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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46호 성령의 은사란 무엇인가?
사랑의 편지: 당신에 대한 우리 생각이 너무 적습니다.
주님은 너무 크시기에 우리 머릿속에 헤아려지지 않습니다.
주님은 너무 깊으시기에 우리 생각에 다 담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너무 넘치시기에 우리 마음속에 자락을 다 펴실 수 없습니다.
주님은 너무 넓으시기에 우리 영혼 속에 다 자리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나 또 주님은 너무 작으신 듯하여
좁은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시며,
주님은 너무 작으신 듯하여
짧은 우리 생각 속에 들어와 일하실 수 있으십니다.
종이 위에 아주 작은 점을 찍고 그 점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 점 속으로 뛰어드는 상상을 해봅니다.
너무나 작아 내 몸 하나 눕힐 수 없을듯해 보이는 점 속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생각해 봅니다.
보이지도 않는 점 같은 이 지구에 주님의 몸을 들여 밀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우주의 티끌 같은 이 세계에 주님의 발을 들여 놓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좁은 인간의 태에 열 달을 잉태되어 주님을 머물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하고...
한 사람이 바닷가를 걸으며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세상의 못된 사람들을 아직도 가만히 두시는 걸까?”
그런데 바닷가 한쪽에서 작은 아이가 무엇인가 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얘야, 무얼 그렇게 열심히 하고 있는 거냐?”
작은 아이는 모래를 조금 깊게 파서 웅덩이를 만들어 놓고,
조그만 바가지로 바닷물을 퍼서 웅덩이를 채우고 있었습니다.
아이는 힐끗 그 사람을 쳐다보면서 말했습니다.
“바닷물을 여기다 가득 채우려고요.”
그런데 웅덩이에 바닷물을 채우는 즉시 바닷물은 모래 웅덩이 속에 스며들어 없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얘야, 봐라. 바닷물이 벌써 없어졌잖니? 그 많은 바닷물을 어떻게 이렇게 조그만 웅덩이에 다 담겠다는 거냐?”
그러자 아이는 정색을 하며 말했습니다.
“아저씨는 어떻게 그렇게 작은 머리로 하나님의 생각을 다 알려고 하세요?”
우리 주위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삶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일어나는 어떤 일은 나의 뜻과 너무 달라 놀랄 때가 있습니다.
만나지는 어떤 사람은 나와 너무 달라 어려운 때가 있습니다.
내 생각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일로,
나와 같지 않은 사람들로,
당황하고 속이 타는 삶 속에서
주님, 오직 당신만이 초연하십니다.
사람의 삶과 환경과 일생을 다 아시는 당신만이...
사람의 타고난 마음과 성질과 생각을 다 아시는 당신만이...
그 너머의 모든 일을 보실 수 있는 당신만이...
주님은 재어지지 않습니다.
주님은 세어지지도, 헤아려지지도 않습니다.
너무 깊어 다다를 수 없는 주님의 생각,
너무 신기하여 자취를 찾을 수 없는 주님의 일,
너무 오묘하여 미치지 못하는 주님의 섭리,
우리 마음의 자로, 우리 생각의 잣대로 측량될 수 없는 주님의 모든 것.
모두 다 알 수는 없습니다.
모두 다 알아야 하지도 않습니다.
모두 다 알려는 욕심은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작은 웅덩이에 바닷물을 다 담으려는
어리석은 아이와 같은 소치이니까요.
다만 지나간 후에야
다만 드러난 후에야
어렴풋이 유추해 보는 주님의 지혜.
그리고 생각하려면 머리가 아득해지고 현기증이 나는,
헤아리려면 마음이 벅차서 숨이 찬 주님의 사랑.
주님,
당신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너무 적습니다.
당신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너무 적습니다.
재어지지 않는 주님처럼 큰 마음
헤아려지지 않는 주님처럼 큰 생각
담아지지 않는 주님처럼 큰 사랑
오늘도 갖고 싶어 두 손을 모읍니다.y
권두언
우리는 하나님을 점점 더 밝히 알아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오해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영생은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관념을 가지기에 쉬운 것 중 하나가 성령의 은사에 관한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가 사용하는 어떠한 힘이 아니라,
우리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로부터 나오는
어떠한 파워 같은 것이 아니라, 인격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성령 하나님께서 주시는 성령의 선물 즉 은사들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받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내려 주시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준비된 자들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믿는 자들은 성령의 은사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더 큰 능력을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그런데 흥미 있는 것은 남을 잘 대접하는 것도 성령의 은사로 구분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잘 다스리는 행정의 능력도 방언이나 목사의 일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성령의 은사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이 흥미로운 성령의 은사에 대하여 펼쳐 보았습니다.
강병국목사
시사와 뉴스: 미국 개신교 목사님이 이슬람 경전인 코란을 불태운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지난 4월1일 아프가니스탄 모슬림들이 마자리샤리프 지역의 유엔사무소를 공격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유엔 직원을 포함, 적어도 10명이 숨졌다고 AFP 통신이 보도했습니다. 이 일은 지난달 20일 미국 플로리다주 게인즈빌의 한 교회에서, 이슬람 경전인 코란을 피고로 하는 모의재판을 진행하고, 코란에 유죄판결을 내린 후 불에 태워 모슬림들의 분노를 샀습니다.
교회와 국가가 손을 잡을 때마다 반드시 엄청난
핍박이 생긴다. 그래서 교회와 국가와 손을 잡는 것을
핍박의 공식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코란 소각을 주도한 인물은, 테리 존스 목사로, 지난해에도 9·11 테러 9주년을 맞아 코란을 불태우겠다고 밝혔다가 미국 내 각 계층으로부터 비난 여론이 고조되자 코란 소각을 포기했었으나, 결국 지난달 실행에 옮겼던 것이다. 하미드 카르자이 아프간 대통령은 미국에 대해 "이슬람의 신성한 책을 불태운 데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라고 비난했다.
이슬람 나라에서 사는 친구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해 드리고 싶다. 이슬람교도인 한 여인이 기독교를 믿던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 두 사람은 비밀리에 결혼하기로 했다. 그런데 결혼식 날 아침, 신부의 집안에서 눈치를 채고 결혼식장을 급습하여 총을 난사하였다. 신부와 신랑 모두 현장에서 죽는 끔찍한 일이 생겼다. 왜 이슬람 국가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될까? 왜냐하면, 이슬람이라는 종교와 국가가 하나로 연합한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슬람 국가에서 기독교로 개종하려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국외로 탈출하든지 아니면 순교를 각오해야 한다.
교회와 국가가 손을 잡을 때마다 반드시 엄청난 핍박이 생긴다. 그래서 교회와 국가와 손을 잡는 것을 핍박의 공식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핍박의 공식을 잘 이해하면, 기독교 역사를 보다 분명하게 볼 수 있고, 예언에 대한 통찰력을 갖게 된다. 핍박의 공식은 시대마다 정확하게 반복되었다. 엘리야 시대에 유대 교회의 거짓 선지자들이 아합 왕이라는 권력자와 결탁함으로 참 신앙을 가진 엘리야를 핍박하였다. 예수님 때에도 유대교가 로마 제국의 군대와 경찰력을 빌려서 예수 그리스도와 제자들을 핍박하였고 그 결과 예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시게 되었다. 중세기에는 천주교회가 부패하면서 로마 제국의 권력과 손을 잡게 되었고, 그런 상황에서 교회는 국가의 힘을 빌려 자신들의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였다. 그 결과 중세기 종교 암흑시대 동안 5천만 내지 1억 명의 순교자가 생기게 된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요한계시록 13장에 나오는 짐승의 표 환란도 세계적인 핍박이기 때문에 핍박의 공식과 패턴이 그대로 반복되리라는 것이다. 실제로 계시록 13장에는 짐승의 표 환란을 주도하는 두 짐승 세력이 나오는데, 첫 번째 짐승은 타락한 교회이고 두 번째 짐승은 국가이다. 이 두 짐승이 서로 손을 잡고 하나님의 참 백성을 핍박하고 죽이는 것이 짐승의 표 환란이다. 타락한 교회와 정치 세력의 연합에 의해서 짐승의 우상이 세워지는데, 그들이 요구하는 교리와 법에 따르지 않는 자들은 모두 죽게 될 것이다. 이것이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의 참 백성에게 다가오고 있는 짐승의 표 환란의 실체이다.
기독교회가 가지고 있는 가장 위대한 정신 중의 하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 핍박하지 않는 것이다.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따먹지 못하게 협박하거나 강요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도 유대민족에게 철저하게 거절당했지만, 십자가에서 죽을 때까지 폭력과 강압을 행사하지 않았다. 왜 강요하지 않고 협박하지 않을까? 왜냐하면, 복음은 완전한 자유와 스스로 선택에 의해서 받아들여져야만 그것을 올바로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사랑과 충성을 원하신다.
그러나 사단은 정통이라는 미명하에 이단을 정죄하고 핍박하는 적그리스도의 정신을 기독교회 속에 슬쩍 밀어 넣었다. 그래서 역사를 돌아보면 핍박은 항상 교회가 국가의 경찰과 군대 힘을 빌려서 하나님의 참 백성을 핍박하는 패턴으로 나타났다. 거짓교회가 참 교회를 핍박하고 죽이는 것이 기독교의 피묻은 역사이다. 이번에 이슬람의 경전인 코란을 불태운 미국의 존스 목사에게 국가가 경찰과 군대의 힘을 빌려준다면, 그는 아주 강력한 핍박의 세력으로 돌변하게 될 것이다.
핍박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항상 핍박하는 세력과 핍박을 받는 하나님의 백성이 있었다. 엘리야 시대에는 아합왕이라는 권력자와 손을 잡은 유대교회가 참 신앙을 가진 엘리야를 핍박하였다. 거짓 교회가 국가의 힘을 이용해서 참 교회를 핍박하였다. 예수님 때에도 유대교가 로마 제국의 군대와 경찰력을 이용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하고 죽였다. 거짓교회가 국가의 힘을 이용해서 참 교회를 핍박한 것이다. 중세기에 천주교회가 로마 제국의 권력과 손을 잡고 하나님의 성도들을 핍박하였다. 거짓교회가 국가의 힘을 이용해서 참 교회를 핍박한 것이다. 거짓교회가 국가의 힘을 빌려 참 교회를 핍박하고 죽인 것이 핍박의 역사이다.
마지막 시대에도 이러한 패턴은 정확하게 반복될 것이다. 그렇다면 마지막 때에 누가 핍박을 받는 하나님의 참 백성일까? 요한계시록은 이 질문에 대해서 아주 분명한 답을 준다. "용(사단)이 여자(참 교회)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닷모래 위에 섰더라" (계 12:17).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계 14:11~12).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신실한 삶을 살아보라. 용이 다가와서 공격할 것이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딤후 3:12).
성경은 마지막 시대에 세계적인 핍박이 올 것을 예언하고 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핍박이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진리를 믿는 사람에게 거짓 교리를 강요하고 심지어 죽이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핍박이다. 참 이상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고 예언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요 16:2).
마지막 시대 짐승의 환란 역시 이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타락한 교회와 정치 세력의 연합에 의해서 짐승의 우상이 세워지는데, 그들이 요구하는 교리와 법에 따르지 않는 자들은 모두 죽게 될 것이다. 이것이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의 참 백성에게 다가오고 있는 짐승의 표 환란의 실체이다.y
핍박의 교리를 가지고 있는 교회를 아시나요?
기독교회 중에서 핍박 신학을 가지고 있는 교파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중세기 종교 암흑시대에 어거스틴은 천주교회의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은 육신적으로 고통을 가해서라도 다시 교회 안으로 불러들여야 하는데, 그것이 하나님께서 이단들의 영혼들을 구원하시는 방법이라고 가르쳤다. 그가 주장한 이러한 사상 때문에 천주교회는 공식적으로 이단을 박멸하기 위하여 또는 이단자의 영혼을 정결케 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온갖 잔인한 핍박의 방법들을 자행하기에 이르렀다. 천주교회는 다음과 같은 핍박의 교리를 가지고 있다. “영적인 검과 물질적인 검 모두가 교회의 권한 안에 있기 때문에 물질적인 검도 교회를 위하여 사용되어야 하며 영적인 검도 교회에 의하여 사용되어야 한다. 비록 물질적인 검은 왕들과 군인들에 의하여 사용되지만, 그것 역시 사제의 뜻과 승낙에 의하여 사용되어야 한다. 공공연히 이단임을 공언하고 말이나 행동으로 다른 사람들을 그릇되게 인도하려고 시도하는 자들은 반드시 출교뿐만 아니라 마땅히 사형에 처해야 할 것이다.”
삶의 작은 간증: 하나님께서 주신 사람
그에게서 편지가 왔다. 겉봉투의 글씨체만 봐도 설레는 내 마음이 기다리던 편지였다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몇 장의 두툼한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결론은 하나님의 뜻이면 나와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고 싶다는 것이었다. 편지를 쓰기 전 사흘 동안 금식하면서 말씀을 읽으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알기 위해 기도했다고 했다. 그리고 여자는 남자가 어떻게 살아 온지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자신의 지난 일들을 편지에 솔직히 썼다. 그렇게 보내온 편지에는 자랑이 없었다. 교만도 없었다. 허세나 무례함이나 욕심도 없었다. 그저 진실이 담긴 겸손한 편지였다. 과거 자신의 일들을 핑계나 꾸밈없이 적어 보냈다. 고마웠다. 솔직히 말해 주는 그 마음이 고마웠고 나에게 선택권을 주는 가난한 마음도 고마웠다. 성경 말씀에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는다고 했고 사랑엔 두려움이 없다고 했다. 편지를 읽으면서 그에 대한 그리고 그와 함께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나 불편한 마음이 없었다. 분명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온이 내 마음에 잔잔히 스며들고 있었다.
난 이 일이 선한 방법으로 이루어지길 바랐다. 그래서 이 일 가운데 부모님을 공경해야 한다는 생각에 먼저 부모님께 말씀드리고 그분들의 의견을 들었다. 교회를 다니시지 않는 아버지셨지만, 딸을 위해 해 주신 조언은 진심이 담겨 깊고 따뜻했다. 그도 그의 부모님께 말씀을 드렸다. 서로 멀리 있었기에 우리는 9개월이란 시간 동안 각자 있는 곳에서 조용히 자신의 일들을 하며 기다려야 했다. 기다림이 길고 외로운 길이라는 것을 잠깐의 경험으로 알게 됐다. 기다리는 시간 동안 나 또한 사흘 동안 금식하며 기도했다. 나에게, 그에게, 우리 가족에게, 그리고 내 이웃에게 무엇이 최선인 줄 아시는 분께 이 교제에 대해 진지하게 묻고 싶었다. 그래서 그 사흘 동안 묻고 내 마음도 이야기하며 그렇게 기도의 시간을 가졌다. 삼 일째 되는 날, 난 분명한 답을 얻을 수 있었다. 부인할 수 없는 조용한 음성이 내 마음에 말씀하고 계셨다. 이 사람이라고… 이 사람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사람이라고… 그리고 9개월 동안 서로 보지 못했지만 사랑은 더 자라갔다. 사랑은 지속적이라고 했다. 한 때는 좋았는데 시간이 지나니 마음이 바뀌더라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한때의 감정일 뿐이다. 그래서 내가 느끼는 감정이 진정한 사랑인지를 알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게 9개월이 지난 어느 날 그는 나를 찾아와 일곱 송이 장미와 함께 청혼했고 몇 개월 후 나는 그의 아내가 되었고 그는 나의 남편이 되었다. 올해로 우리가 결혼 한 지 십이 년이 된다.
그를 닮고 나를 닮은 아이가 네 명이다. 결혼 후 난 한 번도 이 사람에 대한 신뢰가 흔들린 적이 없다. 결혼 전 사흘 동안 금식기도 한 후 얻은 응답과 살면서 그가 보여주는 마음이 날 흔들리지 않게 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옳으시다. 그분의 뜻은 언제나 나와 모두를 위해 최선이었고 항상 옳았다. 그분이 주시는 것은 항상 내 생각을 뛰어넘는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언제나 더 좋을 것을 주신다. 그래서 난 행복한데… 남편은 기도를 적게 해서 나를 만나 손해 본 것은 아닌지 미안한 마음이 들 때가 잦다.
♣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잠 19:14)
♣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 값은 진주보다 더하니라 그런 자의 남편의 마음은 그를 믿나니 산업이 핍절치 아니하겠으며 그런 자는 살아 있는 동안에 그 남편에게 선을 행하고 악을 행치 아니하느니라”(잠 31:10~12)
♣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잠 31:30)
위의 성경 절들은 내가 9개월 동안 그를 기다리면서 그에게 이런 여인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내용이다. 남편에게 선을 행하는 여인이 되고 싶었는데…. 지금은 한없이 부족한 내 모습만 보인다. 다시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 그때 했던 기도를 멈추지 않고 해야겠다. 내가 고집해서 얻지 않았기에, 하나님께서 주신 남편이기에 내게 더욱 소중한 사람이다. 오늘은 남편에게 나와 살아줘서 고맙다고 말해야겠다.y
라이프 토크: 불면증으로 고통당하십니까?
불면증은 그 원인이 매우 다양하고 복잡하다. 불면증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잠자리에 누웠을 때 잠이 잘 오지 않는 경우가 있고, 일단 잠을 잤다가 깨었을 때에 다시 잠들지 못함으로써 충분한 수면을 취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불면증의 발병 원인을 살펴보면, 몸이나 마음에 문제가 있어서 생길 수 있으며, 외부적 요인 때문에 불면증이 생기는 때도 있다.
불면증의 원인은 너무나 복잡하고 다양하므로 그 원인을 모두 파헤치는 것은 매우 어렵지만, 우리의 습관과 생각을 고침으로써 가벼운 불면증 문제는 쉽게 해결될 수 있다. 몇 가지 생활 습관을 바꾸기만 해도 깊은 잠을 잘 수 있다! 불면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점은 잠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쁘면 늦게 자고, 시험공부 때문에 잠시간을 잊어버리며, 손님과 대화하느라고 잠을 자야 할 시간을 뒤로 미루는 것은 잠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증거이다. 잠을 잘 자야, 공부와 일에 효율이 올라가고 삶이 풍요로워지는데, 잠을 잘 자는 일에 실패하기 때문에 삶에 활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잠에도 단계가 있다
먼저, 잠에 대한 의학적 지식을 정리해 보자. 건강에 유익을 주는 깊은 수면은 저녁 9시부터 다음 날 아침 6시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밤 12시를 기준으로 2시간 전과 4시간 후 사이의 시간은 반드시 잠을 자야만 하는 시간이다. 왜냐하면, 밤 12시 이전에 건강에 큰 유익을 주는 성장 호르몬이 가장 많이 분비되기 때문이다. 성장 호르몬은 자라는 아이들의 성장을 도와주며, 어른들에게는 질병의 치료에 유익한 도움을 준다. 성장 호르몬이 제대로 분비되어야 얼굴에 생명이 넘치고 밝은 표정을 가질 수 있다.
이외에도 숙면을 취하는 동안에 세로토닌이라고 불리는 신경전달물질(호르몬)이 분비되는데, 이것은 아침에 일어날 때 가뿐하고 경쾌한 느낌이 들 수 있도록 해준다. 오늘 밤에 취하는 깊은 잠이 내일 하루 동안의 활력을 약속해 주는 것이다. 지난밤에 잠을 제시간에 충분하게 자지 못하면, 오늘 하루 동안의 삶과 정서에 문제가 생겨서 짜증 나고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된다. 수면 부족 때문에 삶의 즐거움이 사라지게 된다. 수면 부족은 생명의 활력을 서서히 잃어버리게 하기 때문에 장수와 수면은 매우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또한,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하면 체중의 증가를 가져오기 때문에 비만증의 원인이 될 수 있다.
밤 12시나 1시 또는 2시까지 잠을 자지 않는 생활 습관을 갖게 되면 어떤 일이 생기는가? 우리의 건강은 분명한 대가를 지급하게 된다. 24시간을 주기로 날마다 밤이 찾아오는데 밤은 우리의 건강에 큰 축복이 된다. 왜냐하면, 밤에 숙면을 취하면 우리 몸은 낮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하기 때문이다.
잠에는 수면 사이클이 있다. 우리 뇌 안에 흐르는 미세한 전기를 이용해서 뇌파를 검사해보면 정확한 수면 사이클을 알 수 있다. 잠자리에 누워서 깊은 수면에 들어가기까지 대개 60분이 소요되는데, 전체 수면은 5단계로 나누어질 수 있다. 단계마다 뇌파가 다르게 나타나는데, 1단계는 수면으로 들어가는 과정이고 이 단계에서는 조용한 안정 상태를 가리키는 알파 파장이 나타난다. 점진적으로 수면이 진척되어 4단계인 깊은 수면을 취하면 불규칙하고 느린 델타 파장이 나타난다. 바로 이때에 성장 호르몬과 세로토닌을 비롯한 다양한 호르몬 신진대사가 균형을 회복하게 된다. 깊은 수면의 다음 단계는 “깨어나는 잠(REM sleep)”이라고 부르는데, 이 단계가 한창 성장하는 아이들에게 중요한 이유는 이 단계의 잠을 놓칠 때 공부를 집중해서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노인의 경우, 초저녁의 잠이 늘어나고 깨어나는 잠이 점점 줄어들기 때문에 새벽에 일어나게 된다. 깨어나는 잠의 단계에서 꿈을 꾸게 되기 때문에 노인이 될수록 꿈을 꾸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나이가 많은 분이 아직 꿈을 꾼다는 것은 매우 좋은 현상이다.
잠이 몸을 바꾼다
이제 깊은 수면이 뇌에 미치는 영향을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밤에 수면을 취하는 동안, 우리의 뇌는 충전이 된다. 씨앗을 땅에 심고 비가 와서 수분이 공급되고 햇살도 비취면 충전이 되어 씨가 발아하게 된다. 자고 있던 생명이 깨어나서 싹이 트게 된다. 밤에 수면을 취할 때도 이와 유사한 일이 뇌 속에서 생긴다. 숙면을 취하는 동안 양질의 산소를 호흡함으로써 뇌가 충전된다. 또한, 심장은 활력을 얻고, 기억력과 지력과 명철과 영성이 회복된다. 우울증 환자의 2/3는 수면부족 때문에 고통당하고 있거나 고통당했던 경험이 있다.
일관성 없는 생각과 행동, 업무에서 잦은 실수, 사고의 위험성 증가는 모두 수면부족과 깊은 관계가 있다. 충분한 수면은 가정의 행복과 직장 생활의 효율성을 증대시켜준다. 이토록 수면이 중요한데도 대부분 사람이 수면의 중요성을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잠을 자야 할 시간이 여러 가지 부수적인 일들로 잠식당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저런 일을 하노라고 밤 12시가 돼서야 잠을 자는 가정주부는 가정에서 행복한 미소와 다정한 말을 남편과 자녀들에게 나누어주기 어렵다. 밤새 몸과 마음이 쉼을 얻고 다시 생명력을 회복해야 아내와 어머니로서 해야 하는 수많은 일을 처리할 수 있는데, 충분한 잠을 취하지 못하므로 몸과 마음이 다음 날을 위해서 준비되지 못하게 된다.
잠은 부족해도 문제가 되고, 너무 많아도 문제가 된다. 잠은 규칙적인 리듬을 지킴이 좋다. 주중이나 주말이나 공휴일이나 항상 같은 시간에 잠자리에 들고, 같은 시간에 일어남으로써 일정한 수면을 취하는 습관을 유지하면, 몸과 마음에 놀라운 유익을 얻게 된다. 불면증은 잘못된 수면 습관이 오랫동안 불규칙하고 잘못 형성되었을 때 찾아오는 증세이다.
불면증 때문에 약을 먹는 사람은 두통, 어지럼증과 같은 여러 가지 부작용을 느끼게 된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생활 습관을 고침으로써 불면증에서 벗어나는 것이 최고의 방법이다.y
불면증을 벗어나는 생활 습관
● 날마다 흙을 만지면서 일을 하라. 집에 조그만 텃밭을 만들어서 필요한 채소를 기르는 것은 불면증을 물리치는데 큰 유익을 가져다준다.
● 해가 지면 더 이상 일거리를 만들지 마라. 일찍 잠자리에 들기 위해서는 저녁 시간을 잘 관리해야 한다.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 시간을 정해놓고 그것을 잘 지키는 습관을 형성해야 한다.
● 저녁 식사 후에 잠시 눈을 붙이고 자는 습관을 버려라. 저녁 식사 후에 잠이 오면 잠시 옥외에 나가서 산책하거나 가족들과 가벼운 대화를 함으로써 정해진 수면 시간을 유지해야 한다. 잠자리에 드는 시간과 깨는 시간을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낮이나 저녁 시간에 잠을 자지 말아야 한다. 잃은 잠의 보충은 아침나절이 좋다.
● 빈속과 빈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라. 잠자리에 들기 3~4시간 전에 모든 식사를 끝마침으로써, 위장이 비어 있는 상태로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 과식과 간식과 밤참을 피해야 한다. 또한, 모든 걱정과 염려를 하나님께 맡김으로써 마음이 쉼을 얻은 상태에서 잠자리에 들어야 양질의 숙면을 취할 수 있다.
● 저녁 시간에는 몸과 마음을 흥분시킬 수 있는 것을 피하라.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자극적이고 흥분된 장면이나, 전화로 다른 사람과의 많은 이야기는 수면을 방해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
● 카페인이 함유된 식품이나 초콜릿을 먹지 마라.
● 정제된 전분 식품, 동물성 음식, 과다한 설탕을 삼가라.
● 저녁 시간에 홍삼 액기스같은 농축된 식품 섭취를 피하라. 이런 종류의 식품은 아침이나 낮에 섭취하는 것이 좋다.
●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수분을 섭취하지 마라. 아침에 일어나서 두 잔의 물을 마시고, 낮에 수분을 섭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물을 마시면 수면을 방해받게 된다.
● 통풍을 잘 시켜서 실내 공기의 음이온이 충분하도록 하라. 밤에는 창문을 열어서 외부 공기가 실내로 들어와서 유통될 수 있어야 한다.
● 가벼운 이불과 편안한 침대를 사용하고, 얼굴을 이불로 덮지 마라.
● 잠자리 들기 전에 몸의 긴장을 풀어주라. 잠자리에 들기 전에 50여 번 호흡을 천천히 하는 것은 온몸의 긴장을 풀어주는 좋은 방법이다. 따뜻한 물에 10여 분간 몸을 담갔다가 자는 것도 같은 효과가 있다.
● 수면을 도와주는 약초를 조금 짧은 기간 사용하라. 개박하와 합스 차를 따뜻하게 만들어서 잠자리 들기 전에 마시면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조금 더 확실한 효과를 나타내는 것은 “deep sleep”이라고 불리는 생발레리안 뿌리의 농축액으로 만든 스프레이인데 침실 베개 밑에 두었다가 필요하면 혀 밑에 3번 스프레이하고 타액을 삼키면 쉽게 잠이 들면서 적어도 6시간의 수면을 취하게 되는데, 이처럼 약초로 도움을 받은 수면은 아침에 일어나서도 어떤 부작용도 느끼지 않는 천연의 수면과 그 질이 같아서 몸이 편안하다.
독자 이야기: 사랑하는 딸들아
너희를 낳고 처음으로 편지를 쓴다. 그동안 너무 무심한 듯한 엄마를 용서하렴. 엄마는 사랑하는 우리 딸들을 생각하며 펜을 들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구나. 삶의 뒤안길에서 끊임없이 나와 우리 가정을 인도하시고 지키신 하나님의 섭리를 다시 한 번 보게 되었단다.
엄마가 아주 어렸을 적, 교회가 집 바로 위에 있어 자연히 교회에 나가고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 신앙생활의 시작이었지. 엄마의 삶 속에서 예수님을 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할 만큼 집, 학교, 교회가 생활의 전부였단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저 열심히 교회를 다닌 것뿐이었다.
졸업 후엔 학교 대신 직장으로 바뀐 것 외에 달라진 것은 없었지. 집, 직장, 교회…. 단순한 생활에서 유일한 삶의 낙이라곤 교회에서 나누는 예배와 청년들과 친교뿐 그 외의 만족은 없었단다.
그러다… 오직 믿음 하나만 보고 아빠와 결혼했지. 믿음 좋은 배우자를 만나고 싶던 소원대로 말이야. 아빠의 외골수적인 믿음을 따라 잘못된 곳에도 가 보고 우여곡절이 많았어.
사랑하는 딸들아!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엄마는 너희만큼은 멋지게 자라길 바라는 욕심이 있었음을 고백한다. 비록 동기는 하나님 뜻 안에서 양육하려는 것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강요와 규제로 너희를 통제하며 엄마 뜻대로 이끌었구나. 결과는 물론 아픈 상처를 남겼고, 하나님께도 영광이 되지 못했다.
우리 큰 딸이 음악의 길에 들어서면서부터 점점 일이 꼬이기 시작했단다. 우리의 반석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기초 위에 세운 온전한 가정이 아니었기에 일이 꼬일 수밖에 없음을 그때 당시에는 몰랐기에 마음의 참된 평안이 없었고 심지어 과연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을 돌보고 계신가 하는 의구심마저도 들게 되었단다.
나름대로 신앙생활에 열심이었던 엄마는 무엇인가 잘못된 것 같아 당황스러웠지. 당시에는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고 믿음마저도 흔들리기 시작했지. 그런 와중에 경제적인 어려움마저 겹치면서 모든 것이 무너지기 시작하였고 하나님 앞에 그동안 살아왔던 날들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운 생각도 들었다.
결국, 하나님 앞에 엎드려 상한 심령으로 간구하게 되었단다. 엄마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에 야곱이 얍복강에서 천사와 씨름하듯이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구하였어…
근 일 년의 시간이 십 년 이상 느껴지는 고통 중에 주님의 자비가 우리 가정에 임하였단다. ‘생애의 빛’을 통하여 참된 진리를 알게 되었지. 그리곤 엄마의 삶은 전환점을 맞이했단다.
아!!! 그 진리의 말씀 앞에서 엄마는 지난 세월 얼마나 어리석고 헛된 것을 잡으려고 정신없이 쫓아왔는지를 깨닫게 되었지. 이전의 믿음 생활은 진리 위에 온전히 터를 세우지 못하고 그저 교회 생활에만 충실하면 다되었다고 만족했는데, 진리를 알고 나니 모든 것이 잘못된 것을 깨닫게 되었지. 특히 하나님의 성품을 오해했다는 것을 …….
무엇보다 진리를 통하여 우리 하나님의 사랑은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단다. 무례히 행치 아니하시고 끝까지 나를 기다리시는 사랑의 아버지….. 스스로 깨달아 자기의 뜻을 굴복하고 돌아오길 기다리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엄마는 드디어 만나게 된 거야.
지금 엄마는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오해하여 너희에게 선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지 못하고 사단의 기만에 속아 잘못된 하나님의 모습을 심어주게 된 것이 몹시 마음 아프다.
사랑하는 딸들아! 정말 정말 미안해.
너희에게 엄마가 어떻게 용서를 구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그동안 너희가 받았을 영혼의 상처와 잘못 형성된 성품을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 이 엄마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용서해주겠니?
이제는 참 진리를 만났으니 진리 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랑과 온유함으로 너희를 대할게. 우리 주님처럼 겸손하고 온유하며 자비하심을 따라 그 형상이 엄마 속에 이루어질 때까지 성령을 좇아 주님의 온전하신 뜻을 이루며 너희를 진리와 사랑으로 양육할 것을 약속할게.
사랑하는 딸들아!
부족한 엄마를 용서하고 우리 함께 주님 오실 때까지 한 걸음씩 나아가자꾸나.
사랑한다. 영원히! 사랑하는 엄마가..
라이프 토크: 이현맘의 채식요리 레시피
신앙 1부: 성령의 은사와 목적
요즈음 기독교 안에서 성령의 은사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은사를 간구하는 대부분 사람들은 성령의 은사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가지지 못하고 있거나, 막연하게 성령의 은사를 방언이나 치유의 은사 정도로만 알고 있습니다. 많은 분이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질문을 해옵니다. 그리고 그 질문들을 통해 많은 그리스도인이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오해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번 호 신앙 기사에서는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조명해 봅니다. 질문과 문답 형식으로 구성된 가장 성경적인 “성령의 은사”에 대한 연구는 독자 여러분의 영적 눈을 뜨게 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소망을 하도록 고무시킬 것입니다. 숙독을 바랍니다!
Q: 나는 이런 성령의 은사를 받고 싶어요. 성령의 은사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요?
A: 사람이 성령의 은사를 선택하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누어 주시는 것을 받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자세하게 언급된 고린도전서 12장을 보면 11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네, 이 성경 절의 말씀처럼, 성령은 인간이 원하는 대로 마음대로 선택하여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은사는 성령께서 나누어 주십니다.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선물인 것입니다.
성령 은사 세미나에서 성령의 은사를 받기 위해 애쓰고 훈련하며 연습하는 모습들을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성령의 은사를 받기 원하는 사람들은 열심 없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이 열렬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기 원하는 매우 종교적인 사람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마치 성령의 은사를 본인의 의사로 선택하여 구하기만 하면 어떤 것이든지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한 그리스도인들의 태도입니다. 아니, 더 나아가 방언을 하지 않으면 성령의 은사를 받지 못한 것이며, ‘성령의 은사는 곧 방언이다.’라는 그릇된 생각이 그리스도인 중에 팽배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기 위해 훈련을 받고, 이런 성령의 은사를 받고 싶다고 택해 놓고 그 성령을 받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떼를 쓰며 조르다시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의 말을 들어 보면 한결같이 “나는 이런 성령의 은사를 받고 싶어요!”라고 하는데, 이 말은 곧 본인이 원하는 대로 성령의 은사를 마구 가져다 쓸 수 있는, 그리고 원하는 대로 가질 수 있는 어떤 것으로 여긴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성령의 은사를 받기 원하는 사람들의 동기를 보면, 대부분이 성령의 능력과 현시를 통해 자신의 영적인 힘을 과시하고, 또 방언이나 치유의 은사를 자신의 영성을 증명하거나 믿음의 강도를 재는 척도로 삼고 싶어함에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이 개인의 사욕으로 성령의 은사를 사용하려는 잘못된 의도를 권고하며 사도 바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딤전 6:5).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요즈음 기독교 안에 많습니다. 영적인 일을 자신의 사욕을 위해 이용하려는 의도를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는 사람의 선택이나 욕심에 의해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께서 그분의 은사를 나누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은사를 욕심으로 구하지 말고, 오직 겸손하게 성령께서 그분의 은사를 내려주시기를 구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Q: 성령의 은사를 주시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A: 성령의 은사는 구하는 사람의 영광을 위하여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은사는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들을 세우기 위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기 위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 사업의 완성을 위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성령의 은사를 주시는 목적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7절]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에베소서 4장 11~12절]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특별히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자녀가 그리스도의 온전한 품성을 따라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하는 데 매우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엡 4:13~14). 이것이 과연 무슨 뜻일까요?
사람이 처음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믿게 될 때의 영적인 상태와 성품의 성숙의 분량은 매우 미숙한 상태입니다. 물론 온전한 회개와 거듭남으로 칭의를 받았지만, 그의 성품과 믿음의 분량은 아직 어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는 장성한 그리스도의 품성을 이루도록 도와주는 일을 합니다. 먼저 성령의 역사 안에서 영적으로 자라나고 성숙해지는 경험이 그리스도인에게는 필수이지요. 믿노라고 고백은 하지만, 영적으로 자라지 않고 성장을 멈춘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나 가정과 사회에서 문제를 일으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성령의 은혜로 먼저 진리를 이해하고, 진리에 안착하며, 진리의 말씀으로 성화 되는 경험이 선재 되어야 합니다. 자신이 먼저 진리를 온전히 이해하고 진리 안에서 뿌리가 박힌 사람들만이, 주위의 영혼들을 돌보고 영혼을 살리며 하나님의 진리로 인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에 성령의 은사의 역사 하심이 함께 해야 합니다.y
신앙2부: 성령의 은사와 종류
Q: 성령의 은사에는 어떤 것이 있나요?
A: 성경이 말하는 성령의 은사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많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많은 그리스도인이 잘못된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성령의 은사라고 하면 방언을 떠올리고, 방언하지 못하면 성령을 받지 못한 증거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방언이나 또 어떤 은사가 제일 중요하고 좋은 것이라고 순번을 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령의 은사는 사용되는 용도와 목적이 달라서, 어떤 것은 더 좋아 보이거나 커 보이고, 어떤 것은 덜 훌륭해 보이거나 작아 보일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 모든 성령의 은사는 다 훌륭하고 좋은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오고, 한결같이 귀중하고 중요한 성령의 은사에 대하여 조금 더 자세하게 함께 공부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성령의 은사에 대한 성경 절들
[고린도전서 12장 8~10절]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고린도전서 12장 28~30절]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다음은 능력이요, 그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로마서 12장 6~8절]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 하는 자면 권위 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2. 성령의 은사의 종류
성령의 은사에 대한 위의 성경 절들을 보면, 우리가 미처 주의를 기울이거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이 성령의 은사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성령의 은사에는 우리의 타고난 재능이나 달란트도 속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만일 교육을 많이 받지는 못했지만, 매우 지혜로워서 매사에 지혜롭게 행동하고,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닫고 이해하여 지혜의 말씀을 말하고 사람들에게 잘 권면한다면, 그 사람은 성령의 은사인 “지혜의 말씀”을 받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머리가 총명하고 지식이 많으며, 말씀과 진리를 논리적으로 잘 이해하고 가르친다면, 그리고 그 지식으로 인류를 위해 봉사한다면, 그 사람은 성령의 은사인 “지식의 말씀”을 받은 것입니다.
믿음이 좋은 것도 성령의 은사입니다. 어떤 사람은 아무리 믿으려고 해도 천성적으로 의심이 많고 부정적이라서, 잘 믿어지지 않거나 믿음이 약한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 마음이 단순하고 긍정적이고 믿음이 좋고 강해서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과 진리를 금방 어려움 없이 잘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성령의 은사인 “믿음”을 받은 것입니다. 그 외에 섬기는 일, 구제하는 일, 자비와 긍휼을 베푸는 일도 훌륭한 성령의 은사입니다. 대접을 잘하거나, 남을 섬기는 일, 또 다른 사람들을 잘 권면하고 위로하거나, 친절과 사랑을 베푸는 은사도 하늘로부터 받아야 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나 그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그동안 주목하지 않았던 많은 것이 성령의 은사임을 이제 우리는 알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 3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교회 안이나 형제들 간에 생기는 분쟁은, 많은 경우에 다른 사람의 재능이나 달란트를 질투하거나 시기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그것은 성령의 은사를 빼앗으려는 무모한 욕심에 불과합니다. 누구에게나 성령의 은사가 주어집니다. 다른 사람이 가지지 못한 것을 자기만이 가진 경우도 많습니다. 자신이 받은 성령의 은사를 감사하고, 하나님의 사업과 인류를 위해 봉사하고 섬기기 위해 더 많은 성령의 은사를 구하는 사람은 하늘로부터 응답과 풍성한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또한, 받은 대로 하나님을 위해 그 은사를 사용하고, 직무들을 겸손한 마음으로 감당할 때에 그 은사는 더욱 계발될 것이며 자신도 몰랐던 자기 속에 잠재해 있는 은사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3. 바울이 가장 크다고 말한 은사는?
성경에는 가장 크고 좋은 은사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영감을 받아 기록한 것인데, 대부분 사람들은 이 중요한 성령의 은사에 대해 간과해 버립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한 가장 크고 좋은 성령의 은사는 무엇일까요? 놀랍게도 그것은 “사랑”입니다. 그는 고린도전서 12장에 성령의 은사에 대해 쭉 나열한 후에, 마지막 절인 31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그는 제일 좋은 은사를 보여주겠다고 말하면서, 계속되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 가장 큰 은사인 “사랑”에 대해서 소개합니다. 놀랍지요? 방언이나, 병 고치는 능력이나, 가르치는 은사가 아닌, “사랑”을 가장 큰 은사라고 바울은 정의하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가장 큰 은사인 “사랑”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왜 사랑이 가장 큰 은사일까요?
그 이유는 바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10).
아무리 훌륭한 방언을 해도, 병을 고치는 큰 이적을 하고, 능력을 행사한다 할지라도, 그 사람의 성품에 하나님 성품의 사본이며, 계명의 밑바탕과 기초가 되는 사상인 “사랑”이 없으면 그것들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사랑이 동기가 되어 나오는 봉사 이외에는,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 행동하고 살려는 사랑의 헌신 이외에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지 않습니다. 이기적인 동기, 즉 자신의 능력이나 재능을 나타내기 위해, 혹은 자기만족의 정신을 가지고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그 외에 이기적인 동기나 목적으로 성령의 은사를 이용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 불쾌한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사랑이 가장 큰 은사라고 말하는 이유는, 사람이 온전히 거듭난 마음,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과 성품을 가지고 사랑으로 그 은사를 사용할 때에만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며, 그럴 때에만 그 은사가 위대한 능력을 발휘하게 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y
신앙 3부: 하나님의 선물로 주신 성령의 은사들
Q: 타고난 재능이나 재질도 성령의 은사라고 하는데, 그 의미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알 수 있을까요?
A: 네,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거나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가 선천적으로 받은 성령의 은사가 많이 있습니다. 만일 그것에 대해 깨닫기만 하면, 그 은사에 대해 너무나 감사하고, 그것을 더 잘 활용하고 계발시켜,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할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함께 공부해 보기로 하지요.
1) 달란트의 비유에서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마 25:15).
1. 달란트 - 성령의 선물
예수님께서 감람산 위에서 제자들에게 그분의 재림에 대하여 말씀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님 재림의 때가 가까움을 알려줄 징조들을 말씀하시며 제자들에게 깨어 준비하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그런 다음에 주님께서는 그분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은, 무료하게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부지런히 일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라고 가르쳐주시며, “달란트”의 비유를 말씀해주셨습니다.
●다른 지방으로 가는 사람 : 그리스도
●종들 :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
●자기 소유 : 주님을 위하여 사용해야 할 것들
성경은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값으로 산”(고전 6:20) 바 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모든 하늘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각 사람의 의지와 애정과 지능과 심령을 다 사셨기 때문에,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은 다 주님의 소유입니다. 모든 사람은 그분을 위해 봉사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 요구에 어떻게 응했느냐에 따라 큰 심판 날에 그것에 대해 회계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비유에 나타난, 종들에게 위탁하신 달란트는 성령이 나누어 주시는 선물과 축복을 나타냅니다. 모든 사람이 다 같은 선물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주님의 종들에게 각각 다른 성령의 선물을 주시기로 약속되어 있습니다.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고전 12:11).
이 모든 선물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우리의 것이 되었지만, 실제로 그것을 소유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을 받아들이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엡 4:7). 학식과 달란트와 웅변과 선천적, 또는 후천적 재능을 다 가졌다 해도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한 사람의 마음도 감동하게 할 수 없고, 단 한 명의 죄인도 그리스도를 믿게 할 수 없습니다. 반면에 만일 사람이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성령의 선물을 갖게 된다면, 아무리 무식한 제자일지라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될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이 세상에서 최고의 감화를 끼치는 통로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2. 달란트 - 선천적 선물 계발
특별한 성령의 선물만이 비유에 나오는 달란트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 달란트는 선천적이고, 후천적인 것에 관계없이, 또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에 관계없이 모든 선물과 재능을 다 포함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각각 그 재능대로” 나누어 주셨습니다. 달란트는 아무렇게나 나누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다섯 달란트를 사용할 수 있는 재능을 가진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받게 되고, 두 달란트만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두 달란트를 받게 됩니다. 그렇지만 아무도 더 큰 선물을 받지 못했다고 해서 슬퍼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각 사람에게 달란트를 나누어 주신 분은 그것이 크거나 작거나 간에, 각자가 그 맡은 달란트를 잘 활용할 때 모든 사람으로부터 똑같은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이지요.
달란트는 아무리 적을지라도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크게 관계되는 문제는 내가 얼마나 많이 받았느냐가 아니고, 내가 받은 것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온갖 능력을 계발하는 것이 하나님과 우리의 동포를 위해 해야 할 첫 번째 의무입니다. 하나님과 동역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은 재능뿐만 아니라, 신체의 각 기관과 마음의 자질을 완전하게 하기 위하여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참된 교육은 육체적, 지적, 도덕적 능력을, 우리의 모든 의무를 잘 수행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이 교육은 거룩한 봉사를 위하여 육체와 정신과 영혼을 훈련하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영생에 이르게 하는 교육입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모든 방면으로 능률과 재능이 자라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사용해야 하고,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한 달란트를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고후 8:12)십니다. 이 모든 달란트는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에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때, 우리는 우리의 모든 소유와 우리 자신을 아울러 그분에게 바치는 것이며, 그럴 때 그분은 우리가 바친 것을 순결하게 하시고 고상하게 하셔서, 그것으로 동료 인간들을 축복하고 그분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데 쓰도록 우리에게 다시 돌려주실 것입니다.
2) 달란트의 계발·성품 계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아름다운 성품을 계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달란트의 계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로 만들어, 하늘의 율법의 원칙과 조화되게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곧 사람들이 자신과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품성을 재현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생애 속에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것이 곧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름다운 예수님의 성품을 가지기 위해, 또한 품성의 아름다움을 닦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완전한 품성을 얻는 일이 쉽다는 보증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고상하고 모든 면에 원만한 품성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연히 얻어지는 것도 아니지요. 고상한 품성은 그리스도의 공로와 은혜를 통하여 개인이 노력함으로써만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재능과 정신력을 주시지만, 품성 형성은 우리가 하는 것입니다. 품성은, 자아로 더불어 맹렬하게 싸움으로써 형성됩니다. 타고난 성벽을 끊어 버리기 위하여 거듭거듭 계속하여 싸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자신을 면밀하게 돌아보고, 단 하나의 좋지 않은 성벽도 고쳐지지 않은 채 남아 있도록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도 “나는 품성의 결점을 고칠 수 없다.”라는 말을 하지 마십시오. 할 수 있고 없고는 당신의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하려고 하지 않으면 할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은 성화 되지 못한 타락한 마음, 곧 하나님의 지배에 복종하기를 즐겨 하지 않는 마음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아무도 절대로 자기 자신이 세운 표준보다 더 높이 올라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의 성품을 우리의 표준으로 삼고, 비록 고생되더라도 한 계단 한 계단씩 극기와 희생으로 그 진보의 사다리의 꼭대기까지 올라가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꼴 지워진 성품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내세로 가지고 갈 수 있는 유일한 재물입니다. 그러므로 현세에서 우리의 품성을 계발하는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의 의지와 하나님의 뜻이 협력할 때에 그것은 전능한 것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의 힘을 의지하여 이룰 수 있습니다. 그것을 믿는 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신앙 4부: 자세하게 공부하는 달란트의 선물(1)
이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들, 곧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 그리고 얼마든지 계발할 수 있는 달란트들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공부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어진 재능과 재질들을 계발하고 더 진전시키기를 원하십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과 그분의 사업을 위하여 더 유용하고 효과적으로 봉사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자, 지금부터 달란트에 대해 더 살펴보기로 합니다.
지능Mental Faculties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지능을 훈련하기를 요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녀가 세상 사람들보다 더욱 많은 재능과 더욱 명석한 식별력을 갖도록 계획하셨습니다. 유능하고 정통한 일꾼이 되기에 너무 무관심하고 게으른 자들을 주님께서는 기쁘게 여기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하여 우리의 창조주를 알고 그분을 사랑하기 위하여 우리의 지능을 최고로 계발해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영의 지배를 받을 것 같으면, 그리고 우리의 지능이 철저하게 계발되면 될수록, 그것을 더욱 효과적으로 주님을 섬기는 일에 사용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어디서 어떻게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거나 그분에 대해 말하라는 부르심을 받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일할 지적 자격을 갖출 기회를 하나도 놓치지 말아야 하고, 성경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으며, 성실한 노력과 깨어 기도함으로써 위로부터 오는 지식을 얻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원만한 교육을 받게 되어 지식과 함께 품성이 점점 자라날 것이며, 다른 사람의 마음을 감화시킬 수 있는 감화력을 갖게 되어 그들을 의와 거룩한 길로 인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참된 교육은 대학에서 줄 수 있는 교육 이상의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의 산 연결을 맺으므로 얻을 수 있는 더욱 더 고상한 교육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하나님의 지식을 먼저 갖추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언어Speech
언어의 재능은 부지런히 수련해야 할 달란트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우리의 모든 달란트 가운데 언어의 달란트보다 더 큰 축복이 되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말로써 사람의 마음을 각성시키기도 하고, 설득시키기도 하며, 언어로써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송을 올릴 수 있으며, 언어로 다른 사람들에게 구주의 사랑을 이야기해 줄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언어와 음성을 올바로 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너무 작게, 또는 너무 빨리 말하거나, 책을 읽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의 목소리는 둔탁하고 불분명한 소리를 내거나, 너무 높고 날카로운 소리를 내어 사람들을 편안하지 못하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발음이 정확하지 않아서 의사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예도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부지런히 노력함으로써 남이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분명하게 말하므로 좋은 인상을 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는 주님의 일꾼으로서의 유용성을 증가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대중을 상대로 하는 봉사에 부름을 받은 사람들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은, 듣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언어와 음성을 잘 훈련해야 합니다. 진리를 전하는 사람의 말하는 방법과 음성과 태도 여하에 따라서 그 기별을 받아들이게도 되고 거절하게도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할 때 듣는 사람들이 잘 이해하고 마음에 감화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말은 천천히, 똑똑하게 그리고 엄숙하게 말할 뿐 아니라, 중요한 대목에서는 온 정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 일에 우리는 성령의 도움을 받기 위하여 기도해야 하며,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의 모든 기관을 잘 훈련해서 완전한 일을 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언어를 바르게 수련해서 사용하는 일은 그리스도인 활동의 모든 분야와 관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가정생활에는 물론, 서로 하는 교제에도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말할 때 쾌활하게 말하고, 순결하고 정확하게 말할 뿐 아니라, 친절하고 예절 있게 말하도록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특히 우리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고쳐 주려고 할 때는 우리의 말을 더 조심해야 합니다. 그 말들은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향기가 될 수 있고, 사망에서 사망에 이르는 냄새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많은 사람은 남을 책망하고 충고할 때 날카롭고 가혹한 말을 할 뿐 아니라, 상한 심령을 고치는 데 합당치 못한 말을 하며, 서투른 말을 함으로 상대방을 격분시키고 반감을 갖도록 합니다. 진리의 원칙을 변호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하늘로부터 사랑의 기름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또한 자녀들에게 올바른 언어 습관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자녀는 어릴 때부터 부모와 서로 간에 존경하고 사랑하는 말을 하도록 배워야 합니다.
만일 우리의 정신과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차 있을 것 같으면 그것이 우리의 대화에 나타날 것이며, 우리의 영적 생애에서 믿음을 나누는 일이 어려운 일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말은 마음을 나타내는 도구입니다. 잘 연습 되고 성령의 제어를 받은 아름다운 말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능력을 갖추게 될 것입니다.
감화력Influence
감화력은 아무도 주의를 기울이거나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달란트입니다. 우리는 동료 인간과 서로 연결되어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대가족의 일원이 되어 있어서 아무도 홀로 살 수 없습니다. 사람은 각각 자신의 분위기, 곧 생명력을 주는 믿음과 용기와 소망으로 가득 차고 달콤한 사상의 향기가 넘치는 분위기에 둘러싸여 있거나, 아니면 이와 반대로 불만과 이기심으로 침울하고 우울하고 쓸쓸한 분위기에 둘러싸일 수도 있으며, 때로는 품고 있는 죄로 말미암아 몹시 오염된 유독한 분위기에 둘러싸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를 두르고 있는 분위기로 말미암아 우리와 접촉하는 사람들이 은연중에 그 영향을 받게 됩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과 의복과 품행과 심지어는 안색까지도 각각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끼치는 감화는 사람이 판단할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오게 합니다. 만일, 어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선한 감화를 끼친다면, 그 선한 감화와 영향을 받은 사람이 같은 감화를 다른 사람에게 끼치게 되고, 또 그 사람은 또 다른 사람에게 끼치게 되어, 우리가 무의식 중에 주는 감화 때문에 여러 사람이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조약돌을 호수 가운데 던져 생겨나는 파문과 같지요. 파문이 만드는 원이 점점 넓어져서 또 다른 원을 그리다가 마침내는 그 호수의 가장자리까지 이르게 되는 것처럼 우리의 감화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감화력은 우리가 알고 조종할 수 있는 이상으로 멀리 퍼져서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이 되거나 저주가 되기도 합니다.
품성은 힘입니다. 참되고 이기심 없고 경건한 생애가 나타내는 무언의 증거는 소멸할 수 없는 감화력을 발산합니다. 우리는 삶 가운데 그리스도의 품성을 나타냄으로써 영혼 구원 사업에 그리스도와 협력하게 됩니다. 우리 감화의 범위가 넓으면 넓을수록 더욱 많은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모본을 따라 삶 속에서 율법의 원칙을 실천할 때, 곧 모든 행동으로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하고 저희의 이웃 사람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한다는 것을 증거할 때, 교회는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 감화력을 갖게 될 것입니다. 또한 한편, 감화력은 악에 대해서도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의 영혼을 잃어버리는 것도 두려운 일이지만, 다른 사람의 영혼을 잃게 하는 것은 더욱 두려운 일입니다. 우리의 감화력이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가 된다면,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모은다고 하면서 오히려 그분으로부터 흩어 버리는 일을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후일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가 끼친 감화의 결과를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감화가 비록 소리도 없고 의식되지 않는다고 해고,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와 천국으로 이끄는 큰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y
신앙 5부: 자세하게 공부하는 달란트의 선물(2)
시간Time
시간을 갖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시간은 똑같이 공평하게 주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시간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매 순간이 하나님의 것이므로 그것을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해야 할 엄숙한 의무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인생은 헛되이 보내기에는 너무도 짧습니다. 우리가 영생을 위하여 준비할 은혜의 기간은 불과 조금밖에 없습니다. 낭비할 시간도 없고, 이기적 오락을 위하여 쓸 시간도, 죄에 방종할 여가도 없습니다. 내세, 즉 영생을 위하여 품성을 개발해야 할 때는 바로 지금입니다. 만일, 영생을 얻는 데 대한 참된 지식을 얻지 못한다면, 세상의 모든 수고와 획득은 헛된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시간을 아끼라는 권면을 받고 있습니다. 시간을 아낄 수 있는 단 한 가지 방법은 남아 있는 시간을 가치 있게 사용하는 것과 하나님의 크신 구속 사업에 그분과 동역자가 되는 것뿐입니다. 어떤 이들은 주님의 사업을 위해 금전만 바치면 그것으로써 저희가 해야 할 본분을 다했다고 생각하며, 주님을 위하여 개인적으로 봉사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이용하지 않고 헛되이 지내버립니다. 그러나 건강하고 힘이 있는 사람이 하나님을 위하여 활발하게 봉사하는 것은 저희의 특권이요 의무입니다. 모든 사람이 영혼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금전을 바치는 것만으로는 이 일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일분일초에는 영원한 결과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 부름을 받든지 봉사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는 비상 대기병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은 도움이 요구되는 사람에게 생명의 말씀을 전할 기회가 있지만 그런 기회가 다시 주어지지 않을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셨으니, 하나님을 아는 일에, 그리고 영혼들을 하나님과 그분의 진리로 인도하는 일에 온 힘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지식과 지능을 습득하는 일에서의 성공 여부는 우리의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일분일초라도 소중히 여기고 시간을 허비하거나 쓸데없는 일에 낭비하지 않도록 합시다. 질서 있고, 철저하고 민첩하게 하는 습관을 배양하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의무입니다. 시간을 효과 있게 사용하는 방법을 연구하며, 매우 활동적이고 남을 위해 봉사하시던 예수님의 생애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또한,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시간의 가치와 시간을 옳게 사용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을 존경하고 사람들에게 축복이 될 일을 힘써 하는 것이 가치 있는 일임을 가르쳐 주며, 게으르고 나태한 습관이 무능하고 쓸모없는 사람이 되게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할 것입니다. 세상일에 나태하고 부주의한 습관을 지닌 사람은, 그 습관들이 신앙 생애에도 재현되어 하나님을 위하여 능률적인 봉사를 하기에 적합하지 못한 사람이 되게 합니다. 시간을 아껴 쓰지 않는 게으른 사람은 하는 일이 없고 분명한 목표가 없으므로 만 가지 시험을 초래하며, 그 습관이 그들의 심령과 정신을 부패시켜 그 결과로 이 세상에서 파멸될 뿐 아니라 내세를 위한 생명까지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건강Health
건강은 사람들이 별로 그 가치를 깨닫지 못하는 축복과 선물 가운데 하나입니다. 모든 일에 대한 정신적, 육체적 능률이 건강에 많이 달려 있습니다. 우리의 동기와 정서가 우리의 신체 속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달란트를 가장 잘 활용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육체를 가장 양호한 상태로 보존하여 영적 감화를 가장 잘 받을 수 있는 상태로 유지되게 해야 합니다. 체력을 약화시키는 것들은 모두 정신력을 약화시켜서,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는 판단력을 감소시키고 선을 택할 힘이 약해지게 하며, 옳은 것을 행할 의지력도 약해지게 합니다. 우리의 체력을 잘못 사용하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될 수 있는 우리의 삶의 기간을 단축하게 된다는 엄숙한 사실을 깨닫고 그리스도인들은 건강을 잘 보존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나쁜 습관에 빠지도록 방임하고 밤늦게까지 자지 않을 뿐 아니라,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식욕을 방종하는 일, 운동을 등한히 하고, 심신을 과도히 사용함으로 신경계통에 균형을 잃게 하는 일, 인체의 법칙을 무시함으로 수명을 짧게 하고 하나님께 봉사할 수 있는 자격을 상실하게 하는 사람들은, 엄격한 의미로 보면 하나님과 동료 인간들에 대하여 도둑질하는 죄를 범하는 것과 같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축복을 나눌 기회와 하나님께서 세상에 보내어 하라고 하신 일이 건강을 상실하므로 중단되기 때문입니다.
건강 법칙과 자연의 법칙을 범하는 것은 도덕적 법칙을 범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는데, 이유는 하나님이 도덕적 법칙뿐 아니라 자연법칙도 만드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건강의 축복을 타고난 사람은 그 타고난 선물을 잘 보존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더 많이 봉사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일을 하기에 적절한 건강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누구나 다 인체의 구조를 잘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육체의 건강과 생명을 잘 보존하고 발달시킴으로써, 인간을 통하여 신의 성품이 잘 드러나게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신체 조직과 그 활동을 지배하는 법칙을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습관은 마음의 지배를 받아야 하며, 우리 마음은 하나님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 20).
재물과 부Money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재물을 맡겨 주십니다. 또 사람들에게 재산을 얻을 능력을 주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돈을 주신 것은 우리 자신을 높이고 영화롭게 하려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신실한 청지기로서 이 돈을 하나님을 존경하고 영화롭게 하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저희의 재물 일부분만을 주의 것으로 생각하여, 종교적 목적과 구제 사업을 위하여 얼마의 돈을 떼 놓은 후에 그 나머지는 자기의 것으로 생각하고 자기 마음대로 사용하는데 그것은 잘못입니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은 다 주님의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사용한 데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합니다. 돈을 한 푼 한 푼 쓰는 데서 우리가 하나님을 최상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지가 나타날 것입니다.
돈은 큰 선을 행할 수 있기 때문에 매우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돈을 생활필수품을 마련하고, 다른 사람을 축복하고, 그리스도의 사업을 전진시키는 목적 이외에 사용할 것 같으면 그 돈은 모래와 마찬가지로 쓸모없는 것이 됩니다. 돈을 사랑하고 재물이 우상이 되어 아껴 모은 재산은 이생에서 하늘 보물에 대한 사람들의 애착심을 빼앗는 올무가 되기 쉽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큰 날에, 사용하지 않은 달란트와 등한히 한 기회를 들어 그것을 소유했던 자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친절한 마음과 애정Kindly Impulses & Affections
친절하고 관대한 마음과 애정과 영적 사물을 빨리 깨닫는 이해력 등은 귀한 달란트인 동시에, 이런 달란트를 가진 사람에게는 중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이 모든 달란트는 하나님의 사업을 위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많은 애정과 친절함을 소유한 사람은 자기의 친구뿐만 아니라 도움이 요구되는 모든 사람에게, 애정과 친절을 베풀어 주어야 할 의무를 하나님께 지고 있습니다. 사교성 또한 달란트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달란트를 우리의 영향을 받고 있는 모든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사용해야 하지요. 몇 사람에게만 친절을 베푸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고 이기주의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베푸는 사랑과 친절은 하나님을 기쁘게 합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진 선물인 애정과 친절과 사교성은 영혼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데 매우 가치 있게 사용될 수 있기 때문에 좋은 달란트입니다.y
달란트의 활용
달란트는 사용할수록 증가합니다. 모든 일에 성공적인 결과를 얻는 것은 우연히 되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과 깊은 사려와 인내와 견인불발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보수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가진 모든 선물을 다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노력하여 달란트를 계발하고 주님을 위해 사용한다면, 더욱 큰 선물을 하늘로부터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부족한 재능을 이적을 통해 채워 주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에게 있는 것을 활용할 때 그분은 우리의 능력을 증가시키고 더 강하게 하려고 우리와 협력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굴복시켜 성령께서 역사 하실 수 있는 도구가 되게 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 역사 하여 옛 버릇을 억제하고, 좋지 않은 성질을 극복하게 하시며, 새 습관을 기르게 하십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더욱 많이 받게 될 것이며 더 좋은 일을 많이 행하게 될 것입니다. 잠자고 있던 능력이 각성되고, 마비되었던 기능이 새 생명을 받게 되어 더욱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타고난 달란트를 사장하지 마십시오. 달란트를 계발하고 잘 활용한 사람만이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선고를 받게 될 것입니다. 아무도 "그 에게서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라는 선고를 받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 오로지 자기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 사용한 달란트는 점점 쇠퇴해져서 마침내 거두어질 것이며, 큰 심판 날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하지 않은 자들과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고 자신만을 생각하고 자신만을 기쁘게 하면서 산 사람들은, 악한 일을 행한 자들로 취급당할 것입니다. 아무리 작은 달란트라도 주어진 달란트에 감사하고 만족하며 하나님을 위해 사용한 사람은 마지막 날에 큰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y
신앙 6부: 성령의 열매와 은사
Q: 성령의 은사와 성령의 열매는 같은 것인가요?
A: 성령의 은사와 성령의 열매는 다릅니다. 기능과 성질에서 두 가지는 서로 차이가 있지요. 더 자세하게 성령의 열매에 대해 연구해 보실까요?
성령의 열매와 은사의 차이점1. 성령의 열매
성령의 열매는 모든 믿는 사람들이 반드시 가져야 합니다. 성령의 열매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믿고, 그분께 모든 것을 바친 사람, 예수님의 임재 속에서 주님과 동행하며 사는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 생기는 성품의 변화와 열매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 하시는 결과로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그분의 뜻대로만 사시던 예수님의 성품이 우리 속에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하지요. 성령의 열매는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과 성품으로 회복시키시는 성령 역사의 결과로 생깁니다. 성령의 열매 아홉 가지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그러므로 믿는다고 하면서 성품과 삶 속에 성령의 열매가 맺히지 않는 사람은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힌 참 그리스도인의 성품이 바로 구원받을 성품입니다.
2. 성령의 은사
앞에서도 공부했지만, 성령의 은사는 개인의 성품을 구원받을 품성으로 변화시키기 위하여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은사는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고, 도와주고, 봉사의 일을 하기 위하여 주시는 것이며, 자신의 구원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위하여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성령의 열매가 먼저 그리스도인에 맺혀야 성령의 은사가 생기게 됩니다. 만일, 성령의 열매가 맺힘 없이, 육신의 욕망과 자아가 그대로 살아 있는 거듭나지 않은 그리스도인에게 성령의 은사가 주어진다면, 그 은사는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됩니다. 하늘로부터 받은 재질과 재능과 능력을 하나님의 영광과 동료 인간들의 유익을 위하여 사용하기보다는,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 자신이 영광을 받으며, 질투와 교만한 마음을 그대로 지니고 그것들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속해 있는 교회나 사회나 가정은 매우 불행하고 문제가 많은 곳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하나님 안에서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 성품과 생애에 성령의 열매가 풍성하게 맺힌 사람, 자아가 주님 안에서 완전히 죽은 사람이 성령의 은사를 받고 그 은사를 사용해야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그 은사가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이 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성령의 열매가 마음속에 생기면 자연히 성령의 은사가 생기게 됩니다. 하나님과 사람을 향한 사랑이 가득 찬 마음속에서는 다른 영혼들과 교회를 위하여 봉사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과 행동이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은사를 원하거나 사용하기를 원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하나님 안에서 진정으로 거듭난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Q: 성령의 열매가 열리는 데는 순서가 있나요? 그리고 각 사람마다 맺히는 열매가 서로 다른가요?
A: 성경에 성령의 열매 아홉 가지가 순서대로 나오지만, 사실 성령의 열매가 맺히는 순서는 없습니다. 다만, 열매의 질과 성숙도는 사람마다 달라 차이가 나지요. 더 자세한 공부를 계속해볼까요?
성령의 열매가 열리는 데 순서가 있는가?
성령의 열매는 똑같이 동시에 열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있는 사람이 기뻐하지 않을 수 없고, 화평한 사람이 자비하지 않거나 오래 참지 못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옛 생애를 청산하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을 때, 그 사람 속에서는 성령의 열매가 맺힙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예전과 똑같이 화내고 질투하고 미워한다면, 그것은 진짜 주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그리스도인의 생애가 아닙니다. 곧 진정으로 거듭난 경험을 했다고 할 수 없지요. 중요한 사실은, 성령의 열매 역사는 점진적이고 진행형이며, 계속적이라는 사실입니다. 매일 자아가 죽고 거듭나는 경험이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하듯이, 성령의 열매도 매일 열려야 합니다.
물론, 성령의 열매 성숙도와 질에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새로 진리를 깨닫고 예수님을 받아들인 사람은, 거듭남의 경험과 신앙의 연륜이 얕아서, 아직 성품과 생애가 장성한 그리스도인 분량의 열매를 맺을 수는 없지만, 그러나 그 단계에서 나름대로 완전한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할 수가 있습니다. 새로 태어난 아기가 뛰거나 빨리 걸을 수 없듯이, 새로 거듭난 사람은 변화된 시간이 짧아서 양과 질적인 면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는 일이 힘들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도둑질만 하던 사람이 회개했다고 해서 갑자기 자비와 양선을 많이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되기는 어렵겠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은혜와 능력 안에서 매일 자아를 굴복하며 살므로, 그 어떤 것을 보아도 다시는 탐심을 품지 않으며, 이제는 남의 물건을 탐하여 훔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기꺼이 나누어주고자 하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게 되고, 그다음에는 조금씩 더 큰 자비와 양선을 베풀 수 있는 성숙한 성품으로 변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장성한 분량의 열매를 맺으신 분입니다. 이 땅에서의 주님의 생애와 성품을 보면, 그분은 자아가 없는, 남을 위해 온전히 주는 희생의 생애와 사랑의 생애를 사셨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성령의 열매를 맺지만, 그 성숙도와 질과 양에 있어서 장성하고 성숙한 예수님의 열매보다는 매우 부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의 역사에 매일 굴복하고 살 때에, 우리의 자아를 매일 주님께 바치고 우리의 뜻대로 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만 살 때에, 우리도 예수님처럼 성숙하고 장성한 분량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성경은 열매를 맺으며 자라고 변해가는 그리스도인의 생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1,22).
Q: 완전해져야 성령의 은사를 받나요?
A: 그런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완전해져야 성령의 은사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이 변하고 생애에 진정한 성령의 열매가 맺히기 시작하면, 그리고 구원의 경험과 변화의 경험이 진실하면, 그 사람은 성령께서 사용하실 수 있는 준비가 된 상태의 사람입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말을 읽으신 어떤 분들은, 우리가 완전한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만 성령의 은사를 받을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사람이 거듭나는 경험을 하고, 온전히 모든 것이 하나님께 굴복된 상태일 때, 성령의 은사가 주어지고 성령께서 우리를 쓰실 수 있는 도구가 됩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우리가 성령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를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준비 상태와 열매의 질과 양에 따라, 그리고 그 사람에게 주어진 성령의 은사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각각의 경우와 상황에 맞게 그 사람을 일꾼으로 쓰십니다. 얼마나 감사한 특권입니까?
성령께서 역사 하실 때에 우리에게 제일 먼저 일어나는 현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순종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그렇게 할 힘이 생깁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의로운 생각과 생활을 살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재질을 하나님께 바쳐서 성령께서 쓰실 수 있도록 굴복해야 합니다. 교만한 자는 성령의 은사를 받을 수도 없고, 그런 사람의 수중에 있는 재능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보다는 자신을 우상시하고 높여서 오히려 사단의 역사를 돕는 것이 됩니다. 성령의 은사를 받으려면 제일 먼저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들과 함께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지존 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 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사 57:15).
마치면서..
성령의 은사를 충만하게 받아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하나님께서 준비된 사람들에게 성령을 충만히 부어주셔서, 마지막 참된 복음을 바벨론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외치게 하실 때입니다. 전에 없이 하나님께 충성하고, 매일 성령의 충만하심을 받아 하나님의 증인으로 사용되는 독자들이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y
시골 생활 이야기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고전 13:4)
첫 번째 관문 통과하기
(이 글은 지난 145호에서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이른 아침에 밭을 매려고 나왔습니다. 밭고랑에 앉으니 어깨높이까지 자란 수수의 잎들이 자꾸만 얼굴을 스칩니다. 풀들은 이슬에 젖어서 장갑이 축축해지고 양말까지 축축해지는 것 같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해가 올라와 등을 뜨겁게 하고 땀이 나기 시작합니다. 좁은 밭고랑에 쭈그리고 앉아서 일하니 몇 발짝 못 가서 벌써 다리가 아프기 시작합니다. 쉬려면 한 줄이라도 끝까지 나가서 쉬어야 할 텐데 한숨과 불평이 나오려고 합니다. 그때 몇 발짝 앞서 가시는 아버지께서 가족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조금만 더 참자… 끝이 보이려고 한다.”
그리고 아버지는 찬송을 부르기 시작합니다. 저는 속으로 중얼거립니다. 아버지는 뭐가 좋다고 노래를 부르시지? 나는 힘들어 죽겠는데(?)… 그때에 조용히 성령님이 제 마음에 말씀하십니다. ‘너의 불평하는 마음을 내게 주고 너도 함께 찬송을 불러 보렴.’ 잠시 후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새소리와 함께 작은 골짜기가 가족들의 노랫소리로 가득 찹니다.
그렇게 오전에 일을 마치고 땀을 씻고 점심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열심히 일한 탓인지 몸이 피곤합니다. 잠시 쉬었다가 공부해야지 생각하고 있는데 아버지께서 부르십니다.
“햇볕이 뜨거울 때에 해야 풀이 잘 죽으니 잠깐 걸기질(인쟁기질)을 하고 오자! 그리고 와서 네 할 일을 하여라.”
아, 또 일해야 해? 오전에 힘들게 일하고 샤워까지 다 했는데 또 땀을 흘려야 한다니… 영 마음에 내키지 않습니다. 또 불평스런 마음이 듭니다. 일복으로 갈아입고 투덜대며 나가는데 성령님이 또 따라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뭐가 그렇게 불만이니? 이왕이면 감사하고 기쁜 마음으로 아버지를 도와드리렴.’ 아니, 성령님, 지금 제가 감사하게 생겼습니까? 오전에 일을 도와드린 것으로 충분한데 계속 일만 하면 언제 공부를 합니까? 다시 성령님이 말씀하십니다. ‘오늘 아침에 네가 기도하지 않았니? 오래 참는 사랑을 달라고. 지금 네가 간구한 그 사랑을 네게 주려는 거란다.’
걸기질을 하는데 아버지께서 말씀하십니다.
“덥기는 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바람을 불게 해서 시원하게 해주시니 감사하구나.”
아버지는 앞에서 끄는 제가 힘들까 봐 보습을 깊이 대지 못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아버지, 깊이 대셔도 돼요. 맨발로 흙을 밟으면서 하니까 기분이 좋은 데요…”
그렇게 걸기질을 마치고 집에 와서 옷을 갈아입고 이제 공부해야지 생각하고 방 안에 들어가 책상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주방에서 바쁘게 일하시는 어머니가 저를 부르시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말씀하시기도 전에 불쑥 말이 튀어나옵니다. “아, 또 뭐유~?” “힘들겠지만 물 좀 길어다 줄 수 있겠니?” “어머니…” 제가 무언가 말을 하려는데 성령님이 다시 말씀하십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성령님도 참 끈질기시네요. 아, 알겠습니다. 제게 오래 참는 사랑을 주십시오.
물을 길어오는데 갑자기 바로 이런 것을 통해 내가 오래 참으시는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제야 아침에 오래 참는 사랑을 달라고 기도한 것에 대한 응답으로 그 사랑을 가질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의하면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의 성품을 닮기 위한 첫 번째 관문은 “오~~래 참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골이야말로 그 관문을 통과하기 위한 훈련 장소로서 적합한 곳입니다. 시골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가지고 마치 시골을 천국처럼 생각하고 계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시골은 도시보다 더 나은 훈련 학교일 뿐이지 천국이 아닙니다.
시골에 와서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는 분들의 간증을 많이 듣게 됩니다. 예수님과 비교되는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면서 더 하나님께 부르짖게 됩니다. 사단은 큰 것을 가지고 우리를 시험하고 넘어뜨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하고 꼭 승리해야 하는 것은 작은 일들에서부터입니다. 우리의 매일의 삶에서 예수님의 성품을 닮을 기회 주심을 감사합니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을 닮기 위한 어떤 관문을 통과해야 할지 기대해봅니다.y
바이블 맨에게 물어보세요: 성령 받은 증거는 무엇인가요?
성령을 받으면 항상 기쁘고 즐거울 텐데, 왜 이렇게 외롭고 허전할까요?
좀 불안하고 걱정이 됩니다. 어떻게 하면 되지요?
“우리는 이 일의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행 5:32).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은 순종하는 자들에게 임하신다는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라고 말씀하셨고, 같은 장 23절에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계명들을 순종하는 것이 성령을 받을 방법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을 받는 사람들의 느낌과 감정이 모두 같을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 받은 증거로써 감정의 극치를 기대하지만, 성경은 오히려 성령께서 역사 하시는 모습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 3:8). 우리는 바람을 보지 못하지만 바람이 무엇을 하는지는 알 수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이 마음에 역사 할 때에 그것을 만지거나 볼 수 없지만, 그분의 능력이 조용한 가운데 새로운 생명을 가져오는 결과를 볼 수는 있습니다. 만일 우리의 마음이 성령의 역사에 따라서 변화된다면, 우리의 생애가 성령의 임재하심을 증거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임재는 우리의 느낌이나 감정이 아닌 변화된 생애를 통해서 분명하게 확증할 수 있습니다. 만일 온전히 자신을 비우고 마음속의 우상과 죄를 버린다면, 그리스도의 영께서 그 마음속을 충만하게 채우실 것입니다. 오직 이러한 사람들만이 성령의 은사를 받을 수 있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에 대해서 자랑하지 않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릴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심이라”(고전 2:12). 하나님의 영을 받으면, 어떤 느낌보다는 침착함과 예리한 판단력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생애를 드릴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이 충만한 생애이셨으나 감정적 환희와 흥분으로 차있지 않고, 고뇌와 희생으로 점철된 생애였습니다. 그분의 삶에서 성령 충만함은 하늘 아버지의 뜻을 조용하면서도 진지하게 순종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처럼 진실한 그리스도인도, 이성적인 하나님의 진리와 분별력이 감정과 느낌을 다스려야 합니다. 진리는 건전한 상식 위에 세워지며, 질서 있는 가정생활을 통하여 다른 영혼들에게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마음의 거룩함과 생애의 순결을 위해 애쓰는 많은 그리스도인이 괴로움과 낙담 중에 방황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자비와 인자하심에 시선을 두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믿음에 대한 잘못된 생각은 우울한 신앙생활을 하게 만듭니다. 참된 믿음이 가지고 있는 단순함 그 이상을 추구하기 때문에 마음 가운데 온통 어둠으로 사로잡히게 됩니다. 우리는 말씀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단순한 마음으로 믿어야 합니다. 자신의 믿음을 신뢰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들을 신뢰해야 합니다. 마음속의 감정이 어떻든 그리스도께만 시선을 고정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면서 하나님 안에서의 쉼을 얻어야 합니다.
자신의 부족함과 무가치함을 인식할 때마다 심령 깊숙한 곳에 두려움이 몰려들지만,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변했거나,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이 변했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어제 우리가 느꼈던 것과 같은 평화와 기쁨을 오늘은 느끼지 못할 수 있지만,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손을 붙잡고 흑암 가운데서도 빛 가운데서와 같이 온전히 주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마음이 우울할 때, 사단은 “너무도 큰 죄인이므로 그리스도께서 구원하실 수 없다.”라고 속삭이며 우리를 깊은 낙심의 계곡으로 밀어 넣으려 합니다. 우리 자신이 참으로 죄 많고 무가치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염려하지 말고 유혹자를 만날 때에 이렇게 외쳐야 합니다. “나는 나 자신의 공로를 의지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로에 의지하여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였다. 나를 정결하게 하시는 예수님의 보혈을 신뢰하며, 이 순간에도 무력한 나의 영혼을 그리스도께 의탁한다.” 그리스도인은 활기 있는 믿음을 가진 생애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 대한 흔들리지 않는 신뢰와 확고한 믿음은 마음 가운데 끊임없는 평화와 확증이 될 것입니다.
장차 구원받은 자들이 하늘에서 찬양할 “십자가의 죽음으로 우리의 죄를 속량하신 어린 양”의 노래에 귀를 기울여서 이기는 자들에게 주어질 면류관을 믿음으로 바라보십시오. 이런 장면들을 현실화하여 생각하도록 힘쓰십시오. 순교자 스데반은 공회 중에서 정사와 권세와 영적 사악함과 맹렬하게 투쟁할 때에 부르짖기를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라고 하였습니다(행 7:56). 그는 그리스도께서 지극한 관심을 두고 하늘에서 그를 내려다보고 계신 광경을 볼 수 있었으며, 그의 원수들까지도 그의 얼굴이 하늘의 천사처럼 빛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자신의 마음을 그리스도와 하늘에 더 많이 둔다면, 우리는 주님을 위한 싸움에서 강력한 격려와 지지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곧 우리가 갈 하늘나라의 영광을 생각할 때에 교만과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은 사라지고, 예수님의 사랑 외에는 어떤 것도 가치 없이 보이게 될 것입니다.
아무도 스스로 열렬한 노력 없이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지 말아야 합니다. 오랫동안 마음이 세상 일만 몰두하도록 허용한 사람은 자신의 습관적인 생각을 변경시키기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장차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 도성에 들어가 예수님과 그분의 영광을 바라길 원하는 사람은 먼저 이 세상에서 믿음의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습관을 지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과 품성이 우리의 생각과 이야기의 주제가 되어야 하며 날마다 일정한 시간을 드려 거룩한 주제들을 명상하는 일에 바쳐야 합니다.y
Did you know?: 어떤 영의 은사를 구하십니까?
오늘날 성령 은사를 추구하는 대부분 교회는, 무아경 속에서 하는 알 수 없는 방언을 초대 교회가 받았던 성령의 참 은사라고 가르치며, 오늘날의 교회에 그 은사가 있는 것은 정당하다는 증거로서 고린도전서 14장을 이용합니다. 이러한 견해에 대한 논쟁이 수년 동안 교회들 사이에서 존재해 왔습니다.
고린도교회에 구체적으로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우리가 세세히 다 알 수는 없지만, 대체적인 문제의 핵심은 분명합니다. 고린도교회의 갓 태어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연륜에 비해서 엄청난 영적 은사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을 대항하여 싸우기엔 너무도 약한, 겨우 10여 명의 남녀들이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널리 확산시키는 데 필요한 강력한 의사소통의 무기를 그들에게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새로 얻은 언어의 능력을 최대한 이용해 보고 싶은 열정에서, 그 미숙한 그리스도인들은, 그 당시 신비 종교에 빠져 있는 주변의 이교도들에게 어떤 전시 효과를 나타냄으로써 감명을 주고자 노력했습니다.
오늘날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방언을 말하는 방법, 즉 한 번에 하나의 의미 없는 음절을 말하는 방법을 가르칩니다. 배우는 사람이 마침내 자유롭게 자음 모음을 붙여가며 말을 하기 시작하면 그는 은사를 받은 것으로 인정됩니다. 이러한 초보자들은 거의 모든 은사 중심의 집회들에 참석할 때마다 만족한 편안함을 느끼게 됩니다. 예배 분위기에 따라 감정이 고조되어서 그 절정에 달하면 자동으로 사람들은 방언으로 응하게 됩니다.
고린도교회나 현대 교회들의 상황을 비교해 보면, 영적 선물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이 잘못 이해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아마도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사단에게 잃어버린 바 되었다고 선언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참을성 있고 친절하게 그리고 분명하게 그들을 지도하고, 그들과 함께 수고한 결과, 그들은 마침내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미숙한 그리스도인을 사랑으로 양육하며 성경의 진리로 양육하는 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입니다. 현대의 방언을 모두 사단의 소행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그리스도인 복음 활동에 역효과를 가져옵니다. 비록 사단이, 오늘날 종종 방언이라고 불리는 말들을 마음대로 자극하고 조종할 수 있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열심히 당신을 찾는 자들을 아시며 그들을 안전하게 지켜주실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했듯이, 오늘날에도 인내심을 가지고 영혼들을 찾아내어 꾸준히 도와줄 그런 사도들이 필요합니다. 미숙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아이와 같으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그들을 잘 돌보아 줄 책임을 지우십니다.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 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막 9:42).
여러분 자신의 생활을 살펴보십시오. 여러분의 생활 속에서 성령의 열매가 맺히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증거 활동은 성령의 능력으로 기름 부은 바 되었습니까?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마7:4). 우리 자신의 부족함을 깊이 인식하게 될 때에, 우리는 연약한 자들을 참된 사랑과 깊은 염려로 돌보아 줄 수 있게 됩니다. 성령께서 어떤 영혼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기 위해서는 성령의 임재하심으로 그 영혼의 마음이 움직여져야 합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리(영문 번역)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리(영문 번역)로 예배할지니라(요 4:23, 24). 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