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부(4) † 여섯 번째 교회, 빌라델비아/ 내가 너를 사랑한 줄을 알게 할 것이다(3,7-13)
계3:9절은 “보아라. 사탄의 회당에 속한 사람들,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지만, 사실은 유대인이 아니라 거짓말하는 사람들이다. 내가 그들을 오게 하여, 너의 발 앞에 꿇어 엎드리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한 줄을 알게 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내가 너를 사랑한 줄을 알게 할 것이다.” 이렇게 공의와 위엄이 있는 서신 안에서 갑자기 “사랑”이란 말이 나온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심판하시는 가운데서 오히려 그분의 사랑을 말하고 있다! 심판관은 사랑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심판관이 어떻게 자신의 사랑을 말할 수가 있는가? 그러나 주님의 이 한마디는 참으로 놀랍다. 원문의 ‘나’와 ‘너’는 둘 다 특별히 중시되는 것이다. 나는 하나의 특별한 나이고, 너는 하나의 특별한 너이다.
여기는 광야 한가운데서 발견하는 초원의 한 부분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서는 지금까지 없었던 또 다른 한 무리의 제사장과 군왕들을 일으켰음을 보아야 한다. ‘너’ 또한 특별한 너인데, 진실된 빌라델비아 사람의 너로서 나의 말을 지키고 나의 이름을 높인 너이다. 곧 너는 바로 나의 사랑하는 자이다. 이것을 결코 일반적인 사랑이 아니다.
심판 때에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곧 사랑하시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참된 빌라델비아 사람의 성품이다.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의 마음은 얼마나 기쁜지! 알렐루야! 그러나 이 한 구절의 성경 말씀은 문자상의 해석 이외에도 오늘날 세대에 부합하는 교훈을 담고 있다.
이 유대인들은 바로 교회 중의 유대교적인 믿는 이들이다. 사탄의 회당은 유대로 돌아가려는 원칙으로 사람들을 율법 아래 두어 많은 성직과 예배 의식을 회복하여 땅에 속한 종교를 세우려고 한다. 그들의 종교는 예배 의식과 교리 위에 건축되어 있으며, 결코 그리스도 위에 건축되어 있지 않다.
그들은 사람의 유전의 지배를 받으며, 하나님의 말씀보다, 교황청이나 교단이 만든 교리와 조직에 더 순복한다. 그들은 가장 거짓된 교리와 분열된 종파 위에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를 계승하려고 한다. 그들은 결코 유대인이 아닌데 자기를 유대인이라고 하려 한다. 그들이 가진 직분, 의복, 의식, 예법, 교리, 교회는 다 유대교의 오래된 규칙을 따른 것이다.
그들에게는 육체의 자랑이 있으며, 한 면에서 유전에서 온 권위가 있고, 또 한 면으로는 형식으로 말미암아 그 권위를 행사한다. 그들은 그들의 의식과 성직과 율법(교리와 교회법)과 신조 등으로, 단순하며 공개적인 사역, 평등한 만인 제사장 직분, 값없는 은총과 완전한 구원과 하나님의 말씀을 대치해 버렸다.
이와 같은 일종의 유대인들을 우리는 로마 천주교회라 해도 되고, 개신교라고 해도 된다. 왜냐하면 이름의 차이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중요한 것은 실상과 정신이기 때문이다. 유대교적인 것이 가장 심한 곳은 로마 천주교회이지만, 유대교적인 정신은 오히려 개신교회에서도 도처에서 성행하고 있다.
그들은 그들만이 지금 자칭 하나님의 약속의 백성이라고 하고, 그 나머지 사람들은 약속의 백성들이 아니라고 한다. 개신교 종파의 강령과 헌장 중에 이러한 정신을 나타내지 않는 곳은 하나도 없다. 그들의 종파나 단체 이외에는 더 이상 교회가 없고, 그들을 떠나는 것은 바로 교회를 떠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것들은 모두가 다 거짓이다.
이러한 상황 중에서 가장 해를 입는 이들은 빌라델비아의 믿는 이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 이외에 또 다른 이름이 없으며, 하나님의 말씀 이외에 또 다른 신조나 헌장이 없다. 초대교회 당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유대교의 큰 조직 앞에서 멸시와 비웃음을 당한 것처럼, 현재 빌라델비아의 믿는 이들도 유대교적인 가톨릭과 개신교의 각 교단으로부터 업신여김과 배척을 당할 것이다.
이 한 구절의 말씀은 빌라델비아와 서머나를 연결시킨다. 일곱 교회 중에서 오직 이 두 영적인 교회에만 이러한 시험과 시련이 있다. 사탄이 여기서 사용하는 방법은 이미 황량한 교회를 한 걸음 더 깊이 타락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전에 설립하셨다가 지금은 버리신 유대교는 사탄의 가장 좋은 병기가 되었다.
빌라델비아를 지향하는 믿는 이들은 새로운 마음을 품고 그리스도를 추구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초대교회 사도들의 순전한 말씀을 새로이 전파하며, 새로운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것을 본다.
하나님의 은총 밖에서의 사람의 행위는 곧 유대교적인 교리의 실행이다. 믿는 이들이 만일 깨어 있지 않다면, 언제든지 발람의 교훈(계2:14), 니골라당의 교훈(2:15), 이세벨의 교훈(2:20), 사탄의 비밀(2:24), 종파의 분열로 떨어질 수 있다.
여기서 기존 교회 안에서 그러나 빌라델비아를 지향하는 나와 같은 한 개인이(가정교회의 사역),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의 사역을 순교의 자세로 충성스럽게 수행하려는 사람과, 이미 성립된 견고한 기존 교회 조직과 사역을 충성스럽게 따르는 사람들의 차이를 본다. 그러한 기존 조직 안에도 그들의 불합리하고 모순된 많은 부분들을 회복하려는 많은 계획들이 있다.
그러나 기존 교회 조직 안에 있는 사람들은 조직의 배타성과 기존 질서를 옹호하려는 보이지 않는 어떤 강한 힘이 있음을 감지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현재 새로이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경륜과 그 뜻을 보지 못하게 된다. 나아가 주님의 회복의 편에 있는 사람들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핍박하고 억압하며 중상 모략하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이것은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새로운 시험이며 위기이다.
요16:2절은 “사람들이 여러분을 회당에서 쫓아낼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죽이는 사람마다 자기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가 올 것입니다.”(원문 참조)라고 말한다. 비록 그것이 진리라 할지라도, 믿음이 없다면, 이것은 바로 유대회당의 행위이다. 이는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위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을 짓밟고 있다. 그들이 사랑하는 것은 살아계신 인격이 아니라, 그들의 머리 안에 있는 지식으로서의 진리이다. ‘우리가 오늘날 어떻게 그리스도를 가까이 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와 ‘충성스럽게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만이 오늘날의 유일한 필요이다.
계3:10절은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련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장래의 휴거의 일을 말씀한 것이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여기서 “인내의 말씀”은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오랫동안 인내로 그분 자신이 영광 얻기를 기다리셨다는 뜻이고, 또 하나는 그리스도인이 인내하며 그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린다는 뜻이다. 일반적인 말씀이 아니라 인내의 말씀이다. 일반적인 인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과 관련된 인내이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 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시편110:1)고 하셨는데, 바로 이 때문에 그분은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24:,36)고 하셨다. 그분이 지금 취하시는 태도는 바로 아버지의 역사를 기다리시는 것이다.
그분이 만일 역사하신다면 그분은 틀림없이 철장을 얻어 즉시 모든 원수의 배역을 분쇄하실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오히려 기다리시며 그분의 백성들에 대한 계획이 완성되게 하신다. 주 예수님은 세상에 은혜를 베푸시고 사람들의 영혼을 얻어 그분께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 그리스도의 인내와 그분의 능력은 대비되는 위치에 있다. 그분은 즐거이 기다리신다.
“나의 인내의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금세에 배척받은 이야기를 말해 준다. 그분이 승천하심으로부터 그분의 나타나심까지가 다 그리스도의 인내의 때이다.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 아래 순복해야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배척받으신 곳에서 권세를 얻을 수 없다. 우리는 또한 기독교가 이 세상에서 존귀함을 얻는 것을 도울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동반자이기 때문에 오직 여기서 모욕을 당하기를 바랄 뿐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세상에서의 지위는 반드시 당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서 얻으신 지위와 똑같아야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 사이에 이미 동일하지 않은 성질이 있음을 보여준다.
만일 우리가 이것에 대해 분명하지 않다면, 오늘날 죄악이 범람하는 종말의 시대에서 마음이 조급하게 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이미 우리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끊임없는 원수의 대적을 견디신 것을 알진데, 왜 불안해하는가?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사상이 우리의 영성에 있어서 가장 고상한 사상인데, 이러한 사상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더 깊은 연합과 더 비밀한 교통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이 때는 과연 무슨 때인가? 구약의 선지자와 주 예수님 자신과 사도 바울이 다 이때에 대하여 예언한 바가 있다. 예레미야서 30장 7절에 “슬프도다. 그 날이여 비할 데 없이 크니 이는 야곱의 환난의 때가 됨이라”고 말한다.
이때에 하나님은 야곱에게 “그 옆방은 진멸한다 할지라도 너는 진멸하지 아니하리라”(11절)고 말씀하신다. 다니엘도 이때를 말하는데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단12:1)라고 말한다. 구약의 선지자가 말한 주의 날은 대부분 이때를 말하고 있다.
예수님은 이때를 말하시기 전에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마24:7-8)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그날이 이르게 되면 “이는 그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은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마24:21)고 말씀하신다.
사도 바울도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살전5:3)고 말한다. 이때 처음에는 유대땅을 중심으로 하지만(마태복음 24장), 결국 온 천하에 이르게까지 확장될 것이다(계7:14). 그러므로 여기에서 “온 세상에 임할 시험”이라고 칭하는 것이다.
여기서 “때”는 실지로 시각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큰 시련은 다만 장래의 “크고 두려운 날” 가운데 하나의 짧은 시기일 뿐이다. 이 짧은 시기는 다만 삼 년 반의 기간이며, 예수님이 영광중에 나타나실 때 이 시각은 지나갈 것이다.
할렐루야! 아멘!