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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정보
- 작 품 명 : 묵매도작가명허백련제작년도1970재료한지에 수묵분류한국화부문순수소장크기109×33.5작가설명
許百鍊. 기간: 1991. 4. 15 ∼ 5. 14. 장소: 湖巖 갤러리. 전통적 筆意, 고매한 晝格의 山水 晝家.
1. 1977년 2월 15일에 毅齊 許百鍊 화백이 87세로 생애를 마쳤을 때, 나는 월간 《空間》에 < 전통 계승의 마지막 南宗 大家>로 표제한 추모의 글을 쓴 바 있었다. 그러한 평가는 그의 고격한 전통적 산수화의 경지 및 그 정신적 내면성에 대한 참된 이해자들에 의해 이의 없 이 존중되던 毅齊의 예술의 뚜렷한 본질이었고, 지금도 물론 변함 없는 毅齊의 이미지이 다. 내가 毅齊를 처음 뵌 것은 1961년 5월에 해방후 처음 서울에서 개인전을 갖게 될 때였다.
당시 신문기자였던 나는 7순 古稀를 넘긴 백발 노화가의 풍모였던 그를 적선동의 어느 한 옥 여관 유숙처로 찾아가 인터뷰를 청했던 것이다. 그 뒤로도 나는 서울과 光州 무등산 기 슭의 대숲 우거진 離俗 환경의 山家 春雪軒 화실에서 더욱 더 道人 같은 풍채를 보이던 毅 齊를 뵐 기회가 거듭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그의 고매한 인품과 전통적 회화 사상, 곧 南 宗畵論 및 그 사상성의 거침없던 강론, 그리고 그의 고격한 화필 생활의 바탕이 되었던 풍 부한 漢詩 교양 등에 감명을 받곤 했었다.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品이다. 본래 品이란 것은 기교가 있은 뒤에 그 기교를 초탈 한 자유의 경지에서 나오는 법이다. 따라서 先人 大家들의 전통과 기교를 배우고 난 뒤라 야 형상을 벗어난 영원한 생명의 자기예술이 가능한 것이다. 전통을 이어서 공부를 열심히 하면, 처음엔 古人을 본받았다 해도 안 달라질 수가 없는 건 데, 그것을 "成家"라 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창조"라는 말 잘 쓰는데, 창조라 는 게 그렇게 아무나 해낼 수 있는 그런 게 아니다. 대체로 동양의 그림은 墨筆로 그리는 것으로서, 古人들의 말에 "有筆無墨도 不可하고, 또 有墨無筆도 不可하다"했다. 그런 이치로 동양화를 말할 때, 筆力이 있어 움직이고, 또 한 墨體가 있어야만 氣韻生動의 묘경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앞의 말들은 내가 毅齊에게서 직접 들으며 받아 적었던 것의 일부이다.
그는 그림에 대한 대화를 아주 깊이있게 즐기며 듣는 사람을 매료시키곤 했었다. 그것이 그의 예술사상 및 회화사상의 자연스런 표명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는 1920년대 이후의 새로운 전통회 화 양상을 주도한 화가들 중에서 古典 論과 전통적 古法을 가장 충직하게 존중하면서 자 신의 경지를 이룩한 유일한 존재였다. 곧, 그는 정통 남종화법의 자재로운 수렴으로 毅齊 風의 格 및 정신적 筆意를 실현시켰던 것이다.
2. 毅齊 許百鍊의 家系가 19세기 조선시대의 한 대표적 남종화가인 전라남도 珍島 출신 小 癡 許維의 家門이었음은 익히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는 小癡 從高孫으로 1891년에 珍 島에서 태어났었고, 아버지는 농군이었다. 그러나 집안형편은 비교적 넉넉하였으므로 어 려서부터 어려움 없이 마을의 글방에서 한문공부를 할 수 있었고, 당시 珍島에서 유배생 활(1896∼1908)을 하였던 당대의 대학자 茂亭 鄭萬朝에게서 한문수업을 받는 최대 행운 의 기회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小癡의 아들로 珍島와 호남지역 일원에서 역시 직업적인 화가로 활약하던 米山 許瀅에게서 타고난 그림 재질과 흥미로 墨 의 기초 를 지도받기도 하던 소년 行敏(百鍊의 본명)에게 \"毅齊\"란 호를 지어준 선생이 茂亭이 었다고 한다. 그렇듯 한문 공부와 그림 공부를 하던 行敏은 珍島에 생긴 공립보통학교에도 들어가 신학 문을 배우게 되다가 21세 때인 1911년에 茂亭선생의 도움으로 서울에 올라가 중등학교 진 학을 뜻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한동안 米山에게 본격적인 그림 師 事를 하던 그가 그림 아닌 법정학을 목표로 일본에 건너간 것은 1912년의 일이었다. 그러 나 일본에서의 그 법정학 전공의 대학 진학도 생래의 말더듬이 장애로 인해 좌절된 가운 데,
그는 그림으로 立身할 것을 최종적으로 작심하고 東京에 수년간 머무르는동안 박물관 의 古 , 특히 중국의 옛 各 들에 감동하면서 스스로 화가 수업의 시기를 가졌다. 한때는 당 시 일본의 저명한 남종화가였던 고무로 스이웅(小室翠雲)의 문하생이 되어 지도를 받기 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버지 小癡의 화법과 정신을 본받아 그 테두리에서 그런대로 지역적 名을 날리던 米山에 게서의 기초적인 기법 습득에 이은 東京의 유명한 남종화가 고무로의 영향, 그리고 박물 관에서 본 중국 본색의 남종화 名品들을 통해 깊이 自學할 수 있었던 배경 등이 毅齊의 정 통 남종화 세계 지향의 확고한 바탕으로 작용했다.
그는 중국의 論書와 기타 전문서적의 탐독 및 漢詩 교양을 통해서도 자신의 전통적 意 및 筆格을 정립시키는 엄격한 태도를 나 타냈다. 毅齊의 정신적 지향은 小癡가 그러했듯이 중국의 元末 四大家로 지칭되는 남종화 양식의 실질적 개창자들 중에서 특히 黃公望과 吳仲圭의 필법 및 정신을 추앙한 태도로 구현되 어 갔다. 보통 北宗 양식의 객관적·현실적 形似主義와 대립하는 산수화 중심의 정신적 寫意主義 남 종화의 기법적 특색은 수묵 또는 수묵담채의 부드러운 필치와 필법을 기본으로 하여 山形 ·樹木法 등에서 유연한 披麻 法 등을 주로 쓰며 화가의 심의적 趣를 표상하는 데 있다. 다 시 말해서, 남종화 계열의 화가는 체험적인 자연미와 자연애의 감흥을 寫意의 수법으로 형상화시키면서 무엇보다도 내면적 格의 실현을 존중하는 것이다. 毅齊의 화필생애를 일 관한 수묵담채의 산수화 작업에도 그러한 태도와 정신 및 기법적 특색이 잘 실현되어 있 다. 그것은 앞에서 인용한 毅齊의 말 중의 "古人을 본받아 열심히 공부한 위의 成家 "의 경 지로서, 엄정한 그의 창작적 세계였다.
3. 신진화가로서의 毅齊 許百鍊의 비범한 남종화 역량이 서을 화단에서 처음 각광을 받게 된 것은 32세 때인 1922년의 일이었다. 1918년에 일본에서 귀국하여 고향 珍島와 木浦, 光 州를 중심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던 그는 1922년의 제 1회 조선미술전람회(鮮展) 동양 화부에 전형적인 남종화풍의 수묵화(夏景山水)와 (秋景山水)를 응모 출품하여 뒤의 작품 이 1등 없는 2등상을 차지하게 되자 그의 존재는 신문의 특보 등을 통하여 당장 각광과 주 목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때 그 동양화부의 입선 및 입상자 중에는 1910년대에 서울에 등장하였던 민족사회 최초 의 근대적 미술학교 성격인 書 美術會 강습소에서 心田 安中植, 小琳 趙錫晋에게 전통화 법을 수업하고 졸업한 신진들이던 李用雨, 金段鎬, 李象範, 盧壽鉉, 그밖에 卞寬植, 李漢 福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1920년대 이후의 전통적 한국화 전개를 새로운 시대적 양상으로 주도하게 되는 특출한 신 예들이었다.
여기서 일단 언급해 둘만한 것은 편의상 서울派로 말할 수 있는 서화미술회 출신 중심의 신예들이 현실 시각의 소재 및 주제 선택으로 사생풍의 풍경화와 인물화·화조화 등을 각 기 다른 표현감각과 기법적 특색으로 추구하면서 분명한 시대성을 나타낸 반면, 小癡-米 山의 統을 뒤잇고 일본의 남종화가에게서도 한때 사사한 毅齊의 철저하고 엄격한 古法 존 중의 作風은 시대성과는 무관한 관념적 산수화 지향으로 시종돼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 나 毅齊의 그 화면작업은 筆意와 趣 면에서 대단한 깊이와 格致를 실현시키고 있었던 때 문에 새 세대 전통화가들 중에서 그는 처음부터 고격한 남종화풍을 대표하는 존재로 격찬 을 받을 수 있었다. 毅齊의 조선미술전 참가는 1927년의 6회전까지로 그쳐졌고, 그 뒤로는 光州에 정착하여 호남 일원의 전통주의 서화계와 그 주변의 애호가들의 구심점이 되어 명성 높은 화필 생 활을 지속하였다. 1927년까지 조선미술전에 출품하였던 작품은 (秋山暮靄), (春山明麗), (谿山淸趣), (湖山淸夏), (靑山白水), (谿山春曉) 등으로, 모두 詩意의 산수경을 전개시킨 심경적 자연주의의 화면들이었다. 그후의 毅齊 산수화들 역시 거의가 앞의 題들의 반복 적 동질형태로 이루어졌다. 다만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毅齊風으로서의 筆格과 意의 특성이 한층 내면적으로 심화되는 발전을 엿보게 하였다. 毅齊의 산수화에 처음부터 관념적으로 또는 형식적으로 도입되는 가옥과 인물점경 등이 대개 중국화에서 원용된 형태를 취하고 있는 점이 시대성 부재로 비판되기도 했지만, 고 격한 筆意에 뒷받침된 格의 깊이가 그에 대한 뚜렷한 평가를 정당하게 하였다. 渴筆과 濕 筆을 자재롭게 구사하고 조화시켜 이루는 그의 정취 짙은 산수화 수법이 毅齊 예술의 고 매한 기법적 특질이었다. 1939년에 光州에서 그 지역 서화 애호가들의 권유와 후원으로 "鍊眞會"를 만들고, 서 화 교 양의 보급 및 후진 지도에도 힘쓰게 되었던 毅齊는 전통적 호남화파 형성에 지대한 영향 을 미쳤고, 오늘날까지도 그 영향력은 많이 작용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鍊眞會"가 毅 齊의 회화정신을 뒤잇는 신진 양성 연구소로서 존속되고 있는 것이다.
4. 毅齊는 1977년에 타계할 때까지 光州 무등산 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한 그의 고고한 화 필 생활은 그의 心意의 산수화 속의 山家 및 脫俗境의 道人 모습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현실적인 사회사상도 실천적으로 내보였다. 1945년에 민족 해방과 조국 광복 을 맞이한 뒤 그는 그림의 수입으로 가난한 농촌 청소년들을 위해 "땅을 사랑하고, 하늘 을 우러러 믿고, 제 집을 가꾸는 데 부지런하라"는 "三愛思想"을 앞세운 농업 고등 기술학교를 무등산 기슭에 세워 운영하였던 것이다. 그러면서 서울 화단의 움직임과도 자연스런 유대를 잘 유지하였다. 1948년 정부 수립후, 그는 國展에 추천작가, 초대작가, 심사위원으로 참여하였고, 1960년에는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추대되었다. 앞에서 말한 1961년의 해방 후 첫 서울 개인전과 1966년의 두번째 서울 개인전은 그의 농촌 사랑의 농업기술학교 운영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것이었다. 1969 년에도 서울에서 개인전을 가졌는데, 이때에는 팔순 고령을 내다보면서 또 하나의 정신 적 집착으로 적극 후원하려고 들었던 光州 시민운동의 무등산 산정 天帝天官 유적지 聖域 化 및 檀君聖殿 건립의 기금조성을 위한 것이었다. (앞의 聖殿 건립 추진은 여러 사정으 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팔순에 접어들면서 毅齊의 화필생활은 기력의 쇠약과 잦은 노환으로 제약을 받았다. 1971년 연말에 서울신문사가 "동양화 여섯분 전람회"(세칭 6大家展)을 조직하였을 때, 초대출품하여 보여준 (春江 遠), (夏山深遠), (秩山高遠) 등의 산수화가 그의 마지막 시기의 매우 어려웠던 정상적 작품발표였다. 그때 서울신문 기자로서 무등산 春雪軒 화실로 毅齊 를 방문하였을 때, 그는 나에게 다음과 같이 옛 漢詩를 빌은 老 翁의 심경을 말하는 것 이 었다. 옛 사람 글에, "晩知誇 로 眞有得인데, 却悔歲月 來無餘라" -늦게 詩 를 알아서 참으 로 얻은 것이 있는데, 문득 오는 세월이 많지 않은 것을 뉘우치더라-이런 심경인데, 나는 또 "참으로 기력이 미치지 못하는 것을 뉘우치게 되었다"를 보태서 말을 해야 되겠어. 毅齊 許百鍊의 빛나는 예술생애는 앞에서 거듭 말한대로 정통의 남종화법과 그 정신을 엄 격히 전수하여 소화한 바탕 위에서 그의 세계를 독자풍으로 고격하게 실현시킨 탁월한 경 지로 결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특질로서의 그의 산수화 작업의 본질 외에 현대적인 의미의 독특한 개성 발휘나 새로운 시대적 표현정신 등이 결여된 면을 들어 형식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무의미하다. 毅齊는 그가 지향하였던 예술태도를 자신 의 방법 및 형식으로 진실되게 구현하는 가운데 그의 예술혼과 필력을 최대한으로 승화시 킨 大家였다.
끝으로 毅齊 자신 그의 관념적인 산수화 수법에 대한 비판의 시각에 대응하려고 했음이 분명한 현실적 題의 작품도 더러 남긴 사실을 언급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널리 알려져 있 는 그 作例로는 국립현대미술관 소장의 (多島海風靜)(1959년 國展 출품작, 原題는 (海不 洋波) 등이 있고, 그밖에 비특정 實景 소재로는 한국의 현실적 농촌 풍정의 (農耕) 주제 가 거듭 그려졌다. 1939년 작품에 붉은 단풍색이 짙게 곁들여진 사실적인 풍경화를 시도 한 (廣寒樓 秋色) 같은 예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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