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모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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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판의 경모당이란 이름은 각각 취한 바가 있음이라 정부자(程夫子_같은 존현(尊賢)도 天下의 도덕한 선비분들이 찾아가서 맞이했고 또 朱선생같은 仁智한 분도 山水間에서 기거하시며 樂道를 즐겼으니 즉 취한바 뜻은 하나이니라,
우리나라 남쪽에 포산 곽 존재선생이 계시어서 선생은 현익(玄黓;정유재란)을 당하여 선생은 죽음으로서 忠을 남기시고 자식들은 죽음으로서 孝가 되시고 딸과 며느리는 죽음으로서 烈이 되시니, 한 가정에서 삼강이 빛났으니 그 어찌 壯하지 아니함이 겠는가?
고사에 변씨 가문의 시옹(尸雍)의 부인이 목 맴도 이에 대하여서는 부족함이 많고 은전의 포상이 내린것이 국사에 실렸으니 다시 어찌 감히 이에 대하여는 불일 수가 있겠는가,
과거 甲戌 1874년에 선생의 사당을 달성으로 부터 동쪽인 영천 우천동으로 옮겨 세워졌다, 그래서 고을 유림들이 선생을 모시기 위하여 丁酉 1897년에 계를 만들어 명칭을 우모계(寓慕契)라 했다, 그래서 마루대 나무들을 여러번 모아싸서 功을 들여 제숙지소(齊宿之所)를 이미 만들어 끝마쳤다, 선생의 주손인 철보(驖甫)가 나를 방문하여 堂의 名과 堂의 기문를 청하여 문의 하였다,
시에 말씀하시기를, 높은 곳은 우러러보며 선비들이 찾게되니 경자(景字)는 賢의 뜻이 있고 禮에서 말씀하시기를, 조상을 추모하여 본손들이 먼저 찾아드니, 모자(慕字)가 먼저의 뜻이 있는 것이니라, 그래서 경모의 두 글자를 선택해 써서 현판에 달아올린 후에 이 堂에 올라와서 이 글을 보는 사람들은 감탄하는 바가 있어 공경하는 마음이 날것인져,
癸丑年 5월 하순에 利川 徐纘奎 謹記
*서찬규 = 1852~1921년 자는 백윤,호는 혼초, 본관이 이천이고 덕동 사람이다,존재선생은 온가족이 죽음으로 뒤가 없었다, 그래서 그 당시에 존재선생의 제종질을 후사로 정하여제사를 모시게 하였다,
1.존재선생 곽준 = ~1597년 포산곽씨(현풍곽씨)로 고조부는 청백리로 이름이 알려진 곽안방이고 증조는 곽승화.요 조분은 곽미. 아버진 곽지완이며, 망우당 곽재우의 종숙이다,
존재선생의 이름은 곽준.으로 임진왜란 때에 김면의 의군을 도와준 공으로 안음현감이 되어 병자호란 1597년에 청나라 군사가 처들어와서 안음의 황석산성을 지키다가 8월18일 날 전사했다,
그래서 공의 장열한 정신을 존경하고 공경하여 영천유림들이 충열당을 세워 배향하다가 경모당을 다시 지어 향사 하였다, 현풍곽씨 문중에서 영천유림들에게 그 감사와 정성에 감탄하고 그 위폐를 달성군 유가면에 있는 예연서원, 망우당을 모신서원에 봉안하여 묘셔갔다,
공의 위폐는 경남 안의면 충렬사와 황안서원에서 향화하며, 영천 청통면 충렬공 사당 충렬사에서 향사 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