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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토 지역으로 백제 사람들의 대량 이주
야마도 지역으로 백제 사람들의 대량 이주
백제 왕실과 야마도 왕실 사이의 근친관계
홍원탁 (서울대 교수)
고사기와 일본서기는, 야마도 왕국이 수립된 직후에, 백제 사람들이 야마도 지역으로 대량
이주해 온 사실에 대해 자세한 기록을 하고 있다. 1
3세기 말에 편찬된 삼국지 위서 동이전은 일본열도에 말이 없다고 기록을 했다.
그런데 고사기와 일본서기는 말이 공식적으로 일본열도에 도착하는 것을 기록한다.
오오진(應神) 15년인 404년에 백제왕이 아직기(阿直岐) 편에 두 마리의 순한 말(고사기는
암, 수 한 마리씩이었다고 구체적으로 밝힌다)을 보내왔는데, 아직기가 경전도 읽을 줄
알았으므로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오오진이 아직기에게 백제에 자신보다 더 학식이 뛰어난 인물이 있느냐고 묻자, 아직기는
왕인(王仁)이 있다고 대답하였다. 왕인은 405년에 백제에서 건너왔으며, 태자는 왕인으로
부터 많은 경전을 배웠다.
아직기는 아직사(阿直史)의 시조가 되었으며,
왕인은 서수(書首, 文首)의 시조가 되었다.
고사기는, 백제왕이 대장장이와 의복을 만드는 재단공을 보냈으며, 또 술 담글 줄 아는
사람(仁番, 須須許理)도 보냈는데, 오오진(應神)이 그가 맞잇게 빚은 술을 즐기는 장면을
기록한다. 2
일본서기는, 오오진 7년인 396년에, 한반도에서 건너온 사람들을 시켜 저수지를 만든 다음
한인지(韓人池)라 불렀다고 기록을 하는데, 고사기를 보면 신라에서 온 사람들을 시켜
저수지를 만들고서 “백제지(百濟池)”라 불렀다고 기록이 되어 있다.
일본서기는 백제왕이 403년에 진모진이라는 재봉사를 보내왔는데 그녀가 바로 구메
재봉사(衣縫)의 시조라고 말 한다. 3
일본서기에는, 하다 씨족의 시조가 되는 궁월군(弓月君)이 403년(오오진 14년)에 120개 현
의 사람들을 이끌고 “백제로부터” 야마도에 도착하였으며, 409년(오오진 20년)에는
야마도 아야(倭漢) 씨족의 시조가 되는 아지사주(阿知使主)가 17개 현의 사람들을 이끌고
왔다는 기록이 있다. 4
삼국사기 399년 조와 광개토대왕 비문(400년 조)의 기록들은, 바로 이 시기에 백제로부터
일본열도로 일련의 대규모 이주가 실제로 일어나는 과정을 추적해 볼 수 있게 하는 사료가
된다. 5
신찬성씨록은, 하다씨족(秦氏)들이 (오오진의 아들) 닌도쿠(仁德)왕 때에 여러 현에 분산
되어 거주 하면서 양잠을 하여 비단을 조정에 바쳤고, 5세기 후반 유라쿠(雄略)왕 때에는
이 하다 씨족의 규모가 총 18,670명에 달해 92개의 베(部)를 이루었다고 말한다. 6
속일본기는, 야마도 왕국의 중심부인 다케치(高市, 타카이치) 지역이 아지사주가 인솔해 온
아야 씨족으로 넘쳐나 다른 씨족은 열에 한 두 명도 안되었다고 말한다. 7
신찬성씨록에는 아지사주가 오오진 왕으로부터 허가를 받아 이마끼(今來) 군을 만들었는데,
후에 그 이름이 다케치 군으로 바뀌었으며, 이마끼 지역이 아야 씨족으로 너무 붐비게 되어,
이들을 여러 지방으로 분산 배치했다고 말한다.
하리마 풍토기에는 아야 씨족이 재배치되는 사례만이 아니라, 하다 씨족과 결혼관계를 맺는
것까지 기록이 되어 있다. 8
하리마 풍토기는 또, “오오진 때에 백제로부터 도래한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자기 나라에서
하던 식으로 (흙을 파, 掘城處) 성을 쌓아 올리고 살았기 때문에 키무레(城牟禮)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어떤 지명의 유래를 밝힌다. 9
한국 고어에서는 산을 “모” 또는 “뫼”라 했다. 따라서 “무레”는 산을 의미했을 것이다.
그런데, 백제 사람들은 아주 특이하게 성(城)을 키(己, 只)라고 불렀다. (이기문, 1972: 37-
38 참조.) 그러므로 여기서 “키무레”는 “성-산”이라는 뜻으로, 백제 사람들이 (몽촌토성
모양) 흙으로 축조하는 “산성”을 말하는 것 같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유략쿠 7년(463)에 “백제에서” 야마도 지역으로 각종 기술자들이 또
한차례 대규모로 건너 왔는데, 그 중에는 안장을 만드는 사람, 도자기를 만드는 사람,
그림을 그리는 사람, 비단을 짜는 사람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새로이 도착한 기술자들은 오오진 때에 도래한 (야마도 아야 씨족의) 사람들과 구별하기
위하여 이마끼 아야(今來漢, 新漢)라고 불렀으며, 기존의 야마도 아야(倭漢) 씨족이 관할
토록 했다. 10 “이마끼”는 이제 방금 새로 건너왔다는 뜻이다.
백제 사람들의 이와 같은 대규모 이주는, 야마도 왕국의 역사에서 한국이 분명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동경대 문화인류학 교수인 이시다(石田英一郞, 1974: 85)는 “사학자들에 의한 상세한 연구
는, 야마도 조정에 의해 일본이 통일된 직후에 최대 규모의 이민 물결이 있었음을 분명히
보여주는데, 만일 야마도 조정이 한국과 아무런 관련도 없이 세워졌다고 한다면, 이러한
대규모 이민의 유입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라고 말했다.
백제 왕실과 야마토 왕실간의 근친 관계
일본서기를 읽어보면, 백제 왕실과 야마도 왕실이 아주 가까운 친족 관계일 것이라는 인상
을 강하게 받게 된다.
예컨대, 야마도 조정에는 백제 왕족 가운데 누군가가 거의 항상 체류를 하고 있었다.
백제 아신왕(392-405년)의 태자인 전지는, 397년부터 405년까지, 오오진과 함께 야마도에
살았다. 그는 405년에 부왕이 서거하자 백제로 돌아와, 그 뒤를 이어 전지왕(405-20년)이
되었다. 전지왕은 자신의 누이동생 신제도를 야마도에 보내, 오오진을 모시게 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11
오오진의 뒤를 이은 닌토쿠왕 때, 백제 왕자 주(酒)가 야마도 조정에 와서 매를 길들이고
닌토쿠와 함께 매사냥을 다니기도 했다.
개로왕(蓋鹵王, 455-75)때에는 백제 조정에서 유랴쿠의 왕비감으로 모니(慕尼)부인의 딸을
보냈는데, 그녀가 부정한 짓을 해서 그만 화형을 당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개로왕은 그의 동생 곤지(昆支)를 야마도 조정에 보내 유략쿠를 돕도록
하였다. 12
일본서기에 의하면, 개로왕은 자신의 아기를 임신하고 있던 여인을 곤지에게 주어 보내면서,
그녀가 도중에 해산을 하면 아기를 즉시 돌려보내라고 말했다.
그 여인은 정말로 큐슈 부근 섬에서 아기를 낳았고, 곤지는 즉시 사마(한국어로 섬 혹은
시엄)라는 이름의 그 아기를 배에 태워 개로왕에게 보냈다.
일본서기는 그 해가 461년이라고 기록을 했다. 그 아기가 후에 무녕왕(武寧王, 501-23)이
되었으며, 무녕왕 능은 1971년에 공주에서 발견되었다.
발굴된 지석에는 무녕왕의 이름이 사마 이었으며, 523년에 62세의 나이로 죽었음을 기록
하고 있다. 무녕왕의 관은 남부 일본에서만 자라는 금송(金松)으로 만들었다 금송이 자라면
보통 지름이 1.2미터, 높이가 36미터에 달한다.
백제의 삼근왕(477-79)이 479년에 죽자, 곤지의 둘째 아들이 백제로 돌아와 동성왕(479-
501)이 되었다. 일본서기는, 유랴쿠가 백제로 떠나는 곤지의 아들의 얼굴과 머리를 쓰다
듬어 주면서 작별을 아쉬워하는 장면을 묘사한다. 13
백제 무녕왕은 505년에 사아(斯我)라는 왕자를 보내 야마도 조정에서 일을 돕도록 했다.
597년 에는 위덕왕이 아좌(阿佐)태자를 보냈다. 일본서기는, 의자왕의 아들 풍장(豊章)이
631년에 건너왔다고 기록했다. 14
신찬성씨록은 야마도 왕국의 1,182개 지배씨족의 조상들을 기록하고 있다.
이 성씨록의 서문에는 마히또(眞人)가 황족 중에서 으뜸가는 씨족이기 때문에, 수도 지역의
마히또 씨족들을 제1권 황별(皇別) 첫머리에 수록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기록 내용을 검토해 보면, 모든 마히또 씨족을 백제 왕족의 후손으로 간주 할 수
있다. 15
성씨록 제1권 맨 첫머리에 실려 있는 4개의 마히또 황족들은 호무다(오오진) 왕의 후손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5번째는 케이타이(繼體) 왕의 후손, 6번에서 12번까지는 비다쓰(敏達)
왕의 후손, 13번에서 20번까지의 마히또 씨족들은 백제친왕(百濟親王)의 후손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다.
그런데 12번째 씨족, 즉 백제 친왕의 후손으로 기록되어 있는 씨족들 바로 앞에 기록되어
있는 마히또 황족은, 비다쓰 왕의 후손인 백제왕(敏達孫百濟王)의 자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환언하면, (6번부터 12번까지의) “비다쓰 왕의 후손”은 “백제왕의 자손”과 동일하다는
말이 된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비다쓰 왕은 케이타이 왕을 계승한 킨메이(欽明) 왕의 둘째 아들이었
으며, 케이타이 왕은 또 호무다의 5세손이 된다.
결국 첫 번째에서 20번째까지의 모든 마히또 씨족들이 “백제왕”의 자손들이었다고 신찬성
씨록이 기록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호무다 계통의 일본 황족이 모두 백제 왕족에서 유래했음을 의미한다. 16
660년, 백제의 수도가 나당 연합군에게 함락된 후, 야마도에서 귀국한 왕자 풍장은 복신과
함께 주유성에서 항전을 계속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당시 사이메이(655-61년) 여왕과 태자 덴지(662-71년)는, 큐슈까지
나와서, 백제 구원작전을 진두지휘 했다. 663년, 야마도 조정은 구원병 만 여명을 보냈는데,
이들은 백촌강(白村江) 전투에서 궤멸되었고, 주유성(州柔城, 周留城)은 당군에게 함락
되었다.
이 대목에서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그러자 나라 사람들은 서로들 다음과 같이 말을
주고받았다: 주유가 함락 됐구나. 이젠 어찌할 도리가 없구나. 오늘로서 백제라는 이름이
사라지고 말았구나. 이제 우리 조상들의 무덤이 있는 그 곳을, 어찌 다시 찾아 가 볼 수 있을
것인가?”17
國文版 부록: 신찬성씨록의 도래인 분류방식
고사기, 일본서기, 속일본기의 기록들은 모두 왕인이 백제에서 건너 왔다는 것을 밝히고
있는데, 유독 신찬성씨록 만은 왕인이 중국에서 왔다고 말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신찬성씨록은, 하다 씨족과 아야 씨족도 중국(漢)에서 도래한 씨족으로 분류를
해서 현대 일본 사학자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다.
왜 그랬을까? 이제 그 이유를 캐 본다
신찬성씨록이 편찬되고 있었던 8세기 말과 9세기 초 라는 시대는, 야마도 왕국 전체가
아직도 중국의 문물을 동경하며 열심히 견당사를 파견하고 있던 시기였다.
한반도의 백제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
중국의 모든 것이 부럽고, 중국과의 역사적 연관성이 그저 좋아 보이기만 할 때였다.
신찬성씨록에서 제번(諸蕃)이라고 부르는 “공식적”인 도래인 씨족들의 기록은, 중국의 한
(漢) 나라에서 건너왔다는 씨족부터 시작을 해서, 백제, 고구려, 신라, 가야의 순서로 기록
을 했다.
한 나라에서 건너왔다는 씨족들의 출자(出自)는 진 시황제(秦始皇帝), 한 고황제(漢高皇帝),
후한 광무제(光武帝), 령제(靈帝), 헌제(憲帝), 위 무제(魏武帝), 등 엄청난 존재들이다.
그런데 신찬성씨록에 기록된 (수도와 주변 5개 구니의) 1,182개의 지배 씨족들의 조상들을
검토 해 보면, (天孫降臨 원칙에 따라) 문서상으로 완전하게 “토착화”시켜놓은 백제계 지배
씨족들을 제외하고서도, 너무나 백제를 주축으로 하는 한국계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신찬성씨록의 편찬자들은, 인위적으로 왜곡을 해서라도 균형을 맞추기 위해,
아지사주, 궁월군, 왕인 같이 분명하게 백제에서 건너온 사람들을 중국(한 나라)에서 온 것
으로 억지 재분류 했던 것 같다.
신찬성씨록에 실린 1,182개 씨족 중, 335개가 고오베쓰(皇別), 403개가 신베쓰(神別), 328
개가 쇼한(諸蕃), 116개가 기타(未定雜姓) 씨족으로 분류되어 있다.
403개의 신별은, 373개의 천신(天神) 씨족과 30개의 땅의 신(地祇) 씨족으로 나뉘어 있다.
아주 내놓고 도래 씨족이라고 분류를 한 328개의 제번 씨족의 조상은, 104개가 백제, 42개가
고구려, 9개가 신라, 10개가 가야, 163개가 중국에서 건너온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중국에서 도래했다는 씨족 중에는, 왕인, 궁월군, 아지사주 등의 후손을 포함하는
54개의 백제 계통의 씨족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을 바로 잡으면, 제번 중, 백제에서 도래한 씨족이 158개로 증가되고, 중국에서 도래한
씨족은 109개로 감소된다. 116개의 기타 미정잡성 씨족 중에는, 백제, 고구려, 신라, 가야
출신이 (각각 18, 7, 8, 1) 모두 해서 34개가 포함되어있다.
우리가, 야마도 왕국 초창기에 도래한 백제 왕족의 후손을 고오베쓰(皇別)로 간주하고,
그들과 함께 도래한 비(非)왕족 지배층의 후손을 (하늘에서 나려 왔다는) 천신 씨족의
신베쓰(神別)로 본다면, 신찬성씨록에 실린 1,182개의 지배씨족 중, 한국 도래인과 직접
관계가 없는 씨족은, (토착 세력인) 땅의 신(地祇) 씨족 30개, 중국 출자 제번씨족 109개,
비(非) 한국계 미정잡성씨 82개 등, 모두 합해 전체의 20%도 안 되는 221개 씨족에 불과한
것이다.
신찬성씨록 자체의 기록에 의하면, 5세기 초에 궁월군이 이끌고 건너온 120현 하다 씨족의
수가, 5세기 후반 하쯔세 (유랴쿠, 雄略) 왕 때에 와서는 18,670명에 달했다고 한다.
속일본기는 다케치 고을이, 일찍이 아지 사주가 데리고 온 17현 사람들로 넘쳐 나서, 다른
씨족은 열사람 중에 한 두 명도 안 되었다고 기록을 했다. 18
아지사주가 데리고 온 사람들도 결국은, 셋츠, 아후미, 하리마 등 각 지역으로 분산 배치 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배치 된 마을의 촌장은 거의 모두 아야 씨족 사람들이 담당했다.
신찬성씨록의 편찬자들은, 무엇보다도, 이렇게 규모가 큰 하다 씨족과 아야 씨족의 출자를
백제로 그냥 놓아둘 수가 없었다.
[각주]
1. “야마도”는 기나이(畿內)의 5개 구니(國)중 하나로, 오늘날의 나라현(奈良縣)을 의미한다.
옛날에는 그 지역을 倭 혹은 大倭라 쓰고 (대) 야마도라 읽었는데, 737년부터 大和로 고쳐 쓰기
시작했다. 읽기는 전이나 마찬 가지로 야마도라 읽는다. 야마도 평야는 남북으로 30킬로, 동서로
15킬로 정도가 되는 지역이다
2. 亦百濟國主照古王 以牡馬壹疋牝馬壹疋 付阿知吉師以貢上 此阿知吉師者 阿直史等之祖 . .
又科賜百濟國若有賢人者貢上 故受命以貢上人 名和邇吉師 卽論語十卷 千字文一卷 . . . 此和邇
吉師者文首等祖 . . . 又貢 上手人韓鍛名卓素 亦吳服西素二人也 又. . . 及知釀酒人 名仁番亦名
須須許理等參渡來也 (K: 248)
3. 應神 十五年 百濟王遣阿直伎 貢良馬二匹. . . 阿直伎亦能讀經典 卽太子. . 師焉 於是天皇問阿
直伎曰 如勝汝博士亦有耶 對曰 有王仁者 是秀也 時遣. . 荒田別 . .於百濟 仍徵王仁也 其阿直伎
者 阿直伎史之始祖也 . . 十六年 . . 王仁來之 卽太子. . . 師之 習諸典籍於王仁 莫不通達 所謂王
仁者 是書首等之始祖 (NI: 371-373)
亦新羅人參渡來 是以. . .命引率 爲役之堤池而 作百濟池 (K: 248)
應神 七年 高麗人百濟人任那人新羅人 並來朝 時命. . . 領諸韓人等作池 因以 名池號韓人池
(NI: 367)
應神 十四年 百濟王貢縫衣工女 曰眞毛津 是今來目衣縫之始祖也 (NI: 371)
4. 亦百濟國主照古王 . . . 亦貢 . . . 又貢 . . . 又秦造之祖 漢直之祖 . . 等參渡來也 (K: 248)
應神 十四年 弓月君自百濟來歸 . . .領己國之人夫百卄縣 . . . 然因新羅人之拒 皆留加羅國 十六年
. . 乃率弓月之人夫 與襲津彦共來焉. . 卄年. . 倭漢直祖阿知使主. . .並率己之黨類十七縣而來歸
焉 (NI: 371- 75)
도중에 (가라 지역에서) 신라인들의 방해로, 궁월군이 인솔해 온 사람들의 실제 야마도 도착
연도는 405년이 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399년에 아신왕이 고구려를 공격하려고 크게 병마를
징발하니, 많은 백성들이 괴로워 신라쪽으로 달아났기 때문에 호구가 크게 줄어들었다 한다.
아마 이 달아난 사람들이 몇 년 후에 궁월군과 아지사주를 따라 야마도로 이주한 백제 사람들인
것 같다. 광개토왕비는 400년에 왜적의 배후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의 종발성에 이르자 성은
즉시 투항했고, 이어 신라성을 공격하자 왜구가 크게 무너졌는데, 성안의 대부분 사람들이 왜인
을 따라가기를 거부했다고 기록을 하고 있다.
시기적으로 보아 삼국사기의 기록과 일관성이 있는 것이다
阿智使主之黨類 自百濟國來歸也 日本三代實錄 (日本六國史 韓國關係 記事原文: 216-217).
일본삼대실록의 세이와(淸和) 죠오간 4년(862년) 조는, 사카우에 라는 씨족이 아지사주의 후예
인데, 이 아지사주의 무리들은 (중국으로부터가 아니라) “백제”로부터 건너왔다고 분명하게
기록을 하고 있다. 일본삼대실록은 우다(887-897년) 천황의 명에 의해 편찬된 세이와-요오제이
-고오코오 3대 29년 간(858-887년)의 역사 기록이다.
삼국사기에 인용된 기록에 의하면, 기원전 18년에 온조가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했었는데,
그로부터 389년이 지난 371년에 근초고왕이 도읍을 한성(漢城)으로 옮겼다 한다.
위례성이나 한성이나 모두 한산(漢山)과 한수(漢水)의 인근 지역이다. 한성 백제는, 그로부터
105년이 지난 후 (475년에 장수왕이 왕도 한성을 포위하고 개로왕을 잡아 죽였을 때), 문주왕이
웅천으로 천도를 하면서 끝이 났다 5세기 초, “한성”백제에서 건너온 아지사주와 그 백성들을
“漢人(아야 사람)”들 이라고 부르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고사기와 일본서기가 어째서 “한나라, 물 이름, 은하수” 등을 뜻하는 한(漢)이라는 한자
를 써 놓고 “아야”라고 읽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이들 하다(秦)와 야마도 아야(漢) 두 씨족은, 백제의 부(部)제도를 본 따서, 야마도 조정의 재정
출납 등 온갖 행정 기능을 맡아보게 되었고, 그 덕으로 야마도 조정은 국가로서의 기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다.
5. 阿莘王 八年 王欲侵高句麗 大徵兵馬 民苦於役 多奔新羅 戶口衰減 (S2: 45-46)
廣開土王碑文 十年 敎遣步騎五萬 往救新羅 . . . 自倭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 . .倭寇大潰 城內
十九盡拒隨倭
城內十九盡拒隨倭
6. 大泊瀨稚武天皇御世 . . . 秦民九十二部一萬八千六百七十人 (SS: 307)
仁德 御世 以百二十七縣秦氏 分置諸郡 卽使養蠶織絹貢之 (SS: 279)
7. 阿智使主 . . 率十七縣人夫歸化 詔高市郡檜前村而居焉 凡高市郡內者 檜前忌寸及十七縣人夫
滿地而居 他姓者十而一二焉 (SN4: 380)
8. 阿智王 譽田天皇御世.七姓漢人等歸化 . . .仍賜大和國檜隈郡鄕居之焉 . . . 飛鳥村主. . 錦部村
主 . . .鞍作村主 播磨村主 漢人村主 今來村主 . . 等是其後也 爾時阿智王奏 建今來郡 後改號高
市郡 而人衆巨多 居地隘狹 更分置諸國 攝津. . .近江播磨. . 等 漢人村主是也 (SS: 358)
신찬성씨록은, 아스까 촌주(村主), 누가다 촌주, 구라쓰쿠리 촌주, 하리마 촌주, 아야 촌주,
이마끼 촌주 등이 모두 아야 씨족의 후예들이라 한다.
少宅里 本名漢部里 所以號漢部者 漢人居之此村 故以爲名所以後改曰少宅者. . 祖父 娶少宅秦公
之女 (F: 304)
9. 播磨國風土記 神前郡 多駝里 ... 品太天皇 巡行之時 ... 云墓 又云城牟禮山 一云 掘城處者 品
太天皇御俗 參度來百濟人等 隨有俗 造城居之 (F: 330)
도래(度來, 渡來)라는 표현은 고사기(712년), 일본서기(720년), 풍토기(712-20년) 등에 기록된
특이한 표현이다
10. 雄略 七年 西漢才伎歡因知利. . . 取道於百濟 . . 集聚百濟所貢今來才伎 . . 天皇. . . 命東漢
直 以新漢陶部. . 鞍部. . 畵部. . 錦部. . 譯語. . .等 遷居于. . . 或本云 吉備臣. . . 還自百濟 獻
漢手人部 衣縫部 宏人部 (NI: 475-477)
[7대왕] 하쯔세 치세 때, 카후치 아야(西漢) 씨족인 콴인치리의 제안에 따라, 백제한테 기술자
들을 보내달라고 청했었다. 당시 백제 조정이 새로 보내준 이마끼 기술자(今來才伎)들을 이마끼
아야(新漢) 혹은 아야 기술자(漢手人)라 불렀다.
이들을 처음에는 야마도의 어느 한 지역에 거주하게 했다가, 후에 야마도 아야(東漢) 씨족의
아타히 쓰카 에게 명해, 모모하라와 마카미하라 마을에 옮겨 살게 했다. 모모하라와 마카미하라
는 모두 오늘날의 나라현 다케치(다카이치)군 아스카 촌에 위치했다.
11. 應神 八年 百濟記云 . . . 阿花王 . . . 遣王子直支 (NI: 367)
腆支王 或云直支. . 阿莘在位第三年立爲太子 六年出質於倭國 十四年王薨. . 太子還國. . 國人. .
迎腆支卽位 (S2: 46)
應神 十六年 是歲 百濟阿花王薨 天皇召直支王謂之曰 汝返於國以嗣位 (NI: 373)
應神 三十九年 百濟直支王 遣其妹新齊都媛以令仕 爰. . . 率七婦女 而來歸焉 (NI: 379)
12. 仁德 卌一年 百濟王之族. . 爰酒君來之. . 卌三年 . 捕異鳥. . 百濟俗號此鳥曰俱知 是今時鷹
也 乃授酒君令養馴 未幾時而得馴. . 居腕上獻于天皇… 幸. . 遊獵. . 乃放鷹令捕 (NI: 409)
雄略 二年 百濟池津媛 違天皇將幸 婬於. . . 天皇大怒 . . . 以火燒死 百濟新撰云 . . . 蓋鹵王立 .
. . 天皇遣 . . . 來索女郞 百濟莊飾慕尼夫人女 貢進於天皇 (NI: 463)
13. 雄略 五年 百濟 . . . 蓋鹵王. . . 告其弟. . . 昆支. .. 曰 汝宜往日本以事天皇 (NI: 471)
雄略卄三年 百濟文斤王薨 天王 以昆支王五子中 第二末多王 . . . 勅喚內裏 親撫頭面 誠勅慇懃
使王其國 . . . 是爲東城王 (NI: 497-499)
14. 武烈七年 百濟王遣斯我君 . . . 百濟國主之骨族 (NII: 17)
推古五年 百濟王遣王子阿佐 (NII: 175)
舒明三年 百濟王義慈入王子豐章 (NII: 229)
15. 枝別之宗 特立之祖 . . . 眞人是皇別之上氏也 幷集京畿以爲一卷 附皇別首 (SS: 146-147)
일본서기는 덴무왕을 “아마 노 누나하라 오끼 노 마히또”라고 부른다
일본 고대사에서는 소위 텐표(天平) 문화시대라고 부르는 기간(749-57년)이 있다.
당시 주요 씨족들의 계보가 심각한 혼란 속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소위 천평승보(天平勝寶)
말기에 와서, 주요 씨족들의 시조(出自) 기록을 정리하기 위해 저명한 학자들이 소집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작업이 절반도 끝나기 전에, 조정이 어떤 곤란에 처하게 되어, 이들 학자들은
해산되었다. 그 후 799년, 간무의 명령을 받고, 그의 아들 만다(萬多親王, 783-830년)가 주도
하는 위원회에서 성씨록의 편찬 작업이 재개되어, 사가(嵯峨, 809-23년) 재위 기간 중인 815년
에 드디어 완성이 된 것이다.
이 성씨록에는, 경기(京畿) 즉 당시의 수도(京)와 야마도, 셋츠, 카하치, 야마시로, 이즈미 등
기나이(畿內) 지역에 거주하는 1,182개의 주요 씨족의 조상(出自)들이 수록되어 있다.
제1부에는 천황, 황자의 후손이라는 335개 황족들(皇別)의 조상이 기록되어 있다.
제2부에는 천신과 지신의 후예라는 신족들(神別)의 조상이, 그리고 제3부에는 중국과 한국
사람의 조상을 가졌다는 번족들(諸藩)의 조상이 기록되어 있다.
16. 左京皇別 息長眞人 出自譽田天皇 諡應神 . . 路眞人 出自諡敏達皇子…王也 守山眞人 路眞
人同祖…親王之後也 甘南 備眞人…路眞人同祖…大原眞人出自諡敏達孫百濟王也 島根眞人 大原
眞人同祖 百濟親王之後也 . . . 淸原眞人 桑田眞人同祖 百濟親王之後也 (SS: 149-152)
일본서기에 의하면, 센쿠와 왕은 케이타이 왕의 둘째 아들, 요오메이 왕은 킨메이 왕의 넷째
아들, 죠메이 왕은 비다쓰 왕의 손자, 덴지 왕은 죠메이 왕의 맏아들, 덴무 왕은 덴지 왕의 동생
이다. 그런데 21번째부터 44번째까지의 나머지 24개 마히또 황족은, 오오진, 케이타이, 센쿠와,
비다쓰, 요오메이, 죠메이, 덴지, 덴무 왕들 가운데 어느 하나의 자손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신찬성씨록 첫머리에 실려 있는 전체 44개 황족들이 모두 마히또(眞人)인 동시에, 백제왕
의 자손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또 오오진-케이타이 계통의 핵심적인 일본
황족 전체가 백제 왕족의 후예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17. 天智 二年九月 百濟州柔城 始降於唐 是時 國人相謂之曰 州柔降矣 . . 百濟之名 絶于今日 丘
墓之所 豈能復往 (NII: 361)
이 대목에서 일본서기는, 얼핏 보면 마치 주유성 함락 직후에 백제 사람들이 자신들끼리 이런
말을 주고받은 것같이 기록을 해 놓았다. 하지만, 아무리 읽어 보아도 그 내용은 야마도 사람들
이 후에 주유성이 함락되었다는 비보를 전해 듣고 했을 말이다.
18. 신찬성씨록 말대로라면, 야마도 왕국의 핵심 본거지가 중국 사람들로 넘쳐 났었다는 얘기가
된다
백제의 멸망과 야마도 왕국의 새 역사 만들기
Fall of the Paekche Kingdom and Creating a New History of the Yamato Kingdom
백제의 멸망과 신라에 의한 한반도의 통일은 야마도 지배자들에게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한 위기감을 극대화시켰다. 계속해서 백제와의 일체성을 내세운다면 일본 열도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들은 백제와 운명을 같이하려 하지 않았다.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덴무(天武)는 681년에 새 역사를 창조할 것을 명했다.
새로 창조된 역사는, 야마도 왕국이 백제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이 아주 먼 옛날(기원전
660년)에 세워졌고, 천황족은 백제 사람들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순수한 토착세력이며,
지배씨족들은 한반도에서 건너온 게 아니라 하늘에서 곧장 일본 열도로 내려왔고,
한국과 중국 조정들은 모두 야마도 왕국을 종주국으로 모셨다는 식으로 말한다.
야마도 지배자들은, 백제 왕국과의 원초적인 연관성을 제거하고, 지배씨족의 유래를 야요이
원주민 못지않게 오래되고 토착적인 것으로 만드는 동시에, 야마도 왕국의 위상을 자신들이
만든 문서상으로나마 동아시아 지역의 종주국 위치로 격상시킨다는,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편찬한 것이다.
백제의 멸망과 야마도왕국의 새 역사 만들기
칙어구사 勅語舊辭
홍원탁 (서울대 교수)
660~668년: 야마도 왕국의 뉴스 헤드라인
660년 9월5일 신라가 7월 달에 당나라 군대를 한반도로 끌어들여 백제를 멸망시켰고, 왕과
대신들은 당나라로 잡혀갔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야마도 조정에 전해졌다. 곧 이어, 백제의
대신인 복신(福信)이 흩어진 군사들을 모아 군대를 재조직하고, 항전 의지를 고취하니,
당군이 감히 복신을 공격하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660년 10월 복신은 야마도 조정에 사신을 보내 군대와 원조를 요청하면서, 왕자 풍장(豊璋)
을 왕으로 모시려 하니 본국으로 보내달라고 말했다. 1
사이메이(齊明) 여왕은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옛적에도 [아마 광개토 대왕 때를 의미
하는 것 같다] 백제가 우리에게 군사적 지원을 요청 한 경우들이 있었다. 위급한 상황에 처
했을 때 도와주고, 단절된 왕조를 복원시켜 주는 것은, 우리가 언제고 지켜야 할 당연한 도리
이다. 백제가 이제 최악의 상황에 처해 우리의 지원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는 것이다.
이번 사태에 처한 우리의 결단은 확고하다. 나는 우리 장수들로 하여금 동시에 여러 갈래로
즉시 진군하도록 명 할 것이다.”2
661년 1월6일 사이메이 여왕은 백제 구원작전을 진두 지휘하기 위하여 큐슈를 향해 서쪽
으로 항해를 시작했다. 7월24일. 북큐슈 아사쿠라에 임시 행궁(行宮)을 설치하고 구원작전
을 진두 지휘하던 사이메이 여왕이 돌아갔다. 11월7일 태자 덴지(天智)가 그녀의 유해를
아스카로 모시고 와서 장례를 치렀다. 3
662년 7월 태자는 소복을 하고, 큐슈의 나가쓰 임시 행궁에서 구원작전을 계속 지휘했다. 4
663년 3월 태자 덴지는 신라를 공격하기 위해 27,000명의 군대를 보냈다. 8월28일 만 명
의 야마토 군대가 바다를 건너 백제를 구원하러 갔다가 백촌강(白村江) 어구에서 전멸당
했다. 백제 왕자 풍장은 소수의 시종들과 함께 배를 타고 고구려로 피신했다. 9월7일
주유성(州柔城)이 당나라 군대에 의해 함락됐다. 5
668년 1월3일 그동안 소복을 한 채로 한반도 위기상황에 대처하고 있던 태자 덴지가 왕위
에 올랐다. 그해 9월. 당나라 군대가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6
당시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했었을 위의 기록들은 모두 일본서기에서 발췌한 것이다.
서구 학자들은 고대 한일관계에 관한 일본 학자들의 왜곡되고 편파적인 견해를 그대로
수용하는 경향이 있으나, 이 경우에는 Batten(1986: 212)이 말하는 것처럼 쉽게 의문을
풀지 못하고 있다: “비록 순수하게 한반도 내부의 갈등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일본 열도 자체와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사태였는데, 어째서 일본 조정이 그와 같은
열정을 가지고 거국적으로 개입을 했는가에 대한 해답을 찾기가 힘들다.
일본서기가 말하는 대의명분은 아주 고상하게 들리지만,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야마도왕국의 새 역사 만들기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야마도 조정이 670년 12월 국호를 왜국에서 일본으로 고쳤다고
말한다. 7 671년 12월3일, 덴지왕이 죽었다. 8 일찍이 덴지의 둘째 딸(훗날의 지토오 여왕)
과 결혼했던 덴지의 동생은, 672년 이른바 진신의 난(壬申亂)을 일으켜, 673년 2월27일
왕위에 올라 덴무(天武)가 됐다. 9
681년 3월17일. 덴무는 6명의 왕자와 6명의 대신들에게 야마도 왕국의 역사를 편찬
하라고 명했다. 10
당나라 세력을 한반도로 끌어들인 천적 신라에게 백제와 고구려가 차례로 정복당하자,
일본 열도에 세운 자신들 왕국의 운명에 대해 야마도 지배자들이 느꼈던 위기감과 초조감
은 상상을 초월하는 정도에 달했다.
백제의 멸망과 신라에 의한 한반도의 통일은 야마도 지배자들에게 전례 없는 정체성의
위기감을 야기했다. 자신들이 계속해서 백제와의 일체성을 내세운다면 일본 열도에서 살아
남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들은 백제와 운명을 같이하려 하지 않았다.
백제와는 단절된, 토착적인 존재로서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또 일본 열도에서의
영원한 미래를 확보하기 위해, 덴무(天武, 673~86)는 681년 야마도 왕조의 새 역사를 창조
할 것을 명했다.
고사기 서문은 덴무가 옛 상고 역사에 대해 심오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과거를 완전히
꿰뚫고 있던 사람이라고 말한다. 덴무가 사망한 686년 이전 어느 날, 마침내 야마도 왕국
새 역사의 윤곽이 확정됐고, 초인간적 암기력을 보유한 28세의 히에다 아레(稗田阿禮)에
의해 암기됐다.
고사기 서문에 인용된 덴무의 말은, 그가 당시에 느끼고 있던 위기감뿐 아니라, 새로운 역사
창조의 필요성을 그가 얼마나 절감하고 있었던가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여러 지배 씨족
들 본가에 전해져 내려오는 기록들은 사실과 너무나도 다르다.
잘못된 기록들을 바로 이 시점에서 바로잡지 못한다면, 우리 왕국과 왕실의 기초가 몇 년
내에 와해될 것이다.
나는 이제 이 모든 기록들을 면밀히 조사한 다음, 잘못된 부분은 삭제하고, 틀린 부분은
바르게 고쳐서, 우리 역사의 정확한 내용을 후세에 전해주고자 한다.” 11
왕명에 의해 편찬된 역사: 칙어구사(勅語舊辭)
겐메이(元明, 707~715)는 661년에 덴지의 네 번째 딸로 태어나 덴무의 질녀가 되면서
동시에 처제이고 며느리였다. 야마도 왕실의 근친 결혼 관행의 결과이다.
그녀는 710년 수도를 후지와라(藤原京)에서 나라(平城京)로 옮겼다. 711년 9월18일,
겐메이는 (당시 54세가 넘었을 것으로 보이는) 히에다 아레가 암기하고 있는 칙어구사의
새 역사를 야스마로(安萬侶)에게 받아적도록 명했다.
히에다 아레가 구술을 하고, 야스마로는 받아썼다. 넉 달 후인 712년 1월28일, 야스마로는
받아적은 내용을 겐메이 여왕에게 제출했다.
고사기는 연월일(年月日)도 없이, 새로 창조된 역사의 개요만을 기록하고 있다
야마도 조정은 즉시 도네리(舍人) 왕자와 야스마로를 공동 위원장으로 삼아, 고사기를
바탕으로, 편년체 형식의 사서를 편찬토록 했다. 이 야마도 왕국의 공식 역사서는, 겐메이
의 딸인 겐쇼오(元正, 715~724) 여왕 재위 6년 째인 720년 드디어 완성됐다.
697~791년 기간의 역사를 기록한 사서의 공식 명칭이 “속일본기(續日本紀)” 인 것을
보면, “일본서기”라는 명칭은 후세에 사용된 것으로 믿어진다. 야스마로는 723년에
죽었다. 12
명확한 목적의식 하에 편찬된 고사기와 일본서기
야마도 지배자들은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편찬했다.
그들은 백제 왕국과의 원초적인 연관성을 제거하고, 지배씨족의 유래를 야요이 원주민
못지않게 오래되고 토착적인 것으로 만드는 동시에, 야마도 왕국의 위상을 (자신들이 만든
문서 속에서나마) 동아시아 지역의 종주국 위치로 격상시키려 했다.
새로 창조된 역사는, 야마도 왕국이 백제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이 아주 먼 옛날(기원전
660년)에 세워졌고, 천황족은 백제 사람들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순수한 토착세력이며,
한국과 중국 조정들은 모두 야마 도왕국을 종주국으로 모셨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다.
아울러 지배씨족들은 한반도에서 건너온 게 아니라, 하늘에서 곧장 일본 열도로 내려왔
다고 말한다. 아득한 옛날부터 내려오는 토착세력으로서의 새로운 정체성을 창조해 야마도
왕국에게 부여한 것이다
편년체의 “일본기”는 서문도 없고, 표도 없으며, 중요한 사람에 관한 열전이나, 지리지도
없다. 중국에서는 이런 식의 기록을 서기(書記)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래도 일본 사람들은
“일본기”를 항상 일본서기라고 부른다. 하긴, 본기(本紀) 내용은 그런대로 중국의 정사
(正史) 형식을 갖추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출현 이후, 새로운 역사 이념은 야마도 지배층 의식 속에 끊임없이
주입돼, 마침내 일본 열도에서의 반종교적인 천황숭배 형태로 진화하게 됐다. 야마도 지배
자들의 칭호는 급기야 (대)왕에서 천황으로 격상됐다. 13 그 결과, (야요이) 농민 출신 무사
들이 백제에서 건너온 전통적 지배계급으로부터 실권을 빼앗은 후에도, 이들 새 지배자들
은 가난한 귀족들이 교토 지역에서만이라도 체면을 유지하며 살 수 있도록 허용했다.
뿐만 아니라, 천황은 오늘날까지 명목상으로나마 일본 열도의 국가원수로서 계속 군림할
수 있었다. 덴무도 감히 상상할 수 없었을, 기대 이상의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진신의 난을 일으켜 스스로 왕위에 오른 덴무는, 자수성가의 군주였을 뿐 아니라, 진실로
탁월한 선견지명의 군주였던 것이다.
일본열도로의 또 한차례 대량 이주
백제가 663년 멸망한 후, 일본 열도로 백제 유민의 대량 이주가 상당기간 계속됐다.
일본서기는 백제 피난민에 대해 많은 기록을 하고 있다.
“백제 왕자 선광(善光) 일행에게 나니와(오사카 근처)에 거주지를 마련해줬다. 665년 백제
에서의 직위를 감안하고 복신을 도운 공적을 참작해 귀실집사에게 소금하(小錦下) 관위를
수여했다. 백제인 남녀 400여 명을 오우미(近江國)의 간자키(神前) 고을에 살게 하고 전답
을 줬다. 백제인 남녀 2,000여 명을 동국(東國)으로 보내 살도록 했다 승려와 속인을 구별
하지 않고 이들 모두에게 663년부터 3년 동안 관가에서 식량을 지급했다.
669년 좌평 여자신(餘自信)을 포함한 백제 남녀 700여명을 오우미의 가마후(蒲生)로 옮겨
살도록 했다.” 14
새로 건너온 백제 사람들은 백제에서의 지위에 따라 야마도 지배자들과 같은 특권을 누리
거나, 일반 백성들과 같은 혜택을 받았다. 일본서기(N2: 295~296)에는 다음과 같은 민요
가 실려있다
귤은 자신의 가지에서 각각 자라지만
구슬 모양 꿸 때에는
한 개의 끈에 꿰어진다
아마 백제와 야마도 지배계급이 제각기 다른 나라에서 살아왔지만, 이제는 전화위복으로
한 군데 모여서 살게 됐다는 뜻인 것 같다.
신라와 전략적 동맹을 맺어 당나라에 대항
Batten (1986)은 “백촌강에서 참패를 한 663년부터 당군이 한반도에서 물러가는 676년
까지의 13년간은 패배한 일본인들에게 매우 걱정스런 기간이었다.
이들 초조감의 강도는 그 기간 중 정신 없이 방어선을 구축한 데서도 나타난다.
701년까지 계속해서 요새를 축조하고 수리하는 기록들이 여기저기 나타난다”고 말한다.
7세기 말에는 신라 뿐만 아니라 야마도 조정도 당나라의 팽창정책을 두려워했다.
664년 야마도 조정은 대마도와 이키(壹岐)섬, 북큐슈에 수비병을 배치하고 봉화대를 설치
했다. 또 큐슈의 성채들 주위에 해자(垓字)를 파고 수성(水城)이라 불렀다.
665년 야마도 조정은 백제에서 건너온 장군을 보내 나가토에 성채 한 개를 쌓았고, 큐슈에
두 개의 성채를 쌓았다.
667년에는 야마토, 사누키, 대마도에 각각 한 개씩의 성채가 세워졌다.
일본기의 667년 기록에는 축자(筑紫) 도독부란 표현이 나타난다. 야마도 조정은 당나라
침략군과 벌려야 할지도 모르는 전쟁에 대비하여 공격 예상 진로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15
비록 단기간이었지만 신라와 야마도 조정은 당나라에 대항하는 전략적 동맹관계를 수립
했다. 668년 신라가 사신을 보냈고, 야마도 조정은 김유신에게 선물로 배 한 척을 보냈다.
귀국하는 사신 편에 신라왕에게도 배 한 척을 선물했다.
이는 신라와 야마도 조정 사이의 전략적 동맹의 시작을 상징한다.
16 668~695년 기간 중, 야마도 조정은 신라에 아홉 차례에 걸쳐 사신을 보냈다.
하지만 만주에서의 발해 왕국의 등장은 한반도와 일본 열도에 대한 당나라의 직접적인
위협을 크게 감소시켰다.
그러자 신라와 야마도 조정 사이의 전통적 적대감이 다시 부상했다. 발해가 755~757년
기간 중에 요동 지역을 점령하자 신라와 야마도 왕국 사이의 전략적 동맹 역시 빠르게 와해
됐다.
야마도 조정은 754~778년 기간 중 네 차례에 걸쳐 발해에 사신을 보냈지만, 신라에는 단
한 차례도 사신을 보내지 않았다. 급기야 759년엔 야마도 조정 내에서 신라를 공격한다는
풍문이 돌았다. 17
國文版 부록: 백제 지배층의 대량 이주
671년. 야마도 조정은 백제 좌평 여자신과 법관대보 사택소명에게 다이키무게 관위를
수여하고, 학직두(學職頭) 귀실집사에게 세우키무게 관위를 수여하고, 병법에 능한 달솔
곡나진수, 목소귀자, 억례복류, 답본춘초, 약(藥)을 지을 줄 아는 본일비자, 찬파라, 금라금수,
귀실집신 등에게 다이센게 관위를 수여하고, 약을 지을 줄 아는 달솔 덕정상과 길대상,
오경에 밝은 허솔모, 음양에 능한 각복모 등에게 세우센지야우 관위를 수여하고, 기타 달솔
등 50여인에게 세우센게 관위를 수여했다.
백제 지배층의 대량 이주는 두 차례에 걸쳐 있었다. 첫 번째는 4세기 말 호무다가 야마도
왕국을 창건했을 때를 전후로 한 시기였고, 두 번째는, 7세기 후반, 백제가 멸망한 직후
이었다.
백제 멸망 후, 얼마나 많은 백제 왕족들이 야마도로 건너왔는지는 속일본기의 기록들을
보면 알 수 있다.
700년, 백제왕 원보(遠寶)를 히타치 수(常陸守)로 삼았다.
703년, 백제왕 양우(良虞)를 이요 수(伊豫守)로 삼았다.
708년, 백제왕 남전(南典)을 키비의 미치쿠치 수(備前守)로 삼았다.
735년, 백제왕 자경(慈敬)에게 종5위하(從五位下)를 수여했다.
738년, 백제왕 효충(孝忠)을 토호쓰 아후미 수(遠江守)로 삼았다.
740년, 백제왕 전복(全福)에게 종5위하(從五位下)를 수여했다.
의자왕의 아들 선광(禪廣)의 손자 백제왕 경복(敬福)이, 미치오쿠 수(陸奧守)로 있을 때,
최초로 금광을 발견하여 황금 900냥을 바쳤기에, 750년에 궁내경(宮內卿)으로 삼았다.
751년, 백제왕 원충(元忠)에게 종5위상(從五位上)을 수여했다.
762년, 백제왕 이백(理伯)을 히의 미치시리 수(肥後守)로 삼았다.
763년 백제왕 삼충(三忠)을 이데하 수(出羽守)로 삼았다.
764년, 백제왕 무경(武鏡)에게 종5위하(從五位下)를 수여했다.
765년, 백제왕 이선(利善), 신상(信上), 문경(文鏡)에게 종5위하(從五位下)를 수여했다
읽는 사람한테 너무 부담스러울 것 같아, 이런 기록을 계속 나열할 수가 없다.
815년에 완성된 신찬성씨록은 앞서 4세기 말과 5세기 초에 도래한 백제 지배층을 거의
모두 토착화시켜서 기록했다. 하지만 7세기 후반에 도래한 백제 지배층은, 모두 그 출자
(出自)를 백제로 그냥 기록했다.
이들의 출자를 토착화하기엔 시기적으로 너무 근접했고, 그 충격적인 상황이 야마도 사람
들 마음속에 너무나 생생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각주]
1. 齊明 六年九月 己亥朔癸卯 百濟遣 . . 等 來奏曰 或本云 逃來告難 今年七月 新羅. . 引構唐人
傾覆百濟 君臣總俘. . 福 . . 誘聚散卒. . 旣而百濟兵翻銳 唐不敢入. . .冬十月. . .福信遣. . .等. . .
乞師請救 幷乞王子余豐璋. . 將爲國主 (NII: 345-347)
2. 齊明 六年秋九月 詔曰 乞師請救 聞之古昔 扶危繼絶 著自恒典 百濟國 窮來歸我 . . 志有難奪 可
分命將軍 百道俱前 (NII: 347) Aston의 Nihongi (N2: 268-9) 참조.
3. 齊明 七年春正月 丁酉朔丙寅 御船西征 始就于海路. . 居于. . 行宮. . 名曰長津 五月. . .遷居于
朝倉..宮. . 秋七月甲午朔丁巳 天皇崩于朝倉宮. . 皇太子奉徙天皇喪 還至. . .歸就于海 . 還泊難波
十一月. . 殯于飛鳥 (NII: 348 -351)
4. 天智 卽位前紀 七年七月. . 皇太子素服稱制. . 遷居于長津宮 稍聽水表之軍政 (NII: 353)
5. 天智 二年三月. . 率二萬七千人 打新羅. . 秋八月. . .率健兒萬餘. . 於白村江. . 戌申 日本船師
初至者 與大唐船師合戰. . .己酉. . .官軍敗續. . .百濟王豐璋 與數人乘船 逃去高麗 九月辛亥朔丁
巳 百濟州柔城 始降於唐 (NII: 357- 358)
6. 天智 七年春正月 丙戌朔戊 子 皇太子卽天皇位 冬十月大 唐大將軍英公 打滅高麗 (NII: 367-371)
7. 文武王 十年十二月 ..倭國更號日本 自言近日所出以爲名 (S1: 128) Nihongi was still reading the
Chinese characters Nippon as Yamato. 日本 此云耶麻謄 (NI: 81) 夜麻登(倭) (K: 162)
8. 天智 十年十二月 癸亥朔乙丑 天皇崩于近江宮 (NII: 381)
9. 天武 下 二年二月 丁巳朔癸未. . 卽帝位於飛鳥淨御原宮 (NII: 411)
10. 天武 下 十年三月 ...丙戌 天皇. . . 以詔. . .令記定帝紀及上古諸事 (NII: 447)
11. 古事記上卷 幷序
臣安萬侶言. . 飛鳥淸原大宮御大八州天皇御世. . 潭探上古. . 明觀先代. . 於是天皇詔之 朕聞 諸
家之所䝴帝紀及本辭 旣違正實 多加虛僞 當今之時不改其失 未經幾年其旨欲滅 斯乃 邦家之經緯
王化之鴻基焉 故惟 撰錄帝紀 討覈舊辭 削僞定實 欲流後葉 時有舍人 姓稗田名阿禮 年是二十八
爲人聰明 度目誦口 拂耳勒心卽 勅語阿禮 令誦習帝皇日繼及先代舊辭 然運移世異 未行其事矣. .
以和銅四年九月十八日 詔臣安萬侶 撰錄稗田阿禮所誦之勅語舊辭 以獻上者. . 和銅五年正月二十
八日 正五位上勳五等太朝臣安萬侶 (K:. 44-46)
12. 41개의 글자가 동판에 새겨진 비문이 1979년 야스마로의 묘에서 발견됐다. Murayama and
Miller(1979)는 “그 묘지(墓誌)에 새겨진 한자들을 보면, 중국어 문법상 접미어인 지(之)를
“죽었다”는 자동사의 직접 목적어로 사용하는, 놀라울 정도로 한국적인 어법(語法)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식의 사용법은 중국 사람들에겐 아주 비문법적이지만, 6세기부터 8세기 중엽까지
한자로 쓰여진 한국 비문들에선 뚜렷하게 나타난다. 일본의 일반 대중들이 야스마로의 비문에서
발견된 이 놀라운 한국적 어법에 대해 앞으로 얼마 동안이나 계속 모르고 살게 될지를 지켜보는
것도 흥미 있는 일이라”고 말한다.
左京四條四坊從四位下勳五等太 朝臣安萬侶以癸亥年七月六日卒之養老七年十二月五日乙巳
13. 당 고종(唐高宗)이 병약해 657년 하궁(夏宮)으로 물러나 요양하면서 격일로 조회를 열었다. Twitchett(1979: 255)에 의하면, “고종이 660년 10월 심각한 뇌졸중을 당하자, 측천무후의 위상은
누구도 넘볼 수 없게 됐다. 무후는 고종이 정기적으로 무기력 해 질 때마다 자연스럽게 직접 제국
을 통치하고 있었다. 급기야 660년 말 이후엔 명칭만 아닐 뿐 실질적인 황제가 됐다.”
그녀는 670년 중국 역사상 최초로 천후(天后)란 칭호를 스스로 사용하고, 고종에겐 천황(天皇)
이란 칭호를 부여했다. 일본 사람들은 이 거창한 천황 칭호를 재빨리 도입한 것이다.
舊唐書 卷五 高宗下 乾封五年秋八月 …皇帝稱天皇 皇后稱天后
14. 天智 四年 ..勘校百濟國官位階級 仍以佐平福臣之功 授鬼室集斯小錦下 其本位達率 復以百
濟百姓男女四百餘人 居于近江 國神前郡..給神前郡百濟人田
天智 五年 以百濟男女二千餘人 居于東國 凡不擇緇素 起癸亥年 至于三歲 並賜官食 天智 六年
[667] 遷都于近江 (NII: 365-7)
天智 八年 …又以佐平餘自信 佐平鬼室集斯等 男女七百餘人 遷居近江國蒲生郡 (NII: 373)
덴지는 665년 백제 유민 4백명을 오우미 가마후 고을로 보내 살도록 했고, 666년엔 백제 유민
2천명을 동국으로 보냈다. 667년 덴지는 수도를 오우미로 옮겼다. 669년엔 백제 유민 7백명을
오우미 가마후 고을로 보내 살도록 했다. 덴지는 670년 봄 바로 그 가마후 고을에 가서 왕궁
터를 둘러봤다. 오우미 천도를 전후로, 덴지는 백제에서 새로 건너온 사람들을 계속 그 지역으로
보냈다. 덴지는 백제에서 새로 도래한 사람들이 자신의 주변에 다수 모여있는 것이 믿음직
스럽고 또 마음도 편했던 것 같다.
15. 天智 三年 於對馬嶋 壹岐嶋 筑紫國等 置防與烽 又於筑紫 築大堤貯水 名曰水城 (NII: 363)
天智 四年 遣達率答炑春初 築城於長門國 遣達率億禮福留 達 率四比福夫於筑紫國 築大野及 椽二
城 (NII: 365)
天智 六年 遷都于近江 .. 十一月 百濟鎭將劉仁願 遣熊津都督 府熊山縣令…等 送…等於筑紫 都督
府…是月築倭國高安城…屋嶋城 對馬國金田城 (NII: 367)
天武 八年 [679] 詔曰…檢校親 王諸臣及百寮人之兵及馬 (NII: 439) 十二年 詔諸國習陣法
(NII: 461) 十三年 詔曰 凡政要者軍事也 是以文武官諸人務 習用兵及乘馬…其有馬者爲騎士 無馬者
爲步卒 並當試練 (NII: 463)
持統 三年 [689] 詔左右京職及諸國司 築習射所..詔諸國司曰 今冬戶籍可造宜 限九月 糺捉浮浪 其
兵士者 每於一國四分而點其一 令習武事 (NII: 499) 七年 [693] 詔 自今年始於親王 下至進位 觀所
儲兵... 遣陣法 博士等敎習諸國 (NII: 523)
16. 天智 七年 [668] 皇太子卽天皇位..新羅遣…金東嚴等進調..賜新羅上臣大角干庾信船一隻...使…
賜新羅王 輸御調船一隻 付東嚴等 (NII: 371)
天武 四年 [675] 新羅遣王子忠元…爲大使…遣于新羅..詔曰 諸王以下初位以上 每人備兵 (NII: 417-
21) 五年 王卿遣京及畿內 校人別兵…爲大使…遣於新羅..新羅遣…請政 (NII: 425-7)
十年 ...大使...遣新羅國... 新羅遣…(NII: 447-451) 十四年 新羅遣…請政 (NII: 473)
持統 元年 [687] 新羅遣王子…等 奏請國政 (NII: 491)
야마도 조정은 당나라의 팽창정책에 엄청난 공포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야마도로 건너온
백제 장군들의 도움을 받아, 쓰시마에서 큐슈 북부, 또 세토 내해를 거쳐 수도에 이르는 (대륙으로
부터의 침략 루트가 될 수 있는) 통로에, 총력을 집중해 성을 쌓고, 봉화 체계를 갖추며, 방위선을
구축했다. 당시 신라 자신도 당나라의 팽창정책을 두려워했다. 당나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점령한
다음, 즉시 도독부를 설치해 이들 지역을 통치하려 했다. 그러나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부흥
세력들과 힘을 합쳐, 676년에 당 군을 완전히 축출하고, 한반도를 통일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당시 동 아시아의 초강대국인 당나라가, 신라와 야마도 조정에 대해 다 같이 적대적이며 위협적인
존재가 된 것이다. 이와 같이 공동의 적을 맞게 되자, 신라와 야마도 조정은 빈번하게 사신들을
교환하면서, 정치적 군사적 의견교환을 하고, 협조관계를 강화했다. 양국 간의 전통적인 적대
관계가, 국제정세의 변화 때문에, 좋든 싫든 협조관계로 바뀔 수밖에 없었다.
17. 聖武 天平七年 [735] 新羅使…入京..而新羅國輒改本號曰王城國 因玆 返却其使 (SN2: 286)
九年[737] 遣新羅使 奏新羅國失常禮..或言遣使問其由 或發兵加征伐..以告新羅无禮之狀 (SN2:
310-2) 十五年 [743] 新羅使…大失常禮 (SN2: 418)
淳仁 天平寶字 三年[759]六月 令大宰府造行軍式 以將伐新羅也 九月 造船五百艘..爲征新羅也
(SN3: 320-8)
발해가 당나라의 동북방을 위협하게 되자, 당나라는 735년 다시금 신라와 화해하는 조치를 취했다
발해라는 완충지대가 형성되고, 또 당과는 외교적으로 화해하게 되자, 신라는 중국으로부터의
위협을 더 이상 심각하게 느끼지 않게 되었다. 신라보다 당나라의 직접적인 위협으로부터 더욱
멀어진 야마도 조정은, 8세기 중반에 이르자 신라와의 협조관계를 더 이상 지속할 필요를 전혀
느끼지 않게 됐다. 반면, 야마도 조정은 727년 이후 발해에 13회나 사신을 보냈고, 발해는 야마도
조정에 34번이나 사신을 보냈다.
정리: 강현사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