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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장남자가 등장하는 영화 <플루토에서 아침을> 중에서.
온갖 사건들을 접하게 마련인 강력반 형사들. 그들이 기억하는 사건 중에는 살인·강도와 같은 무시무시한 범죄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대개는 손에 피를 묻힌 살벌한 피의자들을 잡아다 앉혀놓고 조서를 작성하는 것이 강력반 형사들의 ‘숙명’이다. 하지만 때때로 피의자들 중에는 강력반 형사들을 당황하게 만드는 엽기·황당 사건의 ‘주인공’들도 있다. 특히 황당한 범죄의 피의자들일수록 ‘각별한 사연’이나 ‘특이한 성향’을 지니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번에 서울 영등포경찰서 강력4팀 심연수 형사가 전하는 사건이 바로 그런 사례. 감쪽같이 여장을 하고 남성들을 유인해 기막힌 절도행각을 벌여온 한 중년남성에 대한 이야기다.
심 형사는 이 사건에 대해 “흔히 ‘꽃뱀’이라 하면 미모나 성적인 매력을 이용해 뭇 남성들의 뒤통수를 치는 ‘나쁜 여성’을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여장을 하고 남성들을 유혹한 이 40대 남성은 우리로서도 정말 의외였다. 피해자들의 황당함이야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어이없이 속아 넘어갔던 피해자들은 대부분 창피한 마음에 신고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이 사건 이야기를 통해 더 이상 비슷한 수법에 당하는 피해자들이 나오지 않길 바란다”라고 소회를 밝혔다.
지난 2005년 1월 21일 키 170㎝가량의 늘씬한 한 여인이 대전시내 한복판에 나타났다. 어깨 너머까지 늘어뜨린 파마머리에 얼굴의 반을 가리는 복고풍 선글라스, 스커트에 하이힐까지 갖춰 신은 이 여인은 길거리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멋쟁이 여성이었다. 그런데 한참 전부터 이 여인을 예리한 시선으로 주시하던 한 무리의 남성들이 있었다. 잠시 후 서로 눈빛을 교환하던 이들은 순식간에 여인에게 달려들었다.
이들은 바로 영등포경찰서 소속 강력반 형사들이었다. 호리호리한 체형으로 나약하게만 보이던 이 여인은 놀랄 만한 힘을 발휘하며 형사들에게 온몸으로 저항했다. ‘쉽게 끝나겠거니…’ 하고 생각했던 형사들은 건장한 남성 못지않은 여인의 힘에 순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형사들에 의해 가까스로 제압된 여인은 수갑이 채워진 채 호송차에 올랐다.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형사들은 ‘그녀’를 체포했던 걸까.
그로부터 몇 시간 뒤 여인은 영등포경찰서 강력반에서 조사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이 여인, 자세히 보니 여자가 아닌 남자다. 절도혐의로 경찰의 수사망에 올라 있던 피의자 A 씨(당시 42세)였던 것이다. 강력반 사무실에선 여장남자라는 사실을 알고 A 씨를 검거한 형사들조차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다음은 심 형사의 얘기.
“A 씨를 검거하기 얼마 전부터 우리는 남성들을 상대로 꽃뱀 행각을 벌이고 다니는 여장남자가 있다는 제보를 받고 수사를 진행해왔다. 하지만 A 씨의 행적을 찾아내는 것은 예상외로 어려웠다. A 씨의 신원 자체가 불확실했기 때문이다. A 씨는 일정한 주거지 없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인물이었다. 직업도 없었다. 따라서 A 씨를 용의자로 특징짓고 추적하기까지는 적잖은 어려움이 뒤따랐다. 이런 사건의 경우 피해자들의 적극적인 진술이 무척 중요한데 피해자들은 신고를 꺼렸다. 일부 피해자는 ‘꽃뱀 행각에 걸려들었다는 것이 창피해서 도저히 신고할 엄두가 나지 않더라’고 하더라. 또 A 씨와 즉석에서 만났던 피해자들로서는 A 씨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알 리 없었고 술김이라 당시 정황에 대해서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제보에 따르면 ‘여장남자’ 절도 용의자는 계속 범행을 저지르고 다닐 가능성이 높은 상태였다. 수사에 착수한 형사들은 정보망을 총동원한 끝에 A 씨가 대전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기에 이른다. 즉시 대전으로 내려간 수사팀은 우여곡절 끝에 거리에서 A 씨를 찾아낼 수 있었다.
“저만치에서 A 씨가 모습을 드러냈는데 어안이 벙벙했다. 모두 ‘어, 저사람 완전 여자잖아~’라는 말을 동시에 했을 정도였다. 행색이나 자태 등으로 볼 때 가까이서 자세히 뜯어보지 않는 한 A 씨는 여자와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경찰 조사 결과 드러난 A 씨의 범죄 행각은 이러했다. A 씨는 젊은 시절부터 성 정체성 때문에 고민해온 인물로 특정한 직업이 없는 상태였다. 고정적인 수입이 없었던 A 씨의 삶은 하루하루 고달프고 불안하기만 했다. 생활비와 유흥비가 절실했던 A 씨는 결국 위험한 범행을 계획하게 된다. A 씨는 술취한 남성이나 자신에게 쉽게 넘어올 것 같은 상대들을 유인해 절도행각을 벌이기로 마음먹는다. 특이한 것은 수월한 범행을 위해 A 씨가 여장을 하고 접근했다는 사실. 다음은 심 형사의 얘기.
“A 씨는 평소에도 여장을 즐겨했던 인물이었다. 오랜 세월 사실상 ‘여자’로 살아온 그는 여성스런 화장이나 말투, 옷차림에 능숙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수 년 전 이미 여장을 하고 남성들을 상대로 범행을 저질러 실형을 살기도 했던 A 씨는 이 분야에 도가 튼 인물이었다. A 씨는 상당수의 남성들이 요염한 여성이 노골적으로 유혹해올 때 그것을 쉽게 뿌리치지 못한다는 점을 이용해 범행을 저질러왔다.
여기서 수사팀이 파악해 낸 A 씨의 구체적인 범행수법을 잠시 들여다보자.
2004년 7월 어느 날 A 씨는 여장을 한 채 대전시내를 거닐며 범행대상을 물색하고 있었다. 그는 우선 홀로 영업을 하는 택시기사를 상대로 범행을 시도하기로 마음먹는다. 타인의 눈에 띄지 않게 ‘작업’하기가 용이할 뿐 아니라 택시기사는 아무래도 현금을 많이 갖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늦은 밤 화려한 화장과 여성스러운 옷차림을 하고 택시에 탄 자신에게 기사가 관심을 보이는 기미가 있으면 범행대상으로 ‘적격’이었다. 이날 목적지로 이동하면서 적절한 기회를 노리고 있던 A 씨는 택시기사 B 씨에게 작심하고 ‘추파’를 던졌다.
아저씨, 너무 멋있다. 딱 내 이상형이네. 우리 찐하게 연애 한번 합시다.”
야한 옷차림에 나긋나긋하고 매혹적인 말투를 지닌 여성이 접근해오면 대개의 남성은 경계심이 풀리게 마련. 예상대로 B 씨는 A 씨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A 씨는 망설이는 B 씨를 이끌고 인근 여관으로 향했다. 이어지는 심 형사의 설명.
A 씨의 목적은 ‘하룻밤 연애’가 아닌 ‘돈’이었다. 범행의 관건은 자신이 남자라는 사실을 들키지 않는 것이었다. 방에 들어가면 A 씨는 상대 남자에게 먼저 샤워를 하고 나오라고 시켰다. 또 A 씨는 ‘금속 알레르기가 있다’며 반지와 목걸이, 팔찌 등 남성들이 착용한 금붙이들을 모두 벗어두게 했다. 상대 남성들은 아무 의심 없이 A 씨가 하라는 대로 따랐다. 이렇게 남자가 샤워하는 틈에 A 씨는 지갑에서 빼낸 현금과 귀금속 등을 갖고 유유히 여관방에서 빠져나왔다. 경찰 수사망을 피하기 위해서였는지 A 씨는 절대 신용카드는 건드리지 않는 치밀함을 보이기도 했다.”
하룻밤 연애를 갈망하는 남성들은 A 씨에겐 마치 불을 향해 덤벼드는 불나방이나 다름없었다. A 씨의 범행은 대상을 가리지 않고 계속됐다. 경찰 조사 결과 A 씨는 20대 나이트클럽 웨이터를 상대로 범행을 저지르기도 한 것으로 드러났다. 40대 여장남자인 A 씨가 어떻게 20대 남성을 유혹할 수 있었을까.
동생 너무 잘생겼다~. 어쩜 이렇게 예쁘게 생겼을까. 언니랑 오늘 화끈하게 놀자’는 식의 말에 20대 청년들도 홀딱 넘어갔다”는 것이 심 형사의 얘기. 특히 A 씨가 20대부터 4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남성들을 유혹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만의 독특한 노하우도 한몫했다.
“이미 전력이 있었던 A 씨는 아무에게나 ‘작업’을 시도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쉽게 넘어옴직한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범행을 시도했다. 예컨대 어느 정도 술을 마신 사람들은 정확한 상황판단 능력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평소 같으면 ‘원나잇스탠드’를 생각할 수 없던 사람들도 술김에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A 씨는 철저히 이런 남성들을 노렸다. 특히 A 씨는 자신이 여자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핸드백에 여성용 자위기구까지 넣고 다니는 엽기성을 보이기도 했다.”
이런 수법으로 A 씨에게 당한 피해자는 밝혀진 경우만 6명, 피해액은 6개월여 동안 1800여만 원에 달했다. 피해자들은 뒤늦게 ‘속았다’는 것을 알아챘지만 원나잇스탠드를 하려 했던 의도가 들통날까봐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이 속만 끓여왔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렇다면 ‘여장남자’ A 씨는 도대체 어떤 인물이었을까.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서는 주어진 성을 거부하는 것이 터부시되고 있는 실정. 과거에 비해 나아지긴 했지만 여장남자나 트랜스젠더를 마치 정신질환자 보듯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여전한 것이 사실이다. 경찰 조사 결과 A 씨는 ‘진짜 여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했을 뿐 별다른 정신병력이 없는 정상인이었다.
A 씨는 남자의 몸을 갖고 태어났음에도 초등학교 시절부터 스스로를 여자라고 생각해왔다고 한다. 특히 2차 성징이 시작되는 청소년기부터 A 씨는 자신의 성 정체성을 두고 심각한 패닉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성의 몸’과 ‘여성의 성징’을 갖고 있던 A 씨에게 사회는 철저히 남성성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성 정체성에 대한 극심한 혼란을 겪으면서도 A 씨는 사회통념상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고민을 속시원히 털어놓지 못했다. 이런 배경 때문일까. A 씨는 여느 또래처럼 평탄한 성장기나 학창시절을 보내지 못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자신의 성향 때문에 마흔이 넘은 나이에도 정상적인 가정을 꾸리지 못한 채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는 불안정한 생활을 해왔다고 한다. 어찌 보면 A 씨는 평범한 삶을 살 수 없었던 불행한 인물이었던 셈이다.
심 형사는 “자신의 특이한 성향을 이용해 범행을 저지른 A 씨의 죄는 분명 처벌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얘기를 듣고 나니 A 씨가 감당해야 했을 그간의 고통도 대충은 짐작할 수 있겠더라. A 씨는 너무도 여자가 되고 싶어했던 것으로 보인다. ‘돈만 있으면 당장이라도 일본에 가서 성전환 수술을 하고 싶다’는 말까지 하더라. 어쩌면 수술비 마련도 범행동기 중의 하나였을지도 모르겠다”며 착잡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A 씨는 결국 특가법상 절도혐의로 기소돼 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현재 A 씨는 교도소에서 자신의 섬세한 손재주를 살려 미용일을 배우며 참회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