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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월당 시집 제2권 1-31 영사詠史 3 영삼간신詠三諫臣 세 간諫하던 신하를 노래하다
1 비간比干
미미악진어종변靡靡樂盡魚終變 미미靡靡의 음악 다하니 고기[魚] 끝내 변하였고
장야감종저도표長夜酣終杵到漂 긴 밤의 기운 끝나며 절굿공이 떠내려갔네.
복철전거여감계覆轍前車如鑑戒 전복된 앞 수레를 경계 삼아 조심했다면
상손응불라주조商孫應不裸周朝 상商나라 자손들이 周 왕조 때 제사지내지 않았으리.
미미곡 연주에 술로 채운 연못(酒池)이 바닥을 드러내고
광란의 밤이 다하자 절구 공이가 떠내려갔다네.
걸왕이 탕왕에게 멸망한 사실을 깨우쳐 경계했더라면
은나라 자손들이 주나라 왕조에서 헐벗고 살지 않았을 텐데.
►미미靡靡 주紂의 악사樂師인 師延이 작곡한 악곡樂曲.
망국적亡國的인 음악으로 주紂가 멸망되어 고기[魚]를 못 먹게 되었다고 한다.
은殷 紂王(?-BC1046)이 애첩 달기妲己와 함께 酒池肉林에 빠져있을 때 궁정악사가 연주한 음악.
이 음악을 들으면 모기(蚊)라도 암수가 짝짓지 않고 배길 수 없었다고 한다
►장야長夜 장야지음長夜之飮.
은殷 주왕紂王이 酒池肉林에서 나체裸體의 남녀가
춤을 추게 하며 120일간 광란의 밤을 보낸 것을 말함.
지켜보던 은殷 주왕紂王의 숙부 비간比干이 그만두라며 諫言하자
“聖人의 심장엔 구멍이 일곱개 뚫렸다는데 확인하자”며
즉석에서 해부解剖하여 심장을 드러냈다고 함.
그 밖에 諫言하던 충신들은 기름칠한 구리기둥(銅柱)을
숯불 위에 올려놓고 매달려서 건너가게 해 떨어져죽게 했다
►저도표杵到漂 절굿공이 떠내려갔다
주周와 은殷이 목야牧野에서 싸운 전투로 피가 흘러서 절굿공이가 떠내려갔다고 한다.
►복철전거覆轍前車 앞의 수레가 전복됨.
하夏나라의 포악한 걸왕桀王이 酒色雜技에 빠져 은殷나라 탕왕湯王에게 멸망했다
은殷 주왕紂王 역시 周나라 무왕武王에게 멸망하고 말았다
►상商 은殷나라. 殷나라의 후기後期 명칭
●비간比干(BC1125-BC1063)
1. 주왕의 숙부
이름은 비比이고 간干이라는 나라에 봉封해져 비간比干이라고 불린다.
말읍沫邑(지금의 허난성 치현淇縣)에서 태어났으며 성은 자子이다.
상商의 28대 태정제太丁帝의 둘째 아들로서 제을의 아우이자 주왕紂王의 숙부叔父이다.
20세에 태사太師(황제의 스승)가 되어 상나라 왕 제을을 보좌했고 어린 제신을 돌봤다.
사람됨이 곧고 강직하여 주왕紂王이 즉위한 후 폭정暴政을 폭정을 일삼자
소사少師(훗날의 승상)였던 비간은 이를 비판하고 직언을 했다.
상商의 마지막 임금인 주왕紂王은 총명하고 용맹했지만
자신의 재능을 지나치게 자신하여 신하의 간언諫言을 불필요하게 여겼다.
그는 술과 음악을 지나치게 즐겼으며 여자를 좋아하였다.
특히 달기妲己를 총애하여 그녀의 말이면 무엇이든 들어주었다.
주왕은 세금을 무겁게 부과하여 ‘녹대鹿臺’라는 궁궐을 짓고
연못을 술로 채우고 고기를 숲처럼 매달아 놓고 즐긴다는
‘주지육림酒池肉林’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방탕하고 사치스럽게 생활했다.
백성들의 원성怨聲이 높아지자 형벌을 강화시켜 기름을 바른 구리 기둥을 숯불 위에 걸쳐 달군 뒤에
그 위를 맨발로 건너가게 하여 불에 타 죽게 하는 포락炮烙이라는 형벌까지 만들어냈다.
그리고 비중費中을 등용하여 국정을 담당하게 했는데 그는 아첨을 잘하고
私利私慾만 채웠기 때문에 상商의 백성들은 모두 그를 멀리하였다.
이처럼 주왕紂王이 폭정暴政을 하자 백성들과 제후諸侯들은 점차 반기를 드러내기 시작했고
특히 서백西伯 희창姫昌(뒤의 周 文王)의 세력이 점차 강성强盛해졌다.
비간比干은 주왕紂王에게 이러한 정황을 간언諫言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서백西伯 희창姫昌이 죽고 그의 아들인 희발姫發(뒤의 周 武王)이 직위를 계승하여
동쪽 정벌에 나서 맹진盟津에 이르자 그를 따르는 諸侯가 800명이나 되었다.
그런데도 주왕紂王이 諫言하는 신하들을 처형하고 暴政을 멈추지 않자 微子 등은 商을 떠났다.
하지만 비간比干은 “신하는 죽더라도 임금께 忠諫해야 한다”며 계속 紂王에게 諫言하였다.
그러자 주왕紂王은 화를 내며
“聖人의 심장에는 구멍이 일곱 개나 있다고 들었다”라며
比干의 忠心이 진짜인지를 확인하겠다며 그를 해부하여 심장을 꺼내도록 하였다.
이처럼 비간比干이 주왕에게 잔인하게 살해되자
기자箕子는 두려운 나머지 미친 척하다가 주왕紂王에게 사로잡혀 갇혔다.
그리고 상商의 太師, 少師는 商의 제기祭器와 악기樂器를 가지고 周로 달아났다.
결국 周의 희발姫發은 忠臣을 잔인하게 살해한 紂王을 토벌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제후들을 규합하여 商을 공격하였으며 목야牧野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商을 멸망시켰다.
희발姫發은 周의 武王으로 새로운 天子로 즉위한 뒤
比干의 묘에 봉분을 새로 쌓으며 그의 忠節을 기렸다.
또한 비간比干의 아들인 견堅에게 ‘임林’이라는 성姓을 주었다.
이 때문에 비간의 아들인 임견林堅은 임씨林氏 성姓의 시조始祖, 比干은 太始祖로 여겨진다.
전설에서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비간의 부인 규씨嬀氏는 임신 3개월째에 남편이 화를 당하자 그 화가 자신과 태아에게도 미칠까봐
수도였던 조가朝歌(말읍, 지금의 허난성 치현)를 떠나 장림長林(지금의 허난성 웨이후이[衛輝]시)의
한 석실에 숨어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천泉이라 했다.
무왕이 주왕을 토벌하여 천하를 평정한 다음 비간의 후손을 수소문했는데
마침내 비간의 아들이 장림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알고는
임씨 성을 내리고 이름을 견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러고는 지금의 허베이성 安平현에 해당하는 박릉博陵 지역을 봉지로 주었다고 한다.
2. 충직과 직간의 대명사
비간比干은 기자箕子, 미자微子와 함께 ‘殷末(상商)3인’ 또는 3賢으로 불리며
역대 왕조에서도 대대로 많은 관심과 추앙을 받았다.
충직과 직간直諫의 대명사로 바른 말을 한다는 ‘시간尸諫’이란 단어가 여기서 나왔다.
중국의 民間에서는 충신忠臣의 전형典型으로 존경을 받으며 글과 재물[文財]을 관장하는
문곡성文曲星(九星 가운데 넷째 별)의 化身으로 숭앙崇仰되었다.
►문곡성文曲星
북두칠성 혹은 음양가에서 길흉을 점칠 때 쓰는 九星 중 하나로
글과 재물을 관장하는 신을 의미한다.
3. 소설 속의 비간
명나라 때의 유명한 소설가 허중림許仲林의 대표작 <봉신연의>에 비간이 등장하는데
소설 속에서 비간은 호리동狐狸洞(여우굴)을 불태우는 바람에 구미호에 비유된
달기(주왕의 애첩)의 원한을 사서 주왕에 의해 심장이 갈라지는 형벌을 받는다.
이후 강태공이 신으로 봉해질 때 문곡성에 봉해진다.
허난성 新鄕시 웨이후이시에 비간의 사당과 무덤이 남아 있다.
사당과 무덤은 역대로 여러 번 중건되었고 1963년 중국 정부에 의해
전국 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어 잘 관리되고 있다.
비간의 무덤은 거의 최초로 봉분을 갖춘 무덤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 때문에 ‘천하제일묘天下第一墓’라는 명성을 얻었다.
또한 공자가 돌에 칼로 ‘은비간묘殷比干墓’라고 새긴 비석이 남아 있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글씨는 공자가 세상에 남긴 유일한 실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이 비석은 ‘천하제일비’라는 명성을 얻었다.
(실제로 돌에 새겨진 글자에서는 ‘墓’자가 ‘莫’자로 새겨져 있다.
미처 다 새기지 못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매년 탄신일에 성대한 행사가 열리는데
이때는 전 세계의 임씨 후예들이 참가한다./네이버 지식백과
2 굴원屈原
상강천고조유혼湘江千古弔幽魂 상강湘江에 천년 동안 묻힌 魂을 조상하노니
초췌행음위저원憔悴行吟爲底冤 초췌憔悴해서 행음行吟한 것 무엇이 원통한가?
약사선생조성세若使先生遭盛世 만일 선생이 태평성대를 만났다면
멱라응흠단장원汨羅應欠斷腸猿 멱라수汨羅水에 응당 단장斷腸의 잔나비 없었으리.
상강의 천년 전 굴원 혼령께 조문하나니
초췌하게 시 읊고 다니시다 물속의 원혼이 되셨네요.
만약에 굴원 선생께서 태평성대에 태어나셨다면
멱라수에는 응당 애간장 끊는 원숭이울음이 들리지 않으리.
►상강湘江 상수湘水.
광서성廣西省 흥안현興安縣에서 발원,
호남성湖南省에 흘러들어 동정호洞庭湖에 유입되는 강.
굴원屈原의 유배지가 湘江 유역의 소택지沼澤地이다.
►원통할 원寃 원통冤痛함. 원혼冤魂
►멱라汨羅 멱라수汨羅水.
춘추시대 초楚나라의 굴원屈原(BC343-BC278)은
왕에게 간諫한 죄로 추방돼 장사長沙의 멱라수汨羅水에 몸을 던졌다.
►멱라수羅水 호남성 湘陰縣의 북쪽에 있는 강,
湘水와 합류되는 곳을 汨羅淵 또는 굴담屈潭이라고도 하며
초楚의 굴원屈原이 투신한 곳이라고 전해 온다.
●굴원屈原(BC343?-BC278?)
초나라의 대신이자 애국 시인.
<詩經>과 함께 중국 고대의 2대 시가집이라고 하는 <楚辭>의 저자(詩辭로도 병칭됨).
湖北省 자귀현秭歸縣 굴원진에서 출생하였다.
춘추전국시대 초楚나라의 왕족과 동성同姓이며 이름은 평平, 자는 원原이다.
생몰연대는 기본 자료인 <史記 굴원전>에 명기明記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설이 있으나 지금은 희곡 <굴원>의 작자인 궈모뤄[郭沫若]의 설에 따른다.
굴원의 대표작인 <이소離騷>에서는
자신의 이름을 정칙正則이라고 했고 자를 영균靈均이라고 표기했다.
굴원은 젊어서부터 학식이 뛰어나 초나라 회왕懷王BC328-299 재위)의 신임을 받았고
26세에 좌도左徒(左相)의 중책을 맡아 내정·외교에서 활약하였다.
하지만 法令立案 때 궁정의 政敵들과 충돌하여 중상모략으로 국왕 곁에서 멀어지기도 하였다.
<이소離騷>는 그때의 분함을 詩로 표현한 것이라고 <사기>에 기록하고 있다.
당시 초나라는 제齊나라, 진秦나라 3국이 대립하였던 때였다.
굴원은 제齊나라와 동맹하여 강국인 진秦나라에 대항해야 한다는
합종설合縱說을 주장하였으나 초나라 회왕과 중신들은 연횡설連衡說을 주장한
진나라의 장의張儀의 전략에 속아 오히려 굴원이 실각하고 말았다.
초나라는 연횡설에 따라 제나라와 단교하였다가 진나라에 기만당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出兵하여 진나라와 전쟁을 벌였지만 고전만 거듭하다 패하였다.
굴원이 다시 등용하여 정사를 맡게 되었고 진나라와의 화평조건으로 장의의 목숨을 요구하였다.
장의가 자진하여 초나라의 인질이 되었지만
내통한 정적과 왕의 愛妾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장의를 석방하고 말았다.
제나라에 사신으로 가 있던 굴원은 귀국하여
장의를 죽여야 한다고 진언했으나 이미 장의는 진나라로 달아난 뒤였다.
이후 진나라에서 화평을 위해 초나라 왕을 진나라로 초대한다는 계략을 펴오자 굴원은 왕이
진나라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지만 결국 왕은 진나라로 들어갔다가 목숨을 잃고 말았다.
왕이 진나라에서 客死하자 장남 경양왕頃襄王(BC298-263 재위)이 즉위하고
막내인 자란子蘭이 令尹(재상)이 되었다.
자란은 아버지를 객사하게 한 장본인이었으므로 굴원은 그를 비난하다가
또다시 모함을 받아 양쯔강 이남의 소택지로 추방되었다.
굴원의 대표작인 <漁父辭>는 정계에서 쫓겨나 강남에 머물며 집필한 작품이다.
창강에서 고기를 잡는 어부를 만나 대화를 나누고 깨친 바를 집필한 책이다.
굴원은 어부사에서 자신을 중취독성衆醉獨醒이라 일컬으며 초나라가 처한 상황을 한탄했다.
<사기>에는 <회사부懷沙賦>를 싣고 있는데 이는 絶命의 노래이다.
한편 자기가 옳고 세속이 그르다고 말하고 난사亂辭(최종 악장의 노래)에서는
죽어서 이 세상의 類(법·모범)가 되고 자살로써 諫하겠다는 결의를 밝히고 있는데
실제로 창사[長沙]에 있는 멱라수汨羅水에 투신하여 죽었다.
그의 작품은 한부漢賦에 영향을 주었고 문학사에서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높이 평가된다.
굴원이 멱라수에 투신하여 죽은 날이
음력 5월 5일 단오날인데 중국에서는 이날을 문학의 날로 기린다.
특히 단오날에 댓잎에 싸서 먹는 쫑쯔粽子는 굴원을 기리기 위한 음식으로 유래되었는데
쫑쯔를 강물에 던져 물고기들이 굴원의 시신을 뜯어먹지 못하게 했다는 풍속이 전해진다.
또한 중국에서 행해지는 경도희競渡戱(용선龍船 경주 시합)도
강물에 빠진 굴원의 시신을 빨리 건져내기 위한 것에서 유래한다.
3 오원伍員
지덕묘전화서퇴至德廟前禾黍堆 지덕묘至德廟 앞에는 벼·기장이 쌓였는데
고소대반원노애姑蘇臺畔猿猱哀 고소대姑蘇臺 가에는 잔나비만 슬피 운다.
노도불시무공업怒濤不是無功業 성난 물결 공업 없는 것이 본래부터 아니라지만
관령인간설화태管領人間雪禍胎 세상사람 영도하며 화禍의 씨를 씻어주네.
오나라 개국시조 태백의 묘 앞에는 벼와 기장이 쌓였는데
고소대 언덕에는 원숭이 울음만 애절하다오.
민심의 성난 물결은 쌓은 공덕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람들을 도맡아 다스려서 재앙의 뿌리를 씻어내려는 것이네.
►지덕묘至德廟(=태백사묘泰伯祠廟=지덕사至德祠=양왕묘讓王廟)
강소성江蘇省 우시無錫에 있음
공자孔子가 吳나라 개국시조 태백泰伯을 地德이라 칭하면서 얻게 된 이름.
오吳나라의 조상은 주周 무왕武王의 증조曾祖인 태왕太王의 長子인데
대왕이 천하를 빼앗을 야심이 있는 것을 알고 멀리 오나라로 도망갔다.
그래서 그곳에서 태백泰伯이 건국하여 오吳라 하였고
세상에서 그를 지극한 德이 있는 분이라 하여 그 사당을 지덕사至德祠라고 하였다.
►고소대姑蘇臺
춘추시대 吳나라 땅 현재의 江蘇省 蘇州府에 있었던 부차夫差와 西施의 宮殿.
오왕부차吳王夫差(재위BC496-BC473)가 월왕구천越王句踐을 쳐서 함락하자
句踐이 미녀 서시西施를 바쳐서 퇴로退路를 허락 받았다.
夫差는 西施를 매우 총애하여 姑蘇臺를 지어 향락享樂에 빠졌다
►노도怒濤 성난 물결.
吳王이 伍員을 죽여서 강에 던졌는데 그 후에 풍랑이 심할 때에는 오원이 소거素車에
白馬를 몰아 그 물결을 타고 올라오는 것을 오나라 사람들이 보았다고 한다.
►관령管領 도맡아서 다스림.
►雪설 씻어냄.
►화태禍胎 재앙災殃의 근원根源
●오원伍員=오자서伍子胥(BC559-BC484)
이름은 원員이고 자는 자서子胥이다.
뒤에 오나라에서 신申 땅에 봉해져 ‘신서申胥’로 불리기도 한다.
춘추시대 초나라 초읍 또는 안휘성安徽省 전초현 출신이라고 한다.
1) 가문의 멸망과 오나라 망명
그의 선조 오거는 초 장왕 때 정직한 간언으로 큰 명성을 떨쳤으며
이후 집안사람들도 대대로 초나라에서 활동했다.
그의 아버지 오사伍奢는 초 평왕平王의 太子太傅로
태자 건建을 보좌했는데 간신 비무극費無極의 무고로 인해 투옥되었다.
이때 초 평왕은 오원과 그의 형 오상伍尚도 불렀는데
만약 오지 않으면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오원은 초 평왕이 자신들 모두를 죽이려는 것을 알고 형에게 가지 말라고 호소했으나
오상은 그 말을 따르지 않고 아버지를 구하러 갔다가 아버지와 함께 처형되었다.
도피 길에 나선 오원은 태자 건이 송나라로 망명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게 투신했다.
송나라에 내란이 일어나자 오원은 태자 건과 함께 정나라로 도피했는데 정나라에서 태자 건은
진晉나라의 대부 중항인中行寅과 더불어 정 정공을 몰아내려다가 실패하여 죽임을 당했다.
결국 오원은 태자 건의 어린 아들 公子 승勝과 함께 오나라로 도피했다.
2) 원수의 시신에 채찍 3백 대를 때리다
오원은 오나라에서 용사 전제, 협객 요이와 가까이 지냈고
이들로 하여금 오왕 요僚와 그의 아들인 경기慶忌를 죽이도록 하고
공자 光을 옹립했는데 이 인물이 오왕 합려이다.
왕위에 오른 합려는 오원을 大夫로 중용했다.
오원은 성을 쌓고 군대를 훈련시켜 국력을 튼튼히 했는데
이때 만든 고소성姑蘇城이 지금의 장쑤성 쑤저우(蘇州)시에 있는 서문胥門이다.
BC506년에는 손무를 발탁하여 원수元帥(군대의 총사령관)로 삼고
초나라를 공격하여 초나라 수도 영郢(지금의 후베이성 서부)을 함락했다.
그리고 초 평왕의 묘를 파내고 그 시체에 채찍 3백 대를 때려 아버지와 형의 원수를 갚았다.
그는 오나라로 하여금 서쪽으로 초나라를 격파하고
북쪽으로 서徐, 노魯, 제齊나라를 물리쳐서 합려가 오나라가 패자霸者가 되는 데 공헌했다.
BC496년 합려가 월왕越王 구천과 큰 전투를 벌였는데 여기서 큰 부상을 입었다.
합려는 죽기 전에 아들 부차에게
자신의 원수를 갚으라고 당부했고 오원에게는 부차를 보좌하도록 했다.
부차가 왕위를 계승한 후 월나라에 보복을 가하자 월왕 구천은 투항해왔다.
이때 오원은 아예 월나라를 멸망시키자고 주장했으나
태재太宰로 있던 백비가 농간을 부려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부차는 제나라를 치고 中原으로 나아가 제후들의 맹주로 인정받으려 했다.
오원이 이런 부차를 여러 차례 제지하며 만류했지만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3) 부차의 명을 받아 자결하다
BC484년 부차는 결국 오원에게 촉루屬鏤라는 검을 내려 자결하도록 명했다.
분노한 오원은 가족에게 자신의 눈을 파내 東城門 밖에 걸어서
월나라에 의해 오나라가 멸하는 것을 지켜보게 하라고 말했다.
이에 오왕 부차는 크게 노하여 오원의 머리를 솔개 가죽(일설에는 말가죽)으로 만든
부대에 담아 전당강錢塘江(저장성 북부를 흐르는 강)에 버리게 했다.
4) 오자서의 예언이 실현되다
BC482년 마침내 오원의 예언대로 월나라 구천이 오나라를 멸망시켰다.
부차는 저승에서 오원을 만나기가 부끄러워 자신의 눈을 흰 베로 싸고 자결했다.
오원의 아들은 제나라 포씨鮑氏에게 의탁했고
그의 후손들은 뒤에 성을 王孫氏로 고쳤다고 한다.
5)오원의 출관出關 전설
송나라로 도망간 태자 건은 그곳에서 푸대접을 받은 후 정나라로 갔고
그 다음에는 당시의 강대국인 진晋나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나라로 갔다.
그러나 정나라에서 하인이 그의 비밀을 밀고하는 바람에 정나라 정공과 자산에 의해 살해당했다.
한편 오원도 무사히 초나라 국경을 넘어 오나라로 도망쳤는데,
이를 ‘오원의 출관’이라고 하는데 출관이란 국경을 벗어났다는 의미다.
이 출관에 관하여 여러 전설이 전하는데 그만큼 그의 출관이 극적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탈출할 당시 초나라 방방곡곡에 수배령이 내려졌다.
운신조차 힘들어진 그는 어떻게 국경을 빠져나갈지를 밤새 고민했다.
얼마나 고민을 했는지 밤사이에 머리카락이 모두 하얗게 새버렸다.
덕분에 변장할 필요가 없어졌고 그는 초나라의 국경 관문인 소관昭關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이것이 가장 보편적으로 전하는 출관 이야기다.
한편으로는 관문의 문지기가 그의 얼굴을 알아보고 상금과 벼슬이 탐나 붙잡았는데
그가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해 풀려났다는 전설도 전한다.
그는 자신을 잡아 넘기려는 문지기에게 자신은 보물을 훔치는 바람에 수배령이 내려졌는데
지금은 보물을 모두 없애고 하나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나를 잡아가면 나는 당신이 내 보물을 모두 빼앗아갔다고 말할 것이고
그럼 당신은 상금은 커녕 목숨도 부지하기 힘들 것이라고 공갈했다고 한다.
문지기의 표정에서 자신이 무슨 죄로 수배 당했는지를
모른다는 것을 직감한 오원이 순간적인 기지로 문지기를 농락한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오원의 탈출에 관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는 태자 건의 아들인 공자 승과 함께 달아나다
소관에 이르러 병사들에게 붙잡힐 뻔하자 승과 헤어져 혼자 도망쳤다.
장강에 이르러 거의 붙잡힐 상황이었는데
마침 한 어부가 배를 타고 다가와 오원을 무사히 강 건너로 피신시켰다.
그는 오나라에 이르기도 전에 병이 났고 밥을 빌어먹으며 오나라에 도착했다.
이렇게 오원의 출관에 관한 전설들이 많다는 것은
그의 탈출이 얼마나 위험하고 흥미진진했는지를 보여주는 반증이라고 하겠다.
옛부터 간하던 신하가 많았지만 이 세 사람같이 임금에게 간하다가 듣지 아니하므로
생명을 버리고 몸을 버린 자가 있지 아니하나
임금이 끝내 깨닫지 못하여 멸망하기에 이르렀으니
바로 두사인杜舍人이 이른바
'진秦나라 사람은 저 스스로를 불쌍히 여길 겨를이 없어서
뒤의 사람이 그것을 슬피 여긴다.’는 것이니
뒤의 사람은 그것을 슬피 여기면서도 거울삼아 경계하지 않았으므로
또 뒤의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 뒤의 사람을 불쌍히 여기게 하는 것이다.
►두사인杜舍人 당唐나라의 유명한 시인詩人 두목杜牧(803-852)
그가 지은 <아방궁부阿房宫赋>에 이런 말이 있다.
진인불가자애秦人不暇自哀 진나라 사람들은 스스로 슬러할 겨를도 없었는데
이후인애지而後人哀之 후세 사람들이 그들을 슬퍼하고 있도다
진인불가자애秦人不暇自哀 이후인애지而後人哀之
진나라 사람들이 스스로 슬퍼할 겨를조차 없이 후세 사람이 이를 슬퍼하였고
후인애지이불감지後人哀之而不鑑之
후세 사람이 이를 슬퍼하여 거울(敎訓)삼지 않으면
역사후인이亦使後人而 복애후인야復哀後人也
또한 後世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 후세 사람을 슬퍼하게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