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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드온 찬양대 귀한 찬양 감사합니다.
오늘은 아테네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그리스 아테네 이곳은 아주 오래전부터 기원전부터 신화의 땅이었습니다. 신화의 중심지 그곳에 바울이 가게 됩니다. 오늘 16절에 보면 바울이 아덴에서 저희를 기다리다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이 분하여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과 누가가 도착한 이 아테네 온 땅에 우상이 가득한 곳. 지금도 그리스에 가면 모든 산과 바위 조금만 특징적인 곳이 있으면 거기에 다 신화와 얽혀 있는 신화들이 존재합니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바로 아크로폴리스 위에 세워진 파르테논 신전이라는 거예요. 제가 이번에 가서 찍었던 사진입니다. 아크로폴리스라고 하는 것은 높은 곳에 있는 도시 아크로가 높다. 높은 곳이다. 폴리스는 도시입니다. 물론 그리스의 여러 높은 산들이 있어요. 작은 봉우리산도 있고 저 북쪽으로 가면 굉장히 높은 올림푸스 산 같은 경우는 굉장히 높더라고요.
그런데 이 아테네 지역에서는 저 산이 굉장히 가장 높습니다. 그래서 거기를 거기에 세워진 그 도시를 아크로폴리스라고 하는데 그 위에 파르테논 신전 조금 전에 본 파르테논 신전을 제가 다 못 찍어가지고 지금 가보니까 예전에 제가 한 15년 거의 20년 전에 이렇게 갔을 때 있었던 그 모습이 많이 없어지고 막 공사하느라고 뼈대만 남아 있었어요. 그래서 원래 있었던 그 모습을 좀 어떻게 보관할까 하다가 오늘 아침에 AI한테 부탁을 했어요. 니가 좀 생성을 해봐라 그랬더니 거의 그럴 듯하게 그 위에 부분 이렇게 부서진 그 삼각형 부분이 페디먼트라고 하는데 저 위에 부분을 부서진 것도 그때 제가 갔을 때 그랬었던 것 같은데 그걸 많이 복원을 이렇게 해내더라고요.
이제 저런 형태를 가진 신전입니다. 그 안에는 거대한 우리가 신전 그러면 우리 예배당처럼 막 이렇게 될 것 같지만 그런 게 아니고 우리 예배당은 이 신전에서 온 것이 아니고 로마 시대에 그리스 시대도 그러고 로마 시대에 공해당 같은 그런 곳 거기서 왔기 때문에 거기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목적으로 세워졌기 때문에 예배당 구조가 이렇습니다만 그리스 신자는 이스라엘 예루살렘 신전도 마찬가지지만 성전도 마찬가지지만 제사를 그 안에서 드릴 목적으로 돼 있기 때문에 내부 공간이 이렇게 대중들에게 넓게 허락돼 있지 않습니다.
교회하고는 달라요. 근데 제가 옛날에 들어갔을 때 그때는 내가 아테나 여신이 그 안에 있었는데 지금 어디 갔는지 임시로 옮겨놓은 것 같아요. 공사 중이라서 들어갔는데 막 저보다 몇 배가 큰 이렇게 올려봐야 될 수 있는 그 여신이 황금 옷을 입고 탁 이렇게 하고 서 있는데 그 위압감이라는 것은 굉장했습니다.
저거예요. 저게 거의 천장까지 이렇게 닿을 정도로 큰 여신이 있으니까 그 안에 이 오늘날 현대인들도 딱 들어가면 위압감을 느끼는데 그 당시에 사람들은 저 안에 들어가면 얼마나 위압감을 느끼면서 경건해지겠어요. 이제 그런 것들을 연출한 곳이 바로 파르테는 신전입니다. 기원전 500년 전에 만들어졌으니까 약 2500년 전 굉장한 건축물이고 또 신전이라고 볼 수가 있어요. 지금도 저 건축 양식이 저는 이제 건축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이 유럽 사회를 보면 교회 건축이든지 아니면 일반 공공 건물 가령 국회의사당 아성블레 나시오날 그 앞에도 그렇고 여기 앞에 가시면 여러분들 교회 마들렌 성당도 그렇고 대부분의 교회나 공공 건물의 앞에 보면 그 지붕 천장 위에 이렇게 삼각형으로 돼 있는 이걸 뭐라고 페디먼트라고 하나 아마 표현이 그럴 겁니다. 그리고 그 안에 조각을 넣는데 그것을 벌써 2500년 전에 이 사람들이 하면서 신전을 만들었다고 하는 겁니다.
아테네인들의 그 건축 기술과 신앙심이 만들어낸 작품 그래서 이것은 정말 세계 문화유산 1호 정도 될 거예요. 제가 알기로는 그 정도로 중요한 작품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로마 그리스 그리스 신화에 대해서 공부할 필요가 있다.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해요. 그래서 제가 그리스를 갔다 올 때마다 결심하는 것이 그리스 신화를 공부해야 되겠구나. 그리스도 신화.
근데 이제 작심 3일이 돼요. 우리가 영어권에 가면 결심을 하고 옵니다. 오늘부터 나는 영어 공부한다. 작심한 대로 다 되면 아마 우리가 영어를 펄펄 날랐을 거예요. 근데 그게 참 쉽지는 않아요. 근데 이제 이 그리스나 로마를 가면 그리스 로마 신화를 공부해야 되겠다 하는 생각이 드는 게 그리스 신화를 알아야 로마 신화를 알고 그리스 로마 신화를 알아야 유럽 문명을 해석할 수 있어요.
유럽 문명은 기독교 문명과 그리스 로마 문명이 이렇게 융합돼 있습니다. 기독교가 2천년 전에 유럽에 들어와서 사도바울이 복음을 지금 전하고 있죠. 사도행전에서 그렇게 해서 여기가 기독교화가 되면서 모든 건축이라든가 문학이라든가 모든 분야에 이 두 문명의 흔적이 남아 있는 거예요. 그래서 문학을 해석할 때도 그러고 건축을 볼 때도 그렇고 그리스 로마 그리고 기독교 이 세 가지를 가지고 볼 때 바르게 볼 수가 있고 유럽이라고 하는 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유럽이라고 하는 말도 신화에서 온 거더라고요. 그래서 에어로파라고 하는 신의 이름을 따서 유럽이라는 말이 나왔어요. 오늘날 세계 문명을 의 결정적인 역할을 영향을 주고 역할을 하는 이 유럽 문명이 기독교 그리스 로마 문명과 맞닿아 있다는 것을 우리가 생각하면서 공부를 좀 할 필요가 있어요.
그리고 우리 신앙적인 공부도 하고 그런 역사 문명을 공부하면 우리 신앙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도 깨닫게 되고 또 이 세상도 바르게 볼 수 있는 그런 힘이 생기게 됩니다. 그 중심 그 신화의 중심 도시가 바로 아테네입니다. 바울이 지금 거기에 도착한 거예요.
바울은 도착하자마자 자기들을 수행해 준 사람들을 보내면서 신라와 디모데를 어서 보내라. 그래서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리면서 아마 사역을 본격적으로 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조금 시간 여유를 가지고 그동안 지친 몸을 추스리면서 그 아테네 시내를 여기저기 돌아본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돌아보니까 우상이 많아도 너무 많은 거예요. 우상의 세계지만 그 당시 고대가 우상의 세계지만 여기 와보니까 너무너무 우상이 많아요.
오늘날도 그런 나라들이 있죠. 가령 일본 같은 나라는 섬기는 신이 800만이 넘는다고 그러잖아요. 그 정도로 많은 신이 있는데 이 아테네 그리스 아테네는 그런 자기들의 신을 또 우상으로 조각해 놓은 어디에 가든지 그 형상을 볼 수 있는 10계명의 2계명과 배치되는 거죠. 그런 것들이 너무 많은 것을 보면서 사도바울의 마음속에 분노가 일어났어요. 분노 거룩한 분노입니다.
분노가 다 나쁜 건 아니고 우리 마음속의 분노라고 하는 감정은 매우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거예요. 나는 분노가 전혀 없다 그러면 이상한 거예요. 분노라고 하는 그 감정은 우리 속에서 자연스럽게 흐르는 것인데 그것이 어떤 대상을 향해서 나오느냐 가령 사도바울과 같이 이런 거룩한 분노가 나오면 그 사람을 성장시키고 더 귀한 사람이 되게 합니다. 그런 분노를 지금 표출하고 있는 거예요.
근데 이제 사람 속에 있는 분노가 그런 거 볼 때는 아무 감정도 일어나지 않다가 불의한 것을 보거나 우상을 보거나 세상이 막 잘못되는 걸 볼 때는 아무 감동이 없다가 사람을 보면 자꾸 분노가 일어난다. 그럼 빨리 병원에 가야 됩니다. 분노가 분노가 아주 중립적인 거지만 어떤 대상을 향해서 일어나느냐에 따라서 그 가치가 다른 것이죠.
바울의 마음, 하나님 아닌 것들을 섬기면서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일어난 그 분노 그것이 저와 여러분들의 마음 여러분들의 분노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럴 수 있어야 돼요. 그리스도인은 막 이 세상이 엉망으로 돌아가고 하나님을 배격하고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서 우상이 가득한 땅으로 갈 때 그것 때문에 가슴 아파하고 기도하고 통곡하고 마음에 분노가 일어나 의로운 분노가 일어나야만 정상적인 그리스도입니다.
오늘 바울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바울이 회당과 길거리에 가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는데 먼저 회당에 들어갔습니다.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격한 경건한 사람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어요. 그리고 저잣거리에 나가서 만나는 사람들 아마 그 당시에는 그 아테네 저작거리에 저작거리가 어디냐면 이렇게 파르테논 신전이 있고 그 바로 중간에 아레오바고 그 언덕이 있고 그 밑에 이제 회당도 있고 여러 가지 일반 일들이 돌아가는 저작거리가 있습니다. 거기까지 다 다니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됐어요.
그런데 그 복음이 변론이 되고 나중에는 다툼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새로운 것에 대한 관심이 많고 그리고 이 말을 잘하는 사람들이 이게 그리스 하면 철학이잖아요. 논리 철학 그래서 말하기를 좋아하고 자기 입장을 표현하기를 좋아하고 또 하나는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기를 좋아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바울이 와서 새로운 얘기를 하니까 그걸 받아들일 마음은 갖지 않고 관심과 흥미를 가지고 있다가 이제 자기들하고 의견이 맞지 않으면 바울과 부딪히게 되는 것입니다.
17절에 보면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저 자리에서 만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아마 따지고 듣는 사람도 있었겠죠. 받아들일 마음으로 대화를 시도하면 훨씬 쉬운데 그리고 전하는 사람도 좋은데 이게 받아들일 마음은 없이 자꾸 따지고 들면 나중에 다툼이 되게 됩니다.
아마 그런 상황으로 간 것 같아요. 여기 사람들 말도 잘하고 머릿속에 든 것도 많고 또 세계적인 도시니까 여기저기 사상들이 유입돼서 어지간한 것들은 다 들어보고 그걸 가지고 얘기하는 사람들인데 바울이 또 만만치 않은 사람인 거예요.
그냥 그 정도 안 되고 나는 그냥 복음만 전하겠다 그러면 별로 다툴 일이 없어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기도해 주면 되는데 이 바울이 만만치 않은 사람이에요. 로마인이고 또 이 디아스포라 해외 생활을 한 사람이에요. 어려서 튀르키에 아나톨리아 반도 저 밑에 있는 타르소에서 어린 시절을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 자라났고 예루살렘에 가서 공부를 했고, 가말리엘 문화 최고의 석학에게 배운 수제자였어요. 그러니까 이 바울도 꽤 논리가 있는 사람이고 머릿속에 들은 것이 아바삭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그냥 지나가지 않고 그 사람들하고 논리적으로 지금 복음을 전하면서 이 맞대결을 한 겁니다.
오늘날로 맞장을 뜬 거예요. 나도 꽤나 가방끈이 길다. 이 그리스에는 당대의 양대 철학 산맥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에비 구레옹, 하나는 수도이고 18절과 19절에 나와 있어요. 어떤 에비 구레오와 수도이고 철학자들은 바울과 논쟁할 세 혹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느냐 하고 혹은 이르되 이방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 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을 전함이로라 에비 구레오 익숙하지 않은 말이죠.
에비구레오가 뭐예요? 에피 쿠루스 학파를 우리가 그렇게 번역을 한 거예요. 에피쿠루스 그리고 스도이고는 스토아 철학 당시의 이 양대 철학이 이 그리스에서 있었습니다. 에피쿠르스는 우리가 흔히 알기로 무슨 주의예요? 쾌락주의입니다. 쾌락주의 그리고 스토 스토아는 금욕주의 이렇게 학교 다닐 때 배웠을 거예요.
그런데 에피쿠르스 학반은 쾌락주의 그러면 막 육체적으로 아주 음란하고 아주 방탕한 그런 것들을 추구하는 철학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되고 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쾌락은 정신적 쾌락입니다. 정신적 쾌락 그 정신적 쾌락에 도달하는 것을 꿈꾸는데 그렇게 해서 신과 죽음의 공포로부터 자신들의 불안한 마음을 해방시키려고 하는 거예요. 그 상태에 도달한 것을 가리켜서 마음의 평화 아타락시아라고 하는 표현을 하는데 마음의 평화를 얻는 거예요.
죽음도 두렵지 않고 신도 두렵지 않고 마음이 편한 상태로 사는 그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 에피크루스 학파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개인주의 성향이 강하다고 그래요. 내가 마음이 편하면 되는 거지 자기 마음 자기 내면 세계를 편안하기 위해서 이 철학을 이게 종교하고 비슷한 겁니다. 교회 다니는 것도 이런 유의 사람들이 있어요. 교회 나오는 이유가 뭐예요? 마음에 평화를 얻고자 오는 거예요. 그거 나쁜 거 아니야 그럴 수 있어요. 우리가 신앙생활 잘하고 말씀 가운데 하나님을 신뢰하면 하나님의 평화가 우리에게 와요. 그런 상태 죽음도 두렵지 않고 미래도 두렵지 않고 어떤 환경도 두렵지 않고 마음이 평안한 상태 그런 축복이 저와 여러분에게도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도 참 좋은 거예요. 근데 이것만 추구하다 보면 개인주의적 성향의 신앙을 갖게 돼. 그래서 이 극단적으로 가면 이 평화를 깨는 사람들은 단절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런 사람은 교제도 안 하고 그래서 교회에 와서도 가능하면 인간관계하지 않고 왜 사람 만나면 이게 자꾸 깨지거든 이거 깨뜨리는 사람들이 많거든 그러니까 이렇게 귀하게 얻은 은혜로 얻은 이 마음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그 밖의 일들을 단절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래서 나 홀로 하나님 앞에 바로 서면 되지 이런 생각으로 가는데 그것은 위험한 신앙이다. 나홀로가 아닙니다. 그것도 유지하면서 우리가 함께 더불어 가는 삶을 살아야 돼요. 그게 크리스천입니다.
근데 이제 그렇게 다이렉트로 비교할 수는 없지만 이 철학 성향과 우리 기독교 신앙의 한 흐름을 볼 수가 있어요. 그게 스토아 철학자들은 금욕주입니다. 금욕 신이 결정해 놓은 로거스라고 하는 논리를 따라 도덕적 삶을 살아야 된다. 도덕적 삶을 강조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이성을 가진 인간이 추구해야 될 궁극적 목적이다. 그래서 금욕적인 자기를 철저히 제어하면서 철저히 도덕적인 그런 삶을 살아요.
이 사람들은 이성을 가진 인간 인간이 다 이성을 가지고 있잖아요. 이성을 가진 모든 인간은 동포다. 세계 동포주의 우리가 그 공통점을 가진 사람들은 우리가 동포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이런 금욕을 통해서 얻어진 부동심의 마음의 상태,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상태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그런 상태를 아파테이아라고 하는데 그것을 추구하는 겁니다. 그 상태를 그래서 이 그룹의 사람들은 사회성을 강조하고 공동체성을 강조해요.
기독교 신앙인 중에도 그런 게 있어요. 한 번 딱 믿기로 결정했으면 흔들림이 없는 사람 있어요. 그리고 굉장히 이타적인 사람들이 있어요. 공동체를 위해서 헌신을 해요.
그런데 이제 마음에 평화가 있는가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워낙 의지가 강해서 다 그 길을 걸어가는 이 두 가지가 잘 50% 50% 이렇게 믹스되면 굉장히 안정적이면서도 굉장히 아름다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다.
우리가 이 철학을 통해서도 배우게 됩니다. 이 두 철학파 학자들이 서로 다른 입장인데 바울하고는 지금 맞붙어서 싸우게 되는 거예요. 다툼이 일어납니다. 이 두 학파는 다르지만 바울의 입장과 함께 바울의 입장에 대해서 함께 다른 입장을 또 취합니다. 이 두 학파의 공통적인 특징은 육체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그리스가 이월론 듀얼리즘이거든요. 영적인 것은 귀하고 보이지 않는 것은 귀하는데 육적인 거 물질적인 거 그리고 보이는 것은 좀 저급하다 이런 사상을 가지고 있어 이게 두 악파가 그걸 가지고 있는 그리스의 사상입니다. 그게 지금 이제 바울과 부딪히는 거예요. 왜 바울이 지금 와서 육체의 부활을 얘기하는 거예요.
육체는 어떤 것이냐 이 사람들에게 육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에 구원이 뭐냐 영혼의 감옥에서 벗어나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금욕을 통해서 육체를 제어하고 마지막에 죽으면 육체라는 감옥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나는 거 그게 구원이에요. 십자가의 보혈 용서 이런 건 아무 필요 없는 거예요. 그리고 육체는 빨리 썩어져 없어져야 될 거예요.
그런데 바울이 지금 전한 복음이 뭐예요? 그 육체가 마지막 날에 부활한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부활 부활하셨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서 부딪히게 되는 거예요. 사실 여러분 유대인들에게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복음에서 부딪혔던 것은 뭐냐 하면 신이 인간이 됐다는 겁니다.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 보이지 않는 분이고 형상도 없는 분이고 만질 수 없는 분인데 그분이 그 삼위일체 중에 한 분이 그분이 인간의 몸을 입고 왔다.
어떻게 신의 아들이 인간이 되냐 이건 유대인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문제예요. 절대로 그게 그래서 이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되는 거예요. 니가 어떻게 하나님이 신의 아들이라면 니가 하나님 아니냐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어떻게 신이 인간이 될 수 인간의 육체의 몸을 입을 수 있나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 유대인들은 거기에 부딪힌 거예요.
그런데 이 그리스 사람들은 신이 인간이 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야. 그리스 신화의 모든 신들은 다 인간 같아. 막 싸우고 질투하고 막 서로 결혼해가지고 애 낳고 막 불륜하고 별짓을 다 해요. 인간이 하는 짓은 다 해. 그게 신이야.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동정녀에서 잉태돼가지고 인간이 되셨다. 동정녀 탄생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그들에게도 그런 사상이 있었어. 그러니까 거침이 없어.
그건 받아들이는 데 별 문제가 없어요. 그런데 그렇게 인간이 돼서 됐다가 죽은 예수가 아니 다시 부활을 했다네. 그 범은 없어져야 되는데 그러니 받아들일 수가 없는 거예요.
여기서 이제 걸린 거예요. 부활에 대한 견해가 갑자기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사상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지만 육체가 다시 부활한다. 몸이 부활한다는 그 바울의 부활 복음에서 그들은 부딪힌 거예요. 그리고 결국은 받아들이질 못합니다. 그 사상의 견고함 유대인들이 신이 인간이 됐다. 그래서 예수가 하나님이다. 이거 못 받아 지금도 2천년이 지나도 그 세계관이 그러니까 그런데 이 그리스의 세계관에서는 이게 또 이제 어려운 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사도바울의 아텐의 사역은 논쟁으로 끝납니다. 물론 소수의 사람들이 구원을 얻었어요. 이제 막 논쟁이 붙자 사람들이 재밌죠. 새로운 게 오니까 재미는 있잖아요. 그래서 데리고 어디로 가냐면 아레오바고라는 언덕으로 가요. 아레오바고 언덕 이 19절 20절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붙들어서 아래 오박으로 가며 말하기를 우리가 너의 말하는 이 세교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겠느냐 내가 무슨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더 듣고 싶어 새로운 거니까. 그래서 데리고 간 곳이 아래호하고 언덕입니다. 제가 가서 사진 찍어왔는데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아레오바고 언덕 저게 이제 아테네 신전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찍었어요. 저희가 이제 아레오바고 언덕이 그 밑에가 이제 저작거리예요. 사람들은 이 저잣거리에서 신전을 바라보고 또 신전에서 저작거리를 바라보고 저 아래오바구 언덕은 뭐냐 하면 당시의 법정입니다. 법정 어떤 문제를 판결하는 곳이었어? 아레오바고라는 것은 화성의 언덕이라는 뜻이에요. 아레아스라는 신의 이름을 따서 만든 겁니다. 저 언덕도 신과 연관 신화가 있어 저기도. 근데 저기서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설교를 하면서 저희가 더 유명해졌어요. 그래야 지금은 얼마나 사람들이 많이 왔다 갔다 하는지 왜 제가 운동화를 잘 신고 갔는데도 막 미끄러질까 봐 수많은 세계인들이 이제 오르는 언덕입니다.
여기서 사도바울이 그 유명한 아레오바고 설교를 합니다. 오늘 본문을 읽어봤죠. 아레오바고 설교 사도행제는 바울의 설교 유명한 설교가 2개가 나와요. 사도행전 13장에 비시디아 안디옥 설교 회당 설교라고도 하고 유대인들에게 전하는 거예요. 구약 성경을 익히 알고 있는 그들을 위해서 어떻게 설교하느냐 구약 성경을 읽고 구약 성경을 풀이한 다음에 구약에서 약속하고 하나님이 약속하셨고 너희가 기다리던 그 메시아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이게 이제 설교의 흐름이에요. 유대인들은 너무 받아들이기가 쉬운 거예요. 우리가 구약을 뻔히 잘 아니까 그분이 예수라고 하면서 관심을 갖게 되는 거예요. 그게 설교인데 오늘 여기 모인 이 마레오바고에 모인 사람들은 다 이방인들입니다. 유대인들은 대개 회당에서 만났을 거예요. 그거 다 이방신을 섬기는 이방인들이 딱 모여 있는데 그들에게 구약 성경을 읽어봐야 잘 못 알아듣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전혀 다른 형태의 설교를 합니다.
17장 22절에 23절에 보면 제가 읽겠습니다.
바울이 아래하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의 종교성이 많도다. 내가 두러 다니며 너희의 위안은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 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이걸 귀납적 설교라고 해요. 그 사람들의 상황으로부터 가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며칠 동안 여기저기 다녀봤는데 너무 우상이 많은데 어느 재단에 가보니까 어느 우상 밑에 가 보니까 아니 세상에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글귀가 거기에 있는 거예요. 딱 그걸 잡은 겁니다. 이게 탁월한 설교가죠. 딱 서론을 그렇게 도입한 다음에 그 알지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 신에 대해서 지금 내가 얘기하겠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관심을 집중하는 거예요. 그 신이 바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니 그 하나님이 보낸 예수님 그분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셨다.
이렇게 이제 풀어나가는 거 바울은 이곳에 서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근데 이곳이 어떤 곳이에요? 재판석입니다. 재판석에서 판사의 말 한마디, 증인의 말 한마디, 변호사의 변론 한마디, 그리고 고소인 검사의 말 한마디가 운명을 바꾸는 거예요. 여기는 허튼 말을 할 수 없는 곳입니다. 지금 바울이 그 위에 서 있는 거예요. 그게 설교단이에요.
그런데 그게 어디에 있어요? 밑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고 정치가 막 돌아가는 저잣거리, 그리고 위에는 그들이 그토록 섬기는 신전이 있는 곳이에요. 신전과 저잣거리 중심에 서서 바울이 지금 복음을 전하는 거예요.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그 신 그 신은 어떤 신이냐 그냥 소개만 했으면 괜찮아요.
그리고 본문을 읽어보면 굉장히 위험스러운 반언을 수위를 넘는 발언을 합니다. 그 신은 뭐가 부족한 것처럼 너희들에게 소개하고자 하는 그 하나님은 뭐가 부족한 것처럼 사람이 지은 집에 들어가 있지 않다. 저 위에 있는 그 아테나 여신 그 여신처럼 그 집에 들어가 있는 분이 아니다. 우주를 지으시고 말이죠. 우주보다 크신 분이다. 하나님을 소개하는 것 같지만 바꿔서 들으면 저 아테나 신을 지금 누르는 거예요. 한마디로 목숨을 건 설교입니다. 이게 그냥 간단한 설교가 아니에요. 거기다가 하나님은 사람이 고안해내거나 사람이 이렇게 만들어 가지고 신이라고 섬길 수 있는 분이 아니다. 우상이 가득한 그 땅에서 그 사람들이 얼마나 그걸 신으로 섬겼어요. 그 앞에서 그것은 신이 아니다. 진정한 신은 우상으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야.
저 속에 있지 않아. 우주를 다스리고 계셔.
오늘 그 하나님을 여러분들에게 소개합니다. 그분이 보낸 아들,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소망을 주셨느니라.
이 설교를 하는 거예요. 설교자의 용기입니다. 설교자의 용기. 설교자가 때로는 위로하고 좋은 말하고 기왕이면 주일날 와서 좋은 말 들으면 좋죠.
그런데 때로는 거슬리는 말도 전할 수 있다. 제가 좋은 말만 하기를 원하면 저를 사이비로 만드는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어떨 때는 좋게도 들리지만 어떨 때는 하나님의 말씀이 막 찌르기도 하고 안 들었으면 좋겠는데 내가 오늘 교회에 와서 저 말을 듣지 그런 음성이 있을 수도 있는 거예요. 그것까지도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어야 되고 또 설교자는 바울처럼 때로는 그런 용기가 있어야 돼 죽음을 각오한 해야 될 말은 하게 되는 그런 용기가 있어야 바울의 설교의 결과입니다. 그들이 희롱하고 다시 듣겠다고도 하고 그리고 바울은 그 자리를 떠나서 떠났고 바울과 친해진 몇 사람이 예수를 믿었어요.
사실 그 열매는 별로 없었어요. 그것을 지금 누가가 기록하고 있어요? 누가의 기록 뉘앙스를 보면 신통치 않아요. 그 앞에서는 굉장한 역사들이 있었는데 여기는 뭐 특별한 일도 일어나지 않고 실컷 변론만 하다가 몇 사람만 그냥 예수님을 따르는 그런 결과를 가져왔어요.
그러나 그들로 인해서 아테네의 교회가 세워지고 또 아테네의 하나님의 역사가 궁극적으로 일어납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당장 볼 때는 상당히 좋지 않은 결과 그래서 마음 상하게 하는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바울도 아마 이 일로 마음이 상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빨리 거기를 떠났어 떠나서 고린도로 갑니다. 고린도로 가서 막상 사역하려고 보니까 이 후유증이 있는 거예요. 여기 여기서 있었던 그렇게 막 그 사람들하고 했는데 결국 열매도 안 나타나고 쫓기다시피 지금 나온 거예요. 그래서 마음이 침체되고 바울도 그런 고민이 있었나 봐요. 내가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근데 고린도 이제 우리가 또 살펴보겠지만 고린도에 가면 막 음란한 도시예요.
거기는 막 창녀가 수천 명이야. 그쪽구만 도시에 신전 창녀가 막 그런 도시에다가 아주 국제 무역이 막 돌아가는 국제 도시에다가 사람들이 돈은 많은데 원래 돈이 많다고 꼭 넉넉한 건 아니에요. 더 막 그걸 가지고 행세하고 이게 이 물질이 풍성해지면 영적인 걸 덜 사모합니다. 그래서 국민 개인 소득이 1만 5천 이게 사회학적으로 종교 사회학적으로 1만 5천 불을 넘어서면 교회의 부응에 그 그래프가 꺾인다는 거예요. 막 어려울 때는 우리가 어려울 때는 영적으로 사모하는데 어느 정도 안정선에 들어가면 뭐 이렇게 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사모함이 없는데 이 고린도가 막 그런 곳이에요. 거기다가 여기서 이제 침체 여기서 한 타격을 받고 와서 바울이 힘들어할 때 예수님이 나타나 예수님이 환상 중에 직접 나타나셔서 위로하시고 격려하시고 여기서 그냥 머물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 여기에 지금 믿는 사람이 많다 하면서 막 용기를 주는 이 바울의 전도 여행 중에 굉장한 위기가 아테네 이후에 옵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생각을 하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실패할 수 있어요. 근데 실패할 때 그것 때문에 그냥 침체되고 좌절하면 그 사람은 그냥 그렇게 무너지는 거예요. 거기서 배우면 됩니다. 배우면 한 단계 뛰어넘을 수 있어요. 바울이 여기서 뭘 배웁니까? 내가 말과 혀로 내 지혜로 했더니 그건 잘했어요. 사도바울이 잘했어요. 그런데 열매는 없구나. 앞으로는 우리가 말과 인간의 지혜도 하나님이 사용하시지만 앞으로는 더 철저하게 성령을 의지하겠다 하는 결심을 해요. 이게 엄청난 터닝 포인트가 됩니다. 그리고 고린도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 말과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에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음을 잊게 하려 하였노라.
고린도에서는 그렇게 사역했다는 거예요. 아테네서의 쓴 경험이 바울의 사역을 완전히 바꿔놨습니다.
사람의 능력도 중요하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 능력을 잘 발휘해서 잘 개발해서 그걸 내 인생을 위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쓰는 것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만 하면 그것만 하면 안고 없는 찐빵 같은 거 되는 거예요. 막 열심히 노력은 했는데 나중에 보면 결과가 없는 거예요. 특히 하나님의 일은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이 하나님의 일을 우리가 교회 일을 하거나 목사가 하나님 일을 할 때 성령의 능력만 의지한다고 해서 막 책도 안 보고 아무 생각도 안 하고 멍하고 있다가 설교단에 올라가지고 능력을 주옵소서 눈 풀려가지고 막 이렇게 얘기하 그건 사이비가 되는 거예요.
실제로 그런 걸 추구하는 사람들 있으면 막 직통 게시 받고 막 나 그랬으면 얼마나 편할지 몰라 설교 준비도 안 하고 그냥 가만히 기도하고 있다가 와서 설교하려고 막 지통 개시가 와 그럼 얼마나 좋겠어요.
근데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에게 준 시간과 이성을 선을 지혜를 최선을 다해서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그거 필요해요. 그러나 그게 다는 아니라는 거예요. 거기에 성령의 기름부음이 임하고 성령이 붙들어 주셔야 되고 성령이 열매 맺게 해주셔야 되고, 성령이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주셔야 역사가 일어난다. 바울이 그동안 성령을 의지해 왔지만 이번 아텐의 사역을 통해서 큰 깨달음을 한 거예요. 앞으로는 더 많은 퍼센티지 아니면 더 절대적으로 나는 말 사람의 지혜가 아닌 성령의 나타남과 성령의 능력만 의지하겠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 순교의 자리에 갈 때까지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사람의 지혜 탁월한 언변 복음을 전하고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는데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게 충분하지 않다는 거예요. 거기에 성령님의 능력이 임해야 합니다. 우리가 조금 부족해도 성령이 함께하시고 능력을 부어주시면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더 놀라운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도 바울의 결단처럼 사람의 지혜를 넘어서는 성령의 역사, 성령의 능력을 의지해서 주님이 주신 사명 감당하며 우리에게 주신 인생을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