
조개들은 서로를 보듬어 무덤을 만드는데
우리는 운명을 안을 수 없는 얼굴들
흔들리는 언덕에 목을 얹고
퀭한 눈으로 서로를 볼 수 없는 우리는
바람을 정수리에 담아도
입술마저 두근대지 않아서
구름이 내려앉으면 언덕은 부풀어 오를까
귀를 기울일수록 이웃은 멀어지고
불타는 숲을 보았어
아무도 다가서지 않았고
물속에 잠기는 아이를
누구도 안아 올리지 못했어
젖은 발가락은 흙 속에서 꾸물거리는데
하나둘 깨어나는 손가락들
슬픔이 고일 때마다
온몸에 꽃피는 구멍들
밤이 오면 뒤꿈치를 들어 올린다
잠시 하늘에 가까워진다
너무나 많은 무덤이
얼굴을 부르고 있다 ■
청동겨울
녹는 거
틀림없나요
함께 죽어 간다는 거요
잔무늬 거울도 세발까마귀의 울음도 거푸집 속에서 발버둥 치고 있다는 거요 불과 볕이 까닭이라면
안짱다리 언니들은 유별나지요 달처럼도 나처럼도 기울지 않아요 어떻게든 우아해지니까요
웃을지 모르겠지만 비극에 대해서
청년들은 정직하다는 거
손님을 들이고 싶은데 문을 닫아요 구경은 미뤘어요 표정도 떼어먹어요 청혼은 언제 하나요 외롭지만 혼자가 아니라서요
어서 와요
문을 열면
반달돌칼을 쥐고 싶을지 몰라
어쩐지 손아귀가 씩씩해질 것 같아서
할머니들이 조금 가엾기도 하지만
엄마들이 졸고 있으니까
오늘 밤 나의 동사들은
누울 때도
설 때도
침을 다시는데
까막까치들이 밤하늘을 수놓을까요 눈보라를 몰고 오네요 사방에 펼쳐진 겨울이 녹스나 봐요 쇳소리도 들리지 않아요 ■
골목 밖에서 붉은 눈이
오래도록 붓끝만 바라보다 겨우 좁은 골목 하나를 그렸습니다
붉도록
검붉도록
이 골목의 어둠은
어떻게 붓질할까요
어둠을 들먹이다 그만
먹물이 말라 버렸죠
누군가 골목 안으로 손을 내밀면 힘껏 잡을 거예요 나 좀 꺼내 달라고요 골목 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숙제도 약속도 있는데 그림자 없인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데 숨소리도 그림자도 잃어버렸어요
내일은 아무도 날 알아볼 수 없을 테니까 다짐도 비밀도 지킬 일 없을 테니까 언제 올 거냐고 왜 이리 늦냐고 야단치는 잔소리도 늦은 밤 막차 타고 꾸벅꾸벅 조는 일도 이른 새벽 출근길도 다가오는 너의 생일도 기일도 빗소리도 눈사람도 잊을 테니까 다시 죽을 일 없을 테니까
다음엔
그다음엔
골목 밖으로
손을 내밀어도
아무도 잡아 줄 수 없을 거예요 눈동자를 쥐여 줄게요 차마 당신의 등을 볼 수 없거든요 골목 밖으로 그렁그렁한 눈길만 보내요
이 골목에서 영원히 마른 붓끝으로 휘돌게요 아무리 써 보아도 내가 쓴 글자들은 나를 구할 수 없으니까 숨소리도 그림자도 잊을 테니까 그러니 누구라도 울지 말아요
골목 밖에서
붉은 눈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