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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4장 1-6절. 사랑을 따라 은사를 사용하라(방언과 예언에 대한 교훈), 요약설교
1. 지난번 공부한 곳은 소위 ‘사랑장’이라고 하는 고린도전서 13장을 공부했습니다.
원래 고린도전서 13장은 ‘은사에 관한 고린도 교회의 질문에 답하는 내용’인 고린도전서 12-14장 중의 중간부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고린도전서 13장에서는 은사를 사용하되 ‘사랑의 방법으로’(in the way of love) 사용하라고 가르쳤습니다.
2. 이번 시간에 14장 1-6절에서는 일반 대중인 교인에게 유익한 은사 활용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즉, 일반 대중에게 유익한 것은 방언보다 예언(預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방언도 통역하게 되면, 일반대중에게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대중집회인 공예배시에는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보다는 예언을 하도록 하고, 굳이 방언을 하려거든 통역까지 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방언도 개인이 사적으로 하는 것은 유익하기 때문에 금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3. 어쨌든, 본 장의 요지는 사랑의 원리(the principle of love)에 따라 개인적 이기심보다는 공중의 유익성을 앞세우도록 하라는 권면입니다.
이러한 공중의 유익성을 위해서는 대중 기도 시간에는 방언을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는 계시의 말씀이나 예언(預言)의 말씀이나 지식의 말씀이나 성경을 가르치는 것을 하라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은사의 사용도 사랑을 따라서 활용하는 길을 추구하라는 것이 주재입니다.
4. 그래서, 이 시간의 설교 제목은 <사랑을 따라 은사를 활용하라>는 것입니다.
1-5절. 모든 교회 활동-말씀 선포, 기도, 찬미, 축복-은 자신의 이익 위주보다는 교회의 건덕(edification)을 위해서 하라는 것입니다.
앞의 고린도전서 12장 7절에서도, 은사는 공동의 유익을 위해서 주신 것이라 (gifts are given for the common good: NIV)고 했습니다.
이것은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의 원칙’과도 일치한 것입니다.
따라서, 방언이나 예언 문제와 관련하여, 교회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일상 통용어(vernacular language)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 예배 석상에서의 기도는 그냥 방언이어서는 안 되고, 모든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통역된 방언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절.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1. 사랑을 추구하며
(1) 사랑이란 성령의 은사를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수단입니다.
은사를 사용하는 데 있어서, ‘사랑을 따라’ 구하라고 했습니다.
앞의 13장에서, 사랑이 얼마나 귀중한가를 여러 말씀으로 설명했습니다.
사랑은 어떤 웅변보다도, 방언보다도, 구제보다도, 순교보다도, 더 귀한 것입니다.
사랑은 영원토록 끊어지지 않는 것이며,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2) 사랑을 추구하라는 말씀은 무슨 은사를 받아서 사용하든지, 지식을 얻든지, 물질을 얻든지, 교회의 직분을 받든지, 사랑하기 위해서 받고 활용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사랑하기 위해서 은사가 필요하고, 사랑하기 위해서 지식이 필요하고, 사랑하기 위해서 물질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방언, 사랑이 없는 구제, 사랑이 없는 예언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했습니다.
(3) 모든 은사를 갖추고 봉사를 잘해도,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지 못하면, 그 은사나 봉사는 헛된 봉사가 되고 맙니다.
어떤 사람은 일은 많이 하는데, 분위기를 다 깨는 사람이 있습니다.
유명한 목사님의 말씀대로, ‘행동의 범죄보다도 성격의 범죄가 더 크다’는 것입니다.
은사를 많이 받아서 봉사를 많이 한다고 하면서, 성질부리고 신경질 내는 성격 장애자는 일로써 사랑을 파괴하는 사람입니다.
기도 많이 하고, 성경 많이 알고, 오만가지 은사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사랑을 따라서 생활하지 않고, 자기 명예와 인간적인 유익을 위해서 행한다면, 백해무익한 것입니다.
(4) 사랑을 추구한다는 것은 교회의 덕을 위해서 기도하고, 찬송하고, 봉사한다는 뜻입니다.
기도도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자기의 덕을 위해서 유익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기도할 때는 교회의 덕을 위하고, 자기의 덕을 위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집에 가서나, 산기도 가서, 혼자서 방언하는 것은 얼마든지 유익하지만, 공중 기도 시간에는 방언으로 시끄럽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5) 성령님께서 주시는 방언은 절제할 수 있는 방언입니다.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마음으로 기도하고, 자유자재로 절제하면서 기도할 수 있는 것이 성령님의 은혜 안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방언한다고 하면서, 절제가 안 되어서, 조용히 하지 못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인격적인 성령님이 주시는 방언이 아닐 수 있습니다.
성경에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화평의 하나님이십니다.
2.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1) 성경에서 예언(預言)이란 앞에 될 일을 미리서 알아맞히는 예언(豫言)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예언(預言)이란 은행에다 돈을 맡긴다는 뜻의 ‘맡길 예’(預)자로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선지자나 사도들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베드로후서 1장 21절에는, 모든 예언의 말씀은 사람의 뜻으로 된 것이 아니고,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 곧 ‘예언’(預言)인 것입니다.
물론 이 예언(預言)에는 미래에 될 일을 미리 알려주는 예언(豫言)도 있습니다.
선지자들이나 사도들을 통해서 주신 예언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백성들에게 전달하여, 회개시키든지 위로의 말씀을 전하든지, 구원의 약속의 말씀을 주시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무당이나 점쟁이는 마귀 귀신의 영을 받아서 점하고, 예언을 합니다.
이러한 무당이나 점쟁이의 말을 따라가면 사울처럼 죽음의 길로 가게 됩니다. (삼상 28:7 이하)
그러므로, 돈을 헌금하라고 하면서, 그렇지 않으면 벌을 받을 것이라고 협박 공갈하는 거짓 예언자들에게 속지 마십시오.
우리의 좋으신 하나님은 아들도 아끼지 아니 하시고 내어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시는 좋으신 분이시고, 사람들에게 무엇을 빼앗으려고 협박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2)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도록 하라’는 것은 교회의 덕을 세울 수 있도록 은사를 사모하고 활용하라는 것입니다.
3절에도 나오고, 6절에도 반복해서 강조되고 있습니다.
3절.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
6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을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예언은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다른 성도들에게 나누어 주고, 가르쳐주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유익한 것입니다.
물론 예언(預言)에는 주님의 재림과 영생 천국과 같은 미래에 되어질 일을 예언(豫言)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아무쪼록,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 많이 해서 성령 충만하고, 성령님이 주시는 놀라운 은혜 속에서 살아가시고, 하나님의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통해서 주신 예언의 말씀인 성경을 사모하고,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서 복된 믿음 생활 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 바랍니다!
2-6절은 방언과 예언을 비교하면서, 방언은 혼자 있을 때 혼자 은혜받기 위해서 방언을 하고, 교회에서는 교회의 덕을 세우고, 모든 성도가 함께 은혜받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전해주는 예언(預言)을 하도록 하라고 말씀합니다.
2절.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3절.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1. 2절과 3절은 첫 번째 방언과 예언을 비교하면서, 방언보다는 예언을 하라고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1) 이처럼 방언과 예언을 비교하면서, 방언보다 예언을 하라고 권면하는 말씀은 두 번째로 4절에서 말씀하고, 세 번째로 5절에서, 그리고 네 번째로 6절에서 반복적으로 강조하여 말씀합니다.
(2) 여기서 ‘방언’이란 자신과 다른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다른 언어(another language)을 가리킵니다. (14:2, 4, 13, 14, 19, 26, 27).
중국 성경에는 한국과 같이 ‘방언’(方言)이라고 했으나, 일본어 성경에는 ‘이언’(異言)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이것은 외국어(foreign language)를 가리키지 않고, 영으로 기도하고, 찬송하는 신비적인 발성입니다.
방언은 영으로 하나님과 교통하고 기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유익합니다.
마음이 세상적인 근심 걱정으로 나약해졌을 때,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와 세상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님과 변화산에 올라간 느낌으로 황홀한 신비경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방언이 개인적으로는 유익한 은사입니다.
특히, 어떤 사람을 만나거나 어떤 장소에 가면, 영적으로 꽉 막히고, 답답하고, 밤에는 잠도 안 오고, 꿈에는 뱀이 나타나는 그런 때는, 방언 기도가 얼마나 유익한지 모릅니다.
어떤 때는 귀신이 역사하여, 건드릴 때는 그냥 기도하는 것보다 방언으로 기도하고, 말씀으로 물리치면, 귀신이 쉽게 떠나가고 아주 좋습니다.
또 어떤 때는 소위 ‘성령 찬송’이나 ‘방언 찬송’을 하면, 마음에 평안과 신비한 영적인 은혜를 얻게 되고, 신비한 황홀지경에 이르게도 됩니다.
이렇게 방언을 개인적인 신앙 생활에 큰 도움을 주고, 영적인 활력소가 됩니다.
(2) 그러나, 주의할 것은 이런 신비적인 현상들이 있더라도, 그것은 개인의 신앙생활에 영적인 유익과 덕을 끼치는 것일 뿐이고, 교회에서 공동으로 예배하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모임을 가질 때는 교회의 덕을 세우고, 다른 성도들에게 유익을 끼치는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교회의 덕을 세우고, 다른 성도에게 유익을 끼치는 영적 생활은 예언의 말씀을 하는 것이고, 깨닫는 마음으로 성경 말씀을 설교로 깨우쳐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격과, 생활 중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말씀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위 말하는 신비주의적인 신앙은 개인적으로 유익하지만, 교회적으로는 유익이 없으므로, 신비주의의 한계를 극복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오늘 본문에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예언(預言)은 설교처럼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서 사람에게 전해주기 때문에, 덕을 세우고, 권면하고, 안위해줍니다.
원칙적으로 예언은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통해서 주신 성경 말씀으로 완성이 되었습니다.
물론 예수님과 성령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목회자나 성도들에게 예언을 주실 수 있습니다.
실제로 어떤 목회자는 설교 시간에도 예언의 말씀이 임했다고 하면서, 예언을 소개하기도 합니다.
물론 그러한 예언은 성도들을 격려하고, 위로하고, 교훈이 되는 말씀이고, 사람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참된 예언과 성령의 은사는 다른 사람에게 덕을 끼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해주고, 마음에 안위와 평안과 교훈과 회개를 줍니다.
그러나 예언이나 계시의 은사를 받았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을 불안하게 하고, 협박하여 돈을 빼앗아 먹는 사람은 마귀의 사주를 받은 사람입니다.
성령님이 주시는 예언과 성경 말씀과 목회자의 설교 말씀은 성도들에게 위로와 격려와 교훈과 회개를 가져다줍니다.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고, 하나님의 뜻대로 교회를 잘 받들게 하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거나 싸우지 않고, 용서하고 사랑합니다.
그러나 은사 받았다고 하면서, 인격과 말이 사납고, 협박하고, 불안하고 어딘가 이상하고, 용서와 사랑과 화평이 없는 사람은 성령의 은사가 아니고, 미혹의 영을 받은 줄 아십시오.
4절.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1. 방언은 영으로 말하기 때문에 말하는 당사자도 마음으로(지성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방언은 정서적(emotionally)으로 유익을 끼쳐서, 깊은 확신과 헌신과 사랑을 불러일으킵니다. (NIV-SB)
방언 기도는 오랜 시간이라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냥 기도하면, 5분도 기도할 것이 없는 사람도 방언으로 기도하면, 하나님과 교통하면서 오랜 시간이라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 남는 것은 없더라도, 변화산상의 황홀지경에 다녀온 것처럼, 마음이 신선해집니다.
2. 그러나, 예언(預言)이 방언보다 더 좋은 이유는 그것이 타인에게 적극적으로 감화를 끼치기 때문입니다.
예언(預言)은 낙심한 성도에게 위로와 격려를 주고, 구원의 확신이 없는 성도에게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고, 세상 욕심에 사로잡혀 사는 형제에게 천국의 소망과 기쁨을 심어주는 말씀을 전해주는 것입니다.
이처럼 설교는 예언의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이처럼 성경 말씀의 뜻을 풀어서 전달해주는 설교(일종의 예언의 말씀)는 교회의 덕을 세우고, 성도들에게 유익을 주는 것입니다.
5절.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1. 바울은 교인 모두가 방언 말하기를 원했습니다.
방언은 개인적으로 큰 유익을 얻게 하고, 공중석상에서도 통역하기만 하면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본 절은 12장 30절(너희가 모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과 모순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본 절은 강요가 아니고, 바울의 소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12장 30절처럼 모두가 다 방언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2. 바울이 특별히 "예언"을 권장하는 이유는 그것이 타인에게 신앙적 유익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방언도 통역하면 타인에게 유익을 끼칩니다(13절)
통역되지 않는 방언은 자신에겐 유익할지 몰라도, 타인에게는 무익합니다.
그런데, 어떤 집회에서는 공중집회에서 방언을 나와서 하라고 하고서는 통역을 해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의할 것은 정말 성경적이지 못하는 내용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제가 잘 아는 어느 권사님과 여집사님들이 어느 유명 강사의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그 강사가 방언할 줄 아는 사람은 나와서 방언해보라고 했습니다. 그 강사가 통역해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평소에 방언하기를 좋아하고, 신비적인 것을 좋아하는 몇 분들이 강단에 나가서 소신껏 방언을 했습니다.
그런데, 한참 있다가 강사가 그만하라고 하더니, “이 방언을 통역할까요 말까요” 하고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그래도, 그 여집사님과 청중이 말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나는 아무개 남자를 좋아합니다. 너무도 좋아서 어쩔 때는 잠을 못 이룹니다. 정말 한번 안겨보고 싶습니다.” - 이런 통역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여집사님이 시험에 들어서 돌아왔고, 청중들은 모두 낯이 뜨거워서 혼났다고 합니다.
저는 그 여집사님들과 권사님들을 잘 알기 때문에, 본인들에게서 직접 그 말을 듣고서, 참 너무나 한심했습니다.
교회에서 중직자들이고, 남편들은 사회적으로 높고 부자들인데도, 부인들이 어쩌면 이렇게 한심한지...
그렇게 가르쳤건만, 또 몰래 몰려가서, 개인적으로 창피를 당하고, 교회적으로도 창피를 당하고 왔던 것입니다.
제발 우리 교회에는 이런 수준 낮은 성도들이 없으시기 바랍니다!
6절.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1. 6절의 주제는 ‘인지성(認知性)의 필요’( the need for intelligibility)입니다.
6절에 나오는 4가지 요소- 계시, 지식, 예언, 가르침-는 모두 ‘인지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통역되지 않는 방언’은 인지성이 없습니다. 즉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2. 4가지 인지성 있는 것들은 ① 계시, ② 지식, ③ 예언, ④ 가르치는 것입니다.
(1) ‘계시’란 하나님의 뜻을 열어 보여주는 성경 말씀을 가리킵니다.
계시란 커튼에 가려서 안 보이는 것을 커튼을 열어서 보여주는 것을 뜻합니다.
(2) ‘지식’이란 이미 구약 성경을 통해서 기록해놓은 것을 신약의 사도들이 깨우쳐서 가르쳐주는 것을 말합니다.
(3) ‘예언’이란 앞으로 예수님의 구원 도리라든지, 성령님의 감동과 인도라든지, 하나님의 보호와 돌보심이라든지, 교회의 거룩성이라든지,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이라든지, 성도의 부활이 있다든지, 최후의 심판이 있는 것과, 불신자 지옥, 예수 믿는 성도는 영생 천국에 대한 내세의 약속을 전달해주는 것입니다.
(4) ‘가르치는 것’이란 기록된 성경 말씀의 뜻을 풀어 가르쳐주는 소위 강해 설교 같은 것을 말씀합니다.
<오늘의 결론입니다>
방언은 개인적으로 유익하지만 교회에는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계시, 지식, 예언, 가르치는 것이 있어야, 영혼의 양식을 얻어서, 유익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개인적으로 방언을 즐기시더라도, 거기에만 머물러 있지 말고, 이제는 그 단계를 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은혜받고, 믿음이 날마다 성장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데서 생기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