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문화 황금기 담은 불화, 日에 전해지다
규수박물관 소장 ‘관무량수경변상도’
唐 문화 대변… 교류 통해 日전해져
화려·장엄한 도상, 구성 완벽 ‘눈길’
정토 수행 이끄는 불교회화사 ‘걸작
일본 규수국립박물관 소장 〈관무량수경변상도〉의 모습. 14세기 가마쿠라 시대에 조성됐다.
이전 연재에서 밝혔듯이 과거 한·중·일 3국의 불교는 그 어느 종파보다도 아미타사상에 입각한 정토신앙이 널리 퍼지고 흥성하게 되면서 이에 따라 〈정토변상도〉가 많이 그려졌다. 중국 미술사상 수·당 이후 대략 7세기 전후해 미적 감각에서부터 예술 양식에 이르기까지 대대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북위시대 전기의 암울 침잠했던 흐름이 홀연히 밝고 선명한 모습으로 일신한 것이다. 우리가 앞에서 붓다 ‘본생도’에서 살펴봤듯이 숭고, 비원(悲願)의 아름다움이 북위시대 흐름이었다면 당대에 이르러 현실의 즐거움으로 바뀌면서 우리와 친숙한 보살, 비천, 금벽(金璧) 휘황찬란한 전각, 누각으로 나타났다. 중국문화의 황금기인 그야말로 찬란한 대당세계(大唐世界)가 펼쳐진 것이다. 우리가 지금 논의하는 ‘변상도’ 역시 이 시기에 최고 절정을 이뤘다. 이 시기 중국 장안에서 서쪽으로는 지중해 연안까지 동쪽으로는 신라 경주, 바다 건너 일본까지 ‘비단길(Silk Road)’이 이어져 교류가 빈번했다.
이렇게 교류가 빈번했던 시기의 많은 문물이 오갔을 터인데, 우리나라에는 이 시기 미술품으로 전해지는 것이 한 점도 없어 아쉽다. 그러나 일본에는 언제 전해졌는지는 불명확하지만 찬란한 당(唐) 문화를 대변하는 〈관무량수경변상도〉 가 있어 이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는 규수국립박물관 소장 〈관무량수경변상도〉로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을 위해 손수 제작했다고 전해진다. 이 〈관경변상도〉는 당나라에서 일본으로 전해져 일본 정토종의 당마사(當麻寺)에 모셔져 ‘당마만다라(當摩曼茶羅)’라고 불린다. 정토교의 기본 경전은 〈아미타경(阿彌陀經)〉 〈무량수경(無量壽經)〉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 등 세 가지 경전으로 이뤄져 있어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으로 불린다. ‘정토삼부경’은 말 그대로 극락세계의 부처님이신 아미타불을 믿고 모든 선근과 공덕을 닦아서 모든 사람들이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바라고, 또 그러한 사실을 내용으로 펼치고 있다.
정토계 경전의 내용을 회화적으로 표현한 ‘정토삼부경’ 만다라 중 일본 규수국립박물관 소장 〈당마만다라〉는 가장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사상적으로도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이 ‘변상도’는 아미타여래가 주재하는 서방극락정토의 모습을 중심으로 〈관무량수불경〉의 요의(要義)와 당나라 선도(善導) 대사의 〈관무량수불경소(약칭 관경사첩소)〉의 내용을 아주 섬세한 수법으로 절묘하게 표현해내고 있다. 이 그림은 화려·장엄하며 정교하고 완벽한 구성미를 갖추고 있다. 또한 뛰어난 화법으로 표현하고 있어 가히 불교회화사에서 정토수행을 이끄는 최고 걸작이라 할 수 있다. 그림 속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부처님께서 왕사성 기사굴산(영취·취두·취봉)에 있을 때, 마가다국 왕사성(王舍城)에는 아사세 태자가 부처님을 시기하고 모함하던 나쁜 벗 데바닷타(提婆達多)의 꾀임에 빠져 부왕 빔비사라왕(頻婆娑羅王, 재위 기원전 580~550)을 감옥에 가두었다. 이때 왕비인 위제희 부인(韋提希 夫人)은 왕을 도울 방법을 강구했다. 그러던 중 궁중 깊이 갇히게 되자 슬픔과 시름으로 몸이 마르고 마음 또한 산란하기 짝이 없었다. 위제희 부인은 멀리 기사굴산을 향하여 부처님께 예배하고 말씀드렸다.
“부처님이시여! 지난날 부처님께서는 언제나 아난존자를 보내어 저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저는 지금 깊은 시름에 잠겨있으나 거룩하신 부처님을 뵈올 길마저 없습니다. 원하옵건대 목련존자와 아난존자를 보내주시어 저를 위로하여 주시옵소서.”
그 모든 바람을 들으신 부처님께서는 곧 목건련과 아난에게 허공으로 날아가도록 하시고는 부처님도 기사굴산에서 홀연히 자취를 감추고 바로 위제희 부인이 있는 왕궁으로 가셨다. 이때 위제희 부인은 부처님을 뵙자 목에 걸고 있던 구슬 목걸이를 끊어버리고 엎드려 울면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부처님이시여 원하옵나니 저를 위하여 괴로움도 번뇌도 없는 곳에 대해 자세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저는 마땅히 그 곳에 태어나도록 힘쓰겠습니다.”
이렇게 하여 부처님께서는 위제희 부인을 포함한 모든 중생을 위해서 서방아미타정토를 볼 수 있고 거기에 태어날 수 있도록 ①일상(日想)을 시작으로 ②물을 생각하는 관(水想), ③땅을 생각하는 관(地想) ④보배나무를 생각하는 관(地想), ⑤공독수를 생각하는 관(八功德水想), ⑥보배누각을 생각하는 관(總觀想), ⑦연화대를 생각하는 관(華座想), ⑧형상을 생각하는 관(像想), ⑨부처님 몸을 생각하는 관(偏觀一切色身想), ⑩관음보살을 생각하는 관(觀觀世音眞實色身想), ⑪대세지보살을 생각하는 관(觀大勢至色身想), ⑫두루 생각하는 관(普觀想), ⑬섞여 생각하는 관(雜想), ⑭신자의 품성에 따라 구품왕생을 설하는 3관 상배관(상품상생·상품중생·상품하생), ⑮중배관(중품상생·중품중생·중품하생), 하배관(하품상생·하품중생·하품하생)의 16관을 설하셨다.
〈관무량수경변상도〉의 아미타삼존불 부분도의 모습.
화면의 중앙 즉, 내진(內陣)은 가장 중심되는 내용으로 좌우 및 아래쪽 3면으로 구성돼 있다. 중앙에는 아미타불과 관음·세지보살의 삼존을 중심으로 제성중 34존(尊)과 연지(九品연못), 누각 등 극락정토의 모습을 웅장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그림의 바깥쪽(外陣)의 좌측 가장자리는 ‘관경(觀經)’ 서문에 나오는 아사세태자의 이야기를, 오른쪽 가장자리는 본론의 16관상 중 제1 관상부터 제13 관상까지, 아래 부분은 제14 관상부터 제16 관상까지 서술하고 있는 삼배구품(三輩九品) 아미타불(阿彌陀佛) 내영(來迎)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이 그림은 가마쿠라 시대의 뛰어난 모사 작품 중 하나이며, 예를 들어 여래와 보살의 얼굴과 신체의 미세한 부분까지 정교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 밖에 제존(諸尊)과 연지, 심지어 하늘까지도 금니(金泥)를 많이 사용하고 있으며, 군청과 청록색을 중심으로 밝고 투명한 색채를 적용하여 눈길을 끈다. 이 그림은 시가(滋賀)현 오쓰(大津)시의 원만원(圓滿院)의 전래품으로 구 표구(裝鑄)는 영향(永享) 7년(1435)의 수리했으며, 화기에는 묵서가 남아있다.
이 그림은 ‘정토삼부경’ 중 〈관무량수불경〉(약칭 觀經)의 내용을 정확히 묘사하고 있으며, 일본 서산(西山) 정토종 개산조사 증공상인(證空上人, 1177~1247)의 해석에 따라 중국 정토종 제2조 선도(善導) 대사의 〈사첩소〉의 내용과 정확히 일치하며, 불보살 권화시현(權化示現)의 작품으로 꼽힌다. 따라서 이 〈관경변상도〉는 일본의 정토사상 발전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일본에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그림에 대한 내력으로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일본의 고대 전설이다. 일본 나라시대(710-793) 우대신(右大臣) 후지와라 도요나리(藤原豊成)의 딸 히메지(姬氏)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매우 그리워하며 야마토(大和, 지금의 나라)의 당마사로 출가 비구니가 되었으며, 법명은 법여(法如)라고 전해진다. 서방정토왕생에 대한염원이 간절하여 7일 동안의 발심으로 서방극락세계에 이르기를 염원했다.
여섯째 날을 한 비구니가 나타나 소원을 이루게 해주겠으니 말 100마리에 실을 수 있는 분량의 연꽃 줄기를 모으라고 지시했다. 그는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3일 동안 연꽃 줄기를 모았다. 이때 그 비구니가 다시 나타났고, 법여는 그 비구니의 지시에 따라 절에서 우물을 파서 채취한 연줄기를 씻어 실로 뽑아냈다. 연실을 햇볕에 말렸는데 자연스럽게 오색이 찬란했다. 한편 이와 동시에 또 다른 여자가 나타났다, 두 사람은 큰 방에서 베(삼베)짜기을 시작하여 단지 하룻밤 사이에 1장(丈) 5척(尺)의 만다라를 그릴 수 있는 비단을 짜냈다. 이것은 생생하고 명확한 〈관무량수경〉을 묘사한 〈당마만다라〉의 내력이다.
법여 비구니는 두 여성의 신원을 알게 되어 기뻐했다. 첫 번째 비구니는 법여에게 자신이 아미타불의 화신이고, 두 번째 여인은 관세음보살의 화신이라고 말했다. 그 이후로 법여는 이 만다라를 일심으로 관상(觀想)하였으며 소원과 같이 775년에 서방정토에 왕생했다.
또 다른 내력은 현대 학자들의 고증에 따른 것으로 이 〈관경변상도〉의 화면의 누각, 인물의 이미지는 완전히 중국 당나라 양식이며, 구성 형태는 돈황 벽화의 〈관경변상도〉와 동일하다 그리고 일본은 8세기에 그렇게 뛰어난 회화 기술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중국 당나라에서 일본으로 유입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보는 견해이다. 또한 그 내용은 선도 대사의 〈관경사첩소〉의 내용과 정확히 일치하며, 선도 대사 자신은 불화에 심취하여 직접 〈정토변상도〉를 많이 그렸는데, 이 그림은 선도 대사와 깊은 연관 관계가 있어 보이며, 당시 선도 대사가 그해에 그린 그림인지도 모른다고 추정하고 있다.
이 〈관무량수경변상도〉가 전설처럼 아미타불과 관음보살을 직접 제작하든, 아미타불의 화신인 선도 대사 그렸든, 이 그림의 내력과 신기한 권위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또한 이 〈관무량수경변상도〉의 화면을 보면, 화려·장엄하고 정치(精緻)한 묘사와 완벽한 구성 그리고 우수한 기교는 불교 예술의 극치를 이르고 있다. 아마도 후세에 나타나는 〈정토변상도〉와는 비교되는 미술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작품이라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