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2장 초나라도 굴복시키고 (1)
투곡어토의 조부는 투약오(鬪若敖).
그는 한수(漢水)가에 위치한 초나라 속국 중 하나인 운나라 공녀를 아내로 맞이하여 투백비(鬪伯比)를 낳았다. 투약오가 세상을 떠났을 때 투백비는 나이가 어렸다. 그래서 그는 어머니를 따라 운나라에 가서 살았으며, 자주 궁중을 드나들었다.
운나라 임금의 부인은 그러한 투백비(鬪伯比)를 자기 자식처럼 사랑하고 귀여워해주었다. 이때 운부인에게도 딸이 하나 있었다. 투백비에게는 외사촌 동생이었다. 그들은 어릴 적부터 소꿉장난을 하며 짝지어 놀았다.
어른들은 그들이 성인이 된 뒤에도 함께 어울려 노는것을 내버려두었다. 그러는 사이 젊은 두 남녀는 넘지 못할 선을 넘었다. 운녀가 아이를 밴 것이었다.
그제야 운부인은 두 사람의 관계를 알았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그녀는 투백비(鬪伯比)의 궁중출입을 금지하는 한편, 딸이 병들었다고 소문을 내어 궁중 깊숙한 방에 감춰두었다.
열 달이 지나 운녀가 아들을 낳았다.
운부인은 비밀리에 그 아이를 몽택(夢澤) 늪가에 갖다버렸다. 그래서 아무도 운녀가 아이를 낳은 사실을 알지 못했다. 심지어는 운나라 임금조차 자신의 딸의 비행을 알지 못했다.
투백비(鬪伯比)는 이 모든 것이 자기 책임이라고 생각하고 괴로워하다가 어머니를 모시고 다시 초나라로 돌아갔다.
어느 날이었다.
운나라 임금은 몽택(夢澤)으로 사냥을 나갔다.
그는 몽택 연못가에 호랑이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좌우의 군사들에게 명했다.
- 활을 쏘아 저 호랑이를 잡도록 하여라.
화살이 빗발치듯 호랑이에게로 날아갔다.
그러나 화살은 한 대도 호랑이를 맞히지 못했다. 뿐만 아니었다. 호랑이는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꼼짝 않고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운나라 임금은 이상하게 여기고 다시 명령했다.
- 연못 가까이 가서 호랑이의 동태를 살펴보아라.
몇몇 군사가 다녀와서 보고한다.
- 호랑이가 한 갓난아기에게 젖을 빨리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운나라 임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 그 갓난아기는 보통 아이가 아닐 것이다. 호랑이와 갓난아기를 놀라게 하지마라.
그러고는 즉시 다른 곳으로 떠났다.
황혼 무렵, 궁으로 돌아온 운나라 임금은 부인에게 이 사실을 말했다.
- 오늘 사냥을 나갔다가 이상한 일을 보았소.
그러면서 갓난아기에게 젖을 빨리던 호랑이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운부인은 순간 그 아이가 자기가 내다버린 아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녀는 고개를 떨구며 솔직하게 말했다.
- 신첩의 허물을 용서해주십시오. 제가 부군(夫君)을 속였습니다. 사실은 그 갓난아기는 첩이 내다버린 아이입니다.
운나라 임금은 크게 놀랐다.
- 부인이 그아기를 어디서 나서 버렸단 말이오?"
그제야 운부인은 투백비(鬪伯比)와 딸 운녀 사이에 일어난 일을 자세히 들려주었다. 그런 후 정색하며 말을 이었다.
- 우리 딸이 낳은 아기를 호랑이가 젖을 물려 보호하고 있다니, 참으로 신기한 일입니다. 이는 그 아이가 후일 큰 인물이 될 징조입니다. 이참에 아예 다시 데려와 기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운나라 임금은 부인의 청을 승낙하고, 그 날로 몽택(夢澤)으로 사람을 보내 외손자를 데려왔다. 그러고는 딸에게 내주어 기르게 했다.
다음해, 운나라 임금은 딸 운녀를 초나라로 보내 투백비(鬪伯比)와 결혼시켰다. 초나라 사람은 젖을 곡(穀)이라 하고, 호랑이를 어토라고 한다. 그래서 투백비는 호랑이가 젖을 먹인 아이라는 뜻에서 아들 이름을 '투곡어토'라고 지었고, 자(字)를 자문(子文)이라 했다. 오늘날도 호북성 운몽현에 가면 어토향이란 곳이 있다.
투곡어토가 태어난 곳이다.
투곡어토는 자라나면서 유달리 글 읽기를 좋아했고, 마침내는 나라를 다스릴 만한 재능과 학식과 무예를 두루 갖추게 되었다. 투(鬪)씨 일족들은 투곡어토의 지혜와 총명함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투곡어토는 자신의 재능을 자랑하는 성격이 아니어서 다른 사람들은 그러한 사실을 잘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중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영윤 자원(子元)은 도화 부인에 대해 불측한 마음을 품고 오만방자한 행동을 자행하다가 끝내 살해되었던 것이다.
투렴(鬪廉)으로부터 투곡어토의 내력을 들은 초성왕은 곧 그를 불러 얘기를 나누어보았다. 과연 투곡어토는 투씨 일족이 자랑할 만큼 학식과 지혜가 깊었으며, 인품 또한 고매하고 강직하였다.
초성왕은 투곡어토를 영윤으로 삼고 나라 일을 모두 그에게 맡겼다.
이때가 초성왕 8년, BC 664년, 주왕실 연호로는 주혜왕 13년, 제환공 22년이다.
투곡어토는 영윤에 오르자마자 대대적인 개혁정치를 폈다.
그가 가장 먼저 손을 댄 분야는 토지였다.
"역사를 보건대, 나라의 불행은 임금이 약하고 신하가 강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므로 모든 신하는 녹으로 받은 토지의 반을 국가에 반납하도록 하라."
그러고는 솔선수범하여 투씨 일족의 땅부터 국유지로 삼았다.
이쯤되자 다른 문무백관들은 투곡어토의 명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투곡어토는 또 중원을 겨냥한 정책으로 군대를 강하게 키우는 동시에 어진 사람을 찾아 등용하고 유능한 사람에겐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벼슬을 내렸다.
그리하여 어질기로 유명한 굴완(屈完)에게 대부 벼슬을 내리고, 재능과 지혜를 겸비한 투장(鬪章)에겐 다른 투씨 일족과 함께 군대를 통솔하게 하였으며, 아들 투반은 신공(申公, 신현을 다스리는 지방장관)으로 삼아 중원으로 통하는 길목인 한수 일대를 장악하게 했다.
이때부터 초나라는 수년 동안의 어지러움을 종식하고 예전의 국력을 회복하게 되었다.
초성왕은 이 모든 것이 투곡어토의 공로라 여기고 모든 신하를 불러 특별히 명했다.
"제나라에서 관중을 중보(仲父)라 부르듯, 앞으로 우리 초나라 사람들은 투곡어토를 호칭할 때 이름을 부르지 말고 자(字)를 부르도록 하라."
그 후로 초나라에서는 투곡어토를 '자문(子文)'이라 불렀다.
🎓 다음에 계속........
출처 - 평설열국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