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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제22대 국왕이자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이다. 조선에서의 묘호는 정종(正宗)이지만, 대한제국 시기 황제로 추존되어 정조(正祖)로 격상되었다. 이는 1897년 대한제국 선포 후 고종의 4대조 추숭에 따라 황제로 추존된 사도세자와 효명세자의 사례와 같다.
선왕인 영조 재위기인 영조 28년(1752년)에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으나 출생 전에 형 의소세손이 요절하여 실질적 장남이었다. 1752년(영조 28년) 태어나 1759년(영조 35년) 왕세손으로 책봉되었고 1762년(영조 38) 조부 영조가 부친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이자 요절한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의 후사가 되어 왕통을 23살에 정식으로 이었다. 1776년 1월 30일(음력 1775년, 영조 51년 12월 10일)부터는 대리청정을 하여 국가의 정사를 직접 관장하였으며 3개월 뒤 조부 영조가 81세의 나이로 승하하자 23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24년간 재위하다 1800년에 47세의 나이로 승하했다.
2. 묘호, 시호, 휘
묘호: 정종(正宗)
시호: 문성무열성인장효대왕(文成武烈聖仁莊孝大王)
대한제국
묘호: 정조(正祖)
시호: 경천명도홍덕현모문성무열성인장효선황제(敬天明道洪德顯謨文成武烈聖仁莊孝宣皇帝)
조선에서 올린 묘호는 '정종(正宗)'이므로 《정조실록》의 원제 역시 '정종대왕실록'이다. 비록 훗날 대한제국 시기에 황제로 재추존되어 '정조'로 묘호가 바뀌었지만 실록명은 바뀌지 않고 그대로 남았다. 제2대 임금인 정종(定宗)과는 한자가 다르다.
대한제국을 연 고종 때 3대조인 양증조부로서 묘호가 조(祖)로 격상되고 선황제(宣皇帝)로 추존되었으며 존호가 더해져 최종적으로 '정조 선황제'가 되었다. 흔히 사극에서 세도정치기의 사람이 '정조대왕'이라고 일컫는 장면이 많은데 '정조(正祖)'라는 묘호는 1897년(광무 원년)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격상된 후에 생긴 묘호이므로 원래대로라면 '정종대왕'이나 '정조황제'라고 해야 맞지만 2대 정종과 헷갈릴 수 있어 일부러 '정조대왕'이라고 하는 것으로 봐야 할 듯.
실제로 정조는 사후 '정조대왕'이라고 불린 적이 없었다. 사후 '조선'에서는 '정종대왕'으로 불리다가 대한제국이 건국되면서 황제로 추존받으며 묘호가 바뀌어 '정조 선황제'가 되었기 때문. 정조의 묘호가 조선의 '조(祖)' 남발과 도매금으로 엮이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묘호가 '정조'로 바뀐 것은 대한제국 건국 당시, 초대 황제로 즉위한 고종의 3대조 자격으로 추숭된 것이므로 조 남발과는 관계 없는 종법상 합당한 추숭이다.
정조의 휘인 '祘'은 '셈할 산(算)'자와 같은 음으로 읽기 때문에 흔히 '산'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대부분의 백과사전도 '산'으로 표기하고 있다. 그러나 정조 당대에 정조가 직접 편찬한 《어정규장전운(御定奎章全韻)》의 〈전운옥편(全韻玉篇)〉을 보면 발음이 '셩'(현대 한국어 '성')이라고 되어 있으며 여기에 어휘(御諱)라는 주석도 달려있다. 제목인 '규장전운' 앞에 붙은 '어정(御定)'은 임금이 정한 것이라는 의미이니 이 발음 사전은 다름아닌 당시의 군주인 정조의 명령에 의해 편찬이 시작된 것이며 정조 본인이 직접 감수까지 한 결과물이다.
또한 일제강점기 때 지석영의 《자전석요(字典釋要)》라는 한자 사전에서 이 글자의 음을 '셩'이라고 표기한 이유로 정조의 휘를 '산'이 아니라 이중모음의 단모음화를 감안하더라도 '성'이라고 읽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결론적으로 현대 옥편에서 저 글자를 '산'이라고 표기해 놨기 때문에 흔히 '이산'이라고 하지만 조선에서는 이 글자를 '산'이라 읽지 않았다는 것. 그런데 이 논란을 뒤집는 연구 결과가 나왔으니 정조 즉위 당시까지만 해도 '산'이라고 읽었으나 즉위 20년째인 1796년(정조 20년)에 '산'의 발음을 '셩(성)'으로 고쳤다는 결론이 나왔다. 초기에 '祘' 이 글자를 '산'으로 발음했을 것이란 것을 짐작케 해주는 내용이 《정조실록》에 있으며 이후 발음이 성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짐작케 할 수 있는 내용 역시 《정조실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1776년(정조 원년)에는 분명 '산'으로 읽고 있는데 1800년(정조 24년)에는 '성'으로 읽고 있으므로 중간에 발음이 바뀌었을 것이란걸 짐작할 수 있다.
피휘의 전례로 보건데 전국의 '이산'이나 '~리산' 지명을 갈아치우다 너무 많아서 결국 그냥 왕 이름 쪽의 발음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한가지 재밌는 사실은 1980년대까지는 정조의 이름을 '이성'으로 알았다가 '이산'으로 고쳤는데 이제 결론이 위와 같아졌다는 것. 또한 선대인 영조 대의 운서에 동자 관계인 '算'자에 '어휘(御諱)'라는 내용이 있어서 이 주장에 근거를 실어주게 되었다. 그 이유는 원래 규장전운의 해당 자리에 있던 '渻'자를 쓰던 약봉 서성(徐渻)이 자손이 매우 많아 그를 부러워하여 그의 이름과 같은 발음으로 채워 넣은 것이라고 한다.
3. 평가
군주로서 사명감이 투철했던 정조는 진정한 위민 정치를 구현하겠다는 높은 이상도 가지고 있었다. 제2의 세종이라 할 만큼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군왕. 그래서 그의 짧은 생애가 더욱 안타깝지만, 과연 그가 더 오래 살았다면 조선의 운명이 달라졌을까? 그는 진정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끈 개혁 군주였나?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16권 中
정조의 통치 행태는 권모와 술수였다. 연전에 발굴된 영의정 심환지와의 비밀 편지 속에서 그의 마키아벨리적 면모가 잘 드러났다. 정조가 죽자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세도기의 경직된 반동 정치는 조선을 일제의 식민지 처지로 몰아갔다. 그래서 우리는 영조·정조 대의 짧은 황금기를 내내 안타까워한다. 그러나 짧은 막간은 정조의 통치 스타일 때문이었다. 혼자 고민하고, 혼자 결정하고, 혼자 지시하는 '헤드십', 이른바 카리스마 콤플렉스가 잉태한 추락이었다.
영산대학교 배병삼 교수
왕 - 의정부(대신) - 삼사(대간)로 대표되는 조선의 전통적인 통치 구조는 태조 그리고 태종이 기반을 다지고 이어 세종과 문종이 열심히 가꾸고 완성한 체제였다. 이러한 왕 - 의정부 - 삼사로 대표되는 삼각 상호 견제 체제는 연산군의 폭정과 중종의 빈번한 대옥사로 인해 금이 가기 시작했다. 선조 이후로는 무수한 사화의 숙청이 일어났으며, 숙종 이후 본격화된 환국 정치에서 알 수 있듯 동인, 서인, 북인, 남인, 노론, 소론, 시파, 벽파 할 것 없이 왕의 전제왕권 강화에 이들이 따라서 부역함에 따라 체제는 완전히 무너져버렸고, 이는 오히려 조선의 합리적인 통치 체계를 망가뜨리는 행위가 되었다. 심지어 숙종 말기 때가 되면 아예 당파에 따라 차기 임금을 정하는 체제가 확립되었을 정도였다.
그래서 영조는 이러한 피를 부르는 숙청보다 온건책인 탕평책을 실시해 각 대간들 간의 강경파인 준노와 준소를 배제하고 온건파인 완노와 완소를 키워서 조정에 대한 견제력을 약화시키고 전제왕권을 강화했다. 하지만 영조는 재위가 거듭될수록 자신의 태생적 약점이 콤플렉스로 자리 잡으면서 정치적 문제에 꽤나 예민했으며 그러던 찰나게 발생한 이인좌의 난을 비롯한 영조 반대 세력의 변란은 결국 영조로 하여금 자신만을 따르는 탕평파들에게만 권력을 몰아주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결국 이에 대한 부작용으로 풍산 홍씨로 대표되는 척신 세력의 발호와 전횡으로 이어졌고, 그 와중에 세자까지 자기 손으로 죽이고 만다. 이러한 경험을 한 정조는 집권 초반에 영조 시기의 강력한 외척 세력인 풍산 홍씨와 즉위를 위해 도왔던 경주 김씨 세력을 몰아내서 외척과 관련이 없는 신하들을 등용시켜 강력한 척신 세력을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인척중심 등용과 측근 홍국영에게 권력을 너무 몰아주어 훗날 세도정치의 문제점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홍국영이 특정인들만 요직에 앉히고 인사권을 휘둘러 전횡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정조는 홍국영 세력을 밀어내고 준론 탕평을 펼쳤으며, 이는 국왕 - 신료 간의 삼각 상호 견제 체제를 통해 돌아가는 조선의 전통적인 통치 구조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정조가 추구한 준론탕평은 옳고 그름을 임금이 가른다는 구조적 한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사망 이후 순조의 즉위와 함께 정순왕후 김씨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었고 극단적인 전제왕권은 왕실 외척 가문의 사리사욕으로 악용된다. 정조에 의해 무력화 된 삼사는 제 기능을 상실하였으며 군주권을 견제할 수단은 절멸하게 된다. 분명한 정조의 실책이고, 이로 인해 조선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어 붕괴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의 유일한 언론기관인 삼사를 무력화 시킨 상태에서 세자 순조는 자신의 치세에 문제가 있음을 인식조차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주변이 모두 태평성대를 말하는 와중에 순조 혼자 개혁을 논하라는 것은 너무나도 이율배반 적이다. 세도정치는 임금을 등에 업은 외척 세력이 견제장치가 없는 무소불위의 전제왕권을 행사할 때 얼마나 악용될 수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선례라 할 수 있다. 순조 대에 세도정치의 막을 연 김조순은 정조 말 정조의 지원를 가득 받은 탓에 아들인 김좌근 대에 이르러서는 모두가 흔히 아는 막장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보아도 세도정치는 견제장치가 전무한 극단적인 전제군주제의 폐단이라 할 수 있다. 정조가 세도정치의 본격적인 폐단을 만든 안동 김씨에게 그러한 힘을 실어주는 역할을 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른 죽음 역시 세간에서 떠드는 독살이나 예상치 못 한 사고사, 감염사 같은 것도 아닌 이상 건강관리 못한 것은 그냥 본인의 책임일 뿐이다. 본인 아니면 컨트롤이 불가능한 시스템을 만들어놓았으면 스스로 술담배와 같은 건강에 안 좋은 요소를 최대한 멀리하며 몸관리를 했어야 했고, 다름아닌 자신의 할아버지 영조라는 아주 좋은 선례도 있었는데 제 스스로 수명을 계속 깎아먹었으니. 장자였던 문효세자가 살아있었을 때에야 자신이 직접 가르치며 이런 통치 스타일을 전수하면 된다 여겼을지 몰라도, 문효세자가 어린 나이에 사망하고 후계자를 보는 데 다시 4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면 적어도 그 때부터는 철저히 자신의 건강을 관리하든가 아들의 치세가 부담되지 않도록 10년의 시간 동안 정치 시스템을 바꾸든가 하는 일말의 노력이라도 했어야 했다. 심지어 원자가 만 10세 가까워지도록 세자로 책봉조차 하지 않고 질질 끌다가 죽기 직전에서야 세자로 책봉하고 세상을 떠나버렸으니 왕으로서도 그렇지만 아버지로서도 실로 무책임하다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조의 전체적인 정치 방식 또한 논란이 될 수 있는데 표면적으로 탕평이라는 이름 아래 정조 자신의 의중으로 옳고 그름을 갈랐을 뿐이고 다수결의 합의제 및 표결 같은 개념이 아니었다. 쉽게 말 하자면 다당으로 견제견 되는 정치에서 왕실 척신정치를 열었다고 보는 것이 적합하다. 정조의 정치가 전제 왕권과 왕의 능력에만 너무 의존한 정치였다는 게 오늘날 중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정조가 현대적 시각에서 과연 개혁적인 군주였느냐는 의문도 존재한다. 정조가 실학자들을 등용하고 서양 문물을 일부 받아들인 것은 사실이지만, 문체반정을 일으켜 학문의 다양성을 탄압하고 성리학적 정통에 집착하는 등의 행위를 보면 상당히 모순적인 면도 분명 존재한다. 때문에 정조의 행위는 자신의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 중론이다. 서양 문물 수입과 서학도 이게 다 패관잡문이나 읽어서 그러니 순정고금체만 쓰라는 명령을 내려 사실상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정조는 스스로를 조선 유학의 대통(大統)으로 칭하는 등 전형적인 유교 원리주의자의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 대중에게 알려진 개혁 군주라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고, 성리학 근본주의로 돌아가 18세기 말의 조선 사회의 복합적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보수적 근본주의를 주장하는 군주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세도정치의 원인이 된 정조는 개혁 군주로 추앙받는데 반해 세도정치를 척결한 흥선대원군은 수구의 대명사처럼 되어버린 것이 어찌 보면 아이러니.
한편 서양 배들이 조선에 본격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한 것이 정조 재위기였다. 《정조실록》을 보면 1797년(정조 21년) 영국 해군 군함인 프로비던스 호가 부산 용당포에 닿은 기록이 등장한다. 그러나 정조도 흥선대원군과 마찬가지로 이양선이 오면 통상 수교에는 관심이 없었고 물과 식량과 같은 기본적인 것만 빨리 제공하고 쫓아냈다.
정조는 재위 15년차 이후 경연을 사실상 중단했으며 알려진 바처럼 어느 순간부터 권신들과 비밀 어찰을 통해서 막후 정치를 하였다. 경연은 흔히 알려진 왕이 공부하는 자리로서의 성격도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신하들과 서로 소통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정조는 신하들이 무식하니 내가 가르치겠다는 명목으로 경연을 없애고, 초계문신제라는 미명 하에 권신들과의 막후 정치에만 몰두하였다.
결론적으로 말해 정조 시대의 한계는 정조 자신이었는데, 박시백이 지적한 것처럼 자질과 실천력 모두 있었지만 그는 개혁 군주이기 이전에 유교원리주의자였다. 그것도 뿌리까지 유학 그자체인 대(大)유학자이며 설사 정조보다 뛰어난 국왕이 권좌에 있었다 하더라도 조선이라는 국가임과 동시에 조선의 체제를 변혁시켰을리는 만무하다. 설령 그럴 의지가 있더라도, 그 자신의 정통성과 여타 상황들 때문에 그럴 수조차 없었고. 정조가 구축한 국가 운영 체제는 적어도 자신 수준으로 유능한 군주여야 정상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견제장치가 상실된 모순점이 가득한 체제였기에 조선을 멸망으로 몰아간 단초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정조의 사상 통제가 조선 계몽에 악영향을 주었다는 비판도 상당하다. 이로 인해 병오소회를 기점으로 조선의 사상과 학문은 엄격하게 검열되며 통제되었고, 조선 백성의 계몽은 크게 후퇴하고 우민화 되어 구한말에 대가를 치르게 된다.
즉,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정조는 상단의 박시백 화백이 논평한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끈 군주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르네상스는 의미적인 르네상스(부활)가 아니라 역사학적인 맥락에서의 르네상스(중세에서 근세로 넘어가는 과도기)였다. 정조는 장용영을 통해 조선 군권은 물론 예산까지 한 손에 틀어쥐고 흔들었으며, 아무도 자신에게 도전할 힘을 가지지 못할 정도로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냈다. 이것은 마치 17~18세기 유럽에서 보였던 르네상스적 절대왕정 군주들의 모습과 유사하다.
또한 정조는 그의 사후 조선(대한제국)이 멸망한 근본적인 원인인 세도정치와 삼정의 문란을 만든 당사자라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처럼 당대에는 전성기를 이끌었으나 후대에 쇠락의 시작을 야기했다는 점에서는 청나라의 건륭제나 프랑스 왕국의 루이 14세와 유사하다. 파란만장한 정조의 생애는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남겨 후세에 많은 작품들을 탄생시켰다.
4. 기타
승하하기 2년 전인 1798년(정조 22년) 다시 새로운 호를 지었다.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는 무척 길고도 독특한 호였다. 하늘에 떠 있는 달이 1만 개의 개울을 비추듯이, 자신의 다스림이 일부 특권 계층이 아닌 만백성에게 두루 혜택이 미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특히 다른 호와는 달리 정조는 만천명월주인옹에 담은 자신의 간절한 뜻과 의지를 조정의 모든 신하와 백성들이 알 수 있도록 '만천명월주인옹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라는 글까지 지어 발표했다. 글은 창덕궁 후원 폄우사 옆 존덕정에 있다.
정조와 의빈 성씨의 장남인 문효세자의 세자 책봉 때, 청나라 황실은 문효세자의 장수를 기원하는 미얀마산 옥불을 선물했다고 한다. 정조는 이 옥불을 보관하기 위해 승가사를 중건했으나, 오늘날 그 옥불은 어디에 있는지 행방이 묘연하여 알 수 없다.
시력이 나빠 안경을 애용하기도 했다. 즉위한 지 23년째 해(1799년)부터 눈이 나빠져서 안경을 썼다는 기록이 《정조실록》에 있다. 다만 본인도 공식석상에서는 쓰기가 부담스러웠는지 다음과 같은 언급을 남겼다.
"나의 시력이 점점 이전보다 못해져서 경전의 문자는 안경이 아니면 알아보기가 어렵지만, 안경은 2백 년 이후 처음 있는 물건이므로 이것을 쓰고 조정에서 국사를 처결한다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 것이다. 요즘 일기 등 문서를 상고해 볼 일이 있었는데, 역시 마음대로 훑어보기가 어려웠다. 이는 예사로운 눈병이 아니어서, 깊은 생각을 한다거나 복잡한 일이 있을 경우 어김없이 이상이 생겨 등골의 태양경(太陽經)과 좌우 옆구리에 횃불이 타는 듯한 열기가 있는데, 이것이 눈병의 원인이 되고 있다. 간혹 시험삼아 불을 때지 않은 온돌바닥에 누워 있으면 몸의 열기로 바닥까지 차츰 따뜻해지므로 처음에는 조금 시원한 것 같아도 나중에는 또 견디기가 어려우니, 이는 전부 태양경의 울화가 팽배해 있는 결과로서 나의 학문의 힘이 깊지 못해 의지의 힘이 혈기(血氣)를 제어하지 못한 때문이다."
- 《정조실록》 52권, 정조 23년(1799년, 청 가경(嘉慶) 4년) 7월 10일 (병인) 1번째기사.
증조할아버지인 숙종과 할아버지 영조를 이어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높이는 사업을 계속했는데 《정조실록》이나 개인 문집인 《홍재전서》를 보면 이순신에 대해 정말 침이 마르도록 찬양하고 있다. 예를 들면 "우리 나라에 진정으로 문무를 겸비한 인물은 이 충무공(忠武公) 밖에 없다."라든지, "그가 만약 고대 중국에 태어났으면 제갈량과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다."라고 평하기도 했다. 실제로도 어명으로 《이충무공전서》를 공식 발간케 하는 등 재위 기간 내내 이순신 기념, 추모에 신경을 정말 많이 쓰기도 했다.
삼국지의 촉한의 황제 유선도 높게 평가했다!
후주(後主)가 촉(蜀)을 생각한다고 대답한 것은 천고의 비웃음거리가 될 만하다. 그러나 그 말의 뜻을 자세히 음미하면 혹 자신을 보전하려는 계책에서 일부러 이러한 말을 하여 속마음을 감추려고 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대저 그 사람은 참으로 말할 것이 없고 평소 그의 사적(事蹟)을 살펴보더라도 진 혜제(晉惠帝)에 비할 수 없으니, 그렇다면 비록 극정(郤正)이 말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어찌 촉을 그리워하는 한 생각이 없겠는가. 이는 참으로 말을 해도 아무 소용이 없고 단지 저들의 의심만 야기시킬 뿐이기 때문에 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극정이 말한 것에 대해서도 가부를 살피지 못했어야 하는데, 오히려 어떻게 극정을 너무 늦게 알았다고 한스러워할 수가 있겠는가.
- 《홍재전서(弘齋全書)》 제114권 中.
강희제에 대해서는 정치적으로 상국이기는 하지만 문화적으로는 금수같은 오랑캐라고 무시했던 청나라의 황제지만 의외로 성군(聖君)이라는 평가를 하기도 했다.
“강희(康煕)는 그 자체로 성군이니, 이적(夷狄)과 똑같이 일률화할 수는 없다.”
- 정조
스스로 재판을 집행하여 판결을 내린 경우도 많았는데, 한 번은 모함 사건을 혼자 눈치채고 옳게 판결한 경우도 있었다. 황해도에서 이가원과 조환이 "조재항이 아내 윤씨를 밥에 돌이 섞였다는 이유로 걷어차 죽였다"고 관에 고발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가원은 윤씨의 외삼촌이고, 조환도 윤씨의 인척이었다. 관에서 즉각 부검을 실시하려 했으나 죽은 지 오래되어 시신의 부패가 심했는데, 등뼈에 피부가 붙었음을 근거로 타살을 확정 지었다. 더불어 마을에 '나는 밥 한 사발 때문에 맞아죽었다'는 내용의 노래가 돌아 조재항의 살인 혐의는 더 명확해졌다. 형조와 황해도 관찰사는 조재항의 살인 혐의를 유죄로 보고 사형을 내릴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장계를 받은 정조는 "모름지기 그러한 노래는 원통함을 알 듯 말듯 숨기는 법인데, 너무 정확하게 범인을 확정 짓고 있으니 도리어 의심스러우므로 다시 조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곧 이가원이 노래를 지어 퍼뜨렸고, 조환이 이가원의 꼬드김에 넘어가 소장을 작성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가원이 조재항에게 금전을 요구했으나 조재항이 듣지 않아 무고했다. 조재항은 사형 직전에 무죄 방면되었고 이가원은 종신 유배, 조환은 도형 정배(중노동 처벌 후 특별 감시)에 처해졌다.
정약용의 다산시문집에 의하면, 시(詩) 짓기 시험을 내서 제 시간 내에 시를 짓지 못하는 관료를 창덕궁 부용지 한가운데의 둥근 섬으로 귀양 보내서 크게 망신을 줬다는 이야기가 있다. 《조선왕조실톡》 33화에 이 에피소드가 나온다.
창덕궁 부용지와 섬. 이런 곳에 조각배 띄우고 노 저어 들어가게 했다.
전해지는 어진을 보면 온화해 보이지만, 이는 후대에 이길범 화백이 표준 영정으로 그린 상상화이다. 실제로 순조의 회상과 선원보감, 열성어진에 의해 그려진 초상화를 보면 상당히 억세고 굳건한 인물로 보인다. 그에 대한 묘사로 정조는 뒷머리가 할아버지 영조를 닮았으며, 코가 높고 펑퍼짐한 눈자위, 네모난 입에 겹으로 된 턱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래보다 나이들어 보였다고 한다. 그리고 정조가 조심태에게 보낸 편지에서 '경처럼 뚱뚱한 사람이 어떻게 견디겠는가. 실로 동병상련이니 우습다.'라는 말을 한 내용 즉 동병상련으로 정조 자신이 뚱뚱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확실한 것은 정조의 외모가 표준영정처럼 문약한 외모는 아니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당시 에피소드 중 하나로, 윤광류라는 농민이 운종가의 종(현대의 종로 보신각)을 멋대로 친 사건이 있었다. 운종가 종은 한양도성의 시간을 알리는 기능을 했으므로 이는 심각한 사건이다. 그런데 관헌에서 당장 잡아들여서 조사한 결과 종을 친 이유가 참으로 황당했는데, 이유는 정조에게 참외를 바치고 싶어서. 행위 자체는 중죄이고 이유도 황당하긴 하나, 딱히 나쁜 의도는 아니어서인지 정조는 그냥 윤광류를 경고에 훈방조치만 하고 바로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신하들이 종을 멋대로 친 것은 중죄이므로 엄히 처벌할 것을 주장했지만, 정조는 "영조 임금 때도 광화문 종을 친 자가 있었는데, 뭔가 억울한 일이 있어서 그랬을 것이라며 넘어가고 대신 종을 담당하는 관리를 파직했다. 이번 일도 그냥 모르고 한 것일 테이니 대충 넘어가자"며 사건을 흐지부지 끝냈다.
백성들의 민원을 직접 다가가 수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격쟁 항목 참조. 신료들이 안전상의 문제를 들어 반대하기도 하였으나 정조는 "백성들은 나의 자식들이고, 백성들이 격쟁을 통해 나에게 호소하는 건 부모에게 호소하는 것과 같다. 그들이 잘못된 게 아니라, 그들을 그렇게 만든 이가 잘못된 것이다."라고 강행했다.
이덕무의 저서 《은애전》은 정조 치세에 벌어진 실제 사건과 정조의 실제 판결 내용을 나타내고 있다.
의빈 성씨에 관한 기록을 보면 상당한 로맨티시스트였던 것으로 보인다.
신하들에게 복숭아를 하사하였다. 정조 19년(1795) 음력 6월 말. 궁궐의 도서관 격인 창덕궁 후원 주합루와 규장각에서 신하들이 책을 읽다가 잠시 잠이 들었는데 마침 그때 어명을 전하는 내시가 온다는 급한 전갈이 왔다. 졸던 신하들이 깜짝 놀라 허겁지겁 내시를 맞았다. 내시가 들고있는 소반의 붉은 보자기 안에는 복숭아가 담겨 있었다. 내시는 아울러 “후원의 작은 복숭아가 마침 익었다. 신선(神仙)의 복숭아는 사람을 장수하게 한다고 들었다. 지금 이렇게 하사하는 데는 각별히 기대하는 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 소반은 남겨 두어 규장각의 고기(古器)로 삼도록 하라”라는 임금의 말씀을 그대로 전했다고 한다.
수시로 성균관에 방문해서 유생들로 하여금 쪽지시험 비슷한 시험을 치르게 한 적이 있는데, 한번은 문제가 너무 어려웠는지 유생들이 단체로 백지 답안지를 제출하자 노해서 쓴 경고문이 〈정조어필 시국제입장제생〉이란 글로 남아있다. 정조 본인도 얼마나 빡친 채 썼었는지 오타를 그냥 먹으로 쓱쓱 지워버린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어 정조의 불같은 성미를 엿볼 수가 있다. 보물 〈정조어필 - 시국제입장제생〉.
대한민국 해군은 2022년 6월 11일 KDX-III Batch-II 이지스 구축함 1번함의 함명을 정조대왕함으로 명명했다. 이후, KDX-III Batch-II급은 정조대왕급 구축함이 될 예정이다.
윤승운 작가의 만화 맹꽁이서당 7권의 능참봉과 정조임금 편에서 언급된 일화로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에 참배후 수원에서 하룻밤 묵는데 비가 내리자 더욱 아버지가 생각나고 "아버님은 차가운 땅속에서 비 맞으며 누워계시는데 참봉놈은 더운 구들장에서 잠을 자겠지." 라는 생각이 들고 괘씸해서 선전관을 불러 능참봉이 구들장에서 편히 자고 있거든 불문곡직하고 목을 치라고 칼을 줬다. 그러나 능참봉 왕성은 며칠전 점을 봤다가 며칠후 목이 달아난다는 말에 살 방도를 물었고 점쟁이가 초닷새날 저녁에 비가 오거든 관복을 갖춰 입고 사도세자의 묘 앞에 축시까지 엎드려 있으라고 했고 정말 초닷새날 저녁에 비가 오자 왕성은 점쟁이 말대로 했고 선전관이 말을 타고와서 왕성의 위치를 묻고 저녁에 능에 올랐다는 말에 올라가보니 비를 철철 맞으며 사도세자의 묘 앞에 엎드려 있었고 이에 선전관은 왕성의 젖은 관복을 가져가서 보고하고 이에 정조는 기특하게 여겨 새 의복과 상금을 주고 벼슬도 올려서 왕성은 지방 수령관이 되었다. 이 이야기가 정사인지 야사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정사라면 정조의 행동은 후대에 욕 먹을 행동이다.
4.1. 엄친아
정조가 유아 시절 외숙모에게 보낸 한글 편지.
각종 기록을 보면 신하들에게 "내가 이렇게 똑똑한데 니들이 뭘 안다고 이러느냐?"며 신하들을 까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문제는 명백한 사실이라 도저히 반박할 수가 없었다는 점이다.
실제로, 정조는 "내가 더 이상 경들에게는 배울 것이 없으니 내가 직접 교육을 해야겠다."라면서 왕이 신하들과 토론하며 학문을 배우고 정책을 논의하는 경연을 폐지하고, 임금 자신이 직접 교육을 시켜서 중하급 관리들을 발굴하는 '초계문신제'를 실시한다.
또한, 《정조실록》에 따르면 신하들에게 "공부 좀 하시오."같이 잔소리를 할 정도였다고 한다. 원래 같으면 경연 폐지는 "그것만은 아니 되옵니다."라고 해야 할 일이긴 한데, 그게 엄친아 정조니까 가능했던 것이다. 진짜 신하들로서는 주눅 들 만한 학문적 포스를 가진 정조 앞에서 입 한 번 잘못 놀렸다가 무식하다고 갈굼당할 테니 말이다.
대단한 독서광이었음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사관이나 승지들이 적절한 인용구를 못 찾아 헤매는 경우가 있으면 정조는 "어느 책 몇 쪽 몇 번째 줄에 뭐라 되어 있는데, 이는 적절치 못한 인용이다. 어느 책의 몇 쪽에 몇 번째 줄에 이렇게 되어 있으니 내가 지금부터 말하는 걸 그대로 옮겨 적어라"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나중에 신하들이 교차 확인할 겸 직접 원문을 찾아봤는데, 왕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았다는 것에 놀라 그 자리에서 주저앉는 경우가 허다했다. 중요한 것은 정조가 신하들과 다르게 군주로서 일하는 입장이라 다른 업무로도 웬종일 격무에 시달리는 바쁜 사람이라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조선 왕들 중 유일하게 왕이 모든 경서를 완벽하게 암기하고 있었던 인물이 바로 정조다. 정조는 책을 암송할 때까지 지독하게 파고드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자의 저서나 기타 저서에 자신이 새로 주석을 다는 등 자신의 집필서를 묶어서 《홍재전서》를 편찬하기도 했다. 이미 동궁 시절 때부터 《주자대전》, 《주자어류》의 선집인 《선통》, 《화선》, 《회영》을 엮어내었고, 이후에는 주자가 평가한 두보와 육우의 시를 모아 《두육분운》, 《두육천선》을 엮었으며 말년에는 《아송》을 펴내는 등 시에 있어서도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한편 성리대전을 뽑아내 《주서백선》을 엮었는데, 이는 퇴계 이황이 저술한 《주자서절요》와는 반대로 철저히 기호학파, 특히 노론의 학문적 입장을 옹호하는 방향으로 기술되었다. 이는 정조가 자신이 학문적으로는 벽파라고 한 말을 증명하는 것이다. 애초에 세손 시절 스승이 김종수였으니 당연한 수순이지만...
특히 주자의 저서에 자신의 주석을 달았다가 사문난적으로 몰린 당대의 네임드 유학자 윤휴, 박세당의 경우와 비교한다면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다. 이는 설령 임금이라 해도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이지만, 아무런 이야기 없이 출판까지 제대로 거친 것은 당대에 정조의 학문 수준이 얼마나 대단하게 평가받았는지를 암시하는 부분이다.
경연 과정에서 정조가 밝히는 유학에 대한 소견에 있어서 당대의 학자들치고 제대로 받아치거나 혹은 반론을 제기한 경우가 없다. 근본적으로 정조가 시행한 '초계문신제' 자체를 봐도 전례가 없는 제도로써, 이러한 제도 자체에 신하들이 완전히 제동을 걸 수 없었던 것은 그만큼 정조의 유학적 소양이나 학문적 능력이 뛰어났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또한 서학에 대한 견해 자체도 정약용의 저서를 읽어보면, 문체반정을 일으킨 이유를 모를 정도로 개방적으로 나온다. 특히 기술적인 측면에서의 수용 능력 자체는 후대 사람들보다 빠르고, 이해력도 높아 아주 적극적으로 나온다.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문체반정에 대한 다른 견해를 제시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문체반정 자체는 유교 근본주의적인 관점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으나, 당시 소장파, 남인 계열에서 서학이 유행했고,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극렬한 탄압 대신 정학을 강조하는 측면으로써의 문체반정도 배제할 수 없다. 당시 천주교에 대한 극렬한 탄압 대신 정학을 세워 사학을 물리친다는 정조의 기본 방법론은 주로 천주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남인 계열, 그리고 후에 시파로 분류되는 파벌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였다. 이들은 정조의 정치적 파트너다. 이러한 문체반정과 정학(성리학)을 올바르게 세우는 방법을 통해 정조 연간에는 진산 사건을 제외하면 극렬한 서학 탄압이 없었다는 점을 고려해야한다. 실질적으로 문체반정 과정에서 이가환, 김조순 등이 사실상 정치적 탄압을 피할 수 있었다는 측면을 배제할 수 없다.
또한 《홍재전서》 중에서는 옥편도 있다. 즉, 훈고학이나 고증학에 있어서도 달인이었다. 임금이 쓴 책이라고 다 출판해주는 게 아닌 조선의 깐깐한 출판 구조와, 임금이 쓴 책이라도 엉망이면 신하들이 미친 듯이 깠던 성리학적 전통을 고려하면, 옥편까지 나온 시점에서 정조의 학문적 달성의 수준은 쉽게 가늠할 수 있다. 신하들이 묘지문(墓誌文)에다가 "우리 임금께서는 진실로 성인이셨다"라고 적은 경우가 전무후무한 일이다. 심지어 20자로 휘호를 정해 오지 않았다고 신하들을 면박을 주고, 세조라는 시호가 왜 안 되냐고 신하들을 협박한 예종조차도 자신의 부친인 세조의 묘지문에 성인이라는 말을 쓸 수 없었고, 그 이전에 세종도 그렇게 쓰지 못했다. 정조가 유일무이한 셈.
원체 책을 많이 읽다 보니 나이가 들어서도 모친인 혜경궁 홍씨를 찾아가 무슨 책을 읽었고, 어떻게 읽었는지를 이야기하면서 책거리를 하는 것이 사실상 월례 행사가 되었다. 바쁜 일이 없으면 한 달에 한 질을 읽었다고 하니 현대로써든, 당시로써든 희대의 독서광이었던 셈.
하지만 비판이 업이었던 대간들에 의해 황당한 비판을 당하기도 했다. 유성한이란 자가 "아무리 신하가 못났다 해도 경연을 소홀히 함은 옳지 못하며, 요새 듣자 하니 주색잡기에 여념이 없다고 하니 남부끄러워서 일 못해먹겠네요"라는 상소를 올린 것이다. 정조는 이 상소를 읽고선 "첫 번째 건은 무슨 뜻인지 알겠는데, 두 번째 건은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다 나올 정도다. 관둘 생각하지 말고 일이나 똑바로 해."라고 소감을 밝혔고 신하들이 "저 미친놈이 돌아도 단단히 돈 모양입니다."라고 일제히 국문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정조는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나중엔 상소도 올리지 말라 명한다. 허나 이 사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는데 남인들이 일제히 유성한의 배후를 캐야 한다고 주장하여 조사한 결과 유성한이 윤구종이란 자와 친해 그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그가 경종의 능 앞에서 예를 표하기를 거부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경종에게 신하 노릇을 할 생각이 없어서 그랬다."라는 폭탄 발언을 했다. 경종이 폐주도 아니고 엄연히 영조 자신도 황형이라 칭송한 어엿한 조선의 임금인데 자신이 악질 역적임을 자복한 셈이나 다름없었다. 그러자 채제공이 "경종대왕께선 4년간 조선의 임금이셨는데 경종대왕께 충성하지 않는 놈이 영조대왕께는 충성했겠고 장헌세자께 충성하지 않은 놈이 전하께는 충성하겠습니까?"라고 곁다리로 사도세자 문제를 들고 나왔으며 나중에 다른 이는 아예 본론으로 사도세자 얘기를 꺼낸다. 이에 호응하여 사도세자를 추숭할 것을 청하는 영남만인소가 올라와 김종수, 심환지를 비롯한 벽파를 두렵게 했다. 이에 정조는 큰 호응을 보였으나 "5.22 하교"란 하교를 내려 사도세자를 추숭하는 게 맞긴 하지만 시기 상조니까 그냥 덮어두자는 결론을 내린다. 하지만 이후 채제공은 이 말을 듣지 않고 사도세자 추숭에 승부수를 걸었다가 정조 말년을 아수라장으로 만든다.
효묘(孝廟)께서 일찍이 무예를 좋아하여 한가한 날이면 북원(北苑)에 납시어 말을 달리며 무예를 시험하곤 하였는데, 그때에 쓰던 청룡도(靑龍刀)와 쇠로 주조한 큰 몽둥이가 여직껏 저승전(儲承殿)에 있었다. 그것을 힘깨나 쓰는 무사들도 움직이지 못하였건만, 세자는 15, 16세부터 벌써 모두 들어서 썼다.
- 정조실록 28권, 정조 13년 10월 7일 기미 4번째기사 어제 장헌 대왕 지문
여기까지만 보면 정조가 공부벌레로만 보이지만, 알고 보면 그것보다도 훨씬 대단한 먼치킨이다. 세손 시절부터 문무를 겸비한 제왕을 지향했기에 무예도 익혔다고 한다.
'고풍'은 원래 조선시대 때 새로 부임한 관료가 하급자에게 공식적으로 선물을 내려준 과정을 기록한 문서를 말한다. 정조 때는 이렇게 활쏘기 이벤트를 통해 기분 좋아졌다는 핑계로 새로 부임한 상급자 관리가 하급자에게 선물을 주는 행위가 종종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해당 자료는 활쏘기 이벤트 후 기분이 좋아진 정조 임금이 신하들에게 상을 내렸던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정조는 고풍 서류가 올라오면, 직접 수결을 하여 결재했고, 간단한 감상이나 신하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적거나, '누구 누구에게 이런 선물을 내린다'는 식으로 추가로 기록하기도 했다. 심지어 어떤 고풍 자료에는 "원래 활쏘기는 우리 가문의 법도인데 이후 10여년 동안 쏘지 않다가 최근 팔힘을 시험해보려고 몇 차례 10순씩 쏘았는데 40여발씩 명중시켰다. 그랬더니 경(신하)들이 축하의 글을 올리기에, 장난삼아 '그래 내가 49발까지 맞히면 그 때 가서 고풍을 청하라'고 했다. 그런데 마침내 오늘(10월 30일) 명중한 화살수가 약속한 숫자(49발)와 맞아 떨어졌으니 선물을 내리려 한다"고 적혀있기도 하다. 이러한 정조의 고풍은 여러 장이 남아있는데, 하나같이 '20순 중에 98발 명중', '10순 중에 49발 명중' 이런 결과가 쓰여있다. 참고로 1순은 5발, 20순은 100발이다.
위 기록에서 보듯 활 솜씨가 대단히 훌륭해서 글자 그대로 '백발백중'. 화살 100발을 쏘면, 98발, 50발을 쏘면 49발씩 맞히고, 나머지 한두 발은 일부러 명중시키지 않았다. 그 이유는 군주는 스스로의 재주를 자랑해서는 곤란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정조 스스로도 이를 두고 '활쏘기는 군자의 경쟁이니 남보다 앞서려고도 하지 않고, 사물을 모두 차지하려 기를 쓰지도 않는다'고 설명했다. 정조 때 실학자인 박제가도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를, '하늘이 내린 임금의 활쏘기 솜씨에서 50대 중 1대를 빠뜨린 것은 겸양의 미덕'이라고 하더라'고 기록하며 '문무를 겸비한 우리 성상(聖上, 정조)은 백왕을 뛰어넘으셨다'며 칭송하기도 했다.
심지어 정조는 곤봉에 놓고 쏘아 10발을 쏘아 모두 명중시키기도 했다. 세손 때 쏘고는 즉위 후 16년간이나 놓았는데도 50발 중 41발을 맞히었고 한 번 49발을 맞힌 이후로는 어김없이 49발을 맞혔다는 기록도 있다. 그래서 '이성계의 현신'이란 말도 나왔을 정도로 문무겸비의 왕이었다.
성격은 자상하기보단 불 같았다. 이 불같은 성격이 엄친아적인 능력과 결합되면서 말빨 최강자로 군림하게 된다. 실제로 조선 역대 국왕 중 언쟁 능력은 극강급. 정조와 논쟁 한번 벌였다가 유체이탈을 제대로 경험한 조정 중신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것에 따르면 욕도 매우 찰지게 잘해서 주위 신하가 말리는 경우가 많았다. 다만 이러한 몇몇 일화로 단순히 욕쟁이, 키보드 워리어 정도의 이미지로 인식하면 곤란하다. 기본적으로 정조는 자신의 뛰어난 자질과 천재적인 재능을 바탕으로 국정을 운영함에 있어 말 그대로 욕먹을 짓을 한 경우에만 욕을 퍼부은 정도이다. 어떻게 보면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속이 시원한 소위 사이다 발언인 셈.
나중에 나이가 들면서는 좀 더 쪼잔해져서 자기 정책을 공개적으로 깐 어느 선비를 사헌부의 수장인 대사헌에 임명하면서 대놓고 "네 주제에 그런 중임을 할 수 있겠니?"라고 조롱했다. 이런 불같은 면모는 할아버지 영조와 증조부 숙종에게서 물려받은 듯. 안타깝게도 정조의 아들 순조는 세도 정치에 휘둘렸다.
의학에도 일가견이 있어서 본인이 직접 자신의 질병에 처방을 했을 정도에다가, 동의보감이 부실하다고 직접 보강을 하기도 했다. 이쯤 되면 정조가 과연 우리와 같은 인간인가 의심스러운 대목. 그러나 이 부분에 있어서는 한의사들 간 의견이 갈린다. 일부에선 처방이 과격하지만 효과는 볼 수 있는 극약 처방을 자주 했지, 크게 틀린 게 아니라고 하는 편과 반대로 격무에 시달리고 술을 즐기고 담배를 피우는 게 잦은 정조에게 그러한 처방은 위험하다 정도로 나뉘는데, 이는 최후의 순간에 내린 처방과 연훈방 논란으로 이어진다. 헌데 이러한 과격한 처방은 허목에 연관된 일화에서 나오기도 한다.그 때문에 '사약에 들어갈 만큼 극한 재료로 병을 치료하는 것이 당대에 유행이 아니었을까?'라는 의견도 존재한다.
그 때문에 정조가 암살되었다는 입장에선 연훈방 처방이 처음에 효과를 봐 두 번째로 시도할 때 누군가가 독을 넣어 연기에 독성을 띠게 했다는 것. 아무튼 정조가 의학을 공부한 것은 즉위 직후부터 자신의 신변에 대한 위협이 지속적으로 존재했었기 때문에, 어의에 의한 독살의 위협을 스스로 방어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볼 여지가 있으나 정작 정조 본인은 일득록에서 "대저 의학서라는 것은 옛 경서와 큰 차이가 없어 누구나 공부하고 익히면 쉽게 배울 수 있다."라고 서술했다. 한마디로 정조 본인은 단순히 잡기를 익히는 수준에서 공부하다 보니까 정통해 졌다고 고백하고 있는 셈이다. 정조의 책을 읽는 방법을 보면 납득이 간다. 일단 정조는 책을 초록한 다음 다시 초록본을 읽으면서 원본과 대조해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의견을 수렴한 다음 다시 재록을 하고 이걸 가지고 책을 완전히 외울 때까지 위 작업을 반복한다.
또한 규장각 검서관인 실학자인 이덕무, 박제가, 장용영소속 장교이자 무인인 백동수가 정조의 명으로《무예도보통지》라는 종합 무예 서적을 발간했다. 책은 요즘도 조선 시대 군인의 복식과 무기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이 책을 바탕으로 무술을 연마하는 사람이나 치러지는 행사도 많다.
4.2. 술과 담배 사랑
어릴 적에 받은 스트레스 때문인지 술과 담배를 병적으로 즐겼다는 기록이 있다.
술의 경우, 자주 마시지는 않고 어쩌다가 한 번씩 마시는 정도였는데, 그 어쩌다가 먹는 술이 술에 취해서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마셨고 한다. 진짜 문제는 술버릇이 매우 고약했다는 점인데, 정조의 술버릇은 신하들에게 억지로 술 먹이기였다고 한다. 현대에서는 꼰대소리 듣기 딱 좋은 최악의 술버릇을 가진 셈이다. 하물며 군주제 국가의 왕이 내리는 술이라 거절도 못하는데, 신하들이 곤혹스러워하는 건 당연지사였다. 허허, 이걸 안 받으면 다른 걸 받게 될 것이오
술마시는 정조 동상. 해당 동상은 팔달문시장 도보 정리로 근처로 이동했다.
수원화성 팔달문 근처의 팔달문 시장(남문 시장) 입구 쪽에 보면 정조가 술상 앞에 앉아 있는 동상이 있다. 그 동상에 불취무귀(不醉無歸), 그러니까 '취하지 않으면 집에 못 간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다만, 이는 진짜로 그런 의미로 쓴 것은 아니고, 백성들이 술에 취할 흥취를 즐길 정도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고 싶다는 정조의 의지가 반영된 글귀이다...만 정조는 이 글귀를 신하들에게 매우 철저하게 적용한 왕이었다.
선비들도 강해져야 한다는 명목으로 강제로 정약용 같은 문약한 선비들을 하루 종일 손이 부러져라 활 쏘기를 시킬 정도로 가혹했던 인물이다. 정약용에게는 이외에도 술을 옥으로 만든 필통에 부어 마시라고 종용했을 정도였는데 정약용이 속으로 나는 죽었다고 복창했다고 회고했을 정도였다. 정약용에게 왕이 직접 삼중소주(三重燒酒)를 하사했다고 하는데 물을 타지 않은 원액이 최소한 70도 이상의 도수를 가지는 매우 독한 술이다.
성균관 제술 시험에서 합격한 유생들을 불러다가 창덕궁 희정당에서 연회를 벌이고는 이렇게 말하기도 하였다. “옛 사람의 말에 술로 취하게 하고 그의 덕을 살펴본다고 하였으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취하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는다는 뜻을 생각하고 각자 양껏 마셔라. 우부승지 신기(申耆)는 술좌석에 익숙하니, 잔 돌리는 일을 맡길 만하다. 내각과 정원과 호조로 하여금 술을 많이 가져오게 하고, 노인은 작은 잔을, 젊은이는 큰 잔을 사용하되, 잔은 내각(內閣)의 팔환은배(八環銀盃)를 사용토록 하라. 승지 민태혁(閔台爀)과 각신 서영보(徐榮輔)가 함께 술잔 돌리는 것을 감독하라.” 이 자리에는 오태증이라는, 집안 대대로 주당으로 이름난 유생이 있어서 술에 취하지 않았는데, 정조는 그의 할아버지 오도일이 숙종 대에 여기 희정당에서 술에 취해 넘어졌다면서, 술 5잔을 더 먹여 결국 취하게 했다. 그래놓고는 "오도일이 여기서 술에 취해 쓰러진 것이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다"며 "지금 그의 후손이 같은 장소에서 취해 쓰러진 것이 우연이 아니다"라며 흐뭇해했다. 여하튼 그토록 술을 좋아하다보니까 사회적 분위기도 같이 따라가서 수도 한양에 술집들이 많이 들어섰는데 하도 많이 들어서다보니까 당대에는 상당한 사회적 이슈로 떠올라서 사대부들이 술집을 없애자고 상소를 올릴 정도였다.
한 번은 부용지에서 낚시를 한적이 있었는데 채제공, 심환지, 남공철, 서유구, 이가환, 이상황, 정약용, 박제가, 유득공, 성해응 등 각 정파별로 터줏대감부터 새내기까지 줄줄이 거느리고 했다. 고기를 제대로 못 잡은 사람에게는 술을 내렸다.
훈련도감이 아뢰기를, "지난밤에 흰옷을 입은 어떤 사람이 궁궐의 담장 아래에서 술에 취하여 누워 있기에 호패(號牌)를 상고해 보니 진사 이정용(李正容)이었습니다. 자초지종을 물으니, 마침 성균관에 들어갔다가 술을 마시고 나서 야금시간에 걸린 줄을 몰랐다고 하였는데, 법에 따라 형조로 넘겼습니다."
하니, 전교(傳敎)하기를, "성균관 근처의 민가는 집춘영(集春營) 건물과 지붕이 서로 잇닿아 있으니 야금시간을 범하였다고 논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근래에 조정의 관료나 유생들을 물론하고 주량이 너무 적어서 술의 풍류가 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다. 이 유생은 술의 멋을 알고 있으니 매우 가상스럽다. 군향(軍餉)을 맡은 고을에서 주채미(洒債米) 한 포대를 주어, 술을 주어 취하게 하고 취한 중에서 덕을 관찰하는 뜻을 보여주라." 하였다.
《정조실록》 44권, 1796년(정조 20년) 4월 12일 정해 1번째 기사.
어느 날은 한 선비가 술에 취한 채 궁궐 담벼락 밑에서 밤에 잠을 자다가 야간 통행금지에 걸려서 잡혀온 일이 있었다. 그러자 정조는 '요즘 사람들은 술이 약해서 제대로 마실 줄을 모르는데 이 자는 술을 잘 마셔서 그 멋을 아니 참으로 가상하다. 상으로 쌀 한 포대를 주고 풀어줘라.'라고 명을 내렸다.
다만 야사에 따르면 조선은 술에 대해 매우 관대한 나라였다고 한다. 높으신 분들부터 천민들까지, 한 번 마시면 쓰러질 때까지 마시는 게 기본이라 생각할 정도다. 일단 둘러앉아 작정하고 마시기 시작하면, 안주도 거의 안 먹으면서 빠른 속도로 술을 마셨다고 한다. 그러다 보면 술상에 그대로 엎어지거나, 술 가지러 가다가 술상 근처에서 쓰러져 잠들기 일쑤인데, 이렇게 아침까지 바닥에서 자다 깨서 영의정은 나랏일 보러 가고, 농부들은 농사 지으러 갔다고 한다. 아무도 영의정 급이 술에 취해 아침까지 널브러져 자는 걸 뭐라고 하지 않았다. 실제로 조선을 유람하고 간 외국인들의 기록을 보면, "조선은 술 때문에 망할 나라"라는 얘기가 많다고 한다. 이는 '조선 놈들은 하도 많이 먹어 농사를 지어봐야 소용없다'는 얘기와 함께 가장 흔하게 발견되는 조선 탐방 후기이다. 정조가 유독 병적이었다고 하기에는 조선의 술 문화 자체가 장난이 아니었던 것.
하지만 이런 그도 어렸을 때는 할아버지 영조 앞에서 "술은 나라를 망하게 한다."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술이 있는 것과 술이 없는 것은 나라에 어떠한 영향이 있겠느냐?”
하여, 내가 대답하기를,
“술은 나라를 멸망하게 할 물품입니다.”
하니, 상께서 이르시기를,
“지금 세상은 모두가 술을 마신다. 이것은 백성의 습속(習俗)이 나빠졌기 때문이냐, 법이 느슨해져서 그런 것이냐? 너는 마음을 속이지 말고 대답하라.”
하여, 내가 대답하기를,
“금지하는 방도에 있어서 더러 미진한 부분이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하니, 상께서 이르시기를,
“너의 말이 옳다. 부디 성심으로 금지하라.”
하였다.
《일성록》, 1763년(영조 39년) 6월 29일 을묘 2번째 기사.
금주법까지 시행했을 정도로 술에 엄격했던 영조가 "성심으로 금지하라."라고 신신당부했지만 훗날의 정조를 알고 있는 후손들이 보면 웃음이 나올 수 밖에 없는 대목.
담배 예찬론자이기도 해서 담배로 스트레스를 날려버렸다거나, "소화에 좋고 추위와 더위를 쫓아낸다"고 극찬한 적이 있다. 심지어는 담배에 관한 시(詩)까지 썼다.
하지만 담배 역시 무조건 장려한 것은 아니었다. 담배로 인해 시작된 좌의정 채제공과 유생 2명의 싸움에서, 채제공의 편을 들어준 적이 있었다. 물론 이건 담배 이전에 유생들의 사람으로서의 됨됨이가 되먹잖았던 게 컸다.
4.3. 정조의 비밀 편지들
2009년 2월 발견된 심환지와 교환한 서신첩인 정조 어찰첩을 보면, 학자 군주답지 않고 왕의 표현이라 볼 수 없는 표현들을 많이 쓰고 있다. 특히 자유자재로 욕설과 막말을 구사하는 모습 때문에 화제가 되었다. 예를 들면 "입에서 젖비린내 나고 사람 꼴도 못 갖춘 새끼와 경박하고 멍청하여 동서도 분간 못하는 병신이 감히 그 주둥아리를 놀린다."라거나, "대신 ○○○는 몸에 동전 구린내가 나 주변이 모두 기피하는 놈이다", "호로 자식"이라든지. 어전 회의 중에 신하들이 조금이라도 실수하거나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보이면 바로 욕설을 구사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정조가 성군으로 추앙받는 이유는, 자기 기분이 틀어졌다고 해서 그것이 신하들의 처벌이나 유배 등으로 이어지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하관 대신 중 한 명이 "전하의 업무 처리 방식이 아주 글러먹으셨는데 그 이유는 전하의 급한 성질 머리 때문으로, 요즘 옥체가 자주 편찮으신 이유도 그 때문인 줄 아뢰오."라는 내용의 상소를 올린 적이 있었다. 상당히 무례한 내용의 상소였고 중신들도 중벌을 내려야 한다고 주청을 올렸으나, 정조는 끝내 그 신하를 용서하고 더 높은 벼슬을 주었다.
어떤 편지에는 '아놔, 내가 새벽 3시까지 잠 못 자고 이러고 있다.'라는 말 뒤에 '가가(呵呵)'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것은 웃음소리 '껄껄'을 뜻한다. 현대로 치면 "ㅋㅋ"와 다를 바 없는 표현이다.
1797년(정조 21년) 4월 11일(음력)에 쓴 정조의 편지
이 편지에도 상당히 재미있는 표현이 많다. 대표적으로 '요즘처럼 벽파가 뒤죽박죽되었을 때는...'이라고 쓰는데 마땅한 한자가 생각이 나지 않았는지 갑자기 한글로 써놓아서 '近日僻類爲뒤쥭박쥭之時...'이 되어있다. 본문 왼쪽에서 세 번째 줄 가장 아래 쪽부터 '뒤쥭박쥭'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로 조선시대 글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읽는다.
수신인 심환지 본인에게도 "갈수록 입조심 안 하는 생각 없는 늙은이"라며 면박을 주는 편지도 있다. 한자로 쓴 편지에도 한국어에서 표현하는 속담을 자주 한자로 옮겨 인용하고, 이두식 표현도 많이 등장한다. 어쨌든 정조 자신이 소설 장르를 탄압하고 이를 따라하는 신하들에게 바른 문체를 강요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참으로 이중적인 면모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면박뿐만 아니라 심환지를 격려하는 편지들도 종종 있다.
사실 이 기록이 남은 것은 후대인 우리 입장에서 본다면야 사료로서의 가치가 높기 때문에 다행인 일이지만, 심환지와 정조 사이의 관계만 놓고 본다면 심히 잘못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 시대에 임금이 자신의 사람이라 믿는 신하에게 이런 편지를 쓰면 신하는 편지를 다 읽은 후 태워 버리는 게 예의였다. 한 마디로 심환지가 혹시 모를 상황에 보험을 들기 위해 남긴 편지 혹은 정조의 약점으로 잡으려 남긴 편지가 그대로 내려와 현대에 발견된 것.
한편 이 어찰첩은 독살설이나 노론 만악 근원설을 논파할 수 있는 중요한 사료로서의 가치도 가지고 있다. 첫째, 정조가 승하하기 전까지 지속적으로 심환지에게 보낸 이 편지에는 '눈이 너무 침침해져서 책도 읽을 수가 없다.'라거나 '어디가 아프고 언제 약을 얼마큼 먹고 있는데, 아파 죽겠도다.' 하고 병세의 위중함을 호소하는 대목이 자주, 그리고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부분은 《정조실록》에서도 드러나고 있기 때문에 딱히 심환지에게만 알려진 사실이 아니라는 점과 정조 본인이 고의적으로 병을 키워서 적었을 가능성이 보이는 부분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심환지를 측근이라기보다는 같이 해야 할 한 당의 영수로 봤다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둘째, 그 동안 심환지를 비롯한 노론 영수들은 정조의 답이 없는 정적쯤으로 치부되었지만, 이 서찰을 통해 노론 역시 정조의 국정 동반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독살설보다 일리가 있는 설명이다.
정조가 쓴 편지글의 자세한 내용은 정조 어찰첩이란 제목으로 성균관대학교 출판부에서 출간됐다.
4.4.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이덕일 세력의 역사왜곡
왜인 한반도 남부 지배 주장
'김현구 임나일본부설 주장' 날조
정조실록 기록 왜곡 해설
삼국사기 초기기록 수정
식민사관 주장
한사군 한반도설
식민사관 주장
'동북아역사재단이 독도 누락' 주장
두음법칙·한글 맞춤법 통일안
식민국어학 주장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정조는 즉위하는 당일 빈전殯殿 문 밖에서 대신들을 소견하고 한 말이다. 임오년(사도세자가 죽은 해) 이후 '하루도 잊지 않고 가슴 속에 간직해 온 한 마디를 선포했다'고 알려졌다. 이덕일에 따르면 그 즉시 일성에 대신들은 경악했다 한다. 특히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았던 노론은 공포에 휩싸였'으며 '14년 전 뒤주 속에서 비참하게 죽은 사도세자가 다시 살아난 모습을 똑똑히 보았던' 것이라 한다.
사도세자의 고백 345p, 이덕일
요약하자면 정조가 해당 발언을 한 것은 사실이나, 이 내용은 이덕일의 편집과 픽션적 창, 변작에 따른 왜곡으로, 실제로는 완전 다른 맥락의 기록이었다.
召見大臣于殯殿門外。 下綸音曰: "嗚呼! 寡人思悼世子之子也。 先大王爲宗統之重, 命予嗣孝章世子, 嗚呼! 前日上章於先大王者, 大可見不貳本之予意也。 禮雖不可不嚴, 情亦不可不伸, 饗祀之節, 宜從祭以大夫之禮, 而不可與太廟同。 惠慶宮亦當有京外貢獻之儀, 不可與大妃等, 其令所司, 議于大臣, 講定節目以聞。 旣下此敎, 怪鬼不逞之徒, 藉此而有追崇之論, 則先大王遺敎在焉, 當以當律論, 以告先王之靈。"
빈전(殯殿) 문밖에서 대신들을 소견(召見)하였다. 윤음(允音, 국왕의 목소리)을 내리기를, "아! 과인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아들이다. 선대 왕께서 종통(宗統)의 중요함을 위하여 나에게 효장세자(孝章世子)를 이어받도록 명하셨거니와, 아! 전일에 선대 왕께 올린 글에서 ‘근본을 둘로 하지 않는 것[不貳本]’에 관한 나의 뜻을 크게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예(禮)는 비록 엄격하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나, 인정(人情)도 또한 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향사(饗祀)하는 절차는 마땅히 대부(大夫)로서 제사하는 예법에 따라야 하고, 태묘(太廟)에서와 같이 할 수는 없다. 혜경궁(惠慶宮)께도 또한 마땅히 경외(京外)에서 공물을 바치는 의절이 있어야 하나 대비(大妃)와 동등하게 할 수는 없으니, 유사(有司)로 하여금 대신들과 의논해서 절목을 강정(講定)하여 아뢰도록 하라. 이미 이런 분부를 내리고 나서 괴귀(怪鬼)와 같은 불령한 무리들이 이를 빙자하여 추숭(追崇)하자는 의논을 한다면 선대 왕께서 유언하신 분부가 있으니, 마땅히 형률로써 논죄하고 선왕의 영령(英靈)께도 고(告)하겠다." 하였다.
《정조실록》 1권, 1776년(정조 즉위년) 3월 10일 신사 4번째 기사.
이 말을 쉽게 풀이해 보면 다음과 같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나, 선왕께서 과인에게 효장세자를 이어받도록 명하셨다. 과인 또한 사도세자의 아들이면서 효장세자의 아들일 수는 없으니 공식적으로는 효장세자의 후계자로만 남겠다는 뜻을 크게 밝힌 바가 있다. 사도세자를 제사지내는 일은 왕실의 예법이 아니라 일반 사대부의 예법을 따를 것이며, 사도세자의 부인이자 과인의 친어머니인 혜경궁 홍씨 또한 대비와 같은 예를 받을 수는 없는 일이니 구체적으로 어떠한 예를 받는 것이 타당하겠는지 의논하여 아뢰라. 이와 같은 분부를 내린 뒤에도 사도세자를 기리느니 기념하느니 하는 소리를 했다가는 선왕의 유언에 따라 엄히 처벌하겠다.
요컨대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먼저 거론하기는 했지만 이는 사도세자를 추숭해 높이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효장세자의 아들로서 보위(寶位)에 오르는 것임을 명확히 밝힌 것이다. 이는 설령 내심으로는 친아버지를 높이고 싶었다고 하더라도 즉위 초부터 선왕인 영조의 결정을 뒤집었다가는 정국이 요동치고 역풍이 불 것이 뻔했기에 사도세자 문제를 꺼내는 사람들을 제어하고 그를 통해 정국을 안정시킬 목적으로 행해졌다고 보는 것이 옳다. 실제로 조선 왕조에서 부모의 죽음을 복수와 숙청의 명분으로 사용한 연산군이 있었고 엄청난 피바람이 불었던 만큼 정조가 적어도 피에 눈이 먼 복수를 원하지 않는 한, 신하들을 안심 시킬만한 행동을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사도세자 문서를 봐도 알겠지만 정조가 막장이 아닌 한 복수할 만한 대상은 거의 없었다. 임오화변 당시 당파를 막론하고 대부분 세자를 감싸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현 국왕의 아버지, 그것도 세자가 죽었을 때 관직에 있었다는 자체는 찬반 여부 불분하고 숙청 대상에 들 수 있었다. 찬성했으면 당연히 죽는 것이며 반대했어도 "네가 더 잘 반대하여 선왕을 제대로 보필했으면 이런 일이 없었잖냐?"라는 소릴 듣는 순간 최소 유배형이고, 가만히 있었으면 있었던 대로 "너는 세자가 죽는데 관심 하나 없었냐?"라는 소리를 들으며 쫓겨나거나 죽을 수 있다. 갑자사화 당시 이세좌는 사약을 전달했다는 왕명을 이행했다는 이유만으로 죽고 광주 이씨에게도 불똥이 튀었으며 폐비 윤씨 논쟁 때 적극적으로 폐출에 반대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처벌을 받은 신하들도 있었다. 신하들의 경계심 자체가 높았을 것은 자명하다. 하지만 정조는 오히려 영조의 유지를 확실히 계승하고 정국을 안정시키겠다는 뜻을 천명했으며, 이러한 발언을 사도세자를 계승하겠다는 의지로 해석하는 것은 정조의 의도를 왜곡하는 것이 된다.
다만 정조의 말이 본심이었는지 아니었는지. 즉 표면 그대로 읽어야 하는지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것이 핵심이고 뒷부분은 명분용 겉치레인지를 살펴볼 필요는 있다. 실제로 당시에도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부분을 핵심적인 내용으로 해석하고 이에 편승하려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덕일과 같이 사도세자가 살아난 모습을 똑똑히 보았던 것 운운하는 것은 도가 지나친 것이며, 사도세자의 억울함을 아뢰는 상소를 올린 이덕사, 이일화, 유한신이나 영조의 인산(장례)이 끝난 뒤 비슷한 상소를 올린 안동 유생 이응원과 그 아버지 이도현 등 적지 않은 인물들이 사도세자를 비호한 죄로 처형되었다. 정조는 이응원 부자를 "외로운 새새끼, 썩은 쥐새끼"라고 비난했으며, 안동을 부에서 현으로 강등하기까지 했다. 이런 조치는 대게 강상을 범하거나 역모를 일으킨 자가 나온 곳이 아니면 잘 나오지 않는다.
물론, 노론에서도 위에 나온 것처럼 처음에는 불안감을 가졌을 수는 있다. 정조가 즉위하면서 임오화변의 일을 끄집어낼까 봐 불안해하는 것이 당연한 상황에서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선언을 부정적인 방향으로 해석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존현각 사건(정유역변)이나 홍계희 집안의 획책 등을 보면 이런 사람들이 실제로 있었던 듯하다. 이후에도 추숭 반대를 외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정조는 오히려 앞서 언급한 발언과 처벌을 통해 노론을 안심시켰고, 사도세자에 대한 추숭도 장기간에 걸쳐 노론 세력과의 협력을 약속하면서 점진적으로 시도했다.
둘 다 맞다고 볼 수도 있다. 즉 사도세자를 비호하려는 자들에게는 "내가 사도세자의 아들이 맞긴 맞는데 그렇다고 추숭 운운하여 정국을 뒤흔드려는 시도는 용서 안해"라고 한 것이면서 동시에 노론에게는 "내가 원래 사도세자의 아들인지라, 할바마마의 명령만 없었으면 너네들 담가버렸을 거거든? 알아서들 기어라!"라고 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권력자들은 여러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말 한마디 던져두고 그 반응을 보는 전략적 모호함을 즐겨 구사하곤 한다. 학문과 정치력이 모두 뛰어났던 정조의 이 말 한마디도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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